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4강b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1. 21:26

마태복음 4강-b

자, 봅시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바리새인을 거론하지요? 바리새인을 거론한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없으면 십자가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한번 묻습니다. 바리새인이 없으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없이는,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서 십자가 사건이 우리 현장에 일어나지 않겟지요. 내가 없으면. 구원받는 내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가 발산되지 않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중에 괴수로 만들어서, 그래서 이 죄인중의 괴수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발산 하도록 우리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이라든지, 자긍심, 우리가 알아서 챙길필요 없고, 주님이 우리를 사용한다는 그것이, 천사도 부러워할 정도로, 귀한 신분이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의 복음으로만, 용서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굴리시죠'. 굴리셨기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아!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견해차로구나,라는 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누구와 파트너다? 바로 예수님과 파트너가 되어가지고, 예수님은 점점더 십자가의 길로, 죽음의 길 다른 말로 하면, 고난의 길, 고난의 길로 가시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무엇으로 가느냐하면은, '힘의 축적', 힘의 축적으로 가는거에요.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하는 모든 말은, 배경에 무엇을 깔고 하느냐 하면은, 이런 발언과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힘이 나에게 모이게 될 것이냐를 염두해두고 행동 하겠지요? 오늘날 이 모습이, 이 바리새인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우리의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 간다. 남편은 교회 안가는데. 남편은 교회가면. "오늘도 교회가나? 왜 가는데? ""다! 우리 가정 잘되라고 기도하는거야"하고 하지요. 그래야 가는 것을 허용하니까. "내 기도 덕분에 당신도 사업 잘되라고, 가는거야?". 얘가 공부를 잘한다는 무슨모임? 힘. 여기서의 힘은, 자기가 하는 사업과, 공부, 하나 더 하면 건강.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가 이거 세가지 말고 뭐 있습니까? 건강 다이어트나 이런것. 건강과 공부와사업. 이거 안되면  이민을 가든지 해야지요. 이 세가지 이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놓고도, 잘했다 싶어요. 이것 빼놓고 없잖아요. 총각 처녀같은 경우는 하나를 덧붙이면, 결혼이 되겠죠. 결혼. 전부다 이걸 위해서 힘, 힘을 위해서 기도. 앞에 하나 보탠다면, 중보기도.중보기도 해서 힘달라는 거에요. 누구한테? 신에게.

그러니까 이 신은, 힘주는 신이지요. 힘주는 신이니까, 성경에 이 용어와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무슨 하나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 용어를 써써, 마치 기도 안하면, 힘 생기고, 기도하게되면 힘 생긴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점점더 힘의 축적이 되죠. 점점더 힘의 응축이 되겠지요. 힘이 모아 지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가는 길은, 있는 힘도 빼잖아요. 있는 힘도 빼가지고 고난의 길로 갑니다. 이때 누가 말립니까? 베드로가 말리지요. "주여~ 힘빼면 안됩니다. 내가 힘이 되어줄게요". "베드로야 칼을 도로 꽃아라, 힘을 쓰는 자는 힘으로 망한다. 다른 말로 하면, 칼로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힘은 진정 없는 겁니까? 과연 없는 걸까요? 제가 문제하나 낼게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2개로 5천명을 5천명을 먹였으니까, 한사람당 보리떡 10개로 칩시다. 보리똑 오만개, 그러면 물고기 5만 마리 먹었다고 칩시다. 합쳐셔 이 오만개의 떡과 오만마리의 물고기. 이 오만 마리떡과 물고기가 힘이 있습�까? 보리떡 5개와 물고리2마리가 의미는, 큰것이 큰것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것이라도 그 많은 힘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해서 오병이어를 한겁니다.

주님은 분명히 힘은 없어요. 힘은 없지만,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힘이, 너희를 구원하는 힘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걸 찾아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면, 구원되는 힘이 생긴다". 우리는 보리떡을 먹고, 뭔가 먹어야 힘이 되잖아요. 먹어야 되는 힘은 먹어도 죽어요. 그런데 먹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힘은, 바로 너희들이 힘없다고 무시하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구원하는 힘이라는 겁니다.

힘 없는 곳에 진정한 우리를 살리는 힘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을 알려주기위해서, 12광주리 남은 것을 버리지 말아라 하시죠. 열두 광주리를 버려버리면,
이만큼 배불리 먹었으니까, 남은 12광주리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죠? 왜 그럴까요? 50000이냐, 12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다 같은 질에서 나왔습니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라는 영원무궁한 힘에서 나왔다고 해서, 남은 걸 모아라. 아! 이제는 꼴보기 싫어요. 음식물 쓰레기로 갖다놓으세요.

