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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0강-성전과 몸(고전3;16-17) 1412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2. 24. 08:14
2014-12-21 12:43:20조회 : 203
성전과 몸 141221 이름 : 이근호

성전과 몸(고린도전서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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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과 몸

2014년 12월 2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4:16-17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오래 살아남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원토록 남기를 바라는 것은 성전입니다. 인간이 위주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 성전이 위주가 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진행시키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나 위주로 해석했던 모든 성경 해석은, 성전 위주의 해석 앞에서 오류로 들통나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미처 모르는 일이지만, 하나님 안목에서 보면,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은 성전되기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각자 살 궁리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적 세상에서 구멍을 내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분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일반적으로 죽는 것과 예수님 죽는 것은 완전히 차이납니다. 사람들이 다 죽는 것은 ‘죽어 마땅함’의 취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죽으심은, 죽음마저 이길 수 없는 분으로 등장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시는 유일한 분이 되십니다. 바로 이 십지가와 부활의 취지를 하나님께서는 허비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성전으로 만들어내어 영원히 기념코자 하십니다.

거기에 비해 인간들의 성전은, 본인들이 생각해놓은 하나님상과 그리고 자신들이 정리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해서 신을 달래고 분노를 잦아들게 해서 자신들의 생존생활에 지장이 없게 하는 조치로서 조성된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 존재가 우선된다는 정신을 신 앞에서도 양보하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뚜렷한 주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슨 이유로 발생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뭐든지 위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마저 자신의 살 궁리를 위한 아이디어로 차용합니다. 즉 “인간은 왜 죽는가? 죄로 인하여 죽는다. 그렇다면 죄 씻어 내가 다시 영원히 살 방법은? 그것은 바로 십자가 피를 믿어주는 일입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살려내야 될 사물로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날 위해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뭐든지 사물과 물체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본인을 보면서 본인을 덩치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 듣지 못합니다. 여기에 한 예가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13절-15절에 보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에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성전 안을 소제하고 난 이후의 성전이 과연 바른 성전일까요 아닐까요? 바른 성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46년과 3일을 비교하시면서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니,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이나 모두 예수님께서 지으시는 성전은 건축물이라는 이 사물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분명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겁니다. 나중에 부활의 영이 제자들에게 임하니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사물체로서의 성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몸을 두고 말한 것임을 인정합니다.

즉 몸, 물체에서 사건이 나온다는 말이고 그 반복적으로 나오는 그 사건이 바로 성전되게 하시는 본 내용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이 자신의 몸에서 자신의 몸을 우상시하는 그런 기능이 계속 사건화되어 발생하는 바를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인간들인 사물을 보면서 먼저 자신을 사물화하려는 안목을 경유해서 바깥에 사물을 보기에 뭐든지 우상이 아니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성전을 짓겠다는 것은 바로 현재 자체가 ‘직접적 미래’가 된다는 말입니다. 즉 미래를 위하여 현재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미래를 모르기에 현재 손에 만져지는 이것을 고정화시킬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성전되게 하신다”가 아니라 “내가 성전이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성전이 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계속 터져 나오는 ‘사건 생산 공장’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 눈에 46년 지은 성전이 보인다는 것은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그 어떤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안목으로 예수님께서 ‘3일 만에 지음’을 언급하니 바로 저 건물을 3일 만에 그대로 짓는다고 이해한 겁니다.

바로 이런 면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는 것은,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의 바로 그런 안목이 곧 ‘우상시된 성전’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곧 인간들이라는 점을 지적하신 겁니다. 이 성전이 우상이라면 이는 곧 그런 안목을 지닌 인간의 몸을 본인들은 우상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이란 이처럼 우상화되어 있고 죄 뭉치로 되어 있는 이 사물을 거룩을 사건화시켜 성전으로 바꾸어진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레위기 22:4-6에 보면, “아론의 자손 중 나병 환자나 유출병자는 그가 정결하기 전에는 그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모든 사람과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것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 성물을 먹지 못할지며”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더럽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배출물이 더럽다는 말은 인간 몸 자체가 더럽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접촉되는 모든 환경이 더럽다는 겁니다. 이 더러움을 거룩함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흠없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뿐입니다. 이 제사가 영원히 거룩을 내뿜는 사건적 장소가 바로 성전입니다. 거룩을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된 자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더러움을 계속 내뿜게 되고, 그것을 계속해서 성스러움을 바꾸는 십자가 효과도 계속해서 반복되게 됩니다.

