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강-d
시작합니다. 두번째 시험은요. "저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이말은, 메시야가 되었으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야되는데, 사람들에게 인기 끄는 방법은, 기적을 베풀 때에 사람들은 너를 추종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는 뭐냐, 일단 밥을 먹어야되고. 두번째는 힘내어서 메시야 일을 열심히 하면, 사람들은 너를 추종하는데 그 메시야나 아니냐를 판단할 때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희안한 기적을 베풀면 너는 사람들에게 왕으로 섬김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 사탄의 두번째 시험입니다.
첫번째는 '일단 살고 보자'고, 두번째는 뭐냐, '기적을 베푸는 것', 세번째는 '세상이 너의 것이다'. 이 세가지를 유혹했습니다. 이 세가지의 유혹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장 되어있어요. 우리는 아담의 죄가 있기 때문에,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하던지 간에, 기도를 하던지 간에, 교회를 나가던지 간에, 항상 이 세가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잘 살고 보고', '기적을 일으켜서' 남들로 하여금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고, 궁극적으로 나의 현재 이 처소가 확장되고, 나의 사업체가 확장되고, 모든 세상 좋은 것은 전부다 내가 차지하는 그러한 지향점, 소망, 기대.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논문을 쓸때 그렇게 썼어요. 인간의 미래는 희망의 홀컵이다. 홀컵 아시죠? 홀컵. 골프칠때 또르륵 똥!하는 거. 인간의 미래는 자기의 희망을 거기다 담아놓는 홀컵처럼 그렇게 기대하고 있어요. 이 꿈이 없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꿈☆이루어진다. 이거 어디 나오는 겁니까? 월드컵 할때, 꿈은 이루어진다. 김연아는 어릴 때 꿈이 이루어 졌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김연아 때문에 거덜난 가정이 한두 가정이 아닙니다. 골프해서 LPGA로 가는 비율이요. 사법고시 비율보다 더 세거든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골프해서 박세리나, 신지애같은 애들만 부하게 되고, 나머지는 다 사라지는 거에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되는 거에요. 전부다.
그런데 사회라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스러운지, 그러한 실패자가 모이지 아니하면, 돋보이는 하나가 출생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물에 피눈물 내지 아니하면, 자기가 웃을 수가 없어요. 이게 사회입니다. 이게 사회에요. 도박판이죠. 도박판의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잃는 자의 돈이, 따는 자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지요? 로또도 마찬가지고. 사회란게, 사업이란게 그런거에요. 남들이 모르는 코스를 자기가 알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올인하면, 돈을 버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몰릴때, 치고 빠지는 거에요. 빠져서 새로운, 남들이 찾지않는 사업을 또 구상하는 겁니다. 또 돈을 벌면, 여기 또 우르르 몰리면, 또 치고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 입니다. '편하면서 돈버는 거'. 그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는 게 없어요. 편하면서 돈버는 수가 없을까.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쉽게 돈버는 수가 없을까? 쉽게. 그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은 나한테 있으니까. 나에게 절만 해라. 모든 것을 내가 다 줄께. 이 세번째가 독일의 전설에서 나온, 괴테가 지었던 파우스트에 이 내용이 나오지요. 파우스트. 영혼 가지고 거래하지요. "니 원하는거 다해줄께. 영혼만 내가 마지막에 데려간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 "온천하를 얻고도, 니 목숨 잃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누가복음 12장 부자가 말하기를,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많은 곡물을 이 창고에 넣어주니 곡간을 하나 더 짓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오늘밤에 니 영혼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것이 되겠는가, 이 어리석은 자여!!". 이 어리석은 자여.
잠언서 한번 봅시다. 잠언서 30장 2절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
여기에 보면, 지식과 지혜가 구분되는데, 지혜가 뭐냐하면, 거룩한 자를 아는 지식이에요.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게 지혜거든요. 지혜는 무엇과 통하느냐하면은, 하늘로 통합니다. 근데 지식은 뭐냐, 땅의 성공과 통합니다. 지식은 수평적이고, 지혜는 수직적이에요. 교회에 왔으면, 뭘 이야기 해야됩니까? 지식을 알려주면 안되요. 교회에서 영어 이런 것 필요없어요. 교회에 오면 무엇을 이야기 해주어야 합니까? 지혜를 알려줘서,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야되요. 오늘밤에 죽어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게 그게 지혜입니다.
