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고전 4장 19-21(말과 능력의 차이)150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19-21절입니다. 신약성경 268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4:19-21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성경에서 매라는 말을 잘 사용을 안 해요. ‘매’라는 것은 부정적인 뜻인데 때린다는 거잖아요. 때린다는 말은 아직 인간 덜 되었다는 말인데 인간 덜 되면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닐까요?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닐까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해 놓고는 매 들고 나온다면 구원이 멀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뭘 해야 된다는 이야기고 이것은 온전한 구원이 될 수가 없는 거지요. 매를 들고 나온다고 하니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보통 나오기 마련인데 사도가 매를 들고 나온다는 말은 개인구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네가 개인 구원을 유지하는 한,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아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가요?” 이런 사고방식을 계속 유지하는 한, 이것은 매를 벌어요. 그런 쪽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구원을 받겠다고 할 때 그 전제 조건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나도 사람인데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았지만 죽어서도 천국 가서 사람으로서 살겠습니다.” 하는 자기 기대를 품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은 없다고 제가 방금 언급 했지요? 인간의 개인 구원 같은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없어요. 내가 없다니까요? 성경 자체가 인간을 분해해 버립니다. 말과 능력, 둘로 분해해 버렸어요. 오늘 본문에서. “제가 어떻습니까? 저는 구원 받습니까?” 라는 그것,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그 말을 역으로 추적해 보는 거예요. 역으로 추적해 보게 되면 너는 네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질적으로 다른 능력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능력은 구원 받지 못할 능력에 포함되어서 나온 말이 되는 겁니다.
말 이전에 능력이 먼저 있고 그 능력은 두 종류의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역 추적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는데, 지금도 내가 사람인데 죽어서도 천국 가서 편안히 행복하게 사는 내가 되고 싶다고 할 때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말, 언어, 그 말이 수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매맞을만한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없다면 교회 나올 필요도 없고 내가 없다면 하나님 믿을 필요도 없지 않느냐?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도 믿고 복 받겠다고 기도하는데 내가 없다면 기도할 이유도 없고 하나님 믿을 필요도 없지 아니한가, 라고 여러분이 생각하실 거예요.
그래서 그게 바로 매 맞을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2차로, 네가 먼저 있고 2차로 하나님을 잡아당기느냐, 그 말이지요. 분명히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먼저 계신 하나님이 없던 우리를 차후에 만들었거든요.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주여, 무슨 능력으로 만들었습니까? 주님 안에 어떤 계획과 목적이 있기에 그 능력을 저를 만드는데 소비했습니까?” 이렇게 나와야지요. 저를 구원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주여, 왜 저를 천국 보내려고 그렇게 안달 나서 설치십니까? 제가 뭔데 왜 저를 구원해야 되지요?”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물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정답은 뭐냐 하면, “왜 하나님은 자꾸 귀찮게 저에게 찾아오십니까?”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잖아요. “저는 하나님이 싫다는데 왜 자꾸 찾아오십니까?” 바로 그러한 발상 자체가, 내가 있고 하나님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먼저 계신 것 맞잖아요. 내가 눈치 챘어요.” 그러한 자를 찾고 있는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거 주님께서 이렇게 일으켰지요? 하여튼 주님은 애를 먹여요, 애를 먹여.” 이런 발상,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 생활방식, 그런 사람을 원한다니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하는 말이, “네가 지금 능력의 포대기에 휩싸였구나. 네가 입에서 나오는 그 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네가 원초적인 능력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내 백성이 맞다.” 이렇게 그걸 알아보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표현입니다. 손에 펜을 들고 있다. 그 말은 생존과 관련이 없는 거지요. 이것은 글을 쓸 수도 있고, 낙서를 할 수 도 있고, 심심해서 펜을 막 돌리면서 놀 수도 있고.
인간은 자기 몸의 표현을 하는데 생존과 상관없는 여분의 행동을 해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기호학적표현이라고 해요. 또는 더 어려운 말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는 말이지요. 이걸 쉽게 하면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영적존재라는 그 말이지요. ‘영적존재이면서 왜 나는 저 짐승과 다른 쓸데없는, 생존과 관련 없는, 내 목숨 부지하는 것과 관련 없는 짓을 왜 하지?’ 몰라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은 아무리 반성을 해도 반성되지 않는 영역이 따로 남습니다. 아무리 내가 “회개합니다. 나는 이렇게 나쁜 인간입니다.” 하지만 마저 죄를 끄집어내는 능력은 우리에게는 없어요.
