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91강-성도의 위상(롬16:3-7)이근호140629

아빠와 함께 2014. 6. 29. 19:10

2014-06-29 12:41:32 조회 : 31         
   성도의 위상 140629 이름 : 이근호   

성도의 위상(로마서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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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6-29 13:24 
성도의 위상

2014년 6월 29일                           본문 말씀: 로마서 16:3-7

(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16: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16: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16: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16: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브르스가와 아굴라는 (행 18:2,26/고전 16:19/딤후 4:19) 원래 로마에 살았으나 로마의 제 4대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 상업 도시인 고린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바울이 제 2차 전도 중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을 당시여서 그들 부부는 바울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천막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바울과 함께 자기들의 집에 거하면서 평상시에는 장막을 만들었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18:3,4)

이렇게 보면 이들의 활동은 평범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인간 세상에서 통용될 수 없는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이며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이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어놓는다’는 표현같은 것입니다.

‘예수 안’이라는 표현은 수동성을 말해줍니다. 즉 어떤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활동이 본인의 결단이나 의지에 의해서 벌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같이 계신 분에 의한 활약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그 이상의 다른 의미로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존재와 존재 사이에 경쟁이 생겨버립니다. 예를 들면, 나에게 나만 그저 홀로 살아있는 자라면 여태껏 살아온 모든 것이 자기 공로로 돌리면 그만인데 ‘누구 안’에 있게 되면 도대체 지금의 나의 인생이 진정 나로 인해 만들어진 인생인지 아니면 나보다 더 활동성 있게 발휘되면 살아계신 예수님의 작품인지 구분되어야 될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어놓았다’라는 것은 사명을 부여받은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즉 시킨 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는 입장에 놓여 있는게 아닙니다. 절대로 ‘시킨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킨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살 것인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인간이 되느냐가 관권입니다.

‘그리스도의 첫 열매’라는 것은 ‘죽었던 분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죽었던’ 사실 자체가 핵심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죽었던 분인데 왜 줄곧 죽지 않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이순신 장군은 물론 훌륭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이미 고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인이 아닙니다. ‘죽었었는데 죽음의 바탕을 떠안고’ 되살아 나신 분이십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심판이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마이너스(-) 현실’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빛에 비해서 어두움이요, 영생의 나라에 비해서 지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참 현실, 즉 플러스(+) 현실에 관한 내용을 우리는 지금 마이너스 현실 속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일반 인간들의 단체에서는 도저히 통용 불가인 용어, 즉 ‘예수 안’이라든지,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을 ‘사도를 위해 목숨도 내놓겠다’는 것이 다른 영역에 속한 의미들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서는 교회가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교회 없음이 전혀 이상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니 분명 없어야 될 인물들이 이렇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재주로 교회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이런 교회가 발생된다는 점이 참으로 신기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비-소통적 용어들을 가지고 참된 교회를 규정해야만 하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 그냥 빈 몸으로 등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비롯해서 구약의 모든 말씀을 대동하고 등장하시게 됩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기 존재를 근거로 예수님의 존재를 직접 상대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간결한 예로, 100명의 사람이 회개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분의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것이 하나님에게 유일한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존재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성립된 일이라서 영광입니다.

이러한 취지의 말씀을 전부 주렁주렁 달고서 예수님이 찾아들면 인간들은 그 말씀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요구하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열매’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개시된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을 말씀 안에서 단촐하게 정리하면 교회란 곧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여자입니다.

여자란 자기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자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란, 자신의 존재 기반이요 이유요 목적이요 의미입니다. 이는 여자 스스로를 위하여 목적이나 의미를 따로 쥐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의 여자입니다. 여자란 자신의 근원을 자기에게 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발견한다면 여자의 일생에서 걱정이나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공포는 가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주인되시는 남자 쪽에서 다 처리해줄 문제입니다. 실제로 여인들은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 자체를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가족을 위해 뭘해서 그 결과물을 본인이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족을 위해 수고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곧 사도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그 사명조차도 ‘예수님의 여인’입장에서 진행되기에 자기 공로로 가져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게 주님 사랑로 인한 현상입니다. 

