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5강-육에 속한 사람(고전2;13-16) 이근호 141116

아빠와 함께 2014. 11. 19. 08:30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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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속한 사람

2014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2:13-16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지난 주 노선에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노선’이란 단독적으로 개인의 역량을 캐묻는 것이 아니라 소속에 대해서 묻게 될 때 드러나는 사항입니다. 이 노선 파악에는 필히 세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대, 그것은 곧 시대정신을 말합니다. ‘투기=투자’를 계속 요청하는 이 자본주의라는 시대 정신에서 누가 초연할 수 있습니까.

이 세대는 ‘달리는 세대’입니다. 아무리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시대 정신이라는 열차에서 함께 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한 다음에 행동에 나서는 세대가 아닙니다. 그저 누구나 강권당하고 제촉 당하고 촉구당하는 분위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육’란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일이 ‘미련한’ 일이라고 보는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벌리신 모든 것이 미련하게 보지 않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마음, 예수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들이 다 육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육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마음, 곧 영적 존재로 달라지지 아니하면 발견되지 않을 일입니다. 성령께서 십자가 사건을 앞장 세우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란 인간이 신을 심판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육적인 안목이 노출되었습니다.

즉 육적인 안목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 참된 하나님께서 ‘미련한 존재’ 취급받고 살해당했다고 한다면 이는 인간들 내부에 따로 ‘육과 영’을 구분하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장 세우지 않고,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반복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고서 자신을 본다면 자신을 마치 영적 존재인 것처럼 착오를 일으키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의 비극적 상황은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독적행위가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같은 노선 안에 함께 결합되어 있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권세’, 혹은 ‘육적인 권세’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이 육적인 세계에서 탈출을 시도해서 권세자가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참된 영적 대신 가짜 영적 영역을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오게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대체하는 용도로 종교생활을 권하게 될 것입니다. 즉 흔히 영적 세계라는 것이 실은 육의 확장 영역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육에서 올라오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철학과 과학이 미처 따라 올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을 따로 구상해놓고, 그 세계의 입장을 하나님이 말씀을 동원해서 집어넣어 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영업을 펼치는 곳이 성당과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천국은 결코 개인적 자격을 유지하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한 자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곳에 천국입니다. 즉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고, 교회에서 벌어지는 집단 최면 효과에 부응해서 온갖 종교적 기능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첨가해서 기어이 본인이 사는 그런 세계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것조차 육에 근거해서 벌러는 육의 축제판일 뿐입니다.

퍽이나 고상해보이고, 거룩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고 자아를 부정하는 행위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작업을 통해서 자신들의 팔자가 바뀌거나 고쳐지거나 개선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권세자에 위세 안에서 갇혀 있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사용하여 어떻게 육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겁니까?

그것은 ZIP입니다. 지퍼입니다. 갇힌 막을 무색할 정도로 위에서 아래로 지퍼가 열리듯이 육과 영을 차단한 그 막이 찢어지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51-52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한 해설은 히브리서 10:20에 나와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원래보터 영적 세계는 육적 세계로부터 감추어진 세계요 숨어 있는 세계라서 인간이 아무리 상상을 하들 그 세계와 이 십자가로 인하여 열린 세계와는 상관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7에는 이 사실을 문으로 표현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이런 문은 아직도 자기 구원에 우선된 자들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세리와 창기와 탕자와 불의한 청지기나 강도마저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십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5:11-12에 보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자는 아무리 울어도 넣어주지 않습니다. 이 이유는 곧 예수님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변화는 창세기 47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7년 대풍과 7년 흉년을 미리 준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실시합니다. 그 실시되는 언약 안에서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흉년을 미리 아는 요셉은 애굽의 바로왕에게 조언하기를 처음에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뒤 예상대로 양식 살 돈이 다 떨어진 백성들은 가축들을 데리고 와서 양식을 구입합니다. 그리고 난 뒤 예상대로 가축마저 다 떨어지고 난 뒤, 백성들은 경작지를 가기고 와서 양식을 구입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 애굽의 백성들이 바로의 종이 됩니다.

이는 곧 개인주의적 의식으로 육의 권세 세상 속에 살던 자기 백성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몽땅 몰수하고 강탈하는 방식으로 육에서 영으로 변화시켜 나가시는 겁니다. 전에는 자기 인생과 운명을 어떻게하든지 좋은 쪽으로 전환시켜 보려고 한 모든 것들이 다 무용지물되게 만드시는 겁니다.

