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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종말과의 만남1409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1. 6. 08:45

2014-09-05 01:26:41 조회 : 298         
종말과의 만남 140904 이름 : 이근호 (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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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2.222) 14-09-28 15:06 
가락-요한복음 4장1(종말과의 만남)140904a-이 근호 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4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지상 행적이 나오는데 요한복음 4장에서 지상 행적이 나온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시작점을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그전까지는 행적이 안 나오니까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냐 하면 종말 + 역사, 이렇게 한 겁니다.

지금 예수님 오심 자체가 종말이거든요. 끝! 끝과 인간의 기나긴 역사를 만날 때에 여기 만나게 되면 접촉이 되겠죠. 접촉해서 무슨 일이? what happen. 어떤 일이 일어날까. 종말을 몰고 역사를 끝장내겠다고 오신 분이 역사와 만났을 때 그 만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게 요한복음 4장부터 이제 시작되는 겁니다. 끝장을 내겠다는 거죠. 종말이란 것은 전부 다 둘둘 말겠다는 거거든요. 카펫이 인류의 역사라면 행사 끝나고 난 뒤에 카펫을 둘둘 말아야 되겠죠. 마는 대신 주님께서는 쿵닥쿵닥 송곳 가지고 구멍을 뚫어서 역사를 찢어버리죠.

역사를 찢는다. 경상도 말로 짼다. 역사를 찢어버리죠. 역사를 찢는다는 말은 시간을 토막 낸다. 시간자체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고이고이 과거가 유지가 될 때 비로소 ‘나는 이 정도다.’ 하는 것이 정립이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같으면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이봉창 유관순 이런 분들이 있어서 독립운동해서 오늘날 한반도에 대한민국이 있다. 할 때 특히 요새 유행하는 이순신 장군, 영화 봤습니까? 봤어요? 저는 안 볼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그때부터 일제한테 나라를 잡아 먹혀서 한국은 확장된 일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만큼 우리나라가 현재 우리가 정당하게 있음을 위해서는 역사에 기여한 사람, 보태준 사람들이 고이고이 유지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찢어버린다는 말은 뭔 뜻일까요? 이 역사가 무슨 역사냐 하면 심판받아야 될, 끝장나야 될 만한 그러한 죄로 점철된, 죄가 겹쳐진, 주름 잡힌 거, 부채를 착 하면 착착착 접히죠. 죄와 죄가 계속 중첩이 되는 그런 식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역사라는 게 죄라는 걸 알려면 역사가 중첩된 그 부분에 심판 사건이 거기다 하나하나 표창을 던지듯이 전부 꽂혀야 되겠죠. 주님께서 그 표창을 던지는 거예요. 날카로운 창 가지고 째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려우니까 쉬운 예를 들게 되면 지금 이 예수님 당시가 유대교가 있던 시대거든요. 그럼 유대교는 야곱의 12지파 가운데서 어느 지파 중심이란 말이죠? 유대교니까 어느 지파입니까? 유다지파죠. 그러면 나머지 11지파는 어디가 있습니까? 유다지파 속에 예속이 돼 있습니다. 유다지파를 높이 세우고 다른 지파는 유다지파에 혜택을 입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 왔다는 겁니다. 그럼 유다지파가 이끌어 왔다 했으니까 정당화 되겠죠.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남기고 다른 지파를 유다지파의 혜택을 입는 식으로 인도하니까 정당하겠죠.

그러면 그 정당성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혼혈아, 혼혈민족, 혼혈민족은 어디 있겠어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있으면 남쪽이 유다고 북쪽이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이걸 북쪽 이스라엘 전의 이스라엘하고 구분하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10지파거든요. 유다는 베냐민 지파가 있어서 이렇게 2 + 10지파로 나라가 둘로 나눠졌잖아요. 그런데 앗수르 나라가 BC 722년에 와서 이 나라를 혼혈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말이죠.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보내버리고 엉뚱한 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여기에 심어놓은 겁니다. 팔레스타인입니까?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은 따로 이 밑에 가사, 가자 지역에 따로 있고요. 옛날부터 늘 있었고, 북쪽은 이렇게 한 겁니다. 이것은 스탈린도 이렇게 했어요. 간도 지방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전부 다 중앙아시아로 다 보내버리고 전쟁할 때마다 그런 이민정책이 그전에는 빈번이 일어났어요.

어쨌든 간에 다른 민족이 오고 유다민족이 가니까 결국은 뭐냐, 혼혈아 된 거예요. 혼혈하겠다는 것은 유다지파를 정당화하는데 보탬이 될까요? 손해가 될까요? 보탬이 되죠. ‘봐봐, 하나님 뜻이잖아. 봐라. 다른 민족은 다 더러운 피가 섞였지만 우리민족 유다지파만은 깨끗하게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유다지파에 하나님의 희망이 걸려있다. 너희들이 나한테 잘하면 메시아 만난다. 구원받는다.’ 얼마든지 큰소리 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혈통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 자손이 천국가게 돼 있고 다윗 자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게 돼 있다 말이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우리가 얼른 상상이 안 되니까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예를 들면 김 집사님의 5대손에서 메시아가 온다. 그럴 때 집사님 가문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내 집안의 5대손이 만인을 천국에 보내주는 메시아다. 그 자부심이란 대단하죠. ‘내 5대손이 메시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그거 어느 계시에 나와 있더냐? 계시를 대라.’ 이렇게 나오면 할 말 없죠. 그 계시가 없으니까.

그런데 유다에는 있어요.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오니까 어느 지파를 깍듯이 모셔야 돼요? 다윗에 속하는 유다지파를 깍듯이 모셔야 되죠. 그러면 자기들의 권위라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는 권위다 이 말이죠. 더구나 유다지파는 남쪽에 있어서 혼혈되지 않았거든요. 혼혈되지 않았으니까 더욱 더 자부심은 클 것이고 상대적으로 자기는 혼혈 아닌데 북쪽은 전부 다 더러운 피가 있기 때문에 북쪽을 통해서 메시아가 올 리가 없잖아요.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날카롭게 대조가 되느냐 하면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이 대조가 되죠. 이게 바로 제가 처음에 강의한 게 뭐냐, 역사를 옹호해야 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역사는 곧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이죠. 역사를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게 되기 때문에 절대 안 돼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역사가 왔다면 역사 있는 그 자체를 우리는 그걸 존중해 주고 하나님의 계시로 수용해야 돼요. 그걸 수용하면 뭐도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더럽다. 혼혈아다. 메시아 오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개처럼 무시해야만 한다는 그것이 바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생각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고 예수님의 12제자가 다 누구들입니까? 유대인들이잖아요.

요한복음 4장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챙겨야 될 내용들이 지금 굉장히 많은 겁니다. 굉장히 많다고 이야기하면 또 처음부터 골치 아프다 하니까 그럴 땐 결론부터 이야기합니다. 요 차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어려워서 제가 말하기가 겁나는데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입니다. 무엇과 무엇의 차이죠?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 굉장히 어렵죠? 요한복음 4장의 핵심이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 매치가 안 되죠? 노동은 뭐고 노동력은 뭐냐? 마르크스란 사람이 있어요. 공산주의 이론을 처음 세웠던 사람인데, 공산당을 만든 사람은 레닌이고 그것을 구체화 시킨 사람이 스탈린이고, 그런데 이론을 제창한 사람이 마르크스인데, 그 사람은 무엇을 전제로 해서 이렇게 노동과 노동력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 당시는 자본주의가 활개를 치던 그런 시대입니다.

