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4. 10. 24) 8-1
마가복음 2장 19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금식 하느냐, 안 하느냐의 주도권이 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신랑에게 있지요. 구약에서는 말씀 지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예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신랑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사람들이 신랑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신랑으로 등장하면 자동적으로 신부의 자리도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자리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자리를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요. 예수님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면 동시에 옆에 신부의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신부 자리가 없는 신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자신이 구원할 자리를 고려해서 활동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고 했어요. 신랑이 오면 자동적으로 옆에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고, 신랑이 없다면 그 옆자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쪽에서 내가 시작한 구원의 자리는 없는 겁니다.
내 구원의 자리는 없습니다. 이 사실이 구원의 자리를 만드는 재료가 됩니다. 우리는 없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다른 식당으로 가야겠다고 나서는데 주인이 "이리로 오세요."하면서 자리가 없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 때, 그 때 그 사람은 식당에서 밥 먹게 된 모든 은혜와 공로는 없는 자리 마련해 주신 주인에게 돌리겠지요. 주님은 이런 전략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이미 있는 자리를 가지고 잘 해보겠다고 자신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해 줘도 자기자랑이 될 뿐입니다. 이런 사람을 탈락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구원 받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에 대해 21절, 22절을 말씀합니다.
22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은 나를 감당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챙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이 감당이 안 됩니다. 그것을 '찢어진다'고 표현한 거예요. 뭔가를 소유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천이 찢어지니까 다 쏟아져버리지요.
유대인, 바리새인이 이렇다면 왜 우리에게는 복음이 들어왔는데 안 찢어지고 보관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천이 옛 천에 속하지 않고 새 천, 또는 새 부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신부의 자리가 생기듯이 예수님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말은 그 포도주를 담을 부대도 같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유대인,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는 주께서 찢어버립니다.
구원은 찢는 작업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구분이 없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다. 이방인도 나름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평생을 법을 지키며 살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런 것이 있는데, 복음이 들어오면 이런 것들이 다 찢어지지요.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구원시켜 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원시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주님 구원의 자료가 됩니다. '구원시켜 주지 않겠다면 우리도 억지로 구원 받을 마음은 없습니다.' 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고, 구원시켜 주지 않음으로써 '어찌할꼬?'를 유발시켜 구원을 위해 노력한 나의 모든 행위가 전혀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구원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절대로 구원에 보탬이 안 되는 쪽으로 조치를 하십니다. 구원은 100%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을 찢는다고 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소굴 만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박을 먹을 때 쪼개서 먹을 수도 있지만 체크무늬 모양으로 잘라서 먹는 방법도 있지요.
주님은 우리의 속을 파서 예수님 자신의 구원을 담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담은 그릇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내 꼴'이 구원 받는데 전혀 지장이 안 됩니다. 세리나 창기, 강도라도 구원 받는데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의 속을 팠습니다.
예수님이 삭게오의 집에 갔는데, 그 전에는 집에 돈이 있었겠지만 이제 구원이 그 집에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을 버리고 땅에 내려오심으로, 예수님의 움직임, 예수님의 동선이 천국의 동선입니다.
만약 우리가 쳐다봐서 천국에 간다면 내가 쳐다 본 것이 공로가 되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 쳐다봤으면 구원 못 받을 뻔했다.' 이렇게 된말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쳐다보는 방식 말고 그냥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방식을 취해서 우리 속을 파고 들어오셨어요. 그렇게 해서 100% 당신이 다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늘 확인시키십니다.
이렇게 되면 내 인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인생은 없고 주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인생만 우리에게 있을 뿐이죠. 우리의 속이 겉을 주관합니다. 우리의 속을 파서 그 안에 십자가가 들어갑니다. 십자가는 죄 용서와 관련이 있지요. 흔히 ‘탕감’이라고 하는데, 탕감이 의미가 있으려면 내가 스스로 탕감할 수 없는 죄, 내 탕감의 능력을 넘어서는 죄를 날마다 저질러야겠지요.
내가 나쁜 짓을 했지만 이보다 더 큰 착한 일을 하면 나쁜 짓이 상쇄되어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우리는 죄를 짓되 내가 감당 못할 죄를 지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바퀴벌레가 보여서 밟아 죽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머 바퀴벌레입니다. 그 광경을 본 새끼 바퀴벌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차를 운전해 가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들 때, 입에서 거친 욕이 나오는데 그 차는 이미 가버렸어요. 심한 욕설을 한 잘못을 그 사람을 만나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그 죄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죄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 때는 주님이 매일 우리 죄를 탕감해 주시면 되지요.
