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60709a사53장7절(입 다문 메시아)-이 근호 목사
141페이지. <이사야와 한국교회>. 이사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이 문서 선지서라는 거예요. 문서 선지서는 어떤 것과 차이 나느냐 하면, 그냥 기적 선지자. 선지자를 둘로 나누면 기적 선지자, 문서 선지자로 나눌 수 있는데 선지자의 처음 시작은 누구냐 하면 모세로 보면 됩니다.
물론 그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선지자지만 그것은 개인 가족 중심이잖아요. 그러나 국가 중심의 선지자는 모세가 처음이에요. 모세는 두 개 다 돼요. 기적 선지자도 되고, 문서 선지자도 되고. 다 되는데, 모세 당시의 사람들은 선지자라 하면 기적, 문서 둘 다 있다고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게 둘로 쪼개집니다.
기적 선지자하고 모세 이후의 기적 선지자로 계속 이어져가는 대표적인 사람이 엘리야, 그다음에 엘리사입니다. 엘리야, 엘리사는 기적을 베풀지요. 기적을 베풀 때 그 기적을 받았던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사일생입니다. 또는 “아휴! 아휴! 혼났다.” 구사일생. “죽을 뻔 했네. 이렇게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줬구나!” 이게 기적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 선지자가 이제는 시절이 떠나요. 이게 날아가 버립니다. 왜 날아가야 되느냐 하면, 도와줘도 소용없어요. 도와줬다고 해서 그때는 반짝 감사한데 인간 자체가 안 바뀌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제공해버리면 인간 자기가 바뀔 생각을 안 합니다. 꼼짝도 안 해요. 돌부처같이.
그래서 기적 선지자의 특징은 도와줘도 안 바뀐다. 도와주어도 안 바뀐다. 이걸 반대로 하면 안 바뀌는 것이 너다. 그런데 이 너라 하는 것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건 이스라엘의 집단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집단. 집단에 소속했다는 이유때문에 집단적으로 혜택을 입는 것. 그런 기적. 홍해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요단강 갈라지는 것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으로 취득되는 기적 같은 것은 선지자한테는 애초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천사는 말고 나에게 특별대우해주세요. 이런 기적은 아예 없어요. 항상 선지자는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집단 자체가 아예 바뀔 생각을 안 한다, 이 말은 개인+개인+개인+개인+개인...., 이게 뭐가 돼요? 집단이 되지요.
그러면 집단이 안 바뀐다는 말은 여기 소속돼 있는 개인도 역시 안 바뀐다는 것을 집단적으로 대표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집단적으로 알려주면 그 안에 있는 개인은 집단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을 할당받는 게 돼요. 집단이 이꼴났다는 말은 너도 똑같이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동일하다는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잘 납득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는 점이 바로 요점이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나한테 잘해줘야지.’ 이런 거. ‘나한테 잘해주기 위해서 나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찾는데, 교회를 찾는데..’ 이런 의식을 가지고 보니까 구약 성경이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구약 성경 보다도 신약성경을 좋아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너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구약은 집단이잖아요. 집단. 바뀌지 않는다. 도와줬는데 바뀌지 않는다.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역시 문서 선지자도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바뀌지 않는다. 문서 선지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빨간 걸로 이야기할게요. “보복할 거야!” 내가 준 은혜에 대해서 안 바뀐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안 바뀌어? 그럼 내가 준 걸 다 토해내.” 이걸 하나님의 뒤끝 작렬! 내가 준 거 공짜인줄 알았지? 아니야. 심판으로 갚아. 나한테 저주 받으면서 갚아. 안 갚으면 너는 끝났어. 사실은 갚으라는 말은 못 갚는다는 뜻이에요. 갚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걸 그들이 니가 하는 이스라엘 전체 했던 것을 꼬깃 꼬깃 문서화시켜요. 문서화 시킨다는 것은 법정화시켰다는 것이에요. “문서화시켜서 니가 이런 이런 행동에 대해서 내가 하나, 하나 처벌할 거야. 기록할 거야.” 이게 문서 선지자입니다.
기적은 받아놓고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문서는 두고 두고 남지요. 그래서 그 문서가 집약된 것이 신약에 책으로 나왔는데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 있는 내용을 쪼개보면 전부 다 문서 선지서에서 나온 이야기에요. 에스겔,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너희한테 책임 묻는다 했어? 안 했어?” 라고 그걸 근거로 제시하면서,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너는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걸로 여기고 섭섭하게 여기지 마라. 그게 바로 내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야. 은혜 준 것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 못하면 내가 아주 작살낼 거야. 그게 처음부터 있던 나였어. 처음부터 나였어.”
문서 선지자의 특징은 보복입니다. 보복하기 위해서 문서 선지자 중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사람이 이사야지요. 우리가 지금 이사야를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하면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는 게 아니고, 어디에서 너희는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그토록 싫어하는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선지자가 이사야 선지자고 그걸 뭐로 만든다? 문서화 만든다. 문서화 시킨 거예요.
이토록 내가 싫더냐, 그렇게 싫어서 그게 이제 여러분들이 잘 들어보았던 이사야1장에 나온 겁니다. 1장2절에서 4절에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렇게 규정을 하는 겁니다.
이 문서 선지자가 집단적이지요. 집단적인데 문서 선지자는 그들의 잘못을 끄집어내는 쪽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합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을 그렇게 작살을 내겠다. 하는 그 취지가 뭐냐, 그 취지는 “그래도 다른 민족하고 다르잖아. 너 잘못됐어. 너 내가 심판할 거야.”라는 말을 건네준다는 거. 그거는 바로 대화의 상대로 아직도 인정해 준다는 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이게 복인 거예요.
저주받으면서, 심판받으면서 ‘아, 이게 복이구나! 아직까지 우리를 상대해 주시는구나! 아예 버리지를 않고 상대해주시는구나!’ 그 상대 해 주면서 보내는 그 대화 메시지가 이사야입니다.
우리를 이방인처럼 “아예 나는 누군지 몰라.” 이게 아니고, “심판할 거야!”라는 말을 아직도 하신다는 것이 그 심판이 제대로 마감이 되면 그 심판의 자리에서 “내 너 건져줄 거야.” 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내가 건져줄 거야. 이걸 함축해서 보면 신약의 십자가의 취지와 동일하다 보면 돼요.
구원하러 오신 분이 늘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내 말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시면서 이야기해주시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 그래서 내가 꾸중하겠다. 꾸중하는 걸 복이라 여겨라. 은혜인줄 알아라. 그런 뜻이에요.
“이사야를 왜 봐야 합니까?” 물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사야를 기초해서 나온 말씀이에요. 이사야1장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런데 이것을 변론하자고 이야기하거든요.
변론하자는 말은 “너희가 이야기할 걸 내가 미리 A4용지로 다 작성해가지고 너는 이런 이야기하면 돼.” 라고. “너희에게 미리 줄게.” 그 주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내용이에요. “니는 너를 모르지? 나가 너를 알거든. 아는 걸 내가 미리 적어서 너희에게 줄게. 그 받은 거 있지. 그 받은 거 가지고 와. 그 받은 거 가지고 나하고 변론하자.”
