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강-롬 16장 17-20(사단의 활동)1407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6장 17절에서 20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6:17-20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보통 대화할 때 마귀 들어가면 분위기 경직 됩니다. 사탄 들어가면 싸늘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하지 말고 긍정적사고 방식으로 해야 이 땅에서 시달리는 영혼들이 치유가 된다는 것이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상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기어이 사단이야기, 악마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사탄 이야기를 해서 관계가 다 산산조각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사탄이야기를 합니까? 이 세상은 사탄이야기가 들어가면 소통이 안 됩니다.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굉장히 싫어하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사탄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가 이미 사람들, 이 세상 자체가 사탄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사탄이라는 용어를 여기에 집어넣습니다. 듣기 싫으면 말고, 이런 식이라. 아주 배짱입니다. 사탄이야기를 할 테니 듣기 싫으면 말아라, 하는 것이 사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탄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한 번 들어보자고 하기 이전에 평소에 왜 우리는 사탄이 개입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그 의도가 뭐냐, 그 전제가 뭐냐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지요.
이 세상에는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의 대칭구조입니다. 그것을 위치대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치, 내가 여기 있고 너는 나의 맞은편에 있고, 나는 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으며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겠는가, 도움을 준다면 나는 당신을 사귈 용의가 있고 도움 안 된다면 나는 당신에게서 얼굴을 돌리겠다, 항상 늘 그런 식으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살아 왔습니다. 그것을 위치대칭이라 할 수 있는데 사탄을 거론하는 것은 위치대칭이 아니고 위상대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쪽과 위의 대칭이죠.
위가 있다는 것은 위라는 말을 쓰기 전까지는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들만의 세계이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만의 세상이라고 몰아세워버리면 그렇게 몰아세운데 빈자리가 생길 겁니다. 그 빈자리가 하늘나라 위의 나라가 돼요. 성경말씀은 인간들끼리, 우리들끼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끼리 이것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아래쪽에서 한구석으로 몰아세워버리고 그 빈구석, 저는 그 빈구석을 여분의 자리라고 하는데 그 여분의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하늘의 소식, 하늘의 내용을 배치를 해 버려요.
그리되면 아래쪽과 위가 대칭이 되어버립니다. 이걸 어렵게 해서 위상대칭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위상대칭이 되어버리면 인간들끼리 좋은 게 좋다는 이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이 나요. “좋은 게 좋지.” 이런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우리의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번 월드컵에서 일본이 4대 1로 졌잖아요. 우리가 소원하니 일본이 깨졌잖아요. 꿈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들끼리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너와 나만 있을 때는 그 꿈을 이룬 것 같은데, 위치대칭에서는 꿈을 이룬 것 같은데 위상대칭으로 가버리면 그 꿈은 개꿈이 되는 거지요.
위에서 볼 때 네가 꿈꾸고 네가 계획했던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먹혀 들어가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밀고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어떤 부담을 느끼게 되느냐 하면,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아는 것만 알아도 충분히 살수 있다는 것이 정립이 되었는데 하늘의 소식이 들려오면서부터 하늘의 소식까지 아울러 포함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인생 헛산 게 되어버립니다. 왜 길거리에 성경 복음 전하면 왜 사람들이 안 듣느냐 하면, 그 이야기가 이 지상에 있는 인간세계를 한곳으로 몰아붙이는 내용이고 하늘이 침투하는 내용이기에 우리는 거부감을 유발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7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출생할 때 이야기입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자체가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지금 앉아 있다는 겁니다. 옛날 선거유세 할 때 후보자들이 단상에서 연설하면 듣는 사람들은 그냥 땅바닥에 앉아 있었잖아요. 이러한 모습으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우리가 그냥 앉아 있는데 예수님이 태양이 되셔서, 빛이 되셔서 우리에게 비추시고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상대칭구조에서 위의 것이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구잡이로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어둠과 죽음과 그늘임을 증명해주는 일들이다, 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에 또 이런 내용 나옵니다. 노아가 홍수가 있기 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어요. 먹는 게 잘못입니까? 마시는 것이 잘못이에요? 11월에 결혼하실 분도 있는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입니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잖아요. 이게 어두움의 짓이고 악한 그늘에서 유발된 짓이라는 것을 누가 그것에 대해서 동의하겠습니까? 