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에덴동산 같음(겔36;33-36)140917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19. 18:28

에덴동산 같음 (에스겔 36: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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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9-17 21:28 
에덴동산 같음

2014년 9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36:33-36

(36:3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36:34)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36:35)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36:36)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하나님의 계획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은 인간의 요구나 기대와 상관없이 따로 진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덴동산 같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봐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기준해서 세상을 꾸준히 평가내리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비록 지금은 인간 세상이 에덴동산 같이는 않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계획이 마무리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에덴동산 같은 곳에 꽉 차고 들어가 살 것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장래의 상황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진척이 될까요? 출애굽기 23:14-17에 보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세 번의 절기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번의 절기는 초막절에서 완성이 되고 마감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에 마감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일관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관성있는 계획을 확보해야 합니다. 스가랴 14:17-18에도 마지막 초막절을 가지고 세계 운명의 마감을 표출하게 됩니다.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에스겔 36:38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초막절을 매년 지키면 그것이 곧 에덴동산이 된 상황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황폐와 더불어 번영을 약속하는 내용이 연달아 나온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근원적인 파멸은 이스라엘 및 그 어떤 나라나 인간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파멸이 겪지 않고 진행되는 진정한 완성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참다운 끝은 참다운 파멸을 품고서 반복적으로 작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냅니다.

빌립보서 3:20에 보면 여기에 세상의 끝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러한 끝을 증명해주는 바는 특별한 사건이 실제로 나타났기 때문이요 그 사건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다른 견해들이 출몰하게 됩니다.

곧 그들이 멸망 받은 자들입니다. 오로지 땅에서 유지되는 목숨에 자신의 전부를 건 자들입니다. 십자가 사건만이 이들이 십자가의 원수임을 들추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립보서 3:18-19)

그렇다면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 홀로 하시는 작업으로 인해 '당해 버린' 입장입니다. 즉 "내가 뭘 했다"가 아니라 "나는 오늘도 예수님에게 당했다"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에덴동산이 있고 부터 인간들의 공통적인 꿈도 이런 이상적인 상태의 천국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천국은 곧 '꿈의 종합체'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건립은 인간들 사이의 공통적인 염원을 집결시킨 행동을 보여줍니다. 현재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의 일부를 천국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그들을 다함께 달려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생각해놓으신 천국은 이스라엘의 절기를 통해서 진행됩니다. 방식이 인간들이 시도하는 방식을 정반대입니다.
 
바벨탑의 건립은 특정 장소, 특정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그것으로 에덴동산이 되는 계획이라면, 하나님의 실시하시는 천국 만들기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특정 인물 안으로 들어서는 계획입니다. 이는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특정 인물 속에 타인이 들어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인간들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거부하는 취지가 담긴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절기 지킴’ 안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절기를 기켜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뛰어듬을 통해 인간은 도리어 절기 지킬 수 없음이 밝혀집니다.