탕감 받을 때의 그 기쁨은 세상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즐거워요. 우리의 모든 죄를 주께서 매일 탕감해 주시니까 매일이 주님과 함께하는 날이에요. 그러니까 날짜가 진척이 안 돼요. 매일 새날입니다. 왜? 매일 탕감 받는 날이니까요. 매일 곗돈 타는 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통장이 365개가 있고, 이것이 전부 정기 적금이라 만기일이 다르다면 매일 은행에서 전화가 옵니다. “만기 된 것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매일 이런 전화가 와서 매일 즐겁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일 죄의 탕감을 받고 있습니다.
정기예금보다 더 좋은 예금이 뭔가? 탕감 받은 통장. 이 통장을 늘 가지고 있으면 돼요. 가을이 되면 가을이 되어서 짓는 죄가 있지요.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는 남자들이 짓는 죄가 있어요. 부둣가에 가서 떠나간 여인을 생각하면서 추억에 젖는 죄. 그 죄 다음날 탕감 받습니다.
시시때때로 짓는 우리의 죄가 매일 탕감을 받으니 100% 주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탕감이란 내가 죄를 지었는데 주님이 내 죄를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가락교회 강의에서 제가 어려운 질문을 던졌어요. ‘선악과 타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어떤 정신 상태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데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없지요?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말을 이미 선악을 알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도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이 없으니까 바보천치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바보천치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건 안 맞는 것 같고.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자의식이 성립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은 마귀가 갖고 있어요. 마귀가 하나님께 대들 때 그 심리는 ‘나는 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7장 8절에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바벨론이 스스로 한 말입니다.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악마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기는 마귀는 알아요. 선악 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신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선악을 알면 신처럼 돼요. 마귀가 이미 신처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되어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어요.
우리와 같이 되었기에 쫓아내겠다는 것은, 인간은 선악을 알게 된 악마의 길을 밟아가기 때문에 악마와 같이 결탁할 일이 없다고 해서 추방하는 겁니다. 악마는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쫓아냅니다.
그럼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는 뭡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는 예수다.’라고 했어요. 악마는 자신을 쳐다보는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워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를 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마귀는 거기에 대해 삐친 거예요. 왜 내가 아니고 예수인가?
세상의 현실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주냐, 아니면 이것에 대해 반대하느냐?’ 이 양대 세력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말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밀고 있고, 마귀는 스스로 가라고 하고. 석가모니가 죽을 때 유언처럼 한 말이 이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는 ‘네가 주인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주인이다.’라는 것이지요. 이게 마귀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내가 신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자는 오직 예수다.”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앞장세우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집결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구원 받으려는 것도 마귀 짓입니다. 인간은 구원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예수님의 주 되심의 여파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구원 받겠다는 생각은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취지에 반하는 것입니다. “날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가 시킨 거예요. ‘구원 받아서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가야지.’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인간 구원의 의지를 꺾어버리지요.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 받고자 하는 구조 자체를 폭파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의 말이 참 어렵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했는데, ‘외에’라고 잘라내는 대목에 내가 구원 받겠다는 생각도 잘려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결과가 ‘나’여야지, 내가 구원을 소유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가치를 내가 따로 소유하는 것이 됩니다.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나에게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님과는 따로 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 어긋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알기 원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슬쩍 ‘나’를 가져다 붙이면 가룟 유다의 꼴이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주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뭐있습니까?” 주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자기 것을 끝까지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 안 받겠다는 말입니까? 구원 안 받겠다는 말도 너무 건방진 말이에요. 주님이 주시겠다는데 안 받겠다고요? 내가 거부한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입니다. 어떤 과정? 주께서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증거로 남은 필름입니다. 필름이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면서 “예쁘지?” 이럴 필요 없어요. 남들이 보는 것이지요. “이 얼룩이 뭐지?” 하고 3D 안경을 끼고 보니까 십자가만 보이지요. 십자가만 보이게 하는 필름, 그것이 바로 구원 받은 자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알기 전 아담은 하나의 배치물입니다. 어떤 배치물인가? 생명나무, 선악과, 아담 부부, 뱀. 이들은 기능이 소중합니다. 무엇을 만들어 내는 배치물인가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운다는 하나님 본래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위해서 있는 작품들입니다.
