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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위치 바뀜

아빠와 함께 2026. 8. 1. 21:00

2026 여름수련회 창세기 강해 제8강 : 위치 바뀜 - 이 근호 목사

8강하겠습니다. 창세기 37장 26절에 요셉이 죽게 되었을 때 누가 구원해주는가? 유다가 구원해줍니다. “죽이지 말자.” 유다가 나서서 다른 형제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의 피를 은익한들 우리한테 무슨 유익이 있느냐?”라고 하면서 다른 형제들이 요셉 죽이는 것을 유다가 나서서 막았습니다.

막은 것에 대해서 보상이랄까, 그 사실에 대해서 나중에 야곱이 알게 되겠죠. 거기서 아버지 야곱이 요셉과 유다에게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축복입니다. 할 수 있는 게 축복이에요. 자,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미 축복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축복된 민족 가운데 자체적으로 축복과 저주가 나누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요. 민수기에도 나오고 여러 군데 나와요.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서로 성향이 다를 때, 그럼 ‘이스라엘 내에도 축복받을 자 따로 있고 저주받을 자 따로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서 탈락되는 거예요. 탈락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축복하는 장면이 창세기 49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줄 때, 눈에 띄게 투톱이 나와요. 다른 지파와 유난히도 키 차이가 나는, 복 차이가 나는 딱 두 개의 쌍두마차, 또는 축구에서 투톱 작전처럼 두 개가 탁 나오는데 하나는 유다고 하나는 요셉입니다. 아주 길게 했어요. 거기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파는 거의 욕설과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받게 됩니다.

49장 5절 같은 경우에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여기에 야곱이 아들을 불러서 후에 당하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예언한다 하면서 이렇게 했을 때, 이 대목을 보게 되면 시므온은 뭐 받았어요? 저주받았고, 레위 지파도 뭐 받았습니까? 저주받았죠.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어려운 문제. 유다는 복 받았습니다. 요셉도 복 받았어요. 그러면 ‘노골적으로 저주받은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유난히 복을 받은 것도 아닌 다른 지파는 어느 위치에 어느 자리에 할당이 되고 배당이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 도대체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계급이 몇 개로 나누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제일 위에 요셉과 유다, 나머지는 순서대로 이렇게 서열화 시킬 때 과연 그 모든 지파가 복 받느냐 그런 문제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에요. 민수기 같은 데 보면 나오는데요. 이스라엘 전체가 이러한 예언을 품고 이제는 출애굽해서 광야로 갑니다.

민수기 24장 9절을 보면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 아멘.

여기서 그럼 레위지파, 시므온지파 빼고 가실까요? 아니죠. 열두 지파가 다 갖춰져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열두 지파가 다 갖추어져야. 여기를 보게 되면 열두 지파는 여전히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최종 기준으로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을지어다”를 받았던 레위와 시므온 지파는 과연 축복 쪽이냐, 아니면 저주 쪽이냐,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복의 다양성’인가. ‘복의 다양성으로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성립되느냐는 말이죠. 복의 다양성으로서 소소한 복은 이해되는데, 복의 다양성인데 저주받는다는 이야기가 복을 받는 하나의 형태로 가입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가입될 수 있느냐.

아버지가 자식 불러놓고 “너 저주받아라.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복이 이거다.”하면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저주를 주셔서.” 이렇게 나올 자식이 있느냐 이 말이죠. 이게 골치 아프죠? 골치 아픕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골치 아픈 게 풀려요. ‘복과 저주의 내용의 변천’.