자본주의 시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옛날 유럽의 자본주의 처음에 할 때는 제국주의라 할 수 있는데요. 유럽이 다른 식민지에서 원료를 헐값에 가져와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식민지에다 팔므로써 이윤을 챙기는 그 시대가 초창기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그 자본주의하고 요한복음 4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제 어떻게 관련 있는가를 이제 시작합니다. 처음에 제가 요한복음 4장 강의할 떼 뭐라 했던가요?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라 했습니까? 종말과 역사의 만남이라 했죠. 종말과 역사가 만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했습니까? 역사 자체를 찢어버리죠. 종말 자체가 끝, 또는 심판이니까 심판 받을만했기 때문에 찢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입장에서는 역사가 아무리 봐도 자기 역사는 하나님이 친히 베풀어 준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의 역사거든요. 이 역사를 찢을 하등의 근거를 자기들 역사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이 계시는 하나님이 친히 인정한 건데 왜 찢느냐 말이죠. 그렇게 찢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인도를 안 했겠다. 그렇게 밖에 생각 할 수밖에 없죠. 그게 오늘날 우리들의 오해와 그들의 오해와 같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한 것은 절대로 인도했기 때문에 우리를 부정할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날 이만큼 잘 키워줬다. 키워줬기 때문에 난 의인이지, 절대로 난 죄인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 우리는 철석같이 고수하게 됩니다. 왜, 그동안 역사가 신이 손 댄 역사이기 때문에.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누가 저주했죠? 예수님이 저주했죠. 그러면 물어봅시다. 무화과나무를 누가 그동안 관리하고 이렇게 크게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만든 무화과나무를 예수님이 찢어버리죠. 그러니까 베드로나 열두 제자는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게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들 인간된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채니까 주께서 나를, 예수님 제자도 찢어버린다. 그런 뜻인가? 저주한다는 그런 뜻인가? 아주 놀라라. 아이쿠, 깜짝이야.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따라다니는 제자라 할지라도 주께서 저주하면 저주를 받아야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이게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와 관련이 있어요.

뜸들이면 약 올리는 것밖에 안 되니까 미리 말씀드릴게요. 노동력이라 하는 것은 마르크스 이론에 의하면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학자들은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몰랐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전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이라 하는 것은 노동자가 일한 가치를 남길 때 거기에 투입된 것을 노동이라고 한 겁니다. 마르크스는 그건 노동이 아니고 노동력이라고 한 거예요. 왜냐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일을 하고 난 뒤에 품삯을 받잖아요. 그럼 그 품삯은 뭐로 구성돼 있습니까? 누구의 힘이 가미돼 있어요? 노동자 본인의 힘이 가미돼 있죠.

그래서 마르크스가 볼 때에 노동자가 일터에 나가서 일해주고 월급 받아서 자기 밥 먹고 사는 것, 이게 노동자의 할 일이라고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학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마땅하잖아요. 농부가 농사짓는 이게 당연한데, 마르크스는 이야기하기를 이 세상에 노동자만 있으면 이 말이 맞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가가 있어버리면 노동자가 노동한 그것이 다 자기 품삯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10시간 일했으면 10시간 값을 받아야 되는데 5시간 값만 받고 5시간은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어디로 갔느냐 이 말입니다.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10시간 일해서 10시간 값이 돌아오면 노동해서 노동력이 되는데 10시간해서 5시간 품삯이 오니까 이 사람들은 10시간 해놓고 ‘아이고 고맙습니다.’하고 자기 노동력을 다 받은 걸로 노동자들은 착각하고 그렇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이 자본주의 시장자체를 모르고, 자본주의 시장이 아주 정직한 걸로 여기고, 그런데 5시간은 노동하지 않은 자본가 손에 들어갔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노동력은 뭐냐, 노동력은 노동자 개인이 생존과 관련해서 노동을 할 때 노동력이라고 하고, 이 노동은 자본가와 노동자 전체시장에 대해서 노동의 가치를 말할 때 노동으로 이야기해야 된다 말이죠.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노동자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걸로 보이지만 생각하는 게 ‘나는 일해서 살 거야. 이걸 만약에 쫓아내면 못 먹고 살아.’ 항상 자기 노동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노동자는 자본가 때문에 살아요. 자본가 때문에 산다고요. ‘너는 내 덕에 사는 거야.’ 그 내 덕에 사는 그거는 노동해도 그거는 자본가 주머니로 들어가야 자본가 입장에서는 마땅한 거예요.

예를 들면 이 세상에 공장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토지(땅)만 있다고 봅시다. 땅을 트랙터가 아니고 호미로만 파고 있다면, 땅은 주인이 없어요. 자기가 갈아서 나온 만큼만 자기가 삶아먹으면 돼요. 이때는 자본가 필요 있어요? 없어요? 그때는 노동이 노동력이 되고 노동력이 노동이 돼요. 그런데 누가 이 땅이 내 땅이라고 점령한 순간 그 사람들은 노동력만 사용할 뿐이지 자기는 노동은 해놓고 노동력만 가져오고 노동한 나머지 대가는 그 땅 주인에게 주게 돼 있는 겁니다. 이게 자본가 이전에 귀족들이 그렇게 했어요. 그걸 봉건사회, 영주거든요.

자, 그렇다면 이것이 요한복음 4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방금한 이것은 경제이론 같은데 요한복음 4장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요한복음 4장 35절 봅시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시면서 오늘 이 강의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낼 거예요. 이 강의가 어려워요.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 이상하죠? 뭘 받았어요? 아마 삯을 받았죠. 삯이라 하는 것은 뭐하고 난 뒤에 받게 돼 있습니까? 노동이나 노동력을 발휘하고 난 뒤에 일했으니까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일 하지도 않고 먼저 삯을 받는 경우가 세상 천지에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만약에 일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돈 주면 일 해요? 안 해요? 안 하죠. 학생들 시험 안치고 성적 올려주면 공부합니까? 안 합니까? 시험도 안 치르고 통지표부터 먼저 주는 거예요. ‘야, 너 수학 100점, 영어 100점, 사회 100점’ 시험도 친 적이 없는데 시험 성적표가 먼저 주어지고 난 뒤에 ‘자, 이제부터 공부하세요. 여기 숫자에 맞도록 공부하세요.’ 미쳤어요? 공부하게. 이미 점수 나왔는데. 참, 이런 것 때문에 설명하면서도 참 신기해요. 왜냐 하면 보통 이 땅에서는 일한만큼 이익을 얻게 돼 있는데, 지금 천국은 그거와 다릅니다가 아니라 아예 그것과 정 반대가 된다는 거예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정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땅에서 우리가 아무리 서러움과 있는 수모 다 당하고 못된 핍박 다 당해도 주님 주신 그 영생의 값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온갖 수모 다 당하고 매일같이 구박받고 매일같이 얻어맞고 그야말로 옛날 전쟁 때 포로 잡히면 고생 많이 하잖아요. 하루 한 끼밖에 못 먹고 바짝 말라서 굶어죽는 그런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40대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나 맞고 세 번이나 태장을 맞고 세 번이나 파산 당하고 나와도 사도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생의 값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내가 약한데서 강함이라” 그 은혜만 크게 보일 수 있다면 이보다 내가 더 작아져도 괜찮다는 겁니다.

왜 나는 그대 앞에 서면 왜 쪼그라드느냐, 나는 왜 작아지느냐, 이미 사랑을 통해서 영생은 이미 받았어요. 이미 받은 걸 우리는 누리면 되는 겁니다. 다 받았어요. 아휴, 정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돼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성경 보면 나와 있거든요.

그 되에 한번 봅시다. “뿌린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그 다음에 38절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우리가 뭔가 주의 일을 할 때 내 노동을 가미해서 얻는 겁니까? 아니면 여기 노동력이 없이 지금 그냥 줍는 거예요? 그냥 줍는 거죠. 그게 뭔 뜻입니까? 영생, 천국 그냥 주워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 하는 이야기가. “줍는 것도 못하냐. 이 바보야.” 하는 소리와 같은 말입니다. 거저 줘도 모르느냐 이 말이죠.