뒤돌아보면, 몽땅 예수님의 것이 이미 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식으로 변화를 이끌어내시는 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자기 인생이 아니니 자신이 걱정하거나 염려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도 그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육적인 인생임을 알게 하셔서 그 자각이 곧 예수님의 마음과 안목의 확정임을 인정케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영적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종교 생활과 단절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고전 2장 13-16(육에 속한 사람)1411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 13-16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2:13-16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오늘 본문 내용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성경 전체 말씀, 교회에서 하는 이 모든 것 이 성경전체의 말씀이 미련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 그 생각에서부터 출발을 해주셔야 된다는 말이에요. 육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해서 영에 속한 사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성경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다 미련 곰탱이, 아주 쓸데없는 말, 성경책 내용이 비현실적이고 가상적이고 옛날 구닥다리 같은, 지금 안 들어도 무방한,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들려지는 것, 그렇게 이해되는 것, 그게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육과 영의 구분은요 영에 속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구분이지 그냥 보통 사람들은 육과 영을 구분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냥 인간은 나면서부터 인간이고 인간으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 인간이고 죽고 나서도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뭐가 이상해, 아무렇지 않게 신나게 한 평생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고.’ 이렇게 되는 것인데 그것 말고 또 다른 노선이 있다는 생각을 그 사람들은……, 다른 것이 있다는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거지요.



따라서 우리도 그 지점부터 시작을 하자는 말이지요. ‘내가 교회를 한 20년 다니고 성당 다녔다고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고 다 소용없는 짓이야. 누가 본적이 있나? 천국을 가본 놈이 있나? 죽고 난 뒤의 일을 지가 뭔데 알아? 그냥 모르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살다가 죽고 난 뒤에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내 소관 아니고 그냥 사는 동안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다.’라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30년 다녀도 소용없고 성령 받았다는 것도 일종의 착각이며 집단적 최면에 걸린 사항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것보다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원숭이가 사람 되었다는 그것을 철석같이 더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시작해서 네안데르탈인 거쳐서 크로마뇽인으로 진화하면서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그 과정을 더 철석같이 믿고 우주기원 147억년, 지구는 45억년, 인터스텔라를 믿고, 그런 것부터 돼야 돼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이것이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고 현실인데 제가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여기서부터 ‘아니야, 인간이 이렇게 죽으면 너무 허무하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세계,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 하나님의 세계에 내가 참여해야 되고 구원받아야 되고 이 땅에서는 고생 직사하게 했지만 죽어서는 호강을 해야 돼.’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육에서 확장된 가짜 영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성경책을 가지고 작업에 들어갈 때 그 작업하는 영역이 뭐냐 하면, 과학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고 천국 가고자 하는 그 욕망을 세상학문이 달래주지를 못하니까 그 달래주지 못하는 그 미지의, 여분의 영역을 교회나 종교단체에서 공략해서 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어떤 정보를 알려줘서 그것으로 교회장사, 성당장사, 절장사를 해서 사람들의 정신을 좌지우지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때에 그게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영의 세계냐 하는 겁니다.



