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비밀
2014년 7월 20일 본문 말씀: 로마서 16:25-27
(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 즉 ‘복음’, ‘그리스도’, 감추어진 비밀 계시‘ 같은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그다지 다급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내용보다 더 다급한 내용들 속에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 제일 끝에 나오는 단어 ’아멘‘에 동감할 수 없게 됩니다.
‘아멘’이란 대립되는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일치가 된다는 하나님의 자기 진술입니다. 즉 인간들에게 도저히 납득이 되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모두 해결된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선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악이 활개치고, 반면에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맨날 손해보고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아해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선악과 나무를 심어놓아서 결국에는 인간들이 망해서 죽게 하시는 그 경솔해보이는 조치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모두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고린도후서 1:19-20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이 지금껏 해왔던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는 성공이었다는 겁니다. 실패나 하자가 일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O.K! 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이 완벽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완벽하지 못하고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예수님에게는 완성작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의 솜씨나 인간과의 협력작품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홀로 해낸 일이며 따라서 흠도 티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쪽에서 의도를 가지고 시도되는 모든 구원작업은 예수님에 의해서 거절당하고 거부당합니다.
그 거부의 의사표시가 바로 ‘비밀’, 곧 ‘감추임을 당하는 계시’입니다. 누가복음 18:32-34에 보면,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의도적으로 시도하는 인간들에 대항해서, 예수님도 의도적으로 그들의 구원 시도를 무산시키는 방책으로 대항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이런 대립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고 이것이 결국에는 예수님에 대한 무관심과 배척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도적인 감추임’은 아멘을 아멘답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은 대립의 불일치를 성사시킬 상황이 못됩니다. 그것은 인간쪽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안에서 인간들이 이미 갇혀 있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인간들은 남자와 남자, 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남자대 남자라든지 아니면 남자대 여자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남자대 뱀, 곧 사단의 대결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15에는 달리 이야기하십니다. 뱀 대 여자의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진행됩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여자’란 마리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여자 배후에는 남자들이 있어 남자가 여자를 앞장 세워, 남자 본인의 일을 벌리고, 여자 또한 그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운명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뱀과 맞서 싸워 이길 여인은 이 세상에서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출생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마리아는 그저 그런 죄인이요 뱀과 상대할 처지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죄와 사단의 위세에 눌러 있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서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생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고백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그렇습니다. 모든 성도들도 이 마리아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마리아는 ‘없던 여자’ 역할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도 같은 입장입니다. 성도의 자리란 원래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능력으로만 새로이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들어설 경우에만 비로소,
‘복음’이니, ‘그리스도’니, ‘계시’니, ‘비밀’이나 하는 모든 개념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계시, 어떤 말씀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나름대로 흉내내기에 열중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탈출에 성공하신 분이십니다. 성공하시면서 오직 유일한 탈출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미 인간들의 악마에서 정신적으로 장악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에 십자가를 선호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두 잠자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로마서 8:30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 의해서 호명되어야 합니다. 연병장에서 군인들을 모아놓고 호명에 따라서 자대배치가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원하시는 자기 사람을 자신이 호명해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성도는 내부에 블랙박스가 삽입된 상태가 됩니다. 즉 자신의 육신적 입장은 자기 잘난맛에 살아가는 너무나도 속된 존재이지만 그 사람 내부에서 깜빡거리는 블랙박스는 그 어떤 악마의 장난에도 버텨내게 됩니다.
비로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나’라는 존재는 예수님 복음 안에 함께 들어있는 ‘나’로서 오로지 주님과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됩니다. 그 감추어졌다는 비밀이 뭘까요? 비밀은 요한복음 3:36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비밀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중심의 세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4강-롬 16장 25-27(드러난 비밀)1407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6장 25절에서 27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여기 나오는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 이런 용어들은 현대 일상에서 그렇게 다급한 개념들이 아닙니다. 이런 것 없더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구태여 이런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것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되거든요.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 이런 용어가 나온다는 것은 남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요. 지옥 갈 사람들은 이런 용어,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가 나오지를 않아요. 같은 인간인데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인데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 그런 용어가 나온다는 것은 그 사람은 좀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지옥 가는 사람들은 이런 용어가 안 나온다는 아부성 발언을 했습니다만 오늘날 교회 다니는 교인들도 이게 안 나와요. 이런 게 나오지를 않고 있어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돈 안 되거든요. 돈 안 되는 이야기가 왜 여기서 나오지요?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 이게 나온다는 말은 세상은 나 위주, 사람 위주가 아니고 여기 나온 대로 하나님의 비밀 위주로 세상은 갖춰져 있고 돌아간다는 겁니다.
