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60312a시1편5절(학실히+치아라)-이 근호 목사
129페이지, <시편과 한국교회>. 시편은 성도가 속된 세상에서 이게 세상 앞에서 속되다는 표현이 있는데, 속된다는 그런 평가는 성경에서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지 세상 자체에서는 이런 평가가 없어요. 속된 세상이다. 그러면 속된 세상이라고 평가할 경우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는 이 속된 세상에 포함되잖아.” 포함되지요. 그럼 속된 세상에 속한 인간이 세상을 보고 속되다 하면 그 견해 자체도 어때요? 속된 거죠. 엉터리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시편은 그냥 인간들이 세상이다. 속됨을 빼고 그냥 세상이다. 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속되게 한다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게 될 때, 그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어떤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체험할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일반인들은 절대로 속되지 않아요. 거기서 태어났고 좋든 싫든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에요. 현실 아닙니까. 속되다, 속 안 된다, 해가지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건 전혀 없잖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살아가게 되면 그 세상에서 속되다, 라는 말을 그 속에 살아간 인간들은 말을 안 하죠. 말을 못 하고 그 말해 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공식 하나 또 시작됩니다. “세상은 개선되지 않는다.” 바뀌어봤자 그 세상이 그 세상이죠. 그냥 받아들이자. “세상은 개선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자.” 요 이야기. “세상은 개선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자.” 이리 있잖아요. 요 세상에다가 누굴 대입하느냐, 나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나는 교회 간다고 인간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다음에 뭡니까? 그냥 나를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자. 여기서 이렇게 되면 뭐가 탈락하느냐 하면 뭐가 떨어져 나가는가 하면, 복음, 말씀, 하나님의 뜻, 이것은 그냥 왔다 가지요. 왔다가 잠시 붙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세상에 들어가면 먼지가 바람에 불면 붙어 있던 먼지가 날아가듯이 “언제 있었어?” 할 정도로 다시 떨어져 나갑니다.
일요일 날 만약에 말씀 들었다. 일요일 날 말씀 들어도 몇 시간 됩니까. 다시 월요일 되면 우리는 세상에 거저 있는 그냥 받아야 될 세상에서 나는 그 세상에 어떻게 하면 적응하느냐, 살아남느냐, 여기에 몰두하고 그런 식으로 월요일 날 하루를 보낸다면 그런 식으로 화요일 하루를 보낼 것이고, 그런 식으로 일주일 보낼 것이고, 그런 식으로 10년을 보낼 것이고, 그런 식으로 90년을 보낼 것이고, 그 뒤에는 몰라요. 그 뒤에는 모르지요.
그런데 이 시편에 나오는 이 신앙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리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같은 세상 속에 인간이면서도 마치 세상 바깥으로 한 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것 같은 인식을 가르칠 수 있느냐? 아~ 희한하다. 그 희한한 책이 바로 시편 책입니다. 그게 시편 책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같은 인간인데. 그럴 수 있느냐. 성경은 말합니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세상 밖에 한번 나갔다가 들어와 버리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느냐 하면 속된 세상이 돼요. 더러운 세상이 되고. 이건 그 세상에서 그까짓 거 날아가도 오히려 속 시원한 그런 감을 주는 세상인 반면에,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말씀을, 하나님의 예언을 귀찮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편과 한국교회> 강의를 하면서 저는 이 교재(시편 정리)를 쓰면서 이런 마음을 한 번 가져봤어요. 저나 여러분들이나 이 세상에서 이사 갈 때, 세상이 끝날 때 또는 여기 살다가 다른 나라로 이민 간다 할 때, 다른 건 다 버리더라도 요 복사된 두 장만은 안 버렸으면 좋겠다. 이 안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이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은 시편 안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이건 목숨을 버린다 할지라도 이거는 안 버리고 내 죽을 자리에 함께 묻어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나 혼자만의 생각인데,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1번부터 26번까지 지금부터 한번 달려가 봅시다.
성경책을 옆에 두고 부지런히 찾아야 돼요. 친절하게 성경 구절 다 해버리면 종이가 너무 두꺼워져요. 그래서 처음에 두세 개는 해주고 나머지는 직접 찾는 방식으로 합시다.
(1) 영원한 문: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24:7,9/행13:33~34 들어가는 문도 아니요 나오는 문도 아니다.
1번, 아~ 문인데 영원한 문이에요. 그런데 영원한 문인데 뭐라고 돼 있냐 하면 들어가는 문도 아니요, 나오는 문도 아닙니다. 요걸 붙여놨지요. 보통 문이라 하는 것은 문은 그대로 있고 움직이지 않고 들락달락하는 것은 인간들이 들락달락 움직이는 쪽은 인간 쪽에서 움직인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문들은 뭐냐, 아예 문 자체를 짊어지고 자신이 문이 된 채 찾아오시는 문.
인간들은 꿈쩍도 안 하고 있는데 문이 꿈적도 안 하는 인간 쪽에 친히 방문하시는 문. 문자체가 고정된 게 아니고 움직여서 우리를 찾아오는 문. 그 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문들아 들을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을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다. 이게 시편 24편 7절에 있고, 9절에 한 번 더 나오지요.
여기 문이 어떤 문입니까? 영원한 문이지요. 영원한 문이 이 폐쇄적인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은 창세기 3장 21절에서 생명나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치하신 하나님 쪽에서 아예 생명나무가 이동했다. 문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동해서 영원한 문. 영원한 문이 이동해서 들어가는 문도 아니고 나오는 문도 아니고 우리에게 덮쳐지는 문이지요.
