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죄를 기억함(겔36;29-32)140910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14. 10:03

2014-09-10 20:47:51 조회 : 67         
   죄를 기억함 140910 이름 : 이근호   

죄를 기억함(에스겔 36: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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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9-10 21:20 
죄를 기억함

2014년 9월 10일                          본문 말씀: 에스겔 36:29-32
                     
(36: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6: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6: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6: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와 싸운 것은 명분이야 어떻든 간에 결국 생존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언제 어디서는 생존문제가 최우선시되는 사항입니다. 거룩해보이는 일조차도 결국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해서 보상되기를 은근히 원하게 마련입니다. 이점에서 이스라엘이나 주변에 포진된 이방나라나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특별남'은 이스라엘이 정해서 하나님께 내밀 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생존과 싸우는 민족이 아니라 죄와 싸워 이기는 민족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에 호응할 능력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런 전쟁에 관심을 가질 안목이 갖추어지지 않는 입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방치하시거나 포기하시지를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밥먹고 사는 것 밖에 모르는 인간을 가지고 기어이 죄를 이긴 민족으로 탈바꿈 시켜내고야 마는 것이 하나님만이 해내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즉 죄에 대한 이김을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홀로 다 처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심정을 적절하게 이용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생존이 우선이기에 죄는 뒷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하십니다. 생존에만 눈독이 올라와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동안 생존에 힘든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 놓았습니다. 백성들은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 투입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간이 평소에 품은 모든 종류의 죄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특히 종교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종교가 온 이스라엘에 확산되게 하십니다. 곧 이방종교이요 그것은 내심 이스라엘은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생존에 유리하다는 명분으로 주변 나라와 거침없이 정치적 조약도 빈번했습니다. 거칠게 없습니다. 재물 앞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약속의 땅은 이상스럽게 농사에 잘 되지 않고 재난이 주어집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단체로 회개를 한다하지만 그것마저 자기 생존차원에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종교적 시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그저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살려주세요”라고만 부르짖을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생존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뜻 위주로 살 위인은 없습니다. 여기서 사명감조차 퇴색됩니다. 사명감에는, 자신이 억지로 지어낸 사명감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사명감도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사명감은 결국은 좌절로 마감됩니다.

빌립보서 4:11-13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에 의해 조절이 가능한 사명감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명이 자신을 소지하고 있기에 감당하느냐 마느냐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곧 주님의 사명적 현실이 됩니다. 끝까지 주님의 사명이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적인 사명에 휘돌리게 되면, 보편적인 주님의 사명을 공격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사명이 받쳐준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본인의 존재 가치가 우선되는 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를 못합니다. 모든 인간과 인류가 모두다 하나님 스스로의 사명적 일 속에서 일부를 할당받고 있습니다. 나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명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가야했던 것입니다. 즉 “10년 정도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면 그 후로는 자기가 원하는 바로 인생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가 허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10년이 아니라 수 십년동안 사명을 받아 일해도 그 다음날 역시 자기가 원하는 길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생존 문제도 넘어설 수 없고, 사명 감당에도 온전히 못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나 영생 얻기에는 하나님의 다른 준비된 조치가 가동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과 유사한 뜻을 갖고 있는 에스겔 16:63입니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구원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먼저 용서해주시고 그 후에 용서받은 자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늘 반복적으로 체험케 하는 방식을 사룡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자체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주십니다.

그 용서가 반복되는 현장에서는 오로지 용서받은 자가 내쏟는 죄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남들 보기에는 죄 같지도 않고 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것까지 죄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죄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연적으로 살아온 ‘생존 본능’입니다. 곧 ‘살기만 하면 그만이다’는 정신 하에서 움직이고 노력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한 여인의 행동은 따가운 소위 잘난 자들이 차가운 눈총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행동을 다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남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미움보다 훨씬 더, 그리고 제대로 자기를 자신이 미워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용서하심의 능력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37-42)

