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새 마음,새 영(겔36;24-28)14090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5. 20:20

2014-09-03 20:55:06 조회 : 49         
   새 마음, 새 영 140903 이름 : 이근호   

새 마음, 새 영(에스겔 3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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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9-03 21:40 

새 영, 새 마음

2014년 9월 3일                           본문 말씀: 에스겔 36: 24-28


(36: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36: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서입니다. 정결케 하시고 새 영을 주셔서 새 마음으로 율례를 지키며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 거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계획이 하나님쪽에서 뭔가 주시는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 영'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 이 제공하심으로 인하여 인간들이 나름대로 자신을 살리겠다는 모든 시도는 다 허사가 되어버립니다.

즉 새 영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온갖 고귀하고 정결하고 경건스럽고 고상한 삶을 살아본들 그것은 하나님 백성하고 상관없는 짓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쪽에서 뭔가 주신다는 사실은 곧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것을 일체 거부하시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는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영을 주시겠다는 이 소식은 이미 이스라엘이 망해버린 상태에서 주신 통보입니다. 곧 인간들이 철저하게 망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이상스럽거나 예상밖의 일이 아니라 도리어 당연한 결과라는 겁니다. 망하지 않아야 될 그런 존재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새 영을 받지 않고서도 구원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그 시점에서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된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주심으로 이해 전개되는 구원코스는 실은 창세기 2장을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인간이란 아예 없었습니다. 온통 흙 뿐이었습니다. 흙이 나서서 자신들을 인간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를 않았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비로소 나오게 된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이 사실을 믿고 아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떼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없었던 존재를 흙에서 사람으로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 자기 주장을 펼칠 권한이 아예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을 적용시키고 그렇게 나오는 실정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어나가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참으로 새 영을 받은 자라면 자신의 구원받음에 대해서 자신은 조금한 것이라도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되고 고마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인위적으로 이런 마음을 다듬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새 영 안에 인간의 조작성을 용인하지 못한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 영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요? 이사야 4:3-4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하나님의 정결작업이 성사되려면 지정된 특수한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시온산, 곧 예루살렘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지구상 다른 지역과는 달리 하나님의 언약이 유일하게 완성태로 등장하고 적용되는 지역입니다. 이 특수한 공간과 더불어 여기에 언약 완성이 적용된 특별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정해진 사람에만 국한 됩니다. 이들만 거룩한 자들입니다.

즉 다른 이들은 이 거룩함 참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들에 심판의 영과 소멸의 영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과 소멸의 영을 받은 사건도 특수한 이들에게 해당되도록 제한적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심판과 소멸에 관한 내용을 알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의 내용은 시온에 살고 있는 그 제한한 특별한 사람들의 더러움이 씻어지고 그들이 저질러진 모든 우상숭배의 죄가 청결해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판과 소멸의 영이 그들의 죄를 씻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심판이다 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흙에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그 원리에 포함된 속성의 일부로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즉 흙에서 나온 존재는 언제든지 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는 창조의 원리에 위반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곧 죄를 지었으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창조의 원리가 더 깊이를 보여주는 만큼 죄의 깊이도 더불어 함께 드러납니다. 곧 우상숭배라는 형식으로 죄가 그 마지막 내막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새 영이 오게 되면 이런 실정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곧 육신과 영의 대조가 명백하게 구별되면서 하나님의 창조작업이 여지없이 적용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작업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주장을 펼치면서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적 반발이지요. 바로 이러한 죄를 까발리면서 새 영을 심판의 영으로 작용합니다.

고린도후서 4:8-11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란 소위 살았다고 우겨도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십니다. 새 영이 그렇게 하십니다. 따라서 이왕 죽은 자가 되면 이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본인의 가치와 자기 체면도 같이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버립니다.

이 죽음으로 인해 그 성도는 자신이 살았다고 행세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통해서 살아있다고 외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자체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곧 우상숭배 죄가 뭔가를 분명히 늘 인정하면서 자신은 바로 그 죄로 인해 마땅히 심판받아야 함을 늘 수긍하며 사는 자입니다.

