주일설교

고린도전서27강-복음으로 낳은 자식(고전4;14-17) 1502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2. 10. 08:27
2015-02-08 12:47:19조회 : 84         
   복음으로 낳은 자식150208이름 : 이근호  

복음으로 낳은 자식(고린도전서 4: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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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2-08 13:25 
복음으로 낳은 자식 


2015년 2월 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4:14-17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 바울의 말하는 바가 일반인으로서 퍽이나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사실을 이미 사도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교인들을 부끄럽게 만든 그런 내용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의 내용을 바뀔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만 믿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꾸준히 복음 내용만 소개할 다름입니다. 그래서 보다 더 난해해 보이는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복음 안에서 내가 너희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출생됨이란 그 전에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되는 상황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만나기 전에 하나의 남자로서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 되는 순간, 그 전의 디모데는 복음의 입장에서는 아예 없는 존재가 됩니다. 디모데는 지금이 터키 루스드라 출신이며 어린 시절 어머니 유니게와 조모 로이스가 유대인이여서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배우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45년 ~ 46년에 첫 번째 전도 여행 도중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집에 묵게 되는 것을 인연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매우 신임하게 되어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동반까지 하고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예루살렘까지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간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가이사 감옥에서 2년을 보내게 되면서 떨어져서 에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담임 목회자로 오게 되었고 디모데 전 후서라는 사도 바울로부터 2개의 편지를 받아 더욱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그 전에 언제 어디서나 디모데는 늘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동행했고,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는 물론 심지어 로마 감옥에까지 동행했습니다.  바울의 편지 중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등은 디모데가 대필한 것입니다. 바울이 불러 주면 디모데가 받아씁니다. 그만큼 복음에 대한 신임도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23을 보면, 그는 바울만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자기도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또 바울이 자신이 가야할 자리에 디모데를 대신 보내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살전 3:6)에, 고린도교회(고전 16:10-11)에, 그리고 빌립보교회에도 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바탕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인간으로는 어불가능한 예수님이 친히 말씀으로 만든 자리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일생을 자기 힘으로 계속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세월은 인간들이 계속 갉아먹고 있는 형국입니다. 

나중에서 예수님만 만나게 됩니다. 좋은 관계로 만날 수도 있고 나쁜 관계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동안 본인이 딛고 살아온 그 자리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장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디모데의 자리라는 것도 사도 바울을 만나고 난 뒤에는 사도의 자리로 달라져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리 자체의 바뀜은, 모든 말씀이 사람이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말씀이라는 점을 당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8-29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이란 담 타넘고 오신 분의 ‘세간 강탈’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방법과 다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구도자(求道者)’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을 자기 행함으로 구성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自己)-교(敎)’ 교주이며 동시에 신실한 교인입니다. 끝까지 충성을 대해 줄 교인은 자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바로 그게 악마의 지배를 받는 형식이라고 하십니다. 누군가 담을 타 넘고 집주인을 묶어서 밖으로 일방적으로 보쌈해 나가지 않는 이상, 인간은 스스로 구도자의 행위에 온갖 관심을 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도자가 아니라 구원자입니다. 구원의 방식에 대해서 인간들이 알지 못합니다. 

구원 방식을 인간들이 알아버리면 인간들은 그것을 자기 행함으로 전환시켜 구조자로 행세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옹벽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들이 ‘부드러워’집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입각해서 인간들은, ‘아무리 용 써도 구원안 됨’의 입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넘어올 수없는 상황에 예수님이 뛰어드십니다. 마치 막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볼을 야구 외야수가 멋지게 낚아채서 자기 품으로 가져오듯이 말입니다. 이런 예가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멸망되는 세상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는데 마침 이스라엘 쪽의 스파이 둘이 그 여리고성 안에 미리 잠입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기존의 방식을 버립니다. 이는 디모데처럼 ‘자기교’를 버리고 ‘예수교’로 돌아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구원방식이 인간들이 익히 아는 방식이 아닌 이유는,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은 죽고 그것을 근거로 남을 살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8:17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 의사들은 고객을 병을 자신의 병으로 돌리고 그 대신 고객이 병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치료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골병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병을 살리고 죄를 살립니다. 그리고 그 죄와 자신의 죽음과 연계시키십니다. 이로서 마귀의 권세로부터 유일하게 이기신 분이 됩니다. 바로 ‘이 하나됨(1)’을 위하여 모든 다양성은 자체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10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조차 다 예수님의 말씀 성취성에 포함되는 일어나야 될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것으로 매일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드러내기 위한 이유로 살고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2-09 23:46 
27강-고전 4장 14-17(복음으로 낳은 자식)150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14-17절입니다. 신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4:14-17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부끄럽게 하려고 한다. 사도바울은 알고 있어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보통 인간들이 사는 사회에서 안 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압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수치스럽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우리가 너무 무식하구나.’ 이것도 약간 수치가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이 세상 말 어지간한 것은 내가 다 알아듣는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우리가 무식한가? 아니면 사도바울이 미쳤는가? 둘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이 있고 천국 가고 싶은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여망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가 보내신 자라고 나섰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하늘나라 가는 길은 이미 안다고 생각하지요? 중보자를 통해서 가니까. 중보자를 통해서 가야 하는데 그 중보자가 지금 눈에 안보이거든요? 죽어서 부활하시고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안보이기 때문에 누굴 붙잡아야 되는데 누굴 붙잡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사도바울을 붙잡는 거예요. 



