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3강b 1003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1:07

두번째 시간해봅시다.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하게 되면. 구약에 다윗이 왕으로 오신다. 왕1, 왕2가 있을때, 온 다윗이 다시온다. 왜 다시 올까? 여기에 인간들은 실패했고, 인간은 이미 실패했어요. 실패했기 때문에 실패 한 것을, 다윗2가 오는데. 에스겔 37장에 다윗2을 누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왕이 되서 오신다고 되있죠? 아까 에스겔 보셨죠? 거기 보면, 하나님이 다윗왕이 되어서 목자로 오신다고 했죠. 그렇다면 이 다윗2는 인간이 아니고 누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오시죠. 하나님인데 위에 계실때는 하나님이고, 밑에 오게되면 무슨 왕? 유대인의 왕이죠. 유대인의 왕이란, 말씀에 의하면 뭘로 옵니까? 별로 오죠. 이 별이 움직인다는 사실. 따라서 동방박사가 온겁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동방박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본인 구원받는 일입니까? 아니면 지상에 무얼 알리는 일입니까? 지상에 "떳다!". 아기 예수님이 누군가를 지목하는 역할. 오늘날 우리 역할이에요. 아기 예수님 그분이 누군가? 아기는 똑같으니까, 산부인과 가면 애기는 다 똑같잖아요. 그 말이 이제, 아기 예수가 누군가를 지목하고, 그 아기예수님의 그 주변에 이미 구약성경 전체가 거기 다 깔대기처럼 쏟아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예레미야의 말씀. 호세아에 보면, 호세아에 나왔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 내었다"하는 이 말씀. 구약 전체가 이 아기에게로 쏟아진거에요. 그러면 아기 예수가 자라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하면은. 그분에게 쏟아진 구약의 모든 예언의 말씀이, 홀로 짐지고 그 길을 가시는 길이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 실패한 성경 말씀을, 누가 성공한다? 다윗2. 하나님이 다윗이 되셔서, 하나님이 몸소 모든 성경을 다 이루게 되지요. 성경 말씀을 다 이루는 것을 그걸 가지고 뭐라하느냐하면은, 성경에서 '의'라 하고. 제가 아까 의라고 말고 다른 말로 표현했지요? 그걸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이라고 했지요. 거룩. 다 이루었던 그 거룩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냥 우리가 거룩 받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제가 분명히 단언합니다. 뭐냐하면은.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얼마나 간단한 말입니까? 예수믿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천국 갑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못하는거에요. 왜냐? 교회는 교회를 믿어야 되요! 교회를 키워야되고! 교회에 돈을 바쳐야되고! 교회에 봉사를 해야되고! 이건 아니에요! 이건 아니란 말이지요! 그건 아닙니다. 그 수법에 말려들어가면 안되요.

목사가 십자가 지지를 않았어요. 십자가 지신 분을 믿어야지, 십자가 지지도 않은 분을-사람을-목사나 이런 사람을 믿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강남에 와서 하면서, 제 소망이 무엇인가 하면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성경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몸의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가르쳐주세요. "목사님요 이 본문은 구약과 이렇게 통하면 다 통합니다"라고 가르쳐주세요. 그러면 그걸 그대로 배워서 또 딴데 가서 써먹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요한1서 2장 27절.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성령께서 너희에게 가르치시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같이 배우는 게 아니죠.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이 이 말에 대해서 '검증'을 해요. 검증. 저 이근호란 사람의 말이 맞는지 안맞는지. 여러분 속의 성령께서 어떻게 합니까? 검증하는 거에요. "저건 좀 과하다. 저건 쫌 오바 아니야? 저건 쫌 동의 되는 것 같은데. 저건 좀 다른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각자가 검증하는 거에요. 성령께서. 왜냐면 본인이 구원받지, 누가 대신 구원시켜주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이 자리에서. 본인이 "아~그래서 예수 믿으면, 우리가 예수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의인 되는구나". 성경 말씀을 토대로 이제 남한테 알려줄 수도 있는 그런 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2장 마지막에 봅시다. 2장23절에.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오호~ 이게 뭐냐하면은.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데. 선지자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없어요. 선지자가 하신 말씀에 나사렛사람이라는 말이 구약 전체에 어디에도 없어요. 어디에도 없어요. 이거 큰일 났어요 어떻게.

왜 마태는 이것을 구약에 나왔다고 보느냐. 이게 이사야 9장에 보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9장에 보면 뭐라고 되있느냐하면은. 구역별로 정해놨어요. 이사야 9장을 직접 한번 볼까요? 아~이거 녹음 되니까 제가 기분이 굉장히 갑자기 기분이 좋아서 업되뿌는데.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기쁨을 얻는데.

이사야 9장에 두개의 구역으로 나눕니다. 9장1절에 보면은.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따잉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대목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자, 갈릴리 땅이 무슨 땅이냐하면은, 나사렛 땅이에요. 나사렛은 갈릴리. 갈릴리는 나사렛. 같은 구역입니다.

구약을 인용할때, 특정 본문을 가지고 인용한 것도 있지만, 구약 메시야가 사는 전체 지역 넓게 다 넓게를 구약 전체를 통해서, 선지자 전체를 통해서 대충 이분은 이 동네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이사야 9장입니다. 특장 문자를 딱 대가지고. 아까 문자를 대서. 호세아 12장 1절 말씀처럼.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겠다"라는 것처럼. 그런 방법도 있고. 특정 문자가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성경 귀절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그런 갈릴리 지방 전체를 사실 그런 제2의 인생을 사실 분이라고 알려주고 암시하는 대목이 아까 이야기한 이사야 9장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는 이 선지자라는 것은, 바로 나사렛 동네에서 활동했던 모든 선지자들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면서 활동했던 그러한 예언이 된다 하는 것이에요.
 