세상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근데 과학은 누가 만들었는가는 이야기를 안해요. 과학은 '어떻게'만들었는가를 이야기해요. 어떻게. 어떻게라는 논리로 만들었느냐를 이야기하지. "누가 만드셨는데?"-이것을 묻지 않습니다. 태양의 온도가 몇도냐는 것을 묻지, "태양은 누가 만들었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 묻지 않느냐, '나는 어떻게 병을 고쳤느냐"-그것은 묻지만, "저기 의사선생님 나는 누가 만들었지요?"-이것은 안물어요! 그럼 그것은 지식에 관한 문제이고, 지혜에 관한 문제는 아닙니다. 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보고있는, 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남편들은 지식 가지고, knowledge Power입니까? 아는 것이 힘이 되니까, 지식이 힘이 되니까. 지식을 위해서, 무엇을 덮어 버립니까? 오늘도 지혜를 덮어서, 바쁘다는 이유때문에, 교회도 안나오잖아요. 그렇지요?
참 보면, 우리교회에도 그런 분이 있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몰라요. 그들은 말하기를, "교회에 나오니까, 아는 것이 힘인데, 힘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에서 힘을 주지 않고, 예수님이 어떠니,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니, 이런 것만 이야기 하니까, 이것은 내 취향에 안맞는다"라는 거에요. 나는 힘을 원한다는 거에요. 힘.
이 힘은, 힘은 결국에 뭐냐? 마귀의 세번째. 모든 세상의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런데 자기만 힘을 원하면 괜찮지요? 모든 자녀 교육도, 이 시대에 맞는, 맞는 사람, 힘을 가질 수 있는 자질을 양육하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돈벌어서 자식한테 투자하는거에요. 유학 보내서, 어떻게 자식들한테 "힘이 있어야돼. 힘이. 너희들 힘이 없으면 죽어! 다시는 이 아빠 엄마처럼 고생하지 말란말이야!". 어떻게? 편하게. 어떻게? 돈벌게. 편하게 돈버는 방법을 알아내야되요.
세상에~ 편하게 돈버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편하게 돈번다는 것은, 한둘의 유형이 있지. 대부분은 돈을 벌면, 그만큼 힘들고. 편하면 그만큼 돈이 적게 되있어요. 아~ 이것 참, 제가 말해놓고도 이것참 멋진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그러냐하면은, 편한데는 사람들이 몰리고, 경쟁이 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힘든데는, 사람이 힘들기때문에, 잘 안와요. 그러면 거기서 독점하게 되어서, 거기서 돈이 많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어릴때부터 힘들게 공부 해야 돈이 되지요. 어릴때 놀꺼 다~ 놀고서 돈을 번다? 세상에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그런게 어딨어요?
그래서 이 마귀가 하는 말이, 간단하게 합니다. "나에게 절만해라, 나한테 절만해라".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우리 같이 공유하자. 이렇게 했어요. 그러면, 마귀가 절한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인정하냐면은, 세상 모든 권세가 누구한테 있다? 마귀한테 있다고 하는거에요. 근데 예수님은 누구한테 절하자라는 말입니까? 마귀한테 절하지 말고, 누구한테 절하라?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절하자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누구 손에 있다? "마귀, 너한테 있는 것이 아니야! 마귀 너는 비록 이 사실을 인간에게 속일 수 있어-인간에게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한테는 속일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경배하겠다"라고 했다면, 이 방식대로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인도해서, 이 방식대로 끌고 갈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떠납니까? 마귀가 떠나고, 그 다음에 누가 와서 섬기지요? 천사가 와서!! "아이고~ 팔보채 잡수세요~" 이렇게 천사가 와서 대접을 하는거에요. 제가 팔보채에 한맺힌 사람은 아니고요(ㅋㅋ).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은, 하나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세상은, 하나의 연극 무대이지요. 무슨 연극 무대? 예수님하고 마귀와의 연극무대지. 우리는 완전히 빠져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너무 오바하고, 해석이 너무 비약적입니다"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마태복음 8장 29절에 보면, 무덤가에 귀신 들린자가 왔을때.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런데 귀신들린 자가 하는 말이, "어! 예수님! 하나님 아들! 아이고! 왠일이십니까? 우리를 멸망시키러 왔죠!". 본인도 무슨 소리 하는 지를 몰라요. 마귀가 하니까. 군대 숫자만큼, 군인 숫자 만큼 많은 마귀가 있으니까, 붙들려서 하는 말이,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를 멸망시러 왔습니까? 때가 안됬는데, 때가 돼야 멸망하지. 왜 왔습까?". 다른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연극 무대인데, 우리는 거기서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가? 우리가 작은 일 속에서 한번 찾아보세요. 얼마든지 주께서 하신, 그런일을 많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 진도 한번 쫙쫙 나가봅시다. 10절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나오지요. 그래서 아까 예수를 믿는 것은 잘 살기 위함이 아니고, 그건 마귀의 생각이고. 예수를 믿는 것은 아버지께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기때문에 그런 거에요. 다만, 다만, 다만, 그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게 되는겁니다.