그게 영의 세계 아니에요. 그것은 또 하나의 조작된 추상적 세계에 불과하고 일종의 속임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이제는 제발 그 지긋지긋한 “육에서 벗어나서 영적 사람 되세요. 그 방법은 우리가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는 그 지긋지긋한 속임수에서 좀 끊었으면 좋겠어요. 발을 좀 뗐으면 좋겠어요. 그 논쟁, 2천년 된 논쟁이에요. 기독교 역사의 2천년 논쟁이 뭔지 압니까? “육에 있는 우리 교회 오시면 영적 사람 만들어주겠습니다.” 이 쓸데없는 사기, 이 사기, 제발 거기서 좀 끊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중의 하나가 육과 혼과 영이라는 그 이론이고요, 지난시간에 그것은 언급을 했고요. 성경은 분명히 합니다. 뭐냐 하면, 육과 영의 구분은 이미 영적인 사람, 영적인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만이 보이기 때문에 육과 영이라는 그 구분조차도 육에서 조작해서는 이것이 반칙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미련하게 보인다는 거예요.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어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을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미련하게, 하나님의 모든 것이 미련하게 보이고 그 미련하게 보이는 것을 내가 스스로 나에게 미련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서 나를 관리하다든지 뭔가 첨가하는 것, 뭔가 고상한 거룩함, 영적세계의 정보를 첨가해서 나를 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없는데 그걸 자꾸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것은 백 프로 사기꾼 교회에요. 본인 스스로 할 수 없는데 “여러분들이 주기도문을 천 번을 하시면 방언이 터집니다.” 하든지 “방언이 터지면 영적 사람입니다.” 하든지 “믿으시고 기도하면서 병이 낫는데 병 나은 그것이 영적인 역사입니다.” 자꾸 뭔가 내가 나에게 뭔가를 가해서 종교적으로 거룩해 보이는 행동을 가미해서 그렇게 해서 내가 스스로 육에서 영으로 탈바꿈 될 수 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게 맞으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인가? 육과 영은 노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노선이라는 말, 어떤 노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관차를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여러분이 달리는 기관차에서 뛰어내리면 안 되지요. 성경에 보면 인간은 노선으로 되어 있어요. 개별적 행동을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개별적 행동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개별적 행동 자체가 어떤 새로운 역량이나 이 세상에 아무 변화를 주지를 못합니다. 어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영업 3팀이 홀라당 날라 가게 될 때에 그걸 초급사원이 밝혀내서 그래서 영업 3팀이 회생했다 칩시다. 그것은 바둑판의 하나의 게임에 불과한 거예요. 바둑판은 질 때가 있고 이길 때가 있는 거예요. 나한테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세상은 달라질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편과 사별했다 할지라도 태양은 그대로 빛나고 있어요. 내가 시험을 못 쳐도, 내가 공부를 못해도 삼성 라이온즈는 우승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게 노선입니다. 노선이라 하는 것을 성경에서 아이온, 세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할 때 세대를 말합니다. 이 세대는 기관차, 열차에요. 개인이 잘한다고 해서, 착한 일 한다고 해서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 한다고 해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과 팔자는 내 행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야 말한다! 이제야 말합니다. 아무리 교회 가서 기도해도 내 팔자는 내 손에서, 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 행동에 따라서 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의 열차 안에서 삶은 달걀도 먹을 수 있고 김밥도 먹을 수 있고, “땅콩! 땅콩!” 그거 먹을 수는 있는데 그런다고 해서 전라도 가는 기차가 경상도로 간다든지 그러지는 않습니다. 제발 좀 그만 속으세요. 내가 나에게 어떤 행동을 가미해서 내 팔자를 고치고 나를 천국 보내지를 않습니다. 금식하고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선교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머리 깎고 절에 가든지 안 그러면 수녀원에 가도 아무 소용없어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기분 상 그렇지요. 테레사수녀쯤 되면 뭔가 거룩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자기만의 착각입니다.



이 세대라고 되어 있는데 그걸 일반사회적용어로 고치면 시대정신이라 하거든요. 시대정신이 뭐냐 하면, 지금의 시대정신이 자본주의 사회인데 이것은 투자와 투기를 요청하는 시대정신이에요. “투자와 투기 안하려거든 너는 내 앞에서 꿇어.” 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끊임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를 넘어지게 만드는 그런 시대입니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낙오자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왕따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에요. 가게를 세웠다. 맞은편에 경쟁가게가 생겨버리면 내 가게 인테리어를 새로 안하면 망하게 되어 있는 세대에요. 뭔가 계속 페달을 밟아야 돼요.



만일에 뛰어내린다면? 뛰어내린다면 그것은 낙오자가 되지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정말 사람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시대정신, 이게 자본주의사회에요. 몇 몇 뛰어난 사람만 환영받고 나머지는 이름도 없이 그냥 죽치고 앉아 있어야 돼요. 이 세상에 사는지 안 사는지 있는지도 몰라요. 도태되어 버리고 내가 여기 있다고 고함질러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가버려요. 외롭지 않으려면 설쳐야 되고 설치기 싫거든 외로움 속에서 그냥 죽어라, 그걸 요청하는 시대에요. 이게 세대, 시대정신, 노선입니다.



그 노선에서 바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신을 죽인 사건이에요. 인간이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죽인 사건입니다. 그 사건, 인간이 신을 죽일 때 뽑혀 나온 시대정신이 뭐냐? “예수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미련하다.”하는 겁니다. 그 기차에 우리가 올라타 있어요. 따라서 예수님에 관한 성경의 모든 것이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이것이 시대정신에 푹 젖어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저는 예수님이 미련하게 보이지 않거든요.” 이렇게 나올 때는 뭔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고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채워주는 가짜 예수를 스스로 인형처럼 만들었기에 그런 거예요. 가짜 예수를 만들어놓고 그 가짜 예수를 쳐다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났느냐?” 하고 날마다 되묻는 식으로 기도했던, 내가 만들어놓고, 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해놓고 그것을 거울 속에 집어넣어놓고 맨 날 내가 나한테 질문하듯이 하면서 그것을 예수라고 지칭했을 때 그것은 백 프로 종교적이고 백 프로 가짜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해놓고 그것을 성령이라, 또는 영이라 했을 때 그런 의미에서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한대로 그것은 백 프로 육에서 나온 가짜영적 세계입니다. 그런 관계를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들어놓았기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이 있는 방법만 동원해서 자꾸 영과 육을, 자기가 만든 가짜예수와 자기를 연관시켜서 믿음 좋다고 우기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깔끔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육의 시대정신, 우리는 육이라고 하는 기관차에 올라탔어요.