인간이 뭔가 행해보지만 인간들이 기대한 에덴동산같은 상황에 찾아들지 않았습니다.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들은 ‘인간이 절기 못지킴’ 자체가 하나님께서 본디 실시하시는 그 계획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아무리 아브라함 자체를 분석해봤자 그 근거가 밝혀질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은 본인을 ‘복의 근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들면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안에 담겨 있는 제사는 이미 아브라함 때도 시작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절기 치를 때마다 대규모적으로 진행되는 제사 속에는, 인간의 행함을 부정하는 요소가 근원이 되어 진행되는 겁니다. 즉 제사 행위 안에는 모든 인간들의 자기 평가와 판단을 철저히 차단시키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인간 평사를 그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표출케 하십니다. 따라서 제사로 인하여 피 쏟으면 죽어나가는 ‘흠없는 제물’의 운명은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깔아놓으신 죄를 겨냥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하나님이 세우신 인물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인물에 의해서 사전에 점령당한 자들이 추후 알게 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즉 인간은 절기를 지키는 자기 행함을 절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절기의 참된 의미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모형과 그림자라는 겁니다. 비로소 우리는 ‘이스라엘도 하나님에게 당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매일같이 예수님에게 당하는 일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일생 속에서 이미 “다 이루신” 그 취지가 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 곧 성도의 일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만사가 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일인 것을 항상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9-19 01:15 
108강-에스겔 36장33절-36절(에덴동산 같음)1409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장33절-36절입니다. 구약성경 120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6:33-3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찌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어떤 절차,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몽땅 입수해서 미리 알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진리 전부를 확보한 셈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뜻의 전부를 우리가 확보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계획이 전체로 나와 있는 그것을 봐야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에 보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의 그 절차가 나와 있습니다. 이 수요예배에서 제가 말씀 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절차에 따라서 진행되고 마감이 되느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설교가 끝날 즈음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눈치 채시고 다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에덴동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어요. 35절입니다. 에덴동산같이 되었다는 말은 지금은 에덴동산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리신 것이고 그 중간에 ‘지금은 에덴동산 같지 않다’고 판정을 내리신 것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했던 그 절차 중에 하나가 에덴동산 같지 않은 이 세상의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에덴동산 같지 않아, 라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에덴동산 같지 않게 만드는 그것조차 하나님의 완성된 계획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그 말이에요.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참 살기 좋았는데 이 땅에 사는 것이 참 힘들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불평과 불만을 하시는데 이게 끝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지금 힘들게 살고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다 온 게 아니에요. 이것은 다 중간과정에 불과한 겁니다. 마무리가 있어요. 그 마무리가 어떻게 되느냐? 그 마무리, 38절에 나옵니다.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는데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방금 봤던 것을 다시 정돈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에덴동산 같지 않고 황무하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말한 대로, 에덴동산 같지 않다는 말은 에덴동산부터 이미 계획이 수립되어 있고 그 에덴동산 같지 않게 된 이 현재사정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절차상 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 그 마감되는 마지막 끝 모습이 제사드릴 때 많은 사람이 제사를 드린다는 거예요. 제사 드리러 나온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무리 계획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궁금하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계획하고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운영하느냐, 가 궁금하다면 제사제도의 절차가 마감되는 그것이 곧 세상의 마감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계획을 이스라엘에 남겼고 이스라엘에 남기면서 지시한 것이 있습니다. 절기를 지키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 지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요. 그냥 절기 지키면 복 받는지 알았지요. 그러나 그 절기가 완성이 될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대로 완성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멸망하는 가운데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절기가 세 개거든요. 처음 절기가 유월절이고 두 번째가 맥추절이고 세 번째 절기가 칠칠절, 또는 초막절, 또는 수장절, 이름이 세 개나 되어서 혼동되는데 같은 이야기입니다. 칠칠절 또는 초막절 또는 수장절, 수장절이라 하는 것은 한자말로 하면 쉬워요. 열매를 추수해서 그 추수된 열매를 저장하는 날, 수확한 것을 저장한다고 해서 수장절(收藏節), 약속의 땅에서 농사를 지은 모든 것이 끝을 봤다는 말입니다. 아주 풍성하게 끝을 본 거예요. 그 절기 세 개를 지킵니다. 지킬 때 반복해서 계속 진행되는 거예요.



그러면 유월절부터 맥추절과 수장절에 이르는 그 경로, 그 경로가 이스라엘 자신만을 위한 경로가 아니고 인류의 운명과 관련된 경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분이 좀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쉽게 가기 위해서 말씀 하나 미리 드리면 빌립보서 3장 19절,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묻고 싶지요. “목사님, 성경의 끝, 마지막이 어떻게 장식됩니까?” 저는 빌립보서 3장 20절을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비록 여러분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주민등록이 땅에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비록 주민등록이 땅에 있더라도 우리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등록시킨 분이 하늘로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그 날이 마지막 끝 날이에요. 세상 끝나는 날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20절에 이 말씀 하면서 그 앞에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우를 앞에 배치를 해 놓았어요. 뭐냐 하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다시 말해서 멸망하는 자의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이 뭐냐 하면, 백 프로 멸망하는 자의 특징이 땅의 일만 생각하고 땅의 영광만 목적으로 삼는 겁니다. 그래서 멸망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고 한마디로 물으신다면 그들은 땅에서 승부보는 거예요.