용서받은 자의 행위가 벌어지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과 더불어 욕 얻어 먹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죄인인 것을 유일한 분, 예수님 앞에서만 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작업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이미 이 땅에서 죽은 자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9-13 09:31 
107강-에스겔 36장29절-32절(죄를 기억함)1409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장29절-32절입니다. 구약성경 120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6:29-32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 나라와 싸움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 나라들과 싸운다 할 때 나라대 나라의 싸움으로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예를 듭시다.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와 싸울 때에 만약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너무나 풍족하다면 주변 나라와 싸우겠느냐 하는 겁니다. 너무나 풍족하다면. 아주 풍족하다면, 아쉬울 것이 없다면 결코 주변 나라와 전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와 싸운 것이 아니고 자기 생존과 싸운 것이다. 자기의 생존과 싸운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죄를 지적하면서 “너희들이 생존과 싸웠다는 그 자체가 죄와 싸워야 할 자신의 본문을 잃어버렸다.”고 질책하시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죄와 싸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존의 싸움, 자기가 밥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되어서 최종적인 것은 밥입니다. 밥만 있으면 사니까. 모든 인간의 최종적인 것은 밥입니다. 밥 없으면 죽을 맛이에요. 밥만 있으면 느긋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룰 때, 제가 다룬다는 표현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룰 때에, 이스라엘이 물론 아담의 자손이니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그대로 다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본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인 자기 백성을 다룰 때에 그들이 항상 추구하는 것이 밥, 자기 생존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생존문제밖에 모르는 그들을 데리시고 하나님께서 죄의 실체, 죄가 실체로 작용하고 있다는,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죄와의 싸움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그들이 눈만 뜨면 추구하는 그 생존이 굉장히 곤란하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36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곡식을 풍성케 하고 밭의 실과를 풍성케 해서 기근이 찾아오지 않도록 조치하겠다. 언제? 너희들이 죄를 아는 그 시기에는. 그런 뜻이거든요. “너희들이 너희 죄를 기억하는 시기가 온다면 그 때 너희는 곡식도 과실도 풍성해서 생존문제에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상태가 된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한 거예요. 맞지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관심사가 너희들이 관심 두는 생존문제가 아니고 죄에 대해서 그들의 눈이 열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들이 힘들게 살았고 곡식이 풍성하지 못하고 과수가 말라붙었던 것은 농사법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들이 게으름뱅이라서가 아니라 정작 그들의 존재목적, 그들이 사는 이유와 목적을 놓쳐버렸기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사명감상실이지요. 자기가 만든 사명감 아닙니다. 선교단체에 속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늘 느끼는 것은 그거예요. 주님이 주신 사명인가, 아니면 자기 존재의의를 억지로 잡기 위해서 본인이 빡세게 기도해서 본인이 만들어 낸 나의 사명감인가 하는 것을 주시하고 구분하고 유념하면서 듣습니다. “나는 이런 사명을 받았습니다.”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것은 주님이 준 사명이 아니고 본인이 억지로 받지도 않은 사명을 설정해서 조작된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라는 식으로 한다면 주님이 주신 사명이에요.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면, 이것이 나의 사명이 되어버리면 거기서 자기 부인이 안 되어버립니다. 나의 사명.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사명”이라고 한다면 나의 사명이 따로 없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사명의 일부를 성도가 할당받고 배분받은 것에 불과한 거지요. 만약 내 사명을 고집하면 그것이 절대화되고 결국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고 우상화됩니다.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키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쓰면 쓸수록 그 애쓰는 모습까지도 자기 자신이 대견해 보이고 장해 보입니다.



이 딜렘마, 함정에서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사명감을 유지해야지, 하는 순간 그 사람은 나만의 받은 사명 때문에 남들이 받은 사명에 비해 우위의 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사명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 사명이 네 사명보다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나의 사명이 따로 없어요. 오직 주님의 사명밖에 없어요. 주님이 주신 주님의 사명밖에 없어요. 주님이 주셨다고 해서 그 사명이 나의 사명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사명으로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주님의 사명이 인간에게 들어오게 되면 나, 라는 말보다 우리, 라는 말이 적절합니다. 디모데전서나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의 말이 나옵니다. “내가 받은 사명” 사도바울이 내가 받은 사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도바울의 편지들,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나 디모데전후서등 그 편지 뒤쪽에 보게 되면 주님께 같은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나열해 놓았어요. 우리 안에서 나를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내가 사라지게 될 때 남아 있는 것은 주께서 일하심이 남아 있어요.



사명 받은 내가 살아나야 이 사명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으면 이 사명도 같이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명이 부각되기 위해서 주님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오히려 나를 죽이는 쪽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내 사명이라고 우길 가능성이 많기에 이것이 나만의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사명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내 사명 감당하기 위해 내 계획을 따로 세우는 것을 주님께서는 부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빌립보서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에게는 어떤 계획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계획도 수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있기에 주님 살아 있는 앞에서 내가 까불 수가 없어요. “주님, 저 살아 있으니 사명 주옵소서.” 라고 깝죽댈 수 없어요. 그런 소리 하기 전부터도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일을 하고 계시기에.



