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고전 3장 1-5(어린아이신앙)1411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5절입니다. 신약성경 265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1-5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나름대로 목표가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이 정도 돼야 알아듣는데, 이 정도 돼야 알아듣는 다는 말은 내가 그 정도 되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너희들 가운데 섞여 있다는 겁니다. 섞여 있는데 내가 하는 말을 어떤 사람은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못 알아듣는데 그 판정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고 내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아쉬운 것이 없는 거예요. 똥배짱이지요.
내가 하는 말이 자기가 지어낸 말이 아니거든요. 이것은 자기가 성령 받아서 하는 말인데 성령 받아서 하는 말이 그쪽에 어떤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은 내가 받은 은혜와 동일한 은혜를 받았을 경우에,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나를 종으로 다루는 것처럼 나 말고 다른 분들도 다룰 것이 분명한데 그처럼 “나는 참 보고 싶습니다. 나는 참 궁금합니다. 주님이 나처럼 다루는 것처럼 다루는 사람들을 나는 보고 싶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이것은 교인숫자문제가 아니에요. 가려면 다 가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분명히 내가 내 힘으로 구원되지 않는 것처럼 주께서 나에게 작용하신 것처럼 똑같은 작용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는 방법, 만나는 방법은 주께서 주시는 계시와 계시를 효과 있게 하는 은혜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교회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것과 전혀 의도가 달라요. 교회는 이미 하나로 확정되어 있고 그것은 따로 있는데 숨겨져 있는 교회가 현상으로 나타났을 때는 사도가 하는 자신만만한 소리는 뭐냐, “내 말이 이해가 되고 고개를 끄덕일 경우에 그 사람은 나와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사람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사도의 모든 말은 전부 다 마지막에 고마움과 감사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후회하면 자살합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집착을 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 이 사람이 사람 죽인 사람이고 엉뚱한 사람 체포한 사람입니다. 꼭 다윗 같아요. 사람 죽이고 간음했고. 그렇다면 우리 같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되는데 그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당당하게 그래서 왕답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뻔뻔함이 어디 있어요.
사람 죽여 놓고, 그러니까 일반적인 나라의 왕이 아니고 구원받는 집단, 그 집합체의 속성과 성질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왕의 자리에 죄수중의 최고의 죄수가 앉아 있어야 합당하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핑계 같기도 하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했거든요. 사도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너무 엉뚱해요.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떡하면 도를 안 닦아도 구원받는가?’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 같아요. ‘도 안 닦아도 어떡하면 보다 더 죄인 되어서 구원되는가?’ 그것만 매일같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할 때 2천년 기독교신학에서 이 본문 가지고 전부 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2장 13절과 14절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라고 해서 육에 속한 사람은 이미 탈락한 사람, 천국에서 탈락한 사람이고 그 다음에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에서 이 어린아이는 육신에 속한 사람인데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합격은 했는데 아직 기초에 머물러서 조금 더 가르침을 받아야 구원이 되는 쪽을 어린아이로 본다는 거예요.
육에 속한 사람은 이미 탈락한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합격은 했는데 아직까지 연수, 또는 수습과정, 또는 계약직직원, 미생, 이 정도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들 하지요. 커트라인은 통과해서 탈락은 하지 않지만 좀 더 훈련을 받아야 될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거 전부 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개인구원에 애초부터 관심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것은 땡, 탈락이에요. 개인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개인구원문제는 주께서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누가 개인구원 받는가? 예수님만 개인구원 받아요. 예수님만 개인적으로 구원했다는 말은 어떤 누구도 개인적 자격으로 구원될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 구원 받았으니까 손들고 “저도 구원해주세요.” 하면 “손 내려. 너는 손 내려. 너는 내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내 기뻐하는 자가 아니야.” 사람들이 손들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 신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손들어요. “만들어 줬잖아요. 만들어줬으니 책임지세요.” 이런 식으로 신은 나를 만들었고 만들었으니까 책임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자식은 무조건 부모에게 손들고 “용돈 내놔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확장되고 이어지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나 엄마한테 하듯이 하나님을 향하여 “만들었으니까 책임지세요.” 만들었으니 장가보내 달라는 식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여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나님은 만들었다고 구원하는 법은 없고 기뻐하심의 요소가 있을 때만 구원하십니다.