 정리하면, 예언에는 두가지가 있다. 특정 문장이 있는 반면에 포괄적인 문장으로서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이 두가지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나사렛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사렛 사람 어딨느냐!"이렇게 따지지 마시고. 포괄적으로 그렇게 전체를 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걸 "나사렛 사람이 아니고 많이 듣는 나실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하는데. 나실인이라 하는 것은 민수기 1장에 나와요. 나실인이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포도주하고 시체를 안만지고 머리카락을 잘랐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삼손이였습니다. 그게 재밌어요. 나실인이라는 것을 잠깐 소개해드릴께요. 여담으로 알아 놓으세요.

나실인이, "나는 정한 몇년동안 깨끗하게 살겠다"라고 정해놓으면 머리카락이 자랍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난다는 그 기간만큼, 자기는 뭐했다? 그런 시체와 포도주를 손에 안대고. 포도주를 안먹었다. 포도와 관련된 그런 음식을 손에 대지 않았다는 증거로써 머리카락이 자라납니다. 나실인이 오년이고, 육년이면 육년이 딱 끝나면, 머리카락을 짤라버려요.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신체부위가 섞이지 못하는 제물에 특별히 그 머리카락은 그게 방해되는 거에요. 방해되버리면. 그 나실인의 그러한 헌신적인 예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나실인이 규칙을 지키는 그것을 학수고대했던 사람들은, 나실인이 그 자기헌신에 날짜에 성공함으로 말미암아, 나실인에게 기대를 걸었던 모든 사람에게 복이 돌아오는 그런 법칙이 민수기6장에 나실인입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누구냐? 삼손입니다. 삼손이 마지막에 죽을때, 뭐가 잘렸습니까? 머리카락 잘렸잖아요. 머리카락 잘리고, 삼손이 죽을때 그야말로 자기의 힘가지고 자기도 살고, 이스라엘도 구원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선 나실인은 그게 아니고, 지는 죽고, 자기는 죽고, 덕분에 남들이 사는 식이 바로 나실인이에요.

그러면 마지막 나실인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구약 성경 전체가 자꾸 모든 성경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에다가 촛점을 맞추는 겁니다. 이런 것을 끄집어 내면, 성경은 정말 놀랍고 신기하고 재밌어요. 아~ 참 재밌어요. 이것은 교회에서 안하고, 성경공부 하면서 이걸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것까지 다하면, 설교시간이 1시간 이상 길어지니까, 처음 오는 사람들 삐져서 안나올 수가 있습니다.

나실인이라 하는 것은, 머리카락이 제물에 포함되는 유일한 경우다. 제물 덕분에, 제물이 대신 죽으신 덕분에 백성이 사는 그 속에 나실인의 머리카락이 들어가니까. 나실인은 고생은 자기가 해놓고, 혜택은 누가 받고? 남들이 혜택받는 거에요. 그래서 나실인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람만 할 수 있지. 아무도 못됩니다. 나실인의 아버지 이름이 뭐지요? 마노아지요? 그 마노아 가정이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천사가 와서.

"이 집에 자식 없지요?"
"예 자식 생각 안합니다"
"자식 있을것입니다"
"아이고 좋아라"

좋아 할 것이 안되요. 없다가 생겼다는 이말은. 그거 니 자식이 아니다라는 거에요. 없다가 생기는게요. 마리아가 어디 임신하고 싶어서 기도했습니까? 난데없이 애를 낳았으니까,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림받겠습니까? 마리아는 그 자식이 마리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게 다 그래요. 우리 봉사하는 것도, 내 좋아라고, 우리 집안 잘되라고 봉사하는게 아니라, 주께서 일을 시키면, 남 좋아라고 주께서 일을 시키는 거에요. 이게 바로 천사도 부러워하는 직분입니다.

 3장에 봅시다. 그때에. 2장 아시겠지요? 십자가의 흔적이 악마와 대비하면서 이루어졌다. 3장에 보면요.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느니"

야~ 이 대목에서, 뭐가 사람들이 어려우냐하면은. 천국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죠? 천국이 '가까이왔다'고 하는데. 그게 몇센치입니까? 가까히 왔다는데, 몇센치를 말하는 겁니까? 몇일 왔다는 말입니까? 몇일 뒤에 천국 온다는 이야기에요? 신학자들이 이것때문에 골치가 아픈거에요. 도대체 왔으면 온거고, 안왔으면 안 온거지. 아니, 가까히 왔다는 이것이 도대체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가까히 왔다! 언제? 어제도 성경봐도 가까히 왔다고 되어있고, 오늘 성경봐도 마태복음3장에 가까히 왔다고 되어있고, 내일 성경봐도 가까히 왔다 그러고. 도대체 사람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아니 가까히 왔다, 가까히 왔다 그러는데. 언제까지 가까히 온거에요. 벌써 몇년째에요. 몇천년이에요. 몇천년동안 가까히 왔다 그런거에요. 가까히 왔다는 게 무슨 의미냐는 거에요. 이걸 신학자들은 입을 다물어. 모르겠다는 거에요. 이건 뭐 부정관사 백날 언어 따져도 이건 몰라요.

가까히 왔다는 것은 이뜻입니다. 보통 우리가 가까히 왔다는 것은. 참 이것만 해도 어려운데요. 가까히 왔다. 참어렵습니다. 잘 들으세요. 가까히 왔다 할때는 자기가 스톱이 되요. 스톱. 자기가 스톱이 되요 스톱. 자기가 스톱하고. 저쪽에서 누가 올때에. "어이~ 가까히 누가 와! 가까히 온다"라고 이렇게 되는거에요. 맞지요? 이쪽이 스톱이 되고, 저쪽에는 무브. 움직이는 거에요.

