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강-a
지난 시간에 뭘했는가? 마태복음 1장부터 5장까지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은. 하늘을 향하여 갈라진 이야기를 했지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항상 그림만 그리시면 됩니다. 이렇게 산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땅에서 역사가 흘러가면, 여기서 뭔가 구멍이 터지는 거에요. 이렇게 터졌으니까 이 터진 하늘과 땅사이를. 마태복음 1장 하면서, 이것을 '다윗의 약속'이라 했죠. 다윗의 약속이니까 이것을 줄이면 '다윗언약'이라 했습니다. 다윗의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땅의 인간에 대해서 다윗의 약속 따라서 메시야를 보낸다 했습니다. 그러면 메시야가 이 터진 틈을 다 차지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사람이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을 알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메시야-다윗의 약속대로 오신-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 메시야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마음이 있느냐 하면은, 사람마다 다 신이 있잖아요. 사람이 신이 있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때,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신을 그들은 뭐라고 보았느냐 하면은, 율법을 실천 함으로써 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율법을 실천 함으로써 참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여기 사람이 이렇게 있다면, 사람이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해서 자기가 알아야 되겠지요. "아~ 십계명 탐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하는 이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근데 자기들은 뭐냐? 이걸 안다고 여기는 겁니다.
제 말 잘 들어야 됩니데이.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니까, 십계명이라도 좋아요. 어떤 계명이든 제사법이라도 구약성경 전체, 성경 전체를 볼때에, "아~나는 이 성경을 안다"라는 1번-안다. 두번째, 알기때문에 그 다음에 뭐할수 있다 했습니까? 알기때문에 실천하잖아요. 알기 때문에. 횡단보도에 갈때에 파란불이 무슨 의미이고, 빨간불이 무슨 의미이냐 알때에, 빨간불이 나오면 스톱하고, 파란불이 나오면 건너가잖아요. 실천할때에는 먼저 '안다'부터 시작하고," 아니깐 그 아는 대로 실천에 옮기면 참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축복을 주고,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과, 못지키는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라는 것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사람들의 생각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 가지고, 이 율법에 대해서 '안다'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너희들은 모르고 있다"로 바꾸는 겁니다.
"나는 모세 율법에 대해서 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안다"라고 했을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지금 모르고 있는거야"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게 안다고 했을 경우에 실천했던 실천이 있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는 잘못알고 있어, 너는 모르고 있어"라고 했다면, 그들의 실천한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다. 허사!'가 되겠지요? 안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는데, 어! 예수님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 하나하나가 "그런뜻이 아니야~그런뜻이 아니야~너희들은 틀린거야~"라고,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했다면, 그들의 실천은 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나가겠지요? 왜?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딴에는 실천을 했는데, 이건 하나님에로의 길이 잘못된 것. 잘못된 길로 간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하면은 '길'이라고 했단 말입니다-예수님이. 그러면 율법에 대해서 "너희들이 지금 잘못 알고 있어"라고 지적을 하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어디를 가느냐하면은, 이 구멍을 통해서-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쉽지요?
한번 정리해 볼까요. "사람들이 구약성경이 있었다. 자기 나름대로 안다. 아니까 실천에 옮기면, 하나님께 복받는다"라는 아주 단순한 그거였는데. 이제 그 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땅에 오셔가지고,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시고, "너희들이 잘못알고 있고, 잘못 알고 있는 입장에서 실천하는 것도 다 허사며, 그러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너희들은 악마에게 간다. 길을 잘못들었다"는 것입니다. 길을 잘못들었다는 것은, 말로하면 잘 실감이 안나기때문에,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신다 치고, 제가 다른 그림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길이 이렇게 두갈래 길이 있는데. 이쪽으로 가고, 이쪽으로 가고 있는데. 지금 이길로 계속 가게 되면, 이 길이 만약에 천국이고, 이쪽이 지옥에 가는 길이라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도 자기가 지옥가면서, 자기가 지옥간다고 우기는 사람은 없어요. 다 자기가 가는 길을 천국으로 착각하기 마련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갈림길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여러분 아시다시피 천국에서 왔지요. 현재 바리새인들은 어디 가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지옥에 가고 있지요. 그러니깐 일러주는 거에요. "아니야. 그 길은 잘못된 길이야.
