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여름수련회 창세기 강해 제9강 : 창조의 영 - 이 근호 목사
마지막 시간, 제9강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신, 성령이죠. 성령의 출발점은 혼돈이고 무질서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 이 지점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냥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 어두움이 있는 그 자리가 너한테는 딱이다. 우리하고 같이 시작하자. 어둡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무질서한 이 시점부터 내가 너를 새롭게 창조해줄게.” 성령께서는 그렇게 시작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1장 2절에 보면 성령께서 창조에 관여한다고 생각되지만… 성령께서 관여한 창조사업에서 아까 이야기한 흑암, 공허, 이 지점으로부터 인간이 시작을 했고, 창조사업이 마무리될 시점에서는 더 이상 흑암, 공허, 무질서에 성령님이 임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성령께서 다시 인간에게 다가오는 그 시점은 바로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정녕 죽으리라”에요. 이 지점에 가서 정녕 죽으리라는 것을 자신의 창조 사업의 요소로써 그걸 후딱 가져와요, 성령께서. ‘정녕 죽었다. 정녕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가져와서 정녕 죽었다는 것을 가지고 성령께서는 새로운 인간을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성령한테 잘 보일 필요가 전혀 없어요. 우리가 정녕 죽은 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 안하지만 성령은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기 전에 인간은 정녕 죽은 자거든요. 정녕 죽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다 죽었다는 거예요.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이 노래 알아요? 안치환이 불렀던 노래에요. 여기에 보면 ‘품고 사는’이라고 했어요.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안다고 했는데,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자기가 정녕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품고 사는 사람은 성령께서 추진하고자 하는 흑암과 공허의 그 입장과 일치된 입장이 되는 거예요. 무질서하고 공허하고 어둡고.
창조의 개시점은 공허하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개시를 하거든요. 그때 성령께서 팔 걷고서 “내가 나설게.” 하고 성령께서 나서는 겁니다. 처음 시작부터 성령께서 시작했기 때문에 마무리 작업도 성령께서 하시는데, 그렇게 무질서하고 공허한 데서 시작하여 어디서 마무리가 되느냐?
창세기 2장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께서 보기에 심히 좋았고요. 좋아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안식했다는 거예요. 안식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 좀 쉬자. 건들지 말고.”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에 아버지 하나님 입장에서 거기 계실 때 “아, 나는 이제 좀 쉴만 해.”라고 그렇게 기분을 업 되게 하는 데에 누가 그 책임자로 나서느냐 하면 성령께서 나서요.
성령께서 나서는데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니까요, 하나님께서 만족했는지 만족하지 않았는지는 뭐로 알 수 있느냐 하면 안식하는 것으로 드러나요. 하나님께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나 이제 쉴래. 나 일 안할래. 일 끝!”할 때, 성령께서는 창조사업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할대로 다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볼게요. 무질서, 흑암, 허무함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도착지점은 하나님이 쉬시는 것, 하나님의 안식. 여기까지 가는 거예요. 창조의 기본 틀은 이렇게(무질서, 흑암, 허무함 → 하나님의 안식)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안식하시는데, 6일 째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죠. 창조의 기본 틀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는 이 작업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이거 뭐 다 아는 이야기잖아. 우리한테 새삼스럽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지만 이게 새삼스럽게 의미가 있어요.
우리는 정녕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죽었는데 숨이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시작한 일인데 인간은 성령이고 뭐고 관심 없고 자기 자신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관심을 가지느냐?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두 번째, 나는 그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렇게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께서 볼 때 이러한 고백이 ‘죽었다’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껏 끄집어내는 관심사가 ‘①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②나는 그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여기에 있어요. 관심사가 기껏 이런 데 있는 거예요. 그럼 성령께서 묻지요. “네가 이런 고백을 왜 하느냐?” “관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는데?”
성령께서 출발할 때는 항상 너는 공허하다는 거예요. 성령이 찾아왔다는 말은 “이런 되지도 않는 고백 좀 하지 말고, 너는 공허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허무하고 그냥 무질서해.” 그 인식을 성령께서 필요로 해요.
