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측량 개시(겔40;1-4) 1501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 16. 18:03

2015-01-14 20:38:51 조회 : 37         
   측량개시 150114 이름 : 이근호   

측량개시 (에스겔 40:1-4)

음성             동영상

 이근호 15-01-14 21:18 

측량 개시

2015년 1월 14일                               본문 말씀: 에스겔 40:1-4


(40:1)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40: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40: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40: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

예루살렘의 성전이 멸망당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십니다. 거기서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그 성전이 사람에 의해서 지어지나싶었지만 천사가 측량하는 게 보였습니다. 이로서 미래의 성전은 비-실체적인 성전입니다. 하지만 치수로 측량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 세계의 실체적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늘의 세계와 땅의 양면성을 다 보여줄 인물이 바로 인자(人子)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새성전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오실 메시야의 지상 생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늘에서 오셨지만 사람들 보기에 일반 사람과 조금도 차이남이 없습니다. 양으로는 일개 한 사람이지만 질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성전 양식으로 기능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원래 성전이 전쟁의 기념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22:7-10에 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은 주변에 포진 민족들과 전쟁을 벌려서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 승리를 일구어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마무리는 못되어 평화의 시기는 아들 솔로몬왕 때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성전이란 ‘평정’, 혹은 더 이상 전쟁 치를 적이 없을 경우, 모든 사태가 ‘마무리’ 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실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마저 에스겔 때에 와서 멸망하고 말았고 성전도 불태 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의 적의 속성이 그만큼 깊어진 것입니다. 국가 대 국가로 아군과 적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지 아니 사는지를 결판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인자 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되는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멸망당한 성전의 실체성에 해답이 있습니다. 에스겔 10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로부터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18절) 이것은 곧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더 이상 하나님께서 합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들이 지은 성전에는 에스겔 47장처럼 생명수가 계속해서 주변을 차고 넘치도록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영생의 물이 계속 나오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때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실체있는 성전에서 예배 드려야 하느냐를 묻습니다.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 성전이나 아니면 사마리아 민족들처럼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이냐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실체적 성전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몸에 쏟아질 때 비로소 그 몸에서 생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비-실체적 성전이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될 때는 생명수는 차고 넘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보시기에 왜 인간들의 실체적 성전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율법 이해에 있어 자기네들의 행함으로 완전함과 온전함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10계명을 지켜서 온전함과 선함을 쌓아왔다고 자부했습니다. 물론 그 결과로 부자가 되었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돈부터 지적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팔고 빈털터리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부자청년은 근심하다가 자신의 온전함을 지키기 위해 평소에 죄를 피하듯이 예수님을 피하고 말았습니다. 즉 자기 온전함을 유지하려는 그것이 예수님이 싸우려고 했던 저이 됩니다.

천사가 새성전의 치수를 재고 측량하는 것은 모든 성전 부속 건물의 규격됨이 철저하게 이 성전으로 율법을 완수한 한 분에 통일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통일은 곧 이 성전으로 혜택입을 모든 자들이 하나같이 동일한 질로 통일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치수는 새성전의 성도의 양적 숫자가 아니라 질적 합치를 말합니다.

오직 한 분과의 연결이 완벽하게 구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통일이 신약에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이 땅의 삶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 생애의 결정되는 시점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속성이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22:42에 보면,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뜻이란 자신의 완벽한 의에 합한 대우를 받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그 의로움이 죄로 규정받아 아버지로부터 저주받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이 실체적 성전은 신봉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결별하고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시고 그 기념으로 하늘에 성전을 완수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성전인 이유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성도에게 작용하는 새성전의 질입니다.

요한계시록 6:9-10에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합당한 분을 섬기지만 세상은 성도를 가만두지 않고 죄인으로 몰아붙일 겁니다. 스데반집사에게 했듯이 말입니다. 성도된 자는 이 억울함과 분통을 예수님의 세계로 넘길 기회를 가진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온전함을 포기하고 빠져나간 자리에 예수님의 은혜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마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한 수모는 하나님의 구원된 자에게 주신 축복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에스겔 40:1-4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찌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찌어다 하더라”