세상은 나 위주고 아니고 복음 위주고 그리스도 위주요 비밀, 계시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감이 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너무 바쁘게 쫒기다 보니 사도바울이 결론으로 말한 이것이 나오지를 않고 있어요. 나오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 로마서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 아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아멘. 이 아멘이라는 것은
서로 대치가 되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일치가 된다는 하나님의 자기 진술을 가지고 아멘이라고 합니다.
보통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인데 진실로 그러하다는 말은 너희들이 통합할 수 없는 그것이 하나님한테는 통합이 되고 일치가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왜 악이 이렇게 설치고 악마가 설칩니까?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다고 하면서 왜 불의한 것이 창궐하고 정의가 기를 못 펴고 악들이 기를 펴고 설칠 이유가 뭡니까? 대체 하나님은 뭐 하시는 분입니까? 참된 진리는 무시당하고 진리가 아닌 것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명해야 됩니까?”
우리가 그렇게 질문할 때는 나는 정의롭고 선한데 불의한 것과 선한 것이 일치가 되지 못하고 해답을 주지 못할 때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그것이 일치가 되면서 아멘이 되는 겁니다. 아멘, 하니까 지나 소나 하도 아멘, 아멘, 아멘을 많이 해서 심지어 교회 이름도 아멘 교회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도바울이 인생 살면서 참 예수 믿고 난 뒤에도 힘들게 살았습니다. 고생 많이 했어요. 우리 같으면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나를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실패나 실수가 없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보기에는 우리 인생 자체가 고달프고 힘들지요. 불교에서는 생로병사를 이야기하과 있지 않습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병들고 아프고 고생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묻는 것이 그런 인간이 왜 태어났지요? 모르잖아요. ㅁ모르기 때문에 아멘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시다고 되는 거지요. 그냥 해 보는 거지요. 어떻게 마음의 고통을 줄여볼까 싶어서 도도 닦아보고 머리도 홀라당 깎아보고 절에 가서 목탁도 쳐보지만 아멘이라는 것은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잊어보려고, 자꾸 잊기만 하려고 하는데 인간의 두뇌가 기억력이 있어서 잊어도 뭔가 다시 보게 되면 계기가 되어서 허락도 없이 상기되고 새롭게 생각이 올라오기에 우리의 고통이란 없어질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나에게 벌어질 어떤 일도 이것이 하나님 앞에는 모든 것이 성공이었다. NO, 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YES, 다. 모든 것이 PASS, 패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멘의 결과물이고 결실물이 되는 겁니다.
꼬라지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천사 앞에 보일 때 “저 봐라. 저게 내 작품이잖아. 저 죄 짓는 거 봐라. 그런데 구원받잖아. 봐!” 죄 짓는 것과 영생 얻는 것은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이 일치되지 않음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아멘이 된다니까요? 이게 예스가 돼요 죄 짓는 자는 지옥가야 되고 죄 없는 자만 천국 간다는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인데 분명히 우리가 죄짓는 것을 우리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주께서 다 보고 들통이 나게 되어 있어요. 다 보고 있으면서 죄 짓는 그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아멘 안에 흡수 통합 시킨다는 말이에요.
처음에는 우리는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짓해도 되겠어? 이게 말씀에 정면으로 위반이 되는데 이 짓을 해도 되겠어?’ 운전하고 가는데 앞으로 다른 차가 막 들어오면 “에이 씨!” 막 나오면서 ‘내가 성도인데 이래도 될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착해야 되고 거룩해야 되고 경건해야 되고 성스러워야 구원받는다는 이것은 자기중심에서 나온 발상인데 오늘 본문에서 나온 용어들, 복음중심, 그리스도중심, 선지자중심, 비밀 중심, 계시중심으로 돌아버리면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반드시 그래야만. “에이 씨!”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말씀에 위배해야만 하고 죄 지어야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다급하고 중요하지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 중심에서……, 오늘 본문에서 비밀의 계시라고 나왔으니까 비밀의 계시라고 하겠습니다, 비밀의 계시중심으로 옮겨가려면 내 중심으로 했던 모든 것이 어떤 한계에 부딪혀야 돼요. 바르게 살고 바르게 살라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어떻게 사기를 당했다.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불합리하지요. 뭔가 내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해명이 되지를 않지요. 그 불합리가 비로소 감추어진 비밀의 계시를 알고부터 “아, 그래야만 했었구나. 꼭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내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 내 중심은 정신병의 시작이거든요.