땅에서 잘 되면 내 인생 잘 살았다고 작심하고 살아가는 사람, 멸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뭐냐? 땅에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 그들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 그들의 시민권은 주께서 따로 빼돌렸어요.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 있으면서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하늘로서 누군가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 그리스도가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 우리의 소속이 땅이 아니고, “너희들 보기에는 땅으로 보이지. 하지만 정작 소속은, 우리의 소속은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기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가 있기에 이 땅에서 실패했느니 성공했느니 하는 것은 땅의 기준가지고 물을 대상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너는 망했어, 너는 거지야, 너는 지옥 가, 이런 것이 아니고 거지 나사로도 천국 갔잖아요. 그러니까 땅에 있는 기준가지고 인생 성공했다, 실패했다, 그렇게 결정짓지 못한다는 거예요. 오히려 땅의 기준 가지고 설치게 되면 그 사람들이 멸망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런데 그 멸망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빌립보서 3장 17절에 나와 있어요.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되어 있어요. 아, 이게 중요하지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설교 처음에 이렇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류 멸망의 절차, 경로를 보여준다.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인류 멸망의 절차, 경로를 알려면 뭘 보고 아는가? 절기가 세 가지 있는데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렇게 진행되는데 그 절기, 모든 절기가 완성이 되고 마감이 되는 증거가 뭐냐? 그게 바로 신약 시대의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림으로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 모든 세상경영, 세상 모든 계획은 십자가로서 마감이 다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의미심장한 이런 말씀을 남겼지요. 세상 어떤 위인도 그런 말씀을 남긴 적이 없을 거예요. “다 이루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요. 끝! 그러나 주님은 그냥 끝이 아니고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제자들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다 이루었다니. 주님께서 그 동안 사람들을 사용하고 이용하신 거예요. 제자들을 이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 살면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하지 마시고 나는 당했다, 나는 무엇을 했다고 하지 마시고 당했다고 이야기하세요.



오랜 만에 외식하면서 한우갈비 뜯거든 “나는 오늘 한우 먹었다.” 하지 마시고 “오늘 한우갈비 먹음을 당했다.”라고. “아, 먹기 싫었는데 일방적으로 한우갈비 먹는 일을 당했어.” 그렇게 해야 돼요. “나는 시집간다.” 그러지 말고 “나는 시집가는 것을 당했어.” 우리는 늘 주님 앞에 당하고 삽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획에 말려들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마음가짐은 딱 이거 하나밖에 없었어요. “너는 늘 말씀에 당하라.”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하려고 했기에 그들은 패배하고 실패한 겁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주체 자가 되어서 하는 그 작업에 우리는 그냥 말씀대로 당하면 되는데 내가 독자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니 이것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봐야 자기 자랑이나 하고, 이것은 영 아닌 거예요. 항상 인간은 독자적인 자기가치, 자기의미를 따로 챙기려고 하는 버릇이 있는데 따로 챙겨버리면 하나님 계획 따로 있고 자기 계획 따로 있어서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힘든가? 본인만이 살기 괴롭지요. 기도를 해도, 뭘 해도, 전부 다 자기 계획 자체를 포기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 이제 우리가 대략적인 것은 알았는데 여기서 에덴동산 같다고 본문에 나왔기 때문에 에덴동산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몇 번째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 같지 않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황폐한 인간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은 에덴동산이 하나의 모델이 되고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왜 에덴동산 같지 않느냐는 말이야.” 이렇게 따진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모델이 되고 나중에 너희들이 마지막 모든 절기가 완성되고 끝나면 그 때는 에덴동산같이 된다는 거예요.



