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9강-터(고전3;10-15) 1412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2. 17. 08:55

터(고린도전서 3:10-15)

음성 동영상

 



2014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3:10-15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3: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각가지 사물들이 나오고 불이 나오는 것이 다소 신기해보일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시면 구원소지 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셔도 돨 것 같은데 성경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소지용’이 아니라 ‘구출되는 과정’ 자체를 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출이란 곧 ‘현재 네가 있는 곳이 위험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이 왜 위험한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몰래 숨겨놓으신 비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커튼처럼 기능하게 하십니다.

커튼은 커튼 뒤에 뭔가 숨겨놓은 것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뭘 숨겨놓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신 세계가 있습니다. 그 신 세계는 천국과 지옥, 이 두 종류로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서나 천국에서 모두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증거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신 세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비밀의 베일 뒤에는, ‘온 세계는 예수님의 주님을 증명하기 위해 제조되었음’을 말해주는 세계로 자리잡혀 있습니다. 이 비밀이 이 세상 안에서 공개되면서 하나의 지점을 갖게 됩니다. 그 지점이 바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만 ‘구출’이라는 이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구출이 되려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빼내 주실 때 그냥 빼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바뀌어지면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무엇에서 무엇으로 바뀌어져야 할까요? 그것은 사적인 구원관에서 ‘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물체에 불과하다’는 양상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즉 개인용으로 구원을 소지할 자격자가 애초에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즉 ‘나의 구원’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을 보고 물체라고 표현하니 기분 나쁘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금, 은, 납, 나무, 풀 등 사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물은 민수기 31:21-24에 나오는 사물들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손수 벌리시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서 등장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전쟁에서는 필히 전리품이 발생하는데 이 전리품 자체 내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조치들의 흔적들로만 내용이 꽉 채워져야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의 불을 견딜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구원이란 이 세상 인간 중에서는 성사시킬 위인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면서 진행됩니다.

그것은 인간들 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위인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알고, 그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해서 세상이 새 천지 되는 것 아닙니다.

세상의 운명은 일반인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만 속해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처음 애굽에서 나오는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각 집안의 장자들을 다 죽이십니다. 여기서 각 가정이 맏이들은 인간들의 눈에서 각자 가정에 속한 사적 식구라고 간주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묵살하시고 같은 질로 간주하여 다 죽이십니다. 히브리인 장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각되는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1. 무섭게 죽이시는 하나님과 2. 약속된 존재자의 피로서는 죽음에서 되살아남. 이라는 두 가지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둘의 요소가 있을 때만 , ‘구원의 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두 가지 요소를 담고 있는 구원의 터가 확장됩니다. 즉 예수님 개인에게 일어난 요소가 사건이 되어 택한 백성들 전체로 확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도 구원의 터에 같은 질로서 편입됩니다.

즉 사적 구원론에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터로 계속 지금도 활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활약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악된 본색이 드러나야 ‘탈출’이라는 구원의 본래의 취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색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도배를 해봤자 결국 숨길 수 없는 것은 ‘내 식으로 이 땅에서 살아남고 내세에서는 살아남겠다’는 강렬한 불멸 사상입니다.

어떤 분은 방송에 나가서 자랑스레 자신의 가훈(家訓)을 소개했습니다.

1.학교 가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세
2. 공부를 잘하면 학교에서 돈 준다네
3.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가서 돈을 벌세
4. 우리가 돈 벌 곳은 학교 밖에 없네
5. 학교 가서 돈 벌고, 돈 벌러 학교 가세

즉 궁극적인 인간은 독자적인 자기 생존을 그 근거지로 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 파멸적인 상황이 되는 겁니다. 매서운 불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됩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이런 속성을 벗어던져버릴 능력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바는 ‘대신 죽으심’입니다. 레위기 143-5에 보면,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부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새 두 마리나 질그릇이나 백향목이나 홍색 실이나 우슬초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거룩한 하나님의 조치’에 동원된 물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신 희생하심이 근거가 되어서 문둥병자에게 주어진 저주가 풀려서 깨끗함과 정결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오시는 주님의 주님되심의 활동의 요소로 인하여 완성이 됩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차원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물이나 물체의 역할은 성도가 맡게 됩니다. 이는 곧 심판과 용서라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 바탕(터)가 성도까지 확장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겁니다.

