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4장1(종말과의 만남)140904b-이 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게 뭐냐, 뭘 주셨는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주심으로써 뭔가 달라졌거든요.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들은 어떻고 우리는 어떻다. 이렇게 이야기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 자신이 이미 종말에 말려든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일에 말려들어서 그야말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값없이 주의 일에 참여된 자 중에 한 사람으로 돼 버렸습니다. 그게 이미 추수를 당한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 자체가 주님한테 추수당한 겁니다. 공짜로 추수당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제자들에게 주의 일에 참여되는 사람의 모델로서 그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이러한 변화가 누가 오시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사건을 일으키니까 이런 변화가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오늘날도 비록 주님은 안 보이는데도 사건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그런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그럼 주님이 보이지 않지만 일하고 있는 증거가 뭐냐, 바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미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자기 잘남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값없이 이미 다 삯을 줬습니다. 영생을 줬습니다.‘라고 이걸 떠버리고 다니는 사람들. 그걸 아주 편하게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등장했다는 자체는 절대로 그 사람의 혼자 작업이 아닙니다. 주님이 손 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 4장을 보면서 주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때 무슨 뜻에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무슨 근거에 의해서 구약 적으로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일을 하셨으며 그렇게 일함으로써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의 이게 왜 모델케이스로 자리 잡았는지, 그런 것을 두 번째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4장 3절에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으로 가시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했는데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복습해봅시다. 사마리아 땅이니까 이것은 유대 땅이 아니죠. 그러면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려고 왔다.’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게 되면 유대교가 자기 역사 속에서 메시아와 만난다는 그 주장은 옳은 주장입니까? 틀린 주장입니까? 틀린 주장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유다 자손에게 메시아가 오잖아요. 아까 예를 들었죠. 누구의 5대손에 메시아가 온다. 그 선조들은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대할 때 제가 아까 어렵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예수님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이 인간이 아는 이 땅 자리에는 예수님이 안 계시고, 인간이 예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저희들이 아는 예수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 현장에 비로소 예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 후손으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들통 내면서 진짜 유대인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는 뭐냐 유대인들이 누굴 배척하죠? 사마리아 여인을 배척하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느 쪽에 옵니까? 사마리아를 경유해서 유대인에게 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켜 버리고 자기와 직접 만나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이렇게 오게 되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죠. 왜냐 하면 그들 생각에 사마리아인도 구원한다는 것은 그들 사고방식에는 이런 구조가 될 수가 없어요. 결국 구원을 훼방하는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누굽니까? 본인이죠. 본인의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본인에게 접근하는 주님을 피하고 엉터리 예수를 찾아다니는 꼴이 되는 겁니다. 이건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걸 생각도 못하게 우리가 싫어 한 바 되는 그런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도 못한 거죠.
우리가 ‘아니다.‘라고 한 그 노선을 통해서 우리한테 주님이 오신다는 그 내막을 우리는 잘 수용을 못하는 거죠.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노동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노동을 하기 때문에 습관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대목을 다시 보게 되면 여기 37절에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심는 사람은 누구죠? 예수님이죠. 거두는 사람은 누굽니까? 제자들이죠. 심어서 거뒀는데 거두게 된 대상자가 누구였습니까? 사마리아 여인. 38절에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마리아 여인 구원하는데 있어서 그 시점에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죠? 현장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죠.
그러면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해봅시다. 구원될 나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간단하잖아요. 내가 구원되는데 있어서 내가 무슨 기여를 했느냐 말이죠. 방해만 했지, 전혀 안 했죠. 이게 믿어져야 돼요. 내 구원에 내가 하등의 보태 본 적이 없는 게 믿어져야 돼요. 이게 안 믿어지는 이유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뭘 상상하느냐 하면 구원받게 될 나를 상상하기 때문에 방금 이야기한 것이 안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내가 구원받으면 이렇게 될 거라고 이 두 쌍둥이를, 내가 만든 쌍둥이를 이걸 포함시켜서 이 두 개를 종합적인 나라고 생각하니까 이게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겁니다.