마치 포수가 곰을 잡기 위해 곰 가죽을 덮어쓰고 나아가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 죽은 것을 짊어지므로서 실은 그 안에서 자신이 죄인으로서 합당함을 늘 인정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이 창조성을 외면하고 무작정 자신만은 필히 살아남아야 하고 구원되어야 하는 자기 욕심성을 되돌아 복세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당당하게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6강-에스겔 36장24절-28절(새 영, 새 마음)1409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36장24절-28절입니다. 구약성경 120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에 나와 있습니다. 우상 숭배했던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은 맑은 물로 뿌려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이것,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영을 그들의 마음에 주어서 육신의 마음과 새 마음을 구분케 하고 그 새 영이 있는 새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시고 열조에게 주신 그 땅에 거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새 영을 주지 않으면 이 모든 계획이 다 실패로 끝나겠지요. 방금 제가 언급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새 영을 너희에게 준다고 되어있습니다. 본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뭔가를 제공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새 영을 받은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새 영을 안 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에 에스겔 36장 26절에 새 영을 준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가 열심히 해라. 그러면 구원하겠다.”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 쪽에서 뭔가 준다는 것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열심히 하면 되거든요. 이 몸 가지고 놀면 뭐합니까? 열심히 하면 되거든요. 열심히 하면 너희를 하나님 백성 만들겠다고 한다면 열심히 한 사람과 안 한 사람만 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열심을 안 했다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서 돌아갈 때쯤 해서 열심을 내면 되는 거지요. 교회 바짝 다니고 새벽기도 출석하고 그런 식으로 천국 가기 전에 바짝 끌어올려서 하나님의 예쁨을 받는 재롱을 부리면 된다는 말이지요.

 

열심히 해라 구원받는다, 하면 천국 가는데 있어서 별로 어려운 게 있을 수가 없지요. 평소대로 우리 몸을 열심히 굴리면 되니까. 그런데 새 영을 너희에게 준다고 되어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새 영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서를 내놓았다 해도 해당사항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묻는겁니다. 하나님이 새 영을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에 대해서 묻는 거예요.

 

새 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개척교회 열군데 하고 큰 교회 짓고, 이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포함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포함되어 있지 않거든요. 새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이 “새 영 안 받았으니 곱게 지옥을 가자.”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새 영은 안 받았지만 성경말씀대로 사는 그 각오와 결심들이 넘쳐나면 그것은 큰 예배당이 생기고 큰 교회가 생긴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새 영을 주겠다는 것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쪽에서 어떻게 구원을 시도해볼까?’ 이런 시도가 아니고 주님께서 새 영을 줘서 받게 되면 뭘 아느냐 하면, 내 의사와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이미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추후로 뒤돌아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거예요.

 

새 영을 받지 않게 되면 내 쪽에서 어떤 시도와 어떤 정결함과 열심과 착함, 기도와 금식을 다 보태서 천국 문을 열어 제치고 거기에 내 영혼을 안식케 하느냐 하는 그것이 도전목표이거나 과제가 되어버렸어요. 내가 이 땅에서 실패했으나 천국 가는 일에서마저 실패할 수는 없다. 내가 모든 노력과 돈을 다 투자해서서라도 기어이, 기필코 나는 천국가고야 말겠다는 이 야무진 결심들, 그 결심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겁니다. 그 야무진 결심이 뭉치면 그것으로 천국도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못 가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정답은 하나 밖에 없어요. 성령을 안 받았기에 뭔가 이거라도 해야 스스로 자기에게 확신 찌꺼기 같은 것이 생길까, 그래서 마지못해서 시도해 보는 것에 불과한 거지요. 하나님께서 새 영을 주신다는 이 계획이 처음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이 새 영을 준다는 이 예언이 어느 시점에 나왔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육신으로서 율법을 지켜보려고 모든 시도를 다 했는데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만 유발했다는 그 확고한 증거가 확실해지는 시점에서 새 영을 주겠다고 하신 거예요.