복과 저주가 같이 가는데, 이스라엘 내부에서 복 받은 지파와 저주받은 지파가 서로 내부에서 변신을 거듭하고 변천이 이루어집니다. 변천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땅이 하나의 세포라면 땅의 세포막이 점점 더 얇아져서 나중에 땅 자체에서 공중분해 되어버려요. 공중분해 되면 복은 어디 가 있느냐? 복은 하늘에 가 있고, 하늘에 가 있는 복에 들어가지 못한 모든 것은 저주가 되는데, 이 저주 안에 혈육적인 이스라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는 하늘에 들어가겠지만, 명목상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집단이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수직적이잖아요. 지금 변천이라 하는 것은 수평적인 역사 속을 흐르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흐르면서 자기 내부에서 여러 가지 변천을 거치면서 최종 엔트리(참가자 명단)는 하늘 갈 사람/ 저주받을 사람이 확정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성 라이온즈의 스타팅 일군(一軍) 명단이 나왔다 합시다. 일군 명단이 시즌 내내 일군 명단으로 되는 거예요? 강민호는 나이 들어서 못하니까 이군으로 빠지고 그 자리에 누구 넣고. 우리나라 축구 대표 팀에서, 손흥민 너는 뛰지 마. 빼고 다른 사람 집어넣고. 전체는 대한민국 대표 팀이에요. 대표 팀인데 요란스러워요. 굉장히 분주해요.

그럼 이것은 레위 지파의 인간들 문제일까요, 아니면 레위 지파라는 자리 문제일까요? 어느 쪽입니까? 아, 어렵다. 자리는 멀쩡한데, 거기에 들어가는 인간들은 레위 지파 자리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냐로 해서 교체 멤버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그때그때 구성된 이스라엘은 누가 뭐래도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복과 저주의 기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일곱 교회 아닙니까. 일곱 교회 지금 없어요. 튀르키예고 그리스고 일곱 교회 없습니다. 없는데 일곱 교회는 어디 남아있는가? 성경에 남아있어요. 누구와 함께? 하늘에 있는 인자와 더불어서 일곱 별 잡듯이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를 잡습니다. 딱 잡고 있어요. 일곱 교회가 복과 저주의 기준이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그 일곱 교회 자리에 그때그때 그 시대마다 바꿔치기하면서 들어가는 여러 가지 다양성은 그 안에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구약보고 ‘여기서 계시 끝났네.’ 하지 마세요. 변천이니까. 구약에서 일어난 그 변천이 나중에 신약까지 이르기 전에 얼마나 복잡한 변화를 겪는가? 그것은 시편 78편을 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나 10년 전에 어느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어.” “그래? 지금도 은혜 받나?” “나 그때가 그리워.” “그 은혜가 어디 있는데?” “그때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너 왜 자꾸 옛날 이야기해? 지금 은혜가 있느냐?” “몰라. 하나님이 날 버린 것 같아.”

하나님은 나를 버린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것은 내 자리라 하는 인간들을 내쳐버려요. 이것은 내 소유의 자리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자리가 그 인간을 그 자리에 맞도록 전환시키고 변화시키죠.

그러니까 저주받은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은 거죠. 아버지 야곱에게 받았던 레위 자리가 저주의 자리라면 “그 저주가 합당하고 마땅합니다.”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저주를 이해하는 레위 지파로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 돼요. 하나님의 계시의 우산꽂이니까요. 우산꽂이라는 것은 몇 시간 전에 이야기했는데 벌써 다 잊어버렸죠? 아, 인간은 이상해. 하여튼 자기중심이라. 성경말씀 나오면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거 나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러는데….

시편 78편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67절에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아니, 이게 뭐에요? 분명히 그때는 투톱이었잖아요. 야곱이 축복할 때 얼마나 많은 대목이 유다에게 복을 주고 요셉에게 복 줬습니까. 그 복을 받은 두 당사자들은 새삼스럽게 누구 복이 더 오래가고 센 지를 견주어봤을 거예요.

그럼 복 받는 장면을 한번 봅시다. 창세기 49장 8절에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뭐 이쯤하면 요셉 이야기는 들을 필요 없잖아요. 당신이 탑이야!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럼 이야기를 유다부터 하지 말고 요셉부터 합시다. 24절,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이게 뭐에요? 요셉은? 이스라엘의 기초가 되는 목자가 요셉에게서 나오고, 유다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지팡이를 가진 왕이 유다지파에서 온다.