축복받고 행복하고, 축하합니다, 할 일이지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부동산 거래하고, 이것이 나쁜 짓이라고 아무도 동의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노아의 홍수가 오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한 그것이 노아의 홍수를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그 안에서 방출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부동산 거래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행동이 노아의 홍수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일은 되지 못하더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복음 1장에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아래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너 나 없이 전부 다 죽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뜻이거든요. 이러한 내용들이 성경에 있어요. 우리는 여기서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우리를 만들어놓았으면 행복을 보장해줘야지 왜 우리를 악하고 어두운 그늘에 앉도록 우리를 무능력자처럼 방치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대들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사탄의 침투를 고려하지 않고 생각하고 있다.” 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너와 나만 있으면 돼요. 같은 인간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면 그것이 행복한 사회라고 우리는 장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끼리 이야기할 때는 사탄이라는 말을 빼고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에티켓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럴 줄 알고 사탄이야기를 집어넣으니까 우리로서는 사탄이라는 것이 별로 좋은 뉘앙스가 아니잖아요. 착한 나와 사탄과 무슨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나같이 착한 사람한테는 사탄이라는 용어를 나한테는 구태여 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이라는 정보는 나는 몰라도 돼요. 왜, 나는 착하니까.” 우리는 자꾸 착한 쪽으로 자기를 세우고 싶은데 사탄이야기를 왜 나에게 해야 되느냐, 그게 의아스럽다 그 말이지요.
그것은 사탄문제, 이런 위상대칭문제가 인간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그 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끼리, 눈에 보이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그 전부터 이미 사탄의 이야기가 시작이 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사탄을 집어넣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네가 아무리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한다 할지라도 이 죽음과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네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러면 우리가 무능하다는 말입니까?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사탄과 한패라는 뜻이에요. 단순히 무능하다, 소극적으로 우리는 내 힘으로 구원 못 받아, 이게 아니고! 내 힘으로 구원 못 받는데 주님 오시니까 믿으면 구원 받겠구나, 이것도 사탄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교회에서 말하는 그것도 사탄의 생각이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굉장히 소극적이에요.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율법에 의해서 죄지은 것 밖에 없으니까 나 같은 인간은 참 선한 게 없었는데 주께서 십자가 피 주시면 그 피로 용서받고 구원받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앞으로 주님 잘 섬기고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서 주님께 영광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마음 자세를 갖추는 그 자체가 사탄의 생각이라니까요 그게.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탄과 한패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을 안 하고 있어요. 제가 생일이 언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일이 6월 달이라는 것만 말하는데 제가 1953년생이거든요. 1953년생, 1953년에 태어났기에 때문에 1953년 이전의 것을 저는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꾸 생각하기를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문제는 몰라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위상대칭에 있어서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건을 인간에게 덤터기로 뒤집어씌운 거예요.
덤터기로 뒤집어씌우고 난 뒤에 인간이 시작되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인간이 되어서 ‘내가 누구지? 인간은 뭐지?’ 라고 알려면 인간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사람은 자기가 존재하는 것부터 관심이 있지 내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렇게 무관심한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입니다. 불교는 생로병사잖아요. 생로병사가 고통에서 왔다. 고통을 없애려면 자아 때문이다. 자아를 없애버리면 고통이 같이 날아간다. 이게 불교논리다 그 말이지요. 보세요. 생로병사가 어디서 생깁니까? 일단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난 뒤에 생로병사잖아요. 그러면 생로병사가 있기 그 전에 뭐가 있는가? 그것은 부처도 모르지요. 부처도 모른다는 말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한국에서 간 교회 청년들이 인도의 사원에 가서 찬송가를 불렀다는 겁니다. 아주 싸가지 없는 짓을 했어요. 거기는 예배당이 아니고 절이잖아요. 절에 놓인 돌 하나하나 다 돈이 들어간 거예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항상 출발을 돈으로부터 하는 겁니다. 아직 철없는 청년이라서 그걸 몰랐던 거예요. 중들이 불교의 진리를 위해서 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절을 짓기 위해서 투자된 돈을 보고 절을 지키는 거예요. 예배당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진리가 아니고 자기 돈이 투자된 예배당이 진리가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바르게 삽시다, 주의 영광을 돌립시다, 전부 다 개똥같은 소리에요. 그건 다 교회에 돈 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남의 교회에 돈 내지 말고 우리 교회에 돈 내라는 뜻이에요.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게 돈으로 출발한다는 말이지요. 돈이 있어야 내가 사니까. 결국 그 사고방식은 뭐냐, 이것은 위치대칭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고 네가 거기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행하면 이 땅에서 인간답고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 전부가 이 땅에서는 돈이 있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지막이 되면 “얼마면 되겠어요?” 얼마를 주면 너를 사랑하기를 허락하느냐, 그런 뜻이라는 거지요. “얼마면 되겠어요?”