뭔가 미진해요. 회개를 했는데 뭔가 남아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아요. 내 인생이 꼬이는 것을 보니까 마저 들춰내지 못한 그 죄가 화근이 되어서 내 인생을 조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게 바로 뭔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휩싸여 살아가는 이것이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겁니다. 반성해도 반성되지 않고 뭔가 미진하고 찝찝하게 남아 있는 것. 이게 변비, 아침부터 이런 소리를 해서……. 전부 다 변비 같은 인생을 살아요. 다 인생이 변비가 되었어요. 돈은 많은데 행복하지 않아요. 결혼은 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뭔가 계속해서 두려움과 공포에 쫒기고 있어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성육신입니다. “내가 인정하는 몸은 성육신밖에 없다. 너 아니거든? 성육신이야. 네가 살아가는 능력? 성육신에서 나왔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 몸을, 일단은 주셨으니까 이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것이 동물적 본성이고 또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실은 인간의 본성을 추적해 보면 결국 이거예요. “있으니까 무조건 살자.” 그것뿐이에요. 조폭 말이 맞아요. 살고보자. 고상한 철학이고 뭐고 철학박사가 이야기해도, 그 껍데기를 다 훑어내도 마지막 남는 것이 있다면 철학박사학위 따서 교수해서 살고보자, 그거예요. 그저 밑바닥에는 살고보자는 생존욕구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왜 살아야 되는데? 그것은 몰라요. 인간의 말은 표현인데 그 인간의 말이 멈추는 지점이 있어요. 인간이 말을 그렇게 많이 해도 딱 멈추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까운 친구나 가족, 아주 사랑했던 사람 중에 누가 돌아갔을 때, 그 장례식에서 이 말이 나옵니다. “아, 이럴 때 제가 무슨 말을 해야 되지요?” 바로 그거예요, 바로 그거. “이럴 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되지요?” 내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문상은 가야 되고 가보니 정신도 놓고 울기 바빠요. 엎어지고 난리 났어요. 장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을 원망해대고 있을 그 때, “친구야, 내가 너에게 해 줄 말이 없네.” 바로 그거에요. 바로 그거거든요. 그렇게 말을 잘하더니 왜 지금 와서 할 말이 없지?
말이 끊기는 순간 그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말의 이유까지 추적해서 접촉을 해야 되는데 말의 한계가 있어요. 말은 끝이 있어요. 결국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내 살고자 하는 그 표현에 불과한 겁니다. 이유도 모른 채로 말을 해 온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육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육신이란,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그 살아가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우선 자기 몸이 사는 것이 급급하니까 말을 하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항상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뭐냐? 아까 장례식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럴 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는 말은 “너는 나에게 타인이야. 너는 너고 나는 나야. 그런데 내가 너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데 이럴 때 내가 무슨 말을 가지고 관계를 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이거든요. 쉽게 하면, 말이라는 것은 남이 의식될 때, 남이 있을 때 말이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따라서 말에서 능력으로 돌아서게 되면,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돌아서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사람을 상대하지 마세요.
설교 끝났습니다. 인간 상대하지 마세요. 상대하게 되면 말을 하게 되어 있고 말을 하게 되면 타인을 내 좋은 쪽으로 이용하려는 사기성 의미가 그 말 속에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내가 곧 너에게 사기 친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부부도 싸움을 하다가 정말 싸움이 격하게 되면 입을 닫고 말을 안 하잖아요. “나는 너하고 안 논다.” 사실은 우리의 인생이 평생이 그러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주님하고 능력으로 사귀어야 될 관계를 주님은 끊어버리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본능으로 사니까 내가 누굴 사기치고 이용해야 내가 살까 싶어서 그 다음부터 말이 막 나오는 거예요. 입만 떼었다 하면 전부 다 사기성입니다. 부부가 사는 것은 누가 사기를 더 쳤느냐를 시합하기 위해서 살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말로 사신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성육신을 보여준 이유가 뭐냐 하면, 네 자리에서 성육신 자리, 주님의 자리로 끌어당겨서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의 능력에 합류된 자로서 주의 나라에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주님과 관계없으면 자꾸 말만 해대서 안 돼. 말만 많이 해서 사기를 쳐서 안 되겠어요. 그래서 이제는 말을 닫아버리고 네가 말 안 해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주께서는 주시는 겁니다. 네가 사기 안쳐도 사는 방법.