변론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요 내용이에요. 너희 죄는 이미 죄로 확정이 되어있다는 이 사실. 색깔로 표현한다는 것은 지워질 수 없다는 거예요. 확정적이다. 너희들이 기본적인 것을 기본적인 너희의 본성을 내가 색깔로 표현해 줄게. 벌겋다. 주홍같이 벌겋다. 죄들이 모여있으니까 벌겋다.
“그러면 하나님! 저한테 하얀 건 없습니까?” “없다. 온 천지가 벌겋다.” 보통 사람들은 시커멓다 이야기하는데. 구약에서는 벌겋다고 이야기해요. 벌건 이유가 인간의 죄가 타인에게 피 흘리는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벌건 거예요. 손에 피를 묻히니까. 손에 피를 묻혔다 하니까 칼을 들고 식칼 들고 설치는 그런 조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피해를 봐야 내가 살 수 있는 그런 관계 때문에 그래요. 인간관계 때문에.
남이 손해 보지 아니하면 나한테 어떤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인간관계 때문에 남을 피해를 주고 남은 그것에 의해서 피를 흘렸고, 그 피 흘린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연관관계 그게 바로 아까 말한 집단관계.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의 역할로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어제 수요일날 제가 설교했지요. 음녀가 나오는데 권력의 일자. 하나밖에 없는 최고 권력자. 상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세상의 최고 권력자가 남성형이 아니고 여성형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왜 여성형이냐, 남자는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그러나 보이는 남자 뒤에 보이지 않는 추가적인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는데 그게 여성이지요.
그런데 그 여성이 남성들만 앉을 수 있는 왕의 자리를 모조리 씨를 말렸다. 다 죽였다. 그것은 바로 권력을 영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번지르르한 남성의 그 설치는 권력. 그거는 허수아비다. 그 뒤에 음녀가 있다. 그러면 그 음녀와 마주할 수 있는 여성은 뭐냐, 여자의 후손이지요.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은 성녀지만, 음녀는 악녀가 역할을 합니다. 악녀와 성녀의 만남. 성녀에서 그 성녀의 나타난 것은 창세기38장 유다의 며느리가 나와요. 야곱의 아들 가운데 유다가 있고, 그 유다가 며느리를 들였지요. 그 며느리 이름이 다말이지요. 다말 며느리가 이방여인이면서도 자기 시집에 있어서 언약적인 것, 영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간파를 했어요.
굉장히 중요한 것은 육적인 그 집안에서 영적인 집안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냥 말로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뭐를 경유하느냐 하면 스스로 창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육적이라는 것은 선과 악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취득한 것이 육적이거든요.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바르게 산다는 게 육이에요. 바르게 살기 때문에 뭘 놓치느냐, 영적인 요소를 다 놓치는 거예요. 선을 넘어봐야 되는데 선을 안 넘으려고 해요. 왜? 안 넘어야 내가 선한 사람이 되고 내 의를 추스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너희 애비는 악마다.” 하는 바리새인이 한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을 가로막는다고 했거든요. 바리새인들이. 천국은 본인도 못 가고, 가는 쪽을 막을 때 그 막는 무기가 뭐냐,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소리입니다.
악마의 입장에서는 신났지요. 왜? 착하고 바르게 살 때 계속해서 그것은 선악의 법에 함정에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에 악마의 입장에서는 신난 거예요.
착하고, 더 착하고, 바르게 살고, 더 바르게 살고, 완벽하고 더 완벽하고, 철저하고 더 철저하에 그 끝은 어디인가, 끝은 마귀지요. 마귀가 “이리 와! 아직도 멀었어. 더. 더. 더. 더. 더 완벽해야지. 더 철저해야지. 더 순수해야지. 더 순결해야지. 그 신앙의 선배들 어떻게 살았나 봐. 얼마나 희생적이야. 너도 희생해야 돼. 아프리카 가서 너도 우물파던지 해야 돼. 자기를 부인하고. 성경 있잖아. 성경 다 지켜야 돼.” 그 경계선에 도달할 사람이 굉장히 조밀해요. 그 경계선에는.
티벳 불교도 있고요, 천주교 수도사도 있고요, 고 천국의 경계선에 바리새인보다도 더 낫지 아니하면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어떻게 한다? 하늘나라 갈 수가 없어요.
그 천국에 가고자 하는 그 철망에 세상에 내놓으라 하는 순수를 추구하는 자들은 전부 다 거기 다 올망졸망 다 모여있어요. 마치 수능 치는데 교문 앞에 매달려 있는 엿 붙이고 매달려 있는 학부모들 생각하면 딱이에요.
안 그러면 요한복음5장에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그 동네 다 병자가 되어가지고 한 명만 고친다는 그 연못에 순서 기다리는 거. 순번 기다리는 거. 재빠른 사람만 고치는 거. 호수가 움직일 때 1번타자로 해야 되고 그 다음부터는 호수는 끝났어요. 백화점 문 열어 들어가도 소용없어요. 우리 물건 재고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물건 다 팔려서 끝나는 거예요. 이처럼 자비의 재고가 끝났어요.
그런데 다말은 이방여인인데, 아주 쉽게 선을 넘었어요. 선쪽으로 몰리면 안되고 그건 지옥이고, 악쪽으로 가면 되잖아요. 그게 이사야 내용 아닙니까. 이사야 내용. 창녀되면 되는 걸 가지고. 창녀되게 되면 왜 천국이냐 하면, 창녀가 되고 세리가 되면 더 이상 자기가 내세울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내세울 게 없으니까. 주의 원칙.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왜? 의사만 돋보이기 위해서. 병 고친 나, 그래서 구원받았다. 구원받은 나만 돋보이는 게 아니고 의사만 돋보이기 위해서 주께서 필요한 것은 선 넘은 죄인이 필요한 거죠. 그게 생명나무의 원칙이에요. 선만 넘으면 되는데. 그 선을 못 넘네. 주께서 그렇게 했겠지만.
창세기38장의 다말은 자기가 먼저 선을 넘어버려요. 창녀되어서 시아버지랑 관계를 했고 시아버지는 자기는 며느리하고 관계를 한 적이 없어요. 창녀와 했지. 돈 얼마면 할 수 있느냐. 돈 필요 없습니다. 돈은 나중에 염소새끼 들고 오고. 지금은 내가 당사자라 하는 그 표시만 해 주면 됩니다.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줬어요.
주고 난 뒤에 그 염소새끼를 주고 자기 것을 돌려받으려고 하니까 그 동네에 창녀가 없었어요. 없었다 이 말이에요. 그럼 염소새끼 버렸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중에 보니까 다말이 임신했고, 임신했을 때 우리 집안에 우사스럽다 해서 그 여인을 그 며느리를 끌어내어 불살라 버려라.
선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자기 심판이 선하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악에 대해서 사정없이 징벌을 내리는 거죠. 그 불사르기 위해서 갔는데 며느리를 불살라 버리려고 갔는데 며느리가 내놓은 것은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내놓았을 때, “내가 이 물건의 주인 때문에 잉태했습니다. 이 지팡이는 누구 겁니까?” 유다가 이걸 알아보고 하는 말이 “너가 나보다 옳도다.” “니가 나보다 의롭다.” 고 해요.