뭔가 에덴동산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께서 말을 이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에덴동산이 뭔가? 에덴동산이 생긴 이유가 뭔지를 더불어 알아야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실행 내용에 대해서 확고해지는 셈이 되는 거지요. 에덴동산에서 천국까지 이어지는 경로가 예상외로 어렵습니다. 그냥 설명하면 이해하기 힘들기에 이 세상에 있는 쉬운 예를 들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옛날 중세 때에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중요시 하다 보니 이렇게 생각했어요.



빛이 있는데 물체를 볼 때 빛이 인간 눈에 들어와서 인간 눈에서 나온 빛이 저 물체에 비춰서 저것이 그릇, 신발, 사람, 코끼리, 이런 식으로 분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갈릴레이 갈릴레오 이후에, 또는 뉴턴에 와서는 그 사고를 바꿨어요. 빛이 인간 눈에 들어와서 그 빛이 인간 눈에서 나와서 물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빛이 물체를 비춰서 그것이 인간 눈에 다시 비춰서 인간이 물체를 파악한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들으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너무나 상식적으로 맞는 이야기죠.



빛이 어떤 물체에 닿아서 그 반사된 빛이 눈에 들어와서 이것이 피아노다, 이것은 마이크다, 저분이 누구다, 라고 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했어요. 그렇게 생각을 해버리면 인간이 물체보다 존엄성이 떨어진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과 관련지어서 왜 언급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한테 비춰서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식으로 우리가 뭔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빛이 물체에 먼저 들어가서 물체에 비친 그 빛이 눈에 들어올 때 우리는 그 물체가 거기에 있음을 파악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그런 방식이 우리와 의논하지도 않고 먼저 우리 앞에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주제넘게 죄 지은 상태에서, 빛도 없으면서 우리는 함부로 이렇다고 저렇다고 해석을 해버리거든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주신 그 법에서 나오는 빛 하고 그 법을 이해하는 우리 빛 하고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이것이 같지를 않고 틀리게 되어 있어요.



왜 중세 사람들이 사물을 볼 때 빛이 인간 눈에 들어와서 그 빛이 다시 사물로 가서 비로소 사물을 판단한다는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런 소리를 해야 자기 자존심과 자긍심이 유지가 되잖아요. 하나님이 힘 주셔서 내가 판단했다, 그렇게 되잖아요. 지금도 소위 개혁주의 신학에 보면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성도에서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뭘 판단한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자랑하는 것밖에는 안되지요. 그것이 타고난 악마성이고 죄성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신학에서는 그걸 악마성, 죄성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라고 함으로서 모든 인간을 자꾸 기독교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해요.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고 천국을 만드는 경로가 인간들이 파악할 수 있는 노선 따로 있고 인간에게 들키지 않고 포착되지 않는 다른 경로, 다른 방식으로 따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같게 만드신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할거야.’ 하는 인간들의 야망과 욕심에 준한 오해가 따로 있고 그것에 가려졌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이 따로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방법은 뭐고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인간의 방법은 인간들의 공통점을 꺼내서 협동하고 합력해서 하나님나라에 돌진하고 진격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애쓰고 힘쓰고 달음질하고, 그러면 뚫린다는 그 방식을 사람들은 선호하고 좋아해요.



그러면 그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인간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뭐냐? 특정지점에서 신을 향하여 사다리, 탑을 쌓는 겁니다. 그것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바벨탑이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바벨탑의 특징, 본색을 처음부터 못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짓게 해요. 짓게 함으로서 인간이 평소에 갖고 있던 마음가짐이 흩어졌다고 해서 각각 다른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220여개나라로 흩어진다 할지라도 그들을 하나로 모으게 만드는 마음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자.” 하는 그 마음.