12절에 보면, 요한이 잡히고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가지요. 아까 제가 이야기 했으니까 생략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땅 이사야 9장 이야기를 쭉 했지요.
자, 여기서부터 잠시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18절에 나옵니다. 18절에 뭐가 나오냐하면. 특히 선교단체 같은 곳에서 이 대목을 아주 많이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뭐냐하면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 낚는 어부. 굉장히 사람에 대해서, 한 맺힌게 있었나봅니다. 주위에 사람 없어가지고, 한이 맺혀서 그런가요. 사람 낚는 어부라하니까, 이것이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한 사람이 12명을 데려오는 그런 수법같은 게 막 동원되는데.
여기서 '낚는다'는게. 낚는다는게 뭐냐하면은, 낚는게 어부의 본업이잖아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면은, 이쪽이 낚여야된다는겁니다. 낚여야 되는 세계하고, 낚아서 따로 모아놓는 세계 따로 있지요. 세계가 갑자기 두개가 되버렸지요? 둘로 갈라져 버렸죠? 이것은 뭐냐하면은, 분류작업을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12제자를 낚아서, 베드로가 낚는 방법대로 베드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낚도록 이렇게 하겠다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 베드로는 사람 낚는데 신경쓰지 말고, 무엇을 신경써야되요? "어이~ 예수님 당신 한번 나를 낚아보시지!"이렇게 되는거에요. 예수님이여! 나를 한번 낚아 보시란말이에요. 나를! 사람이 잘 낚입니까? 사람은 낚일 존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낚을려는 그 사람조차 자기 역사속에, 자기 역사관 속에 포함시켰기때문에, 낚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지요. 사람은 누구든지.
엄마가 애한테, "너 이번에 산수 백점 맞으면, 내가 휴대폰 사줄께"라고 할때, 그렇게 해서 산수 백점 맞았습니다. 누가 누구한테 낚인 거에요? 엄마가 애한테 낚인 거에요! 엄마가 애한테! 그러니까 사람이 낚을때는 의아해해야 되는 겁니다. "어! 이런 세계는 내가 예상 못한 세계입니다"라는 말이 나와야 낚인 거에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어! 나 이것은 내가 예상 못한 세계인데? 나 이런 세계에 도착한 줄을 나는 몰랐는데?"라고 이럴때 이미 그 사람은 낚아지는 상황 종료된거에요.
"누굽니까? 누구야! 도대체 나를 이런 세계에 넣어준 사람이 누구야?"라고 했을때에 이것이 낚아 진거에요. 그런데, "아마 내가 낚이면 이런 세계일꺼야"라고 미리 짐작했고, 미리 예상 했던 세계라면, 그것은 낚아진 세계가 아니고, 오히려 낚으려는 사람을 자기한테 포섭한 셈입니다. 이거 외에 아주 쉬운 예가 아가서에 나옵니다만은, 연인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는거에요.
사람들 결혼할때, 다 사랑한다고 결혼하잖아요. 특히 애기 낳을때까지는 다 "사랑한다. 나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하잖아요. 애기 낳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첫애기 낳을때는 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이 사랑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사랑의 의미가요.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폭력'이라고 했어요-폭력. 폭력이 뭐냐면, '장악력'. 그 사람을, 상대방을 나의 세계에 장악하는, 장악력을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거에요.