사도바울만 붙잡으면 그 배후에 예수님이 보일 것이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천국 간다, 그렇게 안심을 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 중에서 몇 퍼센트를 가질 것인가,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요. 사도바울의 말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원리원칙하고 너무 다르니까 그 말씀을 다 알아야 되는데 이게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그 점을 이미 사도바울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너희들이 못 알아듣지. 내가 본의 아니게 너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구나.”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그걸 알고 있으면 좀 쉽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 이야기해놓고 또 다시 계속해서 일반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 내용을 실시합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의 원칙이 있어요. 아무나 오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6) 그 원칙을 계속 고수하고 있어요.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만 영생 받게 되어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 일일이 신경 못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에 그걸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배짱이 세다고요. 자기는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구원과업이지 내 자신의 과업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심하게 말씀드릴까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모든 성경말씀은 우리를 위해 준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준 말씀이에요. 끝났어요. 그 말씀을 나에게 당겨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옛날 우리 집에 손님이 많이 와서 제가 아는데요. 할아버지 계 한다고 유별난 음식을 많이 했어요. 손자 된 내 입장에서는 그게 빨리 먹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아직 손님이 오기 전까지는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손대서 우리 입에다 집어넣어줘야 해요. 잘근잘근 씹어서 입에 넣어줘야 하는데 우리가 먹던 식으로 음식을 먹게 되면 이게 소화가 안 되어서 우리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뱉어내라는 거예요. “빨리 뱉어내. 그 말씀 아니야. 뱉어내.” 사도바울이 이 점을 압니다.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은 말씀대로 하고 그리고 너희 인간들이 성경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밀치는 방식, 예수님이 꼴 보기 싫은 방식, 예수님과 안 논다, 하는 방식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말씀을 못 지키고 내가 말씀을 제대로 이해 못하면 이러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내 인생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하는 말이 “당연히 그런 맘을 가지는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네가 손댄 음식이 너한테 안 맞지? 그러니까 내가 진즉에 이야기했잖아. 말씀에 손대지 말라고. 왜 네가 평소에 하는 식대로 ‘이 말씀 지켜서 구원 받아야지. 이 말씀 지켜서 우리 가정 복 받아야지.’ 왜 자꾸 널름널름 손댈 수 없는 말씀에 손대서 스스로 나자빠지고 절망하고 낙담하고 ‘나 하나님 안 믿을 거야.’ 하고 울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괜히 네가 분수를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 예수님 본인의 일을 적용하면서 그것을 우리에게 할 때 우리는 안 되었는데 주님은 되더라, 그 둘 사이를 확인하라고 준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 운명을 내가 선택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운명, 우리의 앞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것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골라잡으라는 뜻이 아니고 ‘나는 왜 이런 길을 갈 수밖에 없는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계속해서 두고두고 확인하라고 우리 인생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경말씀 안에 사실은 우리가 들어 있어요. 들어 있는데 내가 아는 나는 아니에요. 내가 아는 나는 아니고 예수님이 알고 있는 내가 이 성경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 속에 있는 내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것은 시작점이 나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 하면서 이 말씀의 세계와 내가 이 말씀을 지키고자 처음 생각했던 그 세계와 격차가 나야 돼요. 격차가 나면서 누가 무너지는가? 우리 자신이 무너져야 됩니다. 광주시 봉선동의 아파트 옹벽 무너졌잖아요. 그처럼 우리 인생이 말씀에 의해서 와르르 무너져야 됩니다.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람이 나 자체가 옹벽인데 그동안 쌓아올린 그 옹벽이 무너져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려고 애쓰잖아요. 그런데 정답은 이렇습니다. 이미 우리 인생이 있고 그걸 갉아먹는 식으로 우리가 없어지는 인생을 살아요. 하루를 살았으면 하루가 없어지고 또 일 년을 살면 일 년이 없어지는 거예요. 빼빼로데이 할 때 남녀가 빼빼로를 양쪽에서 물고 갉아먹잖아요. 주님은 우리에게 빼빼로를 내밀었고 우리는 그걸 갉아먹으면서 나중에 주님하고 뽀뽀한다는 말이지요. ‘어디지 여기가?’ 어디기는 천국이지. 