누가 스톱되고? 가까히 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톱을 해야되고, 멈추어야 되고. 가까히 오는 사람은 움직여 주어야되는거죠. 보통 생각하니깐, 도대체 우리는 뭐냐? "도대체 몇센치야? 몇미터 가까히 온거야? 몇일되야 여기에 도착하는거야. 확실히 이야기해! 확실히 하란 말이야". 택배회사에서 전화가 와가지고,

"거기 401동이지요?"
"예"
"지금 제가 가까히 왔습니다"
"몇분후에 말입니까?"

이게 되거든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가까히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미 스톱을 누가 스톱이냐하면은. 예수님이 스톱. 예수님이 왔어요. 그때는 뭡니까? 아기 예수죠. 아기예수지만 이미 온거에요. 왔는데. 세례요한은 두리번 거리는 겁니다. 두리번 거리는거. "아니, 이쯤일 건데, 이쯤 됬을텐데, 이쯤인데, 아 분명히 내가 전에 이 집에 와봤는데, 분명히 이쯤일건데". 뭔가 가까히 계실건데. 이렇게 되는거에요.

그런데 이 가까움은 인간의 세례의 힘으로 이것이 일치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 없다? 둘중 하나입니다. 있을까요, 없을까요? 영원히 안되요! 영원히 안되는 거에요! 계속 우리는 찾는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아침 9시 반에 기상한다고 할때, 예수님 생각 합니까? "애들은 보자~ 애들은 일어났나?"이렇게 되잖아요. 예수님 생각 안하지요? 근데 갑자기 그날 10시에 차사고 날 뻔 했을때! 뭐라고 합니까? "오~주여!"라고 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멀리 있었습니까? 아침에 내가 주님생각 안할때 주님이 어디 다른 아파트에 계셨어요? 아니에요.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아침에는 애들부터 먼저보고 남편부터 먼저 챙기고, 왜 주님생각 안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틈새에 어떤 사건 사건을 일으켜요. 사건을 일으키면. 남편생각 자식생각 해가지고. "아휴~내가 자식때문에 골머리 썩고 아프다. 이 군대에 가야되는데"라고 온통 하고있는데. 갑자기 이빨이 아플때. 갑자기 전혀 이것은 애들 생각과 내 이빨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상관 없지요? 전혀 무관한 어떤 일이 탁 터져버리면. "아이고~주여! 지금 성경공부를 해야되는데 이빨 아프면 못가는데 왜 이빨 아프게 해가지고 저를 힘들게 합니까?". 갑자기 예상밖의, 예상밖의 아픔이 오고. 갑자기 전화와서 "여보, 내가 지금 병원에 있다". 갑자기 남편이 병원오면, 갑자기 뭐라그러느냐면은, "오~주여"이렇게 되지요. 물론 좋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보 로또하나 샀는데, 한 200 받았다"이렇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항상 가까히 계심을 그때. 이 가까히 왔다는 말은. "진작부터 가까히 계심을, 우리가 여러분 늘 느끼도록 주께서 해 주실것입니다" 하는 말을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분 주님께서 가까히 계십니다. 가까히 왔다. 가까히 계신다. 놀랍기도 하지만, 구라가 아니냐라고 의심해도 괜찮고. 오바한거 아니냐 의심할 수 있어요. 알레고리가 아니냐할수도 있고 이래요. 그런데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성경 구절에 다 들어가잖아요. 뭐냐하면은, 바리새인들이 물었거든요.

"예수야, 하늘나라가 어딨어? 하늘나라가 성경에 의하면, 저기오고, 여기오고, 어떤 사람은 저기에도 온다하고, 어떤사람은 여기온다고 하는데 어디있느냐?"하니까.
"우리 가운데 계시다"

이미 온거에요. 온건데, 그 사람은 뭐냐하면은. "당신이 기적을 행해봐. 당신이 병을 고쳐봐. 귀신을 쫒아봐!". 기적을 원하니까. 이게 가로 막히는 겁니다. 함께 있어도. 가까히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라고. 함께 있어도 함께 있음을, 우리의 분주함, 우리의 관심사가 너무나 자기 일에 집착하다보니깐 놓쳐버린단말이죠.

보통 일요일날이요. 일요일날에, 보통 평범한 일요일이라면 우리가 교회가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요일이 설날이라든지, 미국에서 손님이 온다든지, 그것도 하필 열시반에 공항까지 가야된다든지. 이런일이 있으면, 순간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느냐하면은, "주여~어떻게 할까요?"라는 거에요. 그 사람은 해답을 원하는거에요. 교회 갈까요? 아니면 손님맞으러 공항을, 시누이가 오랫만에 온다는데 공항에 마중을 나가야됩니까?. 어떻게 합니까?라는 해답을 원하는데. 그런 해답을 만들어내는 그 자체가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안계시면, 절대로 그런 고민을 안합니다. 그게 평소에 주님이 가까히 계시는 거에요. 그러면 그 시누이. 오랫만에 오년만에 공항에 그 시간에, 일요일날 아침에 오게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오게하셔가지고, 우리와 함께 있음을 깨닳게 하는거에요. 그럼 해답은 간단하지요. "그러면 목사님 공항에 갈까요? 아니면 교회에 갈까요? 어느쪽이 옳습니까?". 뭘해도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뭘해도.

"목사님, 남편이 교회를 안가가지고, 우리 계약했습니다. 한달에 두번 교회 나와가지고, 두번은 등산 가기로 했는데. 저 어떻게 할까요?"