 

“네 할 것 다 해 봤나?” “다 해봤습니다.” “해보니 어떠하냐?” “안됩니다.” “안되지? 새 영을 주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 영을 받아 놓고는 이제 새롭게 나의 가치, 나의 행함의 의미를 새롭게 시작해 볼까,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새 영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 영을 줬다는 이것은 우리가 요청해서 주신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낚아채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서에 일방적으로 맞추어서 주님의 레시피가 우리 온 몸에 쏟아져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새 영을 받은 사람이 할 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레시피, 하나님의 이런 요리법에 의에서 나는 다루어졌고 장식되었고 오늘 하루도 주님의 요리하심에 걸려들어 이렇게 관리되었다, 주께서 이런 이들을 벌이셨는데 이런 일들이 성경에 다 나와 있더라, 성경에 이미 나와 있는 계획들이 차질 없이 우리 자신에게, 성도에게 퍼붓더라, 그 고백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쉬운 이야기에요. 본인이 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 쉽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하면 “목사님, 그것 달성하는데 우리 쪽에서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새 영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천국가고 싶은 사람 모집해서 천국 보내주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9장의 말씀대로 인간의 모든 시도나 달음박질, 노력이나 기대나 애탐, 그런 것과 관계없이 천국 갈 사람은 따로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멤버, 리스트가 확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 확정되었다는 취지를 듬뿍 담은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타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언약을 앞장세워서 찾아오신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들은 요청할 없었어요. “하나님, 언약 주옵소서.”라고 요청할 수 없는 이유가 그들은 나라 자체가 없어요. 이스라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지 히브리인들이 모여서 “우리가 애굽의 등살에 힘들어서 못살겠으니 따로 나라 만듭시다.” 이런 식으로 족장 회의해서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거든요. 그들이 폐쇄적인 나라, 독자적인 나라를 원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새로운 약속의 땅도 원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살던 애굽에서 그냥 살고 싶었어요. 힘들었던 것이 감해지고 자기 노동의 대가로만 생활할 수 있어도 만족한다는 그 정도를 원했지 덜렁 들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이런 혁명적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방식은 히브리인들의 머릿속에는 없던 이야기에요. 이 땅 말고 다른 땅 만들어서 그 땅에 따로 산다는 그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이지 사람들의 계획이 아닙니다. 인간이 정든 땅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습니까? 문제는 이 땅이 죽음의 땅이라는 사실이에요. 죽음의 땅인 줄 몰랐지요.

 

오늘 본문이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전체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기도 한데요. 늦게 오신 분이 계시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봅시다. 주님께서 새로운 영을 주신 다는 것은 창세기 2장의 반복이거든요. 마치 인간을 ……, 이게 어려운 말은 아닌데 해 보면 어려워져요. 처음 창세기 1장부터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이 없었기에 사람이 “저 사람 되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 말이지요. 그렇잖아요. 내가 없는데 인간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는 이것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사람 자체가 없어요. 따라서 없어야 마땅한 거예요. 그 때는 사람은 없었고 뭐는 있었나? 흙은 있었어요. 제 말 잘 들어보세요. “당신은 흙입니다.” 할 때 이것을 기분 나빠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없었잖아요. 그냥 흙만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에 영을 부어주니 이게 사람이 되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이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거예요. 너무나 쉬운 것인데 이야기 하면 듣는 사람은 또 기분 나빠해요.