작은 것에 힘이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되면, 큰집에 살고 부잣집에 사는 것이 그게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작은 것에서, 셋방살이 하더라도, 있는 것 먹는 것로 족한 줄 알라. 그렇게 그것을 알게된 그안에,  가난은 힘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해도 주님의 은혜인줄 알게하는 그 은혜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하게 하는 그 힘이 안에 들어있어요. 그러한 인식, 사고 방식, 그런 안목, 그런 눈초리. 그렇게 보는 그 세상관. 그 안에. 바로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공부를 할때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인중에 괴수며,

지금 성경공부하는 이 순간에도, 집에 통장이 마이너스고, 그야 말로 쌀 한톨 없다고 여기면서, 그리고 지금 수배장 되고, 세리와 창기 되었다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잘 보여요. 해석이 잘 된다고요. 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보기 때문에. 더이상 세상 힘에 대한 미련이 없기때문에,성경이 제대로 보이죠. 그런데 힘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면, 보면 볼수록 성경을 다 왜곡해가지고, 오히려 복음을 믿는 사람을 더욱 핍박하게 되는 사례가 벌어지는 겁니다.

실제로 제 이야기가 18장에 나와요. 그때 나오는데, 세리하고 바리새인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바리새인은 의로운 힘이 많잖아요. 내가 남한테 헤꽃이 한적이 없고, 십일조 하고, 구조도 하고, 성전에 힘자랑 하러 나왔어요. 그런데 여기 세리는 어떳게 했습니다. 주여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님 여기서 죄인찾지요? 죄인 찾는 다면서요? "저 찾으세요. 제가 죄인입니다. 주님 찾으시는 죄인 여기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왔죠 주님께서 찾으시는 죄인이 여기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하셨어요. "너가 바로 의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맨날 드라마하고 맨날 신문만 보고, 맨날 방송만 보고, 이런 성경을 멀리 해버리면, 이런 성경은 안보입니다.

"나는 저만큼 힘 가졌는데, 도대체 우리 남편은 뭐하고 살았어? 이렇게 지저분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낳지. 남들은 다 화려한데, 그동안 이렇게 긴긴세월 나는 무슨 성경공부를 해봐야 돈도 안생기고.(ㅋㅋ)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하고 자괴감에 빠져버리죠. 은근히 교회 다니면서 힘을 노리는 것입니다. 이거 바리새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안되는 것. 맨날 세상적으로 육적으로 보는 이 우리가, 영적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안되는 이것을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안되는 것을, 힘있는 전능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바꿔주는 그런 의미에서 그걸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 보는 눈 자체가 달라져요. 그게 전능이지. 자기 원하는 것을 중보기도해서 얻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사람이 말한바, 살인하지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받는다. 살인하면 뭐 받습니까? 심판받는다. 제가 처음에 했죠? 바리새인들이 이 성경을, 볼때 첫번째 무엇으로 본다? 율법에 대해서, 안다. 세번째. 아니까 실천한다. 실천하니까 어디를 간다? 참 하나님을 만난다 이렇게 됬잖아요. 성경에 보면,문자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니까, 살인하면, 심판한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다. 틀린거에요. 왜틀렸느냐하면.

첫번째. 사람들이, 살인이, 어느정도를 살인이라고 지 마음대로 생각했죠, 어느정도 살인하면 죽여버린다는 말을 구약에서 보고, 바리새인들이 자기딴에는 안다고 했으니까? 에메모호한 그걸 살인으로 본거에요. 살인이라는 것의 범위를 몰랐던거에요. 그거 틀렸어요.

두번째. 두번째가 더 틀렸어요. 심판을 하는데, 누가 누구를 심판해야한다 겁니까? 심판은 누가 해야되요. 죄 없는 자가 심판해야되죠. 만약에 살인 안한자를 심판해야, 제대로 된 심판이 되잖아요. 근데 살인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살인 안한자가 없게되죠. 살인 안한자가 없고, 다 살인한자가 되어버리면, 살인 한자가 살인한 자를 심판할 수 있어야 됩니까? 없습니까? 못하지요. 그러면 누가 나서야 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자기 기준을 지금 바리새인들한테 하는 겁니다. 먼저 그들에게 전부 이야기 하죠.

"너희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면, 살인한다고 했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도 살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편에 선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모르고, 내력도 모르고, "맞아맞아!! 이러고 싶지요. 그런 것은 주님앞에 통하질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미워해도 그것이 살인죄가 된다는 것을 무조건 동의 하지 마시고, 이유를 알고, 동의해도 동의를 해야되요.

"나는 예수님 좋아~" 이런 다고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 아닙니다.

"왜? 전능하다고? 너 힘좋아하지? 너 나 이용하려고 하지?"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할거에요.

여기서 우리들 한가지 알아야 할것은, 예수님께서는 항상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선 말씀의 완성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편 될 필요없이.우리도 같이 "주여~주님의 말씀이 나를 가지고, 완성되어서 저에게 덮쳐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이번에 강원도에 눈이 많이 왔잖아요? 그 눈이 한송이 한송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오~ 하나님이여! 이 눈송이 같은 말씀이, 집채만한 눈송이가 나를 덮쳐서, 내가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 그런 자세같으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만약에 말씀을 여전히 이용하려하면,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힘을 축척하려는 음흉한 생각을 못버리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봅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 했지요? 자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 또 살인하는 자는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연결고리가 없지요?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더 합당한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이면, 죽이라" 구약성경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형제를 미워하면 그게 살인죄다 라는 구절이 구약에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안나오지요.

