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8강-상(고전3;8-9) 이근호 141207

아빠와 함께 2014. 12. 9. 16:17

2014-12-07 12:32:10 조회 : 116         
   상賞 141207 이름 : 이근호   

상賞(고린도전서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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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12-07 13:25 
상(賞)

2014년 12월 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3:8-9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상(賞)이란 잘한 일에 주어집니다. 잘못된 일에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을 기대합니다. 상을 받으면 마음 속으로 격려가 되어 용기를 얻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상은 자기 노력과 노동을 전제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타인이 받은 상과 일반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이라면 그 상 속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상이 타인이 받은 상과 똑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 네 것이 되어라고 주시는 상이 아니라 도리어 상 받은 당사자가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를 통고해주는 성질을 지닌 상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주님이 보이시는 하나님의 일은, 얻어 챙기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도리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성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재물이나 시간이나 봉사를 내놓아도 그런 것들은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생명 앞에서 무가치합니다. 도로 집어넣어야 마땅한 것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무슨 취지로 예수님이 인간 세상에 투입시키신 겁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가짜라는 식으로 들통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은 혈족 중심으로 뭉쳐서 고유한 역사를 통해서 국가로 유지하지만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와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중보자 중심으로 뭉쳐진 나라입니다.

세상의 다른 나라들은 인간들의 결집력만 보이는 어느 정도 질서 잡혀 있는 듯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인간들의 이 타고난 결집력을 투입하신 중보자에 의해서 와해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약속이 자리 잡게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어 혈육적인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천사가 와서 미리 통보해준 것처럼 ‘약속의 자식’인 이삭의 개입으로 그 다음 세대가 이어지는 속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그리고 야곱 때에 와서는 12자식으로 퍼집니다. 그 이후의 주도권은 레위지파가 쥐게 됩니다. 모세, 아론이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혈육 중심적 나라로 이어지면 이는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가 아닙니다. 약속이 주도권을 쥐는 나라이어야 합니다.

레위지파가 주도권을 쥘 때는 그 체계가 마치 약속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소년 다윗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 중심의 체계는 무너지고 유다지파 체제를 전환됩니다. 이 와중에서 그 약속의 내용에 서 있게 되는 자는 주변으로부터 맹렬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곧 천국 만들기 원리입니다. 핍박과 무시를 당하는 겁니다.

속의 침투는 기존의 혈육 중심의 노선을 단절시키는 효과로서 주어집니다. 모압 여인은 룻에 의해서 장차 다윗 노선이 생겨납니다. 약속노선이란 이처럼 마치 하수관 공사처럼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도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의 만개는 예수님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장차 신약에 나타나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면서 많은 것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서 모욕적인 대우와 처분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합당한 영광과 감사와 사랑과 심판권을 상실했습니다.
이 상실된 사항이 ‘상(賞)’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를 통해서 배출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짐은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창세기 15:1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상’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 상은 방패, 즉 전쟁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부각시키기 위해 친히 벌이시는 전쟁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상실케 하는 존재로 확인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애초부터 가짜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인간 자체가 가짜이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나 상(賞)도 가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고유의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합니다.

그로 인하여 왜곡된 천국관을 갖게 되고 통용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포도원에 시간별로 각각 새로운 노무자들이 투입됩니다. 그런데 일을 마무리하고 삯을 주인이 주면서 노도시간에 따라 노임에 차이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포도원 자체가 주인님의 것이지 일꾼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일꾼들이 화를 냅니다. 이는 그들의 가치 사수 중심의 천국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 폭로가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이러한 범죄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일입니다. 마태복음 12:39-40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품고 웅크리고 계시다가 부활을 통해서 활짝 만개한 기적을 앞서 요나를 통해서 보여준 기적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세상 끝’을 품에 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본격화시키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이 거짓되고 가짜라는 사실이 이 끝날에 분명해졌습니다.