바로 이 공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영원히 기념되면서 하나님의 거주지가 됩니다. 이 공장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일’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성전도 없고 나를 위한 거룩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에서 나와서 주님의 위한 거룩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감당 못할 성도로서의 증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은 아예 없음을 명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강-고전 3장 16-17(성전과 몸)1412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입니다. 신약성경 266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사람이 살아야 되겠다는 것은 기본 본능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사람, 네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경이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할 때의 그 16절 말씀에서 ‘너희’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전이 안 될 것 같으면 17절 말씀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공갈이나 협박하는 것 같기도 한데 공갈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고. 너희는 네가 왜 있는지를 네가 스스로 분석해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전이면 계속 살 것이고, 영생 얻을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못한다면 본래의 만든 취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제거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제가 설교 초반에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전이 중요하다고 다짐에 다짐을 분명히 하거든요. 하는데 방금 제가 말한 것에 대해서 가장 잘못되게 이해하는 사람의 질문이 뭐냐 하면,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성전 됩니까?” “그 질문을 왜 하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멸하지 않으려고, 안 망하려고.



방금 제가 했잖아요. 우리가 안 중요하다고, 우리가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했건만 우리는 우리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 성전 안 되면 이러다가 이 코너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식이에요. 잘못된 신앙이라 하는 것은 성경이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우리 근본 자체가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에 항상 곡해해서 이해가 되는 겁니다. 잘못된 신앙의 한 예를 들겠습니다. 사람이 죽는다. 죽는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요. 살아봐야 80, 90이라 하니 나이가 70이라 하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이제 며칠 남지도 않았어요. 10년이나 15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걱정된다는 말이지요.



사람은 죽는다고 성경에 되어 있으니까 “왜 죽습니까?” “로마서 6장에 되어 있는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죽습니다.” “그러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죄용서 받으면 됩니다.” “죄용서는 어떻게 받으면 됩니까?” “예수님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으면 여러분은 영생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하는 이것, 잘못된 신앙이에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어떻게 하면 내가 삽니까?’ 부터 출발해서 중요한 목적이 내가 그냥 사는데, 인생이라는 내 코너가 끝나지 않고, 그냥 내가 사는데 목적을 두고 성경을 보고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가 어떻게 하면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네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하면, 교회 와서 무엇을 생각하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내가 영생을 얻느냐, 거기에 관한 것이 성경이 있는 목적도 아니고 교회가 있는 목적도 아니에요. 그 잘못된 것을 긍정해 줘버리면 그 사람은 교회 와서도 천국은 그림의 떡이 되는 겁니다. 소용없지요.



처음부터 그걸 수정해야 되는데 그게 수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교회 와서 ‘어떻게 하면 내게 유리한가?’ 그런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거 잘못된 겁니다.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을 했어요. “조상의 기도가 우리에게 효과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했어요. 조상이 기도하고 착한 일을 하면 그 효과가 3, 4대 후손까지 미쳐서 우리한테도 복이 온다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데 그게 진짜냐고 했어요. 그래서 답변하기를 “성경에서 나오는 기도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기도 말고 다른 분의 기도덕분에 우리가 지금 천국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내 자신을 부인할 수 있어야 돼요. “주여, 내가 기도해봤자 나한테 어떤 효과도 없음을 내가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가 돼야 된다는 말이지요. 도대체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을 해야 만족하겠어요? 두 시간이요? 세 시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철야했다고요? 깨끗한 정신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게 바로 교회 와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마귀의 시험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마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마음속에 갖고 있는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통보해줍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모든 세상 인간이 다 죽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고 당해내지 못하는 어떤 싱크 홀, 싱크 홀이란 땅이 푹 꺼지는 현상이잖아요, 뭔가 이 세상의 어떤 오점 같은 것, 어떤 구멍이 생겼는데 주변의 땅이 그 오점인 싱크 홀에 대해서는 감당 못하는 것, 어떤 특수한 지점이 있어요. 일종의 증상 같은 오점, 포인트, 이 세상 대지에 펑 하고 구멍을 뚫는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난 분이 있다면 우리가 그 살아난 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냥 인간들끼리 살면 “그래, 인생이란 그렇게 살다 죽는 그것이 전부야.”라고 말하는 것도 얼추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데 예수라는 분이 죽었다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그 자체가 잘못된 진리, 이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제대로 모르면서 사는 것이 돼요.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죽었다가 살려냈기에 이것은 우리한테 속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문제에요.