그냥 하고 싶은데로 사세요. 그렇게 고민하고 묻는 것 자체가 주께서 가까히 계신 겁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너무 방치하고, 너무 방종하고, 너무 자기 마음데로 어떤 규칙도 없고, 그야말로 지 기분내키는데로 해놓고, 나중에 가가지고, 이건 주님의 뜻이다. 나는 이근호 목사한테 배웠다. 이게 주님의 뜻이다라고 핑계댈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신앙이라하는 것은, 남한테 보여주는 신앙이 아니라.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본인이 알기때문에. "이렇게 하세요"라고 해서 명령 들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목사가 이렇게 하세요"라고 하면. 목사가 시키는 데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참고로 들어요 참고로. "아~그래 당신 생각은 그런 뜻이지, 하지만 행동은 내맘대로 할거야".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이기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하면은. 주님이 그런 예배한번 빠져 먹어버리고, 어디 가고, 이것때문에 주님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때문에 주님께서 복을 철수해 가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내가 교회 참석하지 않아서 복을 철수해 간다든지, 구원이 안된다고 노리는 것이, 아까 제가 이야기한 바로 '마귀'가 그렇게 하는거에요. 마귀가. 마귀가 그렇게 하는거에요. 스스로 마귀가 우리들한테 그렇게 하는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이제 진도 나갑시다. 갑자기 제가 왜 흥분을 하고요.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라"

여기 한번 봅시다. 여기에, 말씀 그대로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기에 이 말씀 그대로 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여기 계시고, 세례요한은 여기있죠. 이렇습니다. 골짜기가 여기있어요. 골짜기. 골짜기가 여기 있어가지고. 길이 이렇게 있어가지고. 길을 찾으려면 골짜기로 이러이렇게 올라갔다가, 돌았다, 이렇이렇게 가야되요. 그림이 이렇죠.

가까히 왔다 그러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자, 여기서 뭐냐하면은. 내가 왜 왔냐하느냐면, 여기 세례요한하고 플러스 사람들. 사람들 웅성웅성 거립니다. 내가 온것은. 이것은. 이명박이 현대건설에 있을때, 정주영회장하고 한게 뭡니까? 경북 고속도로 내버렸죠. 이걸 골짜기는 낮아지고, 골은 높아지고.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고속도로가 뚤려버리죠. 뚫리면, 바로 뭐가 보이죠? 고속도로가 뚫려버리면, 여기서 보면, 가까히 왔다 하는 분이, 지금 멀리 보이지요. 그야말로 가까히 온 것 맞잖아요.

그전까지는 뭐야하면은, 골짜기가 이렇게 되어있으니까. 주님이 안보이고 가까히 오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근데 이것을 밀어버리니까. 주님이 바로 함께 있는게 보이잖아요. 그럼 이 사람들이 주님을 어떻게 봐야됩니까? 알아서 바로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가요. 세례요한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이사야 40장1절의 말씀대로, 산이 깎이고, 고을은 높아지고 되지. 내가 개인적으로-사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이것은 예언이라는 말씀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아휴~설명하는 내가 다 힘들다.

예언의 말씀은, "알았다니까요,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요". 이게 예언의 말씀이 아니고, 예언하시는 그 말씀과 함께 있을때. 비로소 예수님이 그 말씀 안에 계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 '웅성웅성'하는 이분들은, 세례요한 말대로 뭘받아야되냐? 물 속에 잠수해서, 세례를 받아야되요. 세례를. 세례를 받게되면, 물속에 들어가면 사람은 어떻게 되요? 산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죠. 결국은 이 골짜기가 낮아지고, 높아지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이 가렸다? 우리고 스스로 힘으로 살고자하는 것때문에, 이 골짜기가 다 사라진 거에요. 근데 세례요한은 이런 낮아지고, 높아진게 없기때문에.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는거에요.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누구한테 하는 겁니까? 물속에서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에게 비로소 "보라! 방금 네가 들어갔다 나온 것은 니 죄때문에 들어갔잖아". 우리의 죄때문에 회개해서, 우리의 죄때문에 물속에 잠수되야 하는 거잖아요. 그 죄. 물속에 들어갔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고. 바로 물속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죄인입니다. 어린양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어린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경우에만! 뭐가 딱 매치가 되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겁니다. 의미로 다가오는거에요.

이번에 토요일날 백석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바로 옆에 있는 박사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근호 목사는 왜 저주를 자꾸 이야기하느냐,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데 왜 저주를 이야기하느냐"라고 했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막 방해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건 방해하는데도 해야겠다싶어서. 막 고함지르고, "하지마!하지마!"하는데 말했어요. "저주받는 상태와 세리-창기가 될때, 비로소 자기가 자비롭고, 은혜가 은혜롭습니다"라고 한마디 했다고요.

그것마저 안하면, 진짜 내가 너무 억울할것 같애.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면, "왜? 저주 빼놓고, 자비-은혜를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건데. 왜 그 이야기 안하느냐?"라는 거에요. 사람이 자기가 저주받는 사람이 되어 봐야! 진짜 자비가 얼마나 고마운지, 용서가 얼마나 고마운지 안다고 이야기 한거에요. 그거 하고 난뒤에 제가 "아후~내가 정말 서울에 올라온 보람을 다 했다". 그것이 마지막 답변이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왜? 더 이상 시끄러워서 못하니까. "끝내라! 끝내라! 빨리 쉬어라! 끝내자 끝내자!"라고 막 나오니까 더이상 할 수가 없어요.
 
마지막 멘트가 그거였습니다. "저주를 받아봐야, 은혜가 얼마나, 용서가, 자비가 자비답게 된다고". 세상에 그 성경말씀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힘들었어요.

질문자: 사람이 누구나 다 자비만 원하니까요.