 

왜 기분 나쁘냐 하면,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어느 정도로 성경하고 인간들이 의사소통이 안 되느냐 하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거예요. 부드러운 마음이 어떤 건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추석명절이 되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혼부부는 자칫하면 싸움이 자꾸 일어나요. 여자 쪽에서 시댁에도 용돈 줘야 되고 친정에도 용돈을 줘야 하는데 얼마씩 줘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새댁은 일 년동안 계속 시댁에만 매달 십만원 씩 일년을 줬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눈치가 보여서 친정 엄마에게는 한 푼도 안 줬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추석 때 남편 몰래 이야기도 안하고 백만 원을 줬다가 그게 들통이 났어요. 남편 말이 왜 백만 원이나 주느냐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큼 이미 시댁에 줬다고 했어요. 남편 말이 “앞으로 친정에 돈 줄 때는 내 허락을 맡고 줘라.” 이렇게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보통 일상에서 이런 일이 많이 있거든요.

 

그게 바로 육신에서 나온 굳은 마음이에요. 그러면 부드러운 마음이 뭐냐 하면, “여보, 내가 그동안 시댁에 십만 원씩 매달 줬고 이 번에 친정에 백만 원 줬다.”고 한다면 남편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이렇게 했을 겁니다. “당신이 누구에게 얼마를 주든 나는 밥만 먹여줘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게 남편의 부드러운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부드러운 마음의 남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지요. 지금 없다는 데서 끝나면 안돼요. 중요한 것은 에스겔 36장 25절 26절에서 주님께서 진짜 성령을 준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성경 말씀을 볼 때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찾으면 안돼요. 여기서 새 영을 줬다는 자체가 인간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인데 인간 자체가 달라졌으면 그것은 교회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관계없이 그 사람은 새 영을 받은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서는 새 영 받은 티내고 다른 데서는 입 다물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교회나 어디에서나 다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거예요.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오전에는 강의하고 오후에는 강사에게 관광시켜 준다고 하고 또 저녁때는 나름대로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중국에는 오페라가 있는데 건물 안에 있는 극장에서 오페라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야외무대에서 오페라를 하는 거예요. 어둡게 되면 사방의 온 산과 들의 모든 것이 무대가 돼요. 무대자체가 움직여요. 객석이 왔다 갔다 움직이는 거예요. 객석 자체가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성경말씀은 교회에서 예배 예쁘게 드리라고 새 영을 준 것이 아니고 새 영 준 사람은 그 사람이 어디 가도, 화장실에 가든지 목욕탕에 가든지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새 영을 받은 티를 팍팍 내게 되어 있어요.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부드러운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 육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예상 못할 의외의 겸손이 나와 버려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의외의 겸손이 가장 놀랄 일입니다. 예상 못했는데 갑자기 겸손해질 때 깜짝 놀라버려요. “저건 인간의 마음이 아니고 천사의 마음이다.” 이렇게 돼버려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육신과 새 영을 받은 마음을 대비를 시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놓았기에 어쨌든 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육신입니다.

 

그런데 “누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나요? 주께서 저를 인도하시겠지요.”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해놓고 다시 묻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새 영을 안주면 어떻게 되는가? 안 주면 못 받아서 지옥 가는 거지요. 그게 바로 부드러운 마음이 성령 받은 마음이 되는 거예요. 이 이야기하려고 뜸을 들인 거예요. 성령 안 주게 되면 안 받았으니 당연히 지옥 가는 거지요. 가야지요. 가야지!

 

성령 안 받았으니 당연히 지옥가야 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뭔가 주셔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내 쪽에서 뭘 준비하게 되면 하나님이 날 예쁘게 봐서 도장을 찍어주는가? “십자가를 믿으라면 십자가를 믿겠습니다. 언약을 믿으라면 언약을 믿겠습니다. 복음 안에 살라면 복음 안에 살겠습니다. 성령 받아 살라면 성령 받아 살겠습니다. 이 정도 조건을 갖췄으면 제가 구원 받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에요.

 

어쨌든지 기어이 자기 자신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온갖 발악, 발악이 뭡니까, 발작을 지금 다 하고 있는 거예요. 좋은 것은 다 끌어당겼어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사도바울 말대로 “내가 주에게서 끊어진다 해도 제가 감당하겠나이다.” 이것은 배포도 아니고 용기도 아닙니다. 구원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에 속한 문제임을 주님의 영을 받았으니 그게 내 마음으로 대체되어 버린 거예요.