우리에게 속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문제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도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하나님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자기 아들, 죽은 가운데서 살아난 그 분의 동일한 작업의 반복이 우리 인생에 어떤 싱크 홀, 구멍, 증상으로 나타내게 되면 우리는 살 수가 있는 거예요. 그 산다는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있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3장 16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리라.” 성전이 되고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에 의해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영생 얻는 것을 좋아하거나 그것을 기대하지 마시고 먼저 주님이 하신 작업이 우리에게 어떤 오점과 증상을 남기는 거예요.



오점이라 하니까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화상을 입었다. 어릴 때 뭘 잘못 만져서 화상을 입었다면 나이 들어 할머니 될 때까지 그 화상이 계속 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에 대해서 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그 세상에 구멍을 뚫은 겁니다. “네가 이것까지 알아?” 하고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시킨 거예요. 이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터뜨린 사건이 되는 겁니다. 어떤 재벌집이 있는데 그 집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으니까 어떤 가짜 딸이 그 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재벌 집 엄마가 하는 말이 “얘야, 내가 너 어렸을 때 점이 있었는데 그 점이 어디 있니?” 하니까 그 점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어디 있는지를 몰라요. 가짜 딸이라서 그런 거예요. 진짜 딸은 왼쪽 어깨에 점이 있는데 가짜 딸은 점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진짜 딸, 은 현수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청담동 스캔들의 은 현수는 왼쪽 어깨 뒤에 점이 있는데 가짜 딸은 점이 없네? 그러면서도 딸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점이 우리 몸에 있어야 돼요. 내가 심지 않는 점, 그리고 그 점은 내가 잘못해서 생긴 점이 아니고 우리가 죄 지어서 생긴 점이 아니고 주께서 뭔가 일을 우리에게 저질렀어요.



애가 자기 몸에 점을 새긴 것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생겨버린 그 점이 그 집안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의도 없이 우리에게 어떤 증상을 남기게 돼요. 그 증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전혀 상관없어요.



제가 어떤 분과 전화통화 하는 가운데 제가 보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를 언급을 했어요.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십자가마을의 복음을 듣고 자기가 아는 어떤 분은 술을 막 마신다는 겁니다. 그 분 자신도 우리 교회 설교를 들으면서 “술을 이렇게 막 마셔도 되나?” 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제 복음을 아니까 술을 막 마셔도 된다.”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도 막걸리를 한 잔 마셨다는 겁니다. 평소에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주저를 하다가 이제 복음 알고 막 술을 마셨다는 그 말은 목적하는 바가 ‘술을 어떻게 편하게 먹는가?’를 목적으로 복음이 차후에 동원되는 셈이 돼버렸어요.



하나님의 거룩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심어준 점이 아니고 하나님이 심어준 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는 이렇게 거룩한 점이 있고 그래서 너는 거룩한 성전이다.” 이걸 알려주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너는 거룩하니까 이제는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게 되면 ‘점은 내 의사 없이 찍어놓은 것이고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이런 식이 돼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목적이 그대로 문제가 안 되고, 세상 모든 것이 죄가 아니고 우리가 당당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해버려요. 마치 막 살아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아이고, 왜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는 게 되는데……, 딴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존재적 합주’라고 하는데 <맘마미아>라고 하는 뮤지컬에 보면 있어요. 딸이 결혼식을 하기 전인데 아버지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아버지 쪽에서 내가 아버지라고 하면서 등장하면 참 쉬운데 아버지가 세 명이에요. 그 뮤지컬을 보면 나옵니다. 그리스의 해변 가 작은 모텔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등장하고 <아바> 그룹의 노래가 나와요. 아버지가 세 명이에요. 세 명이 되어서 이게 합주가 되는 거예요. 합창이 되는 겁니다. 서로가 아버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의 흔적, 증상을 찾으려고 딸은 애를 써요.



결혼식은 앞두고 있는데 손을 잡고 들어갈 아버지가 세 명이 등장했으니까 3대 1이에요. 그 셋 중에 하나일수도 있고 셋 다 엉터리 일수도 있고. 너희가 성전이라는 말은 뭔가 우리 몸으로 하여금 찾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헷갈리게 만들면서 찾아가게 만드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이 성전이고 너희는 거룩하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룩과 우리의 성령 받은 것을 총동원합니다. 그 총동원한 다채로운, 부채 살같이 펼쳐진 모든 다양함이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거예요.