내 인생을 내가 갉아먹다보면 나중에 도착한 지점이 천국입니다. 강도는 강도질 하면서 갉아먹으면서 다 오니까 오늘 밤 낙원에 가 있어요. 그 갉아먹는 지점이 뭐냐 하면, 인간은 늘 옹벽이라서 그 옹벽이 무너지게 되면 그런 사람의 특징이 부드러운 남자가 돼요. 사람이 부드러워요. 왜 부드러운가? 그냥 옹벽은 딱딱해요. 딱딱한데 한 번 무너지게 되면 “여기 옹벽이 어디 있어요?” “무너져버렸어요.” 무너졌으니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울산강의 하면서 그걸 ‘꽃을 든 남자’라고 했는데. 꽃을 들어봐야 남자가 부드러운 것은 아니지만. 



갉아먹는 식으로, 매일 조금씩조금씩 닳아지면서 내가 구축해 나가고 만들어가는 인생과 주님이 내 밀었던, 주님이 제공했던 그 인생과 교체작업이 일어나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세계에서는 자기가 자기 인생을 만들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요. 힘든데 인생사는 것도 힘들지만 더구나 힘든 것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이야기하니까 못 알아듣겠지? 그래서 이게 무슨 말인지 스스로 부끄러워지지? 내가 너희들 괴롭히기 위해서, 일부러 골탕 먹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너희들이 진짜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해놓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좀 쉽게 이야기해주면 좋은데 그거 양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말이 나와요. 이것은 앞에 나온 말부터 더 어렵게 나온 말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복음으로 낳았다? 무지무지 어려운 말이에요. 복음으로 낳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아마 설교가 여기에 집중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예상하는데요. 복음으로 낳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왜 방식을 몰라요?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 받지요. 우리가 그 방식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만만해 합니다. “뭐? 예수가 뭘 어쨌다고? 그래서? 뭐? 그래서 그 메커니즘(방법)을 알아?” 복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어떻게 알아듣는지 알아요? “내가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쓰라고 하면 쓰겠습니다.” 그래서 백점 맞겠지요. 그래서요? 그게 뭔데요? 전혀 우리 인생 달라진 게 없는데? 어떤 정보 하나 안다고 해서 사람 달라집니까? 



이것은 복음을 알아서 구원받는다고 되지 복음으로 낳았다, 출생시켰다는 말은 아니에요. 출생시켰다는 말을 하려면 이미 출생된 이후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어머니는 날 출생시켰으니 나의 어머니입니다.” 할 때는 이미 그 애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해야 해요. 태어나기 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낳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엄마와 아빠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복음으로 낳았다는 말은, “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태어나고 난 뒤에는 복음만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내 안에 복음만 출렁거리고 있고 나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 복음이 바로 빼빼로데이 같이 주께서 내미는 과자입니다. 나는 그것을 평생토록 갉아먹으면서 살아왔는데 나중에 주님하고 만나니까, 뽀뽀해보니까 주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이끌어오셨군요. 그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했군요.”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 사실이 실제 우리 몸에 오는데 있어서 장애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굉장히 많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마귀가 그걸 방해해요. “목사님, 어떻게 구원합니까?” 하고 물으면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변해요. 그러면 그 쪽에서 하는 말이 “왜 우리가 모르는 방법으로 구원합니까?” 이렇게 물어만 줘도 저는 감사하겠어요. “압니다. 다 압니다. 십자가로, 예수 십자가로 구원받잖아요.” 이런 소리 하니까 짜증나요. 그것은 정보지요, 정보. 인터넷 치면 나오는 정보고요, 구원의 방식은 그게 아니에요. 