그럼 우리는 대번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뭡니까? 혼선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이유가 뭡니까? 한쪽만 택합시다. 왜 라이벌 두 개가 등장했습니까? 이강인이면 이강인 중심으로, 안 그러면 손흥민 중심으로 분명히 해야 될 것 아니겠어요? 축구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한국 대표 팀은 누구 중심이냐? 둘 중심이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강인은 재빠르고 손흥민은 골 결정력이 있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더 말이 안 되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8장. 참 어려운 대목이에요, 정말. 할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대목에서. 요셉이 드디어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두 아들의 의미가 창세기 41장 51절에 나와요.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을 낳은 요셉 부인의 이름이 아스낫이에요. 아스낫은 애굽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변절자. 배신자여~ 요셉은 애굽 총리로서 어떤 느낌이냐? 이제는 아버지 집안과 빠이빠이에요. 야곱을 싫어하는 게 아니고, 형들한테는 빠이빠이다. 나는 당신하고 상대 안 해. 하나님께서 나를 국무총리 되게 하셨잖아.

세상에, 자식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존재를 인정했다는 거예요. 인정하지 않으면 자식이 없다는 거예요. 옛날 고대인들은 그렇게 해석했어요. 대를 끊었다는 말은 ‘너희 집은 저주받았어.’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자식을 줬다는 것은 ‘한번 두고 볼 거야. 내가 기대해볼게.’ 이런 식으로 이해한단 말이죠.

자식을 줬는데 이름이 뭐냐 하면, ‘내가 이제는 옛날의 아픈 과거에서 빠이빠이했다.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했다. 이제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이런 뜻이죠. 둘째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수고한 땅은 애굽 땅이에요. 요셉은 완전히 변절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요셉의 마음이 흔들렸느냐? 흉년 들어서 야곱 쪽에서 자기 형들이 양식 사러 왔을 때, 그때 분명히 잊었다고 했는데 형들 얼굴을 보는 순간 형들을 보고 싶은 게 아니고 형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가 확 떠오른 거예요. 아버지 잘 계시는지 확인해봐야겠다.

동시에 요셉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준 언약이 아니고 아버지께 준 언약의 파생된 현실로서 내가 아버지 언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요. 야곱 언약을 접촉했다는 것을 알아버려요. 그러면 내가 내 아들에게 이름 지어서 복 받으라 하는 건 뭡니까? 무효에요. 이것은 언약이 아니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언약은 시간을 초월해서 확정적이기 때문에 언약에 끼어들지 않으면 나의 희망과 여망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어느 쪽으로 가야해요? 아버지를 빨리 만나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했듯이 그 축복권을 내려 받아야 돼요.

그런데 그 축복권을 주는 아브라함과 이삭 관계, 이삭과 야곱 관계, 야곱과 요셉 관계의 공통점이 뭐냐? 모두 축복해야 될 자를 자기 선에서 다 잃어버렸던 거예요. 다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없는 데서 나와야 그게 축복의 대상이 돼요. 그게 바로 신약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자 관계를 앞당겨서 보는 거예요.

이자 관계를 더 보기 전에 잠깐 누가복음 24장 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났어요. 만나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 아닌 척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25절, 천천히 읽겠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다음 중요합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러면 예수님 대(代)에서 완성했다, 그 말은 맞아요. 맞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일찍이 전달된 그 시대에 예수님의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이미 다 끝냈다는 그 본질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 본질에 걸려들면 그 사람은 그 시대에 살다 죽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의 맛을 미리 맛본 게 돼요. 미리 맛본 게 됩니다.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현실을 알아? 너는 이 세상이 어떤 현실인 줄 알아? 이 현실은 아버지하고 나하고의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파생된 현실이야. 거기에 너희가 걸려들면 구원이고 걸려들지 않으면 넌 저주야.” 이런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럼 복 받은 사람은 뭐냐? 모든 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기에게 일어난 인생을 살면서 벌어진 모든 사건과 십자가의 관계를 연결해보는 겁니다. 나는 죄인인데 주께서 내 값을 치렀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례를 살아가면서 그때마다 느끼는 겁니다.