그 기독교라는 그거 다 아니거든요. 그 기독교 중에 하나 나온 게 뭐냐 하면, 이제는 복음 아니까 술 막 마셔도 된다는 그것이 하나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증상이 있다고 해서 점으로 찍어놓으면 우리가 눈으로 보면 그만인데 문제는 “너희 몸은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이다.” 할 때 그 우리 몸이라는 자체가 가짜 성전, 가짜 거룩, 가짜 성령, 가짜 예수, 가짜 복음을 유발하고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치가 되고 생산 공장이 된다는 겁니다. 이 점을 뒤늦게 파헤치지요. 우리가 현재 느끼고 있는, ‘내가 이렇게 하니 거룩이다. 이게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몸이다.’ 하는 이 현재라는 이것을 어려운 말로 직접적 미래라고 해요.



미래가 앞서서 직접 우리 현재를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미래를 모르고 현재만 알기 때문에 현재가 전부라고 알고 그것을 붙잡는 거예요. 붙잡으면 그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이라는 게 뭐냐 하면, 우상이라 하는 것이 어떤 대상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일단 나의 몸을 보고 나의 몸을 경유해서 그 대상을 바라보게 되면 그 대상은 백 프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럴 때 “목사님, 이게 진짜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지시를 하던데.” 이렇게 할 때 그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보는 순간 이전에도 이미 우리는 아침마다 거울 보면서 내 몸을 보고 난 뒤에 그 예수님을 봤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이라고 우리가 단정 짓는 것은 내 몸과 예수님의 몸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단정 짓는 겁니다. 내 몸이 아니니까, 아무리 해도 내 몸과 같지 않으니까 그 차이로 예수님 몸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거예요. 그 예수는 우상인 거예요. 사람은 백화점의 어떤 옷을 봐도 그냥 보지 않고 나는 어떤 옷을 좋아할까, 를 생각한 뒤에 백화점 옷을 보기 때문에 그 옷은 하나의 우상이 돼요. 뭐든지 괜찮은 것, 고상한 것, 아름다운 것, 그것을 보게 되면 돌아서면 그것이 다 하나의 우상이 되어서 또 보고 싶지요. 보고 싶은데 보고 싶은 그 다음부터는 시들해져요.



꿈에서 예수님을 한 번 봤잖아요? 그 다음에 똑같은 예수가 등장하면 이제는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그 한 달 뒤에 그보다 더 멋있는 예수가 나온다면 그 차이로 인하여 나중 본 것이 진짜 예수처럼 느껴져요. 인간은 본인이 우상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본인을 보고 대비하면서 비교하면서 보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 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인간의 사물을 보는 그 사물 자체가 우상이 된다는 겁니다. “나의 모습을 형상으로 만들지 마라.” 모든 것은 우상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은 본인을 어떻게 보는가? 인간은 본인을 하나의 사물로 보기 때문에 본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미 나부터 우상인 입장에서 나를 거쳐서, 나를 경유해서 보는 그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는 예수님, 그러니까 그 예수는 우상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우상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우상이라는 것은 형태가 사물로 등장한다. 그러면 사물로 등장하지 않고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몸을 거룩케 하는가? 그것은 사물에서 뭘 로 바뀌면 되느냐 하면, 사물에서 사건으로 바뀌면 되는 겁니다. 사물에서 사건으로 바뀌면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맘마미아>에서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따지는 거예요. ‘내 아버지가 누구지?’ 어릴 때는 그걸 따지지 않았어요. 커서 따지는 거예요. 어릴 때는 자기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커서 점점 반복적으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청담동 스캔들>에서 왼쪽 어깨에 점이 있다는 것이 어릴 때는 아무 문제가 안 되었어요. 그런데 진짜 엄마를 찾느냐 마느냐 할 때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거지요. 몸은 있는데 그 몸에서 뭐가 생산되느냐?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건이, 하나님의 성전 만들기 사건이 이 몸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새롭게 등장하면서 이제는 내가 알고 있던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계속해서 포기하고 버리면서 ‘그것은 아니다.’ 하게 만드는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간단하고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주님이 채찍으로 성전을 다 엎어버렸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문제를 던질 테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겉으로 답변해도 괜찮습니다만 설교시간이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을 휘둘러서 성전에서 양이나 소, 돈 바꾸는 사람들도 다 쫓아내시고 상도 엎었습니다. 그렇다면 정결하게 된 그 성전은 성전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한 그 성전은 성전입니까, 아닙니까? 그게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게 사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흔히들 아는 상식,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고 그냥 예배당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예배당은 우상이 되는 거예요.