내가 길이요. 내가 진리요. 내가 생명이야. 나에게로 가면, 아버지께로 간다"라고 이렇게 갈림길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동의를 했느냐하는 겁니다-여기에. 그래서 동의를 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살해당하지요. 이 갈림길에서 섰는 것이 뭐냐하면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 와서, 이길로 천국 갈꺼냐 지옥갈꺼냐 오다가, 우리는 무엇을 마딱 드리게 됩니까? 십자가를 마딱 드리게 되지요. 십자가를 만나게 되지요. 어! 이 갈림길에, 우리는 다 천국으로 가고 싶은데, "어! 여기에 십자가가 여기있네. 십자가가 왜 있지?"라고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 비켜가지 않고, 스쳐가지 않고, 십자가에 대해서 바로 갑니다. 바로 가게 되면, 십자가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우리의 상황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거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십자가에 일어났던 상황을 더해보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바리새인들과-서기관들과-유대인들-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쳐죽였던 사건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안다 할때에는, 예수님만 알아서는 십자가를 모르게 되고,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느냐까지를 알아야 제대로 십자가를 안다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을 쳐죽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과 사두개인들, '바-서-유-사'.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우리 속에도 있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이 오기전까지는 누구나 육에 있기때문에, 오게되면.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도 누가 있었느냐하면은, 가롯유다도 있었지요. 가롯유다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 어떤 기여를 했습니까?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도록 협조했습니까? 예수님을 팔아먹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다니면서, 귀신쫒아내면서 권능을 행했던 그 제자가, 물론 자기 힘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힘으로 했지만, 그 제자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팔아 먹었다 이말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뭐냐하면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천국으로 가야될 사람이, 이런 악마에 의해서-지도자에 의해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막아서다가, 밟혀죽었잖아요. 결국 그렇게 되잖아요. "아니야! 그 길이 아니야! 그쪽으로 가면 안돼!"라고 주님께서 호소하시다가, 밟혀죽었다 이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길이라도 역시, 주님께서 부활하셔가지고,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길을 가로막는 겁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야! 너도 변한 거 아냐 똑같애! 그러니깐 그게 아니란 말이야!"라고 가로막는 입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구약성경을,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을 다시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십자가 안에서 성경전체를 십자가로 잡아 당기면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율법+실천+참하나님으로 간다'는 이 바리새인의 공식은 잘못이고, 율법을-실천을 누가 하느냐하면은,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었고, 그 예수님이 가 계시는 곳이 바로, 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지요.
무슨 부분이 없어집니까? 바로 "내가 행한다. 실천한다"라는 이 대목이 사라지고.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실천을 다 이루었다는 것만 여기에 삽입되어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지요. 영화관에 갔는데, 추울때 기다리고 있는데, "이 영화 얼마야 만원이야 칠천원이야"라고 하고 있는데, 줄 서고 있는데 뒤에 와가지고 툭툭!치면서, "어이~ 들어가자!"라는거에요. "표 샀다!"라는 거에요. "저는 돈 안냈는데요". 내가 앞에 서서 다 값을 다 치룬거에요. 천국 가는 입장값을 다 치루고, 우리보고 그냥 툭툭 치면서 그냥 오래! "아니 나는 그냥 줄서가지고 돈 내는데"라고 하는데, "필요없어! 그냥 가!"라고 하는거에요. 그냥 가는거에요.
그때 어깨를 칠때에, 어깨를 치면서 묻히는 게 뭐냐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피가, 예수님이 어깨를 탁탁 쳐줄때에, "너는! 입장해도 돼. 내가 알아서 다 했어. 우리 아버지가 너보고 넣어준데"라고 칠때에, 칠때 뭐가 손에 묻느냐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한테 묻어서, 그 피로 말미암아 천국을 지키고 있는 천사앞에서 "표 봅시다"하면은, 예수님의 피-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사실을, 누가 방해하느냐하면은, 바로 인간의 실천력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기를 쓰고 반대 하겠지요. 기를 쓰고 전적으로 반대 하는거에요. 성경 공부를 한다는 실천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복음 안에서 모이게 하셨다는 주님의 실천을 증거하는 모임이 되어야되요. "내가 성경공부 하고 있습니다. 필기를 합니다"하는 실천을 보이는, 공부가 되지말고. 주님께서-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다시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그런 모임이 참된 성경공부가 돼야된다.