이는 더 이상 인간들이 자기 가치를 고수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17-18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 받은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곧 복음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여자나 남자나 할 것도 없이 일반입니다. 동일한 내용으로 복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는 곧 그들의 입을 통해서 “사실 예수님께서는 온 우주를 통해서 합당한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받을 분이다”는 점이 증거됩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고 상(賞) 자체입니다.
일을 해서 상받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하게 된 신분자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친히 전쟁해서
주신 상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그 어떤 가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이 상실한 면을 증거해야 될 탁본들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12-09 10:14 

18강-고전 3장 8-9(상賞)1412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8-9절입니다. 신약성경 265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8-9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상을 준다고 하는데 그 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상을 주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고 있는 세상에서 기대하는 그 상은 하나님은 어림도 없습니다. 이 상의 특징은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다, 똑같다.”라는 내용을 드러낼 수 있는 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의 같은 페이지에 보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상을 쪼개보면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 그런 상이어야 해요. 그런데 보통 세상에서 상이라 하는 것은 그 상장과 상금과 상패를 본인 집에 가져가 버려요. 자기 것이 되어버려요. 자기 것이 되어버리면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라는 그 내용이 누락이 되고 날아가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상이 아니지요. 성경 전체로 볼 때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상이에요. 전도상이니 헌금상이니 해서 냉장고 주고 목걸이 주고 공로상이라고 해서 상패도 주고 하는데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상입니다.

 

성경 본문 외웠다고 상 주는데 저도 옛날에 로마서 8장 잘 외워서 대구 성일교회에서 상 받았어요. 그거 쉬워요. 상 받았어요. 뭐, 없어! 상 받았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만약 대구 성일교회에서 상을 받았는데 그 상을 가지고 다른 교회, 범어교회 가버리면 대구 성일교회목사는 기분 나쁠 거예요. 상은 우리가 줬는데 왜 그거 가지고 다른 교회 가냐고요.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은 너는 영원히 상주시는 분에 소속되라고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상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상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상은 우리에게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잠을 자다가 집에 불이 나서 전신 5도 화상을 입었다. 그게 상이에요. 초반부터 너무 심하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꼼짝도 못하고 그게 상이라는 말이지요. 왜? 하나님께서 불 질렀거든요. 하나님께서 불을 질러서 못나오게 만들어가지고 전신이 타버렸을 때 그게 상이에요. 이렇게 화상을 입은 나도 주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화상을 입어도. “너 화상 입었나? 꼴 보기 싫다. 내거 아니다.” 이런 식으로 버리지 않으시고 화상 입어도 주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오실 때 자기의 생명을 내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내 놓았다는 말 ……, 여러분은 다 성령 받아서 화투를 쳐다보기도 싫어하겠지만 예를 들어서 화투를 치는 것을 상상해 봅시다. 화투칠 때 특징이 두 장씩 한꺼번에 내고 싶다고 내놓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한 장씩 번갈아서 내놓거든요. 소위 성도랍시고, 교인이랍시고 헌금 내놓고, 십일조 내놓고, 전도 내놓으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놔버렸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똥 피를 내놓았는데 저쪽에서는 광을 내놓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을 내놓으니까 주께서 생명을 내놔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섬주섬 우리가 내놓은 십일조를 다시 거둬야지요. “아이고, 내가 이런 짓을, 내가 이런 것을 내놓다니.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명을 내놔야 돼요. 생명을 내놓으면 주께서 그 생명, “에이, 더러운 것 가져가라. 어디서 내 생명 앞에서 네 생명을 거기에 섞어버려? 가져가!” 도로 줘버려요. 왜냐하면 가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가짜였습니다. 사람들은 평생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몰라요.

 

탁본이라는 말이 있지요. 비석에 종이 대고 본뜨는 것. 탁본 뜬다고 하지요. 영주부석사에 가면 탁본 뜨는 체험학습이 있어요. 탁본이라는 것은 백장을 뜨나 천장을 뜨나 원 비석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뭐냐? 탁본입니다. 전부다 가짜에요. 우리 인생들이라는 것이 전부다 가짜들입니다. 가짜가 있다는 말은 진짜도 있다는 말인가? 진짜는 없어요. 진짜는 없는데 가짜들만 있어요. 진본은 없고 가짜들만 있는 거예요. 가짜는 왜 가짜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마귀가 개입해서 그렇습니다. 악마가 개입해서 그렇게 가짜로 된 겁니다. 악마가 개입하다 보니 우리는 가짜를 진짜로 악마에게 속임을 당한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악마한테 속았는데 왜 주님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가? 주님의 의도한 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신약에서 중보자라 하잖아요.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말은 그 전에 이미 역사가 있었어요. 구약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어요.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다른 특징이 있어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중보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는 그냥 인간들끼리 지혜와 힘을 합쳐서,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육적 결합력에 의해서 씨족에 의해서, 씨족이 커져서 부족이 되는데 그렇게 국가를 이루어서 부족끼리 뭉치고 힘을 다지자는 것이 민족주의적인 국가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고 이 혈통이 아닌 약속에 의해서 뭉쳐지고 결합되어서 형성된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그래서 중보자,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는데 그냥 중보자, 주의 이름, 중보자 중심으로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스라엘 나라가 다른 나라하고 전쟁했지요. 다른 나라하고 전쟁하다가 약속의 땅에 가서는 다른 나라하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내부전쟁으로 퍼졌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집안중심이고 혈육중심이냐?” 하고 따지시면서 그게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 복음 중심으로 뭉쳐야 되는데 교회 역사가 10년쯤 지나다 보니까 집안 중심이 돼버리는 거예요. 김 씨 집안, 이 씨 집안, 최 씨 집안, 박 씨 집안, 변 씨 집안, 설 씨 집안까지 있어요. 집안끼리 이렇게 되어가는 거지요. 권사투표 하게 되면 삐져서 한쪽 집안 다 나가버리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어느 지파인데? 족보 어디인데? 에브라임이야, 유다야, 레위지파야, 어느 지파야,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되거든요.