그게 육이라 하는 것은 그 기관차 탄 사람들이 다 육이라고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영이고 나 말고 육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거기 다 탄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는 잘났고 자기 빼놓고 다 못난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시대정신이 그 기관차에 올라탄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나 잘되게 해주면 좋은 분이고 나 못되게 하면 예수님까지 팔아먹는 가룟유다 같은 심성을 우리가 이미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장난치는 것이 아니에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이 장난이 아닙니다.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약간 고치면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오너라.” 와 같은 말이에요. 흙인데 흙이 흙이 되기 전에 상상하는 세상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모델이 되고 그 모델을 키워나가는 식으로 평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좋은 예수나 좋은 하나님은 누구냐? 자기가 보기에 자기를 예쁘게 보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보는 그런 신과 그런 예수를 자기가 매일 같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인간이 신을 심판했는데 그 심판이 잘못됐다, 잘됐다, 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속해서 비로소 판단되는 판단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만 영이고 나머지는 다 육이라고 보시면 간단한데 그 영이라고 오신 예수님을 “이상한 사람이야.” 하고 밀어버렸으니까 예수님을 밀치고 난 뒤에 나머지 인간들끼리 모여서 “우리들끼리 육과 영을 가름하자. 육과 혼과 영을 가름하자.” 이러니 그 전부가 가짜가 된다 그 말입니다. 무슨 수로 우리가 영의 사람이 돼요? 우리가 임의로 가짜 영의 세계를 매일 같이 만들어내면서 또 무슨 영의 세계가 들어옵니까? 들어올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제 말은 뭐냐 하면, 스스로 어떤 수작을 부려도 우리는 영의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노선에 관한 문제입니다. 노선에 관한 문제이기에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절대로 뛰어내릴 수가 없습니다. 때려죽여도 천국가도 내가 주인공 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내가 우선적인 관심사라는 사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의 세계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안돼요.



그래서 지난 설교에도 나오지만, 고린도전서 2장 9절에도 나왔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했어요. 십자가란 말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벌써 같은 고린도전서 2장인데 몇 절 지나갔다고 다 잊어버렸지요? 이게 바로 인간은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늘 자기 속에서 제자리 뛰기 하면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주의 말씀은 자꾸 잊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영과 육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십자가사건이 있는 겁니다. 의사소통이 될 수 없는 그 십자가사건을 앞장세우고 등장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에요. 성령님이 와야 “아, 내가 바로 미련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차후에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같은 인간들끼리 의견모아서 될 문제가 아니고요 어느새 내가 탄 기차 속에서 내가 탄 기차가 다른 기차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초장부터 어려워서 제가 참 미안한대요.



제가 노선, 기차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겁니다. 내가 착함으로 내 팔자를 못 고치는 처지에 있다는 말을 제가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교회 다니고, 성경보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내 팔자는 내 힘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팔자가 완전히 고쳐졌다는 것은 이미 뭔가 다른 노선, 다른 길로 가고 다른 열차를 타고 있음이 차후에 느껴질 때 그러면 전에 내가 했던 짓이 무엇인가, 그 짓은 내가 나한테 뭘 집어넣어서, 뭔가 첨가를 해서, 첨가물은 원래 해로워요, 뭘 첨가해서 영인 척, 성령을 받은 척 했던 그 모든 것이 그 자체가 미련한 짓이었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어요? 제발 그 지긋지긋한 그 종교와 교회를 끊어버리자, 그 말입니다. 지긋지긋한! 그 협박과 공갈과 사기를 이제는 끊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이 쯤 해서 목소리를 좀 낮춰야 되겠지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구원 받겠다고 이것저것 실시하니까, 목사 말 듣고 뭘 하니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구원을 받아버린 거예요. 그런데 뭘 또 나한테 첨가물, 그 해로운 첨가물을 나한테 가져다 붙여서 의미를 주느냐 이 말이에요. 그럴 필요 없다 그 말이지요. “맨 날 내 인생은 왜 이렇습니까? 내 팔자는 왜 이렇습니까?” 그것은 미련 곰탱이나 하는 짓이지요. 지금 내 팔자는, 내 소속이, 내가 임의로 이렇게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주어져버린 거예요. 그분이 사실은 계셨지만 우리는 미련하게 봤지요. 시대정신 때문에.