이렇게 우리를 영원히 덮칠 수 있는 근거는 그 문에 대해서 홀로 오셨다가 나가셨다가 들어오셨다가 나가시는 그 홀로 하신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예 문자체가 되셔서 나는 양의 문이라 하셨잖아요. 자체가 되셔서 오셔서 이것은 우리 인간 쪽에서 들어갔다 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아예 덮친다, 보시면 돼요.
삼손도, 삼손을 가둬놨던 그 요새 그 문자체를 삼손이 힘이 세가지고 어깨에 메고 문자체를 자기가 들고 다녔잖아요. 그러니 영원한 문의 특징은 폐쇄가 무너졌다. 폐쇄가 무너졌다, 하면 이건 더 이상 갇힘이 없다. 자유지요. 자유가 덮친 문. 자유케 하는 문. 그게 영원한 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 가도 요 시편24편7절,9절 이 구절은 정말 잊으면 안 되겠지요. 이민을 가든지 이사를 가든지 어디가도 폐쇄적이잖아요. 세상이.
그 다음에 사도행전 13장 33절, 갑자기 시편과 관련 없을 거 같은 이건 왜 있느냐, 13장 33절에서 34절에 보면 시편 2절에 있지요. 시편2절과 관련돼 있고 13장34절에 보면 제가 읽어보겠어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켰다가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셨다.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 이건 보험 들은 정도가 아닙니다. 보험이 필요 없게 만들어요. 우리에게.
생명보험 자체가 보험료가 인상돼도 갱신되어도 보험료가 오르지 않습니다. 하는 거 있잖아요. 보험료 상관없이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여놓고 죽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살리는 그 문. 그 영원한 문. 시편2편의 기름 부은다, 가 바로 이 예언대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13장에서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할 때, 그 얼마나 놀라운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전하는 자가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너희 사는 세상에 아예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 자부심. 저와 여러분도 그 자부심은 가지시기 바랍니다.
(2) 부활: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10~11
이러한 사도행전의 13장 34절의 내용은 시편16편 10절에서 11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아니할 것이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니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벌써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시편16편이 예언돼있습니다. 이 예언은 일단은 누구한테 갑니까? 예수님한테 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그 다음에 누구한테 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고 믿게 된 자에게. 피동성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 믿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힘으로 믿는 자를 다 거부합니다. 믿게 된 자만 선별해서 받아들이고, 믿는 자는 퇴출시킵니다. 믿게 된 자에게 그 안에서 이 시편 16편이 우리 안에 활동하도록 하시는 거죠.
(3) 복과 오만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1:1)-백설공주의 예
유아들도 들어가는 나라(시8:2/민14:31)
오만 : 자기는 인생뿐이다. (시9:20/56:2/50:22)
3번째, 복과 오만입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다음에 나온 말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이리 되어있지요. 오만한 것, 죄인, 악인. 사람들은 어디에 그만 정신이 팔려있는가 하면, 복 있는 사람 하니까 “그 복 주세요. 주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입춘대길 이런 거 있잖아요. 비스듬하게 대문에다가 쫙 걸쳐놓고, 아니면 상점 앞에다가 입춘대길 딱. 나는 상점앞에 그걸 보면 안 가고 싶어. 입춘대길. 봄 되면 운이 터진다는데.
그 복 있는 사람이라는 규정을 하려면 그 옆에 누가 같이 등장해야 돼요? 악인 등장해야 되지요. 죄인이 등장해야 되지요. 오만한 자가 반드시 함께 동반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동반해서. 말씀은 들었는데 나쁜 소리는 아니네. 이런 거. 희한한 현상이에요. 내가 믿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악인이고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자는. “좀 있다가 믿을게.” 믿음은 믿고자 하는 자에게 주는 게 아니고 믿어지게 하는 자에요.
믿어지게 하는 자라야 복만 딱 손에 쥐는 게 아니고 옆에 있는 그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 라고 덩달아 같이 이걸 포함시켜 줘야 우리 자체가 시편1편이 되는 겁니다.
시편1편 가운데 복만 따내가지고 가위로 오려가지고 그것만 하는 게 아니에요.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숙제하면 잡지에다가 가위로 오려가지고 그림만 해놓잖아요. 그림만 해가지고 숙제에 붙여오잖아요. 가위 대면 안돼요. 우리는 옆에 것은 필요 없다고 하는데 필요 없는 것이 나에요. 필요 없는 것이. 천국의 아무 쓸모없는 것이 나라고요.
이 쓸모없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다음에 나오는 가사 뭡니까? 이 쓸데없는 것. 쓸데없는 자. 유행가만 아는 게 아니에요. 팝송만 아는 게 아니에요. 이 쓸데없는 자. 이 쓸데없는 자가 바로 당사자라는 것을 아울러 아는 거죠.
자, 오만한 자라 했는데 오만한 자의 예가 백설공주에요. 백설공주에서 눈에 띠이게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백설공주 당사자가 아닙니다. 백설공주를 대적하는 바로 거울 앞에 선 사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이게 오만이에요. 모든 인간은 오만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지요. “거울아! 거울아! 이 아파트에서 누가 제일 행복하냐?” 이런 거요. 오만한 거예요.
