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의 순환
2014년 7월 6일 본문 말씀: 로마서 16:9-16
(16: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6: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6: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6: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6: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6: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인간의 이름이란 분리해서 구분 짓기 위함으로 붙여지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이 섞이면 아니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름을 앞장 세워서 살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자기 몸말고 제 2의 자아가 이름을 앞장 세워 생겨나게 됩니다. 과거사가 뭉쳐져서 ‘자기 이름’의 내용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진리관과 세계관을 따로 갖게 마련입니다. 마치 이름이 각자 따로 갖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세계관도 각자 따로 간직하게 마련입니다. 마치 이름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최종 절대적 진리성을 본인들이 느끼기 나름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는, 오직 한 몸입니다. 한 몸된 자들만이 교회요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몸에도 손 따로 발 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손과 발을 한 몸되게 연결하는 그 관계망이 형성되게 마련입니다. 손이 발을 무시 못하고, 발이 손되기를 부러워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한 한 몸같은 교회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평안하라”고 하십니다. 알고 지내라는 이야기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알고 지내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요? 이것은 새로이 이익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너 중심의 세계는 날아갔다는 말입니다.
“평안하라”는 말씀은 이미 모든 일은 예수님 쪽에서 실시되고 있다는 선언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0: 9-14에 보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제들은 전도하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채비를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도의 생존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각자 따로 노는 형편에서 하나로 뭉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판 모르는 사람인 제자들마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임을 수용하는 바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 대한 기본적 생활 여건을 평안의 복음을 받는 쪽이 당연히 맡아야 될 일이 됩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묻은 먼저를 떨털듯이 털어버려라고 하셨는데 이는 복음이라는 것이 심판의 전제로 한 복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10:15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개성에 머물 것이 아니라 전혀 남인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 몸이 형성되는 그 관계망에 주목해야 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아빠”, 혹은 “엄마”라고 부릅니다. 이로서 아이는 그 집안의 관계망을 체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 안에서 문안하라”는 말씀은 각자의 실력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그 하나님의 작업이 어디서부터 개시되었는지를 같이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안의 복음을 전달하시면서 같이 유발되는 사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자 개인을 절대적 자아라고 여기는 그 점을 폭파하고 해체시키는 작업을 병행하십니다. 평생 오직 자기 자신만을 근사하게 가꾸는데 인간들은 몰두하기에, 인간들의 그 모든 행위란 곧 실수를 만회하려는 행위가 됩니다. 자기 인생에 난 흠집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들은 행위에 나서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절대자아성이 문제인 것을 아시고 그 점을 실수임을 알려주십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8:2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하라”는 말씀을 듣고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용서하기’에 나서려고 합니다. 자기로서는 일곱 번 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자부하고 그 옳음을 예수님에게 검증받으려고 했습니다.
타인을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겠다는 것은 같은 인간들에게 대단한 덕행으로 간주되겠지만 문제는 예수님 앞에서도 그것이 정당한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일곱번 용서하고 여덟 번째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바로 ‘용서 안해 준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로 인해 사람 앞에서 받은 평가와 예수님 앞에서 받는 평가가 참으로 차이난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죄가 아니되는 것도 예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한계가 드러내는 것이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평안의 작업성이라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10:23-27에 보면,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천국 갈 수 없다고 소식이 제자들이 놀라서 되묻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되질문 속에서, 제자들에게 있어 부자란 곧 하늘의 큰 구원과 복을 받은 표준치가 됨을 평소에 철석같이 믿고 왔다는 점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간결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구원이나 모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인간쪽에서 관여할 수 있는 내용는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자신들이 그토록 사수하려는 자아 중심의 절대자아적 세계관을 와르르 무너져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안의 삽입 작업은 이처럼 ‘자아 절대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작업을 병행하게 됩니다.