즉 성도들끼리는 동일한 질을 보여줍니다. 각기 다른 활동의 모습을 보여주어도 그들이 뱉아내는 구원의 더 이상 사적 구원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주님 홀로 해내시는 구원임의 결과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영수증 같은 곧 ‘상(賞)’입니다. 이 상 안에는 불과 피의 요소를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이 개인적인 집념의 산물이 아니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지게 하옵소서. 개인적으로 조심한다고 사적으로 챙길 수 있는 대상이 구원이 아님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활동으로 굳어진 예수님의 공로의 증거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9강-고전 3장 10-15(터)1412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입니다. 신약성경 265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원이란 말은 구약 적으로 구출이라는 말인데 구출이란 말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험한 곳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출되어야 된다는 이야기죠. 성경자체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전혀 위험한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물론 밤거리, 차사고, 그런 것이나 주의하지 다른 것은 위험한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요. 그게 위험하지요. 그게 위험한 거예요. 겨울 되면 마지막 잎 새가 떨어지는 것,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전혀 위험한 것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요.



하나님이 보는 세상은 우리 인간이 보는 세상과 달라요. 우리 인간이 보는 세상은 밥이나 먹고 살면 정상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직접 만드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꾸겨버리는, 꾸깃꾸깃 해버린다는 거지요. 구겨버리는데 하나님이 구기시는 그 모습이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베일을, 커튼을 젖히는 거예요. 우리교회 처음 오신 분들은 이 뒤에 벽이 있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베일의 효과에 속은 겁니다. 이걸 들춰보면 여기 유리 있어요. 이곳이 레스토랑 하던 곳이 되어서. 한번 들춰 볼까요? 이 앞이 전경이 좋아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베일이에요. 커튼입니다, 커튼. 이 장막이 무너지면, 이 장막이 걷혀지면 하나님이 준비한 세상이 나옵니다. 두 가지 세상이에요.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 두 개의 세계가 이 커튼 뒤에 있습니다. 우리는 커튼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나중에 주께서는 커튼을 걷어내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계시라 해요. 계시록이라 할 때의 그 계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커튼을 젖혀버리지요. 커튼을 젖혀버리면 준비된 하나님의 실세계가 나옵니다. 그 실세계에 대해서 궁금하지요. 제가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세계가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세계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지옥. 지옥에서도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천국에서도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예수님께서 지옥을 만드시고 예수님께서 천국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지옥과 천국을 다 같이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이 지옥을 만들었다, 예수님이 천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간파할 수 있을까? 그 간파된 내용을 알게 해주는 어떤 사인 같은 것, 어떤 표시 같은 것이 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떤 점 같은 것인데요, 그 점에서 장차 커튼 뒤의 실상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인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그 내용을 하나님께서 점박이처럼 이 세상에 담아놓은 거예요.



다른 인간들은 그 두 분간의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를 모릅니다. 그 대화 내용이 이렇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다음에 그렇게 했던 분이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주가 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시킨 적도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있었던 일이에요. 다른 사람은 눈치코치도 못 챘습니다. 다른 사람은 ‘저 분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도무지 못 알아들어요. 이 세상의 숨겨진 비밀과 관련된 대화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가 있어요.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를 못하는데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게 되면 비로소 성령 받은 사람은 이 베일 뒤에 있는 세상 너머로, 경계선 너머로 이미 넘어온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십자가 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쫙 펼쳐서 발견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한꺼번에. 차근차근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 하나님이 언약 속에 그리스도 들어 있다는 흔히 말하는 언약 적 내용이 이제는 온 몸으로 체험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 눈에 보기에 이 대자연,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나 정상이었습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거예요. 세상은 그대로 별일 없습니다. 하나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 사는 우리는 괜히 온종일 걱정하고 온종일 짜증내고 염려하지요. 자연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런데 시험에 떨어졌다고, 계약직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세상은 아무 일이 없는데. 집에 쌀이 떨어졌다느니 어쩌니. 집에 쌀이 떨어졌으면 굶어죽으면 되지 뭐 아무 일도 없거든요.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온 종일 우리는 뭔가 혼동되고 쫒기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자연세계는 주님의 손에서 아무 일 없음을 아신다면 정말 우리 마음도 아무 일 없습니다. 평안이 찾아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세상 멸망당합니까? 절대로 그런 일 없지요. 이 순신 장군 죽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달 떨어지고 안 그랬지요? 그러나 예수님 돌아가시면 세상이 멸망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는 숨겨진 비밀이라 하는 거예요.