오늘 강의 어려운데 할 수 없는데 어려운데 더 어렵게 합시다. 지금 보고 있기 때문에 안 보여요. 보기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비가시성이 가시성의 일종이란 말이 있어요. 가시성, 볼 수 있는 성질을, 보이지 않는 것도 주께서 우리를 보게 하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앞에 보이는 식으로 해서 못 보게 만드는 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보고 있는데 안 보여요. 꼭 십자가 같아요. 보고 있는데. 요한복음 4장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아이고 지금 어려워서 내가 설명될지 모르는데. 종말과 뭐의 만남? 종말과 역사의 만남이죠. 종말과 역사의 만남인데 그 당시 유대인들 눈에는 지금 종말이 온 게 아니고 누가 보여요? 예수님이 보이죠. 예수님이 보일 때 그들은 예수님을 우리 역사 속의 한 인물로 봅니까? 역사를 찢으러 오신 분으로 봅니까? 역사 속의 한 인물로 보죠. 그러니까 보고 있어도 못 보는 거예요. 예수님 카메라 보듯이 코, 눈을 보고 있어도 예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인다는 말은 결국은 없는 거죠. 예수님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없는 존재가 돼요. 이 말이 너무 어렵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예수님이 없다니까요. 그들이 이해하는 예수님은, 이해한다는 말은 그들이 곡해하고 오해하고 있는 예수님은 있는데 진짜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그들 눈에는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4장 31절에 보면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했죠? 그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모르죠. 지금 예수님 말을 제자들이 알아듣습니까? 도통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어디다 편입시켰다?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지금 역사 속에다 예수님을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기와 똑같은 역사의 한 인물로서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던 그 현실에다 예수님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강의 첫 제목에 뭡니까? 종말과 역사의 만남이죠. 그러나 그들에게는 종말이란 말이 없고 그냥 역사 속에서 그들이 예수님과 거닐다. 이렇게 나오죠. 예수님과 어디 소풍 왔습니까? 거닐게.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달라질 건 전혀 없다. 진짜 그렇습니까? 이게 달라져야 되는데, 안 달라지면 큰일인데.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고린도전서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달라질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죽은 자가 되고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그분은 유일하게 산 자가 돼요.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하면 안 되고 보이지 않는 분이 살아있는 조건하에 지금 내가 그 안에서 나는 산 자고, 만약에 주님이 안 계시면 나는 죽은 채로 죽은 자로 죽어가고 있고, 그렇게 이해하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나 빌립보서나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누가 이 이야기를 알아듣습니까?

방금 이야기한 로마서 갈라디아서가 편지죠? 편지라 하는 것은 우리가 편지 볼 때 이해를 아주 쉽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하잖아요. 편지 할 때 보는 사람에게 ‘오늘은 날씨가 맑음, 그동안 잘 있었나? 나는 잘 있다. 다음에 만나세. 그동안 수고 많았네.’ 우리가 알아듣는 이야기, 소통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내잖아요.

그런데 사도가 보낸 편지가 우리가 알아듣는 편지가 아니고 뭐냐 하면 없으신 분을 들이대서 그분만이 있음이고 우리는, 우리 자체로서는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주 안에서 있는 것 맞지?‘라고 되묻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 거예요. 그러니 이 편지가 얼마나 어려워요? 그래서 베드로 하는 말이 사도바울의 편지는 어려워서 영을 안 받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 안 된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도 ’내 글이 네 눈에 문자로 보여? 문자가 아니야. 이게 영이야.’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자체가 또 어려워요. 이게 문자가 아니래요.

따라서 우리는 해석할 때 문자로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문자로 해석하는 방법은 뭐냐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은 가짜고 진짜 성경책이 따로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 진짜 성경책이 어디 있느냐? 이게 바로 진짜 성경책 이예요. 아니 방금 이게 가짜라며?

가짜 성경책 있는 곳에 진짜 성경책 있어요. 아니 이 성경책이 가짜야? 진짜야? 가짜입니다. 그러면 진짜는 어디 있는데? 이 가짜를 가지고 진짜 있다니까.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르죠? 그런데 진짜 예수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 모르는 예수님이 진짜에요. 그러면 지금 뭐가 문젭니까? 예수님을 이해할 때 이미 제자들이 이미 자기 주체적인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을 자기 아는 현실 속에, 실제 속에 지금까지 자기가 아는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집어넣고 예수님을 이렇게 울타리 쳐서 이해하고 있죠. 그렇죠?

그럼 진짜 주님께서 어떻게 해야 되죠? 그 테두리를 찢어야 되겠죠.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끝이 오게 되면 역사를 어떻게 한다? 찢어버린다. 찢어버리는데 그 찢어버리는 의도를 제자들이 알아요? 몰라요?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데 그 찢는 걸 어떻게 알리느냐? 그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예수님 쪽에서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말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숨겨진 구조가 나옵니다. 숨겨진 질서. 또 이게 어려우면 숨겨진 낯선 성질, 질. 낯선 질, 구조, 뭐가 와 닿습니까? 낯선 구조가 와 닿죠. 예수님 말 속에 낯선 구조가 온 겁니다. 그 낯선 구조는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던, 제자들이 알고 있던, 또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던 그 구조를 용납합니까? 용납 안 합니까? 용납 안 하고 그걸 찢어버리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목사님 천국 가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라는 말을 찢어버리죠. 다시 말해서 ‘내가 무슨 노동을 하면 내 노동의 값으로써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제가 아까 했잖아요. 값을 먼저 받고 시작하기 때문에 . 어떻게 하면 영생이란 값을 받습니까? 라는 말 자체는 인간들한테나 이게 속아 넘어갈 하나의 유혹거리가 되지만 주님한테는 이게 통해요? 안 통해요? 이게 안 통하는 겁니다.

이미 영생의 값을 받아버렸잖아요? 받아버렸으니까 영생에 대해서 이제 고민이 남아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일체 구원이나 영생에 대해서 고민이 없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 합니까? 나는 얻었다가 아니라 뭐라 합니까? ‘신 봤다.’ 하죠. 다시 말해서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했죠. 그전까지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 드려야 됩니까? 그리심 산에서 예배 드려야 됩니까?’ 이건 일종의 뭐냐 하면 노동력이죠. 내가 이 몸이 살기 위해서. 다시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력이라 하는 것은 노동자가 살기 위해서 자기의 갖고 있던 힘과 에너지와 기술과 지혜를 총 동원해서,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니까 노동시장에다 자기의 능력을 상품으로 내놓는 거죠. 그걸 노동력이라 한다 말이죠.

그런데 마르크스는 뭡니까? 그 노동력은 네가 살기 위해서 하지만 전체 시장에서는 노동력보다 노동이 우선된다 말이죠. 시장이 움직이려면 노동이 있어야 되는데 그 노동을 모르고 노동자는 노동력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일한 노동력의 나머지는 자본가가 가져가버렸다 이런 식으로 아까 설명했잖아요. 마르크스 이론에 의하면. 제 이론이 아니고 마르크스에 의하면. 지금 공산당을 선동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공산당이 싫어요.

그런데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왜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로 일은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일은 다 한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일한 걸 뜯어먹어야 되는데, ‘그럼 뜯어먹어야 됩니까?’라는 말 자체도 안 되고 이미 노동을 이루신 분이 그냥 공짜로 값없이 값을 주신 거예요. 값은 ‘네가 일했다.’가 아니라 누가 일했다? 내가 일한 거예요. 너희는 일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은 추수에 그냥 참여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뭐가 필요 없다? 찬란한 역사 이런 게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지막에는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마지막 때가 되면 소급해서 모든 것이 마지막을 위한 절차에 해당돼요.