그냥 무너질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신 평안의 복음의 내용이 체험되도록 친히 주님께서 이끄시는 작업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실수 아닌 것으로 여긴 것조차 실수며, 죄 아니라는 여긴 것조차 죄입니다. 본인만 잘못 산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 짓는 일 밖에 없습니다.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 사적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죄 아래서 살게 하셨습니다. 살게 될 자는 오직 주 안에서 호명된 자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유사 평안의 복음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허무한 죄인임을 아는 깊은 체험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 14-07-07 19:51 | 92강-롬 16장9-16(안부의 순환)1407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6장 9절에서 16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6:9-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사람은 이름을 갖고 있고 그 이름이라 하는 것은 분리시켜서 구분하는 겁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름을 짓게 됩니다. 개도 이름이 있지요. 이름 하나에 개체가 하나 일대일로 붙는데 이렇게 각자 분리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예수라는 것이 각자 예수 다르고 각자 천국 다 달라버리면 그 중에 어느 한 사람의 천국으로 모아서 네가 진짜고 우리가 가짜였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네가 믿는 예수가 진짜고 내가 믿는 예수는 가짜다, 라고 모든 주도권을 너에게 양보한다는 식으로 나올 수가 없지요.
사람이 각각 타고난 역사가 있고 개성이 있으면 그 개성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역사가 비축되어서 현재 자기의 모든 것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개성이지요. 자기만의 그 성질을 뜯어보면 어릴 때부터의 가정환경을 비롯해서 주변 환경의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의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자기구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라 하는 것은 다양성이지 하나로 정할 수 없다는 문제성이 생겨버려요. 지 주먹 지가 흔드는 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람은 각자 각자가 이름이 있다. 이름은 분리해서 구분 짓기 위함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와 나는 다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흔히들 결혼식장에서 이런 말들을 하는데 저도 주례 좀 해 봤습니다만 이런 말은 입을 떼기가 힘들어요. 두 사람이 모여서 한 몸이 되었으니 여러분은 헤어지지 마세요, 하는 말. 저는 헤어지지 마세요, 같은 말은 한 적이 없는데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고 무책임한 겁니까?
저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 나무젓가락을 유심히 봅니다. 이게 하나인지 둘인지 모르겠어요. 짜장면 먹을 때 양쪽으로 갈라지라고 가운데 길게 홈을 파 놓았거든요. 오른쪽으로 비비고 오른 쪽으로 비비고. 일 더하고 일이 일이 되어야 할 부부가 계속해서 줄 창 2로 계속 갑니다. 언제든지 딱 떼면 떼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각자 추진된 역사대로 그냥 밀려가는 거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교회란 뭐냐, 한 몸을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까? 부부도 한 마음이 안되는데 생판 남인데 그 교회가 한 몸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이러면서 찬송가 같이 부른다고 그게 한 몸 되는 거예요?
언젠가 우리교회에서 한 번 실천해 봤잖아요. “당신을 나는 개똥으로 여깁니다.” 서로 인사하는데 “나는 앞으로 당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하자고 했잖아요. “형제를 사랑합니다.”하지 말고 반대로 해보라는 거지요. 속이 다 시원하다니까요? 이게 교회의 진면목입니다. 어디서 자꾸 위장을 하려고?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한 몸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한 몸이 되겠어요? 돈 문제 들어가면 다 깨져버리는데 안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고 지체인 너희들이 구원받는다고 천국 가는 조건이 제시되어 있고 현실적인 교회에서는 같은 집안 식구라도 한 몸이 안 되는데 옆에 있는 사람과 한 몸이라는 이것이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요? 이게 안 되는데. 해결책이 없습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없겠어요?