본문에서 성전을 척량을 하는데요. 원래 척량하는 것은 실체가 있어가지고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적용하는 형틀 같은 것 정확한 규격, 이런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척량을 합니다. 그런데 그 척량하는 분이 누구냐 하면, 사람이 아니고 이것은 천사가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천사가 삼줄로 척량을 합니다. 그걸 척량하는 내용을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자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척량한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나 통할 일입니다. 척량은 실체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 척량을 누가 하느냐 천사가 한다는 것은 천사는 인간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 없는 세계에 속합니다. 실체 없는 분이 실체 있는 이 땅에서의 통하는 그런 척량법이라든지 척량 치수를 알려준다는 것은 그걸 누구한테 이야기하느냐, 인자라고 하거든요. 에스겔입니다. 에스겔 호칭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에스겔이 장차 오실 인자되시는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뜻은 뭐냐, 이 성전은 실체가 없으면서 그 성전이 있어야 될 내용에 대해서는 인간세계와 접해져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접착되어 있는 이런 방식은 인자, 예수, 사람의 아들로 오신 그 분이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에게 속한 분과 일치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척량하는 모든 치수는 뭐냐 이게 실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규격품처럼 척량을 한다는 것은 딱 정해진 거거든요. 어떤 것을 치수를 잰다는 것은 그것은 정품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부속품의 치수를 잰다는 것은 그 부속품을 통해서 만들어질 생산물이 규격화되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치수에 딱 완전하게 맞게끔 완제품으로 정품으로 거기서 생산되는 거죠.



예수님의 이 공생애가 예수님이 장차 오실 인자로 오신 그 분의 모든 행동 하나는 이렇게 치수로 이미 정해진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완료 적으로 이미 정해진 행위들로 그렇게 기능으로 그런 활동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정해졌다는 말은 그 목적하는 바가 확실하게 확정돼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말 하나 하나가 무심코 그냥 낭비나 과도한 게 전혀 없듯이 필요할 적재적소에 꼭 필요했기에 때가 되매 행동 하나 하시고 또 때가 되매 행동하시고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항상 모든 행동에 정확하게 나서시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결과가 뭐냐, 인간세계에서는 실체 없는 성전이 되면서, 그럼 실체가 없다면 성전 자체가 없는 게 아니냐, 그런데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에스겔 성전 다 짓고 난 뒤에 나오는 47장에 보면 거기서 물이 나와요. 그 물이 나오는데 이건 에덴동산에처럼 그 물이 온 사방에 흐르면서 생명을 공급하는 물이 되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나무가 야자수처럼 풍성하게 있는 생명수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에스겔을 이 40장과 48장 전체 내용을 이것을 근거로서 요한복음 4장에서 어떤 여인을 하나 만납니다.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지요. 그 여인을 만나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니 몸에서 생수가 나오리라, 했습니다. 생수가 나오려면 먼저 뭐가 되느냐, 성전이 있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전에서 제사와 예배를 드려야 그 결과물로 그 결실물로 생수가 나오는 것으로 스토리가 그렇게 전개되지요.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되고 우리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에서 예배 드려야 되는데 어느 쪽에서 예배를 드리면 내 배에서 생수가 나올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까? 다시는 물 뜨러 오지 않게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실체 없는 성전이지요. 성전을 척량했다는 말은 척량하는 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이 성전을 만들었다는 거거든요. 만든 사람이 척량하는 거예요. 성전 만들어 놓고 그 척량대로 그 안에서 기능이 움직여지는 겁니다. 고 척량의 치수대로.



거기에 드리는 모든 제사는 이 척량했던 것과 과부하 걸리지 않고 “아이고, 이거 어찌 양을 잡는데 크기가 너무 작네. 이거 누가 만들었어? 작네.” 이렇게 객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분명하게 하나님이 지시한 그 치수 그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맞게끔 확정된 기능을 하실 분이 바로 인자로 오실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생수가 나온다는 말은 사마리아 여인이 어느 곳에서 어느 실체가 있는 성전, 예루살렘 실체가 있는 성전인지 그리심산 성전인지 이렇게 물으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니 쪽에서 뭘 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주님의 피가 니한테 들어오면 너에게서 물이 나오는 영원한 생수가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피가.



주님의 피라 하는 것은 제사가 완료된 다음에 나온 피거든요. 그 피는 천사가 척량했던 그 성전의 죽이게 딱 딱 맞게끔 해야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받아주시는 피를 생산해 내고 그렇게 될 때에 그 효과로서 자기 백성에게 주께서 택한 백성에게 영원한 성령과 그리고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생명수가 우리에게 철철 넘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자에서 이루는 성전, 이 성전은 처음부터 왜 성전이 있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기겠지요. 원래 에스겔40장에 나오는 오늘 본문이지만 에스겔10장에 보게 되면 에스겔 1장부터 그렇습니다. 에스겔1장부터 천사가 나대기 시작합니다. 천사가 좀 설쳐요. 요번에 수련회 때 자진해서 설친 분 계시잖아요. 좀 설치겠습니다, 해가지고 설치더니만 화면 그렇게 잘 나왔지요. 놀랬잖아요.



