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 담긴 비밀
2002년 9월 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 17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불신앙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뿌리도 흔들리면 이 전체가 아프듯이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면 인간 전체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한지, 처음에는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서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다가 좀 더 나가면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보다 대범하게 나가게 되면 이제는 자신의 불신앙을 정당화합니다.
즉 옳은 결정을 했다고 나서게 됩니다. 이런 마음 바탕에는 하나님의 위신마저 조롱하고 마구 꺾어 버렸다는데서 오는 환희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신앙이 아닌 마음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신앙적 태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심두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기 종교심에 관심두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불신앙에서 종교적인 사람으로 달라져서는 아니됩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영적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참으로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쉬운 것은 보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벌린 종교 재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 감사할 마음이 없기에 자기 행위에 자부심을 갖는 것 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겁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죽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아무리 교회 열심히 나와도 하나님은 그 인간을 죽이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아무런 쓸모 짝이 없기에 죽이시는 겁니다.
아무리 찬양을 하고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해도
우리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있는 존재가 못되기에
거기서 나오는 행위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존재물을 마련했습니다.
'새 것'이 있기에 '헌 것', 즉 지금의 것을 죽이시는 겁니다.
이 새 것에 매력을 가져야 합니다.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헌 것에는 미련을 두지 마시고요.
새로운 것이 있다는 점을 가지고 현재 자신의 것이 걸레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새 것과 이 헌 것의 차이에 감사하는 것이 곧 신앙이요 은혜에 감사하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현재 우리 앞에서는 정글처럼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혼잡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길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구원은 위에서 내리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걸레조각 같은 이 몸을 가지고 아무리 굴려봐도 해결점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죽이신다는 이것을 우리는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게 됨에 감사하면 감사 못할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과연 신앙이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14대, 14대, 14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얼른 듣게 되면 앞에서 거론한 숱한 족보의 인물들의 숫자를 그대로 적어넣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헤아려보니, 14대, 15대, 14대입니다. 아브라함까지 다윗까지가 14대이니까 뒷에 것을 의도적으로 14대에 맞추어서 적은 겁니다.
사실 다윗과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 왕 족보에서 네 분이나 빠져 있습니다.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에서 사실은 웃시야는 아하시야를 낳고, 아하시야는 요아스를 낳고, 요아스는 아마샤를 낳고, 아마샤는 웃시야를 낳고 해야 순서가 빠지지 않는 겁니다. 뿐만아니라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요시야는 여호야김을 낳고 여호야김은 여고냐와 그 형제를 나느니라'라고 해야 빠진 것이 없는 순서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에서 왕 네 분을 빼므로 의도적으로 14대 틀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14대에 맞추려면 왕 한 분을 더 빼서 바로 14대를 맞출 것이지 왜 15대로 만들어놓고서 14대 틀이 맞다는 식으로 나옵니까? 관권은 다윗이라는 인물에게 쏠려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인물의 등장을 염두에 두고 아브라함부터 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족보의 틀을 자꾸만 틀었습니다. 마치 기차 철로를 자꾸 바꾸며 달리는 기차처럼 말입니다. 조금씩 방향을 트는 겁니다. 이 방향 틀기에 동원된 자들이 이방 여인들입니다. 혈통적으로 정식 아브라함 족보에 있는 남자가 육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의 여자와 혼인 할 때, '∼에게서' 라는 말이 안나오지만 특별히 이방여자와 혼인했을 때는, '∼에게서'라는 말을 붙여 놓습니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어쨌든 이런 방향 틀기에 의해 다윗이라는 인물이 아브라함 후손 가치를 통해서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출현과, 14대-15대-14대가 14대-14대-14대로 해석해야야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처음에 아브라함과 다윗까지의 14대는, 다윗을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의 정상지점으로 보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의 기간은 정상에서의 추락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이주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출생 사이의 기간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다윗 같은 위상자로 다시 회복시키는 기간입니다. 다시 다윗때와 같은 출현시키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처음의 14대는 그 다음에 나오는 두 14대의 틀이 되는 겁니다. 즉 다윗이 저질른 태의 열매로 인해 추락하는 14대가 있어야 했고, 모든 것이 와해된 마당에서 다윗은 용서하신 그 은혜로 다윗 같은 분,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등장시키는 14대가 있어야 했다는 겁니다. 만약 아브라함부터 혈통따라 내려왔으면 절대로 다윗같은 분은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내포한 족보의 비밀 때문에 그 비밀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방 여인들이 개입해서 족보를 다윗에 맞추어 틀어왔던 겁니다. 다윗이 과연 어떤 분입니까? 그리고 이 풀이가 15대가 14대로 이해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마태복음 1:6에 보면, 거기서도 '∼에게서'라는 말이 나오면서 족보 방향 틀기를 하지만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6를 다시 보면,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되어 있는데, 앞에 있던 세 번의 '∼에게서'에서는 모두 여자 이름이 직접 거론되는데 비해서 여기서는 '밧세바' 라는 여자 이름이 직접 기재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김서방은 박서방의 아내에서는 아들을 얻었으니 그 이름이 김 아무개이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들의 아버지 후보감이 둘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이냐 아니면 다윗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아입니까? 만약 다윗이 아니라면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에서 다윗이 빠지면서 15대가 14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겁니다.
과연 솔로문은 누구의 자식입니까? 이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사무엘하 12장을 잠시 봐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은 남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하게 되는데 거기에 아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태어서 얼마동안 살다가 도로 죽게 됩니다. 처음부터 죽을 아기라면 아예 태어나지도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잠시 낯을 보이다가 도로 죽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 아기의 사망 배후에는 다윗이 저지른 죄가 있음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죄지은 당사자인 다윗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리는 것 대신 그 아기를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그렇다면 밧세바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우리아 장군입니다.
그렇다면 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누구의 죄 때문에 죽습니까? 다윗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죄로 인해 누가 희생당합니까? 밧세바가 임신한 아기와 밧세바의 남편이 죽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희생시키시고 다윗을 대신 살려두시는 겁니까? 바로 이런 다윗의 모습이 아브라함부터 줄줄이 내려오는 신앙인의 맥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께서 꺽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또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의 자세에 본분이요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상식으로서, 죄지은 자는 그 본인이 죄값을 치러야 용서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죄지은 책임은 죄지은 자가 책임진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12:24-2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여디디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음'이라는 뜻입니다.
죄지은 자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덕분의 새로운 아들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다윗의 죄의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입지가 바로 아브라함부터 줄기차게 14대에 걸쳐 추진해온 하나님의 일의 결정체입니다.
당연히 죽을 죄를 지은 자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사랑을 입었다'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솔로몬의 등장은 곧 다윗의 죄가 사해지고 그 대신 이제 사랑을 입은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 억울하게 꺽여진 뼈에 있습니다. 이 '꺽여진 뼈'의 운명을 따라 마리아 '∼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즉 몰락 해버린 14대는 다윗의 죄로 인해 몰락이요, 아무 것도 없는데서 다시 우리아 같은 구원자가 출현하기 위한 제 세 번째 14대는 다윗에게 입혀진 사랑의 실체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내가 아닌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나온 것으로 인해 그래서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할 때까지는 비록 15대이지만 14대로 계산됩니다. 다윗은 결코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신앙인일 뿐입니다. 영적인 사람이지 위대한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으로 보았기에 자신이 얼마나 철저한 죄인이며 아예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속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인도 알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참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사실 우리가 저질러 놓은 죄로 인한 저주의 길입니다. 그 길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의 실상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곧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랑을 입었기에 부활에 참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내가 사는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안에서 사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발 위대한 종교인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서 주께서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