본문 9절에 보면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 여기서 우르바노와 스다구가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인데 결국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하나 될 수 있는 그 방식, 그 비법이 뭔지가 궁금한 겁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분명히 다른 몸이라고 인정하고 각자 자기 이름을 호칭을 불러대면서 너희들이 한 몸이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이 썼던 그 한 몸 되는 비결 방법이 뭐냐? 그것은 주 안에서 문안하라는 겁니다. 안부를 전해라, 또는 알고 지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지내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알고 지낼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것도 국경을 넘어서서 서로 알고 지낼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문안하라는 이 말은 계속해서 나와요. 10절 끝에도 문안하라. 11절 끝에도 문안하라. 꼭 판소리 추임새 넣는 것 같아요. 문안하라, 문안하라, 안 부 전해라, 잘 있느냐, 오겡키데스카, 뭐 이런 식인가요? 거기 잘 계십니까, 하는 식으로 계속 문안하라고 하는데 이게 어떻게 각자 따로 노는 개인을 한 몸으로 묶을 수 있는 비책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이 그냥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식사하셨어요, 하고 묻는 것 하고 주 안에서 문안하는 것 하고 달라요.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이 문안하라는 말을 아주 특별하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할 때는 그 상대자가 안부를 받을만한 상대자가 아니거든 먼지 털고 소금 뿌리는 식으로 돌아서라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서 출발해서 나오는 안부는 낭비해서 허투루 될 용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낭비용이 아니라는 거지요. 낭비용이 아니고 주께서 한 안부는 반드시 그 안부가 도달될 때 그리스도와 하나 된 그 효과를 능력으로 발휘할 수 있는 안부이어야 하는 겁니다.
아무나 안부를 받을만한 자격이 못 된다는 거예요. 안부를 받을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택한 백성 외에는 주의 안부를 소지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마태복음 10장의 대목을 읽어보게 되면 “너희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벌써 제자들보고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뭐 먹고 살라고요? 안부가 해결해 줍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주 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라고 묻는 순간 그 안부를 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도를 영접해야 할 책무를 동시에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쪽은 식사를 대접하고 사도는 식사를 대접받음으로써 우리는 낯선 패밀리, 세상에 육적으로 조성된 가족, 결혼으로 맺은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맺어준 새로운 가족으로 우리는 형성되어 있습니다, 라고 선포하는 증거물이 되는 거예요. 제가 울산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십계명 강의를 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십계명, 율법이라는 게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느냐 하면, 방울 하나를 건드리면 온 방울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전체 율법 하나하나가 다 방울이라면 이쪽 것을 건드렸는데 저쪽에 건드리지 않은 것을 다 울리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된다는 말이지요.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의 완성이 사랑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형제, 같은 몸에서는 그것을 법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받은 사랑이 소용없는 거네.”라고 나오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다 같이 생겨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모를 섬기라는 제 5계명을 어겼다면 우리 생각에는 계명이 열 가지 계명이기 때문에 5계명 외에 다른 계명은 안 건드린 것처럼 여겨지지만 율법이 완성차원에서 보게 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탐내는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계명을 지킬 때에 그 계명과 옆에 있는 계명이 따로 주어진 계명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눈을 건드리는 사람은 비록 눈만 건드려도 그 몸 안에 있는 발가락을 건드린 것과 동일하게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사람은 개체로 되어 있지만, 개체가 이름으로 개체처럼 느껴지지만 개체와 개체를 연결하는 연결망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고 주시한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어린애는 부모를 대할 때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이름을 못 부릅니다.
아빠를 아빠라고 하고 엄마를 엄마라고 불러요. 그런데 엄마 아빠 이것은 개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엄마 아빠와의 관계에 주목해서 그 관계를 보여주는 용어가 아빠 엄마에요. 만약에 아빠 엄마의 이름을 부르면 이것은 관계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강 동희씨!” 이것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자기 아빠를 부를 때는 관계없는 거예요. 그런데 강 동희씨에서 아빠라고 부를 때 너와 나가 따로가 아니라는 관계를 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각자의 이름이 갖고 있던 한계를 이미 벗어난 능력을 너희와 너희 사이를 이었다는 겁니다. 그 이어짐에 주목하라는 거예요. 그 이어짐에 주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보내면서 평안하냐, 잘 있느냐, 라고 마태복음 10장에서 사도들에게 다른 것을 지시한 것이 아니고 그걸 지시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형성된 그 관계가 이제는 온천지에 택한 백성을 향하여 촉수처럼 퍼져나가는 작용을 너희를 앞장세워서 실시하겠다는 겁니다.