그래서 나오는 말씀이 뭐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가난해야 할 때 가난에 처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했습니다.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한 십년동안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네가 원하는 길로 가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금 제가 나름대로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십년동안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해서 11년째는 내 뜻대로 고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0년 동안 아마존 선교하고 그 다음에 나이지리아 선교했다고 해서 한국에서 개판 칠 수는 없는 거예요. 고생 그만큼 했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면 응답해 주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끝까지 없습니다.



힘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죽기 살기로 그 힘든 사명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다른 보상을 기대해서 인간의 집념, 오기로 버티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정작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지간한 고생은 충분하게 감당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주께서 나중에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과 흥정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이 본문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생존 문제가 마지막입니다. 밥만 있으면 돼요. 아무 필요 없어요. 오직 밥을 얻기 위해서, 양식 얻기 위해서 그냥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따라서 양식 외에는 무엇도 최종관심사가 아니고 그 양식을 먹는 당사자가 누군가, 본인입니다. 본인이 양식 먹고 본인이 살면 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할 때는 밥 먹고 살라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생존문제가 최종적 목표라는 그것을 정당화시켜주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목사를 해서 밥 먹고 살았나, 교인이 몇 명이나 되었기에 그걸로 밥을 먹고 살았는가, 그것이 목사의 최종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최종목적을 포기하거나 잊지를 않습니다. 매일 같이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내 목적은 생존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사명이야.” 입에 발린 그런 소리를 해 봐야 역시 돌아서면 생존문제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명 감당할 테니……, 그 다음에는 밥이나 먹고 살게 해 달라는 이게 뒤에 은근히 긴 꼬리처럼 붙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안 됩니다. 인간이 안 되기에 주께서는 일할 재미가 나고 보람이 있는 거예요. “결국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생존문제와 싸웠지 너희의 죄 문제와 싸운 적이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주변 나라와 싸운 것은 생존문제로 싸웠지 죄와 싸우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언약이 없고 우리는 언약이 있으니까 우리가 저들을 부수자.” 이런 관점으로 싸운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잘 살고 우리는 못사니 공격해서 잘사는 것을 더 건져서 우리 생명을 부지하세.” 그런 쪽이에요. 오늘 본문 설교하면서 일단락 짓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혀 하나님의 일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일단락 지읍시다. 그런데 말이죠. 에스겔 36장 이 본문이 예언이거든요. 예언에 의하면 이런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31절에,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모습이 나올까요?



이 세상 어느 인간치고 자기 자신을 밉게 보는 그런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살아온 한 평생이 뒤돌아보니 너무나 미운 생활만 했다고 자처하는 사람, 정말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것이 스스로 밉다고 하는 경우 같으면 명량이라는 그 영화가 안 만들어졌어요. 이 순신 장군이나 유관순 여사 같은 이 모든 사람들은 남들 보기에 살아온 것이 너무나 장하고 근사하고 거룩하기에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신에 열 두 척의 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남은 함부로 못하는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 자기를, “괜히 싸웠어.” 하고 밉게 보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게 되면 나중에 어떤 때가 오는데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이 스스로 너희 자신에 대해서 부정하고 너희 자신이 그렇게 미워질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동안 무슨 짓을 했기에 그토록 미워집니까? 살아오면서 무슨 짓을 했기에? 생존에 매진하고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게 통합해서 마지막 뒤돌아보면 그게 미운 짓이 되느냐 그 말이지요. 무슨 기준을 적용시키기에 그게 밉상이 될 수밖에 없느냐 그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해답은 없습니다.



해답은 없지만 세상적으로 자주 듣는 여러 힌트 중에 하나가 있다면 이렇습니다. 남들 앞에서 과도하고 급작스러운 겸손이 나타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밉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방송에서 이선희라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를 너무 잘 불렀어요. 그러니까 그 관중들이 이선희! 이 선희! 연호하면서 이선희 가수 30주년을 기념하면서 축하를 하니까 그 자리에서 그 가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그 다음 말이 뭐냐 하면, “이렇게 내가 팬들에게 사랑을 받을 줄 알았다면 내가 노래할 때 성의를 가지고 부를 것을,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이 밉습니다.” 하는 말을 했어요.