그런데 인간이 좀 안다고 “아, 천지? 그거 하나님이 만드셨지. 성경에 나오잖아요.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이걸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걸. “되지도 않는 고백하지 말고, 이 우주는 예수님의 세계다.” 여기에 관심을 두란 말이죠. “이 천지 만물은 예수님의 세계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천지 만물은 예수님의 세계야.” 골로새서에 나오는 아들의 나라거든요. “예수님 중심의 세계야.” 이거하고, 거기에 되지도 않는 잔소리하고 끼어들면서 “천지는 하나님이 만드셨고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성령께서 뭐라고 하겠어요? “누가 물어봤어? 그걸 누가 물어봤냐고? 나는 피조물이다, 그렇게 나한테 관심을 두라고 누가 했냐고? 성령의 관심과 그리고 너의 관심과 지금 핀트가 어긋난다는 것을 네가 몰라? 네가 눈치 못 챘어? 못 챘지? 너는 죽었으니까!”
죽었다는 말은 관심사가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전혀 초점이 맞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규정, 자기파악 여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예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는 말은 무엇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정녕 죽은 것도 아니고, 나는 아예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왜? 적어도 이 정도 고백했으면 이건 살았다고 쳐 줘야죠, 하나님. 이 정도 고백하니까 내가 살아 있잖아요. 거기다 뭐 3번 하나 더 보탤까요? ①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②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③나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3번 적어야 되겠다. 구색을 갖춰야 되거든요. 인간 피조물의 목적은? 이거 신학교 가면 많이 배우는 거예요. ‘인간 피조물의 목적은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놀고 있네. 이런 소리를 왜 하느냐는 말이죠. 아무것도 아니고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자는 ‘죽었습니다.’하면 끝날 문제지, 이걸 왜 거론하느냐는 말이죠.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창조는 성령께서 예수님의 나라를 만든 거예요. 인간이 아는 것처럼 ‘나도 끼워주세요. 나도 창조의 일부입니다.’ 지금 자기가 기껏 아는 이야기 알아달라는 그런 세계를 성령께서는 만드신 적이 없어요. 그리고 관심이 자기한테 있으면서 “나 예수님이 좋아요. 나 예수님을 사랑해요.” 성령께서 “참, 가지가지 한다. 정말 가지가지 해.”
그래서 마태복음 12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을래, 성령 믿을래?” 이렇게 나와요. 누가?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하세요. 예수 믿을래, 성령 믿을래? 그 대목을 읽어드릴게요. ‘예수님인가, 성령님인가?’하는 그러한 질문이 성립되는지 안 되는지 여러분들이 의심된다면 이 본문을 읽어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해석해보세요.
마태복음 12장 31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들었죠? 들었으면 해석을 한번 해보세요. 우리 해석항쟁 한번 해볼까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나 여기 안 죽었고, 나는 인식과 이성과 합리적인 체제로 쓸 만하게 있다. 그런 내가, 성경에서 예수를 믿으니까 나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오? 성령도 있네. 여기가 마트인가? 성령도 카트에 챙기자. 성령 믿습니다.’ 주님께서 “No. 성령이야, 예수님이야?” 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이 구원자가 아니고 성령께서 구원자라는 식으로 예수님이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성령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성경이 눈에 띄니까 성령 빼고 다이렉트로 직접 내가 예수 믿겠다 하는 그것, 그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단독적인 자기 세계를 가질 자격이 없어요. 성령이 이미 만들어놓은 그 안에서 인간입니다. 성령이 다 만들어놓은 가운데 인간이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성경을 보면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이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에게 확실하게 적용됐잖아요. 이미 현실이 됐잖아요. 그러면 출발점을 어디서 해야 돼요?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죠. ‘강물 같은…’ 그것은 빼고, ‘나의 죽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그럼 죽은 자가 예수를 믿는가? 죽은 자가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 이거 근본적인 문제인데요.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아니, 죽은 자가 예수를 믿을 수 있어요? 없지요? 없습니다. 성령이 와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어요. 모든 책임자는 성령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안식케 하는 책임이 성령한테 있어요. 성령께 책임이 있는데 창세기 2장에서 성령은 알아챘죠. 이 세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뭐다? 그게 안식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만들었어요. 그럼 안식일을 기초로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안식의 전당이 생겼는데 그 안식의 전당이 두 자로 ‘성전’입니다. 성전.