여기서 벗어나야 됩니다. 전부다 잠재적 정신병자들이에요. “목사님, 해도 안 됩디다.” 그 말 자체가 벌써 자기중심이잖아요. 이 로마서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깔아놓고 마지막에 아멘, 패스라고,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내가 믿음생활하고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구원 받느냐 하는 그 문제를 거론하는 겁니다. 내가 신앙생활 구원받습니까, 에 대한 사도의 대답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서 예수 믿었는데 구원 받습니까?” “그러면 성경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는데 그 말은 왜 등장했습니까?” “너 보고 한 소리가 아닙니다.”
너보고 한 소리가 아니거든요. 그것은 모든 것이 아멘이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이 패스가 되기 위해서 복음에서, 다시 말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 쪽에서 일관되게 벌인 작업 중에 하나가 어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예수님 쪽에서 유발하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감히 제안합니다. 예수를 믿지 마세요. 예수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얼마나 육신에 부합되고 자연스런 현상인 것을 평생 우리가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예수 안 믿게 되어 있는 육신이에요. 그런데 로마서 10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그 소리를 듣고 구미가 당긴 거예요. 입맛이 당겼어요. “예수만 주로 고백한다면 이것은 잘 하면 천국 갈 수 있겠네.”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가 감당 못할 짓을 시작한 거예요. 제가 믿겠나이다,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주님의 전략에 걸려든 겁니다. 내가 믿겠나이다, 하면서 살아보다가 그 믿음이 파선에 이르는, 태풍에 말려서 완전히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경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했던 믿음이라는 것은 액세서리에 불과하고 사실은 우리의 본심이 아닌 흉내내고 성경모방하기의 일환이었음을, 그것마저 내 죄악 된 육신의 모방하기의 연장임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도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일관성이 있어요. 내 중심으로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숨겨진 비밀의 계시중심이고 다른 말로 예수님 중심이란 말은, 정말 예수님 중심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내 중심을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을 차분하게 실행에 옮겨줘야 돼요. 실행에 옮겨주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내 중심에 입각해서 하는 행동인 것이 차분하게 계속해서 쏟아져 나와 줘야 돼요. 쏟아져 나올 때 “그래, 이게 전부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내 쪽에서 시작해서 천국이고 구원이고영생이고 예수 믿는 것도 주님을 사랑한다든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다 이것은 내 솜씨와 실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구체화 시킬 수 있어.”라는 것이 확답되어야 돼요.
그럴 때 비로소 아주 생경하게, 생생하게 그리스도 중심이 우리 외곽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면 로마서에서는 뭐냐 하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를 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과거완료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한다는 뜻은 아니고 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로마서 8장을 본 적이 었었었어요. 거기 보면 미리 아신자를 부르신다고 되어 있어요. 부르신다는 말은 호명입니다.
호명, 호명이라 하는 것은 누가 나를 불러준다는 거예요. 호명한다는 것은 누군가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인간들이나 동물들, 사슴이나 코끼리, 이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인간 말고 우리가 익히 아는 것 말고 다른 분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분이 존재해서 가만 계시지 않고 자기 말씀대로 미리 아셨기에 미리 아신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호명을 해준다는 겁니다. 남자들은 군대에 가 봐서 알아요. 훈련소 하이라이트가 뭐냐 하면, 마지막 날 더블백 하나씩 짊어지고 연병장에 모이게 합니다.
그때부터 자대배치, 본격적인 군대생활 할 곳에 배치를 하는데 호명을 해요. 제일 먼저 카투사, 이건 영순위입니다. 이건 보통 빽을 써서는 갈 수가 없는 자리에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 보안사, 그 다음이 동방사, 동경사, 소위 보리카투사라고 하는 이런 곳으로 가고 마산통합병원, 얼마나 제가 시달렸으면 그런 기억을 다 하겠습니까? 그 다음에 괜찮은 게 영천의 제 삼 사관학교, 그 다음에 101보, 103보 이런데,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에서 못살겠다, 이런 전방, 얼마 전에 미친 놈 총 쏴서 다 죽는 그런 전방으로 보내버려요.
