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7강-자라게 하시는 분(고전3;6-9)이근호141130

아빠와 함께 2014. 12. 2. 07:44
2014-11-30 12:42:27조회 : 260
자라게 하시는 분 141130 이름 : 이근호

자라게 하시는 분(고린도전서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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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게 하시는 분

2014년 11월 3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3:6-9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를 계속되는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서 파악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을 할 수 있어나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무 것도 아니다’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 놓는 안목을 지닌 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부터 줄곧 성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그냥 곱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를 겨냥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11에,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받기 전에 인간 내부에 이미 따로 영이 따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 티가 전혀 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과 지혜를 다 동원해서 바르게 살면 된다고 여깁니다. 불교에서는 8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① 정견(正見):올바른 이해 ② 정사유(正思惟):정견에 따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각오 ③ 정어(正語):거짓말, 중상하는 말, 모욕하는 말 따위를 삼가하는 것 ④ 정업(正業):생명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부정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 ⑤ 정명(正命):불교의 가르침에 부응하지 않는 직업은 택하지 않는 것. ⑥ 정정진(正精進):나쁜 마음가짐을 피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계발하는 것. ⑦ 정념(正念):신체와 감정과 사고의 움직임에 대하여 깨어 있는 것. ⑧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여 명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바로 육입니다. 자기 역사(歷史)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바르게 살면 바른 역사가 만들어지고 흉하게 살면 나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게 살게 되면 오늘 본문 3:7의 말씀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것이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자라게 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으신 ‘자라게 하는’ 질(質)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악령이 지배하는 그 성도의 내부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자기 중심에 자리잡은 자신의 육이 발각되면서 외부로 그 정체를 노출시키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성도는 비로소 자신이 근원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자백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내부에 유령하는 존재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유령은 자꾸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식하고 비교하게 됩니다. 이런 자가 성령을 받게 되면 신앙의 문턱을 넘어서게 됩니다.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말씀의 관람자가 아니라 아예 말씀 속으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사람은 혼란에 싸이게 됩니다. 그냥 편하게 성경을 보면서 참한 자기 역사(歷史)를 만드는데 유용할 말씀들을 뽑아서 괜찮은 자아성을 수립하려고 시도해보다가 더 이상 그런 짓들이 악령이 시킨 짓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즉 말씀을 지켜서 진즉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보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는 더 이상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사람을 가지고서 말씀대로 움직여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 진입하지 않으면서도 진입한 티를 내면서 살려는 사람은 부지런히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죽지 않으려는 시도의 일환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주눅 들지 않는 방법은 선생님이 내놓는 숙제보다 더 많은 양의 숙제를 해서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착하게 살 수 있는지”를 늘 자신의 능력을 측정하고 테스트해 보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자신의 위상을 모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자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직접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질러놓은 죄를 우리 대신 가지시고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합당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이 모습이 제대로 된 우리 자신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만이 더 이상 자기의 역사를 자기 손으로 다듬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가 예상 못한 그 난처하고 낯선 지경까지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덩달아 우리 내부에서 올라온 악령이 준 습성에 준해서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그 예수님과의 관계의 밧줄을 끊으려합니다. 끊으세요! 끊으려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즉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는 천국 백성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 ‘기르심’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는 이 방식을 ‘만나’로 가지고 실행에 옮기십니다. 만나의 특징은 저장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장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애굽식으로 우리의 몸을 위한 우리의 양식을 하나님께서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양식은 우리 몸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위한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안식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처소에서 조금도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출 16:29)