구원받은 나는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 있는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참 말씀드리면서 내가 미안합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나’가 따로 있어요. 주님이 생각하는 ‘나‘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잖아요. 그럼 나는 아니라면서? 나는 아니죠. 왜 나는 아닙니까? 평소에 나는 내가 생각한 나로만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이 나는 나가 아닌데, 이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그 나밖에 모르는 나를 이미 주님께 손 탔어요. 손대다 보니까 나중에 보니까 이 내가 내가 아니고 주님이 구원시킬 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나에 대해서 손을 떼야 된다니까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우리는 나에 대해서 손을 떼 줘야 돼요. 떼서 보게 되면 주님의 것이 되고 손 안 떼면 내 몸이 내 몸이 된다니까요.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고. 가장노릇하지 마세요. 손 떼세요. 손 떼면 주님께서 가장되시고 우리는 그냥 내가 노력지 않는 가장이 돼버린 거죠.
집사님이 혹시 안경 잃어버린 적 있었어요? 안경 잃어버리면 물론 안경 하나 살 수도 있어요. 안경 잃어버리면 섭섭한 게 뭐냐 하면 안경 속에 나의 찬란한 역사가 담겨있거든요. 동거동락을 같이 했잖아요. 그런데 찾으면 기분 좋죠? 잃어버린 내 역사 다시 찾으니까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끼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내가 아침에 눈 뜨면 친히 주님의 손길이 와서 안경을 끼어준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더 좋아요. 머리 빠지잖아요. 머리가 빠지는데 내가 잠잘 때 주님께서 한 땀, 한 땀 심어준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니고 주님의 머리라면 굉장히 기분이 좋죠? 원래 난 눈도 코도 없는데 아침에 되니까 눈도 박아주고 코도 오뚝 나오게 하면 굉장히 기분이 좋죠? 이 기분 좋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요것도 주님께서 요것도 내 것이고 요것도 내 것이고 전부 다 주님이 자기 것이라고 가져갈 때 뭔가 뜯겨나가는 즐거움, 이 몸 자체가 관리대상으로 주님께 친히 손 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목마르지 않은 거예요. 기쁨이 되죠.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 명 있었다. 아까 말한 김철언등.. 그 사람들, 그동안 만났던 남편 만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해야 됩니까? ‘아이쿠, 고맙습니다. 전 전 전 남편님.’ 내 팔자 고치라고 만난 남편이 아니고 다 주께서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붙여준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것도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기쁨이 넘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남은 내 위주로 만났던 그 모든 만남은, 그게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 역사를 찢어 버리면 그게 해체가 됩니다. 해체가 되어서 그 모든 만남을 일단 완전히 무시하시고 오직 하나의 만남만 생각하세요. 그 하나의 만남을 한번 봅시다.
6절에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달라 하시니” 예수께서 “물 좀 달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죠.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에요. 물 좀 달라 하는 예수라고 불리는 어떤 사나이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는 메시아를 만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만났죠.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와서 옛날 지나간 이순신장군 이야기 듣듯이 옛날 옛날에, long time ago, once upon a time, 그 옛날 옛날에 예수님이 살고 있었더랬어요. 예수 이야기 듣는 거예요.
백날 들어봤자 누가 살아있어요? 이야기 듣는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꾸리지 내가 손 타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못 살린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그런 가운데서 옛날 내 역사 가운데서 예수 이야기 들었던 역사를 그냥 집어넣는 거예요. 그거 아무 의미 없어요. 내 역사가 약간 팽창되고 늘어질 뿐 이예요. 내 역사란 주머니가 늘어졌죠. 왜냐 예수님 이야기가 더 꿍쳤으니까. 옛날에 예수란 분이 십자가 졌대, 그 이야기 여기 담으세요. 자기 추억의 주머니에다 예수 이야기를 꼽아 넣었을 뿐이지 그 예수는 아니에요. 왜 자기가 예수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예수를 만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를 만났죠. 그렇게 바뀌게 되면 예수님이 나를 만난 순간 그 나는 나가 아니고 예수님이 생각했던 그 나고 예수님이 생각했던 그 사마리아 여인이죠. 이제 이해되시겠습니까?