 

옛날 마음은 뭐냐 하면, 어쨌든 최종적으로 나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주도적으로 작용했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그 마음 자체가 사실은 육에 속한 마음인 것을 알고 주의 영께서 지배하게 되면 그걸로 인하여 내가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들통난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수용을 한 겁니다. 주의 영이 임했으니 내가 내 위주로 살아가는 이것이 딱딱한 마음이고 부드럽지 않은 마음이고 육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다음 문제요. 25절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이 말 그대로 하면 쉽습니다. 정결케 한다는 것은 그 전에 더럽다는 이야기에요. 어렵지 않잖아요. 주께서 정결케 한다는 것이 주님의 계획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당연히 우리는 주께서 일방적인 물 뿌림의 조치가 없는 이상 우리는 항상 더러운 것만 내놓는 존재라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이미 주님의 계획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의 그 다음 조치, 그 다음 조치, 그 다음 레시피, 하나의 쟁반위에 있는 요리처럼, 요리사가 레시피 대로 장식을 하는 그대로 표현하고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냐? 우리는 더럽지요. 더러운 짓을 했나? 더러운 짓을 해서 더러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더럽다고 했기에 더러운 거예요. 깨끗하신 주님께서 더럽다고 하니까 그 깨끗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더러운 겁니다. 더러움을 더러움이라고 하고 죄인을 죄인이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가 돼요?

 

주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분리시켜서 “더러운 것도 있지만 깨끗한 것도 따로 있습니다. 전적으로 더럽다고는 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나와요. 저보고 욕하는 사람들, 비판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근호 목사는 인간은 뭘 해도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더라. 문제가 있잖아.”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 문제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어요. 제가. 인간은 뭘 해도 죄인이라고. 그래, 문제가 있어요? 그게 성경에 어긋났습니까? 그렇게 비판하는 저쪽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더러운 것만은 아니다. 깨끗한 것도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왜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으냐 하면, 스스로 자기를 구원시키려고 하니까 더러운 것도 있지만 더러운 것도 따로 분류하고 깨끗한 것 따로 추려서 하나님 앞에 드려서 그것을 근거로 자기 자신을 살려보려고, 구원시켜 보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새 영이 오는 시점이 이미 모든 것이 더러운 것으로 발각된 그 시점에서 새 영을 준다고 한 거예요. 새 영이 오는 시점이 어떤 시점인가? 오늘 본문도 중요하지만 이사야 4장 3절에서 상당히 체계화된 구조가 나와요.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잠시 해설을 하게 되면 시온이라는 특수한 땅이 있는데 그 땅에는 어떤 사람이 머무르느냐 하면, 이미 창세전에 명단이 확정된, 구원받기로 작정된 그 명단에 있는 사람만 예루살렘이라는 특수한 지역에 살게 되는데 그 사람만 거룩하다는 거예요. 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방금 읽은 4절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서.”라고 했으니까 거기 있는 사람은 집단적으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죽이는 거예요. 심판의 영과 소멸하는 영, 동일한 영인데 이 심판의 영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거예요.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고 살았다는 자를 죽은 자로 바꾸어주는 겁니다. 사람이 심판 대상이 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심판 받은 자로 만들어버리지요. 심판 받은 자로 만들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심판을 늘 내장하고 심판을 늘 장착하고 다녀야 될 사람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스스로 본인이 “저 살았습니다.” 하고 외칠 자격과 권리는 없는 거예요.