그렇게 호명을 해줄 때 그 운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후방에 가면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와요. 전방가면 휴가도 못 나와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요. 호명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본인이 호출해서 뽑아가는 식이에요. 끝! 믿어요? 열심히 사랑한다고요? 소망을 품고? 네 마음대로 하세요. 전혀 그 방식이 아닙니다. 그 방식은 한국교회가 교인들 끌어 모으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천국은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말한다, 정말! 못갑니다. 안됩니다. 갈 수가 없어요.
이미 명단에 103보 춘천, 101보 의정부로 가기로 다 되어있는데 마산 통합병원에 넣어달라고 백날 해 봐야 명단에 이미 없어요. 배치가 안돼요. 그래서 모든 것, 사람의 운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이미 결정 나버린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저항할 수 없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피조물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일을 벌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요? 그런 것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성이요? 그런 것이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아요.
이런 내용이 로마서 9장에 나왔던 내용입니다. 새삼스럽다고 하지 마세요. 제가 말씀 다 드렸습니다. 드렸는데 그걸 왜 기억 못하느냐 하면,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습니다.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 이것이 오늘날 이땅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다지 다급하고 시급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돌아서면 다 툴툴 털어서 다 버렸어요. 이게 돈 버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는 표현들이기 때문에 다 갖다 버린 거예요. 돈과 무관한 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습니다. 제가 분명히 했지요. 우리는 너나 없이 다 같아요.
그러나 복음, 그리스도, 선지자, 비밀, 계시, 여기에 왠지 관심이 있다는 이것은 특별한 사람이고 특이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받기로 작정된 특이한 생산물이에요. 그야말로 호명당한 사람이고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제가 처음에 했던 이 아멘이라는 것을 다시 살펴봅시다. 이 아멘이라는 것은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서로가 일치되지 않는 내용,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지혜를 동원해야 일치되지 않는 내용이거든요.
예를 들면 “왜 선악과 심어서 시험케 하십니까? 처음부터 선악과를 뽑아버리든지 아니면 심더라도 철조망을 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해야지 선악과를 심어놓고 그것도 보기 싫은 것도 아니고 따먹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나무를 심어넣고 그걸 따먹게 해서 사람들을 멸망케 했습니까?”라고 선악과를 심은 쪽은 하나님이기에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되지 그 책임을 인간에게 지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 불합리, 모든 것의 불합리, 이 불합리에 대해서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해내지 못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납득되지도 않는데 뭐라고 하느냐, “아멘” 하거든요. 일 잘 되었다는 거예요. 뭐가 일이 잘 됐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에 일치되지 못한 상황을 이미 언급해 준 적이 있어요.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이 세상 모든 역사는 남자와 남자에 의해서 구성되느냐, 아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구성되는가?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자식을 낳으니까. 인류의 역사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남자와 뱀하고의 대결상태가 인류의 역사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뭐냐?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와 뱀의 대결구조로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의 논리나 합리에서 파악될 수 없는 자리에 진리를 두고
그 결과물로서 인류의 역사가 오해와 곡해의 역사를 유발시키는 작업들을 해 온 거예요.
그 오해와 결과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종교라는 것, 천주교라는 것,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는 겁니다.
찬양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거예요.아모스에 보면 찬양하지 말라는데.
헌금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는 거예요. 시편 50편에 보면 헌금하지 말라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진선미, 참된 것과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총 동원해서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들만의 공유적속성이라 하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영광 돌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인데? 바리새신학이 그런 이론이거든요.
뭘 빼주고 있느냐 하면, 남자와 뱀의 대결구조로 몰아가는 거예요. 남자와 뱀으로.
그런데 성경에서는 남자는 빠지고 여자가 나서는 거예요. 여자와 뱀의 대결상태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남자중심으로 나왔기 때문에 여자가 나서서 뱀을 이기고 자기백성을 구원한다는 아이디어는 남자로서는 역겹고 거부하고 싶고 듣기 싫은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중에 잔다르크 혹시 계십니까? 잔다르크 나와서 프랑스 해방하듯이 그렇게 나서면 되겠네요? 문제는 그 나서는 여자 뒤에 남자가 배치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자가 나서더라도 남자가 조종해서 여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남자가 나서는 셈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고 명령받고 지시받도록 되어 있거든요. 어떤 여자를 내세워도 결국 그 뒤에는 남자가 주도권을 쥐고 그 여자를 하인 부리듯이 부려서 다루는 것 밖에 안돼요.