여자는 그저 ‘남자의 사랑’만 있다면 아낌없이 다 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이런 예수님의 신부로 만드셨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사랑으로 믿음과 소망이 발생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1강-롬 16장3-7(성도의 위상)1406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6장 3절에서 7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6:3-7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도바울을 도와줬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과연 교회라는 것이 뭐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란 없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여기 교회라고 이야기하면서 나오는 용어들이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용어들이 나옵니다.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것이 말이 안 되거든요. 서울 안에서, 경기도 안에서, 이것은 충분히 말이 됩니다. 브라질 안에서, 지구 안에서, 우주 안에서, 이것은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4절에 보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사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소모품입니까? 뭐예요? 이것 딱 보니까 유 병언 생각나고 유 병언 숨겨준 사람 생각나요. 유 병언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았다, 그런 쪽이 교회입니까? 교회는 없는 거예요. 어느 교회 교인들도 목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목사를 위해서 두부과자 내놓는 사람은 좀 있지만, 목사를 위해서 돈 내놓는 사람은 있지만 목숨 내놓는 것은 돈 내 놓는 과 달라요.

나는 죽을 테니까 내 대신 당신 사세요, 그런 뜻이거든요. 그게 교회인데, 그걸 교회라 하는데 무슨 그런 교회가 이 세상에 있겠어요? 또 여기 5절 끝에 보면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열매를 내놓았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열매를 내놓으려면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서만 이것이 가능하지요. 예수님이 살아 있을 경우에만 열매가 계속 생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다고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느냐 하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이 경쟁관계에 놓이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경쟁관계에 있다 이 말이지요.

이 순신 장군은 살아 있지는 않아요. 훌륭한 줄은 알지만 살아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식사나 운동을 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왜, 그 분은 고인이기 때문에. 그분이 훌륭한 것은 알지만 그분은 고인이기 때문에 운전해서 길을 간다거나 할 때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 있다면 경쟁이 돼요. 지금 예수님이 살아 있다면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이 숨 쉬고 싶어서 숨 쉬는지 아니면 주께서 숨쉬게 해서 숨 쉬는지, 살아 있는 내가 나로 하여금 숨 쉬게 하는지 아니면 나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살아 있는 예수님이 내 심장을 푹푹 눌러서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인지 그것이 항상 애매모호하게 되어버렸어요.

특히 환자가 있을 때에 의사가 살려주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살려주는지 의사와 예수님 사이에 경쟁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혹시 내가 의사 믿다가 주님을, “네가 지금 의사 믿나?” “예” “그러면 나는 뭐가 되지?” “미안합니다. 낫고 난 뒤에 감사 헌금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 살아 있음을 모독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병원에서 퇴원시켜라. 네가 병원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증거다. 지금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 계시니 주님께 기도하면 병이 낫는데 왜 그걸 인간인 의사한테 맡기느냐? 빨리 퇴원시켜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서 병이 나아서 이 세상에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우리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지 우리가 보자.” 하고 아픈 사람 불러내서 철야기도 하는데 환자는 사흘 만에 시체가 되어버리고, 그래야 꼭 믿음이 있는 겁니까?

그럴 때 그 사람은 얼마나 고민했겠습니까? “주님, 제가 믿음 있다, 믿음 있다, 한 믿음 한다고 우기면서도 제 아들이 아프니 이렇게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부탁하는 이 불신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나름대로 믿음이 아니라는 느낌,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깔 때 내가 주님 살아 있는 것보다 이 세상에 사람 살아 있음을 더 우선시 하지 않는가, 하는 자책감을 유발시킬 수가 있습니다. 아예 믿음 없는 사람이야 그런 갈등조차 없어서 편하지만.

어쨌든 교회라는 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있다고 우기고 우리 주변에는 그런 교회가 없고, 이 사태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성경에서는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자.” 그리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첫 열매.” 이런 요건을 갖출 때 그게 교회가 된다고 규정을 해 놓았다면 우리는 뭐예요? 여기 지금 왜 모인 거예요?

그래서 일차적으로 정리해드립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은 일체 교회에서는 통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장로 뽑을 때 삼분지 이의 찬성으로 뽑읍시다.” 그게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삼분지 이가 안 되면 그것은 장로감이 못됩니까? 삼분지 이 되어야 장로감이라고 우기는 그것, 교회 아닙니다. 왜 그게 교회가 아니냐 하면, 우리가 충분히 납득이 되고 통용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란 우리가 익히 아는 것들은 전부다 통용이 안 되고 우리가 상상도 못한 내용들만 서로 통용이 되는 희한한, 아주 기이한 집합체, 단체, 그게 교회입니다. 특히 이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라고 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이라 할 때 우리는 예수님만 딱 모시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수님이 오시옵소서. 예수님이 이 자리에 함께 하옵소서.”라고 이렇게 모시면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 등장하게 되면 뒤에 줄줄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했던 그 말씀이 우르르 같이 딸려온다는 생각을 해 보세요.