이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고 예배당일 뿐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전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우리교회는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예배당이라고 했기에 우리 교회는 성전이 맞다고 우길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교회가 예배당일 뿐이며 그래서 우리는 바른 복음을 알기 때문에 참된 교회라는 것은 어떤 생각이냐 하면,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그 나를 경유해서 나는 결코 우상이 아닐 것이라는 그 생각을 경유해서 내가 맞다고 하면 맞는거야, 라는 자기 우상을 확대하게 되면 우리교회는 괜찮은 교회가 돼버려요. 그것도 우상이에요. 진짜 우상은 어떤 사물이나 존재가 아니고 계속 사건이 터져 나와야 돼요. 고정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방금 요한복음 2장 13절을 읽었잖아요? 그 뒤에 요한복음 2장 19절에 진짜 성전 나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본문에서 사흘 만에 짓겠다는 이 말을 그 현장에 있던 제자들이 들었어요. 듣고 난 뒤에 제자들이 혼란스럽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것을 내가 3일 만에 짓겠다고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46년 동안 지었는데 내가 3일 만에 짓겠다는 그 예수님의 말을 제자들이 들어보니 46년 동안 지은 그 똑같은 건물을 주님은 3일 만에 지어내겠다는 식으로 그들은 받아들인 거예요.



요정들이 한 20만 떼로 몰려와서 아침에 눈 뜨니까 기초공사 다 되어 있고 그 다음날 눈 뜨니까 한 층 올라가고, 이런 식으로 짓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알아먹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 자신이 ‘우리가 어떤 성전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까?’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것을 알기만 하면 영광 돌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라고 자기를 스스로 우상시하는 거예요.



사람은 죽습니다. 왜 죽는가 하면, 죄 값으로 죽지요. 죄 값으로 죽으면서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면 될 것인데 ‘죄 값으로 죽어야 될 내가 어떻게 삽니까?’라는 발상이 나오는 것 자체가 자기가 온전히 죄인이라고 지금 수긍하기 싫다는 이야기거든요. “죄인은 맞는데요. 이 죄인이 어떻게 삽니까?”라는 말은 주님께서 “너 죄인이야.”라는 그 지적과 “예, 죄인인줄 아는데요. 그걸 아는 내가 어떻게 삽니까?” 하는 것은 주님이 지적하는 그 죄라는 것을 온전히 우리가 거부를 하는 거예요.



진짜 온전히 죄인이 돼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산다는 것은 이미 끝나버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희망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희망을 지워버리면 내가 존재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교회 다니는 이유는 내가 나중에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 오잖아요. 그런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의 죄악 된 증상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그냥 자살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사람에 떠밀려서 죽었거든요. 그 떠미는 민중 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시는데 우리는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46년 동안 지었다는 말이지요. 이게 예수님 이야기에요. 46년 동안 지은 것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니까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아마 주님께서 우리더러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46년과 3일을 비교했구나. 그렇다면 저 건물을 46년 동안 짓느라 애를 썼지만 예수님은 솜씨가 있어서 3일 동안 짓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니까 ‘후딱 짓는가?’ 그런 뜻인 줄 안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보니까 제자들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알았다는 겁니다.