출애굽기 3장에서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억지로라도 출애굽 해야 될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언급해줬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 내가 애굽에 있는 너희를 뽑아 세워서 너희를 이곳까지 오게 한 이유는 내가 너희 안에 성전이 되기 때문에 그래.”
왜 성전이 되는가? 성전은 안식일이 기점이 됩니다. 쉬는 날. 기호거든요, 7. ‘7일 만에 창조를 했는데 그 창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안식한다.’라는 7. 1, 2, 3, 4, 5, 6, 7. 7을 한꺼번에 완성으로 봐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그걸 반복시키는 거예요, 그들의 주업무로써. 1일부터 6일 동안 노동하고 제7일에는 쉬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지금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에 합류된 자로서 주의 일에 우리가 참여되어 있습니다.’라는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을 통해서 안식일 제사를 반복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일 제사할 때 안식일마다 7일마다 찾아오는 특정장소가 있어야 되겠죠. 그 장소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합니다, 솔로몬에게. “우리 성전에서 만나자.” 그래서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의 기도가 굉장히 많은데요. 우리나라에 재앙이 임하고 또는 전쟁에 지거나 백성들이 죄를 짓거나 또 내가 죄를 짓거나 뭐 기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더라도 항상 공통점이 뭐냐 하면, ‘성전을 향하여’ 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주께서 죄 용서하실 거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전은 지난 설교시간에 언급했습니다. 성전은 죄를 씻어주는 장치 또는 시스템이에요.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취지를 양보 못해요. 그래서 “안식일에 어떤 죄를 지어도 성전을 향하면 내가 용서해줄게.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용서해줄게.”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안식과 쉼을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요청을 했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말년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 대처가 에스겔 8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8장 14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성전에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거기에 다무스라는 우상을 성전 안에다 심어놓고 그걸 그렇게 애곡했습니다.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그다음에 무슨 단어죠?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개판이에요, 개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자기의 할 사명이 있거든요. 자기의 할 일이 있다고요. 항상 죄 씻어주는 시스템 장치를 향하여. 항상. 그걸 봐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무엇을 원했는가? 다른 이방민족 우상과의 차이점으로 그들은 힘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그들은 많이 봤습니다. 자신의 것이 자기 소유가 되는 에너지를 축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그들이 둘려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러워했단 말이죠. “좋~겠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왜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소유할 힘은 주지 아니하시고, 맨날 성전을 향하여 네 죄를 그렇게 씻으라고 하느냐?” 거기에 딱 불만이었던 겁니다.
지금 성령께서 구성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나라가 아니에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우주는 누구의 나라입니까? 예수님의 나라고 하나님의 나라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누구 좋으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쉬시려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 쉬시려고 자기 집 만든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 독자적인 자기 세계의 힘 안에서 자기가 쉬려고 하는 거예요. 핀트가 또 어긋났어요.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서 나는 일하고 싶다.’ 뭐 이런 주장을 하는데, 이런 주장은 진짜 성령 없는 사람들은 전부다 동의하는 바에요. 내 가정, 내 자식, 그리고 내 가족, 내 돈을 내가 갖고 사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이것은 어릴 때부터, 소꿉놀이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요새 애들은 그렇게 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무 잎사귀 뜯어가지고 돌에다 빻아서 “너는 아빠해라, 나는 엄마할게.” 하면서 어릴 때부터 엄마가 주도권을 쥐고 사는 거예요. 소꿉놀이할 때부터 가정의 영향을 다분히 받아서 그때부터 여자가 주도권을 쥐고 설치죠.
뭐가 없습니까? 죄 씻어주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에게 오더를 내리시는 거죠. 그 오더가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8장 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것은… 성령께서 이 인간의 육신-혼돈이죠, 무질서, 어두움-의 생각을 간파했어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서 이제는 예수님의 나라를 위한 그런 일을 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진짜 인간을 만드는데 성령께서 일을 개시하는 거예요. 성령이 개시하는데 그 개시할 때 개시하는 모델로, 원천으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용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사용하신 거예요.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씀에 대해서 오해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이 육신에 대해 주께서 기대를 한다는 생각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육신은 육신일 뿐이에요. 오해하지 말자! 육신은 육신이지, 오해하지 맙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미 죽어버린 육신을 가지고 작업을 개시하시는 분이 누구냐? 영이에요. 그러니까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육신으로 뭘 해보려는 인간은 이미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영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이미 죽어버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다고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가꾸는 그 작업을 성령이 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신부기 때문에 신랑에게 걸 맞는 신부 화장까지 그 차림새까지 전부다 그것은 육신인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알아서 다해서 신랑에게 데려갈 때 신랑이 기뻐서 대만족할 수 있도록 성령은 여기서 작업을 다 해줘요. 세상에, 그런 서비스가 없어요. 그렇게 철저히 서비스할 수 있는 분이 없어요. 최고에요! 성령이 다 해줘요. 왜? 우리는 무능하니까요.