네가 새삼스럽게 회원모집하지 말고, 네 힘으로 간다면 나의 사조직이 되면 이것은 안 되잖아요. 이것은 구원 파잖아요. 주님의 이름으로 일했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나섰던 중간의 그 사람 이름은 계속해서 부정당하고 빠져버려야 돼요. 그저 주의 이름 같으면 그 주님의 이름이 하시는 일에서 비켜야 돼요. 주님이 일하시는데 가로막지 말고 쑥 비켜서 그 사람과 주님을 바로 연결시켜줘야 그 사람은 그리스도 몸의 지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가로막지 말고 “믿습니까!” 목에 힘주고 말하지 말고 슬쩍 피해야 된다니까요?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직접 여러분을 구원했습니다. 교회 오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할 때 평안, 평화라는 말을 왜 구태여 언급했느냐? 마태복음 10장 13절, 14절에서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해 놓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무엇을 전제로 한 평안인가? 이 세상의 멸망, 심판을 전제로 했을 때 주님의 평안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각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설명 드리면,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냥 인간적인 안부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지요? 각자 개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분리 시켜서 구분 짓는 것이 이름이라 했습니다. 분리하고 구분짓는다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 개성 있는, 숫자로 치면 1, 1, 1, 1, 이 되지요. 우리는 그것을 모아서 열 명, 혹은 이십 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열 명, 이십 명은 전혀 하늘나라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거든요. 한 명이 되었든 열명이 되었든 한 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한 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나라는 1이라는 숫자보다 생판 모르는 너와 나를 이어주는 관계망에 시선을 두고 거기에 주목을 할 때 그 사람은 곧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그 평안이 돈 보다 더 귀한가? 보석보다 더 귀한가? 이렇게 될 때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멸망의 때가 오기 때문에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두고 평안이라는 말의 새로운 의미가 부각된다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데 줬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 평안이 왜 중요한지를 감을 못 잡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이 땅에서 실패를 안 해봤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실패를 만회하려는 데서 나오는 행동들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실패들이 있어요. 도박에 빠지는 것도 실패했기에 도박에 빠지는 거지요. 뭔가 명예회복하려고.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평안을 전할 때는 그냥 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패를 동반해서 전합니다. 한쪽은 파고 한쪽은 심는 겁니다.
감자를 심을 때 흙을 파고 거기에 심잖아요. 감자뿐만 아니고 모든 밭작물이 그렇지 않습니까? 팔 때 아파요. 정말 아파요. 왜 아픈가? 인간은 자기를 순수 1, 절대 1로 최종적 1,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그 1로 꼭 쥐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외부에서 파헤치니까 그게 얼마나 아파요. 사람들이 그동안 살아온 것이 뭐냐 하면,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 만 위해서 산 그것을 자신의 허락도 없이 외부에서 강제로 해체시키고 그것을 부숴버릴 때 얼마나 아픕니까? 공들여서 만든 내 인생인데. 먹을 것 안 먹고 정말 쓸 것도 안 쓰면서 이 정도는 되어야 나라고 여겼던 그 공든 탑이 그야말로 구멍이 나서 깨질 때 얼마나 아파요.
