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고전 4장 6-8(기록한 말씀)150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6-8절입니다. 신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4:6-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이야기가. 성경이 참 재미있는 것은요, 무조건 아멘을 붙이라고 해서 일단 아멘은 붙였는데 도대체 이게 상식에 안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7절 끝에 보면,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아요. 세상에, 받아놓고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안 받은 것을 자랑한다? 없는데 그걸 자랑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 볼 때 너무나 상식 밖이고 무슨 이야기인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자는 거예요. ‘예수만 믿고 천국이나 가자.’ 성경을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뭔가 비비 꽈배기처럼 세 겹, 네 겹, 꼬아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원천적으로 성경을 볼 때 우리의 몸이 세상 일부로서 몸을 보기 때문에 성경은 그 세상적 몸을 퇴치하기 위해서, 그런 자세로서는 못 온다는 그 퇴치하는 고유의 기능을 성경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 자체가 원천적으로 완전히 바뀌어져야 돼요.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가? 이렇게 바뀌어져야 됩니다. 오늘 본문 해석하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바뀌어져야 됩니다. 뭐냐 하면, 미래가 제공한 것이 현재다. 과거가 누적된 것이 현재가 아니고 미래에서 준 게 현재가 돼요.
파리 잡는 아프리카 밀림의 혓바닥 긴 동물이 있지요. 혓바닥 긴 것 보세요. 긴 혓바닥이 나와서 파리를 낚아채서 자기 입에 집어넣거든요. 입으로 후 불면 긴 혓바닥처럼 나왔다가 다시 말려 들어가는 애들 장난감 있잖아요. 미래에서 먼저 뭔가 혓바닥이 나오고 미래가 현재를 돌돌 감아서 미래 쪽으로 삼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현재라 하는 것은 미래의 끝자락, 미래의 일부에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가 걱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성도적인 생각인 것을 감안할 수 있습니다.
해답은 미래에 있다니까요? 해답은 미래에 있고 그 해답이 확정되었기에 현재도 확정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미래는 모호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다지고 다져서 나가자. 그 확실한 것은 뭐냐? 과거에 내가 경험하고 체험한 것이 확실하다. 그 확실한 것을 가지고 미래를 손에 움켜쥐자는 겁니다. 그게 움켜쥐어집니까? 세월이 흘러도 역시 그 앞에 미래가 또 놓여 있으니까. 돌아보면 자기는 과거 덩어리밖에 없는데. 그래서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기록인 거지요.
그런데 오늘 성경 6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여기서 기록된 말씀이라 하는 것은 확정된 정답의 뭉치거든요. 우리는 과거의 기록이고, 이 기록된 말씀은 미래의 기록이고. 그래서 사도바울과 아볼로는 뭐냐 하면, “너희들은 과거에 속한 인물이지? 나는 미래에 속한 인물이다.”라는 겁니다. 그 과거와 미래가 접해있는 해안선 같은 그것이 바로 현재에요. 그래서 현재라는 것은 없어요. 하나의 선, 만난 접합선이 있기에 현재라는 것은 없어요. 순간순간 현재는 없습니다.
찰나요? 찰나라는 것도 불교에서는 계산해요. 0점 몇 초라는 게 있어요. 하지만 0점 몇 초, 이런 간격이라는 것이 없어요. 질질 미래로 끌려가는 입장에서 무슨 내 소유의 현재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려면 내가 과거의 모든 노력하고 수고한 것이 지금의 나라는 이 생각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것을 내동댕이쳐서 버려야 돼요. 이것 버리지 않으면 제가 장담하건대 평생 눈물 흘릴 거예요. 평생 동안 쓰린 마음고생 다 할 겁니다. 내가 옛날에 잘났는데, 과거에 잘났는데, 뭐 어떻게 잘나갔는데, 지금 왜 이런가, 그렇게 평생 동안 뒤돌아보면서 허송세월을 보낼 겁니다.