예. 저주가 아닌 상태에서 그걸 원하니까. 완전히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죠. 세리와 창기가 천당가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제가 이야기하면, "아! 알았어. 그럼 세레요한 볼 일 보고, 우리가 알아서 예수님하고 만날게". 안됩니다. 세례요한과 더불어서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물속에 잠겨야, 내가 죽어야 마땅한 걸 알때. 이런 죄를 위해서 대신 어린양이 오셨다는 것이 비로소 매치가,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진도 나갑시다. 여기에보면, 여기 6절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러 오는데, 여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오거든요. 그때에 7절에 보면은 뭐라고 이야기 느냐하면은.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했어요. 원뜻은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이에요. 독사의 새끼들아. 자식이라는 것은 사람한테 하는 말이고.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거기보면, 하나님이 약속을 주기를, 여자의 후손하고 누구하고 싸웁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죠?

자,여러분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뱀은 아시죠? 뱀. 뱀의 후손은 누구지요? 아마존에 있는 그 뱀의 또 뱀새끼입니까? 이렇게 되어있어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 싸우는 모든 자가 뱀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찾아내요. 왜? 싸우니까. 싸우니까. 천사는 누구냐하면은, 악마와 싸우면 천사가 되는거에요. 바리새인과 싸우면 예수님이 사는거에요. 사도바울의 복음을 반대하면, 사탄의 일꾼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사도바울의 복음이, 복음대로 전파해줘야되요. 십자가를 전해야, 그 교회 내에서 십자가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가가 들통나는 거에요. 그냥 십자가 전하면, "여러분, 우리는 다 뭡니까?". "십자가!!!". 어느 교회든 다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어느 목사치고 그렇게 이야기 안하는 목사 없어요. 다 이야기 해요. "주께서 재림하십니다"라고 다 이야기해요.

그런데 막상 십자가를 전해버리면. 물지요. 나가라고. 공격하고 욕하고. 아~ 십자가는 언어로만 때우자 이말입니다. 십자가라는 언어로만 때우고, 십자가에는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말자는거에요. 왜?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면, 교회를 안나오니까. 교회는 기도해서 복받으러 오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있는 교인들이 다 떨어져나가잖아요. 대구의 성명교회는 사람들이 오면, 봉투에다가 삼천원씩 넣어서 주지요. 그걸보고 옆의 교회가 오천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대구의 범호교회는 그걸보고, 만원줬어요. 만원. 그래서 대구에서 지금 범호교회가 제일 부흥되요. 그 동네 노인네들 전부다 모이는거에요.

그래놓고 자기는 복음 전했다는거에요. 그게 회개입니까? 그거는 돈을 얻으러 오잖아요. 회개가 아니잖아요. 아~ 예수님같으면 예수님 옆에 돈봉다리 놔두고 예수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돈주고 그랬습니까? 안했죠. "날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라오라"라고 했습니다. 말이 십자가지, 요새말로 번역하면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그거 있잖아요. 유골을 잘게 갈아가지고 단지에 담는 것. 유골함이죠. 유골함을 애기들 싸는 포대기에 담아서, 등에 지고 사시면,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이미 나는 죽은 자로 사는거에요. 죽은 자로 자기 해골은 등허리에 지고. 그렇게 가면, 주님이 아주 잘보입니다! 주님이 참 잘보여요! 아~ 예수님이 이렇게 가셨구나. 잘 보이는 거에요. 어떤 분이 어제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제가 대장암 말기에요. 제가 곧 죽는데, 죽을때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감사 기도 하시면 됩니다"
"어느 귀절에 그게 나옵니까?"
"고린도 후서 5장1절에 나옵니다"
"거기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힘이 없어요 목소리에요. 이제 곧 돌아가실 모양이에요.

이제 나의 장막집이 벗어지면,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하나님의 장막을 입을건데. 지금 성도님처럼 죽음과 가까히 가시는 분은, 스트레스가 없고, 곧 들어가면 되지만, 지금 세상 사람들은 지금 죽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살기 때문에 점점 더 십자가와 점점 더 멀어져 간다고. 십자가와 점점 더 멀어져 가지고, 누가 십자가 이야기만 하면 도망쳐 버리고, 나중엔 십자가 이야기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 믿고 어떻게 살려고, 사는 쪽으로 가다보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가 나를 살린다는 것. 죽은 나도 살린다는 그 의미가 화끈하게! 정말 뜨겁게! 신라면 먹는 것처럼. 고추 매운 것 어디 고추입니까? 청량 고추처럼 화끈하게! 내가 죽어도 영생얻는다는. 영생이 청량고추처럼 화끈하게 다가오질 않아요. 왜? 지금 자기가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그런데 그분은 뭐냐하면은, 본의 아니게, 곧 내일이든, 모레든 죽기때문에. 막 이 몸을 벗는다는게 얼마나 속시원한 것인지. 진짜 다 이루었다하는 그 느낌을.

"그래서 당신은 참 행복합니다. 감사하다고 기도하세요. 하나님 이런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세요"

2층 올라가는데, 마지막 계단에 올라갔어요. 문만 열면 들어가요. 문만. 천국에서 문을 열어주지만. 문만 열면 빛이 나오겠지요. 천국의 빛이. 쏙 들어가면 되는거에요. 다른 사람은 살라고, 내치는데.