지금 빵 사러 간 12제자는 아무것도 몰라요.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던 예수님하고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어요. 예수님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빵이나 먹고 있지,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뭘 하려 오셨는지 몰라요. 9절 봅시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묻고 답해봅시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을 싫어합니까?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하죠.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을 싫어합니까? 싫어하지 않습니까? 싫어하죠. 사마리아 여인은 그냥 유대인을 붙들고 이러지 않아요. 싫어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모습은 뭐냐 하면 만약에 메시아가 사마리아 여인 편에 들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은 이미 유대인에게 맞아죽어야 돼요. 왜, 진영이 청군 백군이 이미 갈라져 있기 때문에. 소통할 의사도 없고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하는 순간 이미 유대인한테는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한테는 뭐가 깨지냐 하면 우리는 다윗의 후손들이다. 우리 자손들을 통해서 누가 온다? 메시아가 온다는 그들의 모든 역사에서 나온 메시아 고대함은 하나의 꿈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죠. 참 이런 게 어렵죠. 성경에 분명히 문자로 나와 있잖아요.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온다. 그러면 그걸 보는 사람 백이면 백, 다윗의 자손은 누구지? ‘우리가 다윗의 같은 계통이다. 그러면 메시아는 우리의 혈통을 따라서 메시아가 온다. OK, 끝났어. 성경 해석 OK, 온전하게 됐어.‘ 그게 틀린 해석이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 상상 못하죠. 왜? 누가 와도 거기서 틀린 것을 찾아내지 못하니까.
한번 적어봅니다. 인간은 자신의 과오를 본인이 찾아내지 못한다. 자 그럼 물어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본인의 과오를 본인이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다 마찬가지에요. 유대인도 마찬가지지만 사마리아 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유대인들은 빵 사러 가고 없죠. 그런데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누굴 만납니까? 예수님을 만나죠. 만난 이 지점에서도 여전히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과오를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어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이 과오가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도 과오를 안다? 모른다? 과오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과오를 깨닫게 해서 그 여인이 스스로 자기 역사를 공중에 날라 보내게 하는 겁니다.
참, 이게 중요한데요. 사람이 나쁜 짓 하는 것도 나쁘지만 나쁜 짓 했다고 자책하는 게 더 나빠요. 인간은 나쁜 짓 했다고 자책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왜냐 하면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걸 자책한다고 갑자기 착해지고 선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만난 순간 자책하지 마세요. 주님 만났는데 자책한다는 것은 이것은 마귀의 마지막 시험이 그 시험 이예요. ‘예수 믿으면서 똑바로 살란 말이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사는 게 거룩이야.’ 이게 마귀가 던져주는 마지막 올무고 함정입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하면 안 됩니다.
이 여인은 자책했습니까? 뭡니까? ‘아, 제대로 살걸.’ 이랬습니까? 아니면 뭡니까?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이거죠. 무슨 자책을 해요? ‘내가 조금만 행동을 잘했으면 집안에 우환이 없고 내가 바르게 했으면 뭐 일이 잘 되고.’ 자꾸 자책하지 마세요. 이거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냥 나는 이런들 저런들 어쨌든 메시아 만났다. 끝, 이거에요. 메시아를 만나면 되지, 지금 딸내미 임신했는데 아들인지 딸인지 그거 뭐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친정 엄마가 키우느냐 시어머니가 키우느냐 중요한 문제 아니고, ‘엄마 자식 잘 키워야 된다.’ 하면 ‘그거 잘 키우는 것보다 메시아가 중요하지 메시아 만나는 게 중요하지.’ 그거 잘 키운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을 사마리아 여인을 가지고 대화하는 가운데서 하는 겁니다.
자, 두 번째 강의 해봅시다.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예수님 발언 가운데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잊어버렸죠? 예수님 말하게 되면 뭐가 나온다 했죠? 구조! 목사님이 다른데. 제가 중국 갔는데 어떤 장로님이 이야기하시던데 ‘목사님은 어디가 달라도 다릅니다.’ 사모는 역시 사모답습니다. 그러니까 목사 권위가 ‘어메 기살아.‘ 나오죠.