1장부터 천사가 와서 설친다는 말은 인간의 할 도리는 끝났다는 겁니다. 인간의 할 도리가 끝났어요. 그래서 천사가 어디를 집중으로 파견근무 하느냐 하면, 이미 파괴되어버린 지성소에 있다가, 지성소에 있던 천사가 이제 문밖으로 나와 버려요. 이제 이 실체적 성전은 끝났다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 끝났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전이라는 것이 언제 만들어졌는가, 그것은 역대상22장 8절 같은데 보면 또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이 처음에 성전을 제안할 때는요, 전쟁할 때 “전쟁에 승리하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하는 기념으로 그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 때문에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하나님을 기념하는 독립기념관 같은 그런 곳에 하나님을 모셔서 대대로 하나님만이 우리 편이 될 때 우리는 승리한다. 그런 기념을 드리고 싶어서 성전을 세우라고 한 거예요.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필히 뭐냐 하면, “전쟁을 해서 승리를 했습니다.” 라는 그런 사건적인 결과가 있을 때, 그 시점에 성전에 세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전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다시피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지요. 다윗 시대 때는 다윗이 있는 이스라엘 빼놓고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전부 다 패자가 되고 다윗은 승자가 되어서 승자된 자의 손에 의해서 그것을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기를 역대상 22장에 보면 너를 피를 많이 흘려가지고 피까지 완전히 완료된 상태, 그러니까 니말고 니 다음 차기 솔로몬에 있어서의 성전을 받겠다.



그러면 모든 것이 평정이 된 거죠. 이제 적이 없지요. 그런데 에스겔10장에 보면 그 성전이 불타버리고 이제는 깨집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은 전쟁이 있을 때 만든다는데 다윗에 의해서. 그러면 에스겔40장 오늘 본문에서 무슨 전쟁이 있었는가, 에스겔40장 이전에 39장, 38장, 37장 죽 보면, 이방나라가 멸망하는 대목이 나와요.



전에는 고 이스라엘 근방에 있는 민족들을 다윗이 다스릴 때 “하나님이여, 이제 평정했으니까 우리 예루살렘에다가 짓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고 에스겔40장 되면 이것은 범위가 넓어요. 온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다 평정하고 승리했다는 기념으로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는데 그 성전이 실체적인 입장에서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땅 어떤 산이지만, 이것이 천사가 척량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은 뭐냐 하면,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그것이 건립이 되게 돼있어요. 하늘나라의.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은 그 다윗 당시에는 다윗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서 주변나라가 껍죽대면서 언약이 없으면서 그냥 그들의 칼이나 믿고 말이지요, 그들의 활이나 믿으면서 여호와 있는 것을 감히 공격했다가 다윗한테 혼나지요. 혼나고 솔로몬도 평정해 버리고.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이 승리했다 되는데. 그렇게 했던 이스라엘 성전마저 날아갔다는 말은 패배자 속에 포함되고 예루살렘도 멸망해버리고 이스라엘도 멸망한 이 입장에서 성전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과 무엇의 싸움이었던가 하는 거예요.



전에는 그 이스라엘과 주변나라의 싸움이라면 이제는 온 지구상, 그 패배자 속에 누가 있다? 이스라엘도 포함돼 있다면 도대체 무엇과 무엇의 싸움이냐는 말이죠. 무엇과 무엇의 싸움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승리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죄와 싸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승리한 기념으로 하늘나라에 성전이 세워지는 겁니다. 어린양의 기념으로.



자,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게 그러면 의는 뭐고 죄는 뭐냐 하는 거죠. 의는 뭐고, 죄는 뭐냐. 그것은 우리가 패배자 속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양심에서 끄집어내면 안돼요. 그것도 패배자 속에 잘못된 죄, 잘못된 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한테 패배자 소리를 들어서 내 중심의 실체적인 성전, 쉽게 말해서 내가 다니는 교회를 말합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결코 영원한 성전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목사님이 지금 이 본문 준비하고 있는데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질문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성만찬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어떤 것으로 예언되어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성만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고 성만찬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에서 어떻게 예언되어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답변은 이렇습니다.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성만찬은 뭐냐 하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의 역사 속에 반복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의 손때가 묻을 수가 있어요. 인간이 이루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구약부터 예언이 안 되어 있어요. 왜? 인간의 행함은 모두 다 하나님 전쟁에서 예수님 전쟁에서 죄로서 규정 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규정 받아야 될 거예요.