며느리보고 그냥 죽으라고 이야기했던 게 죽는다고 해서 인간이 바뀝니까. 안 바뀌잖아요. 죽음보다 더 내려간 장소. 이게 죽음이라면 죽음보다 더 내려가면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여기에 천국. 언약이 기다리고 있어요.
사람들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본색이 선과 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안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안 죽으려고. 내가 소멸되면 이 모든 하나님과 성경 이 딴 게 내가 죽는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성경 말씀은 너 때문에 막혀 있다는 거예요. 니가 안 죽어서 막혀 있다는 거예요. 너가 죽으면 죽는 나보다도 이 생명과 언약과 천국이 나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마련되어있다는 사실을 선을 넘어야 발견하는 거예요. 선을 넘어야.
그래서 이사야 문서는 뭐냐 하면, “자살하지 말고 내가 조금씩 죽여줄게. 죽여줄게.” 죽여주면서 어디로 끌고 갑니까? “메시아의 죽음까지 끌고 갈게.” 이게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사야53장이에요. 이사야53장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의 허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을 입어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럼 그분은 죽음이 무섭지 않은가, 이사야53장7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세요. 보통 인간들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아는다. 이 말은 왜 입을 열지 않느냐 하면...,
입을 연다는 것은요, 다른 인간하고 인간하고 잘 봐주세요. 어떻게 잘 살려주세요. 자술서 쓸까요? 탄원서 쓸까요? 누가 하나 옥에 갇히면 탄원서 수백장 들어가잖아요. 판사의 심령을 좀 누구러뜨려서 앞으로 사회에 나와서는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막 집어넣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입을 열지 않았어요. 뭐냐하면 주님은 인간하고 인간은 주님하고 대화할 상대가 안 됩니다. 오직 입을 여는 것은 아버지하고만 입을 열어요. 아버지하고만 입 엽니다.
이게 어제 수요설교에서 기도 제시할 때 하는 내용과 관련돼 있습니다. 이게 뭐냐, “주여, 나의 얼굴을 잊게 하시고, 이제는 주의 얼굴로 살게 하옵소서.” 내가 나의 얼굴을 잊어버리게 하옵소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남 앞에 나설 때 항상 그냥 나서지 않아요. 나 이렇다. 나 이런 사람이다. 이걸 전제로 해서 남한테 말을 해요. 말을.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관계를 시도해 보는 거예요. “우리 친구 할까?” 이런 거요. 그런데 이 세상이 힘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나를 잊어버려야 되는데 나를 안 잊고 있어요. 나를 안 잊는 이유는 월요일날 대구강의<회개 만들기>에서 했어요. 내 안에 타자와 아주 집단을 이루는 거예요. 내 안에.
내 안에 내가 많다는 것은 그건 무슨 노래입니까? 가시나무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 안에 내가 많은 게 아니고 내 안에 남들이 많이 들어앉아있어요. 남들의 지시와 명령과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거부할 수가 없어요. 남들의 지시와 명령이 그게 한데 모으면 눈이 오면 눈송이 되지요. 그 눈 조각 하나 하나가 타인이에요. 타인의 대화고 타인의 지시였어요. 타인의 말이에요. 그 말이 뭉쳐져서 껍데기는 나가 되는 겁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가 그냥 기억 못하고 남들과의 관계가 내 기억안에 턱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보고 누가 이야기할 때 “그래, 옛날에 어떻게 지냈어?” 옛날 이야기해보라 하면 전부 다 누구 이야기 나옵니까? 내가 만났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술술술술 나오지요.
아주 네버 앤딩 스토리. 끝이 없어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음~ 끝~이 없어라. 어디에서요? 모닥불 피워놓고. 모닥불 피워놓고 끝이 없어요. 밤새도록 했어요. 모닥불이 재가 되도록. 박인희 노래에 나오지요. 모닥불 피워 놓고.
본인이 누군지를 모른다니까요. 본인 없어요. 남들이 이런 이야기해서 그 정보를 수집해서 그게 나가 된 거예요. 나가 된 거예요. 그래서 행동 하나 하나할 때 내 이미 내 속을 장악하고 있는 타인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분산된 많은 타인들 그 누가 보낸 거죠? 누가 그렇게 한 거죠? 그 타인이 들어올 때 말을 할 때 말의 의미가 생기거든요. 그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지식에서 나왔고 선악지식은 누가 따먹으라 했습니까? 악마가 따먹으라 했잖아요. 선악지식을.
마귀가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끝까지 인간을 안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주홍 같아요. 남이 시켜서 그들이 갖고 있던 의미를 탈취하는 식으로 내 인생의 의미로 의미의 빈칸을 채우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이사야53장에서 예수님은 뭡니까. 입을 다물어요. 니가 나를 죽이는 것도 이미 사전에 아버지하고 나하고 이미 의논이 끝난 거예요.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마감된 겁니다.
7절 계속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지금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은 인간 앞에서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게 죽기보다 더 힘든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라도 변명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핑계대고 싶고, 무엇이라도 자기방어와 자기가 이런 행동과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남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데요? 그래야 기존의 관계가 안 무너지니까.
기존의 관계가 무슨 관계인데요? 그게 선악관계잖아요. 선악관계에서 발을 떼서 선을 넘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남들이 없으면 내가 살아도 목숨이 있어도 그건 죽은 목숨이니까.
주께서는 이 선악체계로 갖춰진 이 세상. 이 세상에선 나의 죽음 밑에 여기서 뭘 기다리느냐, 주님이 가신 길이거든요. 입을 열지 않고 갔던 주님. 주님께서 이걸 반깁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가 천국입니다. 나도 똑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라고. 받아주잖아요.
그게 바로 이사야1장에서 니는 주인도 모른다고 했던 그 이야기가 이사야53장에 이르러서 바로 양들은 제 갈길로 갔거늘 양들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짐으로서 우리의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킴으로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나음을 입었다를 병원 용어로 뭐라고 합니까? 두 자로. 치료지요. 치료. 요 첫째시간에 요 한 문장만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새로운 설명이 나를 치료케 만들어요.”
이 우주와 이 세상과 나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새로운 페인트칠이 그 케이크 같은데 그 초코렛 같은데 부으면 초코렛이 빵까지 스며들지요. 새로운 설명이 나를 장악하고 스며들면 그것이 뭡니까. 선악체계에서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지옥 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치료시켰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설명이 바로 복음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복음으로. 그게 이사야에요. 그 해석자가 이사야에 주신 그 이사야에 문서 선지서에 근거해서 해석자가 마지막 때에 오십니다. 그걸 새언약이라고 이야기해요.
새언약은 전부 다 해설서에요. 해설서. 기존에 있던 앞에 있던 모든 선지서가 다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다 이루었다. 이루신 분이 책 저자가 학원에 강의하는 것처럼. 저자가 출강해서 자기가 출제한 문제를 자기가 풀어주는 설명해 주는 거예요. 사태가 이렇게 된 거야. 이렇게 진행된 거야.
이렇게 하니까 이사야가 얼마나 참 고맙고 감사한 겁니까.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궁지로 몰 겁니다. 궁지로.
그것은 주님의 해설에 맞는 환경 조성을 위해서. 주님께서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궁지로 몰아넣으면서 하나님은 새로운 타자가 됩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내가 들었던 그 말을 그렇고 그런 인간들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수다와 뒷담화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타인으로 등장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 줍니다.