내가 뒤 돌아보니 나 자신이 미워집니다, 라는 말을 했어요. 히든 싱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요. 자기 자신이 미워진다는 거예요. 왜? 예상 밖에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로서 자기를 미워하면서 눈물로서 예수님 발을 씻길 때 주위 사람들이 여자를 보고 “저 소문 나쁜 여자, 행실 나쁜 여자, 남자를 밝히는 여자, 창녀”라고 얼마나 욕을 해댔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전혀 그 여자에게 심적 상처가 되지를 않아요. 왜, 남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보다 자기가 주님 십자가 앞에 설 때 주님 피 앞에 자기를 온통 다 벌거벗은 채로 내 보일 때 남이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내가 나 자신의 평소 정신 상태와 사고방식이 미워도 너무 미워요. 너무 밉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간단한 말로 회개라고 합니다
. 자기 자신이 미워지는 것. 예수님도 이렇게 했어요.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보고 울라고 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지. 회개를 하게 되면 올바른 사람 되는 것이 아니에요. 회개를 한 만큼 교만이 플러스가 돼요. 회개를 한 만큼 교만의 정당성이 보장이 되는 거예요. 왜, 난 십자가 앞에서 회개를 했으니까. 그 병은 사후에 누가 고칩니까? 그 병은 고칠 재간이 없지요. 그래서 인간이 반복적인 회개를 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도 아니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영생 얻는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로 다시 한 번 인간은 절망에 빠지지요. 첫 번째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자기 생존밖에 생각지 않는다고 했고 설교 중간에 두 번째로 정리하는 것은 뭐냐, 인간은 회개해도 돌아서면 그 회개한 자체가 자랑스러워서 절대로 자기 근원적 자기 미움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절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존을 포기해도 안 돼. 회개해도 구원 못 받아. 어떻게 할까요? 해답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에스겔 16장 63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을 설명해 보면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라고 한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매진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특별조치에 의해서 용서가 된 상태에서 이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주님이 우리 자신에게 행했던 것을 반복해서 되새기는 기간이 남은여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걸 반복해서 행하면 구원받느냐, 가 아니고 처음의 용서가 그 용서해준 인간을 통해서 용서가 반복해서 계속 발산되도록 조치가 일어나요. 다라서 용서를 본인이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펄쩍펄쩍 뛸 때마다 회개가 같이 나오는 겁니다. 이미 용서하심을 다시 한 번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그 순간마다 계속해서 죄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 죄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나올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백하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용서가 먼저 있어야 되거든요. 용서가 먼저 있으려면 그 용서를 내가 장악해서 내 소유화시키려는 그 주체가 없어져야 되기에 주께서 그 용서를 살아 있는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오게 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논리가 어렵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의 행동과 고백은 사후의 고백, 여기서 ‘사(死)’는 죽을 死, 그래서 죽고 난 뒤에야 오는 고백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래서 죽어 마땅하지요. 그렇지요?”라고 내 뱉는 고백,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행세는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유지해 왔던 죄 행세 맞지요?”라고 십자가 앞에 털어놓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낮에 어떤 침례교 목사가 전화를 해 와서 한 40분 동안 통화를 했어요. 십자가 마을의 글을 보고 나서 따지는 거예요. “목사님의 글을 보고 동의하는 점도 있지만 동의 안하는 점도 있습니다.” “뭐가 동의가 안 됩니까?” “천주교를 보고 공격을 해야지 우리 한국의 개혁주의를 왜 공격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공격 대상이 나를 빼놓고 남을 공격하는 것은 자기우상입니다. 내가 소속된 단체를 옹호하고 내가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은 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생각해야 할 것은 공격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 분이 이야기하기를 “개혁주의가 뭐가 나쁘냐?” 했어요. “개혁주의가 세상 죄를 정죄하는 공격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입니다.”라고 하니 그 사람이 고집을 안 꺾어요. “그 십자가로 세상을 공격하는 것은 우리 개혁주의가 동의합니다.”라고 했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수천 차례 들었던 이야기거든요. “우리 개혁주의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아니까 개혁주의가 정통이니 그 개혁주의를 가지고 천주교를 비롯한 남들을 공격해야 옳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개혁주의 자체를 공격하지 말라는 거지요. 왜?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줄 아는 유일한 단체가 개신교 개혁주의니까 개신교와 개혁주의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자기를 미워하는 겁니까, 자기를 지금 옹호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용서를 받게 되면 남이 미운 정도가 아니고 누가 밉다고요? 내가 미워요. 꼭 노래 가사 같아요. 지나간 세월이 너무 미워요, 하는 노래 있지요. 주님의 용서가 예수님의 희생과 피로써 나왔다는 것을 깜빡 깜빡 잊고 그걸 잊으니까 “신이시여,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곱게 예수님의 피를 들이대니까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왜 살지? 밥인가? 돈인가? 나만 살면 그만인가? 그걸 위해서 오늘도 매진하고 있구나. 주여!’ 이것이 내가 깨달아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먼저 되었기에 이런 깨달음을 주시는 겁니다. 용서를 듬뿍 받았기에. 그 용서는 내가 쥘 수 있는 용서가 아니에요. 내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를 이미 받았기에 우리는 마음 놓고 회개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을 이렇게 맺어봅시다. 인간은 누구를 닮아야 되는가? 인간은 예수님을 닮아야 돼요.