그것을 구약부터 이스라엘 내에 실시를 하려고 했고 그것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해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아들이라고 봤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들로 했다 이 말이지요. 그 아들을 뒤늦게 안다고 해서 우리가 아들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아들이 뭔지를 안다고 하는 것과 아들 행세를 하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겁니다. 다들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아들행세를 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처럼 살아가십니까? 아니지요. 복음에는 어떤 양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진리는 양보가 성립이 안돼요. 모든 사람이 탈락하는 수가 있더라도 그 탈락한다는 거기에 주께서는 마음 흔들리지를 않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다 탈락했으니까요. 끝까지 아들답지 않고 아들행세 하지 않을 때는 아들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고집은 일관성 있게 그냥 밀어붙입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말은 사도바울을 다루는 방식으로 자기만 다룰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지요. 그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원칙은 사도바울에게 적용되는 원리원칙과 동일한 원리원칙이기 때문에 그 원칙에 있어서 일체의 양보나 타협은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자를 버리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 원리원칙을 비켜나서 특별대우를 해달란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받았던 원리원칙을 변동시킬 의사는 사도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들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알아들으면 본인의 실력이 아니고 그 사람도 성령의 역사로 은혜를 받아서 나처럼 구원된 사람이고. 따라서 여기서 교회를 만들어놓고 교회에 사람들이 어줍지 않게 움직이니까 그들을 훈련을 시켜서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라고 이 고린도전서를 준 것이 아닙니다. 이 고린도전서는 교회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미 교회는 되어버렸어요. 그 교회에 들어올 사람과 아닌 사람을 판정내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 것이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성경 준 게 아니에요. 정신 차리라고 준 게 아닙니다. 정신 차리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살아도 이 말씀대로 되거든 이미 천국에 소속된 신분인 것을 차후에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편하게 나가거든 우리도 편하게 나갑시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이것은 좀 어려운 말인데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회를 한다는 것은 후회하는 순간 그 사람은 신이 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광주 갈 때 고속버스 타고 가는데 거기에 TV를 틀어놓거든요. 버스 안에 틀어져 있는 그 TV가 언제 정지가 되느냐 하면, 터널 통과할 때에요. 이상화가 스케이트 타고 막 질주를 하는데 갑자기 화면이 정지가 되어버려요. 이 기록이 몇 초인지, 38초인지 아니면 37초가 나오는지. 터널 통과하게 되면 벌써 끝나서 2등 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언제 신이 되느냐 하면, 율법을 잡고 율법에 따라서 회개하고 반성할 때 그 사람은 자기주제파악에서 벗어난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자기가 상상한 자기가 되어버려요. 율법을 안 받을 수는 없어요. 인간양심 자체가 율법이니까. 내가 양심적으로 하는 순간 반성하는 순간이고 그 반성하는 순간 본인이 우상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냥 사는 대로 흘러가면 되는데 내가 누군지, 하고 잠시 멈춰서 그 멈춰진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은 거기서 억지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 이러니 내가 구원 받는 사람 맞구나.’ 또는 ‘아, 이러니 나는 백날 교회 다녀도 지옥 갈 거니까 아예 교회 안 나올 거야.’ 하는 그런 순간, 본인이 아예 판단을 해버리지요.