그것이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입니다.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렇게 해서 뭔가 주님께서 해체작업을 하는 겁니다. 네가 네 가족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주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는데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해체를 동반해서 주시는 겁니다. 왜 해체되어야 하느냐 하면, 주님만이 1인데 우리는 각자 자기를 독자적으로 1로 간주하면 성냥개비, 또는 이쑤시개처럼 돌아다니는 거예요. 천명이 모여도 하나 되지 않습니다. 그냥 천개의 이쑤시개의 하나에요. 찔리면 아파요. 사람은 남이 아파도 괜찮아요. 자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거침없이 남에게 싫은 소리 하고 욕하고 찔러댑니다. 참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절대자아,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님만 섬겨야 될 천국에 넣어준다는 것은 정말 가당치도 않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반성을 해요? 절의 중 보세요. 반성을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반성을 해도 소용없어요. 반성을 하면 반성을 하는 그 결과가 더 단단해진, 더 완벽해진 자아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은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깨부수는 공작을 계속 해 나가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정도는 봤을 거예요. 구약은 너무 기니까 신약의 마태복음부터 읽어보지요. 구약도 읽어가다가는 레위기에서는 지겨워서 못보고 그냥 안보고 마는데 마태복음 1장 족보 지나고 예수님 이야기 나오면 이해될 것 같지요? 하지만 그 모든 이해는 나를 깨트리는, 이 절대자아를 깨트리는 작업이라는 것을 성령 받아야 비로소 이해가 생기는 겁니다.
그 중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3절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자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고 할 때 그 말은 결국 뭘 의미합니까? 우리가 못 들어간다는 의미가 되잖아요.
같은 말이지요. 제자들이 부자가 천국 못 간다고 하니까 잘됐다고 나온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놀란 거예요. 그것은 평소에 제자들이 부자 되는 것이 주님의 복 받은 최종 모델이라고 흠모해왔다는 그 속마음이 들통 난 겁니다. 나도 예수 믿어서 부자처럼 살고 싶다는 그것이 들통 난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이야기 하는데 찔리기는 본인들이 찔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했어요. 그것도 그냥 근심한 것이 아니고 심히 근심했고 심히 놀라서 하는 말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합니다. 상당히 뭔가 제자들이 찔리니까 그 찔림을 감추기 위해서 오버액션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어머니, 여기 놓인 행주 만지지 마세요.” 라고 하면 행주 안 만지면 되는데 “나가 죽어버릴까?” 하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뭔가 오버액션 하고 있는 거예요.
“부자가 천국 못 간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제자들이 오버액션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주님의 말씀이 명언입니다. 명언이라는 말 자체도 부끄러운 말인데 표현이 안돼요. “사람은 할 수 없다.” 오늘 이 본문도 내내 간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간직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지옥 가는 집단이에요. 사람은 할 수 없다,를 간직해 주셔야 돼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만 안다면 “목사님, 어떻게 살까요?”라는 질문 자체도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 믿는데 어떻게 살까요, 라는 그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하나님께서 살게 하실 때에 “저라면 이런 식으로 천국 안 갑니다.”라고 반응만 나타내시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로또 당첨되어서 한 40억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괜히 목사가 기분이 좋아져요. 십일조 얼마 낼까 계산하면서. 누가 만약 40억 받게 되면 주님 앞에 이렇게 하세요. “나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천국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이러면 그 사람은 부자라도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냐 가난하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이 결론이 도출되어야 돼요. 우리 인생속에서, 하루하루 삶 속에서 절대로 내 힘으로는 구원되지 못한다, 는 이것이 늘상 우리에게서 도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그러면 너는 어디 가는데?” 하면 “주께서 하셔서 천국가게 되었어용~.”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 천국가게 된 비법과 능력은 주께서 주신 평안 속에 있습니다. 네가 평안 하냐, 잘 있느냐, 오겡끼데스카, 그 속에 주께서 “네 손 떼라. 내가 다 할게. 어디서 어줍지 않은 솜씨 부리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작업 속에서 나라는 절대자, 나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밖에 모르는 모든 행동들이 내가 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행동으로 나온다고 했잖아요. 그 손을 떼게 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그것이 그냥 실수가 아니고 말씀에 입각해서 실수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18장 2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남이 나에게 일곱 번 죄를 지었는데 반복해서 그런 죄를 지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주면 됩니까?”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한 거예요. 베드로는 실수한 겁니다.