그러면 미래에 사는 삶은 뭐냐? ‘뭐지?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런 경험을 해야 되지? 아, 이것도 뭐가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내가 왜 이런 경우를 당해야 되지? 아, 이것도 뭔가 하나님의 준비된 정답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까 제가 제시한 것,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는 그 7절,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이 말은 그냥 보게 되면 이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그래서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라는 말을 고칩시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때처럼 자랑하느냐?” 네가 과거에 속했으면, ‘아, 나는 궁핍해. 나는 결핍되어 있어.’ 이렇게 어떤 결핍을 느끼게 될 것이고 또 좀 여유가 되면 ‘나는 이것을 가졌다.’ 하고 자랑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 본문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미래의 것을 현재의 너에게 다 줬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겁니다. 이미 다 줬어. 그걸 가지고 8절에서는 왕노릇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는 왕이야. 너는 신하도 아니고 졸개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이미 너는 왕이야. 왕인데, 왕이면서 네가 전에 과거 속에 살던 시절처럼 왜 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그게 자랑인줄 알고 그걸 으스대느냐?” 그 말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았으면 새로운 것을 자랑해야지, 미래의 것을 자랑해야지 왜 과거의 것을 자랑하느뇨?” 이걸 지금 질책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지금 과거에 속한 인물이야, 미래에 속한 인물이야?”라는 것을 딱 깨놓고 우리한테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본문보다도 제가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지요? 본문은 모르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설명은 뭐냐 하면, “당신 누구십니까?” 그거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당신은 (미래소년 코난처럼) 미래에서 오신 분입니까? 아니면 과거의 축적된 사람입니까?”라고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 드리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문제, 취직문제, 결혼문제, 어떤 문제, 교회문제, 어떤 모든 문제도 사실은 문제꺼리가 되지를 않는다는 이야기를 사도가 하는 겁니다.
왕인데 왕이 고민하는 것 봤나, 그 말이에요. 따라서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사도바울의 그 취지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느냐를 파악해야 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이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미래의 것을 누리고 살았어요. 미래의 것. 일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즐거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본인이 만들지도 않은 것들 속에 둘러싸여 살았어요. 본인이 애써서 얻지 않은 것들 속에 둘러싸였습니다. 모든 게. 생명나무도 거기 있었고. 분명히 생명나무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들어와서 아담을 미래의 사람이 아니고 지금의 사람으로 변질시켜 놓았어요. “네가 뭘 해봐라. 지금. 네가 뭘 하지 아니하면 미래의 네가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미래는 너 하기 나름이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완전히 속여 버렸습니다. 똑같은 속임수를 우리는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그 속임수가 누적이 되고 자꾸 쌓인 것이 우리의 현재 몸이에요. 우리의 몸.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은 덮어버리고 자꾸 우리는 내가 속아왔던 것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에 제발 나를 좀 누가 좀 속여 줬으면 좋겠다는 몸을 갖고 있어요. “당신은 이렇게 해야 당신의 미래가 펴.”라는 그런 사기를 좀, 그런 사기성이 있는 발언을 내게 해달라는 거예요.
사기당해서 날리고, 보증 섰다 날리고, 이 모든 것이 미래의 꿈이 없이는 그렇게 안 되거든요. 미래를 모르니까, 미래를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사기꾼한테 그렇게 사기를 당하는 겁니다. 저도 결혼 초에 사기 당했어요. 좀 더 좋은 곳에 살려고 하다가 경매 넘어간 집인 줄도 모르고 사기 당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단칸방에서 살아도 그것이 왕노릇한다는 고린도전서 4장 8절을 몰랐지요. 봤다고 해도 그걸 알았겠어요? 성경이 문자로 되어 있는데 본다고 알았겠어요? 예수님 이용해서 더 잘 살아보려고 시도했겠지요. 못 살아도 왕이라는 그런 생각, 미래소년 코난처럼 살지를 못했겠지요.
비밀요원 되어야 됩니다. 하늘에서 파견한 비밀요원.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 뒤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 보면,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쓰레기같이) 되었도다.” 이것을 아주 여유 있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사도바울의 자신감이라 했잖아요. 자신감, 여유. 그 정답은 어디 있느냐? 내가 미래에서 보낸 사람이냐, 아니면 내 힘으로 미래를 일구어 나가야 될 그런 무거운 짐을 진 자냐? 그 차이점이에요.