이것은 일반인, 이 순신 장군 죽음이나 세종대왕 죽음하고 다른 죽음이에요. 뭔가 주님만이 아시는 그 은밀한 비밀이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노출된 겁니다. 노출된 그것과 관련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 노출된 내용을 그 나라가 수긍하지 못할 때 그 나라는 망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존재자체가 비밀이에요. 그리고 옛날 이스라엘이 간직하고 있던 그 비밀을 새롭게 간직된 어떤 집단이 나타났는데 그게 오늘 본문에 있는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 이야기하려고 초반부터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어요. 생중계 되지도 않는데 그 틈을 이용해서 제가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커튼이 있는데 이 커튼을 젖혀버리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로 삼는 새로운 세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는 두 종류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되풀이 하는 겁니다. 생중계 못 들으신 분들 위해서 다시 되풀이 하는데 그 두 개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결국 모든 인간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한 사람은 지옥으로 분류되고 또 한 사람은 천국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미리 성경에 담아 놓은 거예요.

그것을 구약 때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민족과 다른 나라의 차이성을 오늘날 교회와 교회 아닌 자의 차이성,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성으로 표현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의외로 간단해요. “그렇게 비밀을 노출시키고 비밀을 규정짓는 그 기준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십자가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할 수 있는 그 대화는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하고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만 알고 유일하게 하나님 품에 있는 독생자가 알고 그래서 두 분만의 대화에 감추어진 모든 비밀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자꾸 울고불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 별로 신빙성이 없어요. 울고불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냉철해야 됩니다. 울고불고 하는 것은 나의 욕구와 욕망과 관련되어 있지요. 대자연은 아무문제가 없는데 내가 왜 울어요? 지금도 새는 짹짹거리고 있는데 내가 왜 우느냐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사적인 감정에 휘말려서 그런 겁니다. 사적인 욕심에 휘말려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님이라는 인간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간단한 거예요. 너 말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것으로 된 자아를 예수님의 것으로 바꿔치기 하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중심점이고 예수님이 노출된 비밀의 지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예수 안에 들어가려면 그냥은 못 들어가고 ‘왜 하나님은 나하고는 이야기를 안 하시지? 왜 하나님은 나하고는 상대를 안 하시지? 내가 나를 간직하는 이 자체가 문제가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를 하나님의 소속으로 바꾸어주는 그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변화에 의해서 인간은 육으로 안 되고 영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제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부러웠고 선생님이 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직업이 안정되었다는 그 점이 부러웠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들이 굉장히 불쌍해요. 왜냐하면 학생들은 3시나 4시 되면 집에 오는데 선생님들은 6시까지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어릴 때, 어릴 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참, 얼마나 힘들까? 선생님 참 불쌍하다. 그런데 저 일을 왜 저렇게 하지? 아, 돈 벌려고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좀 커서 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는 그것이 자기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한 때, 한 때 그랬어요. 한 때라는 말을 하니까 벌써 수상하지요?