이제 요셉도 거기에 걸려들었어요, 요셉도. 내 자식보고 ‘너는 잘됐다. 이제 행복 시작 불행 끝이다.’ 했는데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버지가 있는 이상 아버지의 언약이지, 내 언약이 아니거든요. 아버지의 결과물에 자기가 말려들었기 때문에 아직 남은 일이 뭐냐? 나에게 축복했던 아버지로 하여금 이제는 내 자식에게 아버지의 축복이 전달되는 그 일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48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헤프닝이 벌어집니다. 48장 5절에서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이거 누가 이야기하는 겁니까? 요셉이 아버지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요셉의 이야기를 들은 야곱이 한 거죠.

2절에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은 네가 애써서 낳은 아들이 아니고, 내 자식이다. 내 자식이 안되면 하나님께 받은 이 축복권에서 너는 제외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공히 야곱의 다른 아들들처럼 축복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축복이에요. 축복입니다. 축복인데, 이제 어려운 문제가 뭐냐? “둘 다 이리 와. 축복해줄게.” 굉장히 간단해요. 어려운 것 없습니다.

그런데 뒤에 할아버지 야곱이 잘 축복하도록 아버지 요셉이 보조를 하는데 13-14절에,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보고 요셉이 가만있으면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 위치가 바뀌었네요.” 여기서 요셉의 의견과 야곱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어긋납니다.

요셉이 요셉에서 야곱으로 건너오는 매개변수, 연락책인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대동해 옵니다. 그러면 요셉은, 손자가 할아버지 야곱에게 조상이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권을 받게 되면 이 둘은 내 아들이니까 요셉 입장에선 자기 소유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야곱의 생각은 달라요. 지금 요셉에게서 두 아들을 떼냅니다. 왜 떼어내느냐? 떼어내서 야곱의 다른 지파와 더불어서 동등한 아들 대우를 여기서 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물론 대표자는 요셉이고요. 그러니까 이것은 므낫세, 에브라임, 요셉 따로따로 셋이 아니라, 요셉이 대표로 하는 이 테두리 안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아들 요셉이 받는 축복에 한 통속으로 한 세트, 한 바구니에 담는 식으로 야곱은 축복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해봅시다. 축복이라는 것은 반드시 무엇이 동반되는가? 저주가 동반되죠. 저주스러운 상황처럼 보이지만 여기는 축복요소가 저주의 위세에도 흔들림이 없이 그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따로 끄집어내는 방식을 써요. 저주에서 탈출하면 축복되는 것이 아니고, 저주 안에 축복을 품고 있는 거예요. 품고 있는데 저주받은 자는 이것을 모르죠.

그러면 축복권은 저주 안에서 축복을 따로 끄집어내는 방식인데, 그 방식이 굳이 야곱이 어긋나게 해야 되는 거예요. 어긋나게. 팔을 나란히 하면 되는데. ‘너는 장자의 복을 받고 너는 차자의 복을 받아라.’ 복이란 것은 하나의 세트(set), 집합인데, 세트에 에브라임이 복을 받고 므낫세는 여기에 합류하는 식으로 복에 참여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밝혀지느냐? 유다, 요셉으로 대표되는 이 축복의 집단에 다른 열 지파가 이 바구니에 참여하는 식으로 전체 이스라엘은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자가 유다, 요셉이니까.

그런데 시편 78편 보니까 어떻게 돼요? 아까 78편 봤잖아요. 대표자에서 누가 탈락해요? 78편 67절, 68절에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한다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둘로 대표된 축복의 바구니가 이제는 요셉 이름이 탈락하고 대표자가 뭐로 바뀌죠? 유다 이름으로 바뀌죠.