예를 들어서, 남자가 여자한테 "나 당신을 사랑해", 그러면 여자들은 속으로 "당신은 낚였어, 나한테 낚인 거야, 내 미모에 뿅갔어"라고 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세계는 그대로 있고, 남자는 달랑 기존에 있던 자기세계의 영역안에 이미 들어와서 자기의 일부가 된거지요? 이럴때 서로 쓰는 말이, 아주 고상한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거에요. "자기 나 사랑해? 나도 자기 사랑해".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폭력이죠. 강제 수용이죠. 도시계획 강제 수용하듯이, 강제 수용한겁니다.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죠-남자도. 결국은 사랑은 흥정으로써, 대충 얽어지죠. 여자쪽, 남자쪽, 이렇게 해가지고. 대충 이렇게 중간 지점을 생겨나는 것. 중간 지점이 생성됩니다. 이게 바로 결혼인데. 다~ 주진 않았죠. 남자는 다 주진 않았어요. 하다가, 집안의 무슨 아주 사소한 일때문에, 아이 교육때문이라면, 남자가 갑자기 뭐를 공격하느냐면은, 여자의 친정집을 공격합니다. 여기 질세라 여자는 남자의 시갓집을, 자기 시갓집을 공격하지요. "하여튼 당신보니, 당신 아버지가 참 잘 키워놨다"라고 하거든요. 그 배후. 이미 떠나버린, 그 가정까지 다 들먹여버리면, 이게 뭐냐하면은, 두 부부의 싸움이 아니라, 두 집안과의 싸움이 되지요.
그러면 여기에 사랑이 어딨습니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거에요. 그래서 사랑은 어떻게 사라지느냐하면은, 여기서 애기를 낳아요. 애기를 낳게되면, 아기는 1,2에서 제 삼자가 되요. 1,2,3. 제 3자가 되지요? 그러면 애기 없을때는, "우리 갈라서자!"라고 나오다가, 애기가 있게되면 뭐냐하면은, "야~ 참! 내가 참는다! 내가 이 애보고 참는다!"라고 하지요. 애보고. 제3자.
자~!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내가 예상못한 제3의 영역이 구축될때, 이게 사랑이라. 이게 사랑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낚았다. 우리를 사랑했다 이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아버지의 세계, 천국의 세계. 이것을 더욱 감격스럽게 보게 할때에, 주님이 우리에 대한 낚았음의 역할은, 다 된겁니다. 다 된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부싸움할때, 부부생활 할때에 "목사님 어떻게 하면, 화목한 부부생활 됩니까?" 간단해요! 너 말고, 나 말고. 제 3의 영역. 제가 아까 '자식'이라고 했잖아요-자식. 이 자식하면, 이 자식도 얼마 안갑니다. 왜냐? 이 자식도 내 새끼라하고 뺏어가면, 마찬가지니까.
이게 뭐냐하면, 여기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자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러면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막 공격하려고 하다가. 어떻게, 어디를 경유한다? 십자가를 경유하고 가게 되면, 십자가에서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겨서 구원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면, 저 아내는 이 불쌍한, 불쌍하다 했으니까, 불쌍한 나니까, 이 불쌍한 나에게 과분한 여인으로써의 주께서 중매를 해서 나에게 붙여주신 여인이 되는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앞에서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의 남편의 태도가 되겠지요. 말들을 안하시니까, 이런 남편이 없습니까?(ㅎㅎㅎ)
여자도 마찬가지죠. "아우~ 저 인간, 아우~ 정말". 이렇게 하고 싶은데, 십자가 앞에 딱 가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같은 여자도, 나같은 불쌍한 여자도, 주께서 피를 흘려 주었다면. 그렇다면 저 남자는 이처럼,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닳게 하기 위해서, 붙여준 남자라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붙여준 남자라고 할때에. 그 남자를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되느냐면은. "그러면 나는 저 남자에게 어떠한 여자가 되어야 합니까? 주님앞에 어떠한 여자가 되어야합니까?"라는 물음으로 저 남자에게 다가서게 되는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 남자가 비록 나에게, 친정집이 어떠니, 뭐 당신 처제가 행동이 그렇다니, 막 인신공격을 해대도,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뭐해주면 되겠어?라고 하면되지, 같이 반발할 필요는 없다 이말이죠.