이런 모임을 자주 안가지게 되어버리면, 우리 눈에서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자꾸 사라져요. 십자가가 왜 자꾸 사라지냐하면은, 그냥 "십자가!십자가!" 열번 하면 되는데, 십자가가 왜 사라지느냐라고 반문을 하실텐데. 차에 달랑달랑 매달려있는 그 십자가 말고, 이 십자가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은, 이게 중요한데요. 이 십자가가 늘 보여야 된다고 제가 이야기하는데요. 십자가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우리의 삶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매일같이 죄가 나옵니다. 죄가 나오는데,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간주하지 않고,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의라고 간주해요-반대로.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애들 오늘도 도시락 싸줬어. 하나님 이것도 나의 의입니다. 남편도 잘 봉양해주고, 이것도 의입니다. 교회 충성도 해주고 이것도 의입니다. 거기다 성경공부도 참석해주고 이것도 의입니다". 항상 우리는 죄가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의가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십자가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은, 의가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성경말씀 모임, 성경 모임이나 성경 말씀 또는 예배시간에 복음을 접하게 되면, 내가 의라고 생각했던 것이 성경 말씀에 딱 맞닥뜨려보니까. 의가 뭐로 변하느냐하면은, 이게 바로 '예수님처럼 행하지 못하는 죄'로 변해요. 죄로 변하는 순간, 우리를 둘러쌓던 그 십자가의 의미가 다시 한번 새롭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말로만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루에 열번 스무번 외운다고 십자가가 아니라, 항상 성경 말씀과 접하게 되면, 성경 말씀을 지키시는 예수님의 실천과 나는 내 나름대로의 있는 것-정성껏 다한다는-나의 괜찮아 보인다는 훌륭한 그 자질-그것과 말씀공부를 통해서 딱 대비해보니까, "아~영~ 미치지 못해". 주님이 하신 것과 영, 형편없이 모자란거에요. 형편없이 모자란 것을 가지고, 그것을 나의 의라고 우겼으니까, 얼마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했을까요.
우리가 성경 구절을 한번 찾아봅시다. 이 귀절은 우리가 공부하면서도 기억해야겠지만, 우리가 평소에도 기억해야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입니다. 2장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꼭 성경은 반드시 뭐가 붙느냐. '아니요'가 먼저. 이 아니요에 해당되는 문장이 먼저 나와요. 우리 성경 공부 할때에 우리가 그 점을 놓치면 안됩니다. '아니요'가 먼저 나와요. 그냥 뒤에 '이다'만 나와버리면 사람들은 그걸 쉽게 받아들이는데. '아니요'가 먼저 나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이다'가 나옵니다.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노라"
이렇게 되어잇지요.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의 믿음하고 율법의 행위하고 같은 노선입니까? 다른 노선입니까? 다른 노선이죠? 그러니까 서로 만나지 않는 노선입니다. "율법으로 행해서 예수 잘 믿으면 되잖아"하는 소리는 하지 마라 이 말이지요. 율법의 행위하고, 예수 믿는 것하고 노선이 달라요. 하나는 부산으로 간다면, 하나는 목포로 가는 거에요. 노선이 달라요. 율법의 행위 실천으로 옮겨서 예수 잘믿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은 여기서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라는 소리를 하면 안된다는 거에요.
"율법의 행위로써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써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여기서 예수님의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키를 믿습니까? 체중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뭘 믿는 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 본문대로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뭘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너는 율법대로 행해야 돼라는 말을, 그런 말을 주께서 우리한테 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믿는거에요. 제가 말을 어렵게 했지만, 중요한 이야기지요.
예수님께서 저보고 하는 말이, "얘! 너는 예수믿나?" "믿습니다" "이제부터 율법을 행하란 말이야"라는 식의 예수님은 안계시다는거에요. 그럼 뭘 믿느냐하면, "야! 너는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야 믿나?" "믿습니다". 이걸! 믿으란 말이지요! 그럼 저는 묻지요. "그럼 제가 율법을 행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해서 제가 의인이 되었습니까?"라고 우리 입에서 질문이 나와야되지요.
그것이 바로 뭐냐? 그것이 17절에 보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이 말은 뭐냐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말아야된다 이말이지요. 만약에 십자가를 믿는다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더욱더 죄인되게 만들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고. 그 일어난-드러난 그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처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바로 죄로 드러난 우리 자신을 누가 다룬다? 십자가에서 다루어서 우리가 뭐된다? 죄인이 아니고 의인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빠져주시고, 십자가하고 죄하고 바로 연결되도록. 우리는 제발 비켜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비켜나가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산자가 아니죠? 뭐가 되느냐하면은, 비켜나니까. 우리가 구원받는데, 구원받을 내가, 내가 구원받는데 내가 비켜나니까 우리는 무슨자가 되느냐면은, 죽은 자로 취급받는 겁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겁니다.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가 산 것이 아니면, 다른 말로 뭡니까? 나는 죽은 자가 되지요. 아까 식당에서 질문했잖아요. 우리는 죽은 자라고. 그렇지요?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우리 구원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산자로 행세'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문제에 대해서.