그리고 이 복과 오만의 이 나라는 이건 힘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어린아이도 들어가요. 어린 아이도. 여기 민수기14장31절인데, 이걸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이게 뭐냐 하면 정탐꾼 가고 난 뒤에 “아, 이거 우리는 괜찮지만 아이까지 사로잡혀서 우리는 못 들어갑니다. 어떻게 저 강력한 약속의 땅 원주민을 당해냅니까?” 할 때, 너희 유아들이 내가 친히 인도하여서 너희가 싫어하는 그 땅을 보려니와. 그렇게 만들겠다. 그게 민수기14장31절.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젖먹이가 사자와 같이 노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 무서운 사자와 어떻게 친하게 지내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땅에 들어가게 할 때는 그만한 사자든 뱀이든 뱀의 굴에서 아이가 장난을 치든 상함이 없는 조건을 구비한 채 다시 말해서 영원을 보장받은 채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여기 시편8편2편에는 이건 워낙 유명한 말씀이지요. 젖먹이 어린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승리에 대해서 찬양한다는 내용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결국 어린아이가 들어간다는 말은 여기서 우리가 무슨 내용을 끄집어 낼 수 있느냐 하면, 일체 천국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움이 없다.
천국 가기 전부터 이 땅에서 이미 선제적으로 두려움이 없게 만들어요. 성도는. 두려움이 없다. 왜? 내가 요령을 부려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낚아채이 듯이 피동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두려움은 기존의 이 세상에 속하는데 성격이고, 장차 올 천국의 성격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움이 없는 방법은 자꾸 질문하세요. 집에 불났다. 안되는데. 가스불 안 끄면 안되는데. 집 없으면 뭐 어때? 참 집 없어도 되잖아. 좀 춥겠지. 추우면 어때. 추우면 얼어죽겠지. 뭐. 그러면 되잖아요. 뭐. 이런 거. 계속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극한으로.
오만은 뭐냐 하면, 자기는 인생뿐이라. 시편9편20절.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자기는 인생뿐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지요. 인생이 인생을 해결하니까 속된 세상의 일부로서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잘 적어놨다가 여러분이 마지막 나는 돈 안 준다. 유산으로 이거 남긴다 해가지고 이걸 그냥 복사해서 주면 돼요. 자식들에게. 원판 주면 안 되고 복사해서.
그 다음에 시편56편2절,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어떤 자가 많습니까? 교만. 교만히 치는 자가 많다. 교만한 자가 뭐냐, 메시아를 안 믿는다든지, 메시아를 조롱한다든지, 메시아에 관심 없는 모든 자들은 교만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낚아채기 전에 우리의 자세였어요. “지금 사업한다고 돈 벌기 바쁜데 언제 교회 다녀.” 그런 식으로. 그게 오만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시편9편20절, “니는 딱 니 인생뿐이다.”
시편50편22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뭡니까? 찢으리라. 찢으리라~~.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어버려요. 그러한 권한이 주님한테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찢어도 할 말 없는 대상이다.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뭡니까?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이 찢었으니까. 하나님이 건지지 않는 한 아무도 건지지 못합니다.
(4) 시온 : 들어가는 길이 너무 어렵다.(시15:1,5), 자기 내부까지 침투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시온에 복이 주어진다. (시134:3)
택한 자만의 도성 : (시78:67~69)
이방민족 중의 시온이다 : (시87편)
산 자의 땅 : (시27:13)
4번째, 시온. 시온에 들어가는 길이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요. 시편15편1절.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지 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누구입니까?” 하는 말은 이게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거의 없다는 뜻이지요. 이게 쉬울 거 같으면 대충해서 다 들어가면 되는데, 거의 없어요. 거의 없습니다.
성산에 들어가는 자는 거의 없는데 들어갔다 하는 자는 그 혜택이 주어져요. 15편5절에.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그 혜택이 뭐냐 하면, 요동치 아니한다. 아까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이번에는 뭡니까? 흔들림이 없다.
이를 위하여 자기 내부까지 침투한 전쟁. 왜냐하면 우리가 출신이 이 세상 속된 출신이기 때문에 천국은 이런 천국이고, 우리 내부 세상은 속되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전쟁터가 돼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복이 주어지는데 복은 어디에 주어지는가, 시온에 주어진다. 시편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복주는 장소가 지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옷 파는 곳 갈까요? 삼일동안 텐트치고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갈까요? 그 장소가 어디냐, 그 시온은 주께서 친히 만들어내는 곳이지 어떤 특정장소에 우리가 기다린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뒤에 나와요. 시편78편67~69절.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아까 시온이 어디냐고 했지요? 일단은 요셉 아닙니다. 에브라임 거부당합니다.)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유다지파를 통해서 메시아.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아. 메시아가 시온입니다.)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여기 70절에 다윗을 택하시고, 되어있지요. 다윗을 택했다는 것은 오실 메시아를 다윗이 그 시대에 모형으로서 최종적 모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다윗을 택했다. 그래서 시온은 택한 자만의 도성이다.
그 다음에 시온은 그 우뚝, 이방 민족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우뚝 서지요. 시편87편.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한다.” 우뚝 서지요. 4절에 보면,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시온에 등록된 사람들을 따로 뽑아내어서 아까 선택이니까. 믿음이 쳐들어오니까. 해서 시온에 집결시킨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집결시킨다. 이리 되겠지요. 특히 6절에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복과 저주, 복이라는 저주라는 그 구조에 체계에 맞추어서 적절하게 적당하게 탄생하게 출생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소속이 복의 소속이냐, 저주의 소속이냐가 중요하지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말씀드렸지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예언(새로운 현실판)이고.