결국은 인간들이 아무리 구약성경을 봐도, 인간들이 나올수 없는 이야기만 골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야기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기어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서, 죽일 수 밖에 없도록, 예수님께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못 믿도록, 예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요. 우리 힘으로 믿어버리면 이건 성령으로 믿은게 아니잖아요. 반드시 믿은 사람은, 내 힘으로 믿었습니다라는 말은 안나오고, 성령께서 믿게 하셔서 주께서 믿게 하셔서 믿게되었습니다,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믿었습니다라는 말이 안나오고, 성령께서, 주께서 믿게 하셔서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때 까지!! 계속해서 우리 말을 캇(cut), 계속해서 제치고 "그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주여 제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면, "바로 그거야!"라고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구원받았으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함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나올때까지! 계속 제쳐놓는 거에요.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계속 제쳐 놓는 거에요.

내가 시어머니한테 머리 쥐어 뜯겨 가면서, 교회 나가서 내가 구원받았습니다. 주께서 "그건 아니야. 그건 네가 뭔가로부터 피해를 받았다는 것이 또하나의 의-주특기가-장기가 되는거야" 그게 아니야. 하고 제껴놔버리는 거에요.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설거지하다가 구원받았습니다". 주께서 "그건 아니야. 그겄도 아니야. 그럼 뭡니까?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바로 그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거야". 액션 행동을 어떻게 한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서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기도를 한다든지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든지, 기도원에 간다든지, 이런 법으로 해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그건 다 부흥사나 목사가 사기치는 거에요. 교회 나와서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전도라는 것 주님이 그 사람이 있는 그 자리에 찾아가서 전도하지, 그 사람을 교회 불러놓고,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사람을 불러오는 거에요. 그것은 봉투에다 돈 넣어주면, 다 오게 되어있어요. 한 5만원 정도만 넣어주세요. 일당 보고 다 교회에 오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라하는 것은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주님께서 찾아가면, 찾아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진짜 전도 받은 사람은, 어느 집사님께서 복음 전했습니까? "어느 집사님이 아니고". 그럼 어느 목사님께서 복음전했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아니고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복음을 알게 했습니다"라고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만을. 어느 목사가 용하더라, 뭐 설교잘하더라라는 그 따구 말은 다 빠져야되요. 어느 목사가 아니라, 목사를 어떻게 쓰든지 간에,심지어 이단이 하는 소리를 듣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어요. 여호와 증인이 남긴 복음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도 있어요. 여호와증인이 남긴 그 복음 듣고, 여호와 증인이 이단인줄 알고, 자기는 십자가 믿은 사람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것은 세상에 어떤 경우라도, 내 행함을 가지고, 구원받는다는 소리를 일체 나오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같은 산상설교는 결국 뭘 의미하느냐하면은, 우리로 하여금, 산상설교를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모든 인간들의 노림수를 사전에 차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율법을 알아서, 안 율법을 내가 실천에 옮겨서 구원받는 이야기를 일체 못하도록, 다 차단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어떤 질문이 생기냐하면은, "목사님, 성령이 임해서, 이미 예수를 믿어서, 새 사람이 된 입장에서 산상설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뒤에는 예수믿는 사람으로써, 산상설교를 지켜야합니까? 아니면 구원받았기때문에 지키지 말아야됩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그렇지요? 구원받았으니까, 산상설교를 덮어버리고, 모른척하고, 십자가만 알면 구원받는데, 이거 뭐때문에 펼칩니까?

구원받기 전까지는 우리의 죄를 알기위해서 했다면, 이 산상설교를 볼 필요 없지 않습니까? 지키지도 않을 법 조항을 왜 폅니까?라고 하시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는 산상설교가 법이 아닙니다. 뭐냐하면, 하나하나에 복음이 들어있어요. 레위기나 민수기라는 전부다 제삿법도, 예수믿는 사람에게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있어요. 십계명도 뭘로 바뀌느냐하면은, 복음으로 바뀝니다.