 

지금 하나님의 약속,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쳐다보고 사느냐,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혜택을 입고 그 효과로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봐야 될 텐데 자기 지파는 레위지파니까 레위지파끼리 똘똘 뭉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내부적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사람이 왜 등장하는가? 원래 이스마엘이라는 아브라함의 혈족이 있는데 이삭을 집어넣어 줬잖아요.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천사 셋이 와서 약속해서 들어온 겁니다. 이름도 웃었다고 해서 이삭인데 약속의 개입이거든요.

 

혈통노선에 약속이 위에서 투입한 거예요. 그 약속의 투입은 혈통중심의 사람한테는 상당히 이질적이고 배타심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혈통이니까, 이게 만져지니까 진짜인줄 알았지 가짜인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거예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흙이 될 거예요. 중국 가니까 세계에서 제일 큰 모래조각공원이 있어요. 모래로 굉장히 아름답게 꾸며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걸 분양받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은 모래로 만든 거거든요. 진짜 건물이 아니고 모래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미키마우스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전부 다 모래로 만들어놓아서 아무 가치 없습니다. 나중에 바람 불면 다 무너져요.

 

우리도 우리한테 투자하는 이것이 미련한 짓이라니까요? 우리는 모래로 된 것, 흙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다른 민족은 몰라요. 그러나 중보자가 개입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개입된 사람은 아는 겁니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가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뭔가 외부에서 약속이 주어질 때 가짜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나는 가짜고 나의 진짜는 하늘에 있느냐? 나의 진짜라는 그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짜로 사는 그걸로 우리의 임무는 마감되고 없어져요. 우리의 원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원본은 애초부터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가짜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보내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준다는 겁니다. 받아줄 수가 없지요. 선악과 따먹어서 애초부터 에덴동산에 추방된 입장인데 추방된 사람들끼리 데모한다고 해서, 월급 올려달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시위에 굴복해서 좋은 게 좋습니다, 하고 계약직에서 정 직원으로 바꿔주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져서 이삭언약이 되고, 이삭의 언약이 녹아져서 야곱 언약이 되고, 야곱언약에서 열두 갈래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가 생긴 거예요. 열두 지파가 생기고 난 뒤에 처음에 레위지파에서 주도권을 쥐었거든요. 모세와 아론이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로서 중보자 노릇을 했지요. 지파가 열 두 개지만 사실은 열 세 지파에요. 요셉지파가 둘로 갈라져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되어서 


숫자로는 13이지만 

이것이 열둘로 계속 유지되는 이유가 

레위지파가 빠져나와서 모든 지파의 대표자자격으로 특수한 레위지파가 되어서 

레위지파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다른 지파는 레위지파가 제사 잘 드리는 그 효과와 은덕을 입는 식으로

약속의 땅에서 곡식이 자라는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복잡해요 이게. 대한민국민족 같으면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되는데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가짜가 아닙니까? 이스라엘도 가짜지요. 이스라엘도 가짜지만 이스라엘이 아는 것이 뭐냐?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아는 거예요. 다른 민족은 가짜인 것을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본인이 가짜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리고 나의 진짜를 얻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가짜 되게 하신 분에 합류되는 겁니다.