그래서 이 성경말씀이라 하는 것은, 세례요한처럼. 세례요한이 출세할라고 이럽니까? 아니지요. 세례요한도, 이런 세례요한 선지자 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희망사항이였습니까?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없었어요. 없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엘리사벳에게 임신한다는 통보를 해줘가지고, 임신해가지고, 밴 애가 있는데, 그 애가 이름이 누구지요?  이름도 자기가 이름을, 아버지가 이름을 못지었고, 천사가 와서 서판에 써서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세례요한의 인생이라는 것은 출세할라고 하는 것 전혀 없고, 주께서 시키는데로, 시키는데로 살다가 나중에는 쟁반에 목따다가, 쟁반에 이렇게 바쳐다가 죽지요. 불쌍합니까? 그거 참 안됬어요? 우리보고 안됬다고 해요. 우리보고 오히려. "아이고~ 참 고생많네~ 제대도 못하고, 니들이 참 고생이 많다". 이렇게 하지요. 그래서 이 성경을 본다는게, 이 성경을 대한다는 게, 얼마나 우리자신이 성경을 대할때의 마음자세가, 낮아져야 됩니다. 참 낮아져야되요.

 자, 그 다음에 한번 봅시다. 여기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했는데. 여기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할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 독사의 자식이 뭘보고 왔습니까? 독사의 자식이 뭐가? 미지. 미지의 뭐가 있기때문에 왔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이 세례요한 보고 왔습니까? 누구 보고 왔습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독사의 자식들이 세례요한을 보고 온 것으로 보이지만. 세례요한은 영적인 사람이기때문에, "너희들이 나타난 것은, 내 말고, 미지의 인물-예수님을 보고 나타난 독사의 자식들아". 그래서 이들이 와가지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세례요한보고 와가지고.

"어이~ 너는 어느 신학교 나왔어?"

이렇게 나왔어요. 그게 지난 토요일날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똑같애요. 세례요한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너 누구한테 계시 받았어? 옆에 있는 박사가 하는 말이, "이런 해석은 구약해석 역사상 없는 해석입니다"라고 평을 했어요. "어느 신학교 나왔어? 누구 가르쳤어?". 그래서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뒤에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구원받는다면 누가 구원받는 다고요? 돌맹이도 구원받겠다!.

야~ 여기 9절에 나오지요.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돌맹이도 구원받겠다. 자, 여기서 제가 어려운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여러분 돌맹이가 구원받습니까? 안받습니까? 돌은 구원 안받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돌맹이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지요? 그러면 바리새인 재껴놔버리고, 왜 돌맹이를 이렇게 사람으로 만들어서 구원 왜 안하십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는데. "야~ 저리가 저리가. 나 돌맹이 가지고 구원할거야". 이렇게 돌맹이 구원하시면 되잖아요.

왜 그들로 나오게 했습니까?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마귀의-뱀의 자식을 거쳐야, 독사의 자식을 거쳐야, 여자의 후손이 어떠한 희생을 치룬다는 것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이 독사의 자식중에 누가?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고요. 우리가 돌맹이들 잠자고 있다가 구원받을까?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시키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싫어! 우리는 예수님하고 헤어질거야! 예수님께서 나를 힘들게하면 나는 예수 안믿을거야"라고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는, 뭔가 내 속에 예수님에 대해서-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뭔가 반발하는 그런 힘이, 아직도 우리 안에는 습관처럼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에요. 아~ 우리는 뭐보다 못하다? 돌맹이 보다 못하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여자의 후손,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구나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닳게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우리보다 더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10절에 봅시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라는 거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합시다. 이미 도끼가 우리의 무릎. 우리의 무릎관절이 아니고, 발목 관절에 놓였다고 생각해보세요. 도끼의 날이 발목관절에 놓였다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간질간질~ 하겠지요? 제가 왜 도끼가 나무뿌리를 발목에다가 두느냐하면은. 제가 왜 이런식으로 쉽게 할라고 이런 예를 드느냐하면은. 우리는 자기의 눈에 보이는 이 덩치 자체를, 자기 어릴때부터 자기가 애써서, 애써서 성과한 열매로 간주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고생 안했으면, 내가 공부 안했으면, 오늘날 이만큼 내가 될수 없다라는 자기 전체를. 자기 애씀의 덩어리 자체로. 덩어리 전체로. 오늘날 자기 자체를 자기 애써서 얻은 열매로 간주하려고 하기때문에 제가 이 발목 뿌리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걸 도끼로 탁 짤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에 있는 열매가 파닥! 넘어지겠지요? 하나님께서 도끼를 들고, 바로 발목뿌리를, 위에는 나무니까. 나무 밑의 뿌리에 도끼를 대고. "하나! 둘!"하고 찍는다는 겁니다. 그 찍는 역할을 누가 합니까? 지금 세례요한이 하고 있죠.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한번 교회에서 하기가 참 힘들겠죠. 너무나 부정적 견해이기때문에. 너무나 부정적 견해이기때문에 힘들겠죠. 그러면 이 나무뿌리라는 것이 뭐냐? 원래 뜻은 나무뿌리라는 말은 뭐냐하면 바로, '역사'를 끊는 겁니다. 역사를 끊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낼테니까 한번 맞춰보세요. 사람이 어떤 역사를 이렇게 구축하면, '역사', 나의 역사, 자식의 역사, 남편의 역사. 이렇게 구성한다 합시다. '우리교회의 역사'이런 것. 역사를 구성하면, 그 구성한 본인은 역사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질문이 이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역사를 상상하고 구성을 딱 해놓으면, 그렇게 상상해서 만든 그 역사안에, 그 역사를 보는 관점이 역사 안에 들어갑니까? 밖에 나옵니까?