인간은 자기의 역사를 쥐고 있지만 그 쥐는 역사가 필요치 않아요.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그러지 마세요. 네 집안 없어요. 네 집안 다 끝이야. 끝의 긴 그림자에요. 여러분 그림자라 하는 것은 먼저 뭐가 있어야 돼요? 안양 공부 하신 분은 알죠.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먼저 있고 난 뒤에 그림자가 있잖아요. 그러면 실체는 안 보이지만 그림자가 있다면 그림자가 붙어있는 실체는 언젠가 나타나잖아요. 언젠가 나타나게 되면 그림자는 어떻게 됩니까? ‘아, 나는 그림자입니다.’ 이렇게 돼야 된다 말이죠. 맞죠?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이란 말은 하나의 주님을 보여주는 그림자로서의 죄인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고 한 순간 누가 의인돼요? 예수님만이 의인되죠. 따라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고치면 ‘주님만이 의인입니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그런 뜻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왜 기분 나쁘고 왜 기분 나쁘게 들립니까? 얼마나 그게 기쁜 말 이예요? 집사님 죄인 이예요? 의인 이예요? 죄인, 아이쿠, 좋겠다. 죄인인데 왜 저주 안 받죠? 죄인이면 저주 받아야 되는데. 그 저주 받을 저주를 누가 해결했어요? 주께서 자신의 십자가 피로 이미 해결을 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내 노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여지도 있다? 없다? 일체 없어요. 그림자가 따로 독단적으로 일해 버리면 그건 그림자가 아니고 본인이 실체가 돼 버려요. 그림자는 설치고 매달리고 활동해도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이지, 나는 나의 그림자가 안 된다 이 말이죠.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여자 스스로 자기가 실체라는 것이 들통 나 버렸어요.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예배를 내가 어디서 드려야 구원받습니까?” 이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실체고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그만큼 내가 그동안 어느 곳에 예배 드려야 됩니까? 이 정도로 내가 종교적으로 신경 쓰고 있습니다. 라는 그런 자기 잘남을 표현한 거거든요. 남자 다섯 명 사귀고 여섯 번째 남자 사귀고 있지만, 이걸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남편이 다섯 명이고 지금 남자 여섯 번째라고 간단히 하지만 실제로 풀이해 보게 되면 처음에 김 철규씨하고 두 번째가 송 지석씨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이 규진씨하고 그 다음 네 번째가 하 정우씨하고 다섯 번째가 용호씨하고 했고, 보세요. 이름을 낱낱이 가상해서 대니까 여자가 얼마나 찬란할 줄 알겠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이 명배씨하고 그러니까 이여자의 이 모든 인생의 역사가 따지고 보면 사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부 다 찢어진 역사죠. 유대인들이 그 소리 들으면 환장하죠. 무슨 간음을 해도 그만큼 다섯 번이나 간음을 하느냐 이렇게 한다 말이죠. 원래 유대인 율법에 보면 헤어져도 다시 옛날 남편하고 만나야 돼요. 죽기보다 싫겠지.

그러니 인간이란 자체가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을 때는 그저 자기 나름대로 역사가 아주 이뻐. 내 역사는 그 고생 가운데서도 그나마도 아름다워, 낭만적이고 그리고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고 소중하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사마리아 여인도 그런데 유대인이야 말할 것도 없죠. 우리 유대인의 역사가 어때서? 얼마나 찬란합니까?

요새 노래에 보면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게 있어요. 내 나이가 어때서, 내가 늙었지만 연애할 수 있다는 이 말 아닙니까? 우리 역사가 어때서? 우리 역사가 얼마나 거룩한데. 그걸 지금 주님께서 찢어버리는 거예요. 이걸 찢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적인 역사 개인적인 사적인 것을 주께서 다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입에 집어넣고 씹어서 내뱉을 거예요. 정말 찢는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서 산산조각으로 없어져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그러면 그 날라 가는 역사 한 조각을 붙잡고 ‘아이쿠, 내 역사, 내가 얼마나 공들인 역사인데 이걸 날리다니.’라고 이걸 붙들려고 애쓰는 게 우리들 이예요. 여고 때 앨범 쳐다보면서 ‘세상에 교복 입고 이렇게 이쁘고 교복도 빳빳하게 카라에다 단발머리 찍어서, 남들 보기에는 걔인지 쟤인지 똑같이 생겼는데 ’얘보다 내가 너 낫지, 얘는 누구하고 결혼했고 얘 소식은 없고 미국 이민 간다 했는데 끝났어.‘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못났지만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귀하게 간직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집에 기르는 강아지도 우리는 귀하듯이 강아지보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더 귀히 여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난 순간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끝을 만났죠. 끝을 만나고 난 뒤에 뭐가 귀하다? 나를 누굴 만났다? 메시아를 만났다. 끝! 나의 모든 역사는 주님의 입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제 내 남아있는 역사는 주님만 있으면 됐지, 내 남아있는 역사는, 나의 역사는 없다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4장 이야기라면,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 이야기는 그보다 더 심해버려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이야기를 하나의 그림으로, 모형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게 바로 요나가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갔을 때 겉으로 보면 물고기만 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요나가 들어있는 식이죠. 예수님이 물고기라면 우리는 어디 안에 들어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거기서 오늘도 파닥파닥 하고 있는 거예요. 주 안에서!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편지에 보면 항상 “네가 문안해도 주 안에서 문안하고 남편에게도 주 안에서 공경하고‘ 전부 다 걸핏하면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사람들이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주 안을 빼버려요. 주 안을 빼버리니까 그 말이 완전히 엉뚱한 말이 돼 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강의하다 보니까 무지무지하게 강의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여러분 일단 들으시고 그 다음에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게 되면 이해가 돼요. 예수님이 오셨는데 세상을 끝장내기 위해서 종말로 오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시대의 어떤 인물이 나타난 걸로 그렇게 생각해서 예수님 하는 모든 행동과 말에 대해서 자기들이 충분히 납득을 하고 이해한다고 그렇게 오해를 했었습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옛날 어느 사마리아 땅에 가시던 그날에.

그런데 제자들이 알아서 빵 사러 가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유대인들이 빠진 상태에서 예수님 홀로 남아서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어요?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홀로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의 역사관에 의하면 이건 유대인의 구원받는 노선에서 완전히 탈락된 노선에 해당됩니다. 왜, 혈통적으로 혼혈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배제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 위치에 있는 노선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도 인정합니까? 인정 안 합니까? 인정을 하는 거예요. ‘너희들하고 우리하고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심 산이 있고 우리도 옛날 이스라엘의 한 부분 DNA 유전요소를 한 부분 갖고 있는 이상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나름대로의 구원관을 갖고 있던 그런 사람들 이예요. 어쨌든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적대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제자들을 보내고 사마리아 여인을 몰래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무엇을 이야기했느냐 바로 유대중심을 파괴시킵니다. 유대인 중심의 세계를 파괴시켜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의 파괴냐? 역사의 파괴죠. 역사의 파괴의 증거 하나를 여기 보게 되면 14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영원이란 말을 집어넣어버리면, 역사라는 게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어제는 두 컵 나오지만 오늘은 세 컵 나올 거야.‘ 이러면 뭐가 됩니까? 역사가 되죠. 그럼 내일은요? ’내일은 다섯 컵 나올 걸.’ ‘야 점점 더 생수가 많이 나오는구나.’ 그러면 많이 나오면 순서가 정해지겠죠. 순서가 정해진다는 말은 뭐가 성립됐다? 역사가 만들어진 거예요. ‘전에는 이런데 지금은 이렇고’라고 역사가 만들어졌죠. 지금은 이렇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지금처럼 이렇지 않다는 과거가 계속 살아 있어줘야 되죠.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역사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오늘인지 이게 9월 4일인지 9월 5일인지 구분이 돼요? 안 돼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데 그게 무슨 날짜가 의미 있어요? 6월 6일 날은 5컵 나오고 6월 7일에는 10컵 나오면 차이가 나는데 영원과 영원 사이에서 누가 큽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영원히 나와 버리면 결국 뭣에 점령당한 거예요? 역사가 묵시의 영원에 의해서 접수되고 점령당한 거죠.

그러면 영원에 속한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돼요? 영원에 점령당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역사가 있어요? 없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따로 자기 역사를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럼 역사가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영원이란 말도 되지만 결국 뭐냐 고정, 또는 고정화, 고정되죠. 스타일 펌프처럼 매일같이 제자리를 뛰고 있는 겁니다.