말씀 가운데 뭐가 나온다? 구조가 나온다는 겁니다. 구조란 말은 결국 서지도 못하는 질서가 나오는 겁니다. 이 질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실상은 나왔지만 그 질서에 대한 해설은 12제자가 오고 난 뒤에 12제자 보고 그 해설을 해준 겁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른다.”라는 새로운 구조가 나오죠. 그러면 이 구조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보통 구조라 하면 이렇게 정육면체 같으면 여기 점이 13개인지 모르겠는데 많죠. 점이 하나가 아니죠?
그런데 예수님의 구조는 점이 몇 개죠? 오직 하나밖에 없죠.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아무리 사람 수가 많더라도 쳐다보는 지점이 어디만 쳐다봐야 돼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쳐다봐야 그게 교회거든요. 왜냐 하면 그 십자가를 봐야 누구도 ‘나 잘났다. 나는 너보다 일 더 많이 했다.‘라는 소리가 나와요? 안 나와요? 안 나오게 돼 있다니까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고 하나밖에 없거든요. 참, 하나밖에 없다는 소릴 했더니만 그걸 너만 아느냐고 시비를 걸면 이걸 어떻게 해야 돼요? 시비를 못 걸어서 애가 타는 모양이라.
사마리아 여인을 주께서 찾아올 때 사마리아 여인만 찾은 게 아니고, 유대인은 유대인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이걸 반대로 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만났잖아요? 만났는데 사마리아 여인 뒤에 누가 있더라? 12제자가 끌려오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해요. 지금 유대인들은 누굴 싫어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하잖아요. 그 싫어한 사람을 앞장세워서 그 뒤쪽에 자기 제자들이 끌려오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방법 사용했거든요. 누가 높으냐. 싸움이 났을 때 예수님이 누굴 앞장세웠습니까? 어린아이를 앞장세웠죠. 그러면 12제자는 어디 서있어야 돼요? 어린아이 앞에 서있고 그 뒤에 ‘똑바로 서, 똑바로 서.’ 그러면 줄 설 때 먼저 앞장서려고 또 싸울 거예요. 어린아이 세운 데는 어린아이 자리가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 세운 데는 사마리아 여인 자리가 아니고 누구 자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자리에요. 결국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자리 만드는 거예요. 어디다가? 사마리아 여인 속에다. 마음속에다 예수님 자기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12제자, 베드로 자리에 예수님자리. 사도요한 자리가 예수님자리.
그러면 예수님이 몇 명이 됩니까? 벌써 3명인데, 그게 아니고 3명이 있더라고 그것이 예수님은 오직 한 분되게 하시는 그 구조가 나오는 겁니다. 이 구조 말고 인간사회 구조가 뭐냐 하면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독자적으로 사수하는 그런 구조죠. 한번 해볼까요? 민주주의 구조는 어떤 구조냐 하면 유기체라 하거든요. 유기체란 뭡니까? 살아있는 유기체. 이건 뭐냐 하면 여러분 죽부인 압니까? 부인중에도 죽부인이 있어요. 홀아비들 껴안고 자는 것. 그 죽부인의 중심이 어디 있죠? 죽부인은 중심이 없어요. 왜냐 하면 죽부인은 대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었기 때문에 어디를 껴안아도 괜찮아요. 서로가 중심 이예요. 서로가 중심에서 마주보거든요.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 중에서 대나무로 만든 공 같은 거 있죠? 공보면 중심이 어디죠? 없잖아요. 자기 있는 위치가 각자 중심이 된다. 이게 민주주의에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각자 역할이 다르죠. 한쪽은 사법기관, 한쪽은 행정기관, 한쪽은 논문, 각자 위치가 다를 뿐이지, 위치가 달라도 서로가 독자적인 자기의 자리는 고수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늘에서 주어진다. 이것을 존로크의 천부 인권설이라 해요. 갑오경장인가 삼일천하로 끝나버린 게 있죠. 조선의 마지막 총잡이, 삼일 동안 노예를 해방시키고 모든 인재를 양반, 상놈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시킨다 하려하다가 청나라 러시아 군대가 와서 김옥균이가 죽었는지 도망쳤는지... 삼일천하, 일본으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천부 인권설, 인간의 권리는 하늘에서 주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요걸 구조화 시키면 바로 죽부인, 대나무 공예품으로 생각하면 제일 적당할겁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이렇게 있는 것.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구조인데 예수님 구조는 어떤 구조에요? 오직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 중심 이예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전부 다 뭘 경유하게 돼 있어요? 내가 저쪽으로 미사일 쏘는 게 아니고 누굴 경유해서? 예수님을 경유해서 가게 돼 있어요. 내가 손톱이 자란다. 그냥 자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주님이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고 손톱도 자라게 하시고 키도 한 자나 키우게 하는 것도 주님을 경유해서 하시는 거예요.
