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2014년 8월 20일 본문 말씀: 에스겔 36:22-23
(36: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36: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에만 누리던 특징은 그들은 ‘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기 자리에서는 궁극적으로 자기 혼자뿐입니다. 가족끼리, 때로는 친구끼리 모여 있어도 ‘나는 혼자만의 자격을 견지한다’가 생생하게 살아있게 마련입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만약에 어떤 이는 “나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면 의아해 합니다.
흔히 신들린 무당이나 주장할 그 주장을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동행한다고 해서 동행자를 위해 이스라엘이 사느냐 하는데서 말썽이 일어나게 됩니다. 단순히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자기 삶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 신을 초청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낯선 신의 속성을 역사를 통해서 방출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를 실패자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성공적인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신은 자신의 존재성을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동행자를 실패자 되게 하십니다. 인간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내부 속성의 문제점을 폭로시키려는 겁니다.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자기 존재만이 사수하기에 아무리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동행하셔도 이 본심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즉 ‘자기 구원’에 대한 기대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은 나와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자신의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만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행자’된 인간들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대로 여호와 이름의 거룩과 영광성을 고백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성을 훼손한 자들로 단정받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자기를 위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과 영광을 거론하면서 그 행위로 인해 자기에게 돌아올 자기 영광을 계산해 넣고 살아온 겁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훼손하고 모독한 것입니다. 일반 이방민족에서의 신이란 국가나 백성의 자기집단의 번영과 행복과 편안을 위해 복을 제공하는 신으로 여기고 정기적으로 섬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과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만은 그런 섬김은 용납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을 들먹이면서 절대로 ‘자기를 위한’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들의 모든 ‘자기를 위한 그 무엇’을 비켜가시면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과 경쟁하시기 위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이름의 영광성을 처음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형편에 놓여 있지 않고 그 성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잊었습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제대로 된 저주가 쏟아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저주유발자’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저주와 더불어 동행한 역사를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이스라엘이 자기 이름의 영광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는 저주받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게 되는데 이 세상 어떤 인간치고 자진해서 저주를 합당한 저주를 퍼부음을 당하기 위해 신과 동행하려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소원은 구원입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포부마저 ‘자기를 위한 시도’로 판정되기에 동행하시는 분의 ‘이름 거룩성’에 부합되지 못하는 분위기가 마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실패자마저 버리지 아니하사고 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 거룩되기’ 작업에 차질을 보이지 않고 실행에 옮기십니다.
그 방식이 바로 ‘없는데서 있게 하심’입니다. 즉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되는 모든 이에게는 ‘없는 존재’로 취급하십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들 속에서 단결되기 위해 의견을 소통하는 방식과는 크게 다른 방식입니다. 인간 세계는 결속과 결합을 달성하는 식으로 의견을 소통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신들을 이미 ‘있어야 마땅한 존재’로 자부하게 됩니다. “우리를 없애다니, 감히!”라는 성질을 각자 내부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이 미리 정해놓으신 자기 백성만 데리고 가십니다.
그 데려가는 방식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 못할 ‘소통 부재’의 말씀을 해버리십니다. 소통의 단절이란 곧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소위 예수 믿겠다고 다가온 모든 자들은 이 어두움 세계가 발휘하는 막강한 권세의 호된 맛을 보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자부했던 모든 이들은 제 풀에 낙담해서 예수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그 끊어진 지점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만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등장하는 지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을 마시게 된 것은 바로 ‘반석이 터져 나온 물’입니다. 고린도전서 10:4에서는 이 물을 ‘신령한 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반석 자체고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통될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반석 밑에는 원래 물이 있었다’고 해설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반석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물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 자체가 터져 나온 겁니다. 그들이 물만 마신다고 구원을 얻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이름’이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던 바로 그 ‘내 이름 영광성’ 때문에 대신 저주받을 받으셔야만 했던 그 분의 희생을 접하는 순간, 성도는 원래, 본디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던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가 되기 위해 성도는 만들어져야 했던 겁니다.
이런 성도만이 자기 이름을 부인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다시 이어짐을 기적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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