안식일이라는 말씀의 완성은 우리 인간 소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되심과 관계는 실행입니다. 바로 이 말씀 실행이 우리의 모든 언행을 다 감싸주시고 덮어주시는 솥뚜껑 역활을 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안식에 성공함’을 이루게 하십니다. 즉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어디에 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처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헤어지고, 만나고, 또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일들의 연속선을 꿈꾸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판을 만들어내십니다. 이 판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의 무늬로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요’가 성립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는 늘 원망하고 늘 주님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앙탈을 부리면서 그 와중에서 주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새롭게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고전 3장 6-9(자라게 하시는 분)1411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6-9절입니다. 신약성경 265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6-9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가 과연 성령 받았는지, 과연 신앙인인지, 라는 판정은 성경에 그 판정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는데 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이 ‘아무것도 아니요.’를 할 수 있는 사람, 이 근호 목사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것.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그 말은 그 인간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본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나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뿐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수십 년 교회 다녀도 “성도 맞습니까? 성령 받았습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필살기 알려드립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구원 받는 나도 아무것도 아니요. 구원의 문제는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주님께 속한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한다는 그것은 욕심이고 그 욕심이라는 것도 허락받아야 돼요. 미생 마지막 장면입니다. 욕심도 허락 받아야 돼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절묘하게 배치를 했는데 성령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성령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어요.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영의 사람이 있을 것인데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라는 질문이 많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미 예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6절, 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심는 사람이 누군가? 사도바울 본인이거든요. 사도바울 본인이 성도에게 말하기를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어떻게 보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보입니다.” “오케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괜히 선교사한테 돈 빼앗기지 말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왜 그렇게 하느냐? 처음부터 “성령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깔끔하게 끝났으면 좋을 것인데 성령 받았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은 뭐냐 하면, 성령 받았다는 같은 인간들끼리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만나게 해줄 때 성령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령 받은 티를 내는 사람들은 사람한테 훅 가게 되어 있습니다. “휴, 저 사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저 권사님 아니었으면 난 신앙생활 못할 뻔 했다.” 이런 식으로 인간들의 전도자, 인간들의 선교사, 강의하는 사람, 목회하는 사람, 목사한테 훅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속에 유령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어 있어서 그래요.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보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성령을 언급하면서 사람 속에 다른 영이 있음을 암시를 하고, 전제를 깔아놓고 이제는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은 성령이 아니면 발각되지를 않아요. 성령이 임한 사람만이 성령은 외부에서 주어지고 외부에서 주어지면서 거기에 대한 불만요소로서 내부에서 악령이 마중 나와서 티격태격 싸우게 되는 겁니다. 그냥 성령이 안 오게 되면 내 속에는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저 올바른 생각, 올바른 마음, 올바른 태도만 가지면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올바른 마음, 올바른 생활태도, 그걸 가지고 불교에서는 팔정도라고 합니다. 여덟 가지 바르게 하면 신이 되고 해탈한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 불교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성령이 오기 전에 우리 마음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TV에 보면 <님과 함께>라는 프로가 있어요. 안 문숙하고 김 범석 아나운서 하고 나오는데 제가 놀라운 말을 들었어요. 안 문숙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프로그램 각본상 서로 친한 척, 서로 연애하는 척을 해야 되는데 오래도록 그 방송을 하다보니까 진심이라서 혼란스럽다는 겁니다.



“진심이라서 혼란스럽다.” 서로 사귀는 척을 해야 되는데 사귀는 척의 문턱을 넘어버렸어요. ‘이제는 정말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혼란스러워진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교회는 예수 믿는 척만 하면 돼요. 그런데 예수 믿는 척을 하다가 언젠가부터 진짜 예수 믿어버리면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우리 인생 훅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척만 하면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진짜 주님을 진정 사랑해 버리면 내 자식, 이 가정은 어떻게 하라고? 불안한 거예요. 걱정스럽고 염려되는 겁니다.



제가 신앙 있는 척 하는 요령을 알려 드릴게요. 30년 목회 노하우입니다. 신앙 있는 척 하는 방법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순종을 하게 되면 스스로 테스트 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까지 착해질 수 있는가를 테스트 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은 신앙 없으면서도 뭔가 티를 내면서 자유를 느끼는 거예요. 학교에서 숙제를 내면서 애들 괴롭히는 선생님한테 애들이 그 선생님을 잡아먹는 방법은 뭐냐 하면, 선생님이 내는 숙제보다 더 많은 양의 숙제를 해 오는 겁니다.



선생님이 미안스러워질 정도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내가 더 착해지면 하나님한테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다룰 수가 있는 겁니다. 열심히 기도하라고 성경에 나오니까 자기는 사십일 금식을 해버린다든지 해서 두 번 다시 하나님이 나한테 잔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서 하나님도 내 밑에서 놀게 만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나한테 어느 정도까지 있는지를 테스트 해보게 되면 그게 바로 신앙의 티를 내면서도 드디어 내가 하나님 위에 올라앉았다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게 우리 속에 있는 악령의 정체입니다. 교회 와서 악령을 더 키우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거든요. 그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장 남보다 지기 싫어해서 누가 더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완벽한가를 시합을 해서 얼추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었습니다. 자기는 최고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아서 자기 역량을 테스트 해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자기 역사가 자기 힘으로 만들어져 가는 거예요. 찬란한 역사, 멋진 자기 자신의 역사가.