그래서 8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그다음에 뭡니까? “인도함을 받는”다는 거예요.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꼼지락거리면서 뭘 한다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인도함을 받으면 우리는 평소에 우리 버릇대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챙기려고 하잖아요. 자기를 챙길 때, 성령께서는 자기 챙기는 것을 쓰레기 치우듯이 다 긁어내요. 새벽 4시가 됐는데 세상에, 쓰레기차 와서 호텔 쓰레기 치울 때, 삐걱거리는 소리를 여러분 들었어요? 주무신다고 못 들었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작업하게 되면 우리가 좀 시끄러워요.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니까. “아까 그것은 하늘나라에 필요 없어.” 그런 식으로.
그래서 로마서 8장을 보면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그다음 나온 단어가 뭐죠? “알지 못하나…” 왜냐하면 성령의 시작은 혼돈과 무지(無知)를 전제로 해서 시작하기 때문에 알기는 뭘 알아요. 죽은 주제에 잘난 척하려는 이 삐걱거림. 안 맞음.
주님께서는 인간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 성령께서 그냥 기계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저거 어떻게 해버릴까, 저거.” 이런 말할 수 없는 걱정과 탄식으로. 걱정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은 아니고 알아서 다해요, 알아서.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근심으로 친히 간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성령님이 찾아오시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시끄러워요. 사는 게 시끄러워요. 삐걱거리고 요란스럽고 늘 이렇게 수시로 불만과 불평이 터져 나와요. 불만과 불평이 터져 나오면서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감사와 기쁨이 되고.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지만. 또 불만과 불평이 터져 나와요.
“좀 가만 나둬요.”
“아니야.”
“내가 알아서 이 정도 했으면 알아서 천국 갈게요.”
“천국은 네 세계 아니거든. 네 세계 아닌데 왜 네가 거길 가? 아직도 관심사가 너한테 있지? 너한테 있는 관심사, 네가 불만 불평해도 내가 그걸 다 쓰레기 처리하듯이 새벽이라도 일해가지고 삐걱거리면서 치울게. 그럼 너한테는 좀 불편하겠지만.”
너에게 관심 꽂는 그 관심을, 생길 때마다 제거하고 생길 때마다 제거할 거예요. 주께서. 왜냐하면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난 귀찮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가세요. 왜 나한테 와가지고… 나는 나 잘난 맛에 살렵니다. 나한테 오지 말고, 다른 사람 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성령이 가셔서 구원하든지 뭘 하세요.”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성령님은 아버지의 영에서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무슨 영으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으로 바뀌었어요. 아버지의 영에서 예수님의 영으로 바뀌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에스겔에 보면 그 의미가 나오는데요. 에스겔을 제가 몇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일단 36장 25-27절에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 우리는 성급하게 자기가 살아있다고 착각해서 이 말씀을 내가 지킨다고 덥석 물잖아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순서가 있어요. 이 말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이 말씀에 대해 인간 손 다 떼게 만드는 거예요. “죽은 주제에. 가만있어, 가만있어.”하고 성령이 어디를 가시느냐 하면 예수님께 가요.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남들은 물세례만 받았어요. 그런데 특이한 분께 지목해서, 다른 사람 빼고 오직 특이한 한 분에게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면서 거기서 어떤 소리가 들려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고 소리가 났어요.
남자 목욕탕 탈의실에 나왔는데 거기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목욕탕 관리인이 휴대폰을 보고 있었던 거예요. 여성이 없어요. 없는데 뭐는 있어요? 소리는 있어요. 그 점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이에요. 부재하는 어떤 소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육신적 예수님과, 사실은 성경 보면서 제일 어려운 대목의 일종인데요, 거기에 달라붙은 아버지의 영이 같이 있으면서 아버지의 영이 육신적 예수님으로 하여금 본래의 사명을 늘 일깨워주는 거울 속의 소리로서 붙어 다니는 겁니다. 소리로 붙어 다니는 거예요.