그 말씀을 하나의 깡통이라고 봅시다. 빈 깡통이라고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데 소리가 요란해요. 덜그럭거리면서 깡통소리와 함께 말씀이 우르르 같이 온다 그 말이지요. 우리는 예수님 있고 내 존재 있으면 좋은 게 좋다고 서로 좋게 이야기하면 구원될 줄 알았는데 주님 뒤에는 온통 주님께서 날린 말씀들이, 멘트들을 들고 나오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주님이여, 제 뜻은 이렇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치마를 휙 걷으면서 “자, 이 깡통들(말씀들)을 한 번 봐라. 방금 말한 네 말이 이 말씀들에 저촉이 되는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그 후에 나에게 나오너라.”하게 되면 도대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예수님께 접근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 모시고 교회 한 번 해 보려는데 우리가 엄두가 안 나는 분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분 단독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가지고 올 때 그 말씀을 우리교회에 다 적용시킨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견딜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고 형제를 미워한 것도 살인죄고, 그것이 계속 우리 교회에 통용된다고 상상만 해보세요. 머리에 진짜 쥐납니다. 전에 우리 실습했잖아요.

“형제님,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납득이 돼요. “우리 같은 교인까리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이것은 납득이 되는데 “난 당신을 솔직하게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이 통용된다면 어떻게 그 교회에 교인들이 남아 있겠습니까? 안 남아있지요. 그래서 로마서 16장에 명단들이 나오고 천국 갈 생명책 명단들이죠. 다른 성경에 보면 여기 있는 명단이 그냥 명단이 아니고 이 명단 그대로 하늘나라 생명책, 예수님 책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우리 눈 앞에 지금 펼쳐져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가 여자니까 아내 이름이 먼저 나와요. 아굴라는 남편 이름입니다. 여자가 좀 나댔던 모양이지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같은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냥 보통 인간인데 주님보시기에 부리스길라 아굴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기재된 그 사람이 부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을 아무리 설명해도 길어져요.

그래서 이 시간에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단출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이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지금도 활동한다는 거예요. 활동하게 되면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 안에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같은 사람입니다. 본인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보다 선재해서 자기에게 활동을 시키는 분이 함께 있는 거예요. 누가 일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시킨 대로 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고민이 없어요. 아무런 고민이 없습니다. 애가 비자를 받든 안 받든지 전혀 고민거리가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내 인생 내가 챙기고 내가 이끌어갈 책무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내 인생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없어요.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나가면 내 인생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이너스 현실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어낸 말이에요. 현실을 볼 때에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아시지요. 사람들이 그걸 다 아는데 뭘 모르냐 하면, 죽은 분이 부활했다는 것, 죽은 분을 빼놓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 태반이에요.

죽고 난 뒤에 부활했기에 부활은 소망이 아니고 부활은 절망이고 심판입니다. 너희들의 손으로 죽인 자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부활했다는 말은 주님 혼자 부활했다, 가 아니라 이제 본격적으로 지적질을 하겠다는 거예요. “누구야,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이. 누구야, 내 아들을 죽인 세력들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서는 거예요. 전설의 고향에 의하면 “내 다리 내놔라.”하는 식이에요. 부모가 아플 때 아들에게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지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죠. 아침부터 이렇게 음습한 이야기를 해야 될까 싶은데, 이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비올 때 따라 와서 “내 다리 내놔라.” 하는 그 이야기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미 고인이에요. 우리는 고인인 줄 알고 교회 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미 죽은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했던 말들, 예수님이 했던 멘트도 다 이미 구닥다리, 우리 눈앞에서 다 치워버리라는 말이지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교회라는 모임으로 얼마나 친하게 지내고 사업상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날까, 그런 것이나 따지면 되고 좋은 신랑감이 있는지 그런 것만 살피면 되고 그런 예수님 멘트는 다 빼자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교회가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필요하면 교회 다니고 필요 없으면 빠지고. 교회에서 봐주면 장로되고 장로투표에서 떨어지면 그만 나가면 되고. 그게 사람들이 보는 교회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없다는 것, 성경의 그 교회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데 그런데 우리에게 압박이 되는 이유는 성경에서 이런 교회가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한 번 찾아보자는 거예요. 찾아볼 때 그냥 찾지 말고 조건 따라 찾아보자는 겁니다. 그 조건이 뭐냐,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사도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는 사람,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들 되는 사람, 이런 겁니다. 지금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린 거예요.