성경은 그런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사탄이 나왔잖아요. 16장에 사탄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사탄이 뭐냐고 할 때 우리 인간은 사탄이 뭐냐를 알아볼 위치에 있지 않아요. 우리는 그럴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탄과 독립되어 있으면 사탄이 뭐냐를 우리가 밝힐 수가 있는데 사탄과 단짝이 되어 있는 입장에서 사탄이 뭐냐를 말하게 되면 이것은 나에게서 돈이 빠져나가게 하는 것은 무조건 사탄이고 나에게 돈이라는 축복을 주면 무조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장에서 돈 빠져나가면 이것은 하나님이 벌주는 것이고 통장에 돈 들어오면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렇게 이해한다 그 말이지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18절에 나와요.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자기의 배, 영어로 하면 body, 자기 배만 섬긴다 그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 얼마나 분위기 썰렁하겠습니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을 설교해야지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자기의 배만 섬기고, 자기 살 궁리만 챙기는데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뭐냐 이거지요.
예수님은 자기의 배만 섬기는데 필요한 상품이 되지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배만 섬긴다고 지금 사도바울이 지적 질을 했는데 이 지적 질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사도바울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그런 지적 질을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부자 될 수 있어요?” 지금 그 소리를 들으려고 교회 왔는데 거기 관한 이야기로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우리가 정작 듣고 싶은 것을 듣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사탄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아요. 바로 이런 이야기, 부자 되는 비법을 듣고 싶어서 온 거예요.
기도하면 부자 된다, 교회충성하면 부자 된다, 목사 섬기면 부자 된다, 그런 소리가 듣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그 당시 가르치는 엉터리 설교자뿐만 아니고 그 설교자에게 가는 그 교인들도 자기 배만, 각자 자기신상만 챙기고 자기 몸만 챙기면 그걸로 만사형통이고 복이라고 여겼던 그 때의 교회분위기를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부정적 발언이에요. 긍정적이고 적극적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굉장히 부정적으로 설교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설교자가 이렇게 비판적으로 설교할까, 이렇게 하는 것이 힘들어요.
그러면 우리가 이 사탄을 상대할 입장이 못 된다면 사탄이 처음 출현했던 그 자리로 가야지요. 그 자리가 뭐냐, 창세기 2장입니다. 창세기 2장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아담보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면 말, 우리가 사용하는 이 말이라는 것은 대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말을 붙이는 이것이 옳은가, 아니면 말이 먼저 있고 그 말에 따라서 대상이 거기서 솟구쳐서 나오고 방출되는가, 그 문제가 있는 겁니다.