인생의 모든 차이는 한 방, 딱 그 차이점이에요. 아담의 본성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려나간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당신 말은 간단하네. ‘미래에 속하나, 과거에 속한 인물이냐. 과거는 속임수고 미래는 실재인데 속임수 버리고 실재에 속하면 된다.’ 말은 당신 말이 간단한데 왜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가?” 하는 그 문제가 있겠지요. “왜 그 말을 못 알아듣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지요?”라고 저에게 질문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본인부터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되묻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이 말이 굉장히 간단한 말인데 왜 이 말을 못 알아듣는가 하면, 기록한 말씀 때문에 그래요. 제가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을 못 알아듣는다고 책하지 마시고 모두 다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우리 이 몸,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아무도 이 말, ‘미래에 속했다.’는 이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자기에게 편한 것을 좋아하지 괴로우면서도 자기 정당화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것도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줬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기록된 말씀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현실이 있고, 우리가 여기 있고 천국이 저기 있다면 그 사이에 기록된 말씀이 있다고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우리는 여기 있고 천국은, 하늘나라는 저기 있으니까 그 사이에 뭐가 놓여 있느냐? 그 놓여 있는 것만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천국 갈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뭐가 놓여 있느냐? 모세가 하나님을 단독으로 만났던 기록된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에게 문제가 반 이상은 해결이 된 거예요. 그 기록된 말씀을 존중하면서 그 기록된 말씀대로 지키면 되겠지요. 그걸 지키면 천국 가는 겁니다. 이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뿐만 아니고 오늘날 모든 교인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런 식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데 누가 훼방을 놓느냐 하면, 여기 메시아라고 오신 분, 예수님이 여기에 턱, 하니 등장한 거예요. 등장해서 하시는 말씀이 바리새인들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천국을 간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쪽 길이 아니고 이쪽 길, 내가 곧 길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쪽 지키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거예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행함이 아니고 나를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보세요. 내가 여기 있고 천국은 저기 있는데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지켰잖아요. 지켰을 때에 “그걸 지키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했을 때 “그러면 지키지 않고 이제 예수를 믿으면 되겠네.”라는 것이 이게 안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그 말씀을 지킨 나를 부인하는 조건하에 예수를 믿어야 되거든요. 이게 인간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과 누굴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지킨 것이 이미 파토가 나고 “더 이상 소용없어. 나는 안 돼. 원래 인간은 안 되는 거야.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서 그냥 무너지는 거야.”라고 했을 때 주께서 “나를 믿으라.” 하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38년 된 병자가 38년 동안 있어도 ‘저 호숫가에 들어가서 병이 낫는 것이 나의 미래다.’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그런 미래가 여전히 남아 있을 때 그 미래, 네가 주인공이 되어서 네가 생각하는 미래를 하지 말고 미래에 계시는 분이 그 38년 된 병자를 낚아채면 이미 그 사람은 38년 동안 병든 그 자체가 자기 잘못도 아니고 예수님 일 자체가 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 인생 자체가 여러분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라니까, 이게. 주님의 일이 돼요, 주님의 일이. 미국에서 여기 온 것도 주님의 일이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 된다니까요, 주님의 일.
따라서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일의 주체가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뭐가 날라 가버렸느냐 하면, 내 일이 없어요. 나의 일이 없다고요. 내가 예수 믿을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더 나아가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는 거나 말씀 지키는 거나 둘 다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믿지 않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나를 사용해서 일하심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의 편지는 이런 겁니다. “여기 예수 사람 있어요?”라고 묻는 거예요.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겁니다. “이미 여러분은 왕 맞지요? 그런 거지요? 아니라고요? 내가 잘못 알았나? 내가 엉뚱한 곳에 왔나? 여러분이 왕이 맞지요? 여러분은 세상 것 가지고 자랑할 일이 없지요? 이젠 그런 과거의 산물을 자랑할 필요 없지요? 오직 미래에서 오신 분이 여러분을 낚아챈 그것이 유일한 자랑거리 맞지요? 아니라고요? 내가 편지를 잘못 전달했나?” 지금 사도바울은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는데 자꾸 뭔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우리 몸의 버릇이 뭔가 해야 미래에 그만한 결과가 나온다는 그런 것이 습관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버릇이 되어서 그래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기록된 말씀, 율법을 통해서 천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것은 주님의 쳐놓은 덫에 걸린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과거에 속한 인물이지.”라는 덫에 걸린 겁니다. 그 덫에 걸린 기록이 바로 말씀의 기록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의 기록이에요. 성경 말씀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밖에 안 되더라.’를 보여주는 기록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기록한 거예요. “네가 이런 잘못했지? 저런 잘못도 했지?” 하고 기록해 놓는 겁니다.