한 시간 끝나기 전에 물어봅시다. 여러분, 창조가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창조는 역사가 없어요. 왜냐 하면 1, 2, 3, 4, 5, 6, 7, 그 다음에 무슨 날입니까? 8이 아니고 1, 2, 3, 4, 5, 6, 7, 안식일 지키고 그 다음에 1, 2, 3, 4, 5, 6, 7, 이게 원래 창조의 원리에요. 8, 9, 10, 11,..이런 게 없어요.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죠. 알파와 오메가에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항상 알파와 오메가 두 가지 속성이 한꺼번에 다 들어있거든요. 알파와 오메가가 매일같이 반복을 해보는 겁니다. 공이 탱탱 튀듯이 공이 그냥 튀듯이. 지금 주님께서 똑같이 우리를 계속 살려내고 있는데 그게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어제 수요일 날 했죠. 포수가 곰 잡으려고 뭘 뒤집어씁니까? 곰 가죽을 뒤집어써서 곰으로 하여금 ‘저게 인간이야? 우리 같은 편이야?’ 분간 못하게 만들어서 총 쏴서 잡듯이.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한테 짊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계속 나온다? 예수님이 계속 나오게 하는 거죠. 이게 아까 봤던 요한복음 4장 14절의 말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사도바울도 어렵지만 요한복음 4장 이것도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이걸 우리가 계속해서 요번 시간에 이걸 한번 살펴보자 이 말입니다. 지금 이 어려운 것을. 뭔가 영원히 작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내 쪽에서 자꾸 영원을 잡으려고 하는데 그런 부질없는 짓 하지 마시고요. 지금 영원히 나한테 작용하는 그 증거가 뭐냐, 그것을 확인하고 찾으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2.222) 14-10-13 21:59 
가락-요한복음 4장1(종말과의 만남)140904b-이 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게 뭐냐, 뭘 주셨는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주심으로써 뭔가 달라졌거든요.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들은 어떻고 우리는 어떻다. 이렇게 이야기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 자신이 이미 종말에 말려든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일에 말려들어서 그야말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값없이 주의 일에 참여된 자 중에 한 사람으로 돼 버렸습니다. 그게 이미 추수를 당한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 자체가 주님한테 추수당한 겁니다. 공짜로 추수당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제자들에게 주의 일에 참여되는 사람의 모델로서 그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러한 변화가 누가 오시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사건을 일으키니까 이런 변화가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오늘날도 비록 주님은 안 보이는데도 사건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그런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럼 주님이 보이지 않지만 일하고 있는 증거가 뭐냐, 바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미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자기 잘남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값없이 이미 다 삯을 줬습니다. 영생을 줬습니다.‘라고 이걸 떠버리고 다니는 사람들. 그걸 아주 편하게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등장했다는 자체는 절대로 그 사람의 혼자 작업이 아닙니다. 주님이 손 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 4장을 보면서 주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때 무슨 뜻에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무슨 근거에 의해서 구약 적으로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일을 하셨으며 그렇게 일함으로써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의 이게 왜 모델케이스로 자리 잡았는지, 그런 것을 두 번째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4장 3절에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으로 가시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했는데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복습해봅시다. 사마리아 땅이니까 이것은 유대 땅이 아니죠. 그러면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려고 왔다.’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게 되면 유대교가 자기 역사 속에서 메시아와 만난다는 그 주장은 옳은 주장입니까? 틀린 주장입니까? 틀린 주장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유다 자손에게 메시아가 오잖아요. 아까 예를 들었죠. 누구의 5대손에 메시아가 온다. 그 선조들은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대할 때 제가 아까 어렵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예수님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이 인간이 아는 이 땅 자리에는 예수님이 안 계시고, 인간이 예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저희들이 아는 예수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 현장에 비로소 예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 후손으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들통 내면서 진짜 유대인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는 뭐냐 유대인들이 누굴 배척하죠? 사마리아 여인을 배척하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느 쪽에 옵니까? 사마리아를 경유해서 유대인에게 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켜 버리고 자기와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이렇게 오게 되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죠. 왜냐 하면 그들 생각에 사마리아인도 구원한다는 것은 그들 사고방식에는 이런 구조가 될 수가 없어요. 결국 구원을 훼방하는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누굽니까? 본인이죠. 본인의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본인에게 접근하는 주님을 피하고 엉터리 예수를 찾아다니는 꼴이 되는 겁니다. 이건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걸 생각도 못하게 우리가 싫어 한 바 되는 그런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도 못한 거죠.

우리가 ‘아니다.‘라고 한 그 노선을 통해서 우리한테 주님이 오신다는 그 내막을 우리는 잘 수용을 못하는 거죠.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노동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노동을 하기 때문에 습관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대목을 다시 보게 되면 여기 37절에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심는 사람은 누구죠? 예수님이죠. 거두는 사람은 누굽니까? 제자들이죠. 심어서 거뒀는데 거두게 된 대상자가 누구였습니까? 사마리아 여인. 38절에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마리아 여인 구원하는데 있어서 그 시점에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죠? 현장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죠.

그러면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해봅시다. 구원될 나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간단하잖아요. 내가 구원되는데 있어서 내가 무슨 기여를 했느냐 말이죠. 방해만 했지, 전혀 안 했죠. 이게 믿어져야 돼요. 내 구원에 내가 하등의 보태 본 적이 없는 게 믿어져야 돼요. 이게 안 믿어지는 이유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뭘 상상하느냐 하면 구원받게 될 나를 상상하기 때문에 방금 이야기한 것이 안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내가 구원받으면 이렇게 될 거라고 이 두 쌍둥이를, 내가 만든 쌍둥이를 이걸 포함시켜서 이 두 개를 종합적인 나라고 생각하니까 이게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겁니다.

구원받은 나는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 있는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참 말씀드리면서 내가 미안합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나’가 따로 있어요. 주님이 생각하는 ‘나‘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잖아요. 그럼 나는 아니라면서? 나는 아니죠. 왜 나는 아닙니까? 평소에 나는 내가 생각한 나로만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이 나는 나가 아닌데, 이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그 나밖에 모르는 나를 이미 주님께 손 탔어요. 손대다 보니까 나중에 보니까 이 내가 내가 아니고 주님이 구원시킬 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나에 대해서 손을 떼야 된다니까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우리는 나에 대해서 손을 떼 줘야 돼요. 떼서 보게 되면 주님의 것이 되고 손 안 떼면 내 몸이 내 몸이 된다니까요.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고. 가장노릇하지 마세요. 손 떼세요. 손 떼면 주님께서 가장되시고 우리는 그냥 내가 노력지 않는 가장이 돼버린 거죠.

집사님이 혹시 안경 잃어버린 적 있었어요? 안경 잃어버리면 물론 안경 하나 살 수도 있어요. 안경 잃어버리면 섭섭한 게 뭐냐 하면 안경 속에 나의 찬란한 역사가 담겨있거든요. 동거동락을 같이 했잖아요. 그런데 찾으면 기분 좋죠? 잃어버린 내 역사 다시 찾으니까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끼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내가 아침에 눈 뜨면 친히 주님의 손길이 와서 안경을 끼어준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더 좋아요. 머리 빠지잖아요. 머리가 빠지는데 내가 잠잘 때 주님께서 한 땀, 한 땀 심어준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니고 주님의 머리라면 굉장히 기분이 좋죠? 원래 난 눈도 코도 없는데 아침에 되니까 눈도 박아주고 코도 오뚝 나오게 하면 굉장히 기분이 좋죠? 이 기분 좋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요것도 주님께서 요것도 내 것이고 요것도 내 것이고 전부 다 주님이 자기 것이라고 가져갈 때 뭔가 뜯겨나가는 즐거움, 이 몸 자체가 관리대상으로 주님께 친히 손 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목마르지 않은 거예요. 기쁨이 되죠.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 명 있었다. 아까 말한 김철언등.. 그 사람들, 그동안 만났던 남편 만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해야 됩니까? ‘아이쿠, 고맙습니다. 전 전 전 남편님.’ 내 팔자 고치라고 만난 남편이 아니고 다 주께서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붙여준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것도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기쁨이 넘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남은 내 위주로 만났던 그 모든 만남은, 그게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 역사를 찢어 버리면 그게 해체가 됩니다. 해체가 되어서 그 모든 만남을 일단 완전히 무시하시고 오직 하나의 만남만 생각하세요. 그 하나의 만남을 한번 봅시다.

6절에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달라 하시니” 예수께서 “물 좀 달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죠.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에요. 물 좀 달라 하는 예수라고 불리는 어떤 사나이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는 메시아를 만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만났죠.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와서 옛날 지나간 이순신장군 이야기 듣듯이 옛날 옛날에, long time ago, once upon a time, 그 옛날 옛날에 예수님이 살고 있었더랬어요. 예수 이야기 듣는 거예요.