제가 지금 성령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면 어떤 사람은 굉장히 불평할 거예요. 성령도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성령님을 보조 역할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영광과 찬양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느냐 이런 주장을 하는데 요한계시록 21장 그리고 끝에 22장을 한번 보세요. 그 말이 통하는지.
요한계시록 21장 22절,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성전은 뭐라고 했습니까? 복습 합시다. 성전은 우리의 모든 죽을 죄를 다 씻어서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흐뭇해하는 그런 장치를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놓고 거기서 나와 만나자는 거예요. 성전에서.
그런데 그 성전에 관여했던 분인 성령이 여기서 빠집니다. 성전에 있던 보좌가 세 개입니까, 두 개입니까? 기본적으로 몇 개에요? 이게 하나일 수 있고 둘이 있는데 어쨌든 간에 성령님을 위한 보좌는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의 성전이라”
요한계시록 22장 3절에 보면, 다시 만물이 소생해요. 죄가 없으니까 소생하게 되는데 “다시 저주가 없으며” 저주가 없지요, 장치가 있는데. 성전에서 제사하는 장치가 정상적으로 가동이 됐으니까 죄가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이 무질서한 우리로 하여금 어디를 보게 합니까? 내 죄가 사라지는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살게 하는 거예요. 쉽죠. 우리 인생 사는 것 쉽죠? 스스로 죄를 안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뭐 재료가 있어야 생산물이 나오죠. 죄 사함이라는 생산물을 위해서는 계속 뭐가 투입되어야 돼요? 죄가 투입되어야 돼요. 하나님 보시기에 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하냐 하면, 정녕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기쁨을 완성시키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피조물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에요. 우리 행복한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이 죄 용서에 관여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에요. 중앙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성전이 중첩되어 있고 거기서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왔던 생명수가 나와요.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꾸 자기가 죽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가 공허하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못하고, 천주교처럼 ‘내가 죄는 지었지만 가능성은 있을 거야.’ 가능성. 그러니까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죠. 아직도 배 열두 척이 있습니다. 열두 척 전부다 말아먹어야 돼요.
열두 척이 없어요, 우리는! 아예 없어요. 아예 없는, 아무것도 없는 여기에 아버지의 영인 성령께서 아무것도 아닌 육신을 가진 예수님께 딱 들어붙어서 “아버지의 일을 하세요. 아버지의 일을 하세요.”하고 성령께서는 야무지고 너무 매몰차게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생애 전에 악령을 만나게 했습니다.
성령이 보기에는 인간은 다 죽었으니까 관계없고, 지금 예수님의 원수는 악령이에요. 악령과 예수님과 맞짱 뜨는 장소를 광야에 마련해놓고, 예수님께 어떤 유리한 점도 제거하기 위해서 40일 동안 굶겼어요. 힘도 다 빠졌어요. 심지어 물도 안 마셨어요. 물도 먹고 싶고 떡도 먹고 싶어요.
그런데 악령이 예수님의 솜씨를 알잖아요. 돌로 떡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알고 가서 “기도하더라도 힘내야지. 너무 힘 빠지면 기도도 안 되는 거예요. 힘내고요. 기도하는 거 뭐라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뭐 하나님을 위해서, 메시아라 하는 거 뭐라 하지 않는데 다만 떡이나 먹고 하세요.” 이렇게 했어요. 일단 당신 살리고, 당신이 살아나야 하나님 일을 할 게 아니냐. 너무나 논리에 맞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마치 뭐와 같냐 하면요.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서 교회에서 어떤 권사님이 작심하고서, 40일까지는 너무 건방지고 하여튼 금식하려고 애를 썼는데, 평소에 권사님의 그 위선적인 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다른 집사님이 “권사님, 기도하는 건 좋은데 먹고 합시다. 먹고 하세요.” 우리교회에 그런 분들 계세요. 많아요. 신앙인 척하기는. 아이고, 웃긴다. 내가 당신을 아는데, 먹고 합시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악령의 지배 하에서 인간은 그동안 어떤 식으로 그렇게 후달리고 시달렸는가를 성령께서 주께 실습, 체험시키는 거예요. 40일 체험을 시켰습니다. 그 체험에서 악마의 유혹을 뿌리칠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인간은 이미 ‘정녕 죽으리라’로 죽은 상태에요. 악마한테 사로잡혀서 악마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죽었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죽었다. 뭐 헬스해도 소용없어요. 그것도 ‘죽었다’의 일종이에요. 악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걸 성령께서는 충분히 인지시키는 거예요, 옆에서.