구원의 방식은 주님 쪽에서 어떤 작업을 걸었는가, 그 방식입니다. 내 쪽에서 뭘 하나 더 알아 챙겼느냐, 지식 하나 더 알아 챙겼느냐, 기독교교리를 아느냐, 그런 것은 소용없어요. 주님 쪽에서 나를 어떻게 손댔는가,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 방식에 대해서 마태복음 12장 2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대목에서 우리 쪽에서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이 대목 내용에 “우리 쪽에서 어떻게 하게 되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제가 구원 받습니까?” 하는 내용은 없어요. 교회가 증거 해야 될 것, 설교자가 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손댔습니까, 하는 것을 증거 해야지 우리가 이렇게 하면 된다는 그것은 설교가 아니고 그걸 가지고 구도자라고 해요. 여러분, 구도자의 반대말이 구원자에요. 구도자라 하는 것은 자기가 도 닦는 것이고 구원자라 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구원자에요. 



만약에 우리가 아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구원자, 구원자, 백날 입에 달고 다녀도 어느새 그것은 구도자로 바뀝니다. 왜? 방법을 아니까. 방법을 알면 그 방법대로 행함을 뽑아내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거든요. 그런데 구도자 아니고 구원자가 돼 버리면 “네가 아는 행함의 방식은 나한테는 내 밀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이 성경은 구도자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 책이나 보세요. 구원자에요, 구원자. 구원자가 어떻게 나를 손대는가, 입니다. 방금 읽었던 본문에 보니 그것은 세간늑탈이지요. 세간 도둑질하는 거지요. 



세간을 도둑질 하는데 주일학교 애들에게 이런 이야기 하면 주일학교 애들이 엄마한테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엄마! 목사님이 도둑질 하면 구원 받는데. 집에 있는 컴퓨터나 냉장고를 도둑질 하면 구원 받는데.”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뭘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도둑질을 해서 우리를 보쌈 하는 식으로 건져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걸 전제로 하려면 바로 악령의 세계를 전제로 깔아야 돼요. 마귀의 세계, 마귀가 우리의 주인노릇 하고 있고 아무도 그 주인에게 반격해서 스스로 탈출할 기미가 전혀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마귀를 이기신 분이 담 타넘고 들어와서 그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마귀 밑에서 자기 자리 지키고 있는 그 냉장고나 금고나 TV나 이런 것들이 담 타넘고 온 도둑에게 강탈당한채로 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희한하지요. 그 과정이. 



우리는 묻지요. “도둑님! 집 주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도둑질이 가능합니까?” 도둑이 하는 말이 “집 주인이 무섭나?” “무섭습니다.” “그걸 내가 꽁꽁 묶어놓았거든. 이젠 집 주인이 입이 있어도 아무 말도 못해. 그냥 묶여서 아무소리도 못해. 이젠 도둑이 활개 치면서 마음껏 가져가는 거야.” 그걸 자유라고 하거든요. 내 자유가 아니고 나를 훔쳐가는 주님의 자유를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나만의 자유를 고수하다 보니 이 자유가 마귀한테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마귀한테 막혀버리는 겁니다. 



돈, 건강, 어떤 행복, 어떤 자유도 마귀가 주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 대책이 없어요. 이 말씀, 모든 성경은 우리가 쓴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작업의 말씀이거든요. 따라서 이 작업 속에서 우리 역할은 뭐냐 하면, 마귀한테 꼼짝 못하고 그냥 제자리에서 동동거리면서 앉아있는 그 역할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사도바울이 진짜 난해한 말을 해요. 복음으로 너를 낳았다, 여기서 낳았다는 말은 우리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없었는데 누가 어떤 조치를 해서 내가 출생했다는 것이 성립되는 거예요. 



없는 인간이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있어도 없는 존재로 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히 방해자가 있어야 돼요. 마귀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이 성사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말이 어렵지만 들어보면 이해하실 거예요. 성령 받은 분들이니까. 갑자기 또 무슨 아부성 발언이 나오네요. 우리가 어떤 성경을 볼 때 자꾸 어떤 정보로 이해하고 나는 안 변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가? 내가 뭘 해서 뭘 얻겠다는 그런 것은 성경보다도 실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보게 되면 이해가 될 거예요. 