<개그콘서트>에 보면 ‘유민상장가보내기프로젝트’라는 것이 있어요. ‘유장프’라는데 보면 신인개그맨이 안경 커다란 것 끼고 늘 걱정하는 것이 뭐냐 하면, “정말 우리 선배님 결혼하게 되면 이러다가 우리코너 끝나는 것 아닙니까?” 하는 거예요. 늘 끝나는 게 무서워요. 이러다가 끝나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믿는 척 하고 사랑하는 척 하게 되면 여전히 우리 인생은 그대로 남아요.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 주님을 사랑해버리면, 즉 신앙의 고비, 문턱을 넘어서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넘어가버리면 우리 인생에서는 ‘내 인생’ 코너는 끝나는 겁니다.



내 인생 코너 끝나버리면 이제는 내 것이 없어요. 내 인생이 내게 소속이 안 되어 버립니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내 인생에 내가 터치할 권한이나 자격이 없어요. 신앙세계, 영의 세계에 가게 되면 새롭게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나보다 더 나 자신다운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내가 미처 모르는 나인데 나에 대해서 말끔하게 알고 계셔서 나보다 더 나 자신답게 사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나 대신 먼저 가까이 가셔서 내가 안고 있는 모든 죄, 나도 미처 몰라요, 그러나 그 분은 나보다 더 확실한 나 자신이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서서 그 죄에 대해서 저주받는 사태를 유발시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우리가 생활하면서 이렇게 불평이 많고 불만이 많고 짜증을 내는데 하나님한테 저주받아 보세요. 그런 짜증도 사실은 사치입니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평소에 나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냥 내 그림자가 있는 그 주위만 뱅뱅 돌면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왜 교회 나오느냐? 지금 교회보다 더 재미난 일이 없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목사입장에서 제일 무서운 일은 그 교회에 진짜 성도가 출석하는 일이에요. 그것은 충격입니다. 다들 믿는 척 하고 사랑하는 척 하고 있는데 진짜 또라이 하나 와 버린 거예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등장하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와 버리면 “집사님이 새로 나오셨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오셨습니까?” 이렇게 하다가 진짜 그 분이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목사가 “제가 집사님 신앙생활 많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면 그 집사님 입에서 “목사는 아무것도 아니요.” 이렇게 나온다면 좀 꾀어보려 하다가, 그 영혼을 갖고 놀려고 하다가, 그 영혼을 장악하려고 하다가 움찔하는 거예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다른 교회 가지 왜 우리교회 와가지고.’ 내가 만든 조직사회에서 일탈, 비죽비죽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겁이 나는 거예요. 무서운 겁니다. 설교 하면서도 구라치는 것 다 들통 난다 싶어서 눈치보고, 설교 다 하고 난 뒤에 2부 순서로 “그게 아니고…….” 이런 식으로.



주께서 나보다 더 자신답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남하고 비교하면서 이정도 나만이 아름다운 역사와 인생을 꾸려나갔는데 그것은 마치 갤러리에서 그림 구경하는 거잖아요. 그림 구경할 때, “그림 좋아해요? 아저씨도 그림 배워서 화가 해보시렵니까?”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현실에 들어오는 것을 그렇게 무서워해요. 성경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은 참 좋아해요. 소설책도 읽잖아요. 소설을 읽지만 그 소설책 속에 들어가기는 참 곤란하지 않습니까?



유명한 작가가 지은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 있잖아요. 재미있거든요. 하지만 그 소설 속에 들어가서 그런 팔자로 한 번 살아보렵니까? 빨치산하면서 총 싸움하고 형제간에 싸움하면서 그렇게 살아볼래요? 그 사람 소설은 좋은데 그 현실은 싫은 거예요. 성경속의 현실이 두려운 겁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나 자신다운 주님께서 구원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를 질질 끌고 우리가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성경속의 현실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집어넣어버리면 전에는 관람자였는데 이제는 주변 상황 모든 것이 말씀 속에 푹 녹아져 있고 젖어 있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말씀 지키는 게 없어요. 말씀 지킬 필요도 없어요. 말씀이 나를 가지고, 복음이 나를 가지고 복음이 복음답게 실현시키는데 나를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 지키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성경말씀 지키겠다는 것은 지금 얼마나 내가 착한가, 어느 수준까지 내가 착해질 수 있는가, 주님의 숙제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 자기 착함을 측정하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앙도 없으면서 티내는 겁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따라서 말씀속의 현실에 들어가면 내가 되고 싶은 곳으로 가지를 못해요. 내가 되기 싫은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밧줄을 끊어야 돼요. 주님이라는 사랑의 밧줄을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가위로도 안 끊어져요. 그게 미치는 거예요. ‘내가 발을 너무 담갔다. 이제는 빼야 되겠다.’ 그런데 이게 빠지지를 않아요. ‘이젠 절에 가야겠다. 교회 안 나가야지.’ 빼세요. 그런데 빠지지를 않아요. 가위로 끊어도 끊어지지를 않아요. 대충 끊어진 사람들 다 나갔어요. 여러분은 나가지 마세요. 배추 백포기 김장한 것 먹고 나가야지요.