판단을 하는데 이런 반성과 회개의 체험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겠어요. 나이 60넘어 퇴직하고 할 일 없는 사람이 주로 어디서 많이 보이느냐 하면 공사장에서 많이 보여요. 자기 집 공사하는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나와서 하루 종일 그거 쳐다보고 있어요. 누가 토기나 닭 키우면 하루 종일 그거 보고 있습니다. 꼭 하수도 공사할 때 “할아버지! 좀 저리 가세요.” 포크 레인 움직이는데 그거 들여다보고 있어요. 할 일 없을 때 그래요. 사람이 안 바쁘니까 내가 누구냐를 생각하고 내가 구원받았느냐를 생각합니다.
특별히 자기에게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자기 쪽에서 주님을 위해서 일을 만드는 거예요. 주로 교회에서 가정주부들, 새벽기도 나와서 그걸로 하루 일과를 끝내는 노인 분들, 구역예배 참석하시는 분들, 점심이나 저녁 먹을까 싶어서 심방 따라다니는 권사들, 이게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집에서 노는 사람입니다. 바쁘게 지나가면 내가 누구냐를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성경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누구냐를 도 닦는 식으로 늘 생각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뒤늦게 내가 신이 되는, 나는 이래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확정이 되는 그것이 실패로 끝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성도로 이미 확정되었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알게 되면 후회하게 되어 있고 모르면 뭐든지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어렵게 해서 자꾸 예를 지어내야 하는데. 군에서 첫 휴가 나와서 아빠 엄마가 중국 요리 집에 가서 “뭘 시킬래?” 하니까 “자장면!” “야, 좀 비싼 거 시켜, 비싼 거.” 그런데 “싫어. 나 자장면 먹을 거야.” 자장면 시켜놓고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군에서 자장면을 잘 못 먹었기 때문에 낯선 거예요. 낯설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동생도 자장면을 시켰는데 늘 먹다 보니까 시큰둥해서 ‘이 참에 탕수육을 시킬걸. 형은 그것도 모르고 자장면 시켜가지고…….’ 이미 자장면이 얼마나 맛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때부터는 후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낯선 사건들을 들이닥치게 해서 자꾸 우리 성도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반성하고 회개하기 보다는 감사하는 쪽으로 계속 가게 합니다. 목사가 너무 많이 알면 자살해요. 계속 자신의 바닥을 봐야 하는데 저 높은 곳만 쳐다보고 있어요, 저 높은 곳. 무슨 신기한 것, 새로운 것, 더 깊은 것. 깊은 것 알아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뭐 신비로운 것 알아서 구원받았어요? 아닙니다. 그러면 뭘 알아서 구원받았어요? 알기는 뭘 알아요. 모르는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지요. 자꾸 뭔가 더 캐내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김동리란 사람은 기독교 내용으로 그렇게 소설을 써놓고도 정작 본인은 예수 안 믿어요. 기독교에 대해서 그렇게 연구해도. 지적 호기심, 지적 욕망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체험 있는 신앙을 이야기하는데 이 말도, 체험 있는 신앙 이 말도 엉터리입니다. 옛날 고대인들은 왕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했어요. 왕이 비를 내린다. 우리 보기에는 참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많은 증빙이 되는 체험을 했고 그래서 내린 결론입니다. 왕 또는 왕세자가 제물을 바쳐서 기도하게 되면 비가 오는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사람이 지구는 멈춰있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했어요. 지구는 중앙에 있고 그 주변을 태양과 달이 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구중심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그 주장한 게 천년이 넘었어요. 천년동안 그 주장이 왜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맞는 이야기인제 수천수만의 사례들, 지구가 멈춰있고 태양이 돌고 있다는 그것을 증빙해왔던 겁니다. 체험이요? 백날 모아봐야 신념의 체제밖에 안돼요. 어떤 신앙체험도 자기긍정만 되지 그것은 진짜 진리를 아는 수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냥 사시다가 낯선 것 나오거든, 자장면 나오거든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항상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을 대라면 하나만 대면 돼요. 범사에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 말씀을 전했더니만 전부 다 떠나버리고 한 명도 안 오더라. 