첫번째. 밖에 있어버리면, 이 사람은 또 하나의 역사가 또 생기지요? 자기 밖에 있기때문에. 자기 역사가 또 있잖아요. 자기역사. 역사가 둘 되버립니다. 역사가 둘이 되요. 한번 예를어서, "우리 가족은 거짓말장이다. 거짓말을 잘한다". 여기 우리 가족은 거짓말은 잘한다고 말할때, 이 가족중에 이런 말을 하는 본인은 포함 됩니까? 포함 안됩니까? 포함되겠지요? 그러면 이말은 거짓말이네? 방금 한 이말은 거짓말이네요. 우리 가족은 거짓말을 잘해라고 말한 그 자체가 거짓말 되어버리잖아요. 자기의 그말도 거짓말 되어야 우리가족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맞잖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지금 말장난 하는게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사람은 '나 빼놓고 다 거짓말쟁이다'라고 하거든요. 내 빼놓고. 내 빼놓고 다른 사람은 다 거짓말장이다라고 하면. 그 본인은 그 가족에 포함이 됩니까? 안됩니까? 포함이 안되죠.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거에요. 그래서 뭐냐하면은, 인간은 항상 어떤 역사를 꾸밀때, 본인을 집어놓고, 역사를 생각합니다. 본인을 집어놓고 역사를 생각하면서, 본인은 그 역사에 포함이 안된 것처럼, 바깥의 외각지점에, 역사 바깥의 지점에 자기를 딱 세워요. 이걸 초월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역사 초월의 지점에 딱 자기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이말은 뭐냐하면은, 남들은 다 하나님께서 저주하되, 나는 빼달라는 그런 심보로써 모든 걸 본다 이말입니다. 모든 걸 다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되면, 자기가 뭐가되느냐면, 자기가 신이 되지요.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이 모든 역사를 판단한다고 우기지요. 나쁜역사든 좋은 역사든, 저 사람 좋은 역사, 이 사람 나쁜역사, 다 판단하는거에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쉽게 설명 해봅시다. 여기에 파마한 엄마가 있어요. 여기 아들이 하나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때 아들이 학교에서 오줌을 쌌다. 오줌을 쌌다 이렇게 됬어요. 오줌을 쌌다. 엄마가 이야기 합니다. "얘~ 너 초등학교 2학년때 오줌쌌어". 그러니까 엄마 보기에, 엄마의 역사에 애의 역사가 뭐냐? 여기 있고, 태어나서 초등학교 2학년때, 오줌쌌다. 지금 중학교 3학년이다. 6학년때는 수학여행, 역사가 이렇게 있었고. 엄마가 보는 역사가 이렇게 아이에 대해서 이렇게 있잖아요.

그런데 애는 뭐라고 하느냐면, "엄마, 초등학교 2학년때에, 나는 옆에 부잣집 여자애를 알았어". 그럼 얘는 오줌싼 것은 잊어버리고, 얘의 시간 역사속에는 뭐가 빠져있습니까? 초등학교 2학년때, 부잣집 친구가 왔는 걸 집어넣겠지요. 이 역사와 똑같은, 아들이고, 똑같이 그 역사를 지켜보면서, 엄마의 역사, 엄마가 보는 아들역사, 아들이 보는 아들역사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른거에요. 그럼 어느게 맞습니까? 둘다 맞는 잖아요 둘다. 둘다 맞는 것이 아니고, 둘다 자기 입장이지요. "얘 너 오줌 싸느라고, 내가 그것 빠느라고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너는 기억 안나는구나"하면, "엄마, 모르겠다. 나는 처음듣는데?"라고 하고 있다고요.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를 믿어도, 예수믿는 경험을 말하면, "니 믿는 예수하고, 나 믿는 예수하고, 다 달라". 역사가 다 달라. 역사가 다 따로 나와요. 이것을 어떻게 통합시킬 수가 없을까요? 한번 아이디어 내보세요. 이걸 통합시켜 보잖말이죠. 카드마다 내는 사람마다 각자 다 다르니까. 이걸 전체로 다 한번 통합시켜 보자 이말이지요. 이게 통합이 안되면 구원이 안되니까. 이걸 통합시키는 방법이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까요? 머리 좋으신 분 한번 지어내보세요. 다른데 어떻게 했을까요?

방법은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역사속에 들어와버려요. 예수님께서 이 역사속에 들어와버리면. 어떤 역사든간에, 이 역사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렇게 오줌 싼 것이든지, 이웃집 부잣집 친구였든지간에, 관계없이. 이 모든 역사는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어야 될 '죄악의 역사'였다는 것을, 다 칩에 들어가버리면, 내 역사속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들어있는, 그런 역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포함된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역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바로 나는 죄만 짓는 역사인데, 같이 들어왔던 예수님께서 내 대신 돌아가셔서, 그 역사 자체를 승화시키셨군요. 천국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새로운 성령의 노선으로 바뀐다는, 말씀대로 바뀌어 졌군요"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나 하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오줌싼 것도 뭐라고요? '하나님의 은혜'. 왜? 역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내속에 들어왔던, 거기서 죽으셨던, 그분이 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앞으로 10년후에 여러분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역사는 주님께서 은혜를 주신 역사지요. 그걸 미리 안다는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치매 걸렸다. 예수 누군지도 모른다. 죽었다. 그럼 지옥갑니까? 아니죠. 지금 알고 계신 주님께서, 그것까지 다 책임을 져 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미리 하이카, 보험 들어놓으면, 차사고 나면 누가 다 알아서 해줘요? 하이카가 다 알아서 다 해주는거에요. 주님께서 미리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니까, 우리속에 성령이, 우리들의 모든 역사, 일방적인 나의 역사를, 자기 역사로 다 바꾸어내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구약에 있었어요. 여러분 요나 알지요? 요나 선지자가, 자살을 할라고 한거 여러분 압니까? 요나 선지자가, 자살을 할라고 했어요. 세상에 선지자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목사입니다. 자살이 죄라는 것을 뻔히 알아요. 근데 왜 요나 선지자가 자살 할라고 했어요?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자기가 예상한데로 계시가 진척이 안됬어요. 그래서 자기 자존심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것은 선지자로써 이거는 도저히 자기를 자기가 용납이 안되요. "내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예상도 못하고, 틀리게 햇다면, 내가 기분 나빠서 더이상 선지자 노릇 못하니까, 부끄러워서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죽이십니까? 아니면 도로 살리십니까? 살리시지요. 주님께선 뭐를 포함시키느냐 하면은, 선지자가 자살을 하려 할때는, 니느웨 성에 대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알았는데, 지가 삐져가지고 자살하려고 할때, 하나님께선 뭐냐? 니느웨성때문에 삐진 너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요나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마지막 4장 대목이에요.