그 다음에 시편27편13절.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같이 찾아보니까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요. 뭐가 감사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나이가 92, 94, 95 되어보세요. 눈이 어두워서 못 찾아요. 아직까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27편13절입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그 땅에 어떤 자만 모이게 되어있다? 영생을 얻은 자. 영원한 눈이 덮인 자. 산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세계. 이게 바로 천국이지요. 이게 천국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젊을 때 대기업에 합격해 보세요.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이 있겠습니까.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자부심이 옛날에 우리 일 때는 서울대학교 교복이 따로 있었어요. 신입생 입학식 할 때 자부심이 널널했을 거예요. “너도 왔어? 3년 재수하더니 너도 왔구나! 기어이 왔구나!” 이런 거. 뿌듯한 자부심. 그러나 그 자부심은 늙어 죽으면 소용없는데 이건 영원함입니다. 영원함. 영원한 세계에 합격을 했으니 집에 가스 불나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합격했으면 됐어요. 자식 공부 못해서 맨 날 2등만 하고. 2등해도 괜찮아요. 전교 2등해도 괜찮다고요.
(5) 진동 : 시68:8/29:8
그 다음에 진동. 시편68:8절. 진동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왜 이렇게 진동을 따로 요 개념으로 따로 했느냐 하면, 결국 이 세상이 히브리서12장에 말씀 이 세상이 결국은 움직인다는 거예요. 결국은 모든 것이 흔들리잖아요. 진동은 뭡니까? 흔들기지요. 흔들기. 흔들어버리잖아요.
시편68편8절,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고, 그러니까 아까 이 이야기 듣고 두렵고 이러면 안됩니다. 두려움이 없고 이미 요동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거 뭐 어차피 떠날 동네니까 주께서 마음껏 흔들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지요. 그런 느긋함이 있어야 됩니다.
시편29:8절, 전쟁 일어났다고 걱정할 거 없어요. 기름 오른다고. 어차피 흔들거니까.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에 진동하며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을 진동하셨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며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다. 여호와께서 홍수때에 좌정하심이라. 이게 뭐냐 하면 홍수 때에 일으킨 분이 누구다? 하나님이다. 그러면 홍수를 일으킨 분이 시편29편8편을 말씀하신다. 이리 보면 돼요. 그냥 말씀하는 게 아니라 “내가 홍수를 일으킨 당사자거든. 그래도 내 말 안들어?” 이런 뜻이에요.
(6) 도로 소환 : 시71:20/115:17~18
그 다음에 6번. 시편71편20절. 도로 소환이라 하는데 이게 특이하지요.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고난 같은 것은 주님의 말씀의 고난은 주께서 모른 척 하는 게 아니고 다 알고 계시다는 거예요.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일종의 우리를 뭐로 사용하시느냐, 샤브 샤브로 사용하는 거예요. 일단 뜨거운 물에 집어넣고 주님의 입속으로 쏙 들어가는 거예요. 소스 찍어가지고. 무한리필 샤브샤브. 28,000원내지 30,000원 할 거예요.
이 세상의 고난 속에 있는 것은 그걸 줄여서 일부러 주인님이 적시게 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자기 인생을 탓하거나 내가 죄를 많이 지었구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착하다고 고난 안 받는 줄 알아요? 아무 상관 없어요. 고난은 누구나 이 땅에서 성도는 고난받게 되어있습니다. 특이하게 여기지 마세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시편115편17~18절.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송축하는데 어디까지 송축한다? 영원까지. 그러니까 찬양대가 저희 집에서 연습하라고 찬양대 하는 게 아니잖아요. 찬양했으면 연습했으면 어디를 찬양해야 됩니까? 본 무대에 본당 낮 예배에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찬양한다는 것은 이 찬양이 어디에 합류하느냐, 천사들이 찬양대에 올려붙이는 천사들의 찬양대에 그것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찬양대에 합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파트연습 한다 보면 됩니다. 소프라노는 소프라노끼리, 테너는 테너끼리, 베이스는 베이스끼리, 메조는 메조끼리. 다 파트별로 연습하는 거예요. 천국에는 이런 삶을 산다.
그래서 아까 누가 말씀하신 것처럼 다윗은 왜 노래를 불러서 하나님 신을 받는가, 왜 엘리사는 노래를 부르느냐, 그 노래가 모든 것이 미래가 종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가 확정된 종결된 완성된 상태에서만 현실을 구축하는 거기서 현실의 내용이 압축된 채 선지자 입을 통해서 현실 입장에서 미리 내뱉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누릴 비가 안와서 이렇게 하는데 자기는 음악 노래하고 있으니 노래 듣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다른 세계가 완성된 세계가 미완성세계에 침투라 보시면 됩니다.
(7) 말씀의 성실 : 시119:89~90/89:1~2
그 다음에 7번을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거예요. 7번. 시편119:89~90절. 물론 나만 좋아하지만 하여튼 너무 좋아해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야~~, 세상 전체가 주의 말씀이 없는 곳이 없다는 거예요. 모조리 다 주의 말씀이고, 그 주의 말씀 활성화되는 것은 인간 손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성실하심이 말씀이 말씀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어느 한순간, 어느 한 장소도 말씀이 없는 곳이 없는 거예요. 말씀이. 네덜란드에도 말씀 있고, 한국에도 말씀 있고. 어느 곳에도 말씀 없는 곳이 없어요. 그냥 사람이 왔다 갔다 해도 말씀은 양쪽에 다 말씀이 있고, 그런 모든 일어난 일은 주님의 성실하심의 몫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89편1~2절.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영원히 알게 하리라.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도가 된 게 아니고, 주님의 성실하심을 우리 입을 통해서 이게 마이크로 사용하기 위해서 스피커로 사용하기 위한 용도지 내가 뭘 구원을 챙겼다. 이거 하라고 그 믿음을 주신 게 아니에요. 나는 챙겼으니까 나는 헤헤 거린다. 이게 안 돼요. 평생 죽을 때까지 스피커로 사용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의 성실하심은.