부활하고 난 뒤에 알았다는 말은 설명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백날 설명해 봐야 우리 속에는 “그러면 우리가 어느 교회를 다녀야 합니까? 어떤 성전을 만들면 됩니까? 내 몸을 어떤 성전으로 갖추어놓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다고 인정해서 나를 구원해 줄 겁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제일 처음에 했던 이야기에요. 성경은 우리 이익 되라고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한 작업이고 그 작업은 우리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지시받은 작업을 그냥 밀어 붙인 식이에요. 그 밀어붙인 식의 결과물이 뭐냐 하면, 너희 몸이 성전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합작해서 하신 일인데 거기에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거든요. 끼어들 자리가 없으니 우리를 배척해버린다고요. 배척하는 이유가 “너는 나가놀아라.”입니다. 우리가 만약 ‘나가 놀아라.’가 되어버리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채로 방치되어 있는 나는 ‘어떻게 나를 살릴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서 완전히 배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가 답답한 거예요. 나는 나를 살려야 되겠는데 주께서는 “나가 놀아라.”하니까 교회와도 안 돼, 기도해도 안 돼, 성경공부 해도 안 돼, 예수 믿어도 안 돼, 성령 받아도 안 돼, 십자가 믿어도 안 돼, ‘자칫하면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은 뭐냐 하면, 뭐든지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 ‘주되심’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심 쓰다 보니까 나의 우상적 이해만 자꾸 반복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네 몸뚱이 자체를 하나의 사물로서 생각하기에 그렇다. ‘내 몸뚱이가 어떻게 삽니까?’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주여, 내 몸에서 주의 어떤 사건적 증상, 사건이 어떻게 일어납니까?’를 보여주면 된다.”는 거예요. 방구 뀌었으면 냄새나기 마련이거든요. 냄새를 그냥 내면 되는데 안 뀐 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안 뀐 체를 하니까. 이래야 제일 쉽네.



뭔가 풀풀 예수의 냄새를 피우면 되는데. “나는 어떻게 삽니까?” 하는 그것은 냄새에 포함되면 안되는 냄새거든요. 그것은 우상적 냄새가 되는 거예요. 레위기 22장 3절에서 9절까지인데 들어보세요. 3절에,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4절에,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 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자나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만한 자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성물을 먹지 못할찌며…….”



지금 이런 이야기들, 벌레라든지 시체라든지 어떤 더러운 것을 접촉하게 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를 못한다는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 듣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런 벌레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 악한 벌레를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 본인이 만들어놓고 우리보고 접촉하지 말라고 하면 처음부터 만들지를 말지. 왜 만들어놓고 우리를 접촉케 하느냐는 말이지요. 창세기 2장에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아예 선악과를 안 심어놓으면 되는데 왜 심어놓고 우리보고 먹지 말라고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지금 수긍하고 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거룩 만들기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복음 알았으니 이제 술 맘껏 먹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우리 맘대로 술 먹으라는 세상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은근히 노렸던 거라니까요. 마음 놓고 술 먹고 싶다. 이걸 예수 이용해서 마음 놓고 술 먹어볼까 하는데 그걸 위해서 준 게 복음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술 먹으나 안 먹으나 상관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그러니까 술 먹어도 되잖아.”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술 먹으나 안 먹으나 그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으니까 먹어도 되잖아.”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모든 인간은 더럽다는데서 하나로 묶어 놓았어요. 거룩할 수 없다. 성스럽지 않다. 그걸로 전부 묶어 놓은 거예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주께서 우리보고 더럽다고 했으면 그 다음의 과제는 간단한 거예요. 이것은 머리 안 좋아도 괜찮아요. “어째서 더러운데요?” 이러면 되는 거예요. 더럽다는 것이 판정이 났기 때문에 아까 ‘직접적 미래’라고 했는데 미래가 와서 현재를 만들어버린다는 말이지요. 우리 현재라는 것이 미래가 현재를 쥐고 있는 거란 말이지요. 그 미래와 더불어서 확정된 내용도 우리 현재에 미리 와 버리면 우리는 싱크 홀이 되고 하나의 증상이 되고 왼쪽 어깨의 하나의 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내 주변 세상이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아요. 빼려고 해도 안 빠지는 점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이 여기서 나온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도들의 특징이 뭐냐? 톱으로 켜고 돌로 때리고 아무리 해도 이 증상이 지워지지를 않아요. 주님이 심어놓은 증상이 지워지지를 않아요. 사람의 힘으로 지워질 증상 같으면 주께서 새기지를 않습니다. 주께서 새긴 그 증상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너는 더럽다는 겁니다. 우리가 더럽다는 것을 아는 즐거움, 기쁨, 감사가 있어야 돼요. “그래. 더러워.”