부활의 첫 열매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냥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 죽은 자였는데 그 죽은 자가 살아난 거예요. 그리되면 진짜 현실은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현실만이 플러스(+) 현실이고 그 외에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 출세하려고 애쓰는 이것은 마이너스(-)현실인 거예요. 마이너스 현실, 그러니까 참된 현실의 시커먼 그림자라고 볼 수 있지요. 참된 부활의 세계가 천국이라면 이것은 보나마나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지옥 갈 자들이 만들어낸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우리는 지금 혹독하고 확실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중심,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달라지면 되는 거지요. 바뀌면 되는 거예요. 일단 말은 간단하게 해 봅시다. 우리가 마이너스 현실에서 플러스 현실 속에서 살면 되잖아요. 마이너스 현실 속에 사는 것이 예수님 밖에 있는 존재라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플러스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은 쉬워요. 달라지면 되고 바뀌어 지면 되는 겁니다.

달라지고 바뀌면 되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달라지고 어디에서 어떻게 바뀌면 되는가? 얼마나 오래살 수 있는가, 라는 인생에서 참다운 인간이 뭐냐로 관심을 돌리면 되는 거예요. 오늘 죽거나 내일 죽더라도 후회 없이 바른 인간으로 살다 죽으면 되는데 마이너스 현실 속에서 그저 오래 살려고 하면 그것은 안 되는 겁니다. 말을 해놓고 보니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제 방송 보니 어떤 의사가 나와서 하는 말이 살 빠지는 비법을 이야기해요. 그 비법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보통은 식사에서 국하고 밥하고 반찬 나올 때 우선 국 먹어보고 밥 먹고 반찬 먹고 그 다음에 후식 먹잖아요. 그 의사의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밥 먹고 반찬 먹고, “잘 먹었다.” 하고 후식을 먹는데 순서를 그렇게 하지 말고 바꾸라는 거예요. 과일 먼저 먹고 그 다음에 반찬 먹고 그 다음에 밥 먹고 그 다음에 국물은 먹지 말고 건더기만 건져 먹고.

왜 그래야 하느냐, 이미 과일로 배를 채워놓으니까 일단 배부르고 ……, 건강에 관한 소식은 왜 그렇게 잘 듣는지 모르겠다. 일단 배불러서 양이 차니 더 많이 안 먹게 되고 그 다음에 과일의 성분이 염도를 낮춘다는 겁니다. 살찐 사람들에게는 좋은 아이디어 아닙니까? 그것을 복음에 적용시켜 봅시다. 내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교회 나와, 반찬 먹어, 기도해, 헌금하라 해서 헌금해, 봉사하고 예배 참석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이게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이게 경쟁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교회 와서 내 신상이 잘 되어야 하고 내 어려움이 해결되어야 하겠다고 할 때는 항상 내 존재가 우선이에요. 내 존재가 우선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존재를 우선시 한 적이 없어요. 나한테는 내 존재가 제일 중요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호응하거나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 우선이냐 하면 예수님 우선이에요. 천명이 회개해도 하나님께 영광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피 흘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이걸 아는 교회가 정말 드물어요. 천명이 몰려와서 예배드리면 영광 되는 줄 알지요. 찬양하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아들밖에 없어요. 이 발상이 있어야 돼요. 자꾸 나하고 주님하고 엮이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엮여봐야 어설픈 본드로 붙여서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뚝 떨어집니다. 실로 천 같은 것 묶어 봐야 강한 인장력이 잡아당기게 되면 연결되어 있던 천들이 다 찢어지듯이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30년 믿고 50년 믿고 목사 되고 장로 되어 봐야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두두둑 다 찢어져버려요.