 

이게 이해가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제 소관이 아니니까 그냥 내질러 보겠습니다. 레위지파 중심으로 나라가 되니까 이 레위지파가 또 착각을 하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진짜인줄 알고 있어요. 모세, 한나, 사무엘, 전부 다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가 전권을 쥔 겁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가 가짜인 것을 들통 내는 방법이 유다지파를 준비했어요. 유다지파에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소년 다윗이 등장하거든요. 우리 같으면 “다윗아, 네가 기름부음 받았어요? 그러면 몽땅 우리 전권을 너한테 인수인계해 줄게.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어.” 이럴 줄 알았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럴 줄 알았지요? 성경에 사사기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권력을 쥐면 그 권력을 세습화하고 그 권력이 공고화 되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특정혈족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속성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번져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사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룻기에 보게 되면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의 노선은 기성 권력에 관계없이 보아스와 이방 여인 룻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서 장차올 이스라엘 왕이 마치 하수구같이 숨어 있어요. 마치 하수구같이 숨어 있는 어떤 다른 노선에 의해서 뒤집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 뒤집기가 시작되면서 지파들의 권력투쟁이 일어나는데 거기서 생겨나는 것이 뭐냐? 상실이에요,


상실. 잃어버리는 것. 왜 상실이 중요하냐 하면, 

중보자가 이 세상에 올 때에 곱게 오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중보자가 받아야 될 영광과 찬양과 감사와 사랑과 공의로움과 그 모든 능력을 

이 땅에서는 전부 다 상실해 버리는 겁니다. 잃어버려요. 

그 중보자가 받아야 될 모든 영광과 가치성을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것,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품고 이 땅에 새싹처럼 돋아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진짜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굉장히 성경이 어려워요. 성경 전체가 통한다는 것이 그렇게 표면에서 쉽게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보자가 계신데 하나님은 중보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같은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는데 정작 만들어진 이스라엘은 그 중보자의 가치를 어떤 의미로 모독하느냐 하면, 혈통중심으로, 내가 이 땅의 권력자라는 그 중심으로 압박하고 핍박해서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받아야 될 영광과 찬양을 누락시켜 버리고, 모독해 버리고, 빼앗아 버리고, 잃게 만들고, 핍박하는 양상으로 이스라엘이 변질되고 마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죽기 까지 사람들 중에서 그 분을 호응한다든지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너무나 처참한 지경까지 내려가요. 노숙자 정도가 아니고 아주 정치범으로, 귀신의 대장으로, 이단이지요 이단, 이단으로 간주되어서 처형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중보자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자기가 뭔가 그럴싸하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관계할 때, “하나님, 십일조 했습니다. 교회 나와 줬습니다. 충성도 했습니다. 봉사도 했습니다. 김장 백포기 담았습니다.” 이런 것을 죽 내놓으면 주께서 내놓는 것은 뭐냐? 주의 생명을 내놔버리는 거예요.

 

화투치는데 이쪽에서는 피사리를 내놓는데 저쪽에서는 광이 나오니까 주섬주섬 다시 거둬 들여야지요. 네 것 내놓고 내 것 내놓고, 그래서는 영광이 안 되거든요. 네 것은 치워버리라는 말이지요. 도로 가져가, 다 도로 가져가, 도로 가져가고 오직 예수님이 내놓는 그 생명으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 것을 내놓으면 안돼요.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도 천국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여전히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고.

 

마태복음 20장에 보게 되면 “천국은” 이라고 예수님께서 운을 떼시면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는 겁니다. 천국이라고 할 때 우리 같으면 “천국은 이 정도로 살기가 좋고 잔디밭은 몇 평이고 골프장이 있고 생명수 깊이가 몇 미터이고 헤엄치기도 좋다.” 이런 쪽으로 이야기할 것인데 천국이라고 해놓고는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리를 이야기해요. 원리 모르면 좋은 곳도 소용없다는 뜻이지요.

 

포도원원리를 이야기하는데 포도원에 놀고 섰던 사람들을 아침 10시에 불렀고, 12시에 불렀고, 오후 3시에 불렀고, 마지막에 퇴근시간 한 시간 남겨놓고 5시에 부른 사람이 있어요. 부를 때 전부 다 한 데나리온씩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노동운동 하시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무엇이냐를 설명하는 겁니다. 천국이 무엇이냐 하는 설명이 우리 인간들은 상당히 쓸데없는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아무리 해도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이라는 겁니다. 화려하고 아름다고 천사들이 팡파르 울리는 그런 좋은 곳에 있다는 거지요.