사도바울은 그걸 예상하면 안 되고 낯설게 느껴야 되고 그걸 감사해야 돼요. “주여, 제 예상이 빗나가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이 사실을 전에는 미처 몰랐지요. 나는 교회이면 다 교회인줄 알았지 다 떠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자살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생각하게 되면 그 순간 사람은 응고가 됩니다. 딱딱해지고 웅크리게 되고 축소가 돼요. 웅크리고 축소가 되면서 나중에 자기폭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블랙홀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자기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것이 펼쳐집니다. 뭔가 웅크렸던 것도 펼쳐지면서 표면적인 인생이 아니고 입체적 인생이 됩니다. ‘아, 나만 구원받는 게 아니었구나.’ 달리 이야기해서 ‘나만 구원 받으라고 예수님 십자가지신 것이 아니었구나. 나 같은 것은 생각지도 말아야 될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구나. 주님의 계획은 따로 있었구나. 교회 구원이지 내 구원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집합적 구원이지 달랑 내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웅크린다는 말, 점점 축소한다는 말의 반대말은 펼쳐짐이지요. 그렇게 되면 표면적 인생 따로 있고 입체적 인생 따로 있습니다. 표면적인생을 가지고 게임밖에 모르는 인생,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네가 어디까지 잘났나, 나도 잘났다. 젠틀맨이다, 이런 것. 네가 어디까지 잘났나? 나도 잘났다. 이게 껍데기에요, 껍데기. 껍데기에서 양적으로 누가 잘 났나 못났나를 시합하고 있는 겁니다. 입체적으로 들어가 버리면 표면에 불과한 것은 아주 얇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카스테라 먹을 때 종이에 붙은 부분까지 빨아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만 카스테라가 아니고 깊이 있게 다 카스테라에요.
그래서 ‘나라는 것이 뭐냐, 너는 뭐냐? 다 같은 성도인데 왜 나는 못살고 너는 잘 사는가?’ 그게 카스테라 밑에 그리스도가 있고요 그 밑에 그리스도가 활동한 모양새가 다양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되고 부자가 되고 하는 거예요. 너는 거지 나사로 되고 나는 그야말로 창기 되고 강도되고 그런 겁니다. 천국 가면 강도가 되었든지 창기가 되었든지 상관없이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사야 45장의 말씀처럼 그것은 다 기억치 아니해요. 그것은 다 역할이니까요. 사람이 배역을 사람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없고 영화 끝나고 옷 벗으면 선배님, 후배님, 이렇게 되어버리잖아요. 천국가면 그 때는 엘리야는 선배가 되고 우리는 후배가 되고 그것뿐이에요. 따로 모방하려고 하지 마세요.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여기여기 남아라.”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을 내 힘으로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성경을 볼 때마다 전부 다 자기가 장성한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본성이 성경 보는 순간 발휘되고 있습니다. 왜? 개인인 자기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러나 소나기 오기 전에는 우산 펴지 마세요. 일단 비를 맞고 난 뒤에 ‘아, 비 맞으면 안 되겠다.’ 해서 우산 펴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 같은 경우를 주께서 당하게 하십니다. 자, 상당히 말이 애매하게 되었는데 제가 아까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서 엉터리로 주장하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일단 예수 믿는 사람 되었는데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란, 합격은 했는데 연수과정이 되어서 정식직원이 아니라 더 훈련받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되면 교회 내에 계급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중세 봉건사회는 그 계급을 즐겼습니다.
왜? 토지분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세금획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야 국가체제와 질서가 유지돼요. 제일 위에 왕과 제사장이 있고 그 다음에 농민들이 있고, 그래야 나라의 질서가 유지가 되기에 그런 것을 ‘봉건장원제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아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어린아이가 있고 장성한 사람이 있다면 장성한 사람 따로 있고 어린아이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예수 믿고 난 뒤에 다 장성한 사람은 아닐 것이고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또 다시 답변합니다.