“이왕 더러워진 거 술 한잔 더 먹으면 어때?” 발상이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더럽다고 해놓고 그것을 다시 자기 하고 싶은 것,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하지 말고 더럽다고, 모든 것이 더럽다고 하는 이것이 대체 어떤 지점에서, 누가, 어떤 취지에서, 하나님의 어떤 취지에서 나왔는가를 알아야 돼요.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기독교가 모르는 다른 숨어 있는 곳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계속 공장처럼 생산되는 거예요. 내가 더럽다는 것이 한 순간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나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저에게 그렇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목사님, 제 나이가 지금 40인데 젊을 때 많이 타락했습니다. 스무 살 때, 그때는 교회도 안다녀서 몰라가지고 결혼 전에 군에서 이등병 때 총각딱지 떼라고 해서 사창가에서 잤습니다. 돌아보니 이것이 음행인데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하시는데 그 분은 뭐냐 하면, 그러면 스무 살 때 군에 입대 전에 사창가에 안 갔으면 거룩합니까? 지금 그 분은 그 때 그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오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때 총각을 떼지 말고 결혼 첫날밤에 떼야 할 것을 철없이 그 때 해서 참 아쉽다.”



뭐가 아쉬워요? 지금이 더러운 것을 왜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본인이 아직도 더럽다는 것을 왜 몰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과거보다 지금 더러운 사건이 매일 등장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는 이것만 안했으면 참 깨끗할 건데.’ 라는 생각을 한다는 그 자체가 자기를 우상시 했던 티가 팍팍 나버린 거예요. 인간의 몸은 계속 우상을 만들어내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몸이 사물이 아니고 사건이 되는데 우상을 보여주는 계속적인 사건, 주님이 더럽다고 해도 “남들보다는 덜 더럽습니다. 이정도면 깨끗한 편입니다.” 자꾸 이렇게 아직도 자기에게 집착과 애착을 갖고 있는 우상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 우상을 만드는데 교회가 한 몫을 담당하고, 한 몫 정도가 아니고 전부를 담당해요. 교회는 우상을 만드는 생산 공장, 현장이에요. 이래놓고 다시 오늘 본문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듣는 순간 미래에서 만든 현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를 딱 사물화 시켜버리면 “아이고, 멸하면 안 되는데. 이러면 내 인생코너 끝나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혹시 바르게 살면 주께서 안 멸하실 거야, 아마.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시는 분이기에 거룩한데 멸할 일은 없을 것이고 그래,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이 성경이 바르게 사는 동기가 되겠지요. 성화 론의 동기가 되겠지요? 그게 우상이라니까요? 그게 잘못된 해석이에요.



거룩하겠다는 자체는 이미 거룩하지 않기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미 거룩해진 사람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더럽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가지고 어떤 전쟁 통에 정신대로 팔려가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거룩은, 인간의 어떤 잘못, 또는 반대로 어떤 착함에도 이 거룩인 하나님의 증상은 일체 침해받지 않습니다. 그 거룩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왜냐하면 성전은 제사하는 곳이기 때문에. 레위기 22장에서 더럽다, 더럽다, 온통 더럽다고 깔아놓고 그 다음에 흠 없는 것과 대조시킵니다.



심지어 레위기에 보면……, 여러분은 성경을 보시는지 모르겠어요. 신천지는 잘도 가르친다는데. 성경을 보게 되면 여자가 월경해놓고도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리고 남자가 설정을 해도 더럽고 유출 병, 종기가 나도 더럽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러운 거예요. 나오는 것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나오는 것의 그 근원지, 원천지가 더럽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쏟아져 나온 것은 다 더러운 겁니다. 기침할 때 그 바이러스만 더러운 것이 아니에요. 그 더러움과 흠 없음이 만나면서 인간이 감당 할 수 없는 더러움을 하나님의 흠 없는 약속의 제사에 의해서 그것이 거룩하게 되는 그 작업,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 내신다는 이 비밀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작업의 거주지가 바로 성전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있는 영토 자체가 거룩한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바르게살기가 아닙니다. 바르게 산다든지 바르게 안 산다는 것이 거룩 앞에서는 빛을 잃어요.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되고 그래서 뭘 해도 거룩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 애매함이 사건을 통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옵니다.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아, 나는 하나님의 사건이 있기 때문에 내가 거룩한 줄 알았는데, ‘나는 하나님의 십자가사건이 있기 때문에 거룩해.’라고 하는 순간 그 현재는 내가 우상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에요. ‘그래, 나는 거룩해. 나는 구원받을 거야. 하지만 내가 분명히 그것만큼은 우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그 순간이 이미 우상으로 돌변해버리지요. 거기 같이 나오는 사건이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것도 내 구원위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십자가 거룩한 사건에 의해서 다시 한 번 질타를 받을 때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부인하게 되는 겁니다.