구약에서 예언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은 예언한 적이 없습니다. 성만찬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에요. 오히려 진정한 교회는 계시가 완료된 이후에는 성만찬을 잡아먹어야 돼요. 성만찬이 없어져야 돼요. 세례식이고 주가 올 때까지도 날아가 버려야 돼요. 모든 말씀의 반복은 인간의 힘으로 반복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불가능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유가 이래요.



한 가지 예로 들면 마태복음 19장에서는 부자청년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예수님,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왔어요.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왔고 ‘자기가 부자 된 것은 의로움에 대한 보상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왔다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니 돈을 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되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같으면 주님 따라 가겠는데 그 청년은 근심이 되었어요. 왜 그걸 못 버리느냐 말이죠. 왜?



그것은 본인이 실체고 본인을 기념하는 내가 이렇게 착한 일 했습니다. 자기 착함을 기념하는 쪽으로 성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자기 완전함을 없애고 그걸 포기하고 주님 따라가기에는 자기의 완전함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게 바로 마지막 성전의 적이 되는 겁니다.



다윗시대 때는 다윗에 있는 하나님의 다윗언약을 주변의 나라가 모압, 암몬, 블레셋 모두 해가지고 불러서 깡그리 심판했다면, 마지막 때는 예수님의 공로 값없는 은혜만 구원 받는데 대해서 거기에 시비 거는 모든 것은 다 평정이 되고 그것은 죄로서 마감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하는데 거기에 천사가 와서 도와줍니다. 그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도했던지 주님의 흘리신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며 피 방울 같이 되었다고 되어있어요. 이 때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뜻은 뭐냐, 완전한 거예요.



완전한 그 완전함을 아버지 뜻은 뭐냐, 그 완전함을 죄에 넘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하지만 억울함을 당해라, 억울함을. 누명 씌워져서 억울함을 당하는 거예요. “내가 억울해도 괜찮아.” 라는 영역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은 왜 자살하는지 분통 나서 자살하거든요. 왜 하느냐 이 억울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가룟유다 같은 사람들. 이 분통함을. 아,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어.



이 괴로움 그것이 분명히 내 자랑이 될 수 있어요. 나의 의로움입니다. 나의 완전함이에요. 하지만 성전은 이 땅의 인간들의 의로움이 채워지는 게 아니고 인간들의 실체 땅에서 미움 받는 의로움 또는 그걸 안 나눠주는 의로움이 이쪽의 아버지 뜻으로 넘어가야 되는 거예요. 이쪽에서는 그 의로움이 죄로 규정되지요. 그러니 너무 억울하지요.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기가 유지하려고 한 겁니다.



요게 요한계시록6장9절에 보게 되면 기도가 나오는데 이렇게 돼 있어요.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 땅에서 분명히 복음대로 따랐는데 세상이 그걸 모독하고 거기다가 억울하게 죄로 규정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의 의로운 만큼 대가 받는 걸 포기를 하고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상과 복락을 누리는 다른 영역이 있어야 돼요.



그게 영역이 없는 채로 자기 의로움을 유지한다면 마지막에 자살로 끝납니다. 자살로 끝나요. 분통 터트립니다. “참, 더러운 세상, 나를 안 알아주고.” 이러거든요. 예수님이 분명히 의로웠습니다. 그러나 의롭다하고 유지하는 것은 내 뜻이고 그것이 이 땅에서 죄로 규정되는 것은 아버지 뜻이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말보다도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이런 경우를 당해봐야 돼요. 젊은 사람들은 없겠지만 연세 많은 사람들은 사기 당해봤거든요.



세상에 사기를 당할 때 여러분은 어떤 심정입니까? 설교시간에 물어볼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서 셋방이 나왔는데 셋방 나온 사람이 이사 갈 때 분명히 자기가 쓴 전기세, 물세는 25,000원 주고 가야 되는데 주인 없이 홀랑 가서 25,000원 날아갔을 때 여러분, 죽고 싶지 않던가요? 25,000원. 25,000원 가지고 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2억5천이라면. 진짜 죽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찾아와서 생수가 나온다 할 때 사마리아 여인은 그저 주께서 자기를 이용한 것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 사마리아여인은 그때부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 실체적인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다른 영역이 자신의 본래 고향으로 진짜 가야될 곳으로 있는 이상은 수모를 당하게 돼있습니다. 다 미움을 당하게 돼있어요. 그게 성도의 기도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지가 하는 대로 잘 될 때 기도가 아니고 분명히 바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을 때 그 원통함과 분통함이 십자가에 동참한 고난입니다. 그럴 때 주님도 나보다 더 심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참여하는 기회에요. 기회가 유일하게 참여하는 기회에요.