1번과 2번 가운데 1번은 아니에요. “너는 왜 너에게 충실하지 않는가” 이건 주님께서 하는 게 아니에요. 2번을 해요. “너는 왜 나에게 충실하지 않는가”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이사야1장에서. 나에게. 나귀도 임자를 아는데 니는 왜 니 주인을 못 알아보느냐, 이 바알 종교가 그래요. 주인이 없어요. 바알 종교의 특징이 주인이 없어요.
왜 주인이 없느냐 하면, 바알종교는 자연세계에 관측된 현상에 인간들이 신을 갖다가 붙였기 때문에 브랜드 붙이듯이 붙였기 때문에 주인은 누가 주인이냐 하면 신이라고 불러준 내가 주인이 돼요. 바알종교는 나를 터치하지 않고 나하고 거래하지요. 바알종교가.
대표적인 것이 불교잖아요. 불교. 불교는 죽음 밑으로 안 내려가요. 살아있으면서 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하냐 그걸 추구하는 겁니다. 불교가 흰두교로 가가지고 흰두교에서 나온 게 불교니까. 맨 흰두교에요. 이슬람도 그렇고요. 그동안 내가 나에게 해석했던 그 해석있잖아요. 성경을 포기를 못 하게 만들어요. 낯설지가 않아요. 낯설지가.
인내하고 참으면 언젠가는 복이 온다. 이게 낯선 겁니까. 너무 상식적이잖아요. 선악 지식이 낯섭니까. “나쁜일하면 떼찌! 안돼! 착한 일 하면 하늘이 복 줄 거야.” 이게 낯설어요? 야~ 이거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이런 거예요?
애를 4명이나 낳았으니까 하나 없어도 괜찮다. 이런 거 없잖아요. 그저 넷 중에 하나만 출세하라. 세명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다 산다. 경우의 수를 넓히자. 그럼 댓명 더 낳아야 돼요. 모든 것이 자기에게 충실하게 만들도록 이미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주님은 반대로 갑니다.
너희에게 충실하지 말고, 나에게 충실하라. 그런데 이 교회라는 거, 이 기독교라는 거, 얼마나 악마적인지. 특히 천주교. 너에게 충실함으로서 곧 나에게 충실한 것이다. 요렇게 변질시켜놨어요. 너에게 충실한 그것이 나에게 충실한 것이다.
너에게 충실하지 말고, 이게 전제가 되어야 되는데. 왜 너에게 충실한 것이 나에게 충실한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인간은 어떤 인간도 너 자신을 포기를 못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기독교는 안되고 뭐는 된다? 복음은 되지요. 구원은 복음에서 오지, 기독교에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기독교가 복음을 가로막지요. 교회가 진짜 교회를 가로막아버려요.
그래서 그 교회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다 들어보게 되면 결국은 뭐냐 하면 ‘아, 행함으로 구원받는구나!’라는 그런 일반교인들이 그런 논리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행함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믿음도 뭐가 돼요? 믿음을 누가 믿어요? 내가 믿으니까. 나에서 나온 것은 전부 다 뭐가 돼요?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게 뭐가 돼요? 나의 행함이 되잖아요.
왜 그런 행함이 나오지요? 자기한테 충실하기 위해서. 왜 충실한데요? 왜 충실해야 됩니까? 이미 나는 선과 악에서 자기는 어느 편에 서있습니까. 이건 반드시 선한 나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자기를 지옥으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개선을 위한 질책이 아닙니다. 우리의 면역체계를 망가뜨리고 있지요. 우리의 면역체계. 나를 지키는 면역체계를 망가뜨리고 인간의 기적을 피해 가는 기적. 분명히 기적인데 인간의 기적을 피해 가는 기적.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표적이라 해요. 표적.
그게 이사야7장에 나옵니다. 이사야7장10절~12절에서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왜 이런 이야기해요? 믿음이 좋아서 이런 거예요?
이미 가질 만큼 가져서 그래요. 죽음보다 더 내려가기 싫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구하라. 안 구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기적이 여기서 멈추지 않지요. 기적이 뭐냐, 기적이 바로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친히 징조를 주는 거예요. 달라 안 해도 징조를 그냥 줘요. 그 징조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 잘됨을 엎어버리는 징조. 이사야 전체가 그래요. 인간으로 하여금 궁지에 몰아넣는 거예요.
그 징조가 뭐냐 하면 “맞아 볼래? 니 당한다. 니 심판받는다. 니는 지옥 간다.” 그거 아닙니다. 그럼 징조가 뭐냐, 처녀가 아기를 낳는 거예요. 이거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 자식이 나쁜 짓하면 엄마가 맴매한다. 회초리 들고 나오면 애가 바들바들 떨잖아요. 애 나름대로 온갖 지가 아는 한에서 다 고민과 예상을 다해요. 때릴 때 다섯 대 때릴 거야. 요번에는 세 대 때릴 거야. 때릴 때 피할까. 아니면 엉덩이로 열 대 맞는다고 바꿔봐. 온갖 생각하잖아요.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나올 것이다. 했는데 회초리를 들고나온 게 아니에요. 꽃을 들고나와요. 그것도 향기로운 꽃으로. 꽃을 가지고 향기를 맡게 해요. 그럼 애가 그걸 보고 이럽니까. “엄마, 잘못했어요.” 이럽니까. “이 무슨 시츄에이션?” “뭐야 이거? 엄마 하던 행세대로 하세요. 이건 당황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징벌한다. 저주한다. 지옥 간다. 천국 간다. 하면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를 인간에 선악 체제를 입각한 언어로 번역해가지고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한 번역해 버려요.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그런데 훅 들어오면 대비가 안 되잖아요. 내가 대비했기에 내는 믿었다. 이걸 주께서는 피해가 버립니다.
그 유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2004 영화가 있지요. 예수님의 고난을 아주 극사실적으로 보여줘가지고 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아프게 매 맞았으니까 예수 믿으세요. 라는 뉘앙스를 주는 그 영화. 멜 깁슨이 제작하고 주연했던 영화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십자가를 방해하는지요.
그게 뭐냐 하면 때리면 아프다. 아프면 고통스럽다. 따라서 주님의 고통에 우리가 진정적으로 동정해서 그 고통에 참여하자.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했기 때문에 메카니즘 프로세스 대로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 된다. 이걸 이미 예상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가 마귀적이에요. 마귀가 그렇게 유도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우리 예상 문제를 다 빗나가서 우리를 구원해요. 그래야 우리의 행함과 예상이 어디 걸칠 건덕지가 없게 만들어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뱀이 인간보다 지혜로워요. 그런데 주님은 뱀보다 더 지혜로워요. 따라서 주님이 하는 일은 우리가 간파해서 구원받는 일은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니 이럴 줄 몰랐지. 이런 거 몰랐지.” 라고 하는 그 일이 끝나고 일어나는 사후 작용의 관점에서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내가 이럴 줄 몰랐지? 이것도 몰랐지? 이것도 몰랐지?”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유구무언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아예 입을 못 벌리도록 입 속에 재를 넣어버려요. 재를 뒤집어써요. 여기 나오는 유명한 노래, 김수희의 노래. 노래 가사에 나오지요. 여러분들이 불러 볼까요. 할 말을 잊었지만은. 할 말을 잊었지만은. 나이 젊은 사람은 김수희 노래 잘 모릅니다. 그런 노래 있어요. 할 말을 잊어버렸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께서 이렇게 촘촘하게 친절하게 자상하게 알아서 다 했는데 왜 쓰잘데기 없이 내 신상에 대해서 그렇게 미리 걱정하고 미리 염려하고 부들부들 떨고 놀아났고, 차라리 자기가 자기를 때려야 돼요.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걱정했어. 죽으면 그만일걸. 왜 살려고 그 짓 했어. 왜? 왜 살면서 자기 변명하고 자기 정당성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랬다는 식으로. 부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어. 자기를 때리되 울면서 때리지 마시고 웃으면서 때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낮 설교에 시편109편에 나오는 저주 조항했지요. 그 저주 조항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호탕하게 웃음이 끊이지를 않아야 돼요. 웃음이 끊이지를 않아야 돼요. ‘아, 주께서 참 잘 조지시는구나! 빌어먹게 하시는구나! 세상에 저런 저주를 당하는 사람 얼마나 좋겠나.’