“제가 회개하겠습니다. 영광 받으소서.” 네가 회개한다고 영광이 아니고 나는 지금 관심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면 그 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아요. 출애굽 할 때 어린양 피만 바르면 될 문제를 안에서 통곡하고 울고불고 한다고 하나님께서 “가련한 아들 살려줄게.” 이렇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냉정해도 너무 냉정해요. 문설주의 피만 보고 그냥 살려주는 거예요. 우리는 그 냉정함, 그 차가움 냉정함이 우리 속에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왜 그런가, 우리는 항상 나한테만 집착하고 나한테 너무 강한 애정을 보내기 때문에, 너무 큰 사랑을 주기에, 내 바깥에서, 그러니까 주님 안이죠,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무슨 의논을 했고 무슨 계획을 했고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와 닿지를 않고 튕겨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는 이 대목만 보게 되면 내가 장담해서는 안 되겠지만 백이면 구십 아홉은 ‘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구나. 주의 종에게 내가 목숨을 바쳐야지. 그래서라도 내가 구원받아야지.’ 그렇게 나온다니까요?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목사 사기꾼한테 옴팍 걸려든 사람이에요.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주 안에 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던 사람이 아니에요. 주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목숨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도록 사명을 부여한 겁니다. 자기도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물에 빠졌다. 건져줬다. “훌륭합니다.” 라고 하니 뛰어든 사람이 “내가 뛰어든 것이 아니고 누가 떠밀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지요. 우리는 항상 주님말씀에 대해서 “하겠습니다.”라고 마음의 결단을 하기 이전부터 하겠습니다, 하는 그 말을 주님이 안 듣습니다. 왜, 그것은 해봐야 부도수표이기 때문에. 하게 하십니다. 그걸 피동적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피동적 자유,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는데 그 뭐든지 라는 그 뭐든 지가 주님 쪽에서 개시한 뭐든 지에요. 주님 쪽에서 시작한 뭐든지 라니까.

예수 밖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 더 쉽게 납득이 될 거예요. 평소에 우리는 예수 밖에 늘 살아가니까. 예수는 고인이고 우리하고 상관도 없으니까. 예수 밖에 있는 경우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보통 주차를 하잖아요. 주차를 할 때는 차하고 운전사하고 같이 있어요. 운전사는 차 안(in)에 있습니다. 주차를 하고 그 안에서 살림 삽니까? 아니지요. 주차하고 나서는 문 열고 나오지요. 문 잘 잠겼나 당겨보고. 주차해놓고 차는 거기 놔두고 우리는 따로 밖에 나와 버립니다.

교인들이 자기 몸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일단 나를 예수 안에 주차를 해 놔요. 해놓고 난 뒤에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너는 이미 구원받았어.”라고 해놓고 자기는 차에서 분리되어서 따로 나와 버려요. 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보는데요. 보통 행동이 그렇잖아요. 예수님 잘 믿겠습니다, 해 놓고는 잘 믿게 된 나 자신을 주차해놓고 그 다음에는 활동은 혼자 돌아다니면서 다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4절에 보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이 사람이 그냥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달랑 이용한 사람입니까? “예수님 고맙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떤 일을 해도 터치하지마세요.” 그렇게 한 사람입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이 말은 자기가 교회 출석했다, 지난 주일에 다녀왔다, 교회 다녀온 그 교회가 교회라고 이 사람 머릿속에는 전혀 없어요. 교회 갔다 왔으니까 교회 갔다 온 거다, 그렇게 느끼지를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움직이는 교회에요. 교회에 갔다 왔다가 안 된다니까요. 본인이 움직이면 교회가 움직이는 거예요.