성경에 개인구원이란 없다고 했지요. 개인구원은 없는데 개인구원을 위해서 어떤 구절을 뽑아서 ‘그래, 이것은 어린아이니까 해당사항이 나에게는 없고 나는 어른이니 어른답게 굴어야지.’라는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개인구원은 없으니까. 개인구원이 없다면 구원은 어디서 나는가? 참 이런 게 중요해요. 내 쪽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것, 그 문은 따로 있고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문은 또 따로 있어요. 따로 따로 있습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나가려고 한다면………, 말을 좀 천천히 해야 되겠습니다. 동영상이 중지가 돼서.
내 쪽에서 나가려고 한다면 성경가운데서 구원이라는 그 목표점을 내가 예상하고 거기에 맞출 중요한 것들을 다 뽑아요. 뽑아서 자기한테 적용시켜서 목사님들이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이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체험이 되어야 된다.”고 하니까 그걸 실습하고 체험을 해서 내 것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랬든지 어쨌든지 간에 결국 출발점은 나고 또 돌아오는 것은 “나는 구원 받았다.” 하고 파이팅을 외치는 것으로 돌아오니까 백날 처음 가는 그 길이나 돌아오는 길이나 똑같은 길이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주님 쪽에서 다가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 쪽에서 출발한 그 쪽 노선과 다른 노선으로 비켜 지나갑니다. 비켜 지나가면서 충돌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런데 십자가사건을 만약에 음주운전차로 본다면 음주 운전차가 앞 차 박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뒤차가 받으면 그 뒤차로 박힌 우리가 십자가사건을 만난 셈이 되어버려요. 자기는 잘 하고 있는데, 교회 나와서 도 잘 닦고 있는데 뭔가 꽝, 하고 충돌한 거예요. 화가 나서 내려가지고 “이 대낮에 술 처먹고 무슨 짓이야?” 하고 소리 질렀는데 운전석에서 내리는 그 음주운전자가 예수님이에요.
전혀 이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메시아답지가 않아요. 너무 초라한 행색에다가 내가 도 닦는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를 않아요.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냥 내려와서 비틀거리면서 “나를 믿어라.”하고 가버려요. “나는 길이요 진리고 생명이다.”(요 14:6) 그러면 “뭐라고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저게?”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성령이 왔을 때 제자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어요.
주님께서 비틀거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 성전을 사흘 만에 지었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뭐라는 거야, 도대체? 기초공사도 사흘 만에 안 돼.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따라서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어린아이 나오고 장성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거 내 쪽에서 출발해서 경험하거나 체험하지 못하고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내십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내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린아이를 후딱 넘어가서, 1단계 넘어가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겠지요? 그거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작용하는 그 순간 우리가 어린아이부터 출발하거든요. 일단 소나기 맞고 난 뒤에, 소나기 퍼붓고 난 뒤에, 옷 다 젖고 난 뒤에 뒤 늦게 우산 좋은지 알고 우산 펴잖아요. 주님께서 성도한테 어린아이가 뭔지를 알려줘요. 알려주게 되면 어린아이는 그걸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 어린 아이는 그걸 장성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어른 이야기를 할 때 간단한 이야기는 그거예요. 애들 보는데 고려청자를 두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귀한 줄을 몰라요. 십자가 복음을 귀한 줄로 몰라요, 어린아이 신앙은. 자기 구원용도로 십자가 진 줄로 알아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든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 믿으면 내 가정이 화목해지고 내 직장일이 잘되고 내 사업이 잘되고 그런 것인 줄로 알아요. 이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육신에 속한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신에 속한 자라고 알 때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목사님, 아까 이야기한 것 하고 지금 너무 다르잖아요. 아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면서 2천년기독교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해놓고는 왜 이제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까?”라고 하신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은 개인이 성경을 이렇게 이용하면 구원되겠다는 어떤 아이디어로 한다면 그런 개인구원용도로 이 본문이 해석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 이젠 어린아이를 버리고 장성한 쪽으로 나가야지.’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린아이 되게 하십니다. 그 어린아이 되게 하신 것이 뭐냐 하면, ‘어린아이 되어서 구원받아야지.’ 하는 이것을 차후로 돌아보면서 그것은 바로 나에게 감사로 이어질 것 같았지만 감사가 아니고 후회함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진작 잘할 걸. 진작 바르게 살걸.’ 여러분 ‘진즉에’ 라는 후회는 자기가 그 순간 절대 신이라는 착각을 할 경우에만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은 원래 그래요. 후회할 것도 없어요. 우리는 후회할 자격도 없고 회개할 자격도 없어요. 우리는 원래 그런데 인간이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인간이 나아지는 것 같습니까?