그동안 성령이 아니고서는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았던 겁니다. 군대에 서울에서 온 어떤 졸병이 있는데 경상도고참이 경상도 말로 지시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졸병이 경상도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어이 졸병! 이것 좀 공가라.” 했어요. 그러니까 이 졸병이 공을 들고 와서 서 있었다는 거예요. 공을 들고 서 있으니까 “공고란 말이야.” “공 가져 왔어요.” 한 거예요. 공 가져오라는 말이 아니고 지지대를 밑에 받쳐서 지지를 하라는 그 말을 경상도 말로 ‘공가라.’라고 합니다.



의사소통이, 같은 인간인데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랑은 육에서 나온 사랑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받지 않는 겁니다. 그 받지 않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강도라도 내가 준 사랑으로 너끈하게 갈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그런데 아주 희한한 게 예수님께서 그 말씀하신 시점이 어떤 타이밍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고난 주간을 지키는 기간이었어요. “주여, 부족합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자동차 뒤에도 붙여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가 부족합니다. 내가 부족합니다.” 지금 그렇게 사람들이 하고 있는 그런 기간에, “내 탓이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그냥 죄인을 부르러온 거예요. 그냥. 그냥 죄인을 부르러온 거예요(막 2:17). 내가 나한테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그냥 막 사는 그대로. 여기 막사는 거 또 나왔네요. 막국수, 그런 종류처럼 그냥 막 사는 그것을 그냥 용서한 거예요.



이게 바로 준비된 사랑입니다. 죽었는데, 사람에게 떠밀려 죽은 그 분이 “예수님은 꺼지세요. 하나님 안 믿을 거야.” 하는 그 죄마저, 그 죄를 일부러 유도해서 그 죄마저 용서하는 사랑으로서 그들을 덮쳐서 육에서 영으로 이동한 것이 순전히 네 덕이 아니고 바로 십자가지신, 너한테 욕 얻어먹고 십자가지신 나 예수 덕분인 것을, 나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 덕분인 것을 그런 식으로 증거 하는 그 세계, 따로 있는 그 세계를 가지고 영의 세계, 그 영을 받은 사람을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엇이 미련한가를 알아채는 사람이에요. 무엇이 미련한 짓인가를. 교회에서 자기가 자기한테 팔자를 바꾸기 위해서 하는 모든 짓이 바로 옛날에 했던 그 짓들이에요. 그 짓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아니에요. 예수님을 사랑한다? 아닙니다. 결국은 뜯어보면, 마지막을 찾아가보면 마지막은 그 짓을 한 내가 남보다 우수한 존재가 된 그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겁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가장 육적인 그 면면을 여전히 정당화하면서 꼭 쥐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안양강의하면서 자살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자살의 문제점은 인간은 죽는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인간은 죽는 것이 없거든요. 왜냐하면 죽어도 다시 불러내니까. 인간의 제일 큰 문제가 안 죽는다는 것이 문제에요. 구더기처럼 밟으면 좀 죽으면 좋겠는데 살다가 힘들면 마지막에는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죽는 게 없잖아요. 자살은 거기에 대한 도전입니다. “왜 없어? 여기 있지.” 안됩니다. 사람은 어떤 짓을 가미해도 자기 팔자와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에 우리는 왜 그렇게 현혹되었던가? 그것은 성경 속에서 성경을 봐야 되는데 바깥에 자기를 세워놓고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준비했을까, 무엇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자기 욕망과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주의 거룩한 말씀을 동원시킨 게 문제에요. 육적인 본성으로 미련한 짓을 한 거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성경 속으로. 성경밖에 세우지 말고 성경 속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성경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 주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주님이 기다리고 있다면 거기서 말하는 영적세계라는 것이 어떤 세계인지를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한 예가 나오는데 길기 때문에 부담 안주기 위해서 제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요셉은 갈수록 팔자가 이상해지는데 남들이 잘 돼요. 결국 요셉은 자기 신세에 대해서 상당히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있던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꾸게 되지요. 타이밍이 멋지게 맞아떨어졌어요. 꿈을 꾸고 난 뒤에 그 애굽 왕이 “이 꿈 풀 사람이 있는가?” 할 때에 그 애굽에 술을 관리하는 신하가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있습니다. 제가 전에 뭔가 오해를 산 일이 있어서 감옥에 있을 때 거기 요셉이라는 젊은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제 꿈을 듣더니 그 꿈을 제대로 해석을 해서 꿈대로 제가 이렇게 복직이 되고 같이 있던 떡 굽는 신하는 꿈 해석대로 임금님한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 사람만이 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 왕이 당장 불러들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꿈을 죽 해석을 하는데 처음에는 살찐 소가 나오고 뒤에는 야윈 소가 나와서 살찐 소를 다 잡아먹는다는 꿈 이야기가 죽 나옵니다. 그래서 그게 흉년이 들게 된다고 할 때 왕이 요셉에게 대책을 묻자 대책은 이렇습니다. 이게 7년 대풍년 뒤에 7년은 대 흉년이 오는데 대책은 뭔가? 창고를 크게 지어서 미리 7년 흉년을 대비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때 바로왕은 “네가 아이디어를 끄집어냈기 때문에 네가 내 밑의 최고자리에 앉아라. 네 위에는 나밖에 없다.” 해서 총리를 맡겨서 창고 짓는 작업에 나섰거든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고 창고를 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경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적 일이 진행되는가를 보자는 거지요. 애굽 땅에 풍년이 들고 난 뒤에 흉년이 시작됩니다. 그 때 요셉이 대책이 뭐냐? “백성들에게 양식 줄 때 그냥 주지 말고 돈을 받고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양식을 줘요. 그런데 돈 받고 줬는데 흉년이 더욱 심화되니까 그 다음에는 “짐승을 받고 양식을 주시기 바랍니다.” 백성들과 그 주변 나라의 백성들이 와서 짐승까지 바치고 양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돈 떨어지고 짐승 다 떨어져도 또 흉년이 계속 되거든요. 그 다음엔 뭐냐? 땅을 바치고 양식을 얻게 되어 있어요. 그런 절차로 점점 몰수에 들어갑니다.