참 이상하지요? 시장 가서 콩나물 사는데, 엄마가 콩나물 사는데, 애가 따라왔어요-자기 아들이. "엄마, 그거 사지마 그거 비싸". "조용이해~ 내가 콩나물사. 좋고 안좋고는 내가 판단하는 거야. 너는 비켜있어". 또 살라하는데, "엄마. 사지마~ 콩나물 사지마". "너는 죽은자야! 더 이상 간섭하지마. 콩나물 장사하고 나하고 지금 거래하는데, 너는 비켜나있어"하고 탁! 때리면서 할때, 걔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콩나물에 대해서 나는 죽은자요. 살아있는 것은 우리 엄마밖에 살아있지 않다"라는 개념이죠. 이해 되시겠습니까? 그 개념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사람은 '믿음으로' 이게 안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율법을 자기 힘으로 실천해내려는 행함을 항상 거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골치 아픈거에요. 단순히 믿는다 안믿는다라고 이렇게 갈라서는 것이 아니고, 꼭 안믿는 사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흉내를, 행함을 가지고 믿는 척을 하기때문에, 같은 교회 내에서도 예수님의 복음 믿는 사람이 많은 핍박을 받게 되어있어요. 심지어 누가 누구를 핍박하느냐하면은 내가 나를 핍박해요. "너 요새 너무 게으르다"하고 내가 나한테 질책을 해요. "너 요새 율법 너무 행하지 않아. 미안해서라도 좀 행해"라고 내가 나한테, 내 양심이 나한테 자꾸 지적을 해요. 그러면 내가 신자 티를 내기 위해서, 안에서 연출하는 그런 희안한 짓을 다해요.
마태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한번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십자가가 어디에 있다 했던가요? 십자가가 어디에 설치되어있다고 했다 했던가요? 장소가?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자리에 서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비켜지나가면 어디로 가게 되어있습니까? 반드시 지옥가게 되어있어요. 십자가를 비켜 지나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안거치고 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못거치고 그냥 가는 사람들은, 율법에서 시작해서 율법으로 계속 나갑니다. 그래서 항상 관심사가, 내가 얼마나 율법을 몇퍼센트 지켰느냐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를 거친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면은, 그때부터 십자가의 고마움을 내 행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버려요. 그리고 이런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십자가가 그냥 '십자가! 십자가!'하는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항상 앞에 뭘 내세우느냐 하면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성경말씀 앞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평소에 우리가 나오는 우리의 삶이 나오고, 그 삶을 우리는 뭐라고 해석합니까? 의라고 생각합니까? 죄라고 해석합니까? 항상! 의라고 해석해요. 인간의 본성이, 인간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 잘하는 걸로 봐요. 이거는 타고 났어요. 갓난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심리학에서 실험을 해보니까, 갓난 애들이-3개월 된 애들이 엄마를 속인다는 실험이 측정이 나와있습니다. 3개월짜리가 엄마를 속여요. 항상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 긍정적 사고방식, 사람이 자기 존재 긍정의 극치가 뭐냐하면은, 자살입니다. 이걸 아셔야되요. 자기 긍정의 극치. 가장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긍정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스스로 자기 목을 따는 거에요. 최진영씨같이. 자살입니다.
여기서 약간 여담입니다만은, 자살 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만약에 16살 소녀가 자살한다고 하면, 16살때까지 알았던 그 삶에 대한 범주-세상보는 테두리,카테고리안에서 세상을 다 읽어버려요. 그러니까 16세 말고, 18세때-19세때 자기 맘이 어떻게 바뀌고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는 것을 미쳐 모르고, 16세때 알았던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16세때 인생을 끝내버리는 거에요. 최진영씨가 39살인데, 42살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자기 자신이 어떻게 바뀔지를, 그건 남겨둬야 되는데. "이러니 인생 살아서 뭐하노?". 이러거든요? 어떻게 서른 아홉살이 인생의 전부를 압니까? 극히 일부를 알뿐인데.
여러분들이 힘들다고 해서 자살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세상을 다 몰라요. 부분을 가지고 전체라고 하니깐.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같으면 못살겠거든요. 그러면 그거를 책을 보던지, 이렇게 교회나와서 어떻게 복음을 듣던지 해야지, 이 16세때까지-이 39세, 이게 다가 아니다말이에요. 40세-50세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 된다고요. "아~인생이 내가 결국은 나라는 것이 그렇게 죽을 만큼 가치 있는게 아니구나". 그걸 아셔야되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알게되면, 사실은 뭐를 알게 되느냐하면은, 십자가를 알게되면, 인생의 전부를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40이 아니라 50,60을 살아도, 인간에게는 푸석푸석 뭐가 나오느냐하면은, 항상 "내 잘났다. 내 잘났다. 내 잘났다. 나는 완벽했었어". 완벽했었어라는 말 대신에, "나는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아왔었어"하는 항상 자기 긍정과 자기 의로움이 나오는 거에요. 성경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그냥 맹탕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앞에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자기 긍정'으로 보지요. 성경을 볼때에, 이 자기 긍정을 가지고, 자기 훌륭한 면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아무리 천독 만독을 해도, 나오는 결과가 뭡니까? "역시 나는 잘났어". 이것밖에 더 나오겠어요? "역시 나는 훌륭해".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율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너가 왜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나온다고 되있거든요. 이 성경 이야기하고, 본인 이야기하고 다른 거에요. 