사탄은 모든 것은 행동이 먼저 있고 그 뒤에 붙이는 것이 말이라고 주장하는 것, 이게 사탄이 등장하면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쉽게 말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로마서 전체 내용이 그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팽배했는데 그것이 사탄의 본색, 사탄이 이야기하고 싶고 사탄이 주장하고 싶은 그 내용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아담이 대상을 보고 말을 붙입니다. 그러면 대상과 말이 일대일 대응이 되지요. 여기 마이크가 있다. 마이크라는 말은 마이크라는 사물이 먼저 있기에 뒤늦게 붙인 표현이 ‘마이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대상이 먼저 있고 뒤늦게 그 대상에 대응하는 말을 관리하고 요리하고 행동하고 그걸 지켜내면 제2, 제3의 마이크를 구체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이것은 지시고 명령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아담이 사물에 이름을 짓기 이전에 이미 추가적으로 부과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행동을 하게 되면 나는 살고 그냥 죽치고 있으면 굶어죽는다. 따라서 내가 행동에 나서서, 노동이죠, 행동인 그 노동을 해서 대가를 얻어서 나를 살린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요 상식이요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노동하는 그 인간이 왜 죽느냐 하는 문제가 풀리지를 않아요.
쉽게 가겠습니다. 성경에 죄를 지으면 죽는다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이걸 한 번 따져 본적이 있습니까? 왜 죄를 지으면 죽습니까? 도대체 죄 지으면 죽는다는 이 일방적 주장은 누가 이야기한 거예요? 여러분이 이야기한 거예요? 할아버지가 이야기한 거예요? 어떤 목사가? 누가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이 말을 우리한테 덤터기로 뒤집어씌운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끊어버리고 내가 노동해서 살면서 죄 지으면 죽는다는 말을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입장이에요. 왜, 돈 벌다 보면 죄 짓기 마련이거든요. 돈 벌다 보면 죄 짓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죄 지을 때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내가 끄집어내게 되면 우리는 돈 벌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것과 돈 벌면서 죄짓기 때문에 죽는다는 이것과 우리 내부에서 모순이 생깁니다. 내가 지금 죽으려고 일하는지 살려고 일하는지 구분이 안돼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살려고 하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데, 살고자 하는 그 인간을 두고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분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누가 이야기하는 겁니까?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린 거지요.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 거예요. 내 육체, 이 몸과 내 영혼은 내 것이 아닌 거란 말이지요.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 밥 먹고 살려니까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해답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인생은 아무리 도를 닦아도, 교회에서 도 닦아 봐야, 성화해 봐야 해답 없습니다. 왜냐, 계속 추가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십계명의 제 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배부를 때는 도적질 안하게 돼요. 경찰서에서 조서 쓰려면 귀찮아요. 그런데 배가 고프면 장발장처럼 길 가다가 빵집의 빵을 훔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둑질이 나쁜 짓인 줄을 알면서도 도둑질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예요. 지금 나의 70조의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거든요. 이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 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해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배고플 때는 도둑질해도 괜찮다는 법을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들거든요.
내가 그래서 도둑질을 했는데 내가 훔쳐놓은 빵을 옆에 있는 노숙자가 도둑질을 해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에이, 죽일 놈!”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만든 법이기 때문에 자기는 안 지켜도 되지만 남은 지켜야 돼요. 내가 만든 법은 나는 어겨도 괜찮아요. 그런데 남이 내 법을 어기면 그것은 내 손에 죽어야 돼요. 내가 살아남는 게 우선이기에 절에 가나 교회 가나 성당에 가나 이것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살아남아야 되기에 내가 행동하는 것이 진리기 때문에 내 행동부터는 법이 새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은 우리 인간이 감당 못할 새로운 추상적인 내용이 계속 쏟아져 나와요. 왜 그런가 하면, 주의 법은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누굴 겨냥했느냐 하면,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줬거든요. 오다 보면 비행장이 있잖아요. 여러분이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비행기 소리 되게 시끄럽네. 비행기 너 나하고 한바탕 해 봐?”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낮은 고도로 나를 향해서 옵니다. 지금 비행하고 나하고 싸우는 겁니까? 서로 으르렁대는 겁니까?