임금님이 애굽 땅의 모든 것을 몰수해 나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꿈속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육의 노선에 있는 인간이 영적으로 옮겨갈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의 야곱언약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너무 어려운 용어니까 치워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언약에 의해서 요셉이 꿈대로 움직이는데 그 언약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십자가는 새 언약이라고 하거든요, 언약이 왔을 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육에 있는 사람을 영적으로 옮겨놓았느냐 하면, 모든 것을 강탈하고 모든 것을 몰수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이지요.



점차점차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뭔가 자꾸 이동해요. 누구 쪽으로?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7년 대풍년이 온 다음에 7년 대흉년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그 분 쪽으로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리지요. 그런데 빼앗기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 마지막 심판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마지막 심판을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창조했다는 권리 때문에 그 세상을 멸망시킵니다. 이에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에요.



자기가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게 없습니다. “만들었기 때문에 없애는 것도 내 맘 대로다 .왜? 꼽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내 맘 대로고 건강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것도 내 맘 대로고 주시는 것도 거두시는 그것도 내 맘 대로다. 다만 그 생겨나고 없애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 과정을 보라.”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 진짜 하나님의 창조의도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작전이었던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 것, 다 빼앗겨도 좋아요. 주 안에만 있으면 그것이 천국이고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에덴동산 잊으세요. 에덴동산은 위험한 곳입니다. 왜냐? 거기는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선악과가 앞에 어른거리는 이상, 먹고 싶은 것이 있는 이상은 일주일을 참았더라도 그 다음은 못 참고 따먹을 수 있는 욕구가 또 생겨요. 그곳은 불완전한 곳이고 위험한 곳입니다. 차라리 아픈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고 한 번 들어가면 더 이상 바뀌지 않는 그런 상황이 좋아요. 그게 천국이거든요.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나라기 때문에 주님이 바뀌지 않는 한 그 나라도 바뀌지 않습니다. 내 이름 포기하고 주의 이름에 몰수당하고 팔자가 주님의 연속된 그림자, 주님의 인형으로 가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 47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이제는 모든 백성이, 모든 백성이 바로왕의 종이 되는 겁니다. 다 빼앗겼어요, 다. 다만 제사장 땅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제사장의 위치, 왕과 제사장의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꿈꾸게 하고 꿈대로 풍년과 흉년이 일어나게 했거든요. 그게 나중에 이스라엘한테 그대로 그 시스템이 옮겨져 버리면 너는 왕 같은 제사장나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 예수님이 일찍부터 창조하셨다는 그 정보와 흔적을 왕과 제사장이라는 아주 특이한 위치와 위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제사 없이는 죄용서 없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몰수해 가는 거예요. 내 인생, 내 인생 하는 그것 다 빼앗기시기 바랍니다. 빼앗기면 나머지는 내 인생인데 그 나머지도 몰수를 당하고 나중에는 다 빼앗기면 그분만 존재하고 나는 그 분의 종으로만 존재하는 관계, 그게 영적 관계에요. 그게 영적관계인데……, 여기부터 약간 어려운데요. 그 영적관계를 마귀는 알고 있거든요. 아주 극렬하게 반대해요. 요 근래가 납북된 사람 신고하는 기간이거든요. 여러분이야 주의 깊게 안 보겠지만. 가족 중에 납북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별 관심도 없지요.