주일학교 설교였는데요.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시달리는 것을 지켜본 존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사인데 천사의 몸 전체가 눈알로 되어 있어요, 눈알로. 수천 수만의 눈알이 꽉 박혀서 전지전능해요. 늘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지켜보다가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시고 마귀가 떠나가니까 그때부터 수건이랑 쟁반 받쳐 들고 와서 “배고팠죠? 물 여기 있습니다. 뭐 맛있는 짜장면 시켜드릴까요?” 천사들이 와서 돌봐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계, 아버지의 영인 성령께서 일부러 인간의 육신이 당했던 그 모든 코스를 예수님이 가게 하시고 천사는 그걸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그때그때마다 도와주시고. 기도할 때도 천사가 도우면서 “이거 참으셔야 됩니다. 우리 주님이여, 이 고비 넘으셔야 됩니다.” 그럼 예수님이 육신을 지녀서 “아… 아버지, 이 잔을 안마시면 안돼요, 정말? 안됩니까, 아버지?” 성령께서, 천사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성령께서 힘을 주사 드디어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면, 육신으로서는 감히 못하는 고백이 나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자 관계입니다.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과 어린양의 성전,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만 있어도 천국을 이루는데 하등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 죄를 씻어주는데 씻어주는 그 근거를, 마귀가 뭐라 해도 저 사람 죄 씻는 것은 일방적으로 내가 씻는다고 그 정당성을 보장할 수 있는 일에 참여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와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은 보조했고요.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려고 하는 겁니다. 전할 때 그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었잖아요. 아버지의 영은 예수님께 집중했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 이제는 아버지의 영이 아니고 누구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영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어떤 신학자는 지금 우리가 보는 요한복음 5장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게 있어요.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 대목. 쉽게 말해서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영을 제가 받았습니다. 따라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안 죽이고 하는 것은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이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거든요, 골로새서에. 예수님 나라로 이미 완성이 될 때 그걸 누가 뒤에서 흐뭇하게 보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흐뭇하게 봐요. “나 이제 제대로 쉰다.” 예수님이 성전이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고, 예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죄 씻으신 공로만 빛나게 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을 내가 정한다.’라고 창세 전에 정해놓고 성령을 보낸 거예요, 그 사람에게.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게 되면 성령이 도달한 사람은 뭐부터 아느냐? 내 처음 시작점이 괜찮은 사람, 훌륭한 사람, 나는 신앙생활 잘한 사람, 이게 시작점이 아니고요. 시작점이 ‘정녕 나는 죽었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데 이 백성 된 것은 이 사이에 누가 끼어들었느냐? 예수님의 공로가 차곡차곡 차여서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고, 예수님의 나라가 나의 나라가 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이 나의 영광스러움으로 꽉 채워지는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용서하신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일방적 행위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위해서 십자가 전에 마태복음 12장에서 인자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죄 사함 받지만, 성령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곧 성령이 도달하지 않은 자는 지금 세대, 오는 세대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성령이 왔다 할 때, 이런 고백은 다 아니라 했으니까 없애버리고, 성령이 왔다면 어떤 고백이 나옵니까?” 물으신다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온 말씀,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님을 주라고 하지 못한다.” 이 짧은 문장, 그게 바로 예수님 나라의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 완성, 그 혼인잔치에 예수님 공로를 축복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예수님 옷으로 예복 입으시고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신혼살림하시면서 이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랑이 그냥 신랑으로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신부에 친히 성령을 통해서 관여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우리의 위치- 허무하고 공허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 죽은 것도 모르고 산 체하는 이 허세, 그 위선, 신앙인 척하는 이 모든 것,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성전 되시는 십자가를 향하여 보면서 다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이 기쁨이 반복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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