비행기가 낮은 고도로 비행하는 것은 훈련하는 과정이지 그 비행기가 내가 저한테 욕했다고 나한테 화가 나서 돌진한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 사탄은 우리와 상대 안 합니다. 사탄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등장할 때 사탄이 같이 등장하지 인간은 처음부터 사탄에 예속되어 있기에 사탄하고 상대할 입장이 못돼요. 비행기가 우리하고 싸우지를 않습니다. 그게 싸움이 되겠어요? 괜히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생활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오해를 하는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사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네 팔자와 운명은 사탄하고 네가 상대할 것도 없이 이미 다른 분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하는 이야기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행함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사탄을 이기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이미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마음껏 사탄 이야기가 즐거워야 돼요. 기뻐야 되고. 사탄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에 대해서 다가옵니다. 인간이 사는 게 우선이냐 말씀이 우선이냐, 할 때 “네가 사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유혹을 가지고 다가오게 되거든요. 다가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말씀이 뒷전이고 우리 사는 것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이미 사탄에 장악된 사람입니다.
인간은 말씀이 우선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우선이 되면서 이 땅에서 사탄만한 친구는 없습니다. 가장 허물없는 사이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행함을 격려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에게 꿈은 이루어진다고 늘 독려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사탄입니다. 마귀에요. 네가 하고 안 하고는 너의 하는 행위에 달려 있다고 늘 그런 식으로 사탄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인 말씀을 우리에게 늘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뭐냐, 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이해해 줄 친구를 원하지요.
교회? 친구 찾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결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나와 같이 놀아줄 친구 찾기에요. 그런데 사단만한 친구는 없어요. 최고의 친구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까운 친구에요. 그 증거는 어디 있느냐? 열 두 제자가 주님을 따라다닐 때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친구처럼 따라다닌 거예요. 결국 그 친구의 효용도가 다 했을 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베드로는 자기 친구를 버리지요. 왜, 나는 나를 위로할 사람을 찾았지 나를 배신할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으켜줄 그 친구, 바로 그러한 친구, 그것이 바로 늘 익숙하고 친밀했던 사탄이 우리 곁에서 친구노릇을 단단히 해 줬던 것입니다.
그 친구의 뜻에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열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열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남들 보기에는 진짜 친한 친구처럼 여겨졌지만 마지막 때에 열 두 제자는,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부터 해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까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결별,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본인들이 사탄과 함께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 오기 전까지는, 아니 심지어 예수님 곁에 바짝 있었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빠이빠이, 떠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임을 폭로당한 거예요.
그 순간이 바로 자기 자신을 비로소 재발견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공익광고에 이런 게 있지요. 운행하는 승용차 안의 풍경인데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엄마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고 애들은 책도 보면서 재미있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유리창 깨진 파편이 튀면서 앞으로 쏠리면서 립스틱은 날라 가고 아빠도 죽고 애도 죽고, 나중에 깨보니 꿈입니다. 안전벨트 하라는 공익광고에요. 그런 광고 보신 적이 있지요? 우리 교인들은 TV를 잘 안 보시니까. 안전벨트 안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 안전벨트가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광고예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 받은 열 두 사도는 이 땅에서 안전벨트가 없습니다. 안전벨트가 없어요. 왜, 나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동안 나를 지켜왔던 것, 안전벨트 역할을 한 것은 누구입니까? 사탄이 나를 지켜주는 안전벨트 역할을 한 거예요. 교회 다니면 주님이 나를 지켜줄 것이고 절에 가면 부처가 나를 지켜 줄 것이다. 그 부처, 그 예수가 바로 사탄이었던 거예요. 나를 왜 지켜야 되지요? 도대체 나는 나를 왜 지켜야 되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안전벨트용으로 했습니까? 안전벨트 매기 위해서 교회 온 것을 가지고 자기 배만 채운다고 한 거예요.