(8) 원수 : 시139:20~22, 악은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시1:5)
저주가 임한다 : 시140:10/7:6/79:6/69편
원수가 있는 이유 : 시5:8
그 다음에 8번. 원수. 시139편20~22절. 20절,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여기서 원수는 주님에게만 원수입니다. 나의 원수, 내 돈을 떼어먹은 보이피싱은 원수 아닙니다. 주님에 대해서만 원수.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일단 원수에요. 그리고 자기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헛되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도 주의 원수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에 2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까? 묻지요. 내가 주와 한 패입니다. 나를 치는 것은 화내지 안아도 주를 치는 것은 용납 못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22절,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이 다윗의 이야기가 사실은 안에 다윗 안에 예수님이 먼저 들어있어서 예수님의 원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시편1편5절, 복 있는 사람은 그 대목이지요.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그러므로 악인은 뭘 견디지 못한다?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이게 얼마나 속 시원합니까. 잘됐다. 인간아! 너희들이 뭐 요령부림으로서 교회 안가고 빠진다고? 심판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때 어떻게 한다? 하나님이 만약에 경상도 사람이라면, 학실하게 심판한다. 학실하게! 김영삼 흉내냈는데. 학실하게! 학실하게 심판합니다. 이건. 아주 봐주는 거 없어요. 로마서12장19절에는 심판은 내게 맡겨라. 니가 어줍잖게 심판하지 말고 학실하게! 확실하게 정도 아니고. 학실하게! 심판해 주니까.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견디지 못하니까 지옥이고,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어떤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보람을.
교회 간다고 조롱하고 틱틱거릴 때, 그때는 여러분들이 딴소리하지 마시고요. 그냥 세자만 이야기하세요. 학실히! 그 다음은 입 다무세요. 또 부부싸움 하면 안된다. 학실히! “학실히 뭐?” “학실히 오늘 오뎅국 끓여준다 이 말이야.” 괜히 이호선 교수 찾아다니지 마시고요, 상담가 찾지 마시고, 정신과 의사 찾지 마시고, 학실히! 이것만 알면 돼요.
시편140편10절, 아우, 살다 보면 제일 얄미운 뺀질이들. 그 뺀질이들. 학실히!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그 다음에 무슨 말입니까? 이것도 아까 학실히! 했지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정말 학실하다 정말.
자, 원수가 왜 있는가, 이유는, 시편5편8절,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야~~ 이거 중요한 말이네. 원수가 왜 있느냐 하면요, 하나님의 의는 바로 원수와 동반해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원수를 알아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하나님과 한 패 먹었다. 하나님쪽에 속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를 파악한다는 거예요. 그 잘난체 하는 거 전부다 오만 한 거 하고 다 하나님의 원수지요. “하나님, 저 의롭습니까?” 찾지 말고, “주의 원수가 어디쯤 있습니까?” 찾아라 이 말이에요. “나, 의롭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믿고 의롭다.” 자꾸 지 챙길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자인가를 발견하면 이미 의로운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9) 재물 : 시52:7/인간은 그림자만 남긴다: 시39:6/49:6~8, 16~20/62:10
제물로 인하여 책망하지 않음 : 시50:8/52:7
9번. 재물. 돈 문제 나와요. 시편52편. 하여튼간 시편은 빠짐이 없어요. 구색을 다 갖췄어요. 시52편7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야,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거 아닙니까. 그대로 보지요. 교회는 나가지만, 듬성 나가는 이유가 돈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재물의 풍부함을 기대하는 사람, 의지한다는 말은 의지하고 싶어서 기대하는 사람. 자, 이 재물이 다음 중 몇 번입니까? 1번, 75억, 2번, 202억, 3번, 407억, 4번, 25만달러. 도대체 재물의 든든함이 어디까지입니까? 한도 끝도 없지요. 그래서 우리가 주께서 믿음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재물에 재물을 신으로 섬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시편39편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무엇이다? 그림자다. 인간은 그림자다. 실체는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그냥 니가 있었다는 것. 그림자만 남긴다. 이 말입니다.
시편49편6~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아~ 이거 새겨 들어야 돼요. 형제한테 교회 데려가려고 잘해주면 교회 가겠지. 예수 믿겠지. 다 그런 헛된 짓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 돈 써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내 본인도 주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을 참인데, 내가 그 사람한테 좋은 인상 남긴다고 해서 물론 나쁜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의도적으로 노리고 좋은 인상 남긴다고 복음에 대해서 알고 구원받고 이런 거 없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내가 하나님의 원수고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을 통해서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시편49편16~20절,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이태원이라든지, 청담동이라든지, 전두환 대통령 살았던 그 동네. 그 동네 부자들 많잖아요. 관악산 밑에 보면 대사관들있고 부자들 얼마나 많습니까. 그걸 보면서 만약에 10대나 20대라하면 나도 언젠가는 돈을 벌어서 이 집 사야지. 이런 것. 만약에 50대, 60대 그 부자동네 지나가면 나는 도대체 뭐하고 살았나, 자괴감이 들지요. 담이 높아서 그 안에 잔디밭이 있는지 모르지요. 도대체 잔디밭이 있는지는 <기생충>영화 보고 알았어요. 안에 어떻게 돼있는지 모르지요. 그거 두렵지 말라는 것은 기죽지 말라는 거예요. 그가 죽음에 가져가는 거 없다. 그 부자는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제물에 대해서 시편50편8절, “내가 너의 제물(여기 제물은 재물이 아니에요. 제사하는 제물인데. 그것도 들어있지요. 책망하지 않는다.) 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시편52편7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그러니까 재물을 의지한다는 자체가 악이다, 이 말입니다. 생명이 없다 이 말이에요.