사실은요. 이것도 잘못된 일이에요. 제가 성경을 좀더 해보니까. 여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여자를 연약한 자라고 했어요. 연약하다는 말은 뭐냐하면? 여자가 막 퍼부어도, 남자가 바다같은 넓은 마음으로 그걸 감싸줄 줄 알아야, 그게 남자지요! 같이 막 싸우면, 이게 같은 여자지, 이게 무슨 남자이겠습니까? 아니! 여자는 사랑받기 위해서, 결혼한게 여자지. 같이 싸워서 누가 훌륭하다, 그걸 하는게 여자가 아니거든요. 남편이 일방적으로 사랑해주고! 여자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 의미에서, 이게 바로 사랑이라고 '제가 주례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ㅎㅎㅎㅎ)
낚았다는 것은 바로, 새로운 제 3의 영역에서, 우리가 낚이는 겁니다-제 3의 영역에서. 그래서 제3의 영역일때, 만약에 우리가 그냥 낚여버리면, 내가 남을 낚을려고 하지만, 제 3의 영역에서 내가 낚여버리면, 내 힘으로 그 상대방을 낚는게 아니고, "나를 낚아주신, 나를 낚아내신, 그 힘이!, 주께서 나처럼!, 저 분에게도 임하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고 나서겠지요. 내 사람 만들지 말고, 주의 사람 되게 하자 이말이지요. 내가 전도하지 말고, 주님이 전도하도록, 날 사용해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집사님이 교회에 왔다. "아이고~ 우리 집사님이 전도도 잘하고"라고 하면, "아니에요! 아니에요! 내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냥 나를 사용하실 뿐입니다"라는 말을 하자 이말이지요. 그럴때 연말에 냉장고 받고, 메달을 받고, 그럴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힘으로 자꾸 할 것 같으면, 연말에 메달주고, 냉장고 주고, 김치 냉장고 주고, 교회에서 경품들어가지고, 마치 보험회사도 아니고 말이지요. 뭐에요! 보험회사 같으면 거기에 보너스도 있겠지만, 보란듯이 남들 기죽으라고, 그럴 필요는 없다 이말이지요. 그겁니다.
자 그러면 궁금하지요. "그럼 목사님, 어느 세월에 인도합니까?". 그게 마태복음 5장입니다. 흔히 아는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 팔복. 팔복인지 십복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 복. 이 복 가지고 오는데, 많은 여정이 필요해요. 다시한번 보면, 우리는 죄인인데, 누가 홀로 나오셨다? 예수님 홀로 나오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낚아야돼. 낚아서 주님 가신 길로 빼시시 얼굴을 내밀게 하는거죠. 성령께서 주께서, 이렇게 할때에, 성령께서는 빼시시 12제자들이 내밀게 하는데, 그 내미는 세계에서, 뭐가 있느냐. 악마의 세계가 있지요. 악마의 세계는 뭐가 기다리느냐? 축복이 기다립니다. 축복이. 축복은 아까 이야기한 몇가지? 세가지. '잘살고', '기적 일어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는' 축복. 축복인데 주께서는 이 축복 말고, 다른 복을 주시죠.
첫번째 복이 뭐냐?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
와~ 심령이 가난한 자. 어떠한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 글자 그대로 하면, 심령을 텅텅 비우는 사람. 안에 자기것이 없는 사람. 저는 이것을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저는 TV를 거의 안봅니다. 왜냐면, TV를 보아봤자,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기때문에, 짜증나서 안보고 하는데, 가끔 보면. '파스타'. 제가 보는게 아니고, 그냥 보이고 들려요. 하여튼 파스타라는 드라마가 있거든요. '공효진?' 그 배우가 있는데. 어떤 장면에서 제가 굉장히 이상하게 여겼어요. 그 남자 배우, '이선균'라는 사람이 있어요. 둘이 주인공인데. 이선균이라는 사람이 '허연 거탑'이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사람인데. 어떤 대목이 있느냐하면은, 마주 볼때가 인상 깊었던 것이 아니고. 남자가 등을 돌리고 다른쪽을 이렇게 보고 있는데, 키작은 여자가 뒤에서 이렇게 껴앉는 대목이 나와요.
남자가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니고, 남자는 얼굴을 다른 쪽을 보고 있는데, 여자가 뒤에서 딱 서서 껴앉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보았어요. 뭘 느꼈느냐면은, 이 여자의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었느냐 하면은, 여자의 마음속에 이 이선균이라는 남자의 전부가 다 들어있는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속에 자기것이 없는거에요. 보통 여자 마음은 손만 대면 기겁을 하잖아요. 보통 여자가 손만 대면, "성추행이야! 어디서 음탕한 눈을!"이라고 하는데. 이거는 남자가 앞을 보고 있는데 여자가 뒤에서 껴앉는다는 말은, 이미 다 가져갔어요. 다 가져갔어요. 이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이 것임이라. 나는 주님 당신 것입니다! 다 가져가세요! 주님의 뒤에서 주님을 안는 것. 주님을 사랑할때에 뒤에서 안는 거에요. 못떨어졌지요. 공효진이 이선균을 뒤에서 이렇게 껴안는데.