베드로가 왜 실수했는가? 실수를 해서 절대자아가 허물어져야 비로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그 사랑으로만 하늘나라 넣어줬다는 그 과정을 밟아야 되기에 베드로는 그 실수를 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도 몰랐지요. 자기는 잘한다는 식으로 그 실수를 저지른 거예요. “일곱 번 죄지을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나름대로 용서 많이 한 건데 그 정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백구십 번을 용서해주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오기가 나서 사백구십 번을 용서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는 490번의 490번을 해라, 이렇게 나올 거예요. 어떤 사람이 죄지었는데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해줄까, 말은 이렇게 쉽게 하는데 제가 한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항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거예요. 글자를 써서 “사랑해.” 그냥 쓴 글자가 아니고 꽃으로 쓴 글자, 꽃으로 장식한 “사랑해” 해놓고 목걸이도 준비해놓고 프로포즈를 한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서. 그런데 그 남자가 바람까지는 아니어도 갈 뻔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걸 들킨 전력이 있어요. 그러니 용서가 안 될 것 같아서 돌아섰는데 친구가 다리 놔서 옛날 프로포즈했던 그 때 그 방식으로 또 공항에서 꽃으로 그때는 “다시 시작하렵니까?”라고 하니 그 여자가 마음을 풀고 다시 받아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두 번째거든요. 또 바람을 피웠습니다. 또 사랑해, 세 번째라는 말이지요. 세상에 어느 여자가 일곱 번까지 용서할 여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지가 신사임당입니까? 지가 육영수에요? 그런 여자 없거든요. 베드로는 자기 딴엔 ‘성질 다 죽었다.’ 하고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지요?”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490번 용서하라고 언급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네가 하는 그 모든 용서조차 인간이 남에게 해준 용서조차 실패요 실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인간이 실수한 것이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 전체가 실수 외에는 할 짓이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인간이. 점잖게 술 마시고 있어도 실수에요. 인간은 죄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여섯 번 용서한 것도 죄고 일곱 번 용서한 것도 죄고 칠칠은 사십구, 사백구십이 되지요, 사백팔십 아홉 번 용서한 것도 죄가 될 줄을 사백팔십 아홉 번 용서할 때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예수님 앞에 서지 아니하면 그 죄를 모른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똑같은 일자, 이쑤시개 같은 나도 1, 너도 1, 1과 1 앞에 서서 일곱 번 용서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놀랄 겁니다. “당신은 정말 놀랍군요. 당신은 경건하군요. 당신은 정말 성화되었군요. 천국은 당신의 것입니다.” 하고 나올 것인데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예수님한테 했다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칭찬이 늘어질 줄 알았지요? 드디어 예수님한테는 그 자체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는 자체가 미처 네가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숨어 있는 근원적인 죄라고 지적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의외로 간단해져요. 문제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습니까? 각자 따로 노는데 어떻게 이 따로 노는 경계선이 철폐되고 주님의 사랑의 관계망에 의해서 구원받습니까?” 그 점이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문제는 간단해요. 왜 간단하냐 하면, 베르로로 하여금 “제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께서 그 전에 베드로가 몰랐던 멘트, 언어를 날렸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베드로가 나름대로 말씀을 안다고 여겼는데 자기가 알지 못한 사랑의 더 깊은 말을 들었을 때에 졸지에 자기는 초래해지지요.