저주는 저주를 당하면서 구원은 자기 구원받지요. 그 때마다 확인되니까. 얼마나 가벼워요. 신나고. 이 가벼운 마음으로 10분 쉽시다.
안양20260709b사53장7절(입 다문 메시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교재141페이지 보겠습니다. 중간 밑에 보면, 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자신은 스스로 탄핵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그게 이사야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성전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가게 되는데 성전에서 천사들이 등장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사야 2장 2절에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고, 산들이 있는데 다른 산들은 성전이 없는데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만 굳게 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산들은 밑에 작은 산으로 깔리고 많은 백성이 거기에 모여든다. 이게 2장2절이고요.
3절에 보면, 그 성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율법이 나와요. 율법이. 성전에서 뭐가 나온다? 율법이 나온다. 그럼 이 말이 뭐냐 하면 율법은 이미 주어졌지요. 율법은 이미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율법이 있었잖아요. 모세의 율법. 있는데. 율법이 어디서 나온 성전이냐, 어디서 나온 성전.
기존의 성전 같으면 율법이 안 나온다. 이사야 2장3절의 말씀입니다. 높은 산에 성전이 세워지고 성전에서 율법이 나온다면 그 율법이 나오게 된 그 찾아가고, 찾아가고, 접근하고, 접근하고, 접근하는 요 성전. 성전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사야6장에 보면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이 등장합니다. 그럼 이사야가 들어왔던 성전은 이 율법이 나왔던 이 성전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있는 성전이에요. 그런데 성전에 들어갔는데 그 성전이 전에 들락달락했던 그 성전이 그 성전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났고 여섯 개의 날개짓하면서 의지하면서 찬양할 때에 그 기존의 이스라엘 성전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성전이 유다에. 이 성전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요동친다. 흔들린다고 되어있어요. 이사야 6장4절에,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문지방의 뜻은 성전의 기둥의 입구 전체를 말하는데 문지방 터가 언약궤가 있는 그 입구가 요동하며 그 집에 연기가 가득 찼다. 인공물인 자연물 자체의 성전이 구조물이 건축물이 흔들렸다 이 말이지요.
그 자리를 누가 찼느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고 말았어요. 그럴 때 6장5절에 이사야가 스스로 자기를 탄핵해요. 뭐냐하면 내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되었다. 나의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선지자가 뭘 하는 사람이에요? 말을 하는 사람인데. 내 입술이 부정하다.
부정한 곳에서 정답이 아닌 것이 튀어나왔다는 거죠. 그러면 그 자기가 그동안 선지자 노릇했는데 그걸 누구보고 했느냐 하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그 당시의 백성들이 선지자를 요청했는데 자기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말을 해 달라고 이미 선지자들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가했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당신하고는 당신 교회에 안 간다. 했겠지요. 모든 선지자가 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압박을 받았다, 그 말이지요. 모든 선지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서 했는데 이사야도 그중에 한 사람인데 막상 이 성전 들락달락하는 뻔히 아는 성전이 아니라 딱 어느 날 들어갔을 때 웃시야 죽던 해에 왕이 죽던 해에 성전은 제대로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 왕은 죽어도 성전은 그냥 건물이라도 하나님은 산뜻하게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 영광과 더불어서 살아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이사야는 왕이 죽었으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직접 자기에게 도달되겠지요. 자기는 백성의 뭐가 되겠어요? 대표자가 되겠지요. 그 대표자의 고백이 뭐냐,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만 망한 게 아니고 같이 있는 백성들도 다 같이 망할 존재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끝.
영광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뭐냐, 필히 우리는 뭐해야 된다? “우리가 망해야 될 백성이 주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교재로 돌아와서 142페이지 중간에 누가 읽어보세요. 로마서8장32절 말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니” 내어주신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왜 내어주시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불쌍히 살리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주셨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고 자기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나머지 인간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상대하지 않겠다.
그래서 첫째시간에 했던 게 뭐냐, 나의 얼굴 지우고, 그 얼굴에 주님의 얼굴로 대체되는 것.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요 얼굴 대신에 이름을 집어넣어도 돼요. 보통 인간의 이름은 자기 얼굴을 대표하거든요. 내 이름지우고 주의 이름으로 나를 대신하고 나를 대표하는 거예요.
그럼 이름 대신 뭘 집어넣으면 됩니까. 얼굴 집어넣으면 되지요. 이름하니까 성 자꾸 그렇게 하는데. 출애굽기33장에 보면 그런 게 아니에요. 출애굽기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냥 등짝만 보여줘요. 등짝만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세 낯짝보고 싶은 게 아니에요. 자기가 원하는 얼굴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자기가 원하는 얼굴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보고 “보지 마! 눈 뜨면 안돼. 쑤그리!” 해놓고 주께서는 지나가지요.
지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는 긍휼을 준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그다음 문제에요. 왜? 공짜로 주기 때문에. 인간하고 상대를 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대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이 땅의 하나님의 얼굴로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 창세 전에 체결된 약속. 그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이 달성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언약이 달성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의 이름만 높일 수 있는 빌립보서2장 9절, 10절과 11절에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모든 무릎을 주의 이름 앞에 꿇게 하는 그 작업과 관련되어있는 그 결과가 되어있어요.
그래서 구원해주세요. 라는 말이 나올 수 없게 만들어요. 왜?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하고 상대를 안 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그것을 은혜로 제공하는 자가 있습니다.
살과 피.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지요. 살과 피가 성립이 되려면 이 몸체가 따로 있으면 안돼요.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안에까지 흘러야 되지요. 이건 뭐냐 하면 살과 피라는 말은 내 것 받아라가 아니라 너는 이미 나와 같은 몸이 될 경우에만 이 새언약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니 살이 니 살이 아니고 내 살이고, 니 피가 니 피가 아니고 내 피야. 내 피를 온몸에 돌아다니는 거예요. 온몸에. 몸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나가 될 때 기존에 있는 내 몸체로 하나로 묶어야 됩니까. 내 몸체가 벗어나서 주님의 몸체로 하나로 묶여야 되겠어요? 주님의 몸체의 하나로 묶여야 되겠지요. 몸체로 묶게 되면 그 이름이 필요하잖아요. 이름이 주의 이름이고 주의 이름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한 몸이 되었지요. 한 몸. 주의 이름입니다. 내 이름 아니고.