 

그걸 모방하기 위해서 성가대를 만들었잖아요. 성가대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물론 성가대 테너 베이스 뒤에 앉아서 연애하는 그것은 관계없고 어쨌든 노래할 때는 괜찮다 그 말입니다. 설교할 때 장난도 치고 졸기도 하지만 노래할 때만큼은 아름답잖아요. 왜 성가대가 아름다우냐 하면, 천국의 천사들이 우리 인간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 아름다움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의 극한으로, 연장선으로 한 거예요. 연장선은 반칙이에요.

 

단절이 되어야 하는데 이 땅에서 진선미, 아름답고 착하고 좋은 것에 대한 극한의 상태를 천국이라고 일방적으로 상상해 버린 겁니다. 현재 서울지하철 9호선 연장하는데요. 그것은 돼요. 9호선 연장노선 공사하는 것은 되는데 이 땅에서 깔아놓은 지하철은 천국까지 연장공사가 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와 아름답고 착한 것을 연장해서 천국은 이것보다 더 선하고 이것보다 더 아름답고 이것보다 더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가짜가 가짜를 늘여봐야 가짜밖에 안돼요.

 

여러분, 엿가락 늘이면 엿 됩니까, 소시지 됩니까? 엿가락 늘여봐야 엿밖에는 안되지요. 백날 늘여봐야 소시지로 변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가 예수님입니까? 엿가락이 소지지로 변하게? 그런 법은 없어요. 교회는 그냥 노는 데에요. 노닥거리는 데지 이것은 천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곳입니다. 아침 열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 시에 왔습니다. 자, 천국이 무엇이냐를 설명하는데 이것이 왜 필요하지요? 이것부터 우리는 의아해합니다. 죽어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왜 필요하냐는 말입니다.

 

그게 뭐냐? 너희들이 가짜로 만든 중보자, 가짜로 만든 삼위일체 하나님, 가짜로 만든 하나님을 신봉해서는 천국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노동시간이 한 시간이에요. 그 다음에 오후 3시에 온 사람이 있습니다. 노동시간이 세 시간입니다. 한 시간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이니까 그 다음에 받는 사람은 3데나리온을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 그 다음에는 열두 시에 왔으니 6데나리온을 기대했는데 한 데나리온, 아침 여덟시에 온 사람은 8데나리온을 기대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 받았습니다. 구원받는데 자기의 노동시간이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한 데나리온 받고 그냥 갔으면 주께서 이렇게 설명하지를 않습니다. 가지를 않았습니다.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왜 저에게 이렇게 적게 줍니까?”라고 했어요. 바로 그것을 통해서 평소에 인간들이 전혀 천국을 모르는 체 천국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으로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한 겁니다.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천국은 어디 있느냐 하면, 천국을 부술 때 그 부수는 기능이 천국이에요. 인간이 천국 갈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부수는 기능 자체가 천국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가짜가 가짜로 들통 나지 않으면 천국 갈 수 없어요. 가짜로 들통 나야 돼요.

 

“우리가 가짜지만 진짜 행세를 했습니다.”라는 것도 용납이 안돼요. 그냥 가짜로 사세요. 오늘도 기쁜 소식을 전해서 감사합니다. 그냥 가짜로 사세요. 뭘 해도 가짜에요. 뭘 해도 자기의 노동시간을 남에게 양보해 줄 하등의 마음가짐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힘들게 번 돈은 내 것인데 네가 왜 가져가는데? 동냥을 해줘요? 자선냄비 구제하지요. 그것도 내게 있는 여분의 것으로 주는 거예요. 돈은 주지만 내 자존심은 더욱더 확대되는 겁니다. 손해 본 것 없어요. 자비를 베푼다고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습니다. 자비를 베풂으로서 ‘나는 진짜 같아.’ 가짜가 진짜 행세하는 그런 위장술만 늘어날 뿐이지요.