원래 이 세상은 사람 죽이기 적합한 세상이에요. 창세기 3장에 의해서. 그거 몰랐지요? 이 세상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람 죽이는 기계에요. 사람 죽이는 방앗간, 공장이에요. 사람 죽이는 곳.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사람 죽이는 세상에서 왜 살고자 하느냐는 말입니다. 초반부터 뭔가 일이 꼬이고 잘못되었어요. 죽이는 세상에서 살려고 하니까 자기만 힘들지요. 자기만 괴로운 거예요.
“그래도 목사님, 우리가 살아 있잖아요.” 그 살아 있다는 것이 다른 능력 때문에 살게 하신 겁니다. 다른 능력 때문에.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누가 살려주니까 사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살려주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그 능력이 나오는 그 원천지, 원류지를 주께서는 찾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찾아가게 하는가? 주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사라져요.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가 될 수 있고요. 베드로의 경우 요한복음 끝에 보면 이렇게 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우고 데려갈 것이다.” 자기 자신은 있어도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지요. 시편 105편 19절에도 보면, 요셉이야기를 죽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최초의 조폭이 요셉의 형들이에요. 구덩이에다 파 묻어버린 거예요. 물 없는 구덩이에다가.
마침 그 때 베두윈이 안 지나갔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래서 노예시장에 팔려갔는데 요셉도 요셉본인 인생에 대해서 평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합니까? 괜한 꿈을 꿔서 이런 고생을 합니까?” 하지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되어 있어요.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이 우선이고 나는 나중이에요. 말씀이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그 말씀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 중에 하나가 요셉이 태어나야 되고 베드로가 나와야 되고 사도바울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정리하게 되면, 능력이 오게 되면 내가 사라져요. 내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아니에요. 내가 사라짐으로써 말씀의 능력이 나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겁니다. 주의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살면 어디로 갑니까?” 성육신을 만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빼빼로데이, 빼빼로 갉아먹다보면 결국은 예수님과 뽀뽀하게 된다고. 먹히다 보면. “주께서 내 인생 이렇게 만들어놓았지요?” 이렇게. “그렇다. 왜, 싫으냐?” “아니요. 좋았습니다.” “이제 와서 좋다는 소리 하는구나. 네가 처음에는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맞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여러분, 꿈과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항상 지나고 난 뒤에 평가하기 마련이에요. 꿈 꿀 때는 꿈인지를 몰라요. 현실인줄 알지요. 깨 보면 식은 땀 흘리면서, ‘꿈이었구나. 큰일 날 뻔 했네.’ 이런 경우도 있고 ‘아, 꿈이었어? 그냥 깨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꿈도 그렇지만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사랑은 항상 뒤돌아보면서 사랑이란 단어를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말 할 때는 좀 적어놓으세요. 사랑할 때는 다툼이에요. 끝나고 나니 그것이 사랑이었어? 그리워지면 사랑이고 생각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아픈 사랑은 사랑이에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너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 중심이라는 말이 추상적 개념이잖아요. 그 추상적 개념이 능력이 임하게 되면 추상이 아니고 이게 실제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 주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이 추상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하나님이 자기를 망하게 할 때 비로소 그 말씀이 내가 지키는 추상적인 교훈이나 윤리가 아니고 실제로 이 이스라엘 자체가 그 말씀의 능력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겁니다.
자, 지금 우리 주제가 뭐냐 하면, 지금 우리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냥 말만 해서 어쨌든 눈에 띄면 이용해먹을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김장하는데 좋은 것 있으면 그걸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장로님이 빌려가서 김장 잘 했답니다. 인간은 모든 말하는 것이 다 이용해먹겠다는 사기용인데 그래가지고는 원천적으로 안 되거든요. 주님과 뽀뽀가 안 된다는 말이지요. 성육신이 있고 그 성육신과 일치가 되어야 되는데 그 가는 방법은 망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요셉이 ‘말씀이 응하기 위함입니다.’를 알기 위해서는 요셉은 점점 더 밑으로, 이제는 너무 망해서 ‘나 같은 인간은 차라리 버림받았어.’라는 지점까지 가야 되는 거예요.