경기도 양주에 농민마트가 있거든요. 어떤 사람이 팔겠다고 내놓았어요. 3억 5천에 내놓았는데 나이가 각각 53살, 50살인 부부가 9살 먹은 늦둥이 키우면서 살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내놓은 농민마트를 인수하겠다고 나섰어요. 3억 5천에 내놓은 것을 인수의사를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 5억 5천 주겠다고 하고 계약금으로 전 재산인 5천만 원을 먼저 줬어요. 그 뒤에 전 주인 쪽에서 대출이 되도록 해 준다고 약속을 했는데 나중에 대출도 잘 안되고 일이 꼬이니까 계약 취소하고 계약금 돌려달라고 하니 안 돌려주네요. 나이 50먹은 아주머니가 몸에 기름 붓고 가스통 터트려서 자기도 죽고 농민마트 불나서 다 날라 가고 졸지에 늦둥이 애는 엄마도 없는 애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가 복음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농민마트 화재사건 그 이야기, 오늘날 성경에서 다윗이 어떻고 아브라함이 어떻고 예수가 어떻고 모세가 어떻고, 그 이야기는 귀에 잘 안 들어와도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 농민마트 분신사건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니까요. 교회에서 다윗 이야기하면 잠 와요. 그런데 농민마트 이야기는 현실이야기라니까요. 현실이야기. 그 분신자살한 아줌마의 잘못은 뭐냐 하면, 농민마트 전 주인을 믿었다는 거지요. 왜 믿습니까? 왜 믿어야 돼요? 



대출을 해준다는 그 사람 말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 여자는 평생 동안 자기만 믿고 살았어요. 자기의 결단과 자기의 결심을 믿은 거예요. 자기의 계획을 믿었고 자기의 미래를 믿은 거예요. 자기 계획대로 안 되니까 분신자살 한 겁니다. 모든 인간은 마귀 밑에서 배운 것이 뭐냐 하면, 마귀 밑에 있는 세간이면서도 스스로 자기가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다고 지금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고.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유일한 자기교회 신자가 뭐냐, 유일한 신자가 오직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교회에서 가장 신실한 교인은 자기밖에 없어요. 인간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 십자가 이야기하면 인간은 그것을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용도로서 성경정보를 뽑아서 자기 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래놓고 구원이요? 십 원도 안 되겠다. 그게 무슨 구원이에요? 자기가 자기한테 손질하는 건데. 디모데라는 사람이 있어요. 분명히 있어요. 사도바울이 만나기전에 분명히 있어요. 사도바울이 1차전도 때도 만났고 2차전도 때 디모데 데려가서 예루살렘까지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바울이 갇혔는데 디모데는 빠져나와서 에베소에 가서 거기서 목회했던 사람이에요. 



2차, 3차전도 때 돌아다니면서 사도바울이 힘들 때 사도바울의 편지를 대필한 사람이고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본인도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대필한 사람 같으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신임했겠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말한 것과 다른 소리를 하면 안 되니까. 예수님의 계시이니까. 고린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전부 다 디모데가 대필한 겁니다. 실제로 심지어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와 빌립보교회에서는 사도바울이 직접 못 갔을 때는 디모데를 대신 보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사도바울과 함께 다니기 이 전부터 이미 디모데라는 존재가 있어요. 이미 있는데 낳았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전의 디모데는 자기교 신자에요. 농민마트 구입하려는 자기교 신자라니까요. 모든 것을 자기결정과 자기결단에 의해서 자기가 인생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주님이 내민 빼빼로를 갉아먹는 인생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기에 따라서, 내 선택에 따라서 내 인생이 바뀐다고 생각했던 자기교 신자에요. 자기만 믿는 사람이에요. 평생 동안 주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하게 했는가, 그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체가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없는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거기에 전폭적으로 모든 시간을 바쳤던 자기교신자라니까요. 



그걸 사도바울이 복음으로 낳았다는 겁니다. 복음으로 출생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가 바뀐 거지요? 뭔가 바뀌었잖아요. 디모데가 사도바울 만나기전에 이미 디모데는 있어요. 있는데 1차전도 때 만나고 난 뒤에, 2차전도 때는 동역하고 난 뒤에 그 때는 뭔가 바뀌었어요. 뭐가 바뀌었는가? 자리가 바뀐 거예요. 무슨 자리가? 디모데자리에서 사도바울의 자리로 바뀐 겁니다. 사도바울의 자리로 바뀌었다는 말은 사도바울 본인도 복음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출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출생했다는 말은 뭔가 새로운 자리가, 기존의 자리는 찢어버리고 새로운 자리가 내 두발을 딛는 겁니다. 두발을 딛는다 하니까 또 사건이 생각나네요. 문경에 나이가 48살 먹은 남자와 40살 먹은 여자가 둘 다 이혼하고 새로 만나서 문경에 새집 짓고 귀촌해서 살아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는데 보일러 후드가 잘못되어가지고 시집간 지 이틀 만에 죽었어요. 그 사람이 주님 보기에 뭐가 잘못되었는가? 문경의 새집의 그 자리, 주님의 복음 위에서 살아야 되는데 이 문경이 문제라. 문경이 무슨 파라다이스거나 천국도 아니잖아요. 