 

시온과 예루살렘이 같은 지역인데 여기가 특수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뒤편에 있는 산 이름이 시온입니다. 다른 지역은 안돼요. 그 특수한 지역에서 심판의영과 소멸의 영이 주어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는 언약의 최종목적지, 완성상태를 보여줘야 될 지역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자기 약속을 줬고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완수하고 그 완수한 모든 결말을 예루살렘, 시온의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그들에게만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최종상태를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최종상태가 뭐냐?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산자라고 여기던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통보를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있으면서 무엇을 표출하고 있느냐하면, 언약의 마지막 최종적인 심판성을 마음껏 보여주는 존재로서 그들은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죽은 자로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참 어렵지요, 이것이. 이것이 이사야에서 성령이 와서 하는 거예요. 정리하게 되면, 성령이 오면 어떻습니까? 성령이 오면 산자가 죽은 자로 간주됩니다. 성령이 오면 왜 그렇게 됩니까? 성령은 심판하는 영이고 정결케 하는 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뭘 근거해서 인간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은 신약에서 답변해야 돼요. 신약에서 성령 받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십자가지신 영으로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나서서 예수님을 영차, 하고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성령께서 성도를 다룰 때 필히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늘 우리를 예수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뒤집어 씌워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드는 겁니다.

 

곰 잡는 포수가 곰을 유인하기 위해서 사냥할 때마다 곰 털을 늘 짊어져야 되지요. 그래서 곰이 자기 편 인줄 알고 긴장을 풀 그 때에 총을 쏴서 곰을 잡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올시다. 나는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고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 있기에 예수님이 살아 있고 나는 죽은 존재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늘 상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살아 있는 것과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우리가 살아 있으면 우리의 자존심도 살아 있고 우리의 가치나 체면과 위신도 살아 있게 돼요.

 

그러면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고 딱딱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네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처가에 백만 원을 줘? 돈 압수. 경제권 내가 다 가질 거야. 시댁에서 겨우 십만 원씩 주고 친정에는 백만 원 주고 말이지.” 그것은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에요. 자기 자존심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내가 처가에 백만 원 줬다. “괜찮아요! 밥이나 먹여주면 그걸로 고맙지요.” 할 때 그 남편은 여자 앞에서 죽은 존재가 된다니까요.

 

물론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가 없고 성령 받아야 되는 겁니다. 아, 말을 조심해야 되는데. 성령 받은 모든 남편이 다 그래야 된다는 식으로 흉내 낼 우려가 있어요.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경우에 되느냐 하면, 그 남편의 큰 잘못이 밝혀졌을 때,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때, “밥이나 먹여주면 고맙지요. 나 같은 인간 그저 붙어살게 해주니 고맙지요.” 이렇게 되는 거지요. 바로 성령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짓을 해도 죄밖에 안 나오고 저주받아 마땅함을 들춰내는 그 시점에서 새 영을 집어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콩 내놓으라, 팥 내놓으라, 못하게 만드는 그런 시대, 그런 식으로 천국 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출세와 권리를 주장하고 유지했습니까? 베드로는 원치도 않는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원치도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콩 내놓으라, 팥 내놓으라, 내 인생 왜 이렇게 조져놓았습니까,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왜? 부드러운 마음이니까. 우리는 지옥가도 할 말 없는 마음이니까. 흙인 존재를 하나님의 성령의 뜻이 있어서 성령을 줬다면 우리는 주님의 뜻만 나타난다면 우리는 오케이, 대 만족, 대 만족입니다.

 

가끔, 가끔이 아니라 늘 상 우리는 내 주장이 나오지만 그 때마다 주께서는 또 포수처럼 곰 옷을 뒤집어쓰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겨 쌈을 당하게 만들어요. 세상 좋아하면서 남에게 기죽지 않겠다고 까불다가 된통 터지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낮추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이 살려내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는 방식으로 주께서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하시는 거지요.

 

이것은 바로 에스겔 36장에 나오는 이 예언이 지금 현실화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이 그저 이야기로, 문자로 끝나지 않게 하옵소서. 실제로 활동하는 실제 이야기고 현실인 것을 우리가 놓쳤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말씀대로 모든 것이 운영된다는 것을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06강-에스겔 36장24절-28절(새 영, 새 마음)140903-이 근호목사.hwp (64.0K), Dow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