유다 이름으로 바뀌면서 이 복의 변천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점점 더 세포막이 옅어져서 세포막이 분열되듯이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 눈에 띄는 이스라엘, 국가 형태의 이스라엘에서 벗어나서 영적 이스라엘로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오 오 오~.

상승기류를 타려면 혈통적 원칙에서 벗어나서 유다 지파의 자손은 혈통으로서는 죽고 육으로서는 죽고 영으로 부활되는 유다 지파의 자손이 등장하면 되겠죠? 그렇잖아요.『선녀와 나뭇꾼』에서 선녀가 뭐가 없어서 하늘로 못 갔습니까? 옷이 없어서 못 갔잖아요. 옷이 없어져버렸으니까.

놀랍게도 갈라디아서 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나라 간 사람들은 옷을 바꿔 입어야 된다. 예수님의 옷으로. 예수님의 세례를 받는데 예수님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된다는 이 말은 하늘의 것을 입지 아니하면 너는 이미 하늘에 완성된 예루살렘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그게 신약인데 그 신약 오기 전에 구약에서 이러한 변화와 변천이 있어야 되겠죠. 그래서 변천을 지금 살펴보는 거예요. 지금 아직 유다는 아니고요, 요셉입니다. ‘요셉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 누가 훌륭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돼요, 안돼요? 성립 안돼요. 누가 훌륭한 게 아니에요. 에브라임이 형 므낫세보다 훌륭해서 대표 축복권을 받는 게 아닙니다.

뭐가 중요하냐? 바뀌어졌다는 게 중요해요. 네 성격이 어떻든지 관계없어. 바뀌어졌다는 거예요. 바뀌어졌다는 것은, 땅의 생각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하늘의 생각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뒤집어진 거예요.

심지어 자기 아버지인 요셉도 상상도 못했어요. 형이 살아있는데, 형이 나쁜 짓한 것도 아니고 형이 살아있다면 마땅히 대표 축복권은 형한테 가야 되는데, 탈락될 수밖에 없는 동생에게 의도적으로 아버지 손이 가니까 요셉이 생각하기를 ‘아버지가 눈이 어둡구나. 아이고, 내가 보조를 잘해야 되겠네.’해서 한마디 거듭니다. “아버지여.” “왜?” “위치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아버지가 째려봤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나도 알아. 나도 알아.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 어떤 인간이 훌륭하고 어떤 인간이 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내 형 에서와 바꿔치기한 그 원칙과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축복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모든 축복 내용은 저주가 있는 자리에서 난데없이 횡재하듯이 ‘주여, 내가 천국 가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터져 나올 때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9장에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 여러분 의인이 뭐냐 하면, 천국이 있다면 천국은 의로운 나라잖아요. 의로운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땅에서 뭐만 준비하면 돼요? 내신 성적 준비해야 되겠죠. 내신 성적이 뭡니까? 남보다 착한 사람 된다. 이것을 주장했던 사람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에서 바꿔버려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31절) 여기서 우리가 ‘세리와 창기가 착한 일했습니까?’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이에요. 착한 짓한 게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바꿔치기했다는 데에 의미 있어요.

세리와 창기는 아예 포기했어요.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둘입니다. 둘이 있다면 그 둘은 다 천국에 갈 만한 사람이 못되죠. 강도 하나 더해서 세 사람 있어도 못 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의 일방성을 거기다가 심어버려요. 한 쪽은 무조건 버리고 한 쪽은 무조건 택해요. 이걸 놀랍게도 구원받은 강도가 알아챘다는 겁니다. 알아챘다는 게 놀라운 거예요. 자기 주제파악을 해야지. 어디 넘볼 걸 넘봐야지. 살인 강도해놓고 어디 천국을 넘봐. 이게 앞뒤가 연결된다고 생각하냐?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옛날 초등학교 문제인데 요새 그런 문제 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문제가 있다 합시다. 좌측에는 사람들 직업군이 나와요. 세리, 창기, 목사님, 순교자,… 뭐 여러 가지 쭉 있고, 우측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이 둘 사이에 줄을 이으세요. 물론 초등학교 가운데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세리-천국, 강도-천국, 목사-지옥, 순교자-지옥. 선생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100점.