이런 사람들은 이런 성경 귀절보고 또 뭐라고 해석하느냐하면은, "성경 말씀은 더욱 더 죄인되게 한다"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가 내 죄를 아니까, 나는 얼마나 훌륭하기 짝이 없어~". 또 이렇게 나와요. 자기가 자기의 죄를 안다는 것도, 자기의 장점으로 그만 포함이 되어버려요. 참, 자기 부인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성경공부를 수십년 하면서 느낀점은, 말씀이 체험화 되지 않고, 말씀이 체험화 되지 아니하면, 항상 이게 이론으로 남는다는 겁니다. 이론으로 남으면, 그냥 곱게 남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고 이론은 그 이론을 안다는 것이, 자기의 똑똑함의 첨가가 되요. 똑똑함의 증거물로 사용되요. "너 이거 알아. 나 이거 알아. 너 이거 모르지? 나 이거 알아"라고 된단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말씀이 내안에 들어오면, 나도 살아있고, 말씀도 살아있고, 이런 법은 없습니다. 말씀이 나한테 쳐들어 오게 되면, 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죄인으로써 끽소리 못하고, 내 안에 말씀이 살아서, 그 말씀이 나를 천국으로, 말씀이 온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말씀의 출처가 천국이기때문에 말씀의 출처가 되는 그곳으로 나를 끌고가는 식으로, 인도하는 식으로 데려가는 것이 펄펄 느껴지지요.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렇게 느껴지면, 평소에 밥먹는 것도, 그리고 아플때도, 또는 건강할때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되어진! 사건이라하는 것이, 차후적으로, 차후적으로 깨닫게 되요. 그때는 몰라요. 아플때는 짜증이 나요. 아프다는 것은 통각인데. 고통이거든요. 그러면 현실이잖아요. 아픈거 외에는 현실이 안보이거든요. 그러면 나중에 건강하게 되면, 아픈 것도 내가 반드시 치루어야 될, 내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라는 것을 치루어야 될 하나의 과정이라하는, 경과-경로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욥이 아픈건 아시죠? 욥이. 욥이 아플때, 죄가 없는데도 아팠을때, 나중에 뭘 느낍니까? 아프게 하신 것도 평소에 나를 건강하게 하신 분이, 나를 아프게 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요. 평소에 나를 건강하게 하신 분이, 아프게 하실 자유도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욥은 자기 자유만 아는 것이 아니고, 아프고 난 뒤에, 자기 자유만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유보다 우월한 더 센, 더 높이 계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알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욥은 모든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움직이니까. 그것을 가지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을 빌립보서 4장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자유안에서, 나도 못할게 없다. 주님의 자유이기때문에 못할게 없다. 스데반 집사같으면, 성령 안에서, "까짓꺼 돌에 맞지뭐~ 돌에 맞아죽지 뭐~". 내가 못할게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 십자가!". 하루에 천번 외운다고 십자가가 아니라, 항상 말씀과 늘 가까히 하게 되면, 그 틈과-말씀과 의롭다고 여기는 우리 죄와 만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십자가의 용서하심의 사랑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을 안보면 어떻게 되냐? 안보면 뭐가 남습니까? "역시 나는, 역시 나의 실천력은 대단해~ 나의 신앙심은 대단해~"라는 자기 의가 그대로 남겠지요. 그대로 남아요. 바라기는 우리 모임이, 만나처럼 매일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처럼, 마태복음은 초반부터 이렇게 갈라진 틈이 있고, 이 틈사이에 하나님 위해서 누굴 보냈다? 틈사이에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메시야를 보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뭔지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면서, 이걸 실천에 옮기니까, 실천도 틀렸고, 그렇게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하니까, 그 믿는 하나님도 틀린 이 사람과, 메시야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모든 충돌을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
그래서 메시야 의견도 들어야 되고, 메시야를 미워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다 같이 들어야됩니다. 왜냐하면, 이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이기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바리새인이 아니요"라고 이렇게 할꺼에요. 바리새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필요치 않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율법일변도로 나가 줬기때문에, 바로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되어줘야, 십자가가 바로 우리 죄를 드러내는 것이고, 동시에 그 드러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피흘렸다는 것이 십자가 안에서 양쪽다 성립될 수 있습니다. 논리상 그렇게 되요.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잘났다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들고, 우리들로 더욱 더 죄인되게, 십자가가 더욱더 죄인되게 하는거에요.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거에요. 할말을. "아~ 주님은 내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주께서 귀하신 생명을 흘리고 있느냐. 저기서. 저기도 십자가가 있네. 저런 귀한 피를 흘리고 있느냐. 그런데 기껏 나는 십자가 앞에서 뭘하냐. 내 헌금한 자랑하고, 내 봉사한 자랑하고, 전도한 자랑을 하고 있으니. 그거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그 행세를 바로 내가 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라고 마태복음이 있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어요. 십자가 마음.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오직 예수님의 피때문에 구원받지. 뭐 내가 예수를 안다든지, 뭐 내가 어떻게 했다든지 그런 여러가지 내 행함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그걸 다시 한번 깨닫는 겁니다.