"탐내지 마라"

할때에, 해석을 새롭게 해요. 탐내지마라를 복음으로 합니다. 탐 내지 마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옛 사람을 보고 이 십계명이 지적하는 거구나. 옛 사람을 보고 지적하게 되면, 옛사람은 옛사람대로, 뭐로 드러나요? 죄로 드러나야되고, 이 죄를 예수님의 피로써 새사람 되었구나 라는 것을 늘 다시금 깨닫게 위해서 십계명이 우리에게 복음적 기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한번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믿고 죽을때까지, 80-90이 될때까지.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뭐가 일어나요? 계속해서 탐심이, 세상을 향한 탐심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계속 그렇게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탐심이 계속 일어나는 것을, 아주 즐기시고. 우리 속에 죄가 계속 일어나는 것을 아주 즐겨야 되요.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즐겨울 것이고, 구원 못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이놈아! 이놈아! 나오지 말라는데 왜 또 너희는 눈치 없이 나왔어! 또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겠구만!" 그거 밟는다고 분주하겟지요. 우리는 발각 당하면, 우리는 즐겁지요? "역시 주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안돼" 날마다 발각당하는 것을 또 즐거워 하지요?

어떤 사람은 예수믿고 난 뒤에 탐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여기에 홈쇼핑 보세요. 홈쇼핑 보면 다 탐나!! 다 탐나! 동대문시장, 그냥 백화점 가지 마시고, 동대문 시장 가가지고,  간 그 다음에 백화점 가보세요. 동대문 시장은 물건도 아니래.

그 갖고 싶은 것 있잖아요. 한 오십만원 들고가다가, 결국은 100만원짜리 외상을. 왜냐면, 오십만 그냥 있으면옷을 입어도 즐겁지가 않아요., 좋아 보이잖아요. 100만원짜리 원피스를 딱 대비해보면, 오십만원 옷을 입으면 후회할 것 같애. 왜? 100만원짜리 이미지가 계속 남아있어가지고, 옷을 입어도 즐겁지가 않아요. "아이고~ 백만원짜리 옷도 있는데, 이것도 옷이라고.." 그래서  우연히 길을 가다가, 자기가 찜해놓은 백만원짜리 옷을 입은 사람이 가면, "난 인간도 아니야. 난 살 이유도 없어. 아이고 이 인간 남편아, 못난남편 만나서, 너 평소에 나한테 해준거 뭐있노? 백만원짜리도 못사주고. 여러번 사는 것도 아니고, 딱 한번인데" 맨날 한번이래~ 하여튼 남편 된사람은 보통 많이 힘들어해요. "딱 한번인데" 이러는 부인 만나면요. 세상에 한번 아닌게 어디있어요. 다 한번이지요.

이 산상수훈을 기쁘게 즐겁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자"다 라고 할때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합니다. "오늘 아침 9시부터 나는 지금까지 형제를 미워하고 있구나" 형제를 미워한다. 미워하는 사람 없어요? 주께서 만들어내기까지 합니다. 지금 미워하는 사람, 없다고 하지요? 좀 기다려 보세요. 생깁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물튀기고 가는 차 가면 또 미워합니다. 지하철에서 내 앞에서 휴대폰 소리 크게 통화하면, 또 미워하는거에요.

매일 같이 우리는 어두운 세계. 맛이 간 세계에서 이 산상설교가 바로 죄라고 규정한 그 덩어리 속에 한복판에 우리가 지금 같이 어울려서 탁류처럼 휩쓸려 살아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느끼게 만들어요. 그들을 비난하지만, 막상 내가 그 구조 안에, 그 힘의 구조안에 있으면, 우리는 변명하고 있으면서 그들의 행동과 똑같이 할수밖에 없어요.
똑같이 할 수 밖에 없어요~