빠질 수가 없어요. 비로소 주님께서는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걸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고 주께서 증명하는 것이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네가 끊을 수 있는 사랑 같으면 애초에 내가 심어놓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악령이 있던 자리에 성령이 와서 교체를 해버리고 바깥에 쫓겨난 악령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우리 편을 들어서 “옛날이 좋았잖아. 옛날에 그냥 구경할 때가 좋았잖아. 신앙 티냈던 그 시절이 좋았잖아.”라고 하면서 “봐라. 저 사람이 아볼로고 저 사람이 사도바울이야. 잘 보여야지. 저 사람이 널 도와줬어. 남들처럼 살아.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거야.” 이런 식으로 자꾸 유혹하지요.



오늘날 신학계에서 맨 날 불신자들이 하는 소리가 뭐냐? 칼빈과 루터이야기에요. 칼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개혁주의가 어떻고. 그거 악령 소리입니다. 칼빈도 아무것도 아니고 개혁주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터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걸 자꾸 언급하는 것은 신앙 없음이 들통날까봐서 신앙 티를 내는 겁니다. “내가 칼빈을 연구했고 루터를 연구했고 그래서 나는 생각이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물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뿐이라는 이것, 하나님뿐인 그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방식이 있을 겁니다. 그 방식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제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속에 풍덩 빠져있어요. 주변이 온통, 동서남북과 위아래가 전부 다 말씀으로 출렁이고 있고 그 속에 우리는 잠수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바깥에서 보던 말씀이 아니고 말씀 속에 들어 있으면서 말씀을 온 몸으로 체득하고 평생 체험하는 순간들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방식이 뭐냐? 자라게 하신다는데 어떻게 자라게 하시는가?



그 방식이 바로 성경 속에, 말씀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저도 말씀 속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옛날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자라게 하시는 방식이 나옵니다. 그게 만나였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제로 나왔습니다. 강제로 나왔다는 것은 전에 있던 익숙해진 생활방식과 전혀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하면, 전에는 내가 아는 식으로 살았는데,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사는 그것이 편했고 습관이었고 기분이었는데 기분도 습관도 소용없고 이제는 만나, 말씀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에 갈 수가 있어요. 천국은 사람이 바뀌어야 돼요. 그냥 덜렁가면 안돼요. 사람 자체가 거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내복만 있고 달에 가면 추워서 못삽니다. 우주복 입고 가도 살까말까 한데 따뜻하다고 내복 입고 가면 어떻게 살겠어요? 밤에는 영하 200도가 넘고 낮에는 300도가 넘는데. 못살잖아요. 멋있어 보이는 달이지만 막상 가서 살려고 하면 못산다 그 말입니다. 천국이 멋있어 보이지만 막상 가서 살기 위해서는 뭔가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 돼요. 전에는 내가 나를 살렸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몸에 습득이 돼야 그쪽에서 살 수가 있어요.