욥이 처음에는 부자였고, 믿음이 좋았었고, 자식들이 많았는데 아들은 잘났고 딸은 예쁘고, 이렇게 좋은 것만 다 있었어요. 그런데 그 욥의 끝이 어떠냐? 욥의 끝 부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욥기 40장 4절에 보면,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이 입, 설교시간이기 때문에 주둥이라는 상스러운 소리는 안하겠습니다. 요 입에서 뭐가 나왔어요? 말이 나온 거예요. 말로서 하나님과 자기와 연결시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타인이니까. 하나님은 타인이니까. “주여, 이럴 것 같으면 왜 저를 만들어놓았습니까? 제가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왜 저를 고생시킵니까?” 그 말, 말, 말, 말, 말이 계속 나와요. 꼭 케이블TV같아요. TV조선 같아요. MBN 그런 거요, YTN, 전부 다 말밖에 없어요. 말, 누구 하나 잘못했다 하면 신났어. 스물네 시간, 계속 말.
그런데 욥기 40장 4절에서 그 입을 막습니다. “주여, 그것이 주의 능력이라면 제가 그 능력을 능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바로 그것이 제 죄입니다. 우리는 불평만 할 줄 알았지 나를 망가지게 하는 그것도 주의 창조주의 능력, 원래 주의 능력인 것을 왜 빼먹었습니까, 내 인생에서? 내가 없어지고 내가 망하고 내가 죽는 것도 주의 능력인 것을 왜 내가 빼먹었습니까?” 죽기 위해서 만든 세상에서 나는 나 혼자 독대하면서 홀로 잘되려고 그런 생각을 먹었다는 그 자체가 현실과 너무 괴리된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으로 그동안 살아온 거예요.
그 다음에 욥기 42장에서 욥은 재를 뒤집어쓰고, 연탄재인지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회개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주여, 말 했던 것에 대해서 회개합니다.” 그게 바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다. 성육신이 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그 성육신이 가는 행로를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출세했습니까? 총회장 되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서 부자가 되었습니까? 그래가지고 차 바꿨습니까? 부동산 구입했습니까? 그 주의 능력을 추적해 보면 결국은 망했어요. 실패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를 사흘 만에 부활시켰습니다.
이게 진짜 하나님의 능력과 부합되는, 천국에 살 수 있는 참된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는 멀었어요. 우리는 근처 가지도 않습니다. 이용할 생각만 했지 내 자신이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할 마음을 갖지를 못했어요. 사람이 자기가 없어질 것으로 마음을 다잡는다면 타인은 의식되지도 않습니다. 능력 안에 있기 때문에 남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별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주님께서는 자기 능력으로 잡아 당겨서 자기천국에 넣기 위한 성도는 반드시 끝장을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끝장은 우리가 찾아가지를 못해요. 여기가 끝인가 보오, 하고 가보면 끝이 아니에요. 더 있어요. 주님께서 능력으로 이끌어가야 우리가 끝장을 보는 겁니다. 여러분이 드라마 잘 안 보시지만 드라마 보게 되면 언제 끝나는가 하면, 꼭 빈 창고 같은 데에 조폭한테 납치가 될 그 때 드라마가 끝나요. 뒤늦게 경찰차가 출동하는 게 나오고. 그게 대단원의 막이 내려오는 장면이에요. 주인공이 얻어맞고 아무도 구출할 수 없을 때, 그처럼 자신의 진짜 끝장의 모습은 그동안 이 세상과 더불어서, 이 세상은 구겨지고 폭삭 주저앉게 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그동안 내가 마치 영원한 것처럼 착각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이 세상과 더불어 같이 깨닫게 하는 순간이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끝장의 순간입니다.