그 기록이 완전히 응축이 되고 압축이 되어서 하나로 뭉쳐지게 되면 그게 뭐냐? 십자가의 피 흘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공식이 나오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시면 구원 받습니다.” 이런 공식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공식을 오해해서 예수의 피를 찍어 바르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고 그 예수님의 피 흘림의 이유가 바로 인간이 구원이 안 되는 쪽으로 자꾸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의 응축, 압축입니다.
참깨를 강한 압력으로 눌러버리면 밑에서 참기름 나오지요. 인간의 죄를 압축해 버리면 피가 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내가 피를 흘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너는 행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느냐? 이 나쁜 놈들아!” 하고 외치고 있는 거예요. ‘놈’이라는 말은 성경에 안 나오지만. 예, 그보다 더 심한 말이 나오지만.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렇게 피를 흘리는데도 아직도 행하느냐?”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말씀 지켜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의롭게 될 것 같으면 아예 주님께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그 참기름을 빼지를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그 피를 흘리지를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해해서, 예수님의 피를 고난으로 이해해가지고 “그래, 예수님이 피를 흘렸으니까 우리는 고난 받아야지.”라고 자기를 자해하고 자학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연말정산을 해도 되는데 안했습니다.”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요. 제 느낌은 그것도 일종의 자해 같아요. 자학이에요. “술 먹고 싶은데 술 끊었습니다.” 그러면 술 먹는 것이 사라집니까? 뭔가 응축되어 있다가 진짜 뭔가 계기가 되어서 술 안 먹던 것 한꺼번에 다 먹을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는데요. 주님께서 십자가 졌다는 것은 내가 너를 안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아니까 나대지 말라는 거지요. “제발 교회 와서 나대지 마라. 내가 너를 알거든.”
제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목사님, 사람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거든요. 제가 사람 무시하는 것은요, 이것은 무시하는 것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성경 자체가 신성한 것과 불결한 것을 처음부터 나눴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고 보니까 성급하게 신약성경에 들어가서 로마서 10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 것부터 막 덤벼드는데 구약의 레위기같은 성경은 왜 안봅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안 보지요.
신성한 것과 불결한 것을 나누었다는 이 말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그 무엇도 하나님 보시기에 다 더럽기 짝이 없다는 거예요. 불결한 거예요. 아니 인간 자체가 더러워요. 인간 자체가 더러워요. 설교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나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사람으로 바뀌면 끝난다 했지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도 전부 다 미래와 연관되어 있는, 미래에서 나온 혓바닥과 연관되어 있는, 미래가 와서 우리를 돌돌 말아서 끌어 잡아당기면, ‘아, 옛날에 있었던 그 일도 다 미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해야 되었었고 그 일이 일어나야 했구나.’ 깨닫게 되지요.
일단 그것만 알면 기분 좋은데 갑자기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신성한 것과 불결한 것을 언급을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우리는 불결한 인간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미래의 사람이 되세요.” 그 다음에 방금 이야기한 “불결한 사람입니다.” 하고 둘을 엮어보세요. 해답 나옵니다. “더러워서 너한테 일 안 시킨다. 더러워서.” 그런데 그 이야기하면 “우리가 어째서 더럽습니까? 우리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하고 기록된 말씀을 지키려고 하겠지요. 기록된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서 드디어 죄, ‘왜 우리가 불결한지, 왜 우리가 더러운 인간인지.’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욱더 짓게 하려 함이다.”(롬 5:20) 로마서 7장에서는 아주 더 강하게 이야기해요. 로마서 7장 9절에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쉽게 말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을 지키려고 했더니만 그 살기 위해서 했던 그 말씀이 도리어 나를 죽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이제 머리 좀 써야 됩니다. 기록된 말씀이 없더라도 죽게 되어 있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한 번도 교회 안 나오고 한 번도 성경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 사람의 피부는 쭈글쭈글해지고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늙어가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죽기 전에 구원 받으려고 교회를 다니거든요.