융이라는 정신의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원형적 무의식이라고 어려운 말로 했는데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태도 생각들은 천국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영원한 유토피아, 완벽한 세계를 항상 생각하면서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너만도 아니고 나만도 아니고 다 같이 하니까 천국은 꿈의 종합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꿈의 종합체, 해태종합선물이비다. 모든 꿈꿀 수 있는 좋은 것은 다 집어넣는 거예요. 진선미, 온갖 아름다움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집결되어 있다고 보는 그런 마음이 모든 인간을 집결하게 만들고 그 집결한 마음가지고 신을 향하여 돌진하고 진격하게 되어 있는 식으로 인간들은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노선이 이런 노선이라는 말은 제가 앞으로 언급해야 될 하나님의 노선은 인간의 노선과 다르다고 한 거지요. 다르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노선은 인간들의 요구를 비켜가면서 따로 주어지는 거예요. 따로 주어지는 노선이 뭐냐?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아서 바벨탑 중심으로, 쉽게 해서 어떤 한 특정지점의 공간에서 살게 되고 거기서 마음이 하나 되면 에덴동산처럼 된다고 본 겁니다. 에덴동산이 어떤 공간이 있으니까 에덴동산이 되기 위해서 인간들이 하나의 특정지점을 찾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여준 것은 특정 공간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노선이 어렵다는 말을 한 거예요. “에덴동산이 어디 있지? 그곳에 가면 되지.” 굉장히 쉬워요. 어떤 지점에 가기만 하면, 기어가든 차를 타고 가든 걸어가든 그 지점에 모이면 에덴동산, 그런 이상적인 나라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지점이 천국이 아니고 어떤 분이 지점이 된다면 굉장히 난처해 져버려요.



어떤 분이 계신 그곳이 천국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들은 대책이 없고 절망적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걷는 것, 바라보는 것, 찾아내는 것, 그런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남은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이야기할 것은 어떻게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이 예수라는 인물로 전환되느냐, 그 어려운 설명을 해야 될 마지막 일이 남겨져 있지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뉴턴이라는 사람이 인류최초로 빛을 분석했는데 그 분석한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빛이 왔을 때 프리즘을 놓습니다. 이것은 뉴턴이 아니어도 일반사람들이 많이 경험한 거예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니까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쫙 갈라졌어요. 뉴턴이라는 사람의 위대한 점이 있어요. “아, 빛이라는 것은 무지개색깔이구나.” 이걸로 끝났으면 그는 위대하지 않아요.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빛이 일곱 개의 색깔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중의 빨간색, 빨간색은 또 무슨 색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해서 빨간색만 따로 뽑아서 거기에 프리즘을 놓고 분광을 해봤어요.



해보니 빨간색에서 빨간색이 나온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빛이 분광되었을 때는 일곱 색깔이지만 빨간색만 따로 하니까 빨간색이 나오고 노란색만 따로 하니까 노란색이 나오고, 그러니까 빛은 일곱 색깔이 맞다, 라고 확정이 되어버렸지요.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일곱 색깔을 조정해서 다시 일곱 색깔을 모아보니까 색깔은 사라지고 그냥 빛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하나에서 일곱 개가 갈라지고 일곱 개는 하나로 통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에덴동산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마감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에덴동산부터 인간과 이스라엘 모든 존재가 실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한 거예요. 그 중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는가? 아담이 포함되어 있고 아담이 포함되어 있으면 우리도 포함되어 있지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죽는 존재가 됨으로 말미암아 결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 것을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발견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주인공도 내가 아니고 나의 주인공도 내가 아니고 자연의 주인공도 내가 아니고.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인간들이 단결해서 어딜 가? 진짜 에덴동산을 찾아간다고요? 그 하늘나라를 간다는 말입니까?



그런 시도 자체도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물론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그런 짓을 부추겼지만. 다시 빌립보서 3장 20절을 언급하겠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은, 그리고 거기서 주님이 영광중에 나타나신다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일곱 개의 빛깔인 빨간색, 파란색으로 그냥 남아 있다가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 빛깔도 다 사라지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러한 입장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멸망하는 사람 특징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 없이 그냥 땅의 것, 땅의 것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거든요. 이 허망한 것들에다가 완전히 목숨 걸고 살아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의 용도라는 것이 없어요. 목숨 자체가 목적이기에 목적은 용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여, 주신 목숨 어디에 써먹을까요?” 우리는 목숨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에 왜 이 목숨이 있고 생명이 유지되는지 그 목적을 따로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말려들었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에 당한 겁니다.