 

그것은 주님이 제공한 생명이 아닙니다. 가짜가 진짜 행세하는 하나의 사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사기죄로 고발을 당해야 돼요. 레위지파가 권력을 쥐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로 메시아를 줘버리니까 인간은 자동적으로 얼마나 자기육적 중심으로 살아왔는가를, 그 중심으로 인하여 진짜 오신 분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육적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어디에 상을 주시고 무엇 때문에 상을 주시는가, 하는 이 문제가 복잡해 졌지요.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나는, 이 여호와는 너에게 방패가 되고 상이 된다는 거예요. 방패란 전쟁할 때 필요한 것이 방패입니다. 그리고 상은 그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나오는 전리품이 상이에요. 그래서 상이라 하는 것은 전쟁 없이는 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님의 상이 되고 하나님의 방패가 되려면 

하나님이 누굴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되는데 

그 전쟁의 상대자가 누구냐 하면, 

가짜가 진짜행세를 하는 그들이 바로 전쟁의 상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놓고
우리를 실패자, 패배자로 만들어놓고
그 패배자에게 승리한 자신의 몫을 우리에게 상으로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천국의 백성임을, 그 효과를 발휘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심는 이나 물주는 이가 일반이라는 겁니다. 똑같다는 겁니다. 내 것이라는 것을 따로 챙길 것이 없는 상태에서 똑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의 내용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싸우시면서 상실한 것이 있어요. 놓친 것이 있어요. 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받아야 할 합당한 영광과 찬양과 권세와 사랑이고 심판 할 수 있는 심판의 권한 같은 것을 이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혔습니다. 성도가 이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들 때문에 주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 서야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그런 것을 내놓을 때 그게 바로 상이에요.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받아 챙기는 것이 상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것을 도로 내놓는 그게 상이에요. 이 상은 예수님만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셔서 이런 혜택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하신 공로를 이런 식으로 내 놓습니다, 하는 이것이 상으로 참여된 백성 됨에 대한 확인입니다.

 

냉장고나 금목걸이 아닙니다. 전도 상 그런 것 아닙니다. 예배드리러 나왔다고 상주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짧은 문장인데 이 짧은 문장이 너무너무 어려운 문장입니다. 어디서 어려운가 하면, 


“우리는” 

이 ‘우리’라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생긴 우리가 돼야 돼요. 

이것은 현재 있는 가짜들이 집합이 우리가 아니고 원본의 우리도 아니고 

예수님을 중앙으로 했을 때 예수님으로 인하여 호출 받은 사람의 집합을 우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의 밭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요. 오직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몰랐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겠어요. 그 말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말은 가짜 하나님을 진짜로 착각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그 틈새를 뚫고 진짜 하나님을 아시는 분인 예수님이 오셨거든요. 그 분에 의해서 형성된 우리,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밭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성립되려면 교회 다니면서 형성된 이 가짜들의 숲을 헤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이런 게 있어요. “두세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 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거든요.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이 오신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호명당한 자가 두 명 세 명 이라도 주님이 호명하신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5천명, 6천명이 있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제 두 명이나 세 명이 모였으니 주님이 자동적으로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불러서 여기 왔느냐고 우리가 자문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여기에 차타고 왔습니다.” 이런 것이 아니고. 마트에 물건 사러 와가지고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니까 버스타고 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버스타고 왔는지 택시 타고 왔는지 그걸 묻는 것이 아니고 뭐 하러 오셨느냐는 것이고 물건 사러 왔다고 해야지요. 주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물어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그걸 묻는 것이 아니라니까. “대체 누가 시켜서 여기 오게 되었습니까?”를 묻는 거예요. 그런 모임만이 하나님의 뜻만을 찾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뭘 행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호출해서 하시는 겁니다. 어떤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학원이에요. 주산학원, 웅변학원밖에 안돼요. 한수 배운다고. 배울 필요 없어요. 배워서 구원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께서 호출하고 호명해주시는 겁니다.

 

주께서 호명하고 호출하실 때 그들은 수동적이 되지요. 그러면 호출과 호명의 작업에 있어서……, 제가 지금 좀 주저하는 이유는 상당히 이것이 난해한데 그냥 들으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는 말은
세상을 품에 품고 웅크렸다가 펼친 거거든요.
세상 죄를 품고 어린양이 되셔서 웅크렸다가 