예수님을 닮아야 되는데 인간이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그 인간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것은 자기의 잘남과 근사함을 유지 보존하는 차원에서 닮는 거예요.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우리가 거룩하다.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 거룩의 개념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거룩한 자가 없어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그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거룩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 하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이 땅에서 어떤 수모도 다 달게 받았습니다. 어떤 수모도.



지난 주일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복음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요. 이 세상 지나면 다른 세상 있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런 내세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얼굴, 추상적이 아니고 구체적인 얼굴, 수치를 듬뿍 품은 그 얼굴론 나타나신 거예요. 그냥 내세라는 것은 이집트의 미술에 나와 있어요. 이집트의 미술은 모든 것을 정 방향으로 보게 되어 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지독한 이 육신의 보존, 내세까지 이 육신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그 사상에 의해서 이집트의 미술은 기원전 4천년 경부터 이어져 왔고 그것이 그리스 로마까지 넘어간 겁니다.



이집트 조각을 보면 전부 다 앞을 보고 있어요. 옆에 서도 앞을 보게 되어 있어요. 지독한 내세 중심이에요. 이집트 종교만큼 내세중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타고난 내세 바라봄, 내세를 바라봄으로써 어떤 희망을 갖는 종교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누가 오셨는가? 이 땅에 그 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기에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가? 오직 성령이 아니고서는 왜 못 알아보는가? 왜 인간이 육으로는 못 알아보는가? 오직 성령 받은 자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신 겁니다. 그게 택한 백성이고 그게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정리합시다. 이스라엘은 뭐냐? 진짜 백성은 뭐냐? 이미 용서를 받아 놓고 그 용서를 받았기에 이 땅에서 어떤 수모나 비난보다도 오히려 자기에게 더 심하게 비난을 가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 정말 예상 밖의 겸손입니다. “제 노래 인생 30년을 이렇게 축하해주시니 제가 노래할 때 좀 성의 있게 부를 것을. 내가 노래할 때 힘듭니다. 힘들지만 이왕 힘들 것 이런 환호를 해주는 팬들을 기억한다면 좀 더 성의 있게 부를 것을.” 하고 갑자기 겸손을 보이니까 팬들도 울고 이선희도 울고, 그렇게 한 거예요. 우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고생과 희생하심을 우리에게 보인다면 단순히 주님 닮아서 우리도 고생하자, 가 아니라……, “고생 하자”가 아닙니다. 고생 하든 안하든 이미 우리는 용서를 받은 입장이에요. 제가 중국의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도 목사님들이 제 강의 내용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서 우리가 다 아는 예를 들었어요. 다음 중 어떤 것이 고생이고 어떤 것이 고난입니까, 라고 물었어요. 강의 들으신 분은 다 알겠지요. 예수 때문에 힘들었다. 그것은 고생입니다. 뭐가 고난인가? 많이 가지고 부요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해야 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고생은 할 수 있어요. 빡세게 악착같이 아끼고 돈 모아서 이 고생을 벗어나자는 식은 인간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고난이에요. 인간은 넉넉하면 돈을 의지하게 되어 있고 주님을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자 된 이것도 나에게 자랑거리가 아니고 나에게 다 밉상입니다. 이것은 나의 유혹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정말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이왕 성령 받은 것, 좀 넉넉하게 누리면서 이것도 복이 아니야, 이런 말 좀 하고 싶어요. 못사는 가운데 하는 것보다는 너무 잘 살아서 처치 곤란한 가운데서 “주여, 이 재산을 나는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 재산이 천조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이 정도, 이 정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사도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는 말씀처럼 네게 준 용서와 은혜는 네가 만든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계속 우리를 지금 사명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생존 위주고 돈 밖에 모르고 밥만 챙기면 만족하는 존재임을 보여서 그런 죄인을 위해서 주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큰 사랑으로 증거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계획에 차질이 없음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저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기 구원에 눈독 들여서 자기 자신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이기주의적인 구원관에서 벗어나서 이미 용서받았기에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주의 앞에 고마움과 감사와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