주의 한 몸이니까. 그 주의 이름의 지체가 되니까 내 얼굴이어야 돼요? 주의 얼굴이어야 돼요? 주님의 얼굴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얼굴이. 그래서 인간의 얼굴은 동일한 적이 없어요. 어제 얼굴하고 어제 얼굴은 그건 딴 사람이고, 오늘 얼굴은 딴 사람이에요. 인간은 같은 사람인 적이 없습니다.
왜 굳이 그 말을 해야 되느냐 하면, 어제나 오늘이나 다같이 주의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을 따로 당겨가지고 의지하고 동일하다고 이렇게 내세울 수 있는 여지는 주께서 거부합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힘든 것은 어제 같은 오늘 그걸 고집하기 때문에 사는 게 힘들어요.
어제는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는데 오늘은 어제 그 기대에 예상대로 안되지. 이건 뭐냐 어제하고 오늘하고 동일할 것이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 고민과 염려가 생기잖아요. 어제도 주의 몸이고, 오늘도 주의 몸이라면 거기에 왜 내가 건방지게 내 몸이라는 생각이 왜 건방지게 거기에 끼어드느냐 말이에요. 빠져야지요.
인간은 자기 얼굴에 자기가 반가워하면 안돼요. 주의 얼굴로 반가워해야 되지. 자기 얼굴로 반가워하면 안됩니다. 장사는 좀 달라요. 어제 온 손님 오늘도 오셨네요. 반갑네요. 오셨군요. 지난달에 오시고 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이리 되지만, 인간은 더 이상 나라는 손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의 지체가 되어서 그때 그때마다 주께서 가라치우는 새로운 얼굴로 감사해야 되지요. ‘어제는 멀쩡했는데 오늘은 왜 그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제일 많이 갖는 사람이 60살 넘은 여자분들이 많이 그래요. 점점 사진 찍기가 겁나요. 왜냐하면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것은 18, 19, 20살 한참 때의 청춘. 머리 단발해도 어울리고, 커트해도 어울리고, 파마하면 고상해 보이고, 긴머리하면 긴머리 소녀되고, 어떻게 해도 됐는데. 나이 60넘어서 길러봤다가 볶아봤다가 아예 머리를 쳐버려요. 어떻게 해도 내가 원하는 내가 왜 안되는데.
그걸 주님한테 기도해 보세요. “주여, 머리 어울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몸이 누구 몸인데? 어떤 머리든 감사해라. 니는 왜 스스로 탄핵하는 모습이 안 보여.” 자기 자신을 탄핵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게 바로 신약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 죄인에게 내어주어서 그걸 다시 회수하시는 그 절차를 따라오시면 구원에 절차입니다.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됐는지 안 됐는지 아는 것은 달리는 차 창가에 풍경을 보세요. 점점 더 내가 옅어지는지. 내가 소멸되는지. 그러면 그 기차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갈수록 내가 더 신경 쓰이고 내가 더 의식된다면 그건 뭐 창가에 너무 잡티가 환상이라는 잡티가 너무 많이 낀 거예요.
자, 어쨌든 율법이라는 것.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사야6장 계속 보면, 나를 위해서 누가 갈꼬, 할 때 기존의 율법이 아닌 새로운 법이 거기서 선포가 됩니다. 이사야28장 7절 보겠습니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비틀거린다는 말은 사상이 혼란스럽다는 뜻이거든요.
이사야29장9절~12절,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율법을 주시는데 그 율법이 어떻게 돼요? 해석가능한 율법입니까? 해석 불가능한 율법입니까? 해석이 불가해요. 28장13절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이 세상에 현재 이 현대인들의 그 사고방식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고방식을 보게 되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요. 정확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 사람이 하면 이 사람이 옳다, 저 사람이 하면 저 사람이 옳다. 정확하게 딱 잡아서 이게 만고불고하게 영원한 진리다. 라고 할 게 없어요. 어떤 학자 이야기하고, 아인슈타인 이야기하고, 뉴턴 이야기하고, 철학자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제안하고, 계속해서 그냥 내놓고 마음껏 내놓고 백날 언급해봐야 그들은 안정감이 없어요.
흔들리고 있어요. 마치 술 먹고 취해서 비틀거리듯이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안정된 진리가 없어요. 이 말하면 이 말이 맞고, 저 말하면 저 말이 맞고. 팔라고 해서 팔아서 망하고, 사라해서 사서 망하고. 지 맘대로에요. 지 맘대로. AI한테 물어봐도 AI도 모르고요.
이사야30장9절10절,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거짓된 것이라도 좋으니까 우리를 위로해 달라. 이거 위로 잘하는 사람 누굽니까? 상담가들 아닙니까. 상담가들.
결국 이사야에서 내린 결정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말은 말이 아니다. 그건 말이 아니다. 말이 아니면 뭐냐, 그들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육체에 불과하다. 이사야40장6절에 나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육체는 풀이요, 육체는 풀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들꽃같으니 꽃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풀이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들의 꽃이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 백성은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들의 꽃이나 풀이나 백성이나 모든 팔자는 똑같습니다.
그러면 뭐가 영원하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인간이 개입될 수 없는 내가 개입될 수 없는 그 말씀. 숯불로 이사야 입을 찢습니다. 숯불로. 제단에서. 제단이라 하는 것은 희생제물에서 나온 겁니다.
희생제물로 드렸던 그 뜨거운 제단에 나오는 숯불들고 와가지고 “화로다 망하였구나!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요.” 할 때, 그 입술에다가 찢어버리지요. 찢어버리니까 이사야가 고백하기를 그 상황이 뭐냐, 이사야가 고백하기를 이게 바로 내 모든 죄가 다 사해졌다는 거예요. 참 희한하지요.
죄가 이 안에 들어있어요. 들어있는데. 죄가 그냥 입술을 통해서 죄가 펄펄 나오는 거예요. 그 출입구를 슝~ 제단의 희생제물로서 그 입에 갖다 대니까 희생제물의 효과로 인하여 이 안에 있는 모든 것도 같이 다, 나올 준비하고 있는데 이것까지 다 깔끔하게 전부 다 죄가 용서를 받았어요. 죄가 용서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이야기지만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죄짓는다. 아닙니다. 인간은 죄가 들어있다. 아닙니다. 인간은 죄다. 인간은 죄다. 인간이라는 육신은 죄라는 영적인 것을 받쳐주는 하나의 껍질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죄다. 여기에 나와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어떻게 죄 용서받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 거룩과 죄를 먼저 만남이 있고 그 결과로 인간은 죄 용서를 받는 거예요. 만남.