‘다시는 내가 화투에 손을 대나 봐라.’ 손댑니다. 경상도에 살다가 서울 가서 서울말을 쓰지요. 명절에 집에 가서 30분도 안 되어서 경상도 말 다 튀어나옵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면 이 어린애 같은 신앙을 본문에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는데 그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받은 자여. 너의 과거가 어떠함을 내가 알려줄게.” 그런 취지입니다. “구원받은 자여. 이미 구원받은 자여.” 구원받은 자여, 라고 한다면 “주님, 제가 구원받은 것이 맞지요?”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육신에 속한 자에요. 구원을 주께서 자기 숙제로 계속 시켜주는데 구원받은 것을 내가 소유화시켜 버리면 소유화되는 순간 우리는 딱딱해지고 응고가 되어버려요. 응고가 되면 그 때부터는 자기관리 한다고 웅크리게 되고, 웅크리게 되면 점점 자신은 축소가 되고, 축소가 되면 어떤 사태가 들어왔을 때는 폭발해 버립니다.
나를 안 알아준다는 그것 때문에 폭발하고 미쳐버리고 자살하고, 이런 경우가 생겨버려요. “나는 이제 자장면 안 먹어.” 이런 거요. 감사가 날라 가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 모든 바리새인과 모든 악한 그 모습을 그 속에 담아줌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나 예수 아니면 너는 절대로 구원 될 수 없었다.” 하는 것을 확정시키는 하나의 재료로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린아이로 어떤 경우에는 장성한 자로. 따라서 장성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 어린아이를 매직으로 지우면 안 됩니다. 이 성경책을 계속 유지하세요.
항상 장성한 자 되었다고 여기다가 다시 돌아보면 어린아이가 바로 나였음을 깨닫고, 어린아이가 바로 나였다고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장성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장성된 사람이 맞잖아요.” 하면 어린아이 되는 거예요. 뭘 어쩌라고? 단독적으로 자기를 응고시켜서는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나는 이렇다.”고 해서는 안 되고 “주께서 이렇게 만들어내십니다.” 하고 나의 자리를 주의 자리로 바꾸어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바꾸어줄 때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나오는데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은 ‘푸쉬키코스’,…… 하여튼 이 원어 나오면 목사가 아마추어들 기죽인다고 원어 쓰는데, 그 다음에 3장 3절에,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을 했기 때문에 성경에 어떤 단어를 써서 구분했는가를 설명 드리는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푸쉬키코스’라고 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구약 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 적 관점에서 육과 혼과 영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이게 육에 속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작업은 ‘프뉴마’라고 해서 영으로, 구약에서 ‘루아’라고 하는데 루아라고 하는 하나님의 신의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푸쉬키코스’라고 사도바울은 표현한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하는 자가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구약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내 쪽에서 어떻게 팔짝팔짝, 뛰면서 신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그토록 애를 쓰면서 도를 닦고 자기관리를 하고 자기가 자기 매니저가 되어서 자기만의 찬란한 역사를 구성해 나가는 사람들,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단어와 그 다음에 3장 3절에 나오는,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할 때 그 ‘육신에 속한 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르키코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정리하면 이렇게 돼요. 복음 안에서 보는 시선과 내가 밑에서 바라보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래, 나는 육에 안 속해야지. 나는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훈육하시면 나는 육에서 점점 영적 사람으로 될 거야.’라는 생각 그것이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자기만 생각하는 표면적 인간밖에 안돼요. 자기를 걸고 자기가 게임을 벌이는 겁니다. 내가 과연 구원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자기가 자기게임을 벌이는 거예요. 카스테라의 새까만 부분, 껍데기 부분이에요. 돼지껍데기부분이에요. 안쪽의 살점부분이 아니고.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입체적 표현은 뭐냐? 2장 12절에,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프뉴마’라고 해서 영을 받았으니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을 쉽게 하게 되면 하나님이 집단적으로 뭔가를 덮었으니까 진짜 신약의 성도는 그 집단에 덮쳐진 사람이라는 그 말입니다. 우리교회 어떤 분이 질문을 했거든요. 오랜만에 중요한 질문을 했는데 제가 이런 답변을 했습니다. “기후와 날씨에 대해서는 지역민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세상 모든 문명이 왜 변하느냐 하면 날씨 때문에 변해요. 인간이 잘못해서 변하는 게 아닙니다. 날씨 때문에 달라져요. 인간의 문명발달이 그래요. 역시 인간은 자연한테 못 이겨요.