인간의 기존의 자리가 어떤 자리라도 괜찮아요. 괜찮은데 자꾸 이 자리가 나를 살린다고, 내가 만든 자리, 내가 결정한 자리, 내가 선택한 자리가 나를 살린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11월이 다 가고 12월1일부터 5일까지 한국에 계엄령이 발동된다. 계엄령과 함께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나면 태국으로 피신해야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 SBS에서 방송했잖아요. 어떤 선교회에서 그렇게 주장해요. 그런 단체들이 많아요. 마지막 때 방주 만든다고 돈 내라고. 전천년주의 주장하면서 핵폭탄이 터지고 난 뒤에 방주 만들어서 우리끼리는 살자고. 



그 자리를 돈 들여서 본인이 만드는 거예요. 어디가면 됩니까? 뭘 어디로가? 주님이 주신 자리는 어디라도 괜찮아요. 진짜 교도소라도 괜찮아요. 강도라도 구원받아요. 평소에 마귀 속에 잡혀 있는 세간살이가 되어놓으니까 마귀가 시키는 대로만 살다보니 백날 팔짝팔짝 노력하고 어떤 시도를 해도 누가 와서 끄집어내 주지 않는 한 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 뭐냐 하면, 새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렇게 하면 돼요. 어렵게 할 것 없어요. 새로 태어난 것이 뭘 의미하느냐? 믿지 말라는 거예요. 믿지 말라. 남 믿지 말라는 거예요. 대출금고 믿지 마세요. 안 믿으니까 계약서까지 다 써야 돼요. 



계약서 쓴다는 말은 “당신 말 안 믿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아무것도 믿지 마세요. 그리고 뭐도 믿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게 믿고자 하는 자기의 결단도 믿지 마세요. 그러니까 남 믿지 마세요. 나 믿지 마세요. 그걸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주어진 자리는 다양성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양성을 믿지 말라는 것은 하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 그러면 중보자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두 명, 세 명이 아니에요. 오직 한 분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다양성이 하나로 초점을 모아줘야 되는 거예요. 하나로 모아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애초부터 천국 못갑니다. “내가 알아서 왔습니다.” 하면 이것은 천국 안 넣어줍니다. “너 어떻게 왔어?” “우리 주님 때문이잖아요.” 옆 사람도 “당신은 어떻게 왔어?” “우리 주님 때문입니다.” 저쪽은 농민이고 이쪽은 어부고, 판사고 의사고 뭐가 되었더라도, 목사라도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것은 뭐냐?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천사가 지키고 있는 그 천국 문이 안 열리거든 모여가지고 합창을 하세요. “하나, 둘, 셋!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공로로, 예수님 덕분에. 교회는 바로 그래야 돼요. 다양성으로 온 그 모든 다양성의 가치를, 개개인의 가치를 전부 다 없애버려야 돼요. 하나로 모아야 돼요, 하나로. 하나로 모으려면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나의 이 다양성 자체를 없애버려야 돼요.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누가 잘하나, 이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너는 저런 역할을 하고 나는 이런 역할 했다.” 가 돼야 돼요. 너는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하고 나는 심은 씨에 물주는 역할을 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겁니다. 항상 다양성이 하나로 모아져야 돼요.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농민마트를 하든 뭘 하든 관계없어요. 오직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쏠리는 관심은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이걸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비라고 나오지요. 일만 스승은 많다. ‘일만’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고 다양합니까? 그렇게 많아도 오직 구원자는 하나다. 하나에서 만들어져요. 이러한 하나로 만드는 이 작업……,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교주고 또 신자기 때문에 나만의, 너와 다른 나만의 주장을 우리는 포기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담을 타 넘는 도둑 같은 주님께서 이 작업을 어떤 식으로 해나가는가?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는 이제 4월부터 시작하는 것이 있어요. 할 일 없는 사람들 시간보내기 아주 좋은 것이 있어요. 프로야구가 시작됩니다. 올해부터는 열 구단이 나와서 짝을 맞춰서 하는데 수비할 때 진짜 멋진 수비가 있어요. 누가 봐도 홈런이 되는 타구가 담을 넘어가는데 외야수가 글로브를 뻗어서 담 넘어가는 홈런 볼을 낚아챌 때 관중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치지요. 그런 호수비를 보려고 야구장에 가잖아요. 