납북된 사람 신고하라는 말은 그 사람이 6.25때 납북될 때에 그 사람이 북한으로 가고 싶어서 갔습니까? 이것은 자기 윤리와 도덕적 행동과 관계없이 이승만 하고 김일성하고 어찌어찌해서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골목길 잘 쓸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무리 해도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권세라고 합니다. 권세는 개인의 윤리적 도덕적 선함을 묻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권세자가 바뀌어야 팔자를 고치지 마귀의 권세아래 있는 한 착해도 그것은 그 권세자와 함께 지옥가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구조에요. 그걸 저는 아까 노선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권세자가, 악마가 아까 이야기한 그 점을 알아요.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아요. 귀신은 알아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벌써 오셨습니까? 아직 멸망할 때도 아닌데.” 다른 인간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귀신과 예수님만 주고받아요. 인간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육이니까. 따라서 권세자가 버티고 있는 겁니다. 버티고 있는 이상은 인간의 지혜로서는 주의 말씀이 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지요. 십자가 자체가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권세에 눌려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권세를 어떻게 뚫고 들어오는가? 그게 지퍼, 위에서 쫙 여는 것, 그 지퍼를 열고 들어와요. 지퍼라 하는 것은 막이 있다는 말이고 막은 이쪽에서 뚫을 수 없고 위에서부터 찢어지고 열려야 되는 그것이 지퍼잖아요.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지퍼를 열고 온다는 겁니다. 깡패 영화에 보면 사람을 부대에 넣어서 땅에 묻었다가 “나와!” 하고 지퍼 열잖아요. 그때는 눈이 부시니까 눈도 잘 못 뜨잖아요. 그 눈부심을 복음의 광채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복음의 광채가 비취면서 그동안 우리가 미련하고 이상하게 보였던 그 예수라는 자가 종교교주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지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두 가지 영역 속에, 권세 속에 눌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 와서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이런 첨가물이 우리 운명을 달라지게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우리는 갇혀 있었던 거예요. 육으로서 영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쓸데없는 일들을 그 동안 해 온 거예요. 수십 년 동안 목사, 장로, 집사가 되어가지고.



십일조 하면 목사가 그거 먹고 집사 되게 하고, 교육관 짓는데 땅 바치면 그거 먹고 장로 시켜주고, 하는 그 짓에 우리가…… 아닌 줄 알지만 뭔가 찝찝하거든요. 혹시 내 팔자가 잘못될까 싶어서. 그런데 내 팔자 자체가 몽땅 압수당해 버리면 그 때는 협박과 공갈을 더 이상 당할 필요가 없어요. 내 인생이 없고 주님의 인생인데 내가 왜 그런 사기꾼에게 협박 공갈을 당해야 됩니까? 지퍼를 열고 바깥에 나와 버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랑의 가치만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주님의 사랑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나를 구원하는 내 사랑으로 본다면 절대로 천국에 넣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인간 천국가면 거기서 또 자기 자랑합니다.



죽었다는 말은 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세상의 특징인데 자꾸 내가 살았다고 여기니까 우리가 도대체 해결책이 안 나오는 거예요. 맨 날 “얼마나 금식하면 은혜 받겠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주님 등기로 넘어갔는데, 내 것이 없는데 또 내 것을 쥐고 있으니까 일곱 귀신이 다 달려드는 거예요. 제가 참 답답해도 보통 답답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구원을 소개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 대립되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 피로 용서한다고 해놓고 어떤 구절에 보면, 어떤 구절이란 게 요한계시록 3장 7절 같은 경우에,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특별히 마태복음 25장의 경우에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신랑 오고 난 뒤에 문 열어 덜라고 해도 문을 안 열어주지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불의한 청지기는 넣어주면서 기름 준비 안 한사람은 왜 안 넣어줍니까? 이게 모순되지 않습니까? 이게 내 구원중심으로 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가치 있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기사랑을 이용해서 내 사랑으로 연장시키려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천국에 넣어줄 수가 없어요. 왜? 천국은 주님의 세계지 내 세계가 아니거든요. 개인적인 가치가 인정받는 세계가 아닙니다. 면류관도 다 반납해야 돼요.