그만큼 이 세상은 가인의 세계입니다. 이걸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거예요. “이 세상, 애굽? 총무 대신? 너는 지옥에서 총무 대신이야, 지옥에서. 거기서 생각했던 그 생각을 네가 네 자식한테 부여, 부여하는 것은 내가 반대다. 너도 알잖아. 옥에 갇힌 최말단의 존재인 네가 국무총리 되었다고.

그거 누구 덕인 줄 알아? 꿈의 덕이지, 꿈. 그 꿈은 누구 때문에 너한테 주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너를, 아버지 이삭을 잃어버리듯이 언약을 위해서 잃어버려야 될 자로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아들을 제키고 가장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요셉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 언약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너를 죽은 자로 만들어버렸고, 실제로 나는 너를 죽은 걸로 여겼다.

그래서 너 대신 베냐민을 내가 붙들었고, 베냐민은 베냐민이 아니라 베냐민 볼 때 나는 죽은 너의 빈자리라고 여겨서 베냐민을 그렇게 사랑했다. 그런데 네가 국무총리 되었으니까 네가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니라 그 자리, ‘죽었던 자리를 살린다. 빈 공백에 하나님의 언약이 채워진다.’는 그것을 나의 축복권에 담아서 이런 축복권이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에 따라서 이스라엘 내내 이어지기를 바란다.”하고 어긋맞기 해버린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에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아까 이야기했죠. 야곱은 죽고 난 뒤에 어디 가있습니까? 막벨라 굴로 들어가요. 그게 자대 배치인 거예요. 세상은 훈련소고 진짜는 언약적 죽음의 힘에 합류하는 데에 있어요. 언약의 백성들이 처할 자리가 되죠.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다음에 거기 나온 단어가 뭡니까?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지팡이 머리란 뭐냐 하면, 내가 얍복 강가에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된통으로 내가 갖고 있던 내 힘의 원천이 박살났던 그 순간, 존재가 사건으로 기호로 거꾸로 들어가는 그 사건에 의해서 그때부터 나는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나한테는 이 지팡이가 그 사건을 항상 생각나게 한다.

오늘날 그 지팡이는 십자가죠. 십자가에 의지해서 나를 항상 잊지 말고 내 본질이 누구며, 나는 지옥 갈 사람인데 바꿔치기 때문에 내가 천국을 갔다는 것, 이것을 항상 생각하는 것. 이게 ‘현상’이고,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이 현상을 영화로 만든 사람이 나홍진 감독이잖아요. 영화 <호프(Hope)>.

전에 대전강의에서도 했는데, <호프> 영화 본 사람 거의 없지요? 수련회 온다고 바빠서 본 사람이 거의 없는데, 영화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외계인의 모함이 깊은 산골 위에 떠 있다가 폭발해서 사라집니다. 요한계시록 12장, 하늘에 있던 악마가 이기질 못해서 패배의 증거로 악마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영화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 다시 말해서 나홍진 감독은 관객을 모독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현실은 다 허상입니다. 전부다 허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허상 속에서는 힘 있는 자, 가진 자가 천국을 따낸다는 되지도 않는 그것이 유행되고 있어요.