한때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언제 장벽에 부딪히느냐 하면, 경쟁이라는 이 장에서는 각자 전부 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이것이 제한되어 있어요. 가지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어요. 저 지금 항공사 부사장 되고 싶어요. 그런데 대한항공 부사장 자리에 누가 이미 있어요. 그래서 내가 부사장 못돼요.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그게 막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구나. 이걸 차단시키는 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구나.’ 그래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인간의 행복은 뭐냐? 내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뭐냐? 제일 인간이 기쁘고 행복할 때가 금지한 것을 넘어설 때입니다. 죄짓는 거예요. 그걸 제가 알게 되었어요.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일부러 해 보는 그것만이 제일 짜릿하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성경 로마서 7장에서 탐내지 말라고 하는 순간부터 탐을 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를 짓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죄를 짓게 하시면서 그 인간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너하고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는지, 왜 터가 네가 터가 아니고, 이 순신 장군이 터가 아니고, 세종대왕이 터가 아니고 왜 예수님이 터인지, 그걸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바꿔치기 하려면 그냥 바꿔치지 않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무서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 무서움을 느끼는 방법은 죄 짓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로 몰고 가서 그 죄에 대해서 얼마나 하나님이 분노하는가 하는 것을 실제로 체험해서 나한테 문제 있음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바꿔치기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떤 분이 가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제 평생 그렇게 감동적인 가훈은 처음 들어봤어요. 자기가 자식 키우면서 다섯 가지 가훈을 정했는데 그걸 제가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감동 받으시기 바랍니다. 1. 학교 가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세. 2.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돈 준다네. 3.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가서 돈 버세. 4. 우리가 돈 벌 곳은 학교밖에 없네. 5. 학교 가서 돈 벌고 돈 벌러 학교 가세. 61세 된 김 을식이라는 분이 전국 이야기대회에 나와서 가훈을 이야기하는데 이 가훈이 왜 그리 감동적이냐 하면, 이 가훈이야말로 진짜 우리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차마 유치해서 이야기 못한다 싶지만 우회적으로 돌려서, “너는 하나님 잘 믿어야 해. 그래야 복을 받아.”라는 이 솔직한 마음을 이 사람은 솔직하게 “학교 가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세.”

그 집에서 한 사람은 교대 나왔고 한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나와서 대위에요. 둘 다 장성했는데 학교 가서 돈 벌었어요. 가훈대로 되었어요. 그 김 을식이라는 61살 먹은 이 사람이 원래 전라도 영광 사람인데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어요. 이 가장 노골적인 가훈, 이 가훈이 정말 찾고자 했던 우리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돈 준다네.” 아주 노골적이에요. 그냥 직구를 던지는 겁니다. 구원이 뭐냐? 바로 여기서부터 탈피되는 것이 구원이잖아요.

구원되려면 솔직하게 자기 모습을 이 김 을식이라는 분한테 배워야 돼요. 오케이, 동감, 같이 동감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솔직함이 우리의 진심인 것을 이야기해야 되고 우리는 이 상태로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거지요. 그 다음 문제에요. 그러면, 구원이 되려면 구원을 가지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2천년교회사가 다 엉터리지만 그중에서 가장 엉터리가 뭐냐? 구원을 가진다는 그 소유개념의 구원론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성경을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구원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가지는 게 아니에요. 피자조각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늘 본문대로 하면 터의 넓힘입니다. 터의 확장이에요. 그런데 그 터가 내 터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터와 확장이 효과가 구원입니다.

마지막 때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입장에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입장에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들과만 대화한다는 것을 아는 입장에서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 마지막 때 모든 커튼을 젖혀버리고 이 세상은 불바다 돼버려요. 불바다 되면서 등장하는 터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터는 두 가지 요소가 들어 있어요. 어떤 요소냐 하면,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가 애굽에 와서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그 죽음의 사자라는 요소와 죽을 때 거기에 어린양도 함께 죽었다는 그 사실, 죽이는 분과 죽임을 당한 그 속에 어린양도 함께 있어서 그 어린양의 죽음에서 유일한 세상의 감추어진 배후의 비밀의 흔적이라고,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른 쪽은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숨겨진 비밀이에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터가 마련되려면 하나님께서 실시한 그 사건의 요소가 둘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그 터가 되어야 돼요. 그 두 사건이 함께 있어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 터가 마련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터가 점점 더 침범하고 퍼지는 거지요. 콘크리트 할 때 1층, 2층, 3층으로 붓잖아요. 그렇게 되면 콘크리트가 점점 더 확장되는 겁니다. 레미콘 차가 와서 부으면 점점 더 늘어나잖아요. 그 늘어난 부분이 구원되는 부분이에요. 구원이란 뭐냐 하면, 콘크리트 같은 것이 나를 덮쳐서 같은 질의 콘크리트로 동일하게 덮쳐지는 겁니다.