아까 했던 거 다시 해봅시다. 창조에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했죠. 왜 없습니까? 1, 2, 3, 4, 5, 6, 7 하고 다시 안식일 지나고 다시 1, 2, 3, 4, 5, 6, 7 , 1, 2, 3, 4, 5, 6은 뭐만 위해서? “주님이 창조하셨습니다.”를 증거 하는 그날을 위해서 임시 땜방으로 1, 2, 3, 4, 5, 6이 있는 거예요. 이게 뺑뺑이 도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해요. 그냥 뺑뺑이 도는 게 아니고 나사처럼 순환구조처럼 점점 더 천국의 완성에 도달되는 거예요. 1, 2, 3, 4, 5, 6, 7, 7, 1, 2, 3, 4, 5, 6, 7, 7, 1, 2, 3, 4, 5, 6, 7 이런 식으로. 그래서 안식일만, 안식일이 향도가 되어서, 이끄는 표준이 되어서 안식일이 이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오기 때문에 안식일 되면 영원하리라. 에스겔에서 나온 것처럼.
여러분들이 닭이 이렇게 있는데 닭이 계란을 낳으면 경사지게 해서 떼구르르 굴러서 이렇게 끝부분에 오게 되죠. 그러면 주인이 와서 계란만 건지면 되잖아요. 닭이 계란을 날 때마다 건지는 게 아니고 경사지게 해서 떼구르르 굴러오면 요것만 건지면 된다 이 말이죠. 안식일만 건지면 되는 거예요. 인자는 안식일의 완성으로 오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성경 속의 구조는 뭡니까? 역사가 있어요? 없어요? 역사는 없고 반복돼요. 반복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역사가 있잖아요? 우리는 역사가 있다는 우리 자체가 가짜라니까요. 우리라는 말 하지 말고 뭘 경유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경유한 우리가 돼야 된다니까요. 요번에 문등 레위기 강의할 때 나왔죠? 나와 우리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나가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할 때 우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우리가 되면 1+1 들이 2가 되는 게 아니고 아무리 1, 1, 더해봐야 이게 뭐가 된다? 1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낯선 구조가 되는 겁니다.
노아 방주가 몇 개죠? 하나죠. 노아 방주가 8척이었습니까? ‘신에게는 아직도 8척의 방주가 있습니다.’ 이랬습니까? 노아 방주는 하나죠? 그러면 살려면 어디 가야 돼요? 방주 안에 다 들어가 있어야 되죠.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서 구원받았습니까? 방주 안에서 구원받았죠. 그럼 방주가 몇 개입니까? 하나죠. 우리는 어디서 구원받습니까? 주 안에서 구원받죠. 네가 날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잖아요. 그게 바로 새로운 질서라니까요. 새로운 질서에서 나에 대해서 숫자 1을 치면 돼요? 안 돼요? 치면 안 되죠. 쳐도 예수님을 경유해서 쳐야 되죠. 너는 있네, 아니야, 예수님을 경유하여 주 안에서 나는 하나고, 너 있네. 하나 +1= 2가 되네, 아니야 주 안에 들어가면 너하고 합해서 1이 되는 거예요. 왜, 다 같은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다 같이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은 전도를 몇 명 했습니까? 달랑 1명만 전도하면 돼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전도하면 돼요. 자기 그리스도의 몸만 전도하면 그게 전도의 끝 이예요. 노아 방주에 8명이 구원받은 이유가 8명이 완벽한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나가 어떻게 되겠어요? 한 방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하나의 표적을. 노아가 긴 그림자잖아요. 그림자 따라보니까 한분만 계시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고 오직 한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노아 식구가 아주 적절하게 잘 보여준 거예요.