애들 함부로 길에서 오줌눌때, "아이고~ 요새 젊은 아들". 그것도 없다. 하지만요. 여러분들이 애 키울때, 12번도 더 했습니다. 식당에서 애들이 맘대로 왔다갔다 할때, 어른들 다 "요새 애들 가정교육이 말이 안돼" 하지만, 본인, 그 사람이 어릴때 다~ 그런짓 했던 사람들이에요. 현재 젊은 아들, 했던 것들은 우리가 다 한번씩 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이렇게 나이 들어보니까, 비로소 우리가 철딱 서니 없게 놀았다. 굴었다는 것을 뒤늦게, 차후적으로 우리는 알게 되지요. 하지만 그렇게 깨닫는 그 나이가, 만약에 오십이라면, 칠십세 되는 노인을 보고, 얼마나 나도 오십때는 그것을 옳다고 생각했어. 또 칠십대는 얼마나 또 꾸짖겠습니까? 칠십대 노인들 같으면 "나도 늙어서 죽어야돼" 하면, 구십대 노인 보면, "어디서~ 젊은게 죽는다 소리해". 이렇게 된다 이말이죠. 또 구십대 노인들을 볼때, 이미 죽으신, 이미 하늘나라 간 사람들이 볼때, 얼마나 철이 없겠습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말씀을 보게되면, 말씀의 깊이가, 우리가 예상못한 일부로 알지만, 전체를 다 보는 입장에서, 말씀을 보기 때문에, 지킨다고 하지 말고, "못지킵니다!"하고 아예 손을 들어버리세요! 이게 지키는 거에요!! 그럴때 우리는 그 말씀이 나한테 의미있게 우리에게 여기에 착됩니다. "나는 못지켜 나는 못지켜" 도저히 미운 형제를 나는 사랑할 수가 없어. 이게 늘 있으세요. "용서하라"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거리가 먼 이야기 입니다. 주기도문 니까?나에게 죄지은자를 용서함 같이 용서해달라. 그것을 실천에 못 옮겨요. 산상설교 어디에 나옵니까? 산상설교 6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 십계명 대로 하면서 우리는 다시한번 주여 십계명을 잘도 외우는 모양인가봅니다만은, 저는 그 주기도문 앞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그것도 거짓말이잖아요. 왜? 우리는 자기 이름을 먼저 우선시 하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우리는 뒷전 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욕하면, 우리는 약간 기분 나빠요.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아무개 너 죽어!" 하고 욕하면, 우리는 발작을 합니다. 예수님을 거론한다고 우리는 발작하지 않죠. 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보다 뒷전이에요. 사람은 자기 이름 욕하면 또 참을 수 있어요. 지 새끼 욕하면 더 미칩니다. 나보다 내 자식이 더 중요해. 서해안에 물에 빠진 사람들 실신한거 봤죠? 그 사람이 예수님 욕해가지고 실신합니까? 군에간 지자식 빠져 죽었다고 실신하잖아요. "이래가지고 누가 군대 보내겠느냐"하잖아요.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혔기때문에 실신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한 1초뿐. 예수님 사랑한다고 실신한 사람들. 없습니다. 그건 핑계고요. 정말 자기 타입의 남자를 못만나서 그래요. 자기 타입의 남자를 만나면 예수고 뭐고 안보입니다. 불교 신자도 괜찮아요. 대시 합니다~ 대시해가지고 기어이 지 남자로 만들어서, 온갖 막장 드라마처럼 머리 쥐뜯기더라도 기어이 살라고 애쓰지 그때 눈에는 예수는 안보입니다.

인간은, 이건 제가 하는 말인데요. 인간은 힘앞에 누구든지 사기꾼 되요. 힘은 누구든지 사기꾼으로 만들어요. 힘은 우리에게 무얼주는가하면은, 안정감을 주거든요. 나그네 인생에서, 정착케하는 거죠. 우리의 모든 정서적인 불안을 감추는 사람은 힘이 있어야 되는데. 힘앞에서 인간은 힘을 선택하지,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돌잔치 앞에서 실놓고, 돈놓고, 책 놓아보세요. 내 옆에다 뭘하나, 십자가를 하나 놔야돼.(ㅎㅎ) 애가 처음부터 십자가를 붙잡으면, 떽! 할거에요. 돈 쥐라고. 

벌써 엄마 입에서 십자가가 빠지고, 이 세가지가 있다는 것은. 돈생기고, 오래살고, 똑똑하고의 이 세가지를 선택한 그 자체가. 어머니의 힘이 일방적으로 그대로 세뇌적으로, 자식에게 파급하는 식으로, 앞으로 양육하겠다. 교육시키겠다는 엄마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거에요.

이게 무슨 성경 하고 관련있습니다. 이런 어둡고 맛이 간 세계에. 주께선 의도 하지 않는데, 빛 되게 하시고! 소금 되게 하십니다! 우리 이것은 예상 밖입니다. 우리는 차라리 이게 편해요. 우리는 안튀는게 편해요. 튀지 않는게 참 편해요. 우리교회 교인들이 오후에 기도하라하면 다 도망가버립니다. 왜? 기도해도 손해고 안해도 손해기 때문에. 하면 믿음 없다고 욕할거고. 안하면 좀 게으르단 소리를 듣지, 욕은 안얻어 먹는다고요.

여기에보면, 22절에 봅시다. 제가 적어볼께요. "살인하는 자는" 뭘받는다? 심판을 받는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다른말로, 지옥갑니다. 살인한자는 지옥에 가요. 이게 민수기 보면 나옵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였으면, 용서받지 못하고, 심지어 도피성이란 곳이 있어요. 도피성이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도피성에 간다는 모든 죄가 용서 받는 다는 그 도피성에 들어가도. 고의로 살인한 사람은, 도피성이 있는데, 강제로 끌어땡겨다가 이 사람은 죽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고의로 살인한 사람은 죽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 문장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안받는다 라는게 인간의 생각이거든요. 근데 깔대기를 세워봅시다. 깔데기 입구에다 뭘 써넣느냐하면은, 이 귀절을 씁니다. "살인하는자는 심판받는다" 사람들 눈에는 이 깔대기가 안보이고, 뭐가 보이느냐? 살인 하는 자는 지옥간다. 이것만 보이겠죠? 그런데 예수님같은 경우에는 그래 보지 않고, 모든 성경 구절 이외에는 전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모든 것이 이 안에 다 포함되게 되어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뭐 까지 보았느냐하며는, 살인한자는 죽는다. 라는 이 문장만 달랑 보고, 그 문장 안에 창세기부터 앞으로의 모든 계시록까지 다 담겨져 있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볼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살인 하지 말라. 심판받는다"라는 것을 병 입구로, 여기 정수기 병이 꺼꾸로 꼽혀있잖아요. 이 정수기 입구로 하여가지고, 정수기 안에있는 모든 성경 귀절에 의해서, 다 끄집어 내어서 결국 뭐냐? "지옥간다"라고하는 결론을 맺는겁니다. 사람들은 이 한 귀절만 피하면, 천국갈수 잇다는 희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성경 구석구석을 다 쑤시면서 다 하니까, 이 성경구절을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성경귀절을 다 어긴 샘이 되는거에요.