백날 들어봤자 누가 살아있어요? 이야기 듣는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리지 내가 손 타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못 살린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그런 가운데서 옛날 내 역사 가운데서 예수 이야기 들었던 역사를 그냥 집어넣는 거예요. 그거 아무 의미 없어요. 내 역사가 약간 팽창되고 늘어질 뿐 이예요. 내 역사란 주머니가 늘어졌죠. 왜냐 예수님 이야기가 더 꿍쳤으니까. 옛날에 예수란 분이 십자가 졌대, 그 이야기 여기 담으세요. 자기 추억의 주머니에다 예수 이야기를 꼽아 넣었을 뿐이지 그 예수는 아니에요. 왜 자기가 예수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예수를 만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를 만났죠. 그렇게 바뀌게 되면 예수님이 나를 만난 순간 그 나는 나가 아니고 예수님이 생각했던 그 나고 예수님이 생각했던 그 사마리아 여인이죠.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지금 빵 사러 간 12제자는 아무것도 몰라요.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던 예수님하고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어요. 예수님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빵이나 먹고 있지,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뭘 하려 오셨는지 몰라요. 9절 봅시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묻고 답해봅시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을 싫어합니까?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하죠.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을 싫어합니까?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하죠. 사마리아 여인은 그냥 유대인을 붙들고 이러지 않아요. 싫어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모습은 뭐냐 하면 만약에 메시아가 사마리아 여인 편에 들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은 이미 유대인에게 맞아죽어야 돼요. 왜, 진영이 청군 백군이 이미 갈라져 있기 때문에. 소통할 의사도 없고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하는 순간 이미 유대인한테는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한테는 뭐가 깨지냐 하면 우리는 다윗의 후손들이다. 우리 자손들을 통해서 누가 온다? 메시아가 온다는 그들의 모든 역사에서 나온 메시아 고대함은 하나의 꿈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죠. 참 이런 게 어렵죠. 성경에 분명히 문자로 나와 있잖아요.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온다. 그러면 그걸 보는 사람 백이면 백, 다윗의 자손은 누구지? ‘우리가 다윗의 같은 계통이다. 그러면 메시아는 우리의 혈통을 따라서 메시아가 온다. OK, 끝났어. 성경 해석 OK, 온전하게 됐어.‘ 그게 틀린 해석이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 상상 못하죠. 왜? 누가 와도 거기서 틀린 것을 찾아내지 못하니까.

한번 적어봅니다. 인간은 자신의 과오를 본인이 찾아내지 못한다. 자 그럼 물어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본인의 과오를 본인이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다 마찬가지에요. 유대인도 마찬가지지만 사마리아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유대인들은 빵 사러 가고 없죠. 그런데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누굴 만납니까? 예수님을 만나죠. 만난 이 지점에서도 여전히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과오를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어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이 과오가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도 과오를 안다? 모른다? 과오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과오를 깨닫게 해서 그 여인이 스스로 자기 역사를 공중에 날라 보내게 하는 겁니다.

참, 이게 중요한데요. 사람이 나쁜 짓 하는 것도 나쁘지만 나쁜 짓 했다고 자책하는 게 더 나빠요. 인간은 나쁜 짓 했다고 자책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왜냐 하면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걸 자책한다고 갑자기 착해지고 선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만난 순간 자책하지 마세요. 주님 만났는데 자책한다는 것은 이것은 마귀의 마지막 시험이 그 시험 이예요. ‘예수 믿으면서 똑바로 살란 말이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사는 게 거룩이야.’ 이게 마귀가 던져주는 마지막 올무고 함정입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하면 안 됩니다.

이 여인은 자책했습니까? 뭡니까? ‘아, 제대로 살걸.’ 이랬습니까? 아니면 뭡니까?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이거죠. 무슨 자책을 해요? ‘내가 조금만 행동을 잘했으면 집안에 우환이 없고 내가 바르게 했으면 뭐 일이 잘 되고.’ 자꾸 자책하지 마세요. 이거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냥 나는 이런들 저런들 어쨌든 메시아 만났다. 끝, 이거에요. 메시아를 만나면 되지, 지금 딸내미 임신했는데 아들인지 딸인지 그거 뭐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친정 엄마가 키우느냐 시어머니가 키우느냐 중요한 문제 아니고, ‘엄마 자식 잘 키워야 된다.’ 하면 ‘그거 잘 키우는 것보다 메시아가 중요하지 메시아 만나는 게 중요하지.’ 그거 잘 키운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을 사마리아 여인을 가지고 대화하는 가운데서 하는 겁니다.

자, 두 번째 강의 해봅시다.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예수님 발언 가운데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잊어버렸죠? 예수님 말하게 되면 뭐가 나온다 했죠? 구조! 목사님이 다른데. 제가 중국 갔는데 어떤 장로님이 이야기하시던데 ‘목사님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사모는 역시 사모답습니다. 그러니까 목사 권위가 ‘어메 기살아.‘ 나오죠.

말씀 가운데 뭐가 나온다? 구조가 나온다는 겁니다. 구조란 말은 결국 서지도 못하는 질서가 나오는 겁니다. 이 질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실상은 나왔지만 그 질서에 대한 해설은 12제자가 오고 난 뒤에 12제자 보고 그 해설을 해준 겁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른다.”라는 새로운 구조가 나오죠. 그러면 이 구조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보통 구조라 하면 이렇게 정육면체 같으면 여기 점이 13개인지 모르겠는데 많죠. 점이 하나가 아니죠?

그런데 예수님의 구조는 점이 몇 개죠? 오직 하나밖에 없죠.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아무리 사람 수가 많더라도 쳐다보는 지점이 어디만 쳐다봐야 돼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쳐다봐야 그게 교회거든요. 왜냐 하면 그 십자가를 봐야 누구도 ‘나 잘났다. 나는 너보다 일 더 많이 했다.‘라는 소리가 나와요? 안 나와요? 안 나오게 돼 있다니까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고 하나밖에 없거든요. 참, 하나밖에 없다는 소릴 했더니만 그걸 너만 아느냐고 시비를 걸면 이걸 어떻게 해야 돼요? 시비를 못 걸어서 애가 타는 모양이라.

사마리아 여인을 주께서 찾아올 때 사마리아 여인만 찾은 게 아니고, 유대인은 유대인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이걸 반대로 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만났잖아요? 만났는데 사마리아 여인 뒤에 누가 있더라? 12제자가 끌려오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해요. 지금 유대인들은 누굴 싫어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하잖아요. 그 싫어한 사람을 앞장세워서 그 뒤쪽에 자기 제자들이 끌려오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방법 사용했거든요. 누가 높으냐. 싸움이 났을 때 예수님이 누굴 앞장세웠습니까? 어린아이를 앞장세웠죠. 그러면 12제자는 어디 서있어야 돼요? 어린아이 앞에 서있고 그 뒤에 ‘똑바로 서, 똑바로 서.’ 그러면 줄 설 때 먼저 앞장서려고 또 싸울 거예요. 어린아이 세운 데는 어린아이 자리가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 세운 데는 사마리아 여인 자리가 아니고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자리에요. 결국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자리 만드는 거예요. 어디다가? 사마리아 여인 속에다. 마음속에다 예수님 자기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12제자, 베드로 자리에 예수님자리. 사도요한 자리가 예수님자리.

그러면 예수님이 몇 명이 됩니까? 벌써 3명인데, 그게 아니고 3명이 있더라고 그것이 예수님은 오직 한 분되게 하시는 그 구조가 나오는 겁니다. 이 구조 말고 인간사회 구조가 뭐냐 하면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독자적으로 사수하는 그런 구조죠. 한번 해볼까요? 민주주의 구조는 어떤 구조냐 하면 유기체라 하거든요. 유기체란 뭡니까? 살아있는 유기체. 이건 뭐냐 하면 여러분 죽부인 압니까? 부인중에도 죽부인이 있어요. 홀아비들 껴안고 자는 것. 그 죽부인의 중심이 어디 있죠? 죽부인은 중심이 없어요. 왜냐 하면 죽부인은 대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었기 때문에 어디를 껴안아도 괜찮아요. 서로가 중심 이예요. 서로가 중심에서 마주보거든요.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 중에서 대나무로 만든 공 같은 거 있죠? 공보면 중심이 어디죠? 없잖아요. 자기 있는 위치가 각자 중심이 된다. 이게 민주주의에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각자 역할이 다르죠. 한쪽은 사법기관, 한쪽은 행정기관, 한쪽은 논문, 각자 위치가 다를 뿐이지, 위치가 달라도 서로가 독자적인 자기의 자리는 고수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늘에서 주어진다. 이것을 존로크의 천부 인권설이라 해요. 갑오경장인가 삼일천하로 끝나버린 게 있죠. 조선의 마지막 총잡이, 삼일 동안 노예를 해방시키고 모든 인재를 양반, 상놈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시킨다 하려하다가 청나라 러시아 군대가 와서 김옥균이가 죽었는지 도망쳤는지... 삼일천하, 일본으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천부 인권설, 인간의 권리는 하늘에서 주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요걸 구조화 시키면 바로 죽부인, 대나무 공예품으로 생각하면 제일 적당할겁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이렇게 있는 것.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구조인데 예수님 구조는 어떤 구조에요? 오직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 중심 이예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전부 다 뭘 경유하게 돼 있어요? 내가 저쪽으로 미사일 쏘는 게 아니고 누굴 경유해서? 예수님을 경유해서 가게 돼 있어요. 내가 손톱이 자란다. 그냥 자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주님이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고 손톱도 자라게 하시고 키도 한 자나 키우게 하는 것도 주님을 경유해서 하시는 거예요.