사람이 끝이 모호하게 되면 그 끝을 하나님과 엮어보려고 시도하게 돼요. 자기 끝을 모르게 되면. 특히 노인 분들, 치매 걸린 분들에게 마지막 전도하면서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요. 과거의 인물이죠. 이제 우리가 응용해 봅시다. 인간세계에서 주고받는 모든 의사소통이 전부 다 과거의 이야기에요. “저, 어르신! 자식 키운다고 애 많이 썼지요?” 과거. “지난 번 놀려가셨을 때는 그렇게 정정하시더니만.” 과거지요. 전부 다 과거예요. “앞으로 어르신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네요.” 과거지요. 그 인식 자체가.
그런데 과거의 말을 사용안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과거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살날은 얼마 안 남았는데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역시 방향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 쪽으로 가지요. “이 밤의 끝을 잡고” 라는 노래도 있잖아요. “이 끝을 하나님과 한 번 연결시켜 보시지요.” 과거. “그래, 지금껏 하나님을 안 믿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믿을게.” 역시 과거. 구원 받습니까? “이제 어르신의 마지막이 되었으니 예수 믿으셔야지요.” “예수 믿습니다.” 과거지요. 그래서 구원받습니까? 안되잖아요.
왜냐하면 토대 자체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성향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과거마저도 전부 다 미래가 되게 하는 그런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어르신이 진짜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고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성령이 와서 순간적으로, 참 그런 기적이 오면 좋은데요, 완전히 이건 로또인데, 순간적으로 그런 기적을 받아가지고 내가 예수 안 믿던 시절도 예수 안 믿어야 하기 때문에 안 믿었다는 것을 미래의 관점에서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아, 이거 얼마나 좋을까요? 그 순간에 빵 터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빵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어떻게 확인하는가? 또 물어보는 겁니다. “어르신, 과거에 애들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지요?” 어르신이 하는 말이, “애 키우는 것도 다 죄지요.” 비로소 의사소통이 뭔가 되거든요. “참 정정하셨는데요.” “건강한 것도 은혜지요. 제가 운동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게 의사소통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더라도 왕노릇 하고 있는 겁니다. “자랑할 것은 주님밖에 없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거든요.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그런 대화가 가능한 집단입니까?”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낸 겁니다.
성경이 들어보면 참 간단한데 왜 성경이 이렇게 두꺼운가? 두껍다고 불만이 많지요. 왜 두꺼운가? 두꺼운 이유는 그 사이에 기록된 말씀 때문에 두꺼운데 왜 기록된 말씀이 이렇게 두껍습니까? 그만큼 인간이 지은 죄가 다양해요. 아주 온갖 종류의 죄가 다 있는데 그 죄가 뭐냐 하면, 말씀 지켜서 구원 받겠다는 죄가 주종을 이룹니다. 말씀 지켜서 구원 받겠다는 것. 이 성경말씀은 우리를, 이왕 죽어가는 인간을 죽게 하는 일이거든요. 죽게 하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기록된 말씀을 지킨다든지 기록된 말씀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를 못합니다.
왜? 우리에게 공감은 되지만 구원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래서 기록된 말씀이 죄 덩어리입니다. 이야기 쉽게 할게요. 쉽게 갑니다. 기록된 말씀이 죄 덩어리거든요. 죄 덩어리인데 이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다른 노선을 끄집어내버려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울 인간이 없는데 율법 외에 다른 의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기록된 말씀을 줘서 너나 나나, 바리새인이나 나나 똑같다. 분명히 이야기해요. 해 놓고 거기에 공감을 해야 돼요. ‘그래, 인간인 나도 말씀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시도했다. 그런 것은 다 헛방이다.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인간이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이 시도 자체가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그걸 알아야 되고 그 외에 다른 의가 눈에 보여야 됩니다.
그것이 로마서 3장의 ‘율법 외에 한 의’인데 이 말을 교인들에게 많이 했거든요. 하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율법 외에 다른 한 의로 듣는 것이 율법 외에 다른 법으로 들어요. 대략난감. 율법 말고 또 다른 법을 준 게 아니고 율법 외에 다른 의를 줬는데 그 의 앞에서 우리의 손은 때찌, 손을 떼라는 말이지요. 손을 떼야 되는데 인간은 버릇이 과거에서 자기가 한 그 결실로서 구원도 따내려고 시도하다 보니까 손을 떼지를 못하는 거예요. 손목을 자르든지 해야지 하여튼, 손을 떼지를 못해요. 내가 열심히 하는 그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거예요. 미치겠어요, 정말. “그러면 누굴 믿습니까?” “예수 믿습니다.”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믿지요.” 결국 돌아오는 것은 그것만 돌아와요.