한 5년 살고 튀어나오렵니까? 자퇴하렵니까? 그럴 수는 없거든요. 그 사는 방식을 바꾸는 작업은 걱정하지 마세요. 끄집어내신 분이 주님이라면 그 사는 방식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퍼부어주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 일은 뭐냐? 원망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잘해요. 아주 쉬워요. 늘 쉬워요. 새벽기도하면서 원망하고, 교회 나오면서 원망하고, 24시간 짜증내고 원망하는 것, 이것은 너무 쉽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쉬운 것을 허락을 해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는 원망할 준비만 하면 돼요. 원망은 원망대로 해도 주께서는 주님의 작업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제가 흔히 드는 예가 그겁니다. 장터에 어린애를 데리고 가면 처음에는 시장 안 가려고 하다가 막상 시장에 가게 되면 장난감도 있고, 튀김도 있고, 맛있는 것들이 많이 있거든요. 엄마는 엄마가 사야할 물건이 따로 있는데 애는 보니까 탐나는 것들이 따로 있고. 엄마는 엄마 살 것만 사는 성 싶어서 자기 살 것들과 점점 더 멀어진다 싶으면 엄마한테 조르고 막 때리고 치마를 잡아당기면서 사달라고 하지요. “너 집에 가서 보자. 이젠 죽었다.” 성질 급한 엄마는 그 자리에서 치기도 하면서 “빨리 집에 가자.” 하지요. 우리는 맨날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맨 날 그런 거예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겁니다. 애굽의 후추가 맛이 있고 애굽의 김장이 맛이 있고 애굽의 수박이 맛이 있고, 좋은 것은 다 이야기하지요. 주님도 우릴 생각한다면 만나 주지 말고 자장면 배달을 해주든지 하면 되는데 절대로 애굽에서 먹었던 것은 일체 주지를 않습니다. 전혀 다른 방식이에요. 그것은 맛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 20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만나를 주는데 이 만나가 이상한 음식이에요. 다음날 아침까지 두게 되면 벌레가 생겨서 썩게 되어 있어요. 썩으니까 축적이 안 되고 저장이 안돼요. 쉽게 말하면 보험도 안 되고 적금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돼요. 일주일 치나 한 달 치, 나중에 빼먹는 식의 삶이 방식은 허용이 안 되는 겁니다. 만기환급금보장, 이런 것이 다 필요 없어요.



그냥 하루치, 주기도문에 나오듯이 일용할 양식, 하루치만 주는 겁니다. 개 사료도 이렇게 야박하지 않아요. 개 사료보다 더한 거예요. 하루치만 주고 다음날 되면 또 주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에 살 때는 항상 시간의식이거든요. 과거 현재 미래, 미래는 대비해야 된다. 하지만 미래는 대비해야 된다는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점점 더 불안감만 가중시키는 겁니다. 미래를 대비해야 되는데, 미래를 대비해야 되는데, 달랑 주어진 것은 하루치, 내일 것이 없어요. 좀 더 여유롭게 주시면 그 기간만큼은 단독적으로 자기를 의지하면서 살고 싶은데 내일 것이 없으니까 다음날 또 주님을 의지해야 되고 그 다음날 또 주님 의지해야 돼요.



애간장이 다 타게 만들어요. 마치 사랑하는 사람끼리 밀당하는 똑같은 느낌입니다. 사랑한다고 했으면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혹시 저 여자가 다른 남자 만나면 이 코너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또 자기 인생 생각하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벌레가 생겼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애굽방식으로 자기들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일체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만나로 기르시면서 이제는 철저하게 그 애굽적 의식을 바꾸는 겁니다. 첫째는 저장하기 없기, 저축하기 없기, 장래보장형환급 같은 것 없기, 보험도 없어요. 살 때까지만 살아라. 건강할 때까지만 건강하고. 안 그러면 나중에 그냥 죽으면 되니까, 하는 식으로 내 인생을 따로 관리해서 ‘괜찮고 참한 역사 만들기’ 그런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주께서는 자꾸 헤어지고 헤어지는 겁니다. 자꾸 헤어지게 하는 거예요. 헤어지게 되면 우리의 본성은 자꾸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또 만나고 싶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방식은 뭐냐? 그런 방식으로는 천국 못가고 헤어지고, 갈라지고, 아볼로도 갈라지고, 바울도 갈라지면서 거기서 새로운 판이 짜입니다. 새로운 판. 하나님은 새로운 차원을 만드는 거예요. 만났던 사람보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는 것, 그러면 새로운 판이 아니고 기존 판, 애굽 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고 육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령에 있기 때문에 대중가요가사나 드라마의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판이 아니고 기존의 판에 미련 두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는 노래 가사에 적절한 내용이 있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새로운 판이 아니고 기존 판에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기억하지 않아도 지워지지 않아요. 슬픔 뒤에 밀려오는 그리움. 세월이 지난다 해도 언제까지나 그대로 내 곁에 머물러줘요. 내게 남은 사랑은 다 줄게.”라는 노래에요. 이 노래 알면 40대나 50대에요. 천천히 다시 하겠습니다. “기억하지 않아도 지워지지 않아요. 슬픔 뒤에 밀려오는 그리움. 세월이 변한다 해도 언제까지나 그대로 내 곁에 머물러줘요.” 얼마나 미련이 있어요? 헤어졌는데 자꾸 그립다는 거예요. 다시 내 곁에 마음으로 머물러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지요.