아까 했던 거 다시 해봅시다. 창조에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했죠. 왜 없습니까? 1, 2, 3, 4, 5, 6, 7 하고 다시 안식일 지나고 다시 1, 2, 3, 4, 5, 6, 7 , 1, 2, 3, 4, 5, 6은 뭐만 위해서? “주님이 창조하셨습니다.”를 증거 하는 그날을 위해서 임시 땜방으로 1, 2, 3, 4, 5, 6이 있는 거예요. 이게 뺑뺑이 도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해요. 그냥 뺑뺑이 도는 게 아니고 나사처럼 순환구조처럼 점점 더 천국의 완성에 도달되는 거예요. 1, 2, 3, 4, 5, 6, 7, 7, 1, 2, 3, 4, 5, 6, 7, 7, 1, 2, 3, 4, 5, 6, 7 이런 식으로. 그래서 안식일만, 안식일이 향도가 되어서, 이끄는 표준이 되어서 안식일이 이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오기 때문에 안식일 되면 영원하리라. 에스겔에서 나온 것처럼.

여러분들이 닭이 이렇게 있는데 닭이 계란을 낳으면 경사지게 해서 떼구르르 굴러서 이렇게 끝부분에 오게 되죠. 그러면 주인이 와서 계란만 건지면 되잖아요. 닭이 계란을 날 때마다 건지는 게 아니고 경사지게 해서 떼구르르 굴러오면 요것만 건지면 된다 이 말이죠. 안식일만 건지면 되는 거예요. 인자는 안식일의 완성으로 오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성경 속의 구조는 뭡니까? 역사가 있어요? 없어요? 역사는 없고 반복돼요. 반복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역사가 있잖아요? 우리는 역사가 있다는 우리 자체가 가짜라니까요. 우리라는 말 하지 말고 뭘 경유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경유한 우리가 돼야 된다니까요. 요번에 문등 레위기 강의할 때 나왔죠? 나와 우리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나가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할 때 우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우리가 되면 1+1 들이 2가 되는 게 아니고 아무리 1, 1, 더해봐야 이게 뭐가 된다? 1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낯선 구조가 되는 겁니다.

노아 방주가 몇 개죠? 하나죠. 노아 방주가 8척이었습니까? ‘신에게는 아직도 8척의 방주가 있습니다.’ 이랬습니까? 노아 방주는 하나죠? 그러면 살려면 어디 가야 돼요? 방주 안에 다 들어가 있어야 되죠.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서 구원받았습니까? 방주 안에서 구원받았죠. 그럼 방주가 몇 개입니까? 하나죠. 우리는 어디서 구원받습니까? 주 안에서 구원받죠. 네가 날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잖아요. 그게 바로 새로운 질서라니까요. 새로운 질서에서 나에 대해서 숫자 1을 치면 돼요? 안 돼요? 치면 안 되죠. 쳐도 예수님을 경유해서 쳐야 되죠. 너는 있네, 아니야, 예수님을 경유하여 주 안에서 나는 하나고, 너 있네. 하나 +1= 2가 되네, 아니야 주 안에 들어가면 너하고 합해서 1이 되는 거예요. 왜, 다 같은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다 같이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은 전도를 몇 명 했습니까? 달랑 1명만 전도하면 돼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전도하면 돼요. 자기 그리스도의 몸만 전도하면 그게 전도의 끝 이예요. 노아 방주에 8명이 구원받은 이유가 8명이 완벽한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나가 어떻게 되겠어요? 한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하나의 표적을. 노아가 긴 그림자잖아요. 그림자 따라보니까 한분만 계시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고 오직 한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노아 식구가 아주 적절하게 잘 보여준 거예요.

37절 봅시다. “그런즉” 그 다음에 뭐가 나와요? 뭐는 심고? 한사람은 심었죠? 그러면 한사람은 심었고 다른 사람은 거둘 때에 거두는 사람이 뭘 쳐다봐야 됩니까? ‘내가 거뒀다.’ 하지 말고 누가 심었느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거두는 사람 이예요.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거는 잘못된 말이죠.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이거는 바른 말이라니까요. 그럼 듣는 사람이 ’에이, 그거 말고요. 주님 때문에 구원받은 건 아는데 주님 때문에 집사님은 어떻게 했기에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그런 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이구, 다른 교회는 권사님이 신방을 12번 가서 구원받았다는데 그런 거 없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12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법이 없거든요. 13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법이 없습니다. 용서를 몇 번째 하면 용서가 됩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면 용서 됩니까? 한번을 해도 용서가 되고 천 번을 해도 용서가 안 되고, 그런 겁니다.

지금 요한복음 4장을 하면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칠 것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너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손댈지...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만났는데 주님이 나하고 만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창조 전에 생각했던 그 사람하고 만났죠. 그래서 내가 나를 경유하거든 나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주님과 경유할 때만 나는 나가 되는 겁니다. 주님 경유할 때만!

그래서 여러분들 인생이 뭔가 망가지고 파괴됐습니까? 주님만 경유하세요. 파괴되지도 않았고 망가지지도 않았습니다. 자꾸 망가졌다. 파괴됐다. 머리가 세어진다. 요새 골치가 아프다. 그거 다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주님의 것이 골치 아픈 거예요. 내 것은 없습니다. 모찌도 주님의 모찌고 그렇고 내 것은 아닙니다. 항상 주님을 경유하세요. 그러면 ‘목사님 말씀은 좋은데 보여야 하죠.’ 보이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식으로 보인다면 그 예수는 가짜에요. 그러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걸 믿습니까? 아니, 보이는 걸 믿죠. 그럼 보이는 걸 믿지 말라면서요? 그냥 보지 말고 주님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나는 여기 보이는데 주님의 것으로 보이죠. 주님의 것으로! 아이쿠, 친절하셔라. 이렇게 친절해도 못 알아들으면...

우리의 몸을 주님의 것으로 만지고 있다니까요. 도대체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알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될지,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해야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 보이겠습니까? 도대체 얼~마나 실망을 해야 할지, 얼마나 자기한테 기대를, ‘나 이제 나한테 기대하면 개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우리는 처절하게 실망을 해야. 만약에 이 몸이 내 몸이라면 철저하게 주님 앞에 도외시당합니다. 내 몸도 아닌데 내 몸이라고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계속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 잘났다. 너. 그래 잘난 네 맘대로 해.’ 절대로 우리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할 때 생각해 보세요. 이게 내 몸을 내 몸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주께서 동조를 안 해주신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진도 나가봅시다.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했죠? 물 좀 달라고 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입장이냐 하면, 여기서 진도 늦게 나가더라도 중요하기 때문에 차근차근 밟아봅시다. 오늘 다 해야 된다는 숙제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의 제공자죠? 그리고 물을 제공 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참, 예수님의 생각 치밀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누가 우위냐 하면 유대인이 위위고 사마리아 여인아 저위죠. 이런 생각을 지금 유대인인 예수님이 갖고 있을 거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이미 생각하고 있죠. 왜, 서로서로 미워하니까. ‘그래 유대인들 잘났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예수님이 도리어 사마리아 여인보고 물을 달라고 했죠. 유대인이 물을 달라고 할 때는 갑자기 유대인은 결핍이 되죠. 물 없음이 되죠. 물이 없어 아쉽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줄 수 있는 시혜자가 되고 유대인들은 수혜자, 받는 쪽이 되죠. 그럼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예수님께 지금 주도권을 넘겨준 거예요. ‘나한테 물 좀 주세요.’ 나한테는 물이 없고 당신한테는 물이 있습니다. 그 물 좀 주세요.‘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청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 자리에서 달라고 한 게 아니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그 미움 받는 자리, 유대인들에게 역사를 주장하는 자리에게 미움 받는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하되 그 자리에다 구멍을 뚫어서 그 자리에 서서도 보이지 않는데 존재하는 어떤 숨어있는 다른 자리, 그 자리에 서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여기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 컵은 말을 못해요. 우리는 물 컵이 입이 없어서  말 못한다고 안 끼워줘요. 그런데 당나귀가 사람 말 하듯이 물 컵이 말 할 줄을 몰랐어요. 그런데 이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어요. 하는 말이 ‘물 컵아 나한테 물을 달라.’ 하니까 물 컵이 생전 말 못하는 줄 알았는데 물 컵이 말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같은 인간들 편이라고 여겼는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인간들 편이 아니라고 밀어낸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잘못된 예수님이고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밀어낸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오는 거죠.