이게 야고보서 2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모든 율법을 지키라.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그 나머지 모든 것이, 다 어긴것이 된다.는 거에요. 그 말이 성사가 되려면, 모든 성경귀절 외에는. 성경 하나하나귀절마다, 모든 성경귀절이 다 들어있다. 이렇게 해야 그 말이,논리가 성립이 되는겁니다. 여러분들이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파도 치는 소리가. 물방울 몇개 소리입니까? 아니면 그 바다 전체 소리가 들린 겁니까? 전체소리죠. 근데 바짓가랑이 튀는 것은 물방울 몇개가 튀었지요? 그 물방울 몇개가 파도소리 전부입니까? 아니죠.

사람은 파도소리를 들을때, 분명히 전체를 다 들어야 될껀데, 인간은 한계가 있어가지고, 전체 바다의 소리 전체 가운데서, 들리는 범위 내에서만 듣게 돼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게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율법 하나하나에 전체 파도소리가 다 담겨있는데. 인간은 자기를 긍정합니다. 인간은 자기 긍정.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자기가 살인 하지 않을때는, 씩씩하게! 살인하는 자는 죽일지라!에 대해서 아주 용감합니다. "김길태. 그 사람 죽여야돼 죽여야돼 김길태." 이말은 뭔뜻입니까? 나는 성폭행하지 않았다! 가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음속으로 간음한것도 김길태다"이렇게 나오면 그 소리 못하는거에요.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왔을때, 예수님이 뭐라했습니까? 누구든지 이 성경, 모든 율법에 의해서, 쭈욱 글쓰면서, 아마 율법을 썼을꺼에요. 모든 성경에 대해서, 쭉 쓰면서 그 사람들 갖고 있는 속의 중심을 보면서. 속에 들어있는것,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때문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다 아십니다. 쭉 써가지고, 할때, (3년전에 곗돈 띄어먹은 것같은 것들부터 해서 쭉 서가지고.) 할때. 사람들이 뭐 써놓았는가 하며는, 자기 죄를 쓰거든요. 다 써놓고 하는 말이, 여기서 죄없는 자가 돌던져라하니까, 전부다 돌을 든 손까락 힘이 빠져가지고, 전율!! 부들부들 떤다 이말이죠.

어떻게 숨겨놓은! 내 일기장에 있는 이야기가 왜 튀나오냐이말이지요. 일기장에만 있는 이야기가! 25년전에 일기장에 어떤 자기 아내가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첫사랑이 아니고, 사실은 그 전에 첫사랑이 있었는데, 자기 한테는 숨기고 있지요. 그렇게 자기보다 먼저만난 사람들과 뽀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심지어 임신까지 만들어 놓았을때, 그거는 드라마 작가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때. 썰렁~ 썰렁~ 자기 이야기 아닙니까? 돌을 손에 쥘수록. "자~죄없는 자가 한번 쳐보시지요!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죄 없는 자가! 슬슬 다 피하는거에요.

그런데 이 중요한 것은요. 성도가 되면, 주께서 이렇게 자기 죄를 해도, 피하지 말아야되요. 피하지 말고, 더 떤져야되요. "주여~ 아직도 제가 모르는 죄 더 알려주세요!"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때문이에요. 주님은 건강한 자를 부르는게 아니고, 병든 자를 고치러 왔기때문에, "병 든자 여'끋윱求�"하고 더 땡겨야 되요. 근데 그 놈들은, 돌맹이 놓고, 예수님 면전에서 사라지면, 마치 여전히 자기가 의인이 되는양, 도망치고 마는거에요. 그래서 목사는 강단에서 복음 전해야합니다. 도망쳐도. 그래서 목사는 강단에서 복음전해야합니다. 도망쳐도. 장로도 도망치고, 집사도 도망치고, 15년 댕기다가 다음주부터 교회 안나오고, 목사 설교에 상처받았다고 하면서, 아~마 쫙쫙 빠져나가죠. 다이어트도하는데. 교회에 군살 있으면 안되요. 운동해가지고, 초코렛 복근 만들어야 됩니다. (ㅎㅎ)

복음 전하면 되요. "교회는 죄인입니다"하는 그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쫙쫙 빠져야 돼요. 빠질때 힘도 빠지지요. 나오는 사람중에 한주에 돈 천원씩하는 사람 나오면 "밥만 축낸다고 속 시원하겠지만" 한주일에 헌금 백만원씩 하면, 목사 얼굴이 �기가 돌아요.