사흘 만에 부활의 영으로서 성령에 의해서 다시 펼쳐지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 고린도전서 3장의 이야기는 직접 다가설 수가 없습니다. 여기 이 ‘우리’에 인간이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아주 우습게 이야기하면, “내가 부활했거든. 그런데 부활했는데 아직 만지지마. 너희는 가지 못해.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거든. 아! 내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게 아닌데. 그냥 내 아버지가 아닌데. 옳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아! 내 하나님이 아니지. 이제는 너희 하나님이지.”라고 급조수정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라는 게 애초부터 우리 인간이 기대할 ‘우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뭔가 작업을 해줘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우리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면, 주께서 세상 죄를 품고 터트려 줘야 돼요. 그 터트려 주는 방식이 마태복음 12장 39절에 나옵니다. 제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어요. 좀 참으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병 고치는 기적 보여 달라, 떡을 많이 팽창시켜 달라, 물 위를 걸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물 위를 한 번 걸어보라, 그런 기적들을 요구할 때 “아니야, 아니야.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기적 말고 진짜 내 기적, 마감기적, 최종적인 기적, 모든 기적은 그 앞에서 기적도 아닌 것으로 더 없어져도 괜찮은 그런 기적은 뭐냐?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하는 거예요. 간증집회 할 때 병 고쳤다는 그런 것 믿지 마세요. 요나의 기적이 전부입니다. 요나의 기적이 뭐냐 하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내용이 이런 거예요. 여러분이 갑자기 혼절되어서 혼수상태에 있을 때에 그 깨는 순간이 있어요. 수면내시경 같은 것 해보셨잖아요. 그 깨는 순간이 뭘 느끼냐 하면, 주변의 모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먹먹해 지지요. 잡음이 먹먹해 지면서 웅웅웅웅, 이런 소리로 들려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다가 물 밖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음란하고 악한 요소를 품고 있다가 바깥으로 나와 버리게 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가짜들만 있다는 것이 다 밝혀져 버려요. 가짜들만 있는 것이. 먹먹한 상태에서.

 

주님께서 제대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본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가짜라는 겁니다. 세상 끝이 있어서 끝이 아니라 내가 오는 순간부터 세상은 끝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끝난 것도 모르고, 끝이 아닌 줄로 알고 열심히 일하고, 계약직이 언제 정 직원 될까 하면서 대우빌딩에서 열심히 일하고. 세상이 모두 끝난 것인데. 끝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나름대로 일을 해요. 주님께서 먹먹한 상태에서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이!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 이리와!” 이 ‘우리’

 

호출이지요. 두 세 사람. “너는 이제부터 ‘우리’거든. ‘우리’라면 우리는 이미 끝났어.” 장차 경험해야 될 끝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되면, 끝에 가게 되면 우리도 요나의 고기 속에 있는 것처럼 끝을 가야 고향으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향, 우리의 본향, 골로새서 3장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생명이 있는 곳에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갈 수 있는데 이 끝을 먼저 만나야 돼요. 그런데 이 끝을 만나는 방법이 뭐냐? 먹먹함입니다. 세상에 대한 모든 것, 출세했다, 성공했다, 예쁘다, 잘났다, 테러문제, 북핵문제, 기름 값이 오르고 내리고, 그 모든 문제가 먹먹한 잡음, 잡음이지요, 잡음.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주변이 시끌시끌한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하면서 창문을 활짝 열어제낄 때 거기에 가짜들만 구더기처럼 모여 있는 거예요. 가짜들만. 진짜는 뭐냐? 끝났는데. ‘끝났는데 왜 주변 사람들은 끝을 모르지?’ 끝나버렸어요. 그런 것을 가지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장 17절에,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기에 젊은이, 늙은이, 어린애,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냥 ‘세상은 끝났네.’ 하는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방언이라고 하고 그걸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오늘 본문 8절, 9절이에요. “심는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게 새롭게 생겨난 ‘우리’에 해당되는 겁니다.

 

우리가 물 안에 수장되어 있다가 물 밖에 나왔다고 봅시다. 그러면 단박 만나는 사람이 “당신의 한 달 수입이 얼마냐?” 또는 “어느 학교 나왔는가?” 또는 “당신의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인가?” 또는 “차는 뭘 타고 나니느냐?” 그런 것을 묻지요. 혹은 “성격이 좋으냐?” 그런 것을 묻는 거예요. 그런 것이 전부 다 잡담인데. 가짜들의 게임에서 통용되는 게임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놀이동산에 가게 되면 큰 회전차가 있지요. 저는 안타봤습니다만. 그 회전차가 죽 올라갈 때는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지요.