기록된 말씀 속에 이게 있어요. 기록된 말씀이라는 그것을 신명기 31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록된 말씀을 차곡차곡 기록한 이유는 심지어 너희들이 멸망하는 것도 기록하는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증거 되기 위함이다. 뭘 증거 하기 위함입니까? 기록된 말씀, 너희가 죄 지은 그 일기장을 어디다 두느냐 하면, 언약궤 옆에다가 둬요. 신명기 31장 26절에 보면,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그러면 율법책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까 제가 말한 대로 인간의 죄지은 기록이 들어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 담은 항아리, 그냥 멀쩡한 돌 판이 아니고 깨지고 나서 다시 깎아 새긴 돌판, 하나님과 너 사이의 계약이 끊어졌던 그 일, 내내 하나님을 원망했던 그 증거인 만나가 든 항아리, “모세 네가 뭔데?” 하고 대들다가 아론의 이름을 새긴 지팡이가 싹이 나고 다른 지팡이에는 싹이 나지 않은 그 희한한 일, 그런 것이 기록된 말씀과 더불어서 언약궤 안에, 언약궤 있는 그 장소에 같이 두게 해요. 거기 두게 하고 거기서 누굴 만나는가? 거기서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위반이 없이는 천국에 못 간다는 그 말이에요. 위반자가 되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할 때 비로소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내 자랑하는 곳이 아니고 주님자랑만 늘어놓는 세계가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사람은 자기가 문을 열지 않는 문은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으로 문을 열 수 있을 경우에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예요. 왜? 그 문 안의 세계가 내가 문을 열었다는 자기의 능력이, 의미가 유지가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지요?
사람은 천국의 문도 본인이 열고 들어갔다는 의미에서의 그런 천국을 원하고 있어요. 만약에 자기 힘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문의 천국에 가버리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천국에서 쪼다가 되어버립니다. 바보가 되어버려요. “너 여기 왜 왔지?” “음, 여기 천국에 왔네.” “네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왔지?” “그냥 왔어.” “아이고, 이 쪼다! 바보야.” 이런 소리 듣는 것을 우리 일상에서는 참을 수가 없어요. 뭐든지 내 힘으로,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들어간 그 세계는 내가 문을 열고 내 힘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영원토록 기념이 되고 영광이 되고 그게 의미가 되는 세계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살 재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런 데가 아니에요.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천국의 문으로 사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인데 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 내용을 가지고 카프카라는 독일의 단편 소설가는 <법 앞에서>라는 유명한 소설을 썼어요. 문은 있는데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문은 있는데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들어가고 난 뒤에 나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모세가 놋 뱀을 들었잖아요. 모세의 조건이 뭐냐 하면, 고개를 들고 놋 뱀을 쳐다보면 누구든지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안 쳐다본 사람들이 있어요. 왜 안쳐다봤게요? 사람이 본인에게 의미가 있는 행동만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본인이 의미를 찾지 못하는 행동을 해버리면 그 행동이 끝나고 난 뒤의 상황은 자기 세계가 아니고 자기에게 명령한 그 분의 세계가 되기 때문에 자기가 참을 수가 없어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천국을 가요? 재미없어 못 갑니다. 대놓고 바보 되는 꼴을 봐야 되겠어요? 교회에 오세요. 왜? 그래야 바보 됩니다. 복음을 들으세요. 그래야 바보가 되고 내가 불결하고 인간 가치도 없는 존재인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 버렸어요. 지옥을 가려고 전세버스를 깔아놨어요. 그게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이 있는데 자기도 안 들어가고 들어간 사람도 막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천국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율법 외에, 행하지도 않았는데 의로운 나라에 가는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바리새인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도 아무도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그 문 앞에서 베드로는 그 문을 세 번씩이나 저주해버렸지요.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문이 있어도, 문이 활짝 열려 있어도 들어갈 줄을 모르는 우리의 모습, 이게 바로 과거에 했던 그 행세 때문에, 미래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그 과거의 행세 때문에 그 몸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까 자기한테 안 맞는 세계거든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하늘나라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정말 강도되어서 십자가에 한 번 달려봐야 정신 차리겠습니까? 처자식이 여기 있고 “여보! 왜 당신이 강도질을 했어?” 이런 소리를 들어 봐야, 아…….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한 그 말이 그 때서야 감사하게 들릴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기억에 불과하다고. 인간의 기록이에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눈에 띄는 것은 자기 몸의 기록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 때문에 정작 주님의 기록 안에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들어 있다.’는 기록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던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하지요. 주의 법은 폭력이거든요. 주께서는 폭력적으로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십니다. 폭력이 되게 되면 인간은 거기에 저항하지요. 저항하다가 힘에 부치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야곱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말 안 듣는 야곱, 그냥 어퍼컷으로 쳐버리니까 야곱이 주저앉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가 떨어져 나오지요. 늘 주께서는 과거의 인물은 없애고 미래의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것을 저는 부활의 반복이라 합니다.