그래도! 그래도! 교회는 목사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목사는 복음 전해야되요. 우리 모두는 주님 십자가 앞에서 의인이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갈라디아서2장 기억나죠? 율법의 행함으로써는, 의로움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만약에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받는다면, 십자가는 헛되히 죽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히 죽은 것이다. 고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이 죽지 않은 걸로 믿으신다면, 두번다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십자가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에요.

자, 그 다음에 22절 끝에보면, "이러한 자는 지옥불에 들어간다". 참~설교에 지옥 이야기를 해서는 교회가 부흥이 안된다는, 그러한 것이 참 유행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어떤 찬송가가 있느냐하면은, "내 형제여~~~ 왜 회개하지 않느냐? 회개 하지 않으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라는 가사가 있어요. 그 가사를 교회에서 불러버리면, 교인들 �기가 삭 없어지면서, 인상 퍼득퍼득 거립니다. 우리교회는 그런일 없겠지만, 없기를 바라겠지만, 그래서 긍정적인 찬송을 부르는게 좋다는 거에요. 어머님 기도 못잊어 이제 옵니다. 이런거요? 어머님의 기도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기도가 있잖아요. "부름받아 났으니,어디든지 가오리라"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긍정이잖아요. 그런데 "내 형제여 지옥불에" 간다고 하면, 지옥 이야기를 참 안하게 되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은 강단에 섰으면 어땟을까요?  아주 사정없이 이야기 해요! 이런 인간은 지옥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즐겨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지요. 맞습니다! 가야됩니다! 그리고 갈 사람은 누구다? 바로 접니다! 이렇게 되야되죠. 그렇게 되야죠.

지옥 갈뻔 했습니다. 이런게 아니고, 뭐때문에? 갈림길에서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기때문에, 지옥 가야되는 것을 십자가가 '빠꾸빠구' 해가지고 다시 천국으로 보낸거에요 우리를. 그러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 시대가 바리새인의 시대라 했지요? 아까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와 대결합니까? 바리새인을 의식하면서, 티격태격 하는데, 사실은 그 바리새인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들어잇으니까, 바리새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 우리 보고 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 보면,

"누구든지 재물을 드리다가,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희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때에 급히 화해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옥이니까, 땅밑에 있는 옥을 무엇이라 합니까? 지옥이죠. 지옥이라는 것은 갇혀있으면 못 빠져나오는 동네가 지옥이에요.

"염려하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 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는 화해하거든, 아멘. 완벽하게 의롭지 못하면 어디에 못간다? 천국에 못간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완벽하려고 애쓴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니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말이 성립되지요. 천국은 항상 어디있냐하면은, 바리새인 그 앞에 있어요. 바리새인과 천국과는 항상 거리가 있어요.

개 경주 하는 것 봤지요? 개 경주앞에 항상 뭘 답니까? 개 경주할때 앞에 딱 먹잇감을 달아가지고. 개는 그 먹잇감을 바라보고 달리다보면, 어느새 결승점을 통과하게 되어잇죠. 개는 그 먹잇감을 삼킵니까 못삼킵니까? 철사로 딱 앞에 철사로 거리를 두었기때문에 못삼키죠?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의뢰해도, 천국은 항상 자기 있는 선보다는 항상 어떻습니까? 항상 앞에 있어요.

우리가 밤길에 달을 잡으려고 할때, 달이 잡힙니까? 안 잡히잖아요. 별을 잡을 수 있습니까? 쫒아가면 별이 잡힙니까? 안잡히죠. 우리의 죄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만하면 용서. "나는 이만하면 용서 받을 죄는 안짓는다" 하지만, 항상 어느새 보면, 죄가 우리 앞에 항상 있어요. 그 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성경 보면 나옵니다.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줄 알라. 족하지 않는다면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겠지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럼 염려하면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겠지요? 항상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한다. 지옥갈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먹을거 입을거 염려하는건데, 항상 우리는 눈만 뜨면, 염려가 항상 앞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는 그냥 '아멘'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되요. "주여 죄인 원하십니까? 여기있습니다. 원했던 죄인 여기 있습니다!!" 산상설교 보니까 꼭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소리 맞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거에요. 자신만만하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갚기전에는 결단코 나오지 못하리라"그럼 여기 한소리 합시다. 저는 그건 제가 갚을 생각도 안합니다. 이러면 되요.

그다음에 27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으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 하는 것은, 음욕이니깐, 이것은 인간속에 뭐가 들었다는 말입니까? 뭐가 들었어요? 겉의 인간과 속의 인간이 있는데, 겉의 인간하고 속의 인간 누가 더 세냐하면은, 속에 있는 인간이 더 세지요. 어떤 노인이 60 먹어서, 나는 마음속으로 간음한 적이 없다 하는데,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안에 맘에 드는 여자를 못 만나서 그래요. 아직 이 사람들이 62살이 안되서 그래요. 62살에 다방 마담 만나서..(ㅋㅋ) 쌍화탕 시켜가지고, 하루종일 거기 있고. 화장 떡질한 마담 만나가지고, 망사 스타킹 입고요.