그래서 그것도 탈락이고 성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뱀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없지요. 정답은 없음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인물을 내 세워라?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가운데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멘, 일 잘 풀렸다는 거예요. 일이 참 잘되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25절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데 그리스도는 해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이것이 감추어진 비밀이고 감추어진 계시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이고 계시라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25분 지났어요. 뭔가 차버리고 배척해야 될 요소가 그리스도 앞에서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우리가 주님하고 흥정을 해요? 같이 결합한다고요? 입을 맞추고? 그런 것 없어요. 철저하게 배격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여자는 마리아네? 이것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이고요. 이 땅에는 여자의 후손에서 이야기하는 그 뱀과 싸워야 할 후손은 없습니다. 그 여인 자체가 없어요. 마리아가 있잖아요. 마리아는 죄인이에요. 그 배후에는 남자가 있고 남자가 여자인 그 부모가 마리아를 낳은 거예요.
마리아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할 때 마리아의 어떤 요소가 삭제되느냐 하면,
마리아가 육신에서 잉태했다는 요소가 삭제되면서
마리아는 마리아지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특이한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해서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해서 예수님을 잉태케 하는 겁니다.
마리아 본인도 자기가 원해서 된 게 아니에요.
마리아가 평소에 기도한 기도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활짝 놀라고 말았어요. “어찌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납니까?”
마리아의 그런 고백은 정말 특이한 고백이고 그 고백은 하나의 사건인데
그 사건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일어나 줘야 그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드리고 있는 겁니다.
“어쩜 이런 일이, 제가 뭘 했다고? 잘난 사람 많은데 왜 저 같은 인간을 천국 보내십니까?
뭔가 하나님의 명단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지금 제 이름이 거기 왜 있어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제 이름이 왜 거기에 있지요?
교회요? 바쁜데 왜 교회 가지요? 십일조요? 돈보다 귀한 게 없는데 왜 거기에 돈을 낭비하지요?”
우리는 철저하게 나 중심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걸 아니라고 하는 그 자체가 위선하고 있는 거예요.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참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것. 하나님 이용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고 교회 충성해서 뭔가 미해결문제가 행운으로 속히 해결되고, 전부 다 모든 것이 나에게 귀속되는, 하나님과 동업해서 나만 잘되면 주께 영광 돌린다는 자기위주로 살아온 그것, 그런데 그 수법을 한 때 써먹다가 나중에 안 써먹어 지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기도 열심히 했는데, 금식도 했는데 왜 내 뜻이 안 이루어집니까?” 왜 불일치가 일어납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불일치를 일으켰지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의 형편이 어떤 형편인가 하면 완전히 수용소군도에요. 이 세상형편은 갇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거예요. 이 갇혀 있다는 것은 외부에서 갇히지 않은 분이 이 땅에 침투할 경우에만 나올 수 있는 발언이지요. 갇혀 있는데, 다 같이 갇혀 있는데 그 갇혀 있는 수용소에서 홀로 탈출에 성공한 분이 계셔요.
그분이 바로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만 탈출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나 탈출했다.”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은 네 힘으로 탈출이 안 된다. 그 탈출하신 분이 자기가 탈출한 조그만 구멍을 만들어놓았어요. 그 구멍이 뭐냐, 십자가라는 구멍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당해라. 이웃사람한테 당하지 말고 마귀한테 당해라.” 마귀라는 그 존재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느끼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남자와 남자의 역사,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놓은 문명이기 때문에 여기에 뱀이 끼어들 자리가 없거든요.
여자와 뱀과 싸워서 인류의 역사가 된다는 이 말은 기독교교리 같은 생각이고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나하기 나름이잖아요. 인생이란 나 하기 나름이고. 모든 드라마의 주제가 뭡니까? 와신상담이라 해서 결국 좋은 날을 보더라는 말이지요. 사기꾼은 잡히고 결국 승리하고. 못된 인간은 그렇게 못된 짓 하다가 장님 되어서 교도소에 갇히고. 모든 드라마가 참고 견디고 이기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그것이 주제 아닙니까? 그게 뭐냐 하면, 빠져나가는 구멍을 반창고로 메우려는 그게 바로 악마의 소리에요. 하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낮추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예수 믿고 예수님처럼 살면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라는 상투적인 멘트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그 멘트가 악마의 소리에요.