주차한 차하고 자기하고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선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막 살아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막 사세요. 사람이 막 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아버리면 조심스럽게 산 나는 주차가 되어 있고 그리고 은밀한 나는 진짜 막 살아요. 그러지 말고 차 몰고 그냥 막 살아요. 막 사는 그 장소에 주님이 밀어 넣는 사태인 것을, 주님이 유발시킨 사태인 것이 떨어지지 말고 같이 있어줘야 돼요. 그렇게 돼야 됩니다.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일 중요한 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인데 어떻게 하면 예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교회 없어요. 없는데 성경에 있다 하니까 그 성경에 있는 교회에 우리가 어떻게 가담될 수 있는가, 이게 제일 관건이고 이것은 해답을 쥐어줘야 할 문제거든요. 아까 그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예수님이 오실 때 그냥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뒤에 빈 깡통을 잔뜩 매단 채 오시는 것처럼 온갖 잔소리, 말씀을 들고 온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 예수님 말씀 속에서 예수님 빼놓고 예수 믿는 사람 전체를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자신의 여자라고, 신부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그냥 할 일 없이 놀러 오신 것이 아니고 너는 나의 신부다, 라고 오신 거예요. 신부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지목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지목, “너 이제부터 나의 신부야. 나의 여자야.”라고 지목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왜 갑자기 신부라는 이야기를 합니까? 물론 성경에서 나오는 용어지만 그 많은 용어 중에 왜 신부라는 용어를 씁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 신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랑을 그냥 받는 거예요.

여러분,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지요. 신학교 졸업하고 나면 강도사시절인데 그 강도사 시절에 부산 새중앙교회에 설교하러 가서 이 본문 가지고 설교를 했어요. 교회 취직하려고 많이 다녔습니다. 아직도 그 본문들이 기억이 나는데. 30초반에 강도사 때 교회 취직하려고 부산 그 큰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이 본문으로 하면서도 무슨 뜻인지를 몰랐어요. 물론 그 후에도 몰랐는데. 믿음 소망 사랑 이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그 대목을.

그 본문 이제는 알지요. 믿음 소망 사랑이 자체 내에 서열을 가진다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사랑을 제일 뒤에 배치해놓고 제일 뒤에 배치한 사랑을 제일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과 소망은 반드시 사랑에서 던져진 것이고 그냥 던져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둘둘 말면, 마치 바다낚시 하듯 닐을 감아올리면 믿음 소망이 있지만 그 믿음 소망이 결국 어디로 끌려온다는 말인가, 이 사랑으로 합류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믿음과 소망의 특징이 뭐냐 하면, 믿음의 주인공이 성도고 소망의 주인공이 성도라면 사랑의 주체자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다가 막상 사랑에 합류하고 도착을 해보니까 사랑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유명한 사랑 장에 보면 노래로 만든 것이 있어요. 사랑은 온유하고, 죽 나오는데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사랑을 가위표 하는 거예요. 이 말 아주 쉽게 하면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가사를 보세요. 그 노래 가사 듣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울었나 몰라요. 여자로 태어난 자체가 저주인지 알았어요. 여자의 일생, 이건 뭐 다 퍼줘요, 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저 예쁜 것만 찾다가 막상 결혼하고 난 뒤에는 “당신만 있으면 난 죽어도 좋아.”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남편 입장에서 봐도 의의할 정도입니다. 이상하다. 여자도 사람인데 사람 같으면 자기 챙길 것을 챙겨야지 어떻게 다 퍼주냐는 말이지요. 도대체 저 의식은 어디서 온 의식인가? 항상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대우 받으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꼭 바보 같아요. 자기 빨래 자기가 해야지 왜 여자가 해줍니까?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어떤 남자는 그래요. “월급 갖다 줬으니까 빨래해 줘야지.” 과연 그런가요? 여자가 남편 빨래 해주면서 월급 벌어다 줬으니까 빨래해 준다는 그 조건부로 빨래합니까? 저는 절대 믿지 않습니다. 도대체 남편은 평생토록 여자를 이해 못해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곁을 떠나지 않는지. 월급 때문에? 뭣 때문에.

여자는 명예나 돈, 자존심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던져버린 그쪽에서 오는 사랑만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만들 때 여자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원천이라고 믿지를 않았어요. 내가 여기 있고 나를 사랑해줄 분은 반드시 내 바깥에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본인이 혼자 있을 때도 절대로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주인 안에 있는 것, 뭘 해도, 빨래를 해도 설거지를 해도 항상 그렇게 생각을 해요.

여자는 뭘 해도 남편생각하고 뭘 해도 자식 생각하고 가족 생각하고, 오직 자기 혼자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맛있는 것 있으면 이거 해서 남편 갖다 주고 자식 갖다 줘야지……, 갑자기 오늘 여자 우대하는 설교가 되어버렸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방금 제가 여자라고 하지 않고 “여자는”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남자는 어떠냐? 남자는 자기만 위하여 일을 합니다. 그러면 여자를 사랑한다?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제야 이야기합니다.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여자의 사랑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 말 제가 용감하게 합니다.