바꿔치기하고 거꾸로 뒤집는다는 것. 그 사실은 철저하게 이 세상의 언약이 가리워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철저하게 언약의 인테리어가 가리워져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때부터 모든 것을 뒤집어서 하나님 뜻과 반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는가? 이걸 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6장을 한번 봐야 돼요. 산상설교에 나온 이야기인데요. 6장 21절, 22절, 23절까지 보겠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이 말은 뭐냐? 밝은 빛이 있는 마음이 되어야 될 너희가 어두움에 잠긴 마음에서 나오는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거예요. 언제 아담부터 모든 인간이 마음 씀씀이, 생각이 어두워졌어요? 어떤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런가? 창세기 3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 3장 이전에 창세기 2장이 있고 창세기 1장이 있었습니다. 이럴 때 창세기 3장이 되기 위해서는, 1장에서는 인간이 없다고 이야기했죠. 2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부터 했죠.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들어와서 범죄함으로써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2장에 하나님의 형상 잃어버리고, 1장에서 인간이 없는 채로 창조를 볼 수 있는 눈이 인간에게는 마련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없는 상태에서 창조를 보려면 창조를 우회해서 내가 없고 다른 눈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러나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내가 빠진 상태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소실된 거예요.

창세기 1장, 2장 그 내용 모르게 되면 어디서부터 인간이 이탈되었는지, 창세기 1장, 2장이 배경인데 그 배경을 모르면 ‘나쁘다, 안 나쁘다, 뭔가 범죄했다’ 이것이 성립이 안돼요. ‘다 지난 일, 그때 옛날 조상에게 일어난 일. 지금 내 마음 하나 반듯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반듯하게 살겠다는 그 각오가, 창세기 3장에 무슨 일이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대체한 악령의 형상에 들어갔느냐?

여러분들이 가끔 어깨 무겁고 뭐 그렇지 않습니까? 마귀가 달라붙어서 그런 거예요. 악령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비 온다 싶으면 뭔가 관절이 안 좋고… 농담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인간은 악령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고 늘 간섭받고 있다는 거예요.

간섭받고 있는데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여러분 잘 알지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해봅시다. 선+악에 대한 지식, 선악 지식으로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뭘 끄집어내느냐? 창조도 끄집어내고, 이 모든 원리도 끄집어내고, 자기 의도 끄집어내고, 거기에 악도 있으니까 악도 끄집어내고, 특히 놀라운 것은 천국도 끄집어내고 여기서 지옥도 끄집어내요.

어디서 나오느냐? 선악 지식에서 나온 거예요, 선악 지식에서. 여기서 종교도 물론 나오죠. 선악 지식 안에서 현재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니까 선악 지식 가지고 창세기 3장에 타락한 것을 여러분들이 한번 설명해보자는 거예요. 설명해봅시다. 내가 선악지식이 있다. 다른 말로, 이성이 있다. 이성이 있다는 식으로 창세기 3장에 인간이 범죄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이미 수천 년 동안 설명해왔어요. 누가? 천주교에서. 천주교에서 했어요. 천주교에서 어떻게 설명하느냐? 인간은 죄를 지었지만, 자기가 죄 지었다는 그 요소만큼은 안 사라지고, 오염된 것은 맞는데 다 오염된 것은 아니고 거기에 ‘내가 죄인이다. 범죄했다.’는 것을 눈치 채는 이성만큼은 그대로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씨앗을. 침례교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왜 갖고 있느냐? 왜 갖고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사랑의 십자가 -그것도 엄마까지 대동해요, 천주교에서는 엄마까지 대동해요, 마리아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랑의 표징으로 봤을 때 ‘그래, 내가 죄인이었어. 저 사랑을 알지 못하다니. 하나님이여, 내가 숨길 수 없는 마지막 양심, 꺼지지 않는 마지막 양심을 끝까지 끄집어내보면 주의 십자가 손길을 내가 붙잡아야 나한테 이익인지, 안 붙잡으면 당최 내게 손해가 될 것인지- 이게 파스칼의 주장이에요, 유명한 신학자 파스칼. ‘하나님과 내기하라. 믿는 게 이익이면 믿어라.’ 이런 식으로 전도하는 거예요.