왜 그런가?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가?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나무 두 개가 있어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두 개가 있지요. 그 두 개의 나무에 의해서 능력이 나옵니다. 죽이는 능력도 나오고 살리는 능력이 나와요. 살리는 능력을 생명나무라고 하고 죽이는 능력을 선악과나무라고 합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능력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그 주님의 말씀은 선악과능력대로 마음껏 발휘하는 영역 속에 네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이 너 살기 좋으라고 있는 동네가 아니고 이 세상이 너 좋으라고 있는 동네가 아니고 주께서 같이 만들어놓은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그 능력을 발휘하는 장으로서 시험용 하얀 쥐 같은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 시험용 쥐를 청산가리가 들어 있는 통에 집어넣어서 약통 문을 열면 살고 못 열면 얼마 만에 죽는지를 시험하잖아요. 그렇게 시험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 심어놓은 것은 시험용 하얀 쥐, 죽어도 별 탈 없는 하얀 쥐로서 아담과 하와를 거기에 놓아둔 겁니다. 거기에 두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따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따먹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어도 괜찮아, 하는 새로운 세력이 거기에 같이 끼어들었습니다.
누가 끼어들었느냐 하면, 거기에 끼어든 어떤 괴물이 있었어요. 그게 뱀을 타고 들어온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에 같이 저촉받기 위해서 그 덫에 빠진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꼭 동화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신빙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건 요한계시록 12장의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하늘나라 전쟁에서 패배해서 지상에 내려와서 어딜 가느냐? 인간이 사는 동네에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수사망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수사망에 걸려든 거예요. 선악과나무 앞까지 제대로 도착을 한 거예요. 그 악한 천사가.
그런데 이 마귀가 인질을 잡았는데 누굴 인질로 잡았는가? 아담과 하와를 인질로 잡았어요. 잡고 난 뒤에 마귀가 마지막 피할 곳이 없으니까 이참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나 같이 물귀신처럼 껴안고 죽자, 하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지? 사실은 선악과 따먹으면 신이 될 줄을 미리 알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만 신이 되려고 따먹지 말라고 했어. 따먹어. 따먹어.” 한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말미암아 마귀가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등장합니다. 악마가 하나님에게 쫓겨난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도 신처럼 되어보겠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걸 거부해서 전쟁을 벌이고 이 땅으로 추방시킨 거거든요. 하나님은 하나님만 되어야지 피조물이 하나님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만이 주가 되시기에 그런 거예요. 천사는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마귀의 늪에, 덫에 걸려서 같이 망한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따먹고 나니 그 때부터 청산가리가 퍼지는데 선악과청산가리가 어떻게 퍼지는가? 이게 능력으로 퍼지는 거예요. 능력으로 퍼져서 “네가 이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죽도록 고생하다가 결국은 네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세상이 아니고 이걸 죽이기 위한, 폐쇄된 실험공간이에요.
나중에 이 실험공간은 주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구겨버립니다. 실험 끝! 구겨버려요.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만 남는 거예요. 이런 것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저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런 말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능력만 있으면 되네요.” 이런 말이 나오면 되는 거예요. 나는 없고 나라는 것이 능력덩어리, 능력다발이 나예요. 어떤 학자는 이런 어려운 말을 했어요. 나라는 것은 ‘나(들)’의 집합체라고 했어요. 참 말도 어려워요. 나라는 단수는 ‘나(들)’이라는 복수의 집합체다. 그 때 그 때마다 나는 너무나 변신하니까.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 나의 변형개념이다, 이런 말도 해요. 변질된 개념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 말은 어렵게 할 것이 아니라 쉽게 하면 돼요. “나는 능력이야.” 이러면 간단한 걸 가지고요. “나는 능력이야.” 하면 다른 사람이 “너는 능력이야? 네가 배트맨이야, 스파이더맨이야? 네가 왜 능력이야?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데?” 그제야 이야기하는 것, 우리의 능력은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다른 곳에서 온 거예요. 그 다른 곳이 어딘데요? 에덴동산? 아니에요. 에덴동산에서 졸업해버렸는데요 뭐. 추방당했잖아요. 그러면 어디? 성육신이라니까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능력이 우리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도록, 합류하도록 하는 조치가 능력 있게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너한테 가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떤 솜씨를 부리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이 본문 말씀이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오랫동안 잘못 해석했잖아요. 말 좀 하지 말고 돈 내라는 그걸로 끝났잖아요. 돈만 내면 믿음 좋다고 다 이야기할 건데 돈은 안내고 그냥 기도로 때우려고 하는데 돈도 안 되는 기도만 하지 말고 돈 내라니까. 돈을 내야 하늘나라가 확장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부 다 이렇게 처리하는데 능력은 그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그어버려라. 네가 너 자신을 ‘나는 없다’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고 나 되게 하는 능력이 나를 되게 했다는 그 말입니다. 나 말고 다른 능력이 나를 나 되게 하신 거예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주님의 그 능력이 나올 때 그 다음에 어떤 능력으로부터는 차단되었어요.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어서 생명나무 과실을 못 먹게 되었습니다. 죽는 능력은 받았는데 그 다음에 사는 능력을 받지를 못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성육신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육신을 보내주셔서 모든 인간은 자체적으로 자기가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성육신은 생명나무거든요. 생명나무, 선악과 합쳐서 주님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주님이 우리에게 뭘 말하는가? 능력을 주시는 겁니다. 능력을 주시는데……이제부터 좀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능력이 오는데 그 능력이 올 때 어떻게 오느냐 하면, 말로 와요, 말로.