그럴때 남자의 심정이요. 아~ 이 여자는 이미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쳤구나. 이것은 거래가 아니지요. 장사치 흥정도 아니고. 줄 것 주고 받는게 아니고. 이분은 아예 고목이 쓰러져가지고, 썩은 고목. 이쪽 고목이 턱~ 하고 엎어졌어요. 다 가져가! 다가져가! 내꺼 다 가져가! 이런 심정. 완전히 일임하는 심정.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것이 바로 신명기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방금 나오는 이야기가 항상 신약은 구약의 밑바탕에 있죠. 이게 모두 다 신명기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신명기에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나와있어요. "몸과 정성과 모~든 것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이고~ 포기해버려. 그거 너무 심해 심해도 너무 심해". 왜? 길건너면서 사랑하다가 차에 치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이것은 말이 안돼요. 말이 안돼. "그러면 애를 굶어도 교회 와서 예배 드릴까요? 애들 분유도 안줘서 3개월만에 죽게 만들까요?". 말도 안돼거든요.
그게 아니고 상대방에게 붙는 거에요. 뚝 떨어져서 '니는 니', '나는 나'가 아니라, 항상 주님 뒤에 손으로 이렇게 해가지고, "주여~저를 항상 가져가세요. 다 가져가세요. 제 인생을 전부다 다 가져가세요"하고 푹 기댈때. 남자는 감격합니다. 차마 뒤돌아 눈을 못마주쳐줘요. 눈을 맞추게 되면, "너 뭐하기 위해서 이런 짓 했냐?"하기 때문에, 차마 있는 그대로가 좋아요. "그래. 내가 당신 눈에서 눈물 안나게 해줄께"-이렇게. 또 마주보면 문제가 생겨요. 마주보면, 지금 공효진이 젊으니까 그렇지, 나중에 한 60대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귀신이 매달리는 거 같아요 (다같이 하하하). 그래서 황혼 이혼이 많잖아요. 세상에 자동차도 10년이면 바꾸는데, 40년동안 중고타면 재미 없어서 무슨 낙으로 삽니까? 보통 외국에서는 그래요. 세상에 같은 차를 20~30년 타면, 그때는 바꿔도 ㅋㅋ.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 다음에 "애통하는 자는". 이말은, 이게 '통과중'입니다. 그러니 그림만 있으면 다 알아요. 예수님 여기 계시고, 우리는 못갑니다. 건너갈 수 없죠. 왜? 마귀의 축복이 있으니까. 마귀의 축복이, "부자가 돼라~ 기도해서 부자되라. 기도해서 기적받아라. 기도해서 세상에 김연아처럼 금메달 따라". 이런게 지금 계속 하나의 계곡을 완전히 메꾸고 있는데, 무슨 수로 주님을 바라봅니까? 가다가 다 빠져버리는데. 다 빠지는데요. "하나님, 다른 사람은 다 복주는데 나는 왜 복 안줍니까"라고 불평을 하며 다 빠져버리니까.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게 아니고, 주께서 이대로 인도하신다 이말입니다. 주께서 인도하는거에요.
다시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못지킵니다! 다만 말씀 못 지키더라도, 표준은 이거다. 표준은 이거에요. 주께서 우리를 잡아당기면, 우리는 이렇게 이것을 통과하면서, 애통하죠. 왜 애통합니까? 이런 것때문에 애통하죠. 부자원하고, 기적원하고.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다음에 뭡니까? 저희가 마지막엔, 눈물만 흘리죠-눈물. 눈물을 흘리니깐. 눈물에게는 위로가 필요하죠. "좋은 기간 동안 수고가 많다. 나도 이러한 수난을 당했다"
그 다음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이게 뭔뜻이냐 하면은, 온유라는 말이 뭐냐하면은, 소유가 없는거에요. 땅이 없는거에요. 땅이 없는 자는 땅을 받을 것이요. 땅 개념이 천국 개념이죠. '땅이 없는 자는 땅을 받을 것이요' 이런 뜻이에요. 이게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땅이 없는 자는 땅을 받을 것이요. 이 세상 땅에 대해서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죠. 이걸 모르고 어떤 목사는 또 "마음만 온유하면, 여러분 부동산 투기 했지요? 땅값 오릅니다" 이렇게 나오더라 이말입니다.