태어남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늙음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당함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바벨탑을 헤칠 때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해서 헤쳐 버리지요. 그리고 난 뒤에 그 바벨탑의 후손가운데서 제사 드려야 될 아브라함을 뽑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우상 만드는 직업인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뽑아서 “너에게 복을 주는 자에게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 해서 아브라함이 그 소리를 들을 때 헐! 자기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빨간색 노란색에 불과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 주님에 의해 자기 인생이 당하고 있는 인생이에요.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복의 근원될 어떤 건더기도 자기에게는 없음을 아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있어요.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누구를 믿어야 되는데, 그 약속된 분을 믿어야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은 껍데기에요, 김 껍데기, 최 껍데기…….



우리의 시민권은, 다른 말로 우리의 알맹이는 하늘에 있다. 그럼 땅에 있는 것은 쭉정이밖에 없지요. 똥 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약속을 담는데 그 약속이 뭐냐, 그게 바로 절기인데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가운데서 아주 근사하게 제사를 드립니다. 그 제사에서 죽음을 보여주고 그 죽어 넘어가는 어린양들이 하나의 그림자 모형이 되고 그것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짊어지는 어린양으로 오시는 겁니다.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나는 어떻게 삽니까?”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목숨 자체, 우리 삶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인생, 그런 식으로 피조물 된 것이 아니에요. 진짜 목적되는 목숨은 우리 목숨이 아니고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목적인데 예수님의 생명은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목숨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겪어야 될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일생에 다 담겨 있어요.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에게 응축되어 있는 그 우리의 생애를 부채 살처럼 도로 펼치면 현재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인생이 “너는 이렇게, 또 이렇게 살아야 영생 얻는 거야. 이렇게 살아야 구원에 골인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나는 다 이루었다.”가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굽이굽이 가운데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이 항상 거기에 들어 있어요. 들어있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발견하는 것을 저는 “당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영덕 울진 올라갈 때에 강구 해변 지나면 고불고불 길 나오잖아요. 거기에 풍력발전소도 있고. 게먹고 놀러가잖아요. 굽이굽이 가면서 돌때마다 그 길을 가도록 당한 거예요. 놀러가도 좋아요. 온천에 가도 좋은데 온천탕에 앉아서 “어, 당했다.” 이러고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이라니까. 오늘도 뜨신 물에 당했다.



우리는 아담이 마귀에 이미 당했고 그리고 이 땅의 저주에 이미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저주에 당했다, 마귀에 내가 당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당하게 하신 분을 믿어야지요. 나로 하여금 그런 것을 겪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신 겁니다. 그분이 지금 하늘에 있어서 시민권이 있는 우리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 마지막 오게 되면 이것이 바로 수장절, 마지막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8절에,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이스라엘 나라라는 그 평지, 그 역사라는 평지가 마지막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었다는 그 신약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평평한 평지로 깔아놓고 그것으로 표현해 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절기를 지켜왔지? 그 마지막 절기에 다시 너희들이 도로 예루살렘을 찾는다면 그것이 세상 끝!”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돌돌 말아버리면 다 이루신 그 분이 이루심을 가지고 하늘에 있으니까 신약에서는 하늘나라 가게 되면 끝!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구약은 하늘나라 그 수직적인 것을 수평적으로 펼쳐놓고 그 당시 그들이 했던 절기와 법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지막을 설명해 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할 이야기, 사람이 끝이 좋으면 결국은 다 좋은 거예요. 말을 바꿔서 하면 끝이 나쁘면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것이 다 나빴던 것입니다. 그래서 끝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내가 수고하고 힘든 인생은 없고 오늘도 주께서 우리를 당하게 조치를 하신 그 조치에 대해서 우리는 그 원인자 되시는 주님께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주님에 의해서 펼쳐진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을 확보하기를 원합니다. 구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펼쳐지는 그 절기의 절차가 이제는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우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펼쳐주시니 그 펼침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낱낱이 다 발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