마지막 남은 것은, 어느 것이 내게 이익인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어서 사랑의 표적을 줬으면 그걸 붙잡아야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지기까지 우리를 사랑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 합세한 사람이 바로 멜 깁슨이에요. 멜깁슨이 만든 영화 제목이 <그리스도의 고난(The Passion of Christ)>(2004)이에요.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서 극도의 아픔을 겪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마이크 대는 거예요. “아, 내 죄 때문에 예수님 고생이 너무 많아요.” “그래요? 가슴이 감동됩니까?” “감동되지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저런 심한 고통을 받다니. 이제부터는 나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예수를 믿겠습니다.”라는 이야기. 마귀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에요. 뭐 아니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은데…

요한복음 6장 65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악마는 가짜 예수를 양산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가짜 예수를 양산해서 수천 년 동안 그걸 종교 중심, 제단 중심에 놔둔 거예요. 제단 중심에 놔서 어떻게 하든 인간이 가장 마지막까지 없앨 수 없는 진선미, 그걸 공유적 속성이라 해요, 하나님이 선악 간에 모든 걸 간파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사랑이 매치할 수 있는 마지막 그 접선 지점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극시키는 거예요. 말씀으로 안 되면 동정심으로, 말씀으로 안 되면 고난으로. 어떤 식으로든 잠자고 있는 인간의 이성을 깨워서 그들로 하여금 ‘주여, 믿습니다. 붙듭니다.’ 뭘? ‘십자가를 믿고 그 피를 믿습니다.’ 고백을 하게 되면 신부나 목사가 “합격.”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컨셉도 이제 시시한지 잘 안 먹히거든요. 안 먹히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대한장로교 통합측에서는 참선을 시켜요, 참선을. 한 점을 찍어놓고 바라보면서, 자기를 바라보세요. 이게 불교인지 천주교 수도원인지. 그게 뭐냐? 절에 가서 수양하는 템플 스테이, 그걸 교회에서 합니다. 영성훈련. 미쳤어요, 미쳤어. 고객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그들이 등록을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하늘나라가 확장될 거거든요.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악마의 모습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너져가는 이 세상에 여전히 악마가 살아있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보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그쪽으로 다 끌려가도록 이렇게 한 거예요. 적그리스도적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믿든 뭘 하든 구원은 이미 끝나버린 언약이에요. 스스로 자체적인 활동에 의해서 언약이 와서 접촉될 수 있도록 이미 끝난 상태라는 것, 구원은 창세 전에 끝났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러한 육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과 차이를 보이면서 왜 어긋맞기 했는지 이걸 알라는 거예요.

여러분들 테스트해볼게요. 만약 여러분들에게 마귀가 찾아와서 “너 망하면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두 가지 예를 들께요. “네가 망해도 좋아?” 1번-“그래, 나는 좋아. 구원받았으니까.” “너 망해도 좋아?” 2번-“안돼! 나 미쳐. 나 지옥가면 안돼. 천국 가야 돼.” 어느 게 정답입니까? 마지막인데 빨리 끝내야죠. 어느 게 정답입니까? 1번일까요, 2번일까요?

2번이죠. “나 망하면 안돼! 미치겠어. 아하하하. 기분 좋다. 오늘 마귀 만났다.” 그러니까 그런 여유 있잖아요.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한 연기하는 거예요. “나 큰일 났어. 큰일 났어. 지금까지 안 복음 다 날아갔어. 어쩌면 좋아?” “그러면 양심을 다하여 예수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옆에서 이렇게 나올 거예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컨셉이 다 거기서 거기죠.

창세기 3장에 하는 일은 주께서 하신 일이고, 창세기 3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어서 우리의 이미 끝난 한계를 들이댐으로써 이 한계를 주님이 알아서 생명나무로 바꾼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니까. 생명이 활동해서 선악과에서 못 빠져나오는 인간에게 선악과가 무엇인지를 사후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미 생명에 속했음을 알려주는 것.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입니다. 잠이나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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