마태복음 오늘 본문 5장 13절 들어가봅시다. 제가 요새 맨날 잊어버려요. 안경 어딨나요? 안경도 잃어버리는데, 무슨 최선을 다합니까?(ㅎㅎㅎ) 5장 13절 보면, 지금 산상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바로 두 의견의 충돌이라 했습니다. 잊어버리셨다면, 다시 해보면, 바리새인의 율법해석과 예수님의 율법해석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자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그 틈에서, 하나님께서 누굴 보내셨다 했습니까? 메시야를 보냈지요? 그 메시야로 인해서 새롭게 발생된 사람을 가지고, 여기서 '소금'이라고 했고, 여기서 '빛'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소금이라 하는 것은 그 환경이 어디에 둘러쌓일때, 소금이 소금값을 한다 했습니까? '맛'을 잃은 세상 속에서의 소금이 비로소 의미가 있지요. 그리고 빛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 주변은 다 뭐하다? 다 어둡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너희들은 이 어두움에 속한 것과 맛을 잃은 사람들을, 이 세상을 가지고, 세상을 어둡다 또는 맛이 갔다고 인식해야되고, 두번째는 그런 전제하에 너희들은 그들과 같지 아니하고, 너희들은 뭐해야된다? 소금이 돼야되고, 그 다음에 뭐가 된다? 빛이 돼야된다하는 거에요.
그러면 소금과 빛이라 하는 것은, 항상 그 배경은 뭐로 봅니까? '어두운 세상', '맛이 간 세상'이죠. 그러면 맛이 간 세상, 어두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거기에 대해서 집착이나 미련을 두겠습니까? 안두겠습니까? 맛이 가버렸는데 그걸. 아니 쉰밥에 왜 숟가락을-손을 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극단적인 말씀이에요. 극단적인 말씀. 쉽게 말해서, 세상을, 포기해라. 세상을 포기해라.
우리가 묻지요. "왜 우리가 세상을 포기해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너는 이미 포기해도 괜찮은 존재야". "내가 빛이라면 누가 뭐래도 빛이고, 내가 소금이라하면, 누가 뭐라도 너는 소금이기때문에, 남들의 시선이라든지, 남들이 궁시렁궁시렁 하는 소리나, 남들의 평가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아라"는 겁니다. 왜? 어차피 그거는 맛이 갔고, 어차피 그들은 어두움이기때문에. 그렇다면 앞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따라 다니면서 뭐만 확인하면 되겠어요? 왜 주님께서 세상을 보고, 자꾸 어둡다고 하는가? 그것을 확인하면서, 한 구십?평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너무 짧습니까? 한 95세까지(하하하)
왜 세상은 맛이 갔는가를, 큰집이 명절때 같이 모일때 한번 확인해보세요. 추석때나 설이나, 또는 제사때나. 왜 맛이 갔는지. 왜 세상이 어두운지를, KBS-MBC 뉴스 시간에, 드라마나-아내가 돌아갔다나 분홍립스틱 이런거 보면서, 왜 세상이 맛이 갔고, 도대체 뭐때문에 사람들은 다투는가? 도대체 십자가 때문에 다툽니까? 연속극 드라마 십자가때문에 다툽니까? 애가 니 애가? 내 애가? 그것때문에 다투잖아요. 막장 드라마가 다 그런 것때문에 다투잖아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 위에서 하나님과 함께 이 틈새로 내려오신 메시야가 보기에, 같~잖치도 않은거에요. 참 말도 안돼는 거지요 뭐.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이걸 가지고 뭐라했냐하면, '사소한 일'이라 했고, '시시한 일'이라 했어요. 시시한 일. 사실은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고린도 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돈이 있는 사람은 돈 한푼도 없다고 여기라. 돈이 있거나 없거나 그런데 신경쓰지 말고, 내가 결혼 했다 안했다 그런데 신경쓰지 말아라". 어떤 여자가 만약에 주를 위해 살다가, 결혼 하고 난 뒤에는 주를 위해 살다가 그 다음부터 남편을 위해서 살겠다고, 몸 바치니까. 그것은 이미 맛이 간 세상, 어두운 세상에, 무슨 볼일 있다고! 거기에다가 올인하고 말이죠. 거기에다가 집착을 해가지고. 남편 서해안에 빠지니까, 같이 뛰어들라고 하다가 엎어지고~ 원인 규명하라고 하고.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에 그런 설교 했습니다. 서해안에. 여러분들이 서해안에 46명 빠져 죽은 것 생각하지 말고, 그 죽은 사람이 지금 어디 가있는가를 생각해보라는거에요. 물에 빠져죽든, 교통사고로 죽든, 늙어죽든, 잠자다 잠깨서 죽든,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거에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거고.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그런데 세상은 딱 거기까지라. 어두운 세상, 맛이 간 세상은. 딱 내 목숨 떨어지는, 그게 전부에요.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몰라요.