날씨가 추울 때는 전부 다 웅크리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날씨가 더우면 옷을 벗는 것처럼, …… 어린애 동화에도 나오잖아요. 더우면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어야 되는 것처럼 주님의 영이라는 것은 상황적으로 들이닥치게 되면 이것은 그 안에 있는 지역민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냥 별나게 몸부림치고 난리치고 할 필요 없어요. 이것이 옳습니까, 저것이 틀립니까, 선교헌금은 얼마를 해야 하고, 작정헌금은 얼마를 내야하고, 교회봉사는 며칠을 해야 되고, 교회출석은 며칠을 해야 되고,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에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교회 오시면 되고 그날 기분이 좀 그렇다 하면 안 오시면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 하려고 목회 30년 했네. “내가 알아서 오겠습니다.” 그러면 백날 와도 날씨에 의해서 덮쳐온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도 닦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건 안 오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영에 속한 사람은 주께서 친히 다루시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인생을 다루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 역사를 찬란하게 구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구성해요. 그게 어린아이 같은 육신인 것을 자기가 영에 속한 입장에서 인정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성령이 덮쳐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감사와 감사밖에 안 나옵니다.
사도는 지금 그런 사람이 있는가를 찾고 있는 거예요. 3절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할 때에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나 말고 쟤, 나 말고 저 집사, 나 말고 저 권사.’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칼 가지고 이 대목 뜯어내세요. 그 사람 성경책에서 이 대목을 아예 파내세요. 자기한테는 해당도 안 되는데. 늘 해당돼요. 10년 교회 나와도 늘 해당되고 30년 교회 나와도 늘 해당돼요. 왜냐하면 날씨는 우리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때로는 육신에 속하고 때로는 신령한 것도 맛보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내 인생 내 관리가 아니고 주님의 관리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혹시 있어요?”라고 외치면서 사도는 자칭 교회라는 교회에 찾아가서 이런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알아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알아듣는 사람은 이런 겁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부터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간통해도 구원받는다고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본인이 즐기느냐, 아니면 감사하느냐?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감사할 거예요. “들켰구나. 감사합니다. 나만 아는 사항을 주께서 아셨구나. 정말 영이 계셨구나. 날씨가 폭설로 덮쳐서 죄 많은 것을 하얗게 만들어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후회한다. 왜 했을까? 아버지 첩이 너무 예쁘고 아버지가 그렇게도 자랑하더니 나는 결혼도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후회하지 마시고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후회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에게 엄청나게 속았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자신에게 속았습니다. 자신이 신인 양, 자신에게 판단기준이 있는 것처럼,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행세한 그 어설픈 몸짓을 이제는 청산하고 주께서 아들 되게 하셨기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그 점에 대해서 평생토록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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