주의 뜻은 뭐냐? 우리를 제거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하고 출발할 때 “나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영생 얻습니다.” 할 때 그것이 십자가 앞까지는 통용돼요. 그렇게 하다가 십자가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우리를 도구로 걸어서 사용할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단독적으로 떼 내서 우상화하는 것을 주께서는 없애버리지요. 그것을 삭제시켜버리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건이지요, 사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이 매일같이 그리스도가 계속 생산되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그 사건화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냄새는, 우리가 살면서 내는 냄새는 더러운 나를 더럽다고 지적해주시고 더러운 나를 자신의 피로써 살려내는 이 작업이 내가 이 작업의 공장이 되어서 계속 발산된다는 것을 우리는 증거 할 수가 있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야,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 네가 진짜 성도 맞구나.”라고 한다면 “아니야! 아니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넘어지지요. 내가 내 것이라고 우긴다고 해서 내가 우상 될 수가 없어요. 내가 우기려고 했지만 왼쪽 어깨의 그 점……, 모르겠거든 청담동 스캔들 마지막 회를 한 번 보세요. 그 점이 내 잘잘못과 상관없이 날 때부터 찍힌 점이에요. 이 점이, 증상이, 이 싱크 홀이 뭔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가 나쁘다고 해서 커지고 내가 착하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 이 점이 바로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점에서 터져 나오는 사건을 증거 하는 하나의 객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증거물이 되고 흔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오늘 본문 마지막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사건이 터지는 장소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주여, 멸하시고 안 멸하시고는 주의 소관에 속한 문제기 때문에 제가 겁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저는 아니요. 저는 다치기 싫습니다.’ 하고 나설 문제는 아니”지요. 처음부터 멸해야 마땅한 사람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 허락도 없이 증상을 심어놓고,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를 건드리지 말라.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 그렇게 십자가의 흔적을 심어놓고, 심어놓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거룩에 부합되지 않는 더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주님이 거룩이라는 것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거룩이에요. 인간이 표현해낼 수 없는 거룩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잘났다고 자칭 주장해도 주님의 거룩 앞에 서게 되면 재를 뒤집어쓰고 엎드려야 돼요. 어디 감히 하나님을, 감히 상대해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에요. 어떻게 그런 하나님 앞에서 깝죽대고 “착한 일을 했습니다.” 하는 가벼운 입놀림이 성사가 돼요? “주여, 제가 기도를 4시간 반 동안 했습니다. 저 착하지요?” 천사도 감당 못해서 자기의 몸을 가릴 정도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우리가 무슨 수로 가까이 합니까?



인간들이 아는 성전은 이런 거예요. 자기가 아는 하나님, 산타클로스 같은 신을 끌어당기고 자기가 아는 인간을 끌어당겨서 둘이 만나게 해주는 장소로서 성전을 만드는 겁니다. 그게 성전이 아니고 신전이지요. 그 신전을 만들어서 “하나남, 뭘 원하십니까?” 하면서 뇌물 바치고 제물 바치는 거예요. “십일조를 원하십니까? 드릴게요. 봉사를 원하십니까? 드릴게요. 전도하기를 원합니까?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전도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이런 것을 드리는 거예요. 그거 드리지 마세요. 선교사 해도 더럽고 선교 안 해도 더럽고 시집가도 더럽고 안 가도 더럽고. 그 더럽다는 것을 거룩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가 그걸 일괄적으로 선언해 주시겠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수십 년 살아온 인생의 고민과 걱정이 다 끝나요.


우리가 인생의 고민이 많은가 하면 자기가 뭔가 소중하다고 여기고 자기가 뭔가 아직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에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우상시 한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는 우상이 되어 있는 우리, 나를 위해 만든 신전, 갓 바위지요, 그 신전에다가 휘발유 부어놓고 불 질러 버립니다. “자, 이제 네가 섬길 너는 없지?” 없애버려요. 주님께서 나 대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가 섬길 나는 없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할 나는 없어졌어요. 바로 그 사태, 사건을 담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나 자신도 모르고 그저 어떻게 하면 밥먹고 사느냐, 평생을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남 보기에 내가 어떠냐, 자존심과 가치만 내세우면서 허송세월하다가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갈 것인가, 또 자기 살리기 위해서 수작을 벌이는 이런 종교적인 것, 기독교적인 모든 것이 바로 죄고 더러운 것이고 우상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행위가 죄라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는 의미 없는 죄보다도 이런 죄를 지적해주시는 주님의 흠 없는 십자가의 거룩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