37절 봅시다. “그런즉” 그 다음에 뭐가 나와요? 뭐는 심고? 한사람은 심었죠? 그러면 한사람은 심었고 다른 사람은 거둘 때에 거두는 사람이 뭘 쳐다봐야 됩니까? ‘내가 거뒀다.’ 하지 말고 누가 심었느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거두는 사람 이예요.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거는 잘못된 말이죠.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이거는 바른 말이라니까요. 그럼 듣는 사람이 ’에이, 그거 말고요. 주님 때문에 구원받은 건 아는데 주님 때문에 집사님은 어떻게 했기에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그런 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이구, 다른 교회는 권사님이 신방을 12번 가서 구원받았다는데 그런 거 없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12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법이 없거든요. 13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법이 없습니다. 용서를 몇 번째 하면 용서가 됩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하면 용서 됩니까? 한번을 해도 용서가 되고 천 번을 해도 용서가 안 되고, 그런 겁니다.
지금 요한복음 4장을 하면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칠 것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너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손댈지...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만났는데 주님이 나하고 만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창조 전에 생각했던 그 사람하고 만났죠. 그래서 내가 나를 경유하거든 나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주님과 경유할 때만 나는 나가 되는 겁니다. 주님 경유할 때만!
그래서 여러분들 인생이 뭔가 망가지고 파괴됐습니까? 주님만 경유하세요. 파괴되지도 않았고 망가지지도 않았습니다. 자꾸 망가졌다. 파괴됐다. 머리가 세어진다. 요새 골치가 아프다. 그거 다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주님의 것이 골치 아픈 거예요. 내 것은 없습니다. 모찌도 주님의 모찌고 그렇고 내 것은 아닙니다. 항상 주님을 경유하세요. 그러면 ‘목사님 말씀은 좋은데 보여야 하죠.’ 보이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식으로 보인다면 그 예수는 가짜에요. 그러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걸 믿습니까? 아니, 보이는 걸 믿죠. 그럼 보이는 걸 믿지 말라면서요? 그냥 보지 말고 주님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나는 여기 보이는데 주님의 것으로 보이죠. 주님의 것으로! 아이쿠, 친절하셔라. 이렇게 친절해도 못 알아들으면...
우리의 몸을 주님의 것으로 만지고 있다니까요. 도대체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알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될지,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해야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 보이겠습니까? 도대체 얼~마나 실망을 해야 할지, 얼마나 자기한테 기대를, ‘나 이제 나한테 기대하면 개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우리는 처절하게 실망을 해야. 만약에 이 몸이 내 몸이라면 철저하게 주님 앞에 도외시당합니다. 내 몸도 아닌데 내 몸이라고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계속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 잘났다. 너. 그래 잘난 네 맘대로 해.’ 절대로 우리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할 때 생각해 보세요. 이게 내 몸을 내 몸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주께서 동조를 안 해주신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진도 나가봅시다.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했죠? 물 좀 달라고 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입장이냐 하면, 여기서 진도 늦게 나가더라도 중요하기 때문에 차근차근 밟아봅시다. 오늘 다 해야 된다는 숙제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의 제공자죠? 그리고 물을 제공 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참, 예수님의 생각 치밀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누가 우위냐 하면 유대인이 위위고 사마리아 여인아 저위죠. 이런 생각을 지금 유대인인 예수님이 갖고 있을 거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이미 생각하고 있죠. 왜, 서로서로 미워하니까. ‘그래 유대인들 잘났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예수님이 도리어 사마리아 여인보고 물을 달라고 했죠. 유대인이 물을 달라고 할 때는 갑자기 유대인은 결핍이 되죠. 물 없음이 되죠. 물이 없어 아쉽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줄 수 있는 시혜자가 되고 유대인들은 수혜자, 받는 쪽이 되죠. 그럼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예수님께 지금 주도권을 넘겨준 거예요. ‘나한테 물 좀 주세요.’ 나한테는 물이 없고 당신한테는 물이 있습니다. 그 물 좀 주세요.‘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청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 자리에서 달라고 한 게 아니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그 미움 받는 자리, 유대인들에게 역사를 주장하는 자리에게 미움 받는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하되 그 자리에다 구멍을 뚫어서 그 자리에 서서도 보이지 않는데 존재하는 어떤 숨어있는 다른 자리, 그 자리에 서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여기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 컵은 말을 못해요. 우리는 물 컵이 입이 없어서 말 못한다고 안 끼워줘요. 그런데 당나귀가 사람 말 하듯이 물 컵이 말 할 줄을 몰랐어요. 그런데 이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어요. 하는 말이 ‘물 컵아 나한테 물을 달라.’ 하니까 물 컵이 생전 말 못하는 줄 알았는데 물 컵이 말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같은 인간들 편이라고 여겼는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인간들 편이 아니라고 밀어낸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잘못된 예수님이고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밀어낸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오는 거죠.