“능력이 올 때 말로 온다고요? 그러면 목사님이 지금까지 설교한 것이 헛방이 되는데요? 능력, 능력, 해도 결국 나타나기는 말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말로 구원받는 것이 맞잖아요.” 로마서 10장에 있는 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 말이 맞잖아요. 말을 해야 구원받지 입 다물면 구원 안 되잖아요. 지금까지 줄곧 입을 다물고 재를 뒤집어쓰고, 이렇게 하더니 소용없네. 말해야 되겠네.”라고 하잖아요.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26절에 보면,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도바울이 말을 해요. 분명히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 사람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 말을 해요. 27절에, “이 백성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둔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라는 이 말씀을 아주 간략하게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요. 구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뭘 보여주는가? 말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도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데, “난 너희들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늘나라에 지금 있는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아브라함은 왜 거기 가 있지요? 구원이 안 되는데 왜 거기 가지요?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회수를 해요. 우리의 모든 살아온 인생을 회수를 합니다. 강도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깡패가 되었든, 불효자가 되었든, 바람을 피웠든, 상관없이 그 모든 고물들을, 그 흙들을 회수를 해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잔재들이거든요. 선악과 따먹은 그 자리에 생명나무가 뛰어들어요. 뛰어들면 거기서 생명이 나와요. 쓰레기통에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회수 당함. 우리 인생은 ……, 여러분이 일을 저지르세요. 일을 저질러놓고 그 저지른 일을 여러분이 책임지지 마시고 감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막 사세요.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렸든, 어떻게 망가졌든지 관계없이 여러분이 손대지 마세요. 범인 지문 감식하는데 지장 있습니다. 현장 보존하세요. 폴리스라인 쳐버려야 돼요. 주께서 손대면 그게 생명체가 되는 겁니다. 모든 범죄는 나로부터 출발하거든요. 나로부터 출발해서 기껏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나로부터 출발해서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이 꼴로 흙이 되었습니다.” 하고 나올 때 “그래! 가만있어. 그거 가만 둬.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게.” 전담반이 따로 있습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제가 지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어낸 것이 아니고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인자를 데리고 골짜기에 갔는데 거기 뭐가 있느냐 하면, 뼈들이 소복이 모여 있어요. 뼈입니다, 뼈. 여자 분이나 남자 분이나 언제 황홀한가 하면, 보석상에서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봤을 때 황홀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에스겔을 보석상에 데려간 것이 아니고 뼈들이 소복이 진열된 곳에 데려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에스겔아! 인자야! 이 뼈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그 질문 안에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그 능력을 오늘 여러분이 받으셔서 오늘 오후에 자신한테 물으세요. “주여, 이 뼈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 있어요. 왜? 우리는 주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능력을 쪼개보면 주의 말씀이 들어 있어요. 인자가 하는 말이 “주의 말씀으로 삽니다.” 하거든요. 과연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보니 그 뼈들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겔 37:7,8)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어떤 목사님들은 이 대목을 보고 걱정이 되어서, 자기 아들딸 불러놓고 유언을 해요. 절대로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뼈 맞추기 좋도록 잘 매장하라는 거지요. 레고도 아니고 도대체……. 화장하지 말라는 당부, 또 어떤 목사님은 상어가 와서 팔 하나 뜯어버리면 어떻게 몸이 결합되겠느냐고 하는데 이 세상은 실험실이 되어서 우리 보기에는 넓은 세상이지만 주님께서는 실험실 구석구석 다 알아요. “이 뼈 여기 있었네. 상어한테 물렸나?” 다 가져옵니다. 선악과 능력 안에 있는 것은 선악과나무가 알아서 그것을 충분하게 극복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성육신이 주님의 의로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증거 하는 것은 이거예요. “어떤 분이 죽었는데 주께서 사흘 만에 살려냈다. 그 분이 누구냐? 그 분이 예수님이다. 그 분의 능력이 그분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의 능력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들은 그분처럼 영생 얻는다. 그 능력이 내가 전하는 말, 말씀 속에 담겨있다.” 이게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왜? 너희는 그 말을 말씀으로 받지 않고 말로 받기 때문에 그래요. 평소에 남 사기 칠 때의 그 말과 같은 질의 말인 줄 알았어요.