그 사랑은 애굽에서 통용되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랑인 그리움으로 사는 거예요. 사랑할 때는 사랑을 모르거든요. 이별의 순간이 올 때 비로소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게 우리 몸에 익숙해졌고 우리 몸의 습관입니다. 실패해도 실패 안한 척, 헤어져도 아름답게 헤어지는 척, 곱게 치장하고 연출할 줄 아는 우리의 마음, 어쩌면 아프다는 그것이 우리의 가장 세상사는 모습일 수가 있어요. 누굴 생각해서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고상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주님 앞에서 고상? 개 코!



무슨 하늘나라에 인간이 고상한 게 있고 십자가 앞에서 무슨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뭐든지 고상하게 뭐든지 아름답게 뭐든지 낭만스럽게. 이 나이에 사랑을 하겠냐마는 색소폰 소리가 어쩌고, 도라지위스키가 어쩌고, 모든 것을 그저 아름답게 포장함으로써 결국은 “나는 아름다웠다. 내 인생은 예뻤다. 실패마저 그렇게 아름답다. 나는 왜 이렇게 귀여워.” 하는 김 지민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나는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이 모습도 하늘색 원피스 입은 소녀의 기도 같아.” 이런 것.



그야말로 폼을 잡는, 신앙의 티를 내는데 그동안 애굽같은 교회에서 훈련을 단단히 받았어요. 찬송하는 법, 찬송가 박수, 위에서 밑으로 내려치는 해병대 박수, 철야하는 방법, 이런 모든 것을 다 배웠는데 그것이 위장술이었다는 말이지요. 그게 육적인 거예요. 새로운 판을 짜게 됩니다. 그 새로운 판은 기존의 내 아름다움, 나의 고상함을 들어주지 않는데 대한 원망입니다. 그 원망하는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자신다운 주님께서 점점 더 우리로 하여금 원망의 끝이 어디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지경으로 가게 합니다.



가면서 비로소 우리는 애굽에서,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다 폭로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첫 번째는 저장하는 법, 미래를 미리 대비하는 방법.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이것이 바로 마귀의 해석이라고. 이 마지막 때에 살아남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되고 저렇게 해야 되고 666, 바코드 찍지 말아야 된다는 것,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살리는 방식, 이것이 바로 애굽적 방식을 옹호하는, 그걸 긍정하는 방식입니다.



만나를 주면서 두 번째로 주께서 주의하게 하신 것이 있어요. 출애굽기 16장 29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좀 난해하더라도 성경 자체가 그렇기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만나를 5일째까지는 그냥 줘요. 그러나 6일째는 곱빼기로 줘요. 하루만 지나도 썩어버리던 만나가 이상하게 안식일 앞두고는 썩지를 않아요. 보통 애굽에서의 세끼 양식은 내 몸만 챙기면 되는 양식인데 그것은 나만 살면 되는 양식이에요.



그러나 하늘나라는 우리 몸을 살리는 그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나의 몸은 잊어줘야 되고 주님의 몸을 위한 양식을 우리가 나의 양식 대신 얻어먹는 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을 우리는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먹는 식으로 먹는데 그 양식이 영생을 주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실은 이 양식은 우리에게 제공될 양식이 아니고 예수님을 예수님이 되게 하는 양식이거든요. 그 양식은 뭐냐 하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양식입니다.



여기서 제가 아까 어렵다고 한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아는 양식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우리가 요리할 수 있는 음식을 양식이라고 해요.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 그러나 제가 방금 이야기한 양식은 요한복음 4장에 나와 있는데 “내 양식은 저 사마리아 여인이 나를 믿는 그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한 겁니다. 아버지의 뜻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되심의 기능이 적용되는 것을 양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는 나를 믿어야 해. 안 믿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 나를 믿기 위해서 지금까지 너는 남자 다섯 명을 사귀었고 헤어지고 이번에 사귄 남자까지 여섯 명이 되었어. 그런데 네가 그렇게 남자를 좋아하고 여섯 번째 사귀는 그것은 바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깔아놓은 하나의 작전이었어.”