천사가 척량한 그 성전은 주님의 공생애입니다. 공생애 가면서 예수님 혼자 전쟁 중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게 의다. 사두개인들은 저게 의다. 주님은 그게 아니야. 내가 의야. 내가 하는 게 의로움이야. 간음한 여자에게 돌로 쳐야 된다. 아니야, 그게 의가 아니야. 그게 기껏 너희들이 신체적으로 아는 의의 전부거든. 신체적으로.



제가 수련회할 때 했잖아요. 인간의 율법은 내가 나 되기를 실패하게 만든다고. 1로 된 것을 0으로 지워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1이 계속 유지되면서 천국가기를 원하지 꼭 이스마엘 같아요. 이삭이 아니고. 내가 왜 죽어? 이 착한 내가 왜 죽어? 이 부자가 왜 내가 거지가 되어 주님을 따라?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내가 했던 것은 내 영광은 내가 고스란히 내가 다 찾아먹을 거야. 그것이 바로 옛날에는 다윗 주변에 있던 이방나라의 사고방식이었고 그리고 이스라엘 때 와서 에스겔에 와서 에스겔이 갖고 있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 성전, 우리는 할 도리 율법대로 다했다는 그 것. 그래서 나온 것이 우리의 잘남이고 거룩함이라는 그 것.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성전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에스겔47장에서는 천사가 만든 완전한 성전에서는 물이 나와요. 사람을 살린다고요. 죽어가는 것을 살린다고요. 지가 착해봐야 이 세상이 착해봐야 지만 살잖아요. 지만 살리지요.



여기 카페 빈이 있는데 카페 빈에 가가지고 커피 마신다고 내가 커피마시는 순간 이 팔공산 쪽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갑자기 커피 맛이 돕니까?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럴 리 없지요. 자기가 한 것만 자기가 받는 그 것. 그게 율법시대에요. 그 율법시대는 그 율법적인 것은 성전 자체가 이미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중구난방이 돼가지고 온전한 의를 거기서 끄집어낼 수 없고 하나님이 그걸 불사르겠다는 말은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사기에 보면 율법 지켜가지고 12지파가 11지파 되었습니다. 분명히 율법대로 했는데 한 지파가 날아가 버렸어요. 율법대로 했는데. 저희들도 율법대로 했는데 이상하게 왜 지파 하나가 날아가지? 뭐가 이상해. 그 빠진 지파가 문제가 아니라 빠진 지파뿐만 아니고 베냐민지파 뿐만 아니고 나머지 12지파 몽땅 율법과 상관없는 행동을 해놓고 자기들이 율법대로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 12지파를 몽땅 부정하기 위해서 모압 여인 룻을 불러가지고 바로 레위지파 중심체제가 유다지파 중심으로 바뀌는 그 중간노선에 이방 여인 룻이 거기에 개입이 됩니다. 외부인이에요. 그러니까 베트남여자입니다. 날아온 돌이 박힌 돌 다 빼버려요.



다윗이 태어났다는 말은 다윗 속에 있는 어떤 새로운 질이 태어나는 거예요. 새로운 질. 예수님이 갖고 있던 새로운 성전, 새로운 물이 나오는 성전의 질은 인간들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될 정도로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 이미 확인이 됐어요. 예수님이 말해도 행동해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만큼 그 사람들의 질은 도저히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성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주께서는 전쟁 치러가면서 그게 아니라고 분명하게 다짐을 한 겁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나님이 계시는 전, 그게 성전인데 그건 창세기28장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꿈에 사다리 타고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여기가 하나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그 장소가 하나님이 이 땅에 계시는 곳이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39장에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날아가 버렸다는 것. 에스겔 10장에서는 천사들이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해체시켜버렸어요. 바벨론 군대로부터 불타기 이전에 벌써 거기서 먼저 빠져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빠져 나간 사람. 빠져 나온 거예요. 천사가 빠져나와서 천사가 이건 성전이 아니고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오면 새로 세워진다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인자에게 에스겔에게 미리 보여준 겁니다. 모든 것은 확정적이고 최종적이에요.