(10) 사람의 구원은 헛됨 : 시60:11/9:20
인간 힘의 헛됨 : 시44:6/118:8~9/146:3~4
인간의 한계 : 시39:4~5/시90:3,5~10/103:15~16
10번,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권력에 관한 문제에요. 하여튼 시편은 빠진 게 없어요. 다 있어요. 시편60편11절,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하나님이여, 직접 도와주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9편20절,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 아까 봤지요. 자기 인생뿐이다. 인간은 홀로됨 뿐이다. 시편44편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재벌들이 이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시편118편8~9절,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권력층에 대해서. 권력층이 내 취직자리를 보장한다든지. 이런 거. 그런 것은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그건 두려움의 일환입니다.
시편39편4~5절, 뺄 게 없어요. 너무나 다 귀하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나의 뭐를 알게 하사? 연약하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사, 나의 인생은 손을 오므리면 없이 되잖아요. 없다는 이야기죠. 우리 인생이 주 앞에 없는 것 같사오니, 오므리니 없어졌잖아요.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실제로는 허사뿐이다. 아까 이야기한 그림자일 뿐이다.
시편90편은 장례식에 보면 이것을 많이 거론할 수도 있어요. 3절에서 10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얼마나 정확합니까.
시편103편15~16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그러니까 장례치르고 난 뒤에 가족들이 나를 알아달라고 하는데, 자식들이 다 바빠요. 자식들이. 장례치르고. 후딱 가고. 돈 계산한다고 바쁘다고 죽은 선조 잊어버립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10분 쉽시다.
안양20260312b시1편5절(학실히+치아라)-이 근호 목사
강의 제목을 첫째 시간에 이미 정해놨습니다. ‘학실히’ 표준말 안 쓰겠습니다. 학실히. 그 다음 페이지 봅시다.
(11) 기름부음을 받은 자 : 시2:2,7/20:6
11번. 기름부음을 받은 자, 시편2편2절, 1절부터 보게 되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라고 되어있지요. 여호와와 그 메시아가 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셨다는 뜻이에요. 정치적으로.
그냥 개인 구원하려고 온 게 아니고, 몰래 내 사람만 건진다, 가 아니라 아주 박살을 내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정치라고 하는 것들, 정치 조직, 정치 체계, 민주주의 사회, 자본주의 모든 것을 아주 박살 나게 만드는 그 요소. 이것은 인간에 없는 것으로 인간의 세운 모든 것을 무너뜨리게 하는 방식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이 기름부었다는 말은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왕으로 오셨다.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은 왕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왕과 왕 사이에 전쟁 싸움을 하는 거예요. 시편2편1절에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드디어 메시아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먼저 미사일 날린다는 공격한다는 뜻이거든요.
2편9절에 보면 내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리며 질그릇같이 부수지요. 부수는 거예요. 그럼 부수면 뭐가 나오느냐, 8절에 나와요. 내 소유가 땅끝까지 이른다. 그 세상 정치 가운데 갇혀있던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12절에 그 아들에게 입맞춤하라,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한다. 어떻게 망합니까? 학실하게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왕으로 오셨다. 우리가 하는 것은 왕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은 우리가 일체 책임질 필요가 없고 왕이 알아서 해줘요.
시편20편6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우시고 기름 받은 자를 기름 부었던 하나님의 손에서 건져낸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미 시편20편6절이 성취가 되어버렸어요.
시편20편6절이 성취가 됐다는 말은 성경 나머지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는 말이에요. 이 본문만 성취된 게 아니고 나머지 모든 것. 원수를 쳐부수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분명히 있다는 것도 같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12) 낮아지신 하나님 : 시113:5~9
자, 오실 때 어떻게 오시는가, 12번, 시편113편5~9절, 가장 신약에 오신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함축적으로 명쾌하게 밝히는 대목이지요.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자, 이것은 예수님께서 낮아지셨지요. 낮아졌다는 말은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낮아졌다는 말은 예수님의 낮아짐에서부터 새로운 낮아짐의 속성, 낮아짐의 성질을 같이 공유하는 새로운 세계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잉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없어요. 이 땅에. 그런 의미에서 잉태치 못한 채로 잉태된 사람이라 보면 돼요. 아기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성도들도 잉태치 못한 자로 잉태된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육은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이것은 예수님의 잉태를 그대로 카피한 거예요. 그대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기름부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거듭 태어난 자들만 주님의 낮아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3) 주님의 붙드심 : 시3:5~6/121:1
포로에서 돌아옴 : 126:4~8/137편
인자하심 : 145:8
안전함 :시131:1~3
13번, 그 다음 이렇게 구원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 성도에게 부탁하는 것이 ‘주님의 붙드심’. 시편3편5~6절, 우리가 붙드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붙들어주시는 거예요.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시편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뭐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
왜 부족함이 없느냐, 내가 달라는 것을 안 주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어요. 내가 달라는 걸 줘버리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욕심은 한정도 없어가지고 줘도 줘도 또 달라고 해요. 줬는데 또 달라고 하고.