그 다음 6절에 보면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거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쉽죠? 이것을 통과하는데, 세상을 바라보세요. 여기에 무슨 의가 있습니까? 전부다 자기 이익밖에 없죠. 그걸보고 가슴 아파하는거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아~ 정말 나는 돈이 없어서 목마른게 아니고, 의가 없어서 목말라, 하나님의 거룩이 없어서 목말라" 이런 사람에게는 "저희가 천국가면 배부르게 얻을 것이요".
그 다음에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불쌍히 여기나니". 여기에 가니까, 같은 신세, 같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겁니다. 고아들 불쌍히 여기라는 그말 아닙니다. 이거는 정말 예수님때문에 억울하다 소리를 당하는, 이단 소리 당하는 그런 사람을 보고, 같이 긍휼히 여길때 그 사람도 같은 긍휼을 받을 것이요.
그 다음에 7~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늘을 볼 것이요". 목표를 주님만 바라보니까. 하나만 보이니까 청결할 수 밖에 없죠. 뒤에 것이 안 묻으니깐, 청결한 자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천국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한다는 이말은, 모든 기준이, 소송해가지고 합의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태, 어떤 사건이 오더라도, "우리는 이미 다 이루었다. 이미 구원받았다"는 그 기준을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미 우리는 주님때문에, 우리는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다. 복음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다라고 할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고.
그 다음에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아까 했지요.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되어있고.
11절에, "나를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 다음에 보세요. 너희,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 그러니까 이 코스를 우리만 최초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갔다? 바로 선지자들이 갔지요? 그렇다면, 팔복 간단하네요. 팔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보다 먼저 갔던 선배의 길을, 선배 선지자의 길을, 가는 것이 팔복의 길이지요 뭐. 그런데 선지자들이 완벽했습니까? 아니요! 훌륭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선지자들은 뭡니까? 주님께서 함께 동행하니깐, 그 길로 간거에요. 동행하니까! 자기가 훌륭한거 아닙니다.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한번 봅시다. 시편 105장 15절. 다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여기 선지자들 보세요. 우리 선배. 우리 선지자들이 어떻게 갔느냐 하면은, 요셉을 봅시다. 17절에 한사람을 앞서 보냈죠. 요셉이 종으로 팔렸지요. 요셉이 했습니까? 아닙니다! 제발 당부합니다! 성경 말씀 우리가 지키지 마세요. 주께서 말씀대로 우리에게 인도합니다. 다만 우리는 "아~ 이것도 말씀대로 되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면 되는 겁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거든요. 요셉이 종으로 팔렸는데, 요셉의 뜻이 아니였어요. 하나님의 뜻이였습니다. 18절에 봅시다.
"그 발이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차꼬가 뭡니까? 수갑이지요?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요셉이 뭘 꾸었느냐? 꿈을 꾸었잖아요. 꿈꿔서 꿈꾼 이야기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 이말이지요. 그렇다면 꿈을 준 것도 하나님이요. 발이 착고에 차이는 것도 하나님이요. 온몸이 쇠사슬에 매이는 것도 하나님이였는데.
그 다음에 19절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맞지요? 빈틈 없지요? 아~! 선배들! 우리 선배들이 가신 길이 혼자 똑똑하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선배보다 뭐가 더 세요? 말씀이 더 세서. 말씀대로 인도하다 보니깐, 본인도 인도하지 아니한, "아~ 내가 왜 착고에? 내가 왜 고생해야돼?".
그 다음에 보면, 뭐 있는데. 그 다음에 뭐가 있는데. 그 말씀이 생각이 안나네요. 혼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 여기 있네요. 18절 다시 봅시다. "그 발은 차꼬에 상하며, 그 몸이"라고 되어있죠? 그 몸이 아니고, 뭡니까? 혼이 상하죠. 혼났다 이말입니다. 아주 혼쭐이 났어요. 혼쭐이 났어요 하나님때문에. 이 요셉이 갔던 길을, 요셉이 국무 총리를 내다본게 아니에요. 그냥 요셉은 국무총리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자기 인생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기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루에 2초동안, 한 2초동안도 예수님이 사랑스러울 때는, 여러분 뜻이 아닙니다. 그거 누구 뜻입니까? 마태복음 5장 3절이 여러분께 이루어 진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뭐가 보인다? 천국을 볼 것이요. 아~ 주께서 또 은혜 주셨구나~. 2초입니다 2초. 2초 지나고, "너 공부 안하나! 이거! 숙제 안하나!". 그런데 2초동안은, "아~ 주여 나같은 죄인도 구원받는구나-딱2초. 또 애통하는 거, 또 마음이 청결해서 주님이 생각나는 거.