죽을라꼬 딱 있으니까, 날씨가 땡볕이니까, 그래서 주께서 박넝쿨을 키웠습니다. "아따~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말은 이제 살만하다 이렇게 됬습니다. 살만 하다하니까, 다시 방금 박넝쿨을 키워서 그늘을 주신 하나님께서 졸지에 그것을 말라 죽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여! 죽겠습니다!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특히 사막에는 최고기온이 50도가 넘는데요.
"죽겠습니다!" 할때에,
"이제 니 따가운 걸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봐라, 너 이렇게 죽을 것 살려놓으니까, 참 고맙지?"
"고맙습니다"

선지자가,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 있는 역사를 가지고, 남의 역사를 평가 했습니다. "저건 더러운 놈 죽어야돼, 나는 구원받아야 되지요~" 이랬다고요. 근데 주님께서 임해버리니까, 그 사람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처럼, 잘난체 하는 내 속에도, 잘난체 하는 나도, 그 같은 죄도,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갈라디아서6장에는, 누구든지 나를 비난하지 말라, 내안에? 그 다음에요? '예수의 흔적'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의 역사속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역사속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서, 지금 역사 말고, 앞으로의 모든 역사도, 주님의 은혜로 카펫트 깔듯이, 촤악! 깔아간다는 거에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 역사를 누구 역사로? 내 욕망의 역사로 자꾸 번역하지요. 번역해가지고, "내 자식은 이렇게 돼야 되고, 나는 이렇게". 자꾸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여러분들 속에 펼쳐 놓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역사는 짤려야 됩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라는 것은, 지나온 모든 역사는 짤라 내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4페이지에. 성령과 불로, 이거하고 10분 쉽시다.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자, 여기서 세례가 몇번 나옵니까? 지난 시간에 여기 안했지요? 했어요? 물 있고, 불 있고, 성령세례있다고 했지요?  지난 번에 했는데, 잊어버렸으면 다시 한번 하면. 물세례는 그냥 회개하고, 물 뿌리면 쭈그려 앉아있는 거고. 불세례는 저주 받는 거죠. 성령세례는. 이 성령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영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영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합류한 예수님의 대속. 우리를 다 대신 구원하는 그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택배로 다 전달 되는 것. 성령세례.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며,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받는구나"라는 것을 한꺼번에 다 알수가 있죠.

이 불받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피'라고 했어요. '피'. 피라고 했는데. 요한 일서를 한번 봅시다. 요한 1서를 왜 찾아보느냐하면은, 이게 하도 어렵다고 묻는 사람이 있어서요. 요한1서 5장 6절 말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절을 보면,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라"

예수님에서 나왔기때문에 하나가 되는 거에요. 이걸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걸 '성부성자성령' 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데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증거가 뭐냐? 물과 피와 성령을 주신 것을 증거한다. 그래서 이분이 우리에게 그대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증거하는거에요. 그러니까 물과 피와 성령가운데서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물과 피 성령. 다 우리 눈에 안보입니다. 그냥 교회 세례받는 것이 물이 아니에요. 피라하는 것도 보통 사람피가 아니거든요. RH+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셋다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주실때는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없는 걸 줘요. 그래서 구원 시키는 겁니다. 우리의 축복받은 증거같은게 없어요. 뭐 기도해서, 로또땄다라는 것이 증거가 아닙니다. 물과 피와 성령이 있어야 증거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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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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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17 18:28  
주의 길을 예비하고,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는 일을 맡은 신앙의 선배들을
만나게 된 것이 참 행운이다.

그분들은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게하지 않고,
주님께로 향하는 길을 제시해주었다.

방향 제시를 해주고, 힌트를 주는 역할.
백화점 주차장에서 수고하는 안내도우미와 같으신 분들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친히 수많은 거짓의 산과 골짜기를 깎아서,
십자가로 직행하는 고속도로를 까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

사도바울부터 시작해서, 베드로, 요한, 그리고 십자가마을 주민들과 가르치는 은사를 받으신분들 모두 그 일에 동참된 자들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는 참 명언입니다.

-질문과 답변-
질문자:
공부란 이것저것들을 다 내유익한데로 끌어모으고자 하는 시도가 될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성도가 평생가도록 공부해야한다면 공부는 어떤 자세로 해야하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먼저 공부하신 목사님께 여쭙니다.
 
답변자: 
넓은 벌판 위에 하염없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지평선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가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넓은 벌판 한 곳에 움집을 짓고서는 그 안에서 평생 박혀 살면서 집 밖으로 안 나오고,
그저 조그마한 창문에 턱을 괴고 맨날 보는 지평선만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지평선 너머 무엇을 있는 지도 모르는채 자아와 세상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자신을 자신이 만든 울타리에서 내어쫓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을 타고 벌판을 내달리면 지평선 너머로부터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타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내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세계의 소식을 나에게 가져다 줄 자들입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예수님의 세계를 보다 풍성하게 알기 위해서,
만나도 또 만나지는 모든 이들로부터,
그들의 지평선 너머로부터 얻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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