그렇게 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택한 백성을 자기백성 만들기 위해서 남자 여섯 명 사귀는 조치를 하셨습니다.” 믿게 되면 그런 것이 모여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주가 되시는 거예요. “저 인간은 절대로 천국 오면 안 돼. 지옥 가야 돼.”라고 여러 가지 조치를 단행하신 그것, 그것도 주님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양식은 뭐냐 하면,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은 일방적으로 지옥 보내기 위해서 그만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분류를 할 수 있는 그만한 자격을 나만이 갖고 있음을 보일 때 그것이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하나의 증거물이 되고 그것을 양식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 판, ‘내가 애굽에 살면서 내 인생은 내가 곱게곱게 관리해야지. 참하게 관리해야지. 내 몸은 내 몸이고 내 인생은 내 몸에서 예쁘게 꾸며서 나중에 하나님 만날 때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야지.’ 하는 나의 판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에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 그러니까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성경 보면서 성경에서 뭘 뽑느냐 하면, 내가 이만큼 잘났다 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데 필요한 구절들만 뽑아서 나한테 꽃꽂이를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앙의 티를 낸 겁니다.



“착하면 복 주지요?”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면서 귀한 구절, 괜찮은 구절을 뽑은 거예요. 고난 받으라고 하니까 항상 하는 소리가, “고난 받으면 복 줍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거예요?” 자꾸 이런 협상조로 나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거예요. 열 두 제자가 다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떠나 죽는다.”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나왔지요. “이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도다.”



왜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는 것을 거부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이런 거요. “이러다가 내 인생 끝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 믿으면 우리 인생 끝나는 거예요. 끝나면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된다는 것이 좋다는 쪽도 있는 반면에 내 인생 끝나버리면 내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헛짓했다는 것, 헛짓했다고 느끼는 그런 부류도 있을 거예요.



신앙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지금 나 된 것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지작업, 택지조성을 다 깔아온 거예요. 내가 7살 때 누굴 만나야 되고 9살 때는 누구와 헤어져야 되고 10살 때는 누굴 만나야 되고, 이 모든 것이 복음 위주로, 세상이 예수님 주 되심 위주로 다 짜여 있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나 위주로 보다가 막상 성령에 의해서 “들어가!” 해서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과거에 짜인 각본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안 거예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그게 껄끄러운 겁니다. 맨 날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 몸에 안 맞다.” 우리 몸에 안 맞지요. 애굽에 살다가 그게 맞을 리가 있습니까?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게 맞을 리가 있어요? 아파도 내가 아플 때 뭔가 착한 일 하는 것처럼, 뭔가 고난 받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게 예쁘지요. 아파도 고난 받아도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없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늘 하는 소리인데 “그러면, 주께서 다 할 것 같으면 나는 그냥 막 살련다.” 그래서 내가 막 살라고 하잖아요.



“나에게 이득이 없고 나한테 얻어지는 것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 믿느냐?”라는 사람을 지옥보내기 위해서 주께서 작업을 한 거예요. 다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다들 인간의 마음은 악령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고 우리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그 밧줄 한 번 끊어보세요.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 삐졌나?” “삐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교회도 나오지 말고 한 번 하고 싶은 대로 해보지?” “해보지요, 뭐.” 그런데 이게 안 끊어져요. 그런데 이상하게 안 끊어져요. 내 고집보다 밧줄이 더 셌어요.



내 쪽에서 끊고 안 끊고를 내 맘대로 못하는, 내 손을 떠나버린, 내 능력을 떠나버린 다른 판이 모자이크처럼, 이미 하나의 무늬로, 흔적으로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아볼로도 아무것도 아니요 사도바울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는 고백이 서슴없이 나오는 겁니다. 아볼로가 듣고 바울이 들었으면 좀 많이 기분 나쁠 거라고 그렇게 생각 되겠지요? 그러나 정작 사도바울은 기분 나쁜 게 아니고 바로 그런 형제를 그동안 찾았던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역시 어려운 말인데 여기 예수님의 보조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너 자신의 무의미함을 통해서 같이 동감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무의미하다, 목사도 무의미하고 집사도 무의미하고 가족도 무의미하다.”라는 말을 그냥 해버리면 자기혼자 의미 있는 게 돼요. “너희들은 무의미하고 나는 구원받았으니 의미 있다.” 이렇게 되는데 주님 앞에 내가 먼저 무의미함을 아는 사람 같으면 다른 사람도 무의미한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형제인줄 어떻게 아느냐? 무의미한 것끼리 모아봐야 소용없습니다. 모여서 함께 배추 버무려 봐야 돌아서면 또 싸움이나 하고 안 돼요. 주님을 경유해야 돼요. 이 전지와 저 전지에 전류가 흐르려면 전선이 있어야 하고 연결이 되어야 되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흘러가 버리면 무의미한 나를 도와주라고 아볼로가 있었고 사도바울이 있었다는 것을 주님께 감사하죠.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모든 되어가는 상황이.