그 콘크리트의 내용이 뭐냐 하면, 불과 피, 피와 불의 요소로 되어 있어요. 개인이 소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구원’ 하고 소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와서 덮쳐버린다니까요. 우리는 완전히 동결상태, 완전히 굳은 상태, 딱딱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럴 때 같이 딱딱한 상태에서 옆의 사람도 그리스도 공로만 높이고, 나도 그리스도공로만 높이고, 같이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받은 공로만 높이고. 그렇게 해서 이 터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개인에게만 있던 콘크리트가 이제는 넓은 면적을 가지고 확장되면서 택한 백성에게 덮쳐버리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되고 숨겨진 구원될 천국의 집합체가 되는 겁니다.

어렵지 않지요? 굉장히 쉬워요. 문제는 이러한 요소를 방해하는 것이 뭐냐? 사적인 나의 구원, 개인적이 구원, 이것을 자꾸 염두에 두고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그런 식으로 인식이 들었던 사람은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부터 그게 무슨 말인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민수기 34장 13절을 보면……, 찾지 마세요. 또 찾는다고 여러분들이 복잡해지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한테 이스라엘 대표자들 다 모이게 합니다.

모이게 해놓고 이 땅은 네 땅, 이 땅은 네 땅, 제비뽑게 해서 땅을 줘버려요. 희한하지 않습니까? 약속의 땅을 침범하기 이 전입니다. 모세도 구경 못했고 아무도 아직 구경 못했어요. 구경도하기 전에 지도 펴 놓고 “제비 뽑아라.” 제비 뽑아서 이 땅은 네 땅이고 이 땅은 네 땅이고, 이런 식으로 분배를 다 해버렸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가서 칼싸움하기 전에, 우리가 무슨 애를 쓰기도전에 이미 작정하신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을 담고 있는 나라라고 했지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했지요?

이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구원은 사적인 내 소유용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여기 들어 있는 거예요. 구원은 애쓰고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갈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몰라요. 모르는데 그냥 지도책을 펴놓고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이것은 네 땅 해. 제비 뽑았어? 그것은 네 땅해.” 이미 분배하고 그 다음에 들어가는 것은 점검차원에서, 확인차원에서 가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십자가용서 받고 가는 천국은 미리 천국을 당겨서 알 필요가 없어요.

천국 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사랑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 강의하면서 코드 받으면 안 되고, 뭘 조심해야 되고, 마지막 때가 어쩌고저쩌고, 그저 이거 조심 저거 조심해야 된다고 하는데 조심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조심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요한계시록은 피한다고 가고, 조심한다고 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기 들리면 식후 30분에 약을 드셔야 되고, 하루 세 번 드셔야 되고. 병원에 가면 처방전에 조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목감기 들렸으면 사우나 하지 마시고, 운동하지 마시고, 잘 드시고, 푹 쉬시면서 무리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게 못해서 미안합니다만.