그래서 주께서 찾아온 것은 죄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고 죄를 만나게 해서 의되시는 분이 죄와 만나는 거예요. 생명되시는 분이 선악과 따먹은 자를 만나는 거예요. 만나서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 이 의로 인하여 죄가 탕감되는 효과를 의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선포해버리지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하찮은 존재입니까? 귀한 존재입니까? 대단히 귀한 존재에요. 엄청나게 귀한 존재에요. 주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쓰여졌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정도 귀하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결단 못 내려요. 내 인생에 대해서 조정하려 들면 안돼요. 너무 귀하기 때문에. 주제없이 내가 내 인생을 컨트롤하려고 하면 안돼요. 그 정도로 우리는 귀해요. 귀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한테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일방적으로 주께서만 혼자 쓰시는 거예요. 우리라는 그릇은 내가 쓸 자격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없어요. 그래서 이걸 하기 위해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철저하게 말씀위주로 나갑니다. “나를 위해서 누가 가지?” 이건 뭐 뻔히 아시면서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요!” 쳐들어 가지요. “가거라. 그런데 가는데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이게 바로 마태복음13장에서 비유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했고, 또 요한복음 12장43절에 또 나와요.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세상영광은 내 영광을 보지 못한다.
중간에 뭐가 있느냐 하면, 말씀이 있었어요. 이 말씀은 인간들로 하여금 육체에 불과하고, 풀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은 어떠한 솜씨도 없고 재능도 없고 하늘나라에서 받지도 않는 재능, 솜씨 그런 거 소용없고,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 말은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없는 것을 말씀이 담아서 말씀 되시는 분이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할 때 결국은 이 문서 선지자의 이사야 내용의 핵심은 뭐냐, 말씀이 어떻게 일을 준비하고 진행 시키고 마감시키느냐, 고 내용이 이사야 전체 내용이에요.
자, 이제부터 이사야를 제가 전에 강의할 때에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데 제일 마지막 시간에 이사야를 총정리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리스도 속의 이사야] 책에 보면 말씀의 움직이는 책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9가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9가지 이미지.
첫 번째 창조 이미지, 두 번째 낙원 이미지, 세 번째 악마 이미지, 네 번째 노아 이미지, 다섯 번째 아브라함 이미지, 여섯 번째 출애굽 이미지, 일곱 번째 민수기 이미지, 여덟 번째 할례 이미지, 아홉 번째 소돔과 고모라 이미지가 있는데 이미지라고 이렇게 언급한 이유는 이 이미지로 구원받을 수 없어요.
이미지는 영상 같은 거. 그림 같은 거기 때문에 사진 같은 거기 때문에 사진을 들여다 보면 구원받는다 이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그 말씀이 이미지화되는 것은 우리가 이사야를 천독 백독해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본다. 못 알아봐요. 우리가 이사야를 보고 백독해서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 때문에 구원받아요.
이미 구원을 받아 놓은자에 한해서 왜 이런 인간이 이미지를 통과하지 못하고 이걸 기쁘게 못 받아들이는가를 그다음부터 차후에 사후에 이런 이미지화 시키는 거예요.
창조 이미지, 낙원 이미지, 악마 이미지, 이런 이미지들은 어디에는 인기가 없어요? 인간들이 자기 자체적인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일상생활에 몰입할 때는 이런 이미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에 이발소에 가잖아요. 이발소에 가면 꼭 이발소에 그림이 있어요. 이발소 그림이라 해가지고 돈 얼마 안 줘도 길거리에서 파는 삼류 작가들의 남 흉내 내서 그린 그림들이 있어요. 깊은 산속에 계곡이 있고 어떤 외로운 사람 뱃사공이 노 젓는 거. 이발소에 앉아서 그 그림을 바라보면 ‘야, 참 좋다. 저런 세계가 있구나!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 하지만 이발 끝나면 나와야 돼요.
이발 끝나면 이발 한 채로 나와서 일상생활을 해야됩니다. 따라서 이런 이미지를 표현한 것은 일상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이건. 일상생활에. 1번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창조했다, 뭐 어쩌라고? 어떻게 창조했는데? 무에서 창조했다. 이사야 45장 7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이거 외우고 안다고 해서 직장생활이나 살림살이 나아지는 거 없잖아요. 없지요.
또 어떤 경우에 이것이 단지 이미지가 아니고 실제 현실이다, 라는 것을 언제 알까요? 이 창조 이미지가. 간단해요. 언제 아느냐 하면, 창조 이미지로 알았던 이 창조가 나한테 내 인생에 여기에 내 인생을 새롭게 만들어 버리면 비로소 그때는 우리가 알고 싶지 않더라도 온몸으로 느끼지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안에 말씀이 와서 침입을 해가지고 말씀으로 완전히 뒤집어씌운 거예요. 말씀의 샤워. 말씀에 샤워 돼서. “나는 빛을 지었단 말이야. 알았어? 나는 어둠도 창조했어. 알겠어? 나는 평안도 만들어. 알았어? 환란도 창조한 거야. 이게 여호와야.” 하는 것을 실감 나게 만드는 경우가 생길 거예요. 늘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경우가 생기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미지는 못 알아들어요. 실감 나게 실제로 나는 이 말씀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듭니다.
자, 그다음에 낙원 이미지. 51장 3절.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 다음에 35장5,6절,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걸 사람들이 보게 되면 ‘아, 이리 됐으면 좋겠다.’ 이미지죠.
이발소에 가서 ‘야, 저런 계곡 저런 강물이 넘치는 곳에 한 번 가보면 얼마나 풍경이 좋겠나’ 이발 끝나면 나와야 돼요. 잠시 내 영상속에 영상이 떠올랐던 것 뿐이지요. 이게 실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뛸 것이며, 어떤 자만이 이런 고백이 나오겠어요?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저는 자, 이 전부를 실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은 소경 실감할 사람이 있을 거고, 다른 사람은 귀머거리 실감할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것이 실감하게 나온다는 것은 내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아, 이 말씀이 내가 주님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아버지하고 상대해서 결과물로 선물로 그냥 나한테 덮어씌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한꺼번에 이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나는 그냥 주께서 다루시는 꼭두각시 인형 같은 주께서 갖고 노는 인형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이 현실에 잠시나마 이 현실에 확 담겨 들어오게 되지요. 담깁니다.
그다음에 악마의 이미지. 이사야27장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는 것은 신경 쓰는 것은 그 무역하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신경 쓰지, 공장의 일하는 사람들이 바다에 관심도 없지요. 이건 하나의 이미지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이사야47장을 봅시다. 과연 이미지로 끝날 것인가. 47장7,8절,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복음 모르는 여러분의 남편, 가족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주장은 뭡니까.
“나 뿐이라. 나한테 소중한 것은 나만 있으면 됩니다. 앞으로 나 잘될 거예요.” 이게 바로 마귀 이미지지요. 너무 너무 자기에게 충실하지요. 바짝 긴장할 정도에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짝 긴장해서 행여나 남이 귀하고 귀한 나를 건드릴까봐 완전히 털이 고추설정도로 곤두설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요. 젊은 사람들이 갈수록. 전 세계가 전체가 음녀의 세계, 악마의 세계입니다. 자기한테 그렇게 예민해요. 자기한테.
그다음에 네 번째, 노아 이미지. 54장 9절,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한다. 분명히 노아 때 홍수하고 다시는 물로서 멸망치 않겠다는 거예요. 그 말을 잘 알아 들으셔야 돼요. 다시는 멸망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고, “노아 홍수 때 네가 사정없이 완전히 다 작살났지. 그치? 내가 다른 수단으로 그렇게 작살낼게.” 그런 뜻이에요. 이제는 물로서가 아니라 불로서 다 싸질러 버리겠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아브라함 이미지. 51장12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의 이미지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언약이 맺은 이상은 도중에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보다 더 구체화되고 더 심화될 뿐이지. 한 번 택한 자를 주께서는 버리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아브라함 이미지에요. 왜? 누가 먼저 찾아왔어요? 주님이 먼저 찾아왔잖아요. 주님이 먼저 찾아왔어요.