하지만 빛되고, 소금 된 사람은 뭘 통보 해야 되느냐 하면은,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갈림길! 지옥이냐 천국이냐! 그 가운데 십자가 놓여있는, 이 소식을 전해야돼요! 이것이 실은, 본게임이에요 본게임! 지금 인생 사는 것은 이건 뭐냐하면은, 게임도 아닙니다. 이거는 그냥 예고편에 불과하고, 진짜 본게임은, 십자가 뒤에 숨어져 있어요. 메시야께서 몰고 온겁니다-본게임은. 죽고 난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어제 설교했습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는 '나의 법'이 아닙니다. 나의 양심이 아니고. 누구의 법이냐하면은, 주의 법!이에요. 주의 법!
주의 계명. 십자가로 모든 것이 용서 받느냐? 아니면 인간의 죄 그대로 있느냐? 그것으로 완전히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지는 것이지. 네가 뭐 남자인가-여자인가, 성별이나, 직업이나, 지휘나, 판사나, 검사나, 의사. 셋방에 사느냐, 자택이냐. 그런 것은! 나의 법에 속하지, 주님의 법에는 그런게 없습니다. 우리의 법은, 나의 법은 주로 어디에 쓰여있느냐하면은, 가게부에 많이 쓰여있지요. "1999년 5월달에 차 한대 샀다"-이런 것. 쫙 적힙니다. 이건 나의 법이에요. 나의 과거의 기억.
주의 법은 뭐가 있느냐하면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게 써있다고요. 성경책이 주의 법이다. 사람이 주의 법을 보면 잠이 오고, 가계부 부면 정신이 바짝 차리고 있으니, 뭔가 참 어둡기도 참 많이 어둡다 그죠? 우리가 맛이 갔는 모양이라~. 성령께서 맛이 간 우리를 소금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실천 한다고, 소금되는 것이 아니고. 맛이 없는 세상에서 유독! 맛을 우리를 통해서 토해 내도록 하고! 깜깜한 세상에서, 본인도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순간순간 하나의 빛으로 등경위에 있는, 등잔위에 높이 들려있는 빛처럼 그렇게 행세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왜냐면 주님이 살아계시니까.
주님 살아계시면, 주님은 말씀대로만 움직이기때문에, 이 말씀대로 네가 내 제자가 된다면, 다른 말로 하면, 너는 항상 어디를 가도, 빛이 될 수밖에 없고, 소금될 수 밖에 없다 이말입니다. 소금 돼라! 빛돼라!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네가 하기 싫더라도 소금 되게 하고, 하기 싫더라도 빛되게 할테니깐. 너는 바로 이 갈라진 틈. 메시야가 이미 와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7절에 봅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이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누가 예수님보고 이렇게 생각했겠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 율법 전문가들이 예수님을 평하기를 뭐냐하면, 너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무시하는구나. 말씀을 무시하는구나라고 얼마나 욕을 해대겠습니까? 그 증거가 요한복음에 많이 나와있어요. 근데 예수님 말씀에,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없애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온전하게 하러 온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하고 주고받고 주고받고하는, 서로 티격태격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있다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라고 할때에. 율법을 볼때에 그냥 맹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율법을 볼때, 인간은 날때부터 뭐가 있다 했습니까? '자기 긍정'. 자기 잘남을 근거로 해서 성경을 본다 이말이지요. 그러면 율법을 온전케한다는 것은, 내 잘남을 율법을 지킴으로써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식으로, 실천에 옮기겠지요. 자기의 죄인됨을 드러나는게 아니고, 자기의 훌륭함을 드러내기위해서 법을 지킨다 이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율법으로 한다면, 그 다음에, 만약에 그런 율법이라면, 여기 20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있죠.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천국에 못간다고 한다면, 누구도 천국에 못간다는 말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못한 사람들도 줄줄히 천국을 못가는 거에요. 결국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하면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그 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단코 자기 행위로 천국에 못감! 이걸 가지고 뭐라하느냐? 율법의 완성으로 보는 거에요. 그래서 참 희안하지요. 자~ 이런 해석은 말로하면 자꾸 잠이 와요.