바보가 아니고 그들은 본래의 자의식은 없고 하나의 관계로 얽혀 있는(선악과와 얽인 아담과 하와, 생명나무와 얽힌 아담과 하와, 뱀과 얽힌 아담과 하와) 영역으로써의 역할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나는 나다.”가 나와요. "나는 부끄럽습니다. 저 여자가 따먹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부부가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이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도 한 몸이 아닙니다. 한 몸이 아닌데 한 몸의 기능을 하게 하십니다. 둘 사이에 예수님이 개입해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했지 절대로 한 몸이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든지 한 몸인 것을 찾아보세요. 찾을 수 있는지? 찾을 수 없습니다. 동상이몽입니다.
그런데 왜 안 헤어지는가? 주께서 못 헤어지게 그동안 붙여놓았기에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7:15).”고 했어요. 결혼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도 있습니다. 이혼 가능함. 그래서 정 이혼하고 싶으면 계속 복음을 전해서 상대가 그것에 반대하도록 몰아세우면 됩니다. 그러나 너무 전략적으로 하지는 마세요.
22절에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다 일리 있는 말씀을 해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바보가 없잖아요. 들어보면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빠요. 포도주는 예수님 본인을 이야기하고, 낡은 부대는 낡은 것이니까 역사와 전통을 붙들고 있고, 그것을 유지, 보완, 지탱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이고, 결국 내 인생은 내가 끌고 왔다는 자에게 주님의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속을 파내서 그 속에 주님의 아지트를 만듭니다. 그 증거가 뭔가 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늘 나오는 거예요.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죄 뿐입니다.’가 나옵니다. 불신자는 죄가 나오고, 신자는 ‘죄 뿐입니다.’가 나옵니다. 다르지요? 한 쪽은 독자적으로 나오고, 다른 한 쪽은 그리스도 때문에 유발된, 폭로 당하듯이 주님의 삽질에 의해서 나왔을 때,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미 이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삽질을 해서 죄를 퍼내고, 불신자는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하면서 나오는 것은 죄만 나오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소위 백화점 VIP고객한테 유럽의 명품을 팔면서 포장을 시장 난전에 채소 담는 비닐에 담아주는 사람은 없어요. 포장과 내용물이 같은 품위가 되어야지요. 복음을 담을 포장지를 우리가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찢어지고 주께서 우리 속을 파내서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첫 번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이죠. 제자들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도록 주께서 붙들고 갑니다. 제멋대로 회원 탈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세 번이나 부인해도 못 빠져나가요. 왜? 이 말씀(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끝까지 찾아가셨지요. 그리고 “평안하냐?”고 물었어요. 귀신도 이런 귀신은 없어요. 석가모니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석가모니가 대답하기를 “불은 불타는 연료가 소진되면 불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불타는 연료는 육체고 그 육체가 죽으면 불도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석가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악마의 대변자입니다. 전혀 존경할 것이 없어요. 부처 존경하는 것은 마귀를 존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죽어도 안 죽어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가도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지금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처소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신랑 옆의 신부 자리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창세전부터 알아주는 사람이냐,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이것이 문제고 이 모든 결정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내가 손을 떼는 것이 맞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 손에 있는데 왜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손을 떼야지요. 그 손 떼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누가 관리합니까? 무화과나무 자기가 관리를 못합니다. 열매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 없다고 저주하면 그냥 저주 받아야 됩니다. 무화과나무처럼 인간도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사랑 제공자가 책임지기 때문에 환란, 곤고, 핍박 그 어떤 것이 와도 끊어지지 않아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끈질긴 사랑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란과 핍박을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난데없는 어려움이 왔을 때는 주께서 내 속을 파고 들어와서 아지트를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럴 때는 우리 속에 뭔가가 출렁이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마치 여자가 임신했을 때 뱃속에서 태아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듯 느껴야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새 포도주와 날은 부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잖아요. 이 명제를 던져 놓았는데, 모든 결과는 이 명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라고 할 때, 이것은 분석 판단이라고 합니다. ‘총각’이란 말 안에 자체적인 풀이나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나는 포도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포도를 좋아하는 것은 남들은 몰라요. 같이 지내면서 시간을 보내면 알 수 있지요. 이것은 종합 판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무엇이고, 낡은 부대가 무엇인가를 먼저 던져놓고 뒤에 풀이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낡은 부대는 뭔가?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인간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그럼 새 부대는 뭔가? 주께서 안식일을 지켜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우리가 안식일 지킨 자가 될 때 이것이 새 부대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묻기를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했습니까?” 라고 하면, “예.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이 새 부대에요. 복음을 담기에 충분합니다. 전혀 부대가 터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십일조를 내가 했습니다. 소득의 10%를 했습니다. 주일날 일찍 교회에 갔습니다.” 이런 부대는 다 찢어집니다.