초라해지게 되면 인간은 그것을 초라한데서 만회하려고 행동하기 때문에 초라한데서 벗어나서 멋있는 사람으로 등장하려고 그 말을 시도한 거예요. 주께서 용서하라고 하니까 “주께서 용서하래. 너 몇 번 할래?” “난 두 번까지만 할래. 세 번은 도저히 못 참아.” “그래? 예수님, 저는 일곱 번입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받는 문제가 의외로 간단한 것이 뭐냐 하면, 그냥 여러분 성질대로 사세요. 또 나온다. 매주 설교시간마다 막 살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때가 없는데 그냥 사세요. 사시면 여러분들로 하여금 뭔가 내가 산다는 자체가 나의 일방적인 생각,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깨닫게 되는 어떤 낯선 사태들이 일어나요. 나를 잘난 존재로 철썩같이 믿었던 그것을 무너뜨리는 말씀의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경험이 안 되어서 문제에요. 그런데 경험문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시켜줄 문제지 우리가 일부러 나설 문제는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겠다고 기도원에 가게 되면 기도원은 우리가 이미 예상한 곳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를 더욱더 잘난 체 하게하기에 발길을 끊어야 되겠지요. 항상 낯선 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낯선 사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떤 것인가? 간단합니다. “저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저 나름대로 바르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우기면 되는 거예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되지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여, 저로서는 할 도리 다 했습니다. 더 이상 못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를 우기시되 플러스알파, 뭘 하나 추가하세요. 이렇게 우기는 것도 좀 있다 깨질 것 같아, 이걸 가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잘난 존재로 만드는 세상이고 우리는 거기에 순응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느 날 시내에서 짬뽕을 하나 먹는데 삽십 대 중반쯤 되는 여자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얼마나 시끄러운지 짜장면 시켜놓고 먹지도 않고 떠들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외선 A와 자외선 B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자외선 A는 해롭지만 자외선 B는 좋다는 거예요. 지금 아토피 치료기계를 팔고 있었던 거예요. 렌트 비용이 한 달에 20만원인가 하는데 그게 당뇨치료에도 특효가 있다는 거예요. 어찌나 유창하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는지. 또 어느 곳에 가니까 떨기나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출애굽기의 시내산이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그 시내산이 아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데 이스라엘은 엉터리 산을 시내산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그 내용이 책으로 나와서 유행하면서 많이 팔린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는데 쉴새 없이 이야기를 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만 생각해 보니 복음도 아닌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유창하게 하는지. 그런데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면 유구무언이에요.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도 묵묵부답이에요. “너 복음 아는 교회 다닌다면서?” “응” “복음이 뭔데?” 아무 할 말이 없어요. 기껏 하는 말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러니까 세상에 떠도는 대단한 말들, 교회 자랑, 목사가 무슨 대학을 나오고 이렇게 할 말이 많은데 복음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 못하잖아요.
평소에는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잘남을 고수하게 되는데 거기에 흠집이 있을 때 그걸 수리를 하잖아요. 그 흠집을 만회하기 위해서 온 신경을 써요. 내 인생의 흠집 지우기, 여기에 전념하다 보니 자기 잘남을 고수할 때는 그렇게도 말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 언어입니다. 사도바울이 주님 만났을 때에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사도바울은 자기의 절대자아가 허물어지는 겁니다. 그게 이미 주께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그 마가복음의 말씀을 이제는 사도바울을 가지고 실습에 나서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가면 갈수록 매도 맞고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로마 가면서도 죽을뻔 하지요. 그 때 천사가 와서 두려워 말라고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로마에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하고요.
실컷 폭풍이 일어나서 사람을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너는 반드시 살아서 로마에 간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에 본인은 이 모든 일이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으로 간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요나서를 보세요. 요나에 보면 니느웨의 사람들이 40일 지나서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요나를 보냈지요? 요나를 보내서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했을 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예상 밖의 일이 뭐냐 하면, 40일 만에 멸망한다고 해서 그걸 예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개나 소까지 회개를 해버리니까 누가 삐졌나 하면 요나가 삐진 거예요. 요나가 “나 자살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는 주님하고 같이 자존심 상해서 일 못합니다.” 한 거예요. 참 요나도 웃기지요? 언제 네 가치를 보고 일 안했거든요. 주께서 우리 가치를 보고 일하지 않습니다. 그냥 놀고 있는 자를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요. 괜히 자기를 절대자로 주장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없어요. 그걸 사적존재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적존재로 보지만 주께서는 유적존재,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유적이라는 것은 종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지 않았어요. 인간들 속에 인간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죄 아래 다 죽여 버린 겁니다. 그러니 집단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성경내용인데 그게 성경의 표현인데 개인적으로 나와서 나 살았다고 하면 이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고 이것은 사적존재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먹히지 않습니다.