그것이 빌립보서에도 나옵니다. 3장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자기 바디(body)죠,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의 어떤 안전벨트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의 사탄은 어디서부터 등장 하는가? 세례요한부터 등장합니다. 세례요한부터 등장하면서 드디어 세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는 예수님과 딱 붙어 있었지만 세례요한이 등장하면서부터 뭔가 이 세상은 파격적인 금이 갈라져요. 세례요한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름도 요한이라고 특별히 지어줬어요. 어릴 때 그런 계시 받으면 장차 이 사람은 훌륭하고 크게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이 땅에서 안전벨트 매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나 세례요한이 죽을 때는 철없는 계집애 말 듣고 쟁반에 모가지가 잘린 채로 죽었습니다. 누가 그 짓 했습니까? 사탄이 그 짓 한 거예요. 왜 세례요한에게 가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한 겁니까? 세례요한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너와 나는 위치대칭, 그것만 용납되는 세상에서 위상대칭, 땅과 하늘이 같이 섞였다는 사실을 세례요한은 하나의 소리로서 표현했거든요. 그러니까 사탄은 다른 사람은 용납해도 세례요한은 용납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죽여도 아주 처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안전벨트요? 없어요. 세례요한을 지켜준 안전벨트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는……, 이것은 상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먼저 내가 누구이기에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기가 파악을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내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단정하고 모든 행동에 나섭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이후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왜곡된, 이미 사탄과 한패거리가 된 그 존재로서의 나거든요. 그러면 내가 나를 지키면 안돼요. 내가 나를 지키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나를 위로하고 나를 보호하려고 하면 안돼요. 그것은 곧 내 속에 있는 사탄을 보호하려는 셈이 되어버려요.
여기 18절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자기 배만 섬기는 것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대칭이 되어 있어요. 죄송하지만 이게 대칭이 되어 있다고요. 예수 믿어서 복 받자, 이게 안 된다니까요. 사도바울의 설교에서는 이게 용납이 안돼요. 예수 믿고 잘 되자가 아니라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잘 된 거예요. 그 다음에 따로 잘 될게 남겨지면 안돼요.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저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합니다.” 이걸로 잘 된 것으로 끝! 그것으로 잘 된 것이 끝났어요.
“이렇게 주님을 잘 섬깁니다.” 했기 때문에 그 보상책으로 내가 잘되는 것을 남겨두면 안돼요. 그것은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우회를 해서 결국은 어디로 귀속되느냐 하면, 역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귀속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탄의 짓이라니까요. 17절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떠나기는 뭘 떠납니까? 자기가 같은 편인데 뭘 떠나요. 이걸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사도바울 같은 사람밖에 없어요.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말만 들리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목사님 설교 가운데 내가 잘 될 수 있는 것만 따로 뽑아보자.’ 하면 그것은 사탄의 말로서 변화되어서 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사탄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갈 때 출현되는데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입니다. 그 주장에 대해서 이미 사탄과 한패가 되어서 그 주장을 에라, 하고 허물어버리는 그 이후에 모든 인류가 오늘날 62억의 인류고 지금 월드컵 결승을 앞두고 있는 인류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창세기 2장이 아니고 이미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온 그 인간이거든요. 창세기 3장으로 넘어왔기에 이미 그 자체가 사탄과 한패가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나를 지켜 달라, 나를 보호해 달라, 이렇게 되면 이건 뭐가 되어버려요? “우리 사탄님을 지켜 주옵소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식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탄과 이미 한패가 되었는데 그리고 우리 힘으로는 못 벗어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야말로 성경에 나와 있는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에 대해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가? 그것은 주체의 자리에서 우리가 비켜나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 18절-20절의 말씀을 드리면 이해되실 겁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무엇의 싸움이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가 우선인가? 아니면 내가 잘되는 것이 우선인가의 싸움에서 우리가 한 발 물러나라는 거예요.