장차 이 규격에 맞추어서 예배드리고 제사하시는 분이 오는데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성전에 와서 제사 드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44장2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동쪽문은 아무도 못 들어온다. 왜, 들어 오려하면 북쪽과 남쪽 문으로 들어와라. 이 새 성전 문이 세 개에요. 동쪽 문. 서쪽문은 없습니다. 막혀있어요. 동쪽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거기에 들어오시고 그래서 완성이 되시는 겁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천사가 척량한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인데 척량하는 자가 천사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자에요. 그렇다면 이 에스겔의 성전은 실체에 있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이 에스겔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성전으로 오시면서 성전인 듯 성전 아닌 그래 성전인 그런 분이 바로 인자가 되어서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이 세상은 이미 성전 아닌 걸로 끝났고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서 새로운 성전이 시작된 겁니다. 그 성전이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이 새로운 예수님의 성전에는 인자의 새 성전을 만드는 그 성질, 그 성격과 합치되는 사람만 그 성전에 들어갑니다.



합치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죄로 패배자인데,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우리의 잘남, 우리의 완전함을 하나님의 은혜한테 양보하시고 포기를 하세요.



포기한 폭 만큼 은혜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우리 몸이 성전 되는 경우는 자동적으로 성전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잘난 체 하는 것, 뽐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전부 다 이것을 다 지워버리고 거기에 빠져버릴 때 내 자랑 빠질 때, 거기에 나오는 게 뭐냐, 하나님의 실체 없는 성전, 은혜가 있는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은 성전의 기능을 하지요. 새로운 질이 옛날 우리 인간들이 알았던 이 세상이 알았던 질과 지금도 우리 속에서 충돌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이 이미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면서 “나는 죄인이며,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분은 제가 이렇게 설교하게 되면 “니가 하나님도 아닌데 니가 뭘 그렇게 남에 대해서 아느냐?” 이렇게 해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궁극적인 마음만 알면 모든 것이 돼요. 제 이야기 아니고 고린도전서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마음만 알면 되거든요.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서 왜 하느냐” 하나님의 마음은 이 땅에서 접촉점을 둬요. 그게 뭐냐,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겁니다.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를 죄 되게 알려주시는 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그 분의 십자가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죄 되게 하고 죄 되게 한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만 자랑하게 되고 주님의 공로만 높이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만든 마지막 성전입니다. 거기에 모든 규격은 나한테 맞춘 게 아니고 주님한테 맞추는 거예요. 주님한테.



어떤 사람은 성전의 수치가 성도의 숫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성도의 숫자가 아니고 성도의 질을 말합니다. 성도의 질. 성질. 본질을 말합니다. 그 모든 범주는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천사가 모여도 그 성전은 하나밖에 없어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질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꺼내준 자가 없었다. 인자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다는 그걸 알 때, 그 사람은 성령의 하나 된 하나님의 지어져가는 성전이라고 에베소서2장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전은 항상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지금도 분주합니다. “주여, 너무 억울합니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그러면 “그렇게 니가 억울하면 죽지.” “아닙니다.” 억울함을 알아줄 다른 영역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 이 성전 안에 이렇게 억울함을 당해야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거예요.



“야, 세상이 내 잘한다고 알아주는 게 아니고 누구 알아달라고 할 필요도 없고 이 억울하게 해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렇다면 나는 주여, 더 짓밟히게 하시고 더 밟아도 저는 감사하나이다.” 야~ 말을 해놓고도 이 사람이 드물긴 드물다. “주여, 남들이 나를 사기쳐먹고 밟아도 저는 거기서 감사가 나오게 하옵소서.” 이것은 스데반집사나 이야기할 거거든요. 돌이 막 날아오는데. “주여, 더 더 더 날아오게 하옵소서. 많이 내려올수록 주님의 은혜가 더 넓혀질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데반집사의 천사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을 이제는 바꿔야 되는데. 악마의 얼굴을 천사의 얼굴로.



만약에 그거 안 되면 자살해야 돼요. 결국은. 화딱지 나서 못 살겠다. 내가 죽음으로서 남들이 알아주겠지. 이건 끝까지 부자청년이라. 내가 이렇게 하면 남들이 알아주겠지. 우리는 반대입니다. “주여, 제발 나를 알아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짓밟고 또 밟아주시옵소서. 안 알아줘도 주님만 계신 그걸로 족하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궁극적인 것은 주의 은혜밖에 없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무수한 의문점, 왜 잘했는데 어려움을 당하는지 이제는 그 내막을 알았사오니 은혜의 폭을 넓힐수록 주께 영광 돌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