아일랜드에 수도원이 있는데 그 수도원에 역병이 들었을 때에 사람들이 전염될까 싶어서 주변 사람들을 산채로 다 한꺼번에 수도원에 다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길가에 시커멓고 기어 나온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뭐냐, 살아 있으니까 시체들을 비집고 본능적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온 거예요. 역병의 시절에 죽었다고 생각해서 시체로 처리했는데 살아 있으니 나름대로 본성대로 나왔을 때 그야말로 살아 있는 좀비 같고 귀신같은 존재들이잖아요.
주님 보시기에 이 세상 자체가 소돔과 고모라 역병이 돌았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기어 나와서 좀비처럼 돌아다니니 이게 산겁니까, 죽은 겁니까? 다 죽은 자예요. 이 죽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 죽은 자를 주님께서 “잘 있나? 평안하냐?” 이 평안을 주셔서 죽은 자를 하늘나라 산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그 좀비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내는 거예요. 좀비라고 하면 이 본문의 사람들이 기분 되게 나쁠 거 같은데, 여기 나오는 우르바노, 스다구, 헤로디아, 이런 사람들이 다 좀비들이고 거기에 우리까지 첨가하면 멋지지요. 바드로바와 허마, 여기 루포라는 사람은 얼떨결에 예수님 대신 십자가 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랐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로 나오는데 나중에 신자가 된 모양입니다. 이들이 역병 도는데서 기어 나온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작업이 걸린 겁니다. 주님의 구원의 전력이 투입된 거예요. “너희들이 서로 모르는 사람이지? 서로 인사해라. 문안해라. 너희들은 선택되었고 뽑혀 나온 사람들이다.” 그렇게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느니라. 사람끼리 “여러분,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세요.” 제발 이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목사 너도 안 돼. 사람이 자기 빼놓고 사랑할 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요? 베드로가 용서되던가요? 주님 앞에서 완전히 박살났지요? 우리의 사랑도 주님 앞에 완전히 박살나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런 변명뿐이지만 거기에 뭔가 하나 보태세요. 내가 이렇게 잘난 척을 해도 언젠가는 주께서 와장창 깨주실 것이다. 낯선 사건을 통해서 내가 애초부터 죽은 자고 지금도 죽은 자인데 주께서 주님 앞에 세워서 주님의 용서로,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사랑 안 되는 사람도 사랑이 되게끔 조치를 해주시는 그 능력이 나로 하여금 또 다시 나를 왕창 깨는 능력으로 찾아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고백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끝에서 제가 할 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경험을 못한 거예요. 내가 깨지는 경험을 못한 거지요. 죽을 때 깨져서 경험할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주셨는데 이 잘난 체가, 이 잘난 체 하는 역병이 돌아서면 도지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사랑답게 모르고 복음 전하라 해도 유구무언이고, 아토피 기계나 팔라고 하면 좔좔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사는 대로 살지요 뭐.”
식사 당번 하시는 김 권사님이 하신 말씀 정말 맘에 들어요. “권사님, 우에 삽니까?” “그냥 사는 대로 살지요.” 맘에 안 든다는 이야기거든요. 어쩌겠어요? 그냥 사는 대로 살지요. 주께서 그렇게 살게 하셨지요. 나는 주께서 만든 인생에 그냥 결과물이지요. 주께서 시작한 일을 주께서 마감하실 겁니다. 믿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안하다는 말이 그냥 안부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평안 속에 주 안에서 이루어진 평안 그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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