조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여러분, 조심하지 마세요. 오늘 새로운 용어가 나왔는데 여러분, 조심하지 마세요. 술 조심하지 마시고 담배 조심하지 마세요. 나쁜 일 조심하지 마세요. 그런 것 조심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언약이라는 것이, 약속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조심하게 되면 사적인 구원을 얻는다는 그것 아닙니다. 그냥 난데없이 하나님의 비밀이 나를 콘크리트처럼 덮쳐버린 거예요. 이제 주어진 것은 뭐냐 하면, 내 생각과 들이닥친 주님의 뜻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 차이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아까 우리의 뜻은 뭔지 알았지요? 한 번 더 알려드릴까요? 교회 가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기. 이게 우리 뜻이거든요. 우리가 돈 벌 곳은 학교밖에 없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돈 벌 곳은 교회밖에 없네. 교회로 학교를 다 바꾸면 돼요. 교회 가서 돈 벌고 돈 벌러 교회 가세. 뭐 이런 것. 우리의 뜻은 뭐냐? 돈이 있어야 산다는 이것밖에 없어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돼요. 그런데 그 뜻과 우리에게 덮친 뜻이 대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가를 보면 돼요. 어떤 분이 저한테 기도를 어떻게 하냐고 질문을 하는데 빌립보서를 가지고 제가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된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라고 되어 있어요. 기도하기 전에 먼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왜냐하면 염려할 것이 없으면 사람은 기도조차 안하게 되거든요. 기도한다는 것이 뭡니까? 걱정스러워서 하잖아요. 걱정스러워서. “하나님, 우리 딸이 홍콩 갔는데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뭔가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왜 걱정하지?” “걱정해야지요. 걱정해야 기도해서 응답받아야 살지요.” “어떻게 사는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잖아요.” “복이 뭔데?” “돈 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돈 주는 거니까 우리에게 돈 주는 곳은 학교밖에 없네, 이것이 맞잖아요. 가훈이 맞다니까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다 돈이 없어서 염려하는 거예요. 그 KAL기 사무장은 이젠 큰일 났어요. 취직할 데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뜻이 덮친 거예요. 가만있는데 땅콩으로 얻어맞고. 그래서 취직할 데가 없어요.



자기가 항공사를 세우며 돼요. 문제는 돈이 없어요. 그러면 그 사무장은 기도해야 돼요. “하나님 아버지, 저도 항공사를 세워서 오너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돼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감사함으로 아무 염려하지 말고” 라고 해서 “아무것도 염려 안 되십니까?” 그 다음부터 기도하면 돼요. 어떤 기도? “주여, 이런 낯선 세계를 왜 저에게 주십니까?” 하고 감사함의 기도를 할 뿐이지요. 그런 감사의 기도를 하려면 내 터를 다른 터가 덮치면 되는데 덮치려면 내 터가 어떤 터인지를 알아야 덮치지요.

내 터가 어떤 터냐 하면, 전혀 지옥갈 수밖에 없는 터입니다. 돈만 챙기는 터고 돈만 있으면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살겠다는 그 터가 우리 터예요. 그런 인간들을 위해서, 그런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 일방적으로 지도를 펴놓고 다 준 거예요. 왜 주십니까? 그게 약속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약속의 실체, 그 내용이 어떤 것이기에 공짜로 줍니까? “그것은 좀 더 기다려 봐. 나중에 메시아가 오셔서 네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아버지와 담판으로 내가 대신 해결하면 그게 바로 복음이고 그게 바로 예수님의 터고 그 터 위에는 어떤 인간의 공로도 거기에 남겨두지를 않는 겁니다.

구원이 소유용이 아닙니다. 구원이 소유용이 아니라는 말은 상도 소유용이 아니에요. 성경에 나오는 상이라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효과에요. 어떤 영수증 같은 겁니다. 영수증 받아보니 내가 하지도 않은 그 일이 영수증에 표시되어 나와 있네요. 그게 상이에요. 그 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상을 받으려면 깨져야 되지요. 까이는 재미가 얼마나 좋다고요? 제가 미국 갔을 때 배웠습니다. 이 까이는 재미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까이는 재미로 기도해야 되고 감사해야 돼요.