그런 산상설교 5장 전체가 깔대기처럼. 이게 마지막 그림입니다. 깔대기. 여러분 여기 있고, 여러분이 깔대기에요. 깔대기 하니까 자꾸 막걸리가 생각나요. 옛날에 막걸리 집에 받아가지고, 막걸리 먹을때, 어른들이 꼭 깔대기 해가지고, 막걸리 콜콜콜콜 따라먹고 하는데. 모든 말씀이, 여러분들 속에, 깔대기처럼 주어집니다. 그럼 방금 제가 한 것은, 마태복음 5장만 주어진다 했지요? 그게 아니에요. 사실 마태복음 7장,9장,10장에 이루었다 하는 것, 요한복음 19장. 다 여기 섞여서 같이 내려오는 겁니다. 오게 하여가지고, 어떤 때는 마태복음 5장이 생각나고, 어떤때는 요한복음19장이 생각나고, 어떤때는 창세기 2장이 생각나고, 어떤때는 창세기3장의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이 생각나고. 그것은 그때그때! 달라요~(컬투버젼). 그때 그때 다른 거에요. 이게 뭐냐면 말씀을 옷 입었기 때문에, 툴툴 터니까, 사사기가 튀어나오고, 어떤때는 에스겔이 튀어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큐티가 따로 없어요. 늘 성경을 읽게 되면, 그때 그때마다, 성경 읽은 것중에서, 본인도 모르게, 본인이 예상 못한 성경의 다른 구절들이 퍼뜩퍼뜩 생각나는 겁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알잖아요? 그 영화 나올때, 폰트랙 대령 가정이 탈출 할때에, 수도원에서 잡힐때, 성경 귀절 나옵니다. 고린도 전서 나와요. 수녀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탈출하는 장면이 딱 나와요. 그때가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에요. 그때 사운드 오브 뮤직을 처음 봤거든요. 그때 나왔어요. 내 친구 17번 봤는데, 저는 한 5번 밖에 안봤어요. 근데 나중에 교회 다니고 그걸 다시 봤을때는, "야~ 수녀가 했던 말이, 이게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말씀이구나. 주께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성도에게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 나중에 피할 길이 뭐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하나님 은혜가 생각나. 십자가가 보이는 그런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런데 수녀는 그걸 모르고,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피할 길을 준다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이런 것을 잘 모르는-성경 잘 모르는 일반 사람 같으면 뭐라 생각합니까? "사업이 어렵다. 애가 아프다"할때에, 만약에 고린도전서처럼, "주여~ 피할 길을 주신다는데". 거기 수녀가 하나 더 붙여놨어요. '주께서 모든 창문을 닫아도, 피할 자는 반드시 다른 창문을 열어논다"하는 말이 있어요. 다른 창문을 하나 열어놀까. "주여, 그 다른 창문이 어딥니까 어딥니까?". 토정비결보면, 니가 5월달에 목씨성을 만날 것이다. "주여, 목씨성이니까 이씨를 만납니까? 누굽니까?" 이렇게 하지요. 제가 이씨입니다. 자리 피하려고 점 다시 봐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성경말씀이 비록 유치해보이고, 어떤 때는 너무 알레고리처럼, 어떤 기복신앙처럼 보이더라도,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게 하나의 그때 그때, 남들 보기엔, "에이~ 그 말씀 아닌데, 세상에 그 말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알레고리해요"라고 비웃지 마시고. 그 사람한테는 맞는 아~주 귀한 말씀이 올때는, 또 그 사람에게는 또 작용하기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말씀의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래간만에 같이 모여서, 남들이 안믿는, 이 성경이, 진짜로 믿어집니다. 우리가 이땅에 태어난 것도 모르고, 어딜 갈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계시 받으니까. 아~ 이 성경대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게 되었습니다. 가면서 혼자 가지 마시고, 목자되신 주님께서 말씀대로 이끈다는 사실을, 믿어지면서,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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