그래서 이것은 연극식으로 제가 액션을 보여줘야하는데. 여러분밖에 없어가지고. 하여튼 여러분이 바리새인이라 합시다. 서기관이라 합시다. "누가 완벽하게 십계명을 잘 지켰느냐?". 이렇게 자랑하고 있다 이말이지요. 근데 제가 갑자기 여기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하는 말이. "저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근데 이 가운데 제일 잘 지킨 분이 이분입니다. 근데 이분마저 천국에 못간다고 한다면, 나머지 모두는 천국에 못갑니다. 왜냐면 내 자체가 율법이요. 나는 완성이기때문에. 율법의 완성으로 왔기때문에. 여러분들은 나를 믿으면 되지. 앞에 버젓이 와있는 이 율법의 완성은 안믿고. 속닥속닥속닥. "누가 더 잘지켰어? 누가 지켰어?" 여러분끼리 백날 비교해봤자, 만약에 여러분끼리 잘났다고 해버린다면, 여기 온 사람은 머슥해지잖아요. "내가, 메시야가 왜 왔지? 자기네들끼리 잘하고 있는데 내가 왜왔지? 그럼 내가 괜히 왔어? 내가 괜히 온거야 그러면?". 이렇게 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의 율법의 행위에 선을 포기하세요. 여러분의 율법의 의를 포기 해야만, 율법의 완성은 내쪽이 아니라, 예수님쪽에서 이미 완성체로 왔다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되는겁니다.
여러분 키가 얼마입니까? 160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160에 너무 관여해버리면, 예수님의 키는 140이 되어버려요. 뒤에 있어서 안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난장이가 되어버리면, 항상 내 뒤에 계시는 분은, 항상 그 사이로 등장을 하지요. 우리는 십자가의 다 이루었음을, 자꾸 누가 가로막느냐하면은,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을 쓰다보니까. 내가 하는 신앙생활에 내가 너무 이렇게 신경쓰다보니까. 누가 가리워지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 이 행하신 율법의 완성이 자꾸 가리워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우리 인생에 어려움을 줘가지고, 누가 자빠뜨리느냐하면은, 이 고목같은, 이 고목같이 썩어질 우리를, 자빠뜨리게 만들어요.
몸이 아프다든지, 사업이 안된다든지, 엎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누가 보입니까? 멀쩡하신 주님이 피로써 우리 눈에 띄지요. "아~ 주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내가 내 쓰잘데 없는 짓들을 그동안 참 많이 했구나". 촛불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너무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촛불앞에서 아름다워 보이지요. 형광등 앞에서도 우리가 멋있어 보입니다. 근데 만약에 태양앞에 서봅시다. 태양앞에 서버리면 우리는 뭡니까? 그냥 타버리지요. 아름다울 것도 없지요. 그것을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 보면, '복음의 광채'라 합니다. 복음의 광채. 태양의 광채보다 더 유난히도 눈부시는, 그 광채 앞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다". 3층천에 올라가가지고. "내가 지금 여기 어디지?". 꼭 모세 같아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가지고, 내가 지금 어디있지?도 몰랐습니다.
이사야가 성소에서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복음의 광채가 비추어버리면, 우리는 내가 무엇을 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는 그런 궁시렁궁시렁거리는 잔소리같은 소리가 우리에게서 나올 이유가 없어요. "뭐 남편때문에 골치아픕니다. 자식 애맥여서 못살겠습니다. 교회 장로 목사"같은 그런 소리. 그런 이야기가 복음의 광채 앞에서는, 그건 뭐 다 사소한 일에 해당되는 겁니다. 뭐 46명 물에 빠져죽고. 다시 이야기합니다. 물에 빠져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그들이 귀신 되어가지고 어디에 가있습니까? 예수 안믿었으면 지금 지옥 가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요즘에 느낀 점은 하나에요. 사람이 자기 죽을때 멋있게 죽는 줄 알지요? 사람은 누구나 죽을때, "아~ 나라는 죽음도 정말 재미없게 죽는구나". 정말 자기 죽을때 시시~하게 죽어요. 뭐 유난떨면서 안죽습니다. 그냥 하품하다 죽어요. 아주 인기없이 죽어요. 인기없이. 인기없이 쓸쓸하게 죽으면서 그동안 안죽겠다고 평생 버텨왔으니. 이런 자존심이, 이런 망할 자존심이 어디있어요. 아주 못된 자존심이지요.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아주 우리를 아주 시시하게 봅니다.(ㅋㅋ) 하나님께서 욥을 시시하게 보듯이. 아주 시시하게 봐요. 하지만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이 십자가의 피는 아주 귀하게 보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지는 거에요. 우리 자신은 이렇게 '즐겨 비참하시기'바랍니다. 비참해야되요. 즐겨 비참하지않으면, 마귀의 시험듭니다. 그냥 비참하면 큰일나고. 앞에 뭐가 붙어야되요? 즐겨! 즐겨! 아주 가볍게 비참하는. 내가 비참해도 괜찮아하는, 아주 가볍게 비참하게 될때, 그야말로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모든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없어져버립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겁니다.
아이고 벌써 눈치도 없이 50분이 되었네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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