내가 나 됨은 책에 기록된 나가 되어야지 내가 내 힘을 발휘했더니 귀신이 나에게 굴복하더라, 그런 멋진 나를 다시는 쥐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주체가 바뀌어야 돼요, 주체가! 지금 제자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우리에게, 우리에게,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브라질이 독일에게 7대 1로 깨지더라.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게 바로 사탄의 짓이에요. ‘내가 기대하고 잘 되는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었습니다. 내 뜻은 역시 진리였습니다.’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잘못된 자리, 엉터리 자리, 창세기 2장이 아니고 창세기 3장의 자리에 사탄과 함께 있다는 그 표시를 당당히 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후딱 그 자리를 벗어나야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언제였습니까? 하나님보고 도와 달라고 할 때가 언제입니까?” 하고 예를 들었어요. 우연히 누군가가 준 로또복권이 1등에 당첨되었다. 그래서 한 40억을 얻었을 때, 그래서 자식들에게 차사주고 집사주고 아파트 한 채 더 사고 땅도 사고 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정녕 저를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고 돈 좋아하는 심정으로 버려두실 건가요? 제발 저를 이 지경으로 놔두실 겁니까? help me! 살려주세요.” 하고 외칠 때가 바로 그 때가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신명기 9장에 보면 나옵니다. “네가 그 땅에 가서 집을 짓고 거하면서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하게 될 때에 두려워하라.” 그것이 극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교회는 그런 교인들이 하나도 없어요. 아주 다행스러워라. 아주 감사합니다. 만사가 잘 되고 뜻대로 잘 될 때 “역시 하나님은 내 편이다.”라고 자기가 주체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주께서는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되돌리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대로 제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라고 같이 동참하고 동의하고 거기에 겸하여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말씀이 우선이지,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그 말, 그 말이 우선이지 나의 모든 행동은 그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그 팔자대로 이루어질 뿐인 것을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수용해야 돼요.
말씀이 먼저고 모든 것은 말씀의 뜻대로 된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은 거요? 그거 땡 잡은 거예요. 그 사람이 강도 안 되고 강도 잡는 강력부 형사 같으면 구원 못 받았어요. 강도 되어 구원받아야 하기에 강도가 된 겁니다. 뭘 염려해요? 내 팔자는 내가 주체가 아닌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전체 내용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믿을까요? 믿는 것도 그게 행함이거든요. 믿습니다, 이게 행함이 돼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믿기 때문에. 그럼 뭘 믿는다는 말인가? 말씀이 말씀대로 된 그 결과물이 나 인 것을 믿는 것. “원인은 나에게 없습니다.” 어떤 원인도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19절, 20절에 보면 어떤 농부가 창고를 크게 지었어요. 농사가 잘 된 모양이지요. 농사가 잘 되어서 창고를 크게 짓고 하는 말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주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네 말과 네 고백과 네 행동이 네 운명을 결정하는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네가 인정하라는 겁니다.
부자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 밤에 다 데려가게 되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부자 되게 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마음껏 부요함을 누리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 돈이 없어서 못 누리죠. 누리고 싶은데 현찰이 없어서 못하고 있지요. 그 돈과 내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4 곱하기 3은 12고 3 곱하기 4도 12에요. 맞지요? 하지만 4×3과 3×4는 달라요. 4를 세 번 곱한 것과 3을 네 번 곱한 것은 달라요. 짬뽕 곱빼기하고 짜장면 곱빼기하고 다릅니다.
하늘의 질이 반복되는 것,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주님의 결과물로 매일 기쁘게 살아가는 것과,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날마다 기쁘게 사는 이것은 짬뽕과 짜장면의 차이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사탄을 언급할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그랬었던 사람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제가 사탄과 한편이었고 저는 날 위한 친구만 된다면 예수든 부처든 다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탄과 한패…….”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거든요. 창세기 3장 이후는 내 잘못이 아니에요.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을 닦달 내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기 3장 이후의 모든 인간에 해당되기에 그걸 새삼스럽게 알자는 이야기지 똑바로 살라든지 바르게 살라든지 사탄을 이기라는 그런 말이 아니고 우리입장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아담, 창세기 3장의 우리 조상이 아담이기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다만 마지막 때가 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의 주체가 나로부터 예수님의 것으로 바뀌게 되면서, 아, 이 땅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탄을 발아래 물리침으로서 그 효과를 우리가 누리는데 그 누려지는, 전달된 효과가 사탄마저 즐거운 소리로 들려올 정도로 전체를 알고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해주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너희는 자기 배만 챙기는 사람들이다.” 해도 “제가 원래 그렇습니다.”하고 받아들이세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안다는 것은 창세기 3장의 말씀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누가복음 10장의 말씀도 인정한다는 거예요.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행위와 동반해서 “네 이름도 생명책에 있다. 그리고 사탄은 내가 처리했지 네가 처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꺼번에 여러분 속에 빨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행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영생 얻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추적해 보니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그 파고요 효과요 물결이었습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