이 겉사람. 이 겉사람이 속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몰라요. 자기도 몰라요. 사람이 분노를 잠재워도. 갑자기 무슨 사태가 벌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버립니다. 흥분해서 주위사람들이 말리지 아니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수가 많이 있어요. 평소에 성격은 온화한데, 여러분 온화한 성격은 없습니다. 온화한 사태만 있을뿐이지, 온화한 성격은 없어요. 급한 일이 벌어지면 실신합니다. 애 죽고 난 뒤에 실신해요. 해군 사령관한테 가가지고 실신합니다. 여러분 점잖 뺄쭐 알죠? 점잖 빼지 않습니다. 내 새끼 죽는 다음에 눈에 뵈는게 없습니다.

사람이 남편죽고 난 뒤에 곧 따라 죽는 다고 하잖아요. 아내 죽고 난 뒤에, 남편도 곧 죽어요. 살 이유가 없어요 살 이유가. 그렇게 싸웠던 남편인데. "아이고 귀신은 뭐하노"라고 악담했던 그 남편이 악담했던 그 남편이, 악담 하고 난 뒤에 그 남편이 그리워서, 가슴이 뻥하고 뚤려 가지고, 사는 것이 밥이 먹히질 않아요. 밥맛이 뚝 떨어져 버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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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젊을때 상사병 안걸려 봤습니까? 상사병 걸려버리면, 공부요? 안됩니다. 고3? 필요 없어요. 고3이 뭡니까? 계속 눈앞에 그 사람 얼굴, 띄면 이것은 춘향이 한것처럼 바싹 바싹 야윕니다. 애들요? 컴퓨터 게임에 빠져버리면 공부 안 합니다. 공부하면서도 컴퓨터 게임 생각만 나고, 크래프트 그거 보면서,

당구 처음배우면,  성경봐도, 당구가 보인다니까요. 인간은 "내가 뭘 원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본인이 모릅니다" 본인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요. 사십대까지 알았던거 몰라요. 오십대 되면 오십대때 좋아하는 것 또 있어요. 또있습니다. 장담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29절에 보면 짤라야죠!! 만일 오른 눈이 뭘 범죄하거든. 간음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장님 같으면 그 여자에 대해서 음욕 품었겠습니까? 물론 문제는 있겠다. 냄새나는 향수 뿌리니까. 그럼 코막히고 장님되면.. 그럼 귀로도 음욕 품는가?

어쨋든, 여기 오른눈으로 음욕 품을 수 잇으면, 그럼 오른눈을 빼자 이말이지요. 여기 참, 주님도 말이 좀 안되는 이야기를 해요. 오른눈 뺀다고 왼눈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눈 두개 있을때 미인이 이미 눈 하나 뺏다고 추녀로 보입니까?

이번주 오후설교에 보면, 암논과 다말의 연얘사건이에요. 그래서 설교준비하면서 제가 그랬지요. 아름답고 아름다운 처녀. 이것이 암논이라는 배다른 오빠한테 유혹거리됬다면, "추한 유부녀" 이거는 왜 남자들이 안좋아하느냐? 이걸 규명해보자. 추한 유부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나이 60 넘은 추한 할머니, 왜 이것은 유혹이 안될까요? 당연하지하는데 당연한 것이 없어요. 따져야되요.

왜 추한 여자는 유혹거리가 안되는가? 당연하지!라고 하면 안되요! 이것은 우리 내면에, 내면에 나도 모르는 내 주인이 뭔가 음흉하게 요소가 있어요. 추하고 아름다움을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 뭔가 괴물이 들어있어서. 이 괴물이 결정해요. 이 괴물을 드러내야죠. 이걸 표면화시켜야 되요. 밖에 내야되요. 그래야 내 괴물이 내 본모습이지. 끝에 연출하고 모방하는 것은 신앙 모방하는 거에요. 그건 가짜에요.

아주 속에 음흉한 것을 드러내야되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이 산상수훈으로 들어오면, 그럴사 하는 내가, 속에 있는 것이 겉이 되고, 겉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가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늘 봐가지고, 뒤집어 져야되요늘~ 속에 숨겨놓은 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그 점잖아하는 것을, 속에 박아넣어서 늘 주님앞에서 죄인중에 괴수인 것을 즐겨, 기쁘게, 가볍게 고백할수 있는 용서하시는 것은 "주님이 용서 하셨잖아요. 나는 죄인 할께요 용서는 주님이 하세요. 용서는 주님이 하잖아요" 라고 주님을 찾아볼수 있는 계기를 늘 갖고 있어야 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