그럼 물 컵이 예수님입니까?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건 아니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과 더불어 있으면서 사마리아 여인도 미처 모르는 숨어있는 그 빈자리에 이미 예수님이 거기서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는 현장이 어디냐 물어보면 우리가, 내가 여기 있다고 우김으로써 내 있음의 방해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나타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내 뜻대로 할 거야. 하고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도외시된 그 현장에서 주님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하는 게 문제가 되죠.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죠. 주님이 있게 하셨죠. 그러면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계신 거예요. 주님이 계셔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일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 요한복음 4장 다 할 것 아니니까 진도 늦추더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데 뭘 경유하는 조건 하에 받습니까? 누굴 경유해요? 예수님 경유하죠. 예수님을 경유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떤 말을 할 때 누가 하는 것같이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거죠. 예수님의 것이니까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늘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은 경유를 통해서 고백하는 가운데 일을 하란 말이죠. 뭐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애를 때릴 때도 주께서 주신 힘으로 애를 때리라 이 말이죠.
주일 낯에 그런 파격적인 말을 했잖아요. 윤 집사님은 술 먹는 가운데서도 기도한다. 술 취한 가운데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게 하실 때 그게 술 취한다는 조건이 그게 방해가 안 되겠죠.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전서가 얼마나 신비로운 이야깁니까? 그리고 이 신비로운 이야기가 요한복음 4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게 신비롭습니까? 신비롭지 않습니까? 전혀 신비롭지 않죠. 예수님이 어떤 여자를 만났다. 이게 무슨 신비로운 게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으로 봐서는 신비롭죠. 왜냐 하면 적대 관계에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께서 ‘야, 너 나한테 한 수 배워.’ 이것도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먼저 요청하죠. 물 좀 달라 하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자리에 서서 숨어있는 예수님이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토록 영생의 물을 주고 있다면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의 존재는 뭡니까? 그게 나타난 자기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까? 자기한테 영생의 물을 늘 주고 있는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증거 하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거예요? 어느 쪽 이예요? 숨어있는 분을 증거 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추수된 자의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슬슬 감이 잡히죠?
우리가 나타났잖아요? 남들이 우리보고 있다고 하고 목사님도 계시죠. 계실 때 그냥 계시면 안 되고 주님과 경유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있는 게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주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통풍 걸렸으면 주께서 통풍을 보여주기 위해서 통풍 걸린 거예요. 모든 일이 주님 없이 이루어진 일이 없습니다. 왜, 모두 다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가 있다? 없다? 역사가 없어요. 역사가 있으면 흘러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역사라는 게 없고 역사 자체가 반복이 돼 버리면 옛날에 있는 것이 지금도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옛날에도 있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주님 안에서는 알파요 오메가 안에 다 갇혀 있는 겁니다. 하나의 바구니 속에 알파와 오메가라는 바구니 속에 다 이미 일어나야 하기에 있는 거예요.