주님께서는 지옥으로 넘어가는 그것을 낚아채서 가져오는 거예요. 그게 기생 라합입니다. 기생 라합은 자기 동네 여리고성에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나요. 십년동안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요.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바깥에서 누가 왔어요. 두 명의 정탐꾼이 왔습니다. 기생 라합은 소속, 자기 자리인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을 배신하면서 자신은 새롭게 담 넘어온 그 도둑, 스파이를 아낌없이 대접했습니다. 둘 사이에 절친이 되었어요. 밖에서 넘어온 그 분이 나를 데려갈 때 기생 라합은 자기의 직업이 기생이라는 그것이 의미 없음을 아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의 개성은 무엇이고 나의 개성은 무엇이다, 가 바깥에서 넘어온 그 쪽에서는 개성을 찾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그 하나, 그 하나의 단체의 이름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 직업은 뭐고 네 직업은 뭐다, 혹은 기생이니 기생 아니니,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인생이 빼빼로처럼 주님이 주신 준비된 나라, 주께서 주신 하나의 예수님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성경에서 지체라는 말이 어려울 때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된다고 제가 예를 들었어요. 망치 가지고 멀쩡한 손등을 때려보세요. 갑자기 망치로 때렸으니 맞은 자리의 피부가 부어오르겠지요. 부어오른 그 돌출부, 그게 지체에요. 그 돌출부에 있는 실핏줄은 원래 몸에 있던 동일한 실핏줄이지요. 이걸 뗄 수가 없어요. 그걸 떼려면 몸의 핏줄까지 다 뽑아내야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구원받지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를 안다, 내가 복음을 안다, 이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업무로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돌출부, 부풀어 오른 여기에 통하는 그리스도의 동일한 피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했고 복음을 알게 했고 십자가를 알게 하는 겁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몸이 부풀어 오른 것이 우리라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라고 하는 거예요. 사지입니다. 사지, 뻗어 나온 사지라는 말이지요. 몸에 붙어 있는 뿌리라고 할 수 있고 요한복음 식으로 하면 우리는 주님의 줄기에 붙어 있는 하나의 가지다. 그래서 열매가 안 맺힐래야 안 맺힐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열매도 없으면서 가지라고 우기는 것은 줄기가 알아서 가지치기를 해 줘요. “열매도 없는 것이.” 그 열매가 뭐냐 하면, 다양성을 잘라버리고 일치성으로 모아지는 성향, 속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참 어려운데요. 그러면 쉬운 것을 이야기해 드릴게요. 병이 있는데 병 안에 새가 들어갔어요. 주둥이가 있고 몸통이 있는 병 안에 새가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에 그 병의 뚜껑을 닫았어요. 그러면 병 속의 새는 어떻게 빠져나오지요? <만다라>라는 영화의 끝부분에 이런 화두를 제시합니다. 



“이 병속의 새가 어떻게 빠져나오는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서 그 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하는데 해결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질문 자체를 잘못한 거예요. 빠져나와야 된다는 의식 있잖아요. 그 전에 어떤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런가 하면 내가 병 바깥에서 마음껏 날개 짓을 했는데 지금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경우에나 그 질문이 성사되는 겁니다. 제가 말을 해도 참 어렵게 하지만 할 수 없어요. 만약에 현재 내가 태어난 자리가 원래 다들 그렇게들 살아,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누락이 되느냐 하면, 빠져나간다는 질문자체가 성사가 안 됩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가자? 그것은 누구 아이디어인가 하면 본인들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이디어고요. 본인들은 거기서 그냥 사는 거예요. 뭐, 뭐? 이게 전부인데. 여러분 가운데서 이 세상 더러운 악마에게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교회 오신 분이 계십니까? 처음부터 그런 맘먹는 것 아니잖아요. 처음에 교회 올 때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돈 많이 벌고 죽어서는 좋은 곳, 천당 가고 자기 교의 확장을 위해서, 자기가 믿는 자기 교, 자기 사랑, 자기밖에 안 되는 그것을 좀 더 구체화하고 실제로 내가 편안하게 사는 복 받기 위해서 처음 교회 올 때는 발걸음을 그렇게 해요. 