돈 잘 버는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이유가 자기는 놀겠다는 거지요. 그저 이용할 뿐이에요. 그러나 여자는 얼마나 대범한지, “나를 이용해도 좋다. 하지만 그런 남자라도 나는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겠다.” 이미 사랑했다, 가 아니라 나는 당신의 여자입니다, 라고 나서는 겁니다. 그러니 방금 남자 여자 이야기가 행복하게 잘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전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 소망, 그 때 뿐이에요. 믿음 소망을 쥐고 있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뭐냐 하면 이 소망이 어디서 나온 소망이고 나에게 이런 믿음과 이런 소망이 생겼는데 이게 왜 생겼는가, 내가 누구기에 이런 소망이 왜 있는가? 그건 주님께서 낚싯대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당겨보니 이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에요. 무조건적인 사랑.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교회가 뭐냐, 오늘 본문에 5절에 보면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까 제가 설명해 드렸습니다. 열매라 하는 것은 주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뜻이에요. 살아계시는데 그냥 살아계시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죽었던 분이 살아계시는 거예요. 죽었던 분이 살아 있다면 플러스현실, 진짜 현실은 죽은 자 저쪽편에 있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안 죽은 우리는 현실을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현실을 전혀 안죽어봐서 모르는 거예요.

“목사님 주장대로라면 안 죽어봐서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고 안 죽어봐서 교인 못 된다는 뜻이고 안 죽어봐서 영생 못 얻는다는 그런 뜻입니까?”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 브리스길라 아굴라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면, 분명히 안 죽어본 것이 맞는데 저쪽에서, 죽음 저편에서 날라 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성령의 사랑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랑이 오게 되면 비록 육신은 마이너스 현실 속에 지금도 고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기는 여자, 신부잖아요. 그러면 남편은 어디 가 있느냐 하면, 남편은 플러스 현실에 가 있는 거예요.

남편에게서 온 그 사랑으로 인하여 자기는 기꺼이 목숨을 내 놓을 이유가 있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는 이 대목에서 남자이기에 이해를 못했는데 여자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아, 여자들은 이걸 해 내는구나.’ 여자라서 해내는 것이 아니고, 말을 조심해야 돼요, 여자라서 해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여자는 그걸 해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 말의 결론은 뭐냐,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이 마이너스 현실, 죽음 이전의 현실에서는 이 말들이, 성경 오늘 본문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통용이 안돼요.

통용이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예수님 당시에 깡통처럼 숱한 산상설교를 비롯한 많은 설교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퍼부어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결국은 예수님을 강도 바나바보다 더 무가치하고 시답지 않게 봐서 죽인 것이나 오늘날 교회가 복음 전해도 시답지 않게 무시해서 그냥 재미삼아 교회 다니는 그것이나 똑같은 현실 속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 브리스길라나 아굴라나 뵈뵈나 이런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실망했습니까? 아니면 감격했습니까?

실망이 아니고 도리어 감격한 거예요. “저도 예수 바깥에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해서 죽음 저편에서, 부활의 세계에서, 영생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어떻게 저한테, 납득이 안 되어야 하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그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어떻게 납득이 되는 겁니까? 놀라워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물론 방금 제가 하는 말을 흉내 낼 수는 있어요. “놀라워라.” 달랑 네 자 아닙니까? 나도 놀라워라, 할 수 있는데 그냥 놀라워라, 하면 안돼요.

나에게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어떤 험악한 일이 일어났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고민거리나 문제꺼리가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놀라워라, 그렇게 되어야지요. 육에서 영으로 옮겨지는 그 지점이 있어요. 아, 육이었는데 영으로 옮겨졌다. 그 지점이 어떤 지점이냐? 그게 머리냐 팔이냐 심장이냐, 그게 아니고 공포와 염려와 두려움이 발생되는 지점이 육에서 영으로 이전되는 유일한 지점이에요.

제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에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 알겠어요?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 고생 많지요?” “네 말 듣고 내가 마음이 놓인다.” 이게 되겠어요? 이것은 누구하고의 관계냐 하면, 아버지와의 단독관계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것을 공관복음에 여러 번 스스로 자기 입으로 예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십자가 질 때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넘어가게 하옵소서.”