벌써 제가 한 이야기를 잊어버렸지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심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렸습니까?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 신경 쓰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관계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지금 어떤 괜찮은 행동들을 마구 내놓는가, 여기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결국 제 풀에 지쳐서 좌절하도록 하는 그것이 마귀의 마지막 전략이라고 하는 겁니다. 해도 해도 안돼요. 철야해도 안 돼. 금식해도 안 돼. 십일조 해도 안 돼. 창고 지어놓았는데 창고 불나버리고 없어요. 십일조 해서 창고 채우려고 했는데 그만 창고가 불나버린 거예요. 어떻게 해도 안 돼.
온 갖것 해도 다 안돼요. 지금 안 되는 분들만 다 모여 있어요. 그 안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와 그러면서도 안 되지만 기어이 해 볼래, 라고 독려하고 격려하고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으켜 세우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해줘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전혀 특이한 존재로 간주 안하려는 성향들이 강해요. 아주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남들처럼 뭔가 열심히 하게 되면 반드시 기대한 성과는 손에 쥘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물론 성과는 주어집니다. 마귀가 손에 쥐어주지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셨지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이야기는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되고 탈출해야 된다는 겁니다. 신약적인 출애굽입니다. 탈출에 성공해야 그게 구원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 땅에 같이 섞이면서 그들이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요. 17절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상이 이런 세상이에요.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그들은 모릅니다. 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왜 의도적인가? 본문의 비밀의 계시는 감추어진 것이거든요.
이 감추어지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들통 나는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감추어져야 돼요. 언제까지. 주께서 직접 우리를 호명할 때까지. 계속해서 감춰져야 되고 우리 힘으로 이것이 밝혀질 성질의 것은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기도했더니 알았습니다, 헌금했더니 알았습니다, 교회충성 했더니 알았습니다, 그런 소리는 안 되게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죄만 지었습니다만 주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라는 일관된 보편적 고백이 성도들이 모였을 때 하는 고백이고 그 고백밖에 없어요. 제가 주께 드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충성한 것이나 봉사한 것도 없습니다, 백 명이든 천명이든 전도해 봤는데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었습니다, 하는 그 고백.
집 팔고 돈을 예배당 짓는데 바쳐 봤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사기당한 것이라는 그 간증, 그런게 나와야 된다고요. 왜 그렇게 하는가? 마태복음 11장 25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 이게 모든 어른들의 로망입니다. 모든 신자들의 로망이에요.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것, 슬기와 지혜의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것이 있거든요. 성경공부도 그것 때문에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한다? 의도적으로 피해 가신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귀하고 놀란 말이지요. 지금 십자가라는 그 구멍은 주님 혼자 뚫었어요. 그 십자가라는 구멍을 찾아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십자가 구멍에 대해서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성향자체가 십자가와 반대방향이에요. 어떤 사람이 이런 바른 소리를 했어요. 십자가의 반대말이 뭐냐, 십자가의 반대말은 생산력이라고 했어요. 모든 업적이 풍부해지고 번성하는 거예요.
이것은 호세아 말이 맞아요. 잘 먹고 잘 살고 번성할수록 점점 더 십자가와는 멀어진 상태라는 겁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가정에 우환에 없고 매사 날 칭찬하고 부러워하고 박수 칠 때 떠나라! 모든 것이 잘 될 때 그게 우리의 기대치였고 그게 우리의 본색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점점 더 갇혀 있는 꼴이 되고 진리하고 멉니다.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지요.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어린아이 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자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여자가 아니에요. 아들 낳는 그 여자가 아니에요. 성령이 있을 때 여자 역할을 한 거지요. 어린애도 없습니다. 요새는 어린애라도 다 어른이에요. 추사랑, 다 어른이에요. 어린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비로소 주님만 의지한다는 어린애 같은 심정이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 33, 34절에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제자들마저도 진짜 천국 가는 비밀은 감추어놓았습니다. 왜 감춰놓았습니까? 흉내 내기 때문에, 모방하기 때문에, 이미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거기에 아무리 십자가니 복음이니 이야기해봐야 그것은 자기 구원용도로 사용하고 활용하기에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부러 감추고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다 예수 그리스도가 혼자서 일을 다 해주시는 겁니다. 누구의 협조나 일체의 도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선교사가 선교비 없어서 선교 못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그 선교사를 누가 파견했습니까? 한국교회가 파견했으면 돈 보내야 돼요. 한국교회가 보낸 선교사는 돈으로 선교할 거예요. 아프리카 주민들 보고 “여러분이 잘 하면 한국교회처럼 잘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보내서 하는 선교사는 “우리 같이 죽읍시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리스도 때문에 같이 죽읍시다.” 진짜 비밀은 요한복음 3장 36절이 절정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끝!