그럼 물 컵이 예수님입니까?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건 아니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과 더불어 있으면서 사마리아 여인도 미처 모르는 숨어있는 그 빈자리에 이미 예수님이 거기서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현장이 어디냐 물어보면 우리가, 내가 여기 있다고 우김으로써 내 있음의 방해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나타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내 뜻대로 할 거야. 하고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도외시된 그 현장에서 주님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하는 게 문제가 되죠.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죠. 주님이 있게 하셨죠. 그러면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계신 거예요. 주님이 계셔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일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 요한복음 4장 다 할 것 아니니까 진도 늦추더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데 뭘 경유하는 조건 하에 받습니까? 누굴 경유해요? 예수님 경유하죠. 예수님을 경유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떤 말을 할 때 누가 하는 것같이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거죠. 예수님의 것이니까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늘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은 경유를 통해서 고백하는 가운데 일을 하란 말이죠. 뭐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애를 때릴 때도 주께서 주신 힘으로 애를 때리라 이 말이죠.

주일 낯에 그런 파격적인 말을 했잖아요. 윤 집사님은 술 먹는 가운데서도 기도한다. 술 취한 가운데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게 하실 때 그게 술 취한다는 조건이 그게 방해가 안 되겠죠.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전서가 얼마나 신비로운 이야깁니까? 그리고 이 신비로운 이야기가 요한복음 4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게 신비롭습니까? 신비롭지 않습니까? 전혀 신비롭지 않죠. 예수님이 어떤 여자를 만났다. 이게 무슨 신비로운 게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으로 봐서는 신비롭죠. 왜냐 하면 적대 관계에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께서 ‘야, 너 나한테 한 수 배워.’ 이것도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먼저 요청하죠. 물 좀 달라 하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자리에 서서 숨어있는 예수님이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토록 영생의 물을 주고 있다면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의 존재는 뭡니까? 그게 나타난 자기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까? 자기한테 영생의 물을 늘 주고 있는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증거 하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거예요? 어느 쪽 이예요? 숨어있는 분을 증거 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추수된 자의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슬슬 감이 잡히죠?

우리가 나타났잖아요? 남들이 우리보고 있다고 하고 목사님도 계시죠. 계실 때 그냥 계시면 안 되고 주님과 경유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있는 게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주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통풍 걸렸으면 주께서 통풍을 보여주기 위해서 통풍 걸린 거예요. 모든 일이 주님 없이 이루어진 일이 없습니다. 왜, 모두 다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가 있다? 없다? 역사가 없어요. 역사가 있으면 흘러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역사라는 게 없고 역사 자체가 반복이 돼 버리면 옛날에 있는 것이 지금도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옛날에도 있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주님 안에서는 알파요 오메가 안에 다 갇혀 있는 겁니다. 하나의 바구니 속에 알파와 오메가라는 바구니 속에 다 이미 일어나야 하기에 있는 거예요.

사람이 역사를 생각하게 되면 사람이 우울증 걸립니다. 그리고 너무 슬퍼요. 그냥 도라지 위스키 섹스폰 소리 듣고 싶다고 돌아다니고 낭만을 위해서 부둣가 돌아다닐 수가 있어요. 잃어버린 낭만을 위해서, 이 나이에 사랑을 하겠냐마는. 그렇게 되면 사는 게 아무 목적이 없어요. ‘아이고, 또 사는구나.’ 그러나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까? ‘아유, 또 살려주니 아이구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랬습니까? 사는 것 자체가 상급이고 사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살려줬다는 걸 증거 하라고 오늘도 또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건 딴 게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을 뺏어버리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없애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 모든 해석이 사마리아 여인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없애버리고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 되게 하시는 그 사마리아 여인을 우리가 아는 사마리아 여인하고 교체시켜버리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남편 다섯 명이었다. 남편 다섯 명이게 하셨지. 누가? 예수님이. 나중에 여섯 번째 사귈 때 만났던 그 예수님이 물 달라고 왔던 그 예수님이 그전부터 이미 작업 걸었죠. 남자 다섯 명 사귀라고. 김철수부터 해서 다섯 명 사귀라고 그렇게 했겠죠. 이 여자는 다섯 명인데 왜 우리는 한 남자, 한 여자만 사귀게 하셨나. 그것은 바로 그때그때 달라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괜히 한 명만 해야 되는데 두 명 세 명 하다가 그거는 혼쭐납니다.

자,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0절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이라는 거죠. 그 앞에 유대인 맞죠?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했죠? 그러면 예수님은 유대인입니까? 유대인 아닙니까? 예수님은 유대인 맞죠. 진짜 유대인이죠.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하는 그 유대인은 결코 아니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맞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이 결코 그 다윗의 자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여자로부터 질문이 나왔잖아요. 이제는 이미 작업이 된 거예요. 여자 쪽에서 질문이 들어왔죠. 그러면 들어왔으니까 그 여자가 질문한 것은 자기 구조입니다. 말을 할 때 뭐가 나온다? 구조 나오죠. 여자가 말을 했죠. 당신은 유대인이라 말했죠. 그러면 여자는 이미 기존의 망해야 될 심판받을 구조 속에 있죠. 이 구조에다 예수님이 답변을 합니다. 답변하면 예수님 쪽에서 뭐가 나온다? 새로운 구조가 나오죠. 이 구조가 나오면서 옛날 구조가 새로운 구조 안에서 옛날 구조는 새로운 구조의 보여주는 증거물로 채택이 되는 겁니다. ‘여인아 너는 이미 값을 받았어. 이미 내가 하는 추수에 이미 너는 참여된 사람이야.’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참여된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걸 느낍니까? 참여됐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야기와 주님의 답변이 내 쪽에서는 안 맞다는 사실, 이걸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진심으로 나온다는 말은 이미 주님의 구조 안에 이미 갇혀 있는 거예요. ‘내 뜻은 이거지만 주여 절대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신은 유대인입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나는 그 유대인 아니다.“ 뭡니까? 나는 이러 이러한 일을 너와 상종해서 벌릴 분이다. 그러니까 문장이 길어져 버렸죠.

얼마나 긴지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뭐라 합니까? ‘그’라 하죠. 그러니까 현재 네가 생각하는 나, 그 속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따로 ‘그’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저씨 유대인이네.’라고 생각한다면 진짜 나는 여기서 네가 생각하는 나는 아니고 그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이다 하면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 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요. 나타나면서 아이쿠, 내가 생각했던 예수였구나. 깨닫는 순간 그 진짜 예수님이 지금까지 같이 나를 나답게 만든 그 예수님이 나타나는 거예요.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진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냐 하면 항상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그 예수님이 아니고 자꾸 비켜나게 만드시면서 그러면서도 그것이 늘 반복되게 조치를 하면서 뭔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애초부터 창세전부터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것으로서 주님의 자기 관리 하에 내가 이렇게 잠식돼 있고 점령당하여 있다는 걸 느낄 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합시다. 다음에 계속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이야기할 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뜻을 어긋나게 이야기할 때 우리의 내부의 비밀을 들추어낼 때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우길 때, 그 모든 것이 빗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사람이 된 것을, 영생 얻은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