예수님 혼자 부활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날마다 부활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삭제시키고, 과거의 기록을 삭제시키고 과거의 기록을 미래에 있어야 될, 미래에 반드시 필요했던 기록으로 바꾸어놓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일도 미래네? 그것은 몰라요. 내일 되어봐야 알거든요. 따라서 내일 되어봐야 알기 때문에 이것은 내일까지 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여튼 오늘까지가 주어진 미래의 전부입니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미래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미래로 넘어갈 때 우리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왔던 그것도 과거의 것이 되어서 이걸 죽여 버리지요. 죽여 버리고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내일 되면 또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설명하는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복잡하게 설명하는데. 열왕기하 18장 4절에 보면 놋 뱀도 ‘느후스단’이라 해서 하나의 놋 조각이 되고 말아요. 이게 뭐냐 하면, 그렇게 구원했던 그 놋뱀도 열왕기하 18장 4절에 와서는 사람들이 그걸 음란하게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 한 거예요. 사람이 과거에 은혜 받았다, 참 좋았다, 했던 그것도 다시 지금이 되어버리면 과거의 것이 되어서 과거의 것을 음란하게 신봉하는 우상숭배자로 전락해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과거를 미래로 바꾸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십자가 피를 보고 죄를 깨닫고 부활을 보고 ‘다시 주께서는 미래를 위해서 나를 마련했구나.’ 그 생각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들게 할 때 그것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왕노릇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드온이 사사기 8장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기드온이 입었던 옷을 사람들이 섬기기 시작했어요. “야, 우리의 영웅이다. 재수 좋은 거다. 이것만 있으면 구원된다.” 우리는 자꾸 미래의 것을 과거의 것으로 전환시켜서 내 것 만들려는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시도 주님께서 관여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왕노릇 못하지요. “그러면 매일 같이 해야 됩니까?” 이렇게 되면 또 행함이 되니까 매일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내일 되면 앞당겨서 다시 다 해버려요. 더 쉽게 해서 주님이 알아서 다 해버려요. 주님이 모든 것을 다 해버려요.
CF에 하이카 광고 보게 되면, 어른인체 하면서 여자 친구 차에 태우고 가는데 그만 후진하다가 뒤차를 박았던 거예요. 그 때 운전석에서 어른이라고 여겼던 그 애가 양복 입은 체로 애로 변해서 “엄마, 나 어떻게?” 하는 이런 광고가 있어요. 그 때 하이카가 와서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아무리 잘난 인간도 차사고 나면 어린애 되어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잖아요. 우리는 내일 되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애 됩니다. 진짜 어린애 같은 신앙 아니면 안 되지요. 이렇게 하세요.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책임지실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뭐냐? 율법 외에 한 의가, 그 의가 의 자체의 자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일찍부터 태어나게 하셨고 사용하신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오는, 세상 모든 움직임은 예수님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 나에게 일어나는, 내 신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 본인의 자존심을 걸고 일어나는 일이기에 우리는 율법 외에 한 의, 그것만 든든히 의지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간단한 문제인데, 어렵지 않는데, 내가 살아가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주님의 자존심을 위해서 있어야 될 일들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마치 내일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했습니다. 나를 주인공 만들지 않는 나라에 가면서 우리는 아직도 착각하기를 내가 홀로 주인공인양 행세하고 으스대면서 감히 천국을 가려는 이 불결한 존재, 주께서 십자가 피로 뜯어고쳐 주시고 미래의 사람 만들어주시니 이제는 공짜로 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깊이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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