사람이 역사를 생각하게 되면 사람이 우울증 걸립니다. 그리고 너무 슬퍼요. 그냥 도라지 위스키 섹스폰 소리 듣고 싶다고 돌아다니고 낭만을 위해서 부둣가 돌아다닐 수가 있어요. 잃어버린 낭만을 위해서, 이 나이에 사랑을 하겠냐마는. 그렇게 되면 사는 게 아무 목적이 없어요. ‘아이고, 또 사는구나.’ 그러나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까? ‘아유, 또 살려주니 아이구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랬습니까? 사는 것 자체가 상급이고 사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살려줬다는 걸 증거 하라고 오늘도 또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건 딴 게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을 뺏어버리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없애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이 모든 해석이 사마리아 여인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없애버리고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 되게 하시는 그 사마리아 여인을 우리가 아는 사마리아 여인하고 교체시켜버리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남편 다섯 명이었다. 남편 다섯 명이게 하셨지. 누가? 예수님이. 나중에 여섯 번째 사귈 때 만났던 그 예수님이 물 달라고 왔던 그 예수님이 그전부터 이미 작업 걸었죠. 남자 다섯 명 사귀라고. 김철수부터 해서 다섯 명 사귀라고 그렇게 했겠죠. 이 여자는 다섯 명인데 왜 우리는 한 남자, 한 여자만 사귀게 하셨나. 그것은 바로 그때그때 달라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괜히 한 명만 해야 되는데 두 명 세 명 하다가 그거는 혼쭐납니다.
자,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0절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이라는 거죠. 그 앞에 유대인 맞죠?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했죠? 그러면 예수님은 유대인입니까? 유대인 아닙니까? 예수님은 유대인 맞죠. 진짜 유대인이죠.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하는 그 유대인은 결코 아니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맞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이 결코 그 다윗의 자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여자로부터 질문이 나왔잖아요. 이제는 이미 작업이 된 거예요. 여자 쪽에서 질문이 들어왔죠. 그러면 들어왔으니까 그 여자가 질문한 것은 자기 구조입니다. 말을 할 때 뭐가 나온다? 구조 나오죠. 여자가 말을 했죠. 당신은 유대인이라 말했죠. 그러면 여자는 이미 기존의 망해야 될 심판받을 구조 속에 있죠. 이 구조에다 예수님이 답변을 합니다. 답변하면 예수님 쪽에서 뭐가 나온다? 새로운 구조가 나오죠. 이 구조가 나오면서 옛날 구조가 새로운 구조 안에서 옛날 구조는 새로운 구조의 보여주는 증거물로 채택이 되는 겁니다. ‘여인아 너는 이미 값을 받았어. 이미 내가 하는 추수에 이미 너는 참여된 사람이야.’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참여된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걸 느낍니까? 참여됐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이야기와 주님의 답변이 내 쪽에서는 안 맞다는 사실, 이걸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진심으로 나온다는 말은 이미 주님의 구조 안에 이미 갇혀 있는 거예요. ‘내 뜻은 이거지만 주여 절대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신은 유대인입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나는 그 유대인 아니다.“ 뭡니까? 나는 이러 이러한 일을 너와 상종해서 벌릴 분이다. 그러니까 문장이 길어져 버렸죠.
얼마나 긴지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본문에서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뭐라 합니까? ‘그’라 하죠. 그러니까 현재 네가 생각하는 나, 그 속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따로 ‘그’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저씨 유대인이네.’라고 생각한다면 진짜 나는 여기서 네가 생각하는 나는 아니고 그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이다 하면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 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요. 나타나면서 아이쿠, 내가 생각했던 예수였구나. 깨닫는 순간 그 진짜 예수님이 지금까지 같이 나를 나답게 만든 그 예수님이 나타나는 거예요.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진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냐 하면 항상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그 예수님이 아니고 자꾸 비켜나게 만드시면서 그러면서도 그것이 늘 반복되게 조치를 하면서 뭔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애초부터 창세전부터 주의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것으로서 주님의 자기 관리 하에 내가 이렇게 잠식돼 있고 점령당하여 있다는 걸 느낄 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합시다. 다음에 계속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이야기할 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뜻을 어긋나게 이야기할 때 우리의 내부의 비밀을 들추어낼 때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우길 때, 그 모든 것이 빗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사람이 된 것을, 영생 얻은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