주 안에서 사랑하라고 했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내가 갑이 되고 사랑 받는 너는 을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신이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안 되고 ‘주 안에서’라는 말은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 주님한테 사랑받는 방법이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이 있음으로서 나는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깨닫게 되는 그런 기회가 되는 겁니다. 양로원을 방문한다? 양로원 노인들이 “고맙습니다.” 할 때 “내가 오히려 더 고맙지요. 제가 고맙습니다. 주께서 당신들을 만나서 내가 얼마나 애굽적이고, ‘나는 뭔가 저장해야 되고 저축해야 되고 나는 내 인생이 되어야지 주님 인생 되면 싫다.’는 내 본색을 다시 한 번 까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나를 주면서 자기 처소에서 나오지 말라는 그 말은 더 이상 안식일 날 양식 얻으러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그 만나의 목표가 뭐냐? 안식일에 있습니다. 그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누가 붙일 수 있느냐 하면 피조물은 못 붙여요.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고 그 다음에 안식하셨다고 주께서 뒤에 솥뚜껑을 덮는 거거든요. 여러분이 안식이라는 솥뚜껑을 덮어버려야 돼요. 덮어버리면 내가 새롭게 무슨 일을 벌인다든지 안식을 더 늘인다든지 안식을 파괴하는 것과 관계없이 괜찮아요. 그냥 주께서 주시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것이, 그 자체가 안식이기 때문에.



죄 지어도 괜찮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안식이라는 솥뚜껑이 있다는 말은 “네가 아무리 팔팔 뛰어봐야 너는 네 자리의 너일 뿐”이라는 말이지요. 미국가나 여기 있으나 북한 가나 중국 가나 관계없이 애굽이라는 네 처소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주께서 솥뚜껑을 덮어버리면 어떤 일을 했든지 전부 다 그것이 주님의 양식이 되고 그 양식에 우리가 포함되면서 우리는 천국의 양식, 생명의 양식을 얻어먹는 게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보시면 제일 쉽지요.



그게 8절에 나옵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나오고요.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는 이 말은 주님의 받은 그 상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아볼로는 에베소교회 성경선생님을 아볼로라 해요. 제 3차전도 때 있었던 아볼로인데 그 아볼로나 사도바울이나 그 자체로서는 의미 없어요.



그런데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각각 주님에 의해서 받은 상(賞)대로 그들은 일을 하는 겁니다. 일하고 상 받는 것이 아니고 일 하는 그 자체가 상이라는 뜻이에요.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한다는 자체가 영광이고 은혜라는 말이지요. 고민되십니까? 고민도 은혜에요. 고민도 은혜고 걱정도 은혜고 환경도 은혜고,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나를 사용한다는 자체를 안다는 이것이 주님 앞에 영광된 신분이에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간단한 겁니다. 원망만 하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끊으세요. 부탁합니다, 정말! 늘 원망하시고 이제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하세요. 그렇게 하시면서 뭔가 끊어지지 않는 게 그 밑바닥 새로운 판에, 그렇게 까불거리면서 자기 처소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반항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날 몰아넣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통장 돈도 다 떨어지고 죽을 겁니다.” “그럼 죽어라.” “죽기는 싫습니다.” 혼자서 팔짝팔짝 뛰고 다 하세요.



하시면서 느껴지는 것은 뭐냐? 바로 나 자신보다 더 자신으로서 주께서 이런 상황들을 만들어서 절대로 내 힘으로 구원되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하시는 것, 내 것은 이미 주의 것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분이 바로 성도라는 사람입니다. 자유하지 마세요. 왜? 자유 안 해도 자유기 때문에. 자유를 생각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유해야 된다는 부담을 느끼는데 자유하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그것마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걱정 할 일도 아닌데 쓸데없이 구원에 대해서 걱정했습니다. 말씀 더 지킨다고 복 받는 것도 아닌데, 안 지켜도 이미 복을 받고 있는 상태인데 우리는 너무 욕심이 많아서 더 복을 받겠다고 착한 척 했습니다. 이런 허접스럽고 부질없는 일을 청산하고 그저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