그 다음에 시편121편1절, “제가 전에 많이 했던 성경구절인데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찬송가에도 나오지요. 가사가.)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이 말은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 지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요. 우리는 졸아요? 안 졸아요? 졸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지킵니까? 못 지키지요. 우리는 졸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그렇지요. 5절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했는데, 주께서 지키는 게 뭐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것을 주님의 것을 지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주께서 또 붙드시는 사례가 시편126편1~2절, 이 대목은 이스라엘이 참 많이도 노래를 불렀던 대목이에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포로생활 하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애굽은 멋도 모르고 나왔고요, 이제는 약속의 땅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알고 도로 거기서 추방되어서 바벨론에서 노예생활하다가 이제 풀려나와서 다시 돌아오니 그들은 너무 너무 기뻤던 겁니다.
시편137편에 보면, 유명한 보니엠이 부른 팝송 <바벨론 강가에서>이 나오지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조롱하지요. 니 찬송가 해보라고. 우리가 이방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지금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가서 부르련다. 기다림이에요. 포로에서 돌아온 겁니다.
시편145편 8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야~ 이건 완전히 대심방용이다. 정말. 딱이지요. 대심방. 이런 거 가지고 대심방하면 나올 때 봉투 딱 챙깁니다. 이 집안에 입시생있지요, 곧 취업준비하지요. 주께서 도와주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런 거. 여러분이 이런 것에 얼마나 속아넘어갔습니까.
저는 시편131편을 너무 좋아해요. 시편131편1~3절,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을 때 가짜 젖꼭지를 물고 있잖아요. 갓난아이 모자 하나 쓰고. 그걸 여러분 나이 때에 여러분이 그렇게 안겼다고 생각하고 이걸 이모티콘으로 해가지고 상상해 보세요.
주님 품에 큰 어른이 떡하니 응애응애하면서 가짜 젖꼭지 물고 모자 쓰고 편안히 누워보세요. 방금 젖뗀 아이같은 만족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젖뗀 아이같은. 백프로 보장이지요. 100% 보장. 보험회사에서 왔나. 100% 보장하는 겁니다. 당뇨있나 묻지 않고 백프로 보장해 줍니다. 다 계약됩니다. 이런 것처럼.
(14) 표준적 인물의 등장 :시18:25~26/51편
다윗의 맹세 : 132:10~14/시89편
그 다음 14번, 표준적 인물의 등장. 시편18편25~26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이게 뭐냐 하면, 표준적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너, 나 닮았어” 라는 것을 최종 우리 주님께서 우리한테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신의 인자하심과 완전함을 우리 속에다가 집어넣고 그것을 주께서 친히 그걸 찾고 지키시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집어넣은 걸 도로 가져오는 식으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의 표준적 인물은 시편51편 하도 말을 많이 해가지고 시편51편은 제가 지금까지 하면서 이만큼 많이 한 대목이 없지요. 우리가 모친의 죄중에서 태어났다는 것. 절망적이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8절에 주께서 꺽으신 뼈로 인하여, 주께서 손 대신 꺽으신 뼈로 인하여 즐겁긴 누가 즐겁다? 내가 즐거운 거예요.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 다음에 주께서는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주께서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시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걸 안 받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신다. 왜 그러느냐, 그렇게 해서 그 나온 시온 예루살렘 성이 은혜로만 구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혜로만 거기에 활동하기 때문에. 은혜를 가리는 것들은 그 시온성에서 내쫓습니다. 들어갈 수 없어요. 지 잘난체 하는 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표준적 인물중에 다윗이 등장한 거예요. 살인하고 간음하고 이 다윗의 등장은 시편51편을 위한 하나의 구성요건이 되는 겁니다. 시편132편10~14절,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찌라” 다윗의 맹세. 다윗에게 지목해요. 초점이 다윗에게 몰려있습니다. 다윗에게. 그러면 다윗과 오실 예수님과 공유되는 것. 공통점이 있다고 보시면 되지요.
오실 예수님의 요소가 미리 다윗에게 담겨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어떤 공유점이 있는가, 예수님이나 다윗이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완성했지요. 다윗은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레위지파가 유다지파가 아니고 레위지파가 율법대로 제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죄사함이 주어지는 그러한 구조를 유지했던 가운데서 다윗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레위지파에 수장이 제사장이에요. 제사장. 엘리 제사장 중심. 제사장이었던 여기에 사람들은 제사장으로 우리나라가 안정에 보장을 못한다. 우리도 왕을 달라해서 제사장에 흠집을 내듯이 왕 제도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나라를 제대로 세우려면 제사장 제도를 포함하는 인간이 요구하는 왕 말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와야 되겠지요. 왕이.
그래서 제사장직을 더 아울러 더 크게 둘러서 왕직으로 오신 분이 다윗인데, 요 다윗은 창세기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이 나와요. 멜기세덱이 뭐냐 하면, 왕+제사장입니다.
그 전에 왕제사장이 제사장으로 왔다가 제사장의 한계를 느끼고 왕을 추가해서 유다지파로 지파가 바뀌면서 유다지파에서 왕제도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율법으로 제사지내서 하는 것은 이것은 폐기되어야 될 옛 방식이에요. 폐기될 옛 방식을 그대로 완성하신 그 분이 뭐냐, 왕이 되는데 그것을 미리 다윗시대에 미리 보여준 등장인물이 다윗이에요.