여러분, 그 잔 마셔야 됩니다. 그거 넘어가야 됩니다. 우리는 못 넘어가지만 성령께서 오게 되면 우리는 내가 내 결단력이나 결심으로는 못 넘어가는데 넘어가야 될 임무와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는 것, 이들이 천막장사하면서 고생 많이 했거든요. 에베소에서 3년 동안 같이 동역했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내 목숨을 위해서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는다는 이 말은 제발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흉내 내거나 모방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괜히 이런 것 모방하고 누구 숨겨주고 목숨 내놓고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자기자랑밖에 안됩니다. 그냥 막 사세요. 막 살아가는 그것이 순간순간 이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인생이 됨을, 주님이 나한테 삽입시켜 집어넣어서 주께서 조종하는, 그것을 피동적 자유라고 했지요, 주께서 강압적으로 “너는 이 땅에서 마음 놓고 막 살아라. 마음 놓고 살아.” 하면서 주님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는 것, 시키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보고 “야, 너는 살아가면서 네 목숨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바치네.”라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해줄 거예요. 자기는 막 사는데.

사도바울도 막 살았거든요. 성령 안에서. 말 주의해야 됩니다. 성령 안에서 막 살았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남편이 있어야 돼요. 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이미 용서가 가 돼버렸어요. 밥 먹고 반찬 먹고 그 다음에 후식 먹고, 이렇게 하지 마시고 이미 우리는 구원을 먹었어요. 구원을 먹고 난 뒤에 우리의 가는 길은 뭐냐 하면,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다른 분 인생 같아.’라는 느낌을 늘 받으셔야 돼요. 만약에 이게 내 인생 같으면 이 인생이 찢어지고 깨어지게 되면 우리는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감과 공포가 밀려오게 되면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나를 왜 이렇게 아프게 하고 내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이런 말밖에 안 나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마이너스 현실 속에서 계속 버티려는 것 밖에 안 된다니까요.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신부가 뭐라고요? 사랑을 받은 거예요. 우리는 이미 우리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주 예수라 하잖아요. 주님은 남편이고 우리는 주님의 신부라 그 말이지요. 신부가 되면 사랑이 흘러 들어오고 그 사랑은 이미 해결한 거예요. 죄 용서고 영생이고 남편이 알아서 이미 해결 다 지은 겁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이야기할게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제가 광주에 갔는데 광주의 용정 한우식당에 가니까 거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한우 암소가 아니면 백배 보상해드린다고 되어 있어요. 만약 이 식당에서 한우도 아닌데 한우라고 소비자를 속이면 백배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붙여 놓았어요. 교회도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말한 게 복음이 아니면 백배 천배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부활의 열매 그리고 사명 받은 자 그리고 이미 남편 되시는 분이 어떤 행동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일체 묻지 않고 그냥 이미 구원을 입에 넣어주게 되면 이미 후식부터 다 먹었어요.

과일부터 다 먹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라도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걱정과 두려움만 생기는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이상한? 지금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은 말로 설명이 안돼요. 말로 설명이 안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분명히 이게 걱정거리인데 걱정을 안해야 될 신분이고 이게 두려워야 될 문제인데, 울어야 될 문제인데 ①‘이게 내 인생인가, 주님의 인생이지.’라는 생각이 들고 ‘내가 믿어야 됩니까?’ 믿음 쥐고 ‘소망할게요.’ 소망 쥐는데 ②이 쥐는 것 자체가 말이 안돼.

손 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글쎄 사랑만 있으면, 남편만 있으면 우리는 들러붙으면 되거든요. 아담 있으면 하와는 그냥 붙어 있으면 된다 그 말이지요. 주님께서 오실 때 창세기부터 모든 말씀이 우리한테 다 쏟아 붓고 퍼부어진 겁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경 다시 봐라.”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는 주님 가신 좁은 길로 가는데 그 좁은 길 끝에만 영생이 있느니라. 마태복음 7장의 이야기를 이 말씀 가지고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적으로 따져볼 때에 정말 암담하고 난감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줄 압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버텨야 되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을 회복할 수 있는지, 대책 없는 세상, 마이너스 현실 속에서 플러스 되시는 주님의 성령의 사랑이 왔을 때 왜 선함이 아니고 착함이 아니라 왜 사랑인지를 왜 용서인지를 날마다 더욱더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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