그런데 자기 사랑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찍어 발라서 구원 받겠다? “너는 안 믿었지? 나는 믿어.” 이렇게 지 자랑할 것인데? 그런 사랑은 소용없는 사랑이에요. 그래서 지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문 앞에서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다는 말이 문을 가지고 양쪽 세계를 구분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문의 의미는 모르고 내가 노력해서 가겠다? 이제는 반성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넣어준다? 절대로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넣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반성을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내가 내 식으로 어떤 가미를 해서 나는 기어이 살아남겠다고 시도하는 사람은 이미 원인이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에서 완전히 거절당해요.



처음에 주님을 사랑했다고 하지만 사랑했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떠나가서는 마지막 눈길까지 외면하지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도 문 앞에서 울고 그렇게 해 본들 그 내 마음속에, 사랑이 어떻게 내 마음에 남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박 강성의 ‘문 밖에 있는 그대’ 가사를 읽고 있습니다. 한 번 떠난 사랑은 내 맘에 없어요. 한번 떠난 사랑은 내 맘에 없다는 그 말은 뭐냐 하면, 마음자체가 문제인데 내 마음 고칠까, 자꾸 그러는데 네 마음은 필요 없는 거예요. 주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되지 내 마음을 내가 관리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인간은 자기 마음 관리 못합니다. 이걸 결론으로 삼고 싶어요. 내 마음을 어떻게? 우리는 내 몸이 내가 감당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거, 영적인 사람은 다 아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우리는 이 몸 하나도 내가 감당이 안돼요. 성질나는 마음을 어떻게 그걸 억누릅니까? 괜히 아닌 척 할 뿐이고 술 먹으면서 달랠 뿐이지. 제가 하는 말이, 그게 감당이 안 되지요? 안하면 돼요. 안하면 돼요. 그게 막사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막 산다 하니까 “목사님, 그 소리 듣기 싫으니까 바꾸세요. 어떻게? ‘함부로 산다.’로.” 아이고, 함부로 사는 것이나 막사는 것이나.



문밖에서 두드려 봐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문밖에 있는 그대여 눈물을 지워요. 가슴 아픈 사랑은 이제는 없어요.” 끝! “이젠 들어오지 마. 이미 끝났어. 너를 못 잊는 이상은 네가 들어올 자리는 없어.” 그러니까 그들은 “에이, 싫으면 말고! 나도 당신 싫어요.”라고 하시거든 그게 바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2장 14절의 말씀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주님이 하는 말이 미련하게 보이는 거예요. 미련하게. 그러면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다시, 다시 하면 돼요. 그동안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갖 짓 했는데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면 그게 바로 영적 사람입니다.



“주여, 그게 그렇게 내가 찾고자 했던 죄였고 다른 것이 아니고 ‘나부터 먼저! 내가 살아야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하는 그 생각, 그게 바로 미련한 것이고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이렇게 발견한다는 것은, 비로소 육이 무엇이며 영이 뭐라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영적 사람이기 때문에 ‘육이 뭐냐? 은혜 받은 것이 뭐냐?’ 하는 오늘 본문이, 말씀이 이해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뒤돌아보면서 “주여, 제가 바로 그런 자였는데, 지금도 매일 같이 나만 쳐다보고 나만 위해서 살아가는데 그게 육이라는 사실을 이미 영의 사람 된 입장에서 평생 동안 ‘이게 육이고, 저게 육이고, 이게 육이고, 저게 육이다.’ 하는 것, 날마다 새로운 육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하시면서 영에 대해서, 주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알아가는 것, 그런 영적 사람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육이 뭐냐를 유일하게 아시는 여러분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지긋지긋하게 속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를 구원할까, 저렇게 하면 나를 천당 보낼까?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도 영적인 일인 것을 뒤돌아보니 깨닫게 됩니다. 너는 육이고 네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고 십자가 피로 너의 죄를 용서해서 의롭게 되어서 영생에 넣어준다는 이야기가 살아가면서 늘 새롭게 들려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