주님이 먼저 찾아온 사람과 자기가 주님을 불렀다고 여기는 사람의 차이는 뭐냐, 주님이 먼저 찾아온 사람은 항상 모든 것을 주께서 하신 결과로 보는 반면에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은 내가 행동을 똑바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리게 하겠지. 그게 안 찾아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이 안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그 특징이에요.
요렇게 행동을 반듯하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한테 징벌을 좀 줄여준다든지, 봐줄게. 한다든지 앞으로 어떤 일도 어떤 사고도 안 일어나게 조치하겠지. 은근히 기다리는 거. 요게 바로 아브라함의 이미지하고 다른 거예요. 아브라함 바깥 이미지인 겁니다.
여섯 번째, 출애굽 이미지. 이사야11장16절, 아, 참, 출애굽 하기 전에 이사야45장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사야45장은 워낙 중요한 구절들이 되어서요. 45장15절, 다 같이 읽어볼까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야~~, 스스로 숨어계신다. 사람한테 포착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조치를 다 하시는 하나님.
“내가 먼저 주님을 찾아냈습니다.” 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하셨다.” 하는 소리를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내가 어려웠으니까 하나님이 찾아와서 도와줄거라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 어렵다고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안 어려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다 어려워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살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고. 떠나야 할 곳에서 우리가 지금 머물려고 용쓰고 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그래요. 어릴 때부터. 20살 때만 그런 생각이 아니고 줄곧 그것이 우리 몸에 베어있어요. 떠날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안 떠나는 반대로 살고 있으니까 본인이 얼마나 긴장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래 놓고 자기가 이렇게 애써서 하나님이 좀 도와주면 안 되냐고 또 하나님보고 닦달내내요.
장사 좀 해보려고 하는데 또 비가 와가지고 개업하는데 손님 안 오게 만들고. 이런 식으로.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은 “니가 그런 소리하니까 내가 피해서 숨어버렸잖아. 시작을 내가 나대야지 왜 니가 나대. 니가 왜 그렇게 나대냐. 내가 알아서 다 하겠다는데. 진짜 믿음 없는 것도 참. 니가 믿음 없는 것도 정말 재능이다. 정말. 기술이다. 기술. 정말.” 이런 욕을 들을 때마다 그걸 감사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도대체 내가 어디서 문제가 있는지를 인생 살면서 그걸 늘 경험하는 거예요.
그다음 출애굽 이미지. 그거 참 중요하지요. 이사야11장16절,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제2의 출애굽, 제3의 출애굽, 제4의 출애굽, 매일같이 출애굽 시키는 하나님. 이 출애굽 이미지를 말씀에 담아서 매일같이 우리를 하루 하루 스케줄과 일과를 주님쪽에서 정해 놓고 출애굽하기 위한 그러한 원칙을 그것이 오늘 우리의 하루의 삶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빼내는 거예요. 출애굽을 잊지 않으셨죠.
그다음에 일곱 번째 민수기 이미지. 이사야41장15절,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민수기가 뭐 하느냐 하면, 숫자 세기거든요. 그 숫자를 왜냐하면 그 숫자 세는 게 이스라엘을 군대로 여겨서 숫자를 세요.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그 주변에 언약궤가 댓방이고 대장이고 그 주변에 뭘로 둘러싸느냐, 이스라엘 군대로 둘러쌉니다.
그럼 전쟁을 누가 하느냐, 언약궤가 전쟁을 승리하게 되면 그 군대는 하는 일이 뭐냐, 이삭줍기. 이삭줍기하는 거예요. 폐전병들 확인하고 전리품 챙기고. 그게 이스라엘 종족, 이스라엘이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이 해야될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인생 살면서 여러분들이 주께서 일하시는 그 남으신 업적들을 주우세요. 공짜로 주워보면, 쏙! 쏙! 전부 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울 때 이걸 돈, 주식 이런 걸 줍지 마시고 말씀으로 주워야 돼요. 말씀으로. 건강해졌다. 그런 걸 줍지 마시고 말씀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설명이 우리를 치료하니까요. 이 말씀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이 나와 이 세상과 주님을 한꺼번에 알게 만듭니다.
그다음에 할례 이미지. 이사야37장30절, 아, 요거. 야, 요거 중요하지요.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요게 레위기19장23절, 25절에 나오는 나무에다가 할례를 행하면 나무에게 할례를 행하면서 나무에게 나온 실과를 니가 농사해서 내 농사의 결과를 내가 내 거 따먹는 게 아니고, 반드시 할례라는 원칙을 경유해서 죽은 나무에서 죽은 나무를 주님이 살려서 열매 맺게 해서 그 열매를 따먹는 식으로 우리가 열매가 있는 땅에 같이 살아간다, 요런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 할례가 뭐냐 하면 할례가 그런 거예요. 죽었는데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 이미지가 바로 할례 이미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 소돔과 고모라 이미지. 이사야13장19절,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이것은 이렇게 이해를 해주셔야 돼요. 우리가 보기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것이 바벨론이라고 보지요. 바벨론. ‘최후의 서막을 알리는 단일제국’ 이게 바벨론입니다.
최후의 서막. 다른 말로 하면 시작된 최후. 시작된 종말. 이게 어떻다고요? 단일제국이에요. 단일제국이라 하는 것은 나라가 꼭 하나가 될 필요가 없어요. 모든 나라가 한 나라처럼 그냥 소통이 된다는 말이에요. 한 나라처럼. 서로 통하는 하나의 바벨탑처럼. 이게 뭐가 된다?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는 거예요. 불로서 유황불을 받았던 그 시범조로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
그게 벌써 이사야에 이렇게 예언돼 있습니다. 그럼 끝으로 이사야의 이 많은 일을 누가 하느냐는 거예요. 누가? 우리 중에 누가 할까? 인간 중에 누가 할까요? 어떤 인간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처녀 출신이 아니에요. 처녀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사야를 다 보고 백독을 하고 은혜받겠다고 다했는데 초반에 처음 이 출발점 ‘처녀가 잉태하여’ 여기에 대해서 못 믿겠다고 나자빠져버리면 소용없어요. 처녀가 잉태했다는 것은 처녀가 아닌 자는 나는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나는 처녀가 아닌 데서 나온 건 사람 취급하지 않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하지 않겠다는 그걸 여러분들이 확고히 명심해야 돼요. 그게 왜냐 그게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누굴 상대 안 한다? 나를 상대 안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왜 자꾸 쓸데없는 기도를 해요? 상대하지 않는데. 그럼 기도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지 마!” “그럼 어떻게?” 기도하게 하실 거예요. 어떤 식으로? 주께서 하신 일을 알기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감사하라고 주께서 기도를 시킬 겁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이 시간까지 살게 하시고 이사야 말씀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주님만 상대하셔서 어떤 결과물을 낳았고, 그 결과물 속에 초빙받아서 주님만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증인으로 귀한 존재로 쓰여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