 

연인들은 밑에 있을 때는 점잖게 있다가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서로 스킨십도 하고 그러다가 또 밑에 내려오면 점잖게 있고 그러다 다시 꼭대기에 올라가면 또……, 그리고 다시 내려오면 점잖은 체하는 그 회전 차. 그 회전 차처럼 이 세상은 출세할 때가 있고 낮아질 때가 있고 정 직원 될 때도 있고 계약직 하다가 그나마도 밀려날 때가 있고 다 있어요. 있지만 아무리 높고 낮던 간에 같은 회전차 속에 있어요. 내려갈 때도 맨 그 회전차 속에 소속되어 있고, 내려가도 하나님의 집이고 올라가도 하나님의 집이고, 내려가도 하나님의 밭이고 올라가도 하나님의 밭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날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만들어지고 태어나고 비로소 그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에요. 교회는 그냥 놀이터에요. 친목단체입니다. 의미두지 마세요.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호출을 당한 사람들끼리 우리는 세상의 잡담이나 하는 곳이 아니고. 물론 복음에 필요하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가 있어요. 그건 이해해요.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온 것은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세상은 모두 가짜며 이미 끝난 상태인데 끝났는데 그 끝 다음은 뭐냐? 오직 주님의 생명, 주님의 천국의 원칙과 원리가 작용하는 효과와 혜택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출세했다고 까불대지 말고 내려갔다고 해서 주님한테 버림받은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그것보다 더 버림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무리 사랑한들 우리 목숨을 내놓겠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지요.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놨습니다. 그 앞에서 무슨 우리의 봉사나 구제나 십일조나 헌금이나, 그런 것이 비교나 됩니까? 어딜 그걸 내놓고 행세를 하려고 해요. 그것은 위장하는 겁니다. 진짜도 아닌 게 가짜 흉내 내는 거예요. 지난 주일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성령도 못 받았으면서, 믿음도 없으면서, 주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체 하는 요령을 알려 드렸지요? 말씀에 순종한다고.

 

순종해? 그래서 뭐, 없어! 없어! 없어요. 어떤 사람은 아침 열시부터 순종하고 어떤 사람은 열두시부터 순종했는데 없어!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반’이라는 말은 이미 우리 전쟁이 아니고 나의 전쟁이 아닙니다. 주님이 전쟁해서, 내가 힘들여서 받은 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만들 수 있는 돈이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금력도 아니에요. 출세도 아니고 이것은 주님께 돌아갈 합당한 감사와 영광을 우리가 보여주는 것, 이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상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서 봉사하는 이것이 내가 받은 상이라고 했습니다. 일을 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감히 나 같은 가짜가 주의 일을 하다니!”라는 기쁨으로 그런 일을 하게 된, 그 일에 종사하게 된 그 자체가 상이 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세상 적으로 사람들이 사랑을 찾아서 교회 와요. 그래서 교인들이 관심 안 두면 너희들 잘났다, 하고 삐져서 가버립니다. 이 세상적 결속이라 하는 것은 다 가짜들이 만든 거예요. 서울 남산의 ‘사랑의 자물쇠’ 거는데 보면 한 사람당 세 개씩 걸려 있어요. 여자하고 사귈 때 마다 달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파리의 퐁네프다리에는 그게 너무 많아서 다리가 무너질 지경이라 지금 공사 들어갔답니다. 인간들의 사랑은 자기가 가짜이면서도 진짜 인체 하면서 내놓는 사랑이에요. 그거 다 가짜입니다.

 

참된 주님의 사랑은 뭐냐 하면,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는 거예요. 복음이란 우리의 과거를 쳐주지 않고 그것을 내쳐버립니다. 과거를 재현하려 하지 말고,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옛날에도 가짜고 지금도 가짜인데 가짜끼리 비교해봐야 무슨 별다른 가치가 나오겠습니까? 잊어버리고 지금 우리가 놓친 것이 뭐냐? 그게 주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입니다. 항상 주님이 생명을 줘서 그 분이 중보자지 다른 중보자는 없습니다. 주신 생명 때문에 내가 비로소 이 마지막 때를 주께 감사하면서 사는 것,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별한 여유입니다. 여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만든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천국을 내가 내 식대로 만들어가려고 부질없는, 쓸데없는 노력을 얼마나 했습니까? 이제는 어디에 있든지 주의 호출과 주의 부르심이 응답하여서 이 가짜를 천국으로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그 희생의 생명을 도리어 높일 수 있고 그것만이 제일 중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떤 험한 경우라도 잊지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