세상에 누가 나를 건드려요? 아무도 날 건드릴 사람이 없는데 주님이 날 건드려 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누구한테 잔소리를 듣겠어요. 주님한테 잔소리 듣고 주님한테 까일 때 “우리가 남이가?” 주님이 남이 아니니까 주님한테 까이는 겁니다. 자기 백성이니까. 레위기14장에 보면 문둥병이 나와요. 레위기 14장 3절 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찌며.” 이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문둥병이 들리게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문둥병이 저절로 나았어요. 그 때 사람들이 “야, 저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았다.” 할 때 그냥 하나님의 도움으로 때우지 말고 “이리와, 이리와! 네가 정한 제물을 잡아라.” “내가 이 제물에 근거해서 문둥병 저주에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제물 안에는 저주스러움도 축복으로 바꾸는 장치가 들어 있습니다.”라는 뜻이고 이 제물이 나중에 하나의 인격체가 되게 되면 예수님이 되고 그 예수님이 바로 터가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복잡한데 여기에 새나 우슬초 같은 것은 사물, 물체거든요. 이런 물체가 있고 구약의 이런 물체를 통해서 저주받은 지옥 갈 사람도 천국으로 교체가 되는, 변환되는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고 장차 그 제물이 인격화 되면 예수님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성도는 구약 때의 이 사람들의 위상이라면 우리는 뭐가 되는가? 하나의 물체가 되고 사물이 돼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나를 인격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격으로 봐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 주보 앞에 보면 <이번 주 설교요약> 것이 있지요.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해 놓고 민수기 31장 21-24절, 이렇게 해 놓았지요? 민수기 31장 21절-24절에 보면,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너희는 제 칠일에 옷을 빨아서 깨끗케 한 후에 진에 들어올찌니라.” 이런 내용입니다. 여기 나오는 금, 은, 동, 철, 상납, 이 모든 것이 물체입니다. 사물이거든요.



사물인데 이 사물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약속대로 실시하신다, 콘크리트로 덮친다는 것을 확인할 것 같으면 불에 견딜만한 것이 되어야 된다는 거지요. 이제 주보 덮고 오늘 본문을 봅시다. 본문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뭐냐?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만 사람이고 그 외에는 예수님이 누군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물체로서 활용당해라는 그 말입니다.



본문 쉽지요? 이에 왜 어려운가 하면, ‘나도 사람인데 나라고 하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소지할까?’ 이러면 처음부터 이 본문 내용에 들어갈 수가 없고 가로막혀 버립니다. 이 본문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교회 봉사하고 헌금 적게 내면 구원은 받아도 팬티바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걸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적 구원이거든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으면 되지? 이왕 구원받는 것 상 많이 받으면 좋겠다. 상 받으려면 어떻게 하지? 교회 봉사 많이 하고 목사 말 잘 들으면 나중에 구원은 기본으로 받고 상급, 보너스, 성과급을 많이 받아야지.’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본인의 사적인 구원욕구를 가지고 들어갔기 때문에 해석 자체가 전부 다 엉터리 해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자아가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어요. 하나의 물체인데 그 물체가 나타나는 것은 뭐냐? 불로써만 나타나요. 불, 우리의 모든 것을 태우는, 우리 인간을 물체로 변화시키는 그 불만 나오면 돼요. 그 불은 민수기 31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쟁과 관련되어 있고 하나님의 전쟁에서 내 것, 내 공로, 내 행위, 내 의, 내 자존심, 이것은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거든요.

그런데 사전에 하나님의 콘크리트가 덮쳐버리면 내 자존심, 내 오기, 내 체면, 이 모든 것이 사적인 악마의 노림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 사적인 악마의 노림수가 뭐냐?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학교 가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세.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돈 준다네.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가서 돈을 버세. 우리가 돈 벌 곳은 학교밖에 없네. 다섯 번째, 학교 가서 돈 벌고 돈 벌러 학교 가세. 이거잖아요. 이게 어렵습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인데 이게 어려워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교회 가서 시키는 대로 기도해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세. 이거잖아요. 교회 왜 오는가?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돈 준다네. 이걸 가지고 공부 잘하면 하나님이 돈 준다네. 이거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 가잖아요. 이게 불입니까? 자기 잘남이지요. 출애굽 때 하나님의 마지막 유월절 사건에서 숨겨진 비밀이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을 다 죽여요. 죽어도 할 말이 없어요. 다 죽어야 되는데 살 수 있는 것은 뭐냐? 어린양의 피를 바르니까 그 경우에만 사는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인간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하는 그 말 자체가 “나도 인간이지요?”라는 그 말인데 “너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었어. 너는 참된 예수님을 보여주는 물체, 금, 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한 우슬초, 죽어야 할 새, 그 정도지 너를 인간으로 여긴다면 성경은 구약이고 신약이고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습니다. 조심한다고요? 요한계시록 말씀을 보고 조심을 하라고요? 조심 개뿔! 조심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조심하지 말고 노골적으로 사세요. 학교 가서 돈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자. 아주 노골적으로 사세요.