우리의 말은 나 살고자 하는 생존의 욕구가 담긴 능력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뼈로 만드는, 우리를 뼈라고 규정시켜버리는 그 능력입니다. 우리가 뼈가 되어야, 우리는 실험실의 실험용 하얀 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우리를 실험한다는 것에서 여러분은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자긍심을 가져야 돼요. 감히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과 부활의 능력을 실험하겠다고 나를 시험도구로 채택했다는 것, 여러분, 이거 자랑질 해도 괜찮습니다.
교회 와서 돈 벌었다는 이런 것 자랑 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교회 왔다고 돈 안줘요. 있는 것도 망하게 하는데 무슨 돈을 줘요. 우리 인생 무슨 짓거리를 해도, 막 살아도 내(주)가 회수해 줄게. 내(주)가 회수해서 다 가져와요. 90년 살았습니까? 아직 90까지는 안 살았구나. 80년 사시고 어떻게 사시든 다 회수해서 묻습니다, 우리한테. “이 뼈들이 살겠느냐?” “살지요.” “왜 사는데?” “예수님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나는 주님의 그 능력을 믿습니다.” “내가 사는 것처럼 너희도 살리라. 내가 첫 열매고 그 다음차례는 너야.” 이게 현실이고 이게 에덴동산의 개시에요. 에덴동산의 능력의 반복이라니까요.
그래서 성경전체의 말씀은 어느 것을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하나를 믿으면 다 연결되어서 같이 믿게 되어 있어요. 시편 105편의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이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살고 그렇게 어려웠어도 그것은 말씀에 담긴 부활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요셉은 하나의 실험실의 쥐처럼 다뤄졌던 겁니다. 나중에 야곱이 죽고 난 뒤에 형들이 걱정이 되어서 “요셉아! 내가 참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내가 다 보상 못하지. 너를 팔고 잡아 죽이려고 했을 때 네가 얼마나 마음 상했겠느냐? 아버지 없다고 이제 형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건데 우리 좀 용서해줘.” 하니까 요셉이 하는 말이, “형님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나를 보낸 것은 내가 아닙니다. 말씀이 나를 보냈습니다. 왜? 막살았던 형님들, 당신 살리기 위해서 나 하나 희생물로 이 땅에 먼저 보내서 나 하나 희생되어서 막 사는 형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능력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능력 있는가, 하고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나타낸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매를 가지고 갈까, 사랑을 가지고 갈까?” 능력도 없으면서 주둥이, 말로만 해가지고 믿는 척 하는 인간들, 그것은 세상에서 남 이용하는 그 버릇을 못 고치고 교회 와서도 또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뭘 해보겠다는 것, 그 사기술이 하나님한테도 통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일만 저지르는 짓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말썽꾼입니다. 우리는 왜 사는지도 몰라요.
어떤 사람이 자살 적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살면 뭐가 달라지나?” 내가 더 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이야기에요. 살면 달라집니다. 이 세상은 내 세상이 아니고 에덴동산이라는 사실, 우리를 죽게 하고 살게 하면서 주의 죽게 하는 능력과 살게 하는 그 능력이 온전히 주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러한 현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기회를 주실 거예요. 그때부터 이 모든 성경말씀은 말이 아니고 우리를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한 말씀의 세계, 그게 전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먼저 있고 나 살기 위해서 말씀이 있고 예수님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범죄인지를 저희가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런 범죄마저도 주께서 회수해 가신다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하는 주님만 자랑하는 성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