그래가지고 “어느 말씀 지키면 내가 행복해집니까?” 그렇게 시작한다고요. 물론 그렇게 시작해서 그렇게 끝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하여튼 그렇게 시작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빠져나온다는 이야기는 출애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빼내기 위해서 모세와 아론을 보냈더니 놀라운 사실은 그 빠져나와야 될 히브리인들이 바로 왕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와 아론을 욕하는 거예요. 모세와 아론은 그런 욕을 먹어도 됩니다. 왜? 장차오실 예수님의 긴 그림자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자가 왔는데 구도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왜 우리가 아는 방식대로 구원을 안 하는가?’ 이것 때문에 삐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거든요. 우리가 아는 방식대로 안 되었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것이 바로 구원의 방식이에요. 정말 아이러니 하지요? 마태복음 8장 16,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하는 대목이 나와요. 처음에 신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이 본문 다시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빨리 목회 성공해서 밥이나 먹고 살겠다고 수천 명 모을 궁리하고 다들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에요. 병을 고치는 것은 의사고 귀신 나가게 하는 것은 무당들이 하는 짓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병을 친히 짊어졌다니까요? 고쳐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어느 의사가 감기 들린 환자 고쳐주지 당신 감기 자기가 대신 걸리고 그 쪽은 감기 낫고, 이런 의사 같으면 온갖 질병 다 걸렸어요. 폐병 환자가 오면 폐병 걸리고. 의사 하면 할수록 자기는 점점 더 골병들어요. 그런 의사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기술을 발휘해서 저쪽에 유리하게 되고 자기도 같이 살고, 그걸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너는 살고 나는 죽고.’ 



고린도전서 4장 10절부터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이게 사도바울의 자리가 아니고 이미 그 전에 예수님의 자리인거예요. 예수님의 자리, 아버지로 하여금 유일한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양성이 아니고 하나, 그 예수님 자리, 예수님의 그 지체, 머리는 주님이고 우리는 거기에 부풀어진 지체, 그 자리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낳은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뭐냐? 다양성이 아니고 오직 하나만 쳐다본다, 끝! 그런데 전에는 하나가 뭐냐? 나였어요. 농민마트하고 계약할 때 나는 내 인생 내가 잘 선택해서 앞으로 인생 피겠다는 오직 나만 쳐다보는 자기교 교주고 신자인데 이제 디모데나 사도바울은 예수교로 바뀌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쳐다보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겁니다. 나 때문에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올 때는 나 때문에 나 잘되려고 예수 믿었는데 이제는 그게 바뀌어져야 돼요. 도둑이 와야 돼요. 나 때문에 예수 있다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바로 우리에게 심어준 겁니다. 그것 모르면 우리는 지금까지 마귀를 섬기는 마귀 신전의 신자에요. 마귀교의 신자였습니다. 



그게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로 바뀌지요. 이러니 말이 통합니까? 인터넷에 나온 글 제목대로 이러니 말이 통해요? 이러니 십자가 마을 사람하고는 말이 통할 리가 있나. 통할 리가 있어요? 이게 안 통해야 되지요. 자기 밖에 모르는데. 어떤 정보, 신학을 배워서 뭘 하려고 하는데. 



대신 짊어졌다는 말은 대신 짊어지신 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겁니다. 그리고 대신 짊어지신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매일 하루씩 갉아먹고 있어요. 조금씩조금씩 갉아먹고 있어요. 나중에 죽게 되면 다 갉아먹었어요. 지금 보니까 얼마 안남은 분도 계셔요. 요만큼 남은 분도 있고. 그런데 그건 몰라요. 분명히 많이 남았다 했는데 갑자기 어떻게 될 줄도 모르고. 결혼식 하자마자 죽는 사람도 있어요. 압구정에 그런 사람도 있어요. 결혼식 하자마자 깡패한테 맞아서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데쓰노트, 죽음의 노트에 누가 먼저 갈지는 몰라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가 주님의 하나로 바뀐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사세요. 어차피 내 인생 아니니까. 어차피 내 인생 아니에요. 다만 살면서 “주님이여, 왜 저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하게 하십니까?” 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시면 그것이 이미 여러분 속에 하나 되신 주님의 생명이 한통속이 되어서, 동업자가 되어서 같이 움직이는, 그 아버지를 닮은 그 자식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아버지께서 하신 그 작업의 방법이 우리가 알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와서 한 수 배우고 성경 배우면 구원되는지 알았는데 그것은 도 닦는 것이 불과하고 진정한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희들로 하여금 우리 속에 우리 보다 주님이 더 답답해 하시고 더 신경 쓴다는 것을, 관심 두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계속해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