뭐가 바꿔지려면 “내가 기껏 이 정도밖에 안되니 이런 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쳐주지를 않거든요. 맞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저 인간도 아닙니다.” 이렇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남들이 묻기를 “네가 왜 인간도 아닌데?”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돈 준다네.’ 이래가지고 하늘나라 가겠어요? 못가지요. 못 간다는 사실을 평생 들추어주시는 그 고마우신 주님. 이 까이는 재미. 방송국에서 가훈 이야기하니까 다들 주변에서 자식 교육 잘 시켜서 육사 보내고 교대 보냈다고, 그래서 교대 보내고 육사 보내니까 공부 잘해서 학교에서 돈 받잖아요. 그래서 주변에서 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칭찬들을 늘어지게 해요. 부러워서.

나도 부사장 되어서 땅콩 가지고 누구 좀 깠으면 좋겠어요. 만약 누구 집안에 대한항공 부사장이 있다 하면 부러워서 “와, 자식 참 복 받았네요.” 그렇게 할 거라는 말이지요. 그게 부럽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같은 한통속이라는 그 말이잖아요. 그런 것을 들추어주시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뿐이고 그리스도 터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구원이란 지금 주님의 공사 중입니다. 1층 슬라브 하고, 2층 슬라브 하고, 3층 슬라브 인데 3층 슬라브, 2014년도에 우리가 있습니다. 레미콘이 와서 콘크리트 붓는데 죽처럼 된 콘크리트가 막 쳐들어옵니다.



나는 맨 날 학교 가면 돈 벌고, 기도하면 돈 벌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콘크리트가 쳐들어와서 덮쳐버리는 거예요. 덮치면서 나중에 굳어졌는데 현장감독이 거기에 쓰기를 ‘그리스도의 터’라고 분필로 써버린다는 말이지요. 참 쉽지요. 참 쉬운 거예요. 구원은 너무 쉬운 거예요. 어느 날 다른 사람이 와서 이 굳어진 것을 뜯어보니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피가 나오고 불이 나오고. 피와 불의 두 요소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불을 받아도 마땅한데 주의 피로서 이렇게 굳어졌구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유월절에 하나님의 무서운 죽음이 왔고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 산다는 그 커튼 뒤에 숨겨진 비밀의 요소가 이렇게 신약시대에도 계속 진행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세계냐? 이게 바로 영의 세계에요. 이것이 바로 영의 세계입니다. 육과 영을 이렇게 사도바울이 예리하게 분별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영은 그 전에는 구약 이스라엘에 있었고 그것이 이어져서 영입니다. 조심하지 마세요. 오늘도 기쁜 소식 나갑니다. “막 사세요.”에서 바뀌었어요. 이제는 업그레이드되었어요. “조심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살아야 ‘돈만 있으면 출세한다.’는 나의 본색이 유감없이 주님 앞에 들통날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공로, 우리기도, 헌금, 무슨 수작을 해도 그거 다 주 앞에 태워져야 해요. 다 태워지고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것을, 그 커튼 뒤에 세계를 사모하시면서 감사함으로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니고 대자연은 정상인데 우리 혼자 왜 기를 쓰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걱정은 늘어지는지 그 행동이 참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나설 때 그래야 한다는 것, 그것뿐이라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