사실 우리도 찢어졌기에 새 부대가 된 거예요. 인간은 옛 부대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찢고 새 부대로 교체했기에 우리는 옛 부대도 알고 새 부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데 돈이 생기면 있는 돈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넥타이도 5천 원짜리 넥타이는 별로 신경 안 쓰도 되는데, 이탈리아 명품 최고급 넥타이를 선물로 받은 것은 신경이 쓰입니다. 사람은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나는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 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돈이 생겨요.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안식일을 안 지키면 되잖아.' 라고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겠습니까? 교회 갔다 오는 것이 기분 좋습니까, 안 가고 집에 쉬는 것이 기분 좋습니까? 갔다 오는 것이 기분 좋다면 그 사람은 교회 갔다 왔다는 것을 신앙이 있고, 남들 보다는 더 노력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일이 있어서 주일 예배에 불참하면 뭔가 불안하고, 또 한 주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지게 되어 있어요. 내 차를 누가 추돌한다든지, 길을 가다가 넘어진다든지 등등. 그러면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지? 이번 주일 예배를 빼먹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구나.' 또는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앞으로는 주의하자.' 이렇게 돼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데 주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집에 강아지를 키우는데, 어떤 사람이 그 강아지를 발로 찬다면 어떤 기분입니까? 내 몸 아닌데 차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 몸을 차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강아지 키우는 것과 같아요.
율법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나의 영토를 보호하고 나의 것을 지키는 재료가 됩니다. 왜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선악만 남아 있습니다. 마귀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악과를 가진 것이 아니고 선악과의 노예로 살아 온 것입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아 온 거예요.
마귀의 종으로 살아 온 우리가 이제 자유롭게 살겠다고 자유선언을 한다고 마귀가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우리가 이제 복음을 아니까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법 감정에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을 익히 아시고 주님은 안식일을 거론합니다. 안식일이 거론되면 유대인들만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들은 말고 천국 가는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면 됩니까?" 라고 나오겠지요.
막상 안식일 지키는 것에 대해 거론하면 제자들이 안식일을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킵니까? 주님이 일방적으로 다 지켰지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제자들은 본인이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피동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살짝 기분이 나쁘지요. 예를 들면 풍랑이 일었습니다. 풍랑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안에 떨면서 예수님을 깨워 예수님으로부터 믿음 없는 자들이라고 꾸중을 들었을 때, 제자들 입장에서는 풍랑 일어나기 전, 자신들이 믿음 없다는 것이 폭로되기 전의 상태를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가 미처 모르는 지독한 자기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삽으로 찔러 퍼내고 그 자리에 콩나물을 심던지 장미를 심어서 그곳에서 생명을 피워내는 겁니다. 이 때 우리는 아픕니다. 이런 아픔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에 대해 주님이 정답을 말씀하셔도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아무 감각이 없어요. 하지만 제자들은 점차 느낌이 오지요. '아, 이래서 우리가 죄인이구나.'를 알고,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를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뭔데? 내가 선한 주님을 선하게 모시겠다는 이 선함은 뭐야?' 이게 바로 죄입니다. 이것은 자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자의식은 없어야 되는데 선악과 따먹고 독자적인 선언을 해버린 겁니다. "나도 신이다. 하나님도 내 허락 맡고 일해야 해." 이렇게 나오니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런 독자적인 흔적이 뭔가?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 "여자가 따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라고 아내 핑계를 대고, 둘 이 있어도 부끄러워서 치마를 만들어 하체를 가리고 했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지요. 이 말은, 그냥 그대로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 주님의 용서를 훼손하면 안 되니까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존심 챙기는 것밖에 안 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7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을 내가 준수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완성이라고 인정할 때 그것이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알아 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교사의 경우는 평소에 학교에서 일할 때,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주님이 보내 주셨다고 믿으시고 말썽꾸러기라도, 별난 학부형을 만나도 주님이 보내셨다고 인정하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작용을 인정함으로 주도권을 주인에게 돌리고,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쉽지요? 학생은 공부하면서 주께서 시키신 일이라고 믿으면 그것이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짓 복음을 듣고 '이것은 십자가 복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 되고.
우리는 비록 주의 일을 드문드문 하지만 주님 입장에서는 우리가 주의 일을 안 할 경우는 한 순간도 없습니다. 잠을 자고, 길을 걷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주의 일이죠.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도 주의 일입니다. 여기에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너는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을 사랑해서 예수님 이용하는 자일뿐이다."라고. 이런 사람에게 죄인임을 드러내는 필살기는 "죄 짓는 것도 주의 일이다."라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14. 11. 4. 08:32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