이 내용,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걸 한마디로 줄이면 예수중심, 그 앞에서 인간, 인간이 포함하고 있는 나, 이런 것은 흔적도 없이 날라 가버립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면 영생을 얻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에 인정 못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는 결정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진노 아래 여전히 놓여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호명하셔서 성령이 찾아와서 믿게 되면 비로소 이 사실을 내 소유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구원받고자 하는 나마저도 주님이 소유로 이전되어버립니다. “주여, 말씀대로 하시옵소서.” 마리아가 했던 고백처럼. “주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선하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 말씀이 요한복음 3장 36절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너를 사용하겠다고 우리는 주님 앞에 편입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이제 설교 시작하겠습니다.
25절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여기서 ‘나’는 없습니다. 왜 나는 없느냐 하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 이라는 이 말씀의 문장 안에는 ‘나’가 들어 있지만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이 ‘나’를 이 문장 안에 있는 나로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나의 존재이유, 나의 가치, 나의 의미는 오직 복음과 그리스도한테 달려 있다, 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아멘’이 되어버립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 사도바울이 평생 살아온 모든 것이 조금도 실패나 실수가 없고 다 예스가 되고 패스가 되고 하자가 없는 완벽한 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괜찮게 산 사람이에요? 본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데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완벽 합니다? 도대체 너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 거야?
도대체 사도바울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주 안에, 말씀 안에,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나에요. 내가 사도되겠다, 가 아니라 사도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주님의 능력 안에 본인이 들어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비행기 추락하게 되면 그 비행기만 보이지요. 그 안에 블랙박스도 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블랙박스는 색깔이 검지를 않아요. 오렌지색깔이에요. 블랙박스라는 것은 물리학에서 원인에 대한 결과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일컫는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비행기 블랙박스는 1300도 고온에서도 30일 동안 버틸 수 있고 수심 100미터에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허락도 없이 블랙박스를, 감추어진 비밀의 계시를 우리에게 장착 시키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호명할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호명한지 알아요? 아닙니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 수술을 해서 우리 허락도 없이 절개해서 여기에 블랙박스를 집어넣고 봉합한 거예요. 우리가 깨보니 너나 나나 다 돈 밖에 모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밖에 모르고 이렇게 그냥 우리는 살아가요. 교회 오면 말씀 좀 듣다가 끝나서 집에 가면 오늘도 힘들었다 하고 성경 바로 덮어버리고 아니면 성경책을 차 뒤에나 교회 뒤편에 던져놓고 집에 가는데 이상하게 자꾸 밑에서 신호가 오는 거예요.
신호가 오는데 모든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돼. 이게 블랙박스의 작용이에요. 나는 죽어도, 나는 돈에 넙죽 절하지만 이 블랙박스는 돈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잘남, 내 경건과 거룩을 자랑하지만 블랙박스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꾸 뭐가 작동하는데 나중에 이 육신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게 되면 마지막 남는 것은 십자가만 툭 튀어나옵니다. 그렇다고 또 십자가 목걸이하지 마시고. 십자가, 할 때 내가 예수 믿은 것은 주께서 장착하신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것을 가지고 선물이라 합니다. 은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성령 따라서, 같이 동반해서 주입된 그 무엇, 믿음과 소망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 속에 영원한 것이 블랙박스로 지금도 숨 쉬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로마서를 끝내면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만 영화롭게 하신다는 주님의 계획이 남들 눈에는 띄지 않고 우리에게는 느껴지지 참으로 특이한 현상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에 참여되었사오니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아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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