장차 멜기세덱으로 오실 예수님이 미리 그 전에 다윗 때는 다윗을 통해서 왕+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되면서 많은 수하에 제사장과 그리고 레위지파, 이 사람들을 통해서 성전 중심에 운영되도록 왕으로서 책임자로서 왕이 되는 겁니다.
왕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왕 오셨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다 이루었다.” 왕은 개인이거든요. 특정 개인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내가 어떤 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오신 분이 다 이루신 분에 대해서 우리가 의존하게 되면 그 왕의 혜택 속에 들어왔다. 이렇게 단정지어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왕이 있다는 말은 내 인생은 그 분의 손에 달렸다. 이걸 단정지어도 좋아요. 학실하게! 단정지어도 좋습니다.
시편89편 보겠습니다. 이 전체가 다윗에게 맹세한 거예요.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이리 되어있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다윗 언약을 이루러 오셨다.
로마서1장에 복음이 뭐냐, 다윗의 맹세를 이루러 온 게 기쁜소식 복음의 내용이다. 그 뒤에 주욱하면서 바로 맹세를 끝까지 합니다. 언약을 이루고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의 행동 이렇게 해서 끝까지 죽 나와요. 어떤 사람은 시편의 핵심은 시편89편으로 잡는 사람도 있어요. 왜냐하면 다윗언약을 확실하게 보여줘요. 다윗언약을.
(15) 메시아의 고난 : 시22:1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시116:11)
성도의 고난(시38:3~4/42:3)
자, 15번, ‘메시아의 고난’ 봅시다. 메시아의 고난. 시편22편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22편은 정말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준다. 도와준다.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정작 구원받은 자의 입에서는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린다. 버린다.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나온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면 구원이 되겠지’라는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안 받아줘요. 바로 내가 나로부터 절단되고 단절되는 그것만이 구원의 절차에 뛰어들어가는 과정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것은 구원의 과정속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내가 버림받아야 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것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게.
그러니까 매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방금 이야기 한 것이 시편116편11절에 나옵니다. 보게 되면 줄 긋고 싶은 구절이 한 두군데 아닙니다. 그 중에서 하나만 그으라 하면 시편116편11절 보고 줄 쫙 쫙 매직으로 투명한 걸로 쫙 긋고 싶어요. 뭐냐,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뭐라고요? 거짓말쟁이다. 아~~, 세상에. 도서관에 수십만의 책이 있지만 이게 정답 아닙니까. 도서관에 수백만의 책이 있어도 이게 정답이에요. 공부해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내가 거짓말쟁이에요. 내가 거짓말쟁이에요. 내가. 이미 주님의 시선이 그거에요. 니는 니 주제파악이나 하세요. 어디 거짓된 게 천국가려고.
시편116편11절과 아까 시편22편1절과 비로소 통하지요. 거짓말쟁이 중에 한 사람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질문을 덜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시편116편11절을 자기 것으로 받아줄 수가 있어요. 내가 거짓말쟁이니까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거예요.
시편38편3~4절,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이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혹시 여러분한테 관절이 안 좋은 사람 있습니까.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고 의자에서만 앉아야 하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감당 안하면 되지. 감당하지 마세요. 감당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죄 안 짓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악마와 결탁된 그 후유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악마와 연결된 것은 악이라 하고, 그 후유증은 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미 악마와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후유증은 계속 우리안에 배설물로 쌓이고 쌓이는 중입니다. 그러니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게 최고지요. 사람이 몸이 아프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가 나타나지 않아요. 성질 나는데 무슨 미소를 띠워. 가증한 거죠. 우리 몸이 주의 말씀을 못 지키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 안에 호르몬 체제가. 그러니까 이제는 어떻게 하느냐, 나는 거짓말쟁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냥 반기시기 바랍니다.
(16) 어리석은 자 :시14:1
다른 예물 드리는 자(16:4)
16번, 어리석은 자. 시편14편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이거 설명이 많이 필요한데요. “하나님이 아니다.” 이게 아니고 “하나님은 잘못됐다.” 이게 아니고 아예 하나님 자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자체가.
이것은 인간이 자기 생각에 아우라를 스스로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기억력 안에는 뭐가 없어요? 하나님이 없으며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이 없는 게 돼요. 신은 없다. 상당히 용감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시편14편2절에서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이 있다 해도 소용없어요. 왜? 자기 위주로 사는데 하나님 있다, 없다, 뭐 그리 지한테 중요한 문제 아니거든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3장에 나옵니다. 로마서3장에 나오면서 사도바울이 내린 결론은 뭐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할 때 이 시편14편을 그대로 당겨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 말씀이 맞다. 거짓말쟁이고 다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시편16편4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이리 되어있어요.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 하는 것은 지금 모든 인간이 다 하고 있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본인이 만들어요.
어제 수요설교에서는 자기 성질을 꾸겨넣어서 신을 만든다, 했지요.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어제 수요일날 에돔하고 이스라엘 여호람, 유다왕 여호사밧이 모압왕 행동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친 이유가 자기의 숨어있는 자기의 성질을 조절이 안되고 나가도 너무 나간 거예요. 누구나 그런 성질 있는데,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데 저거는 막장이라. 다 드러낸 거예요.
“야, 너 너무 심하게 했다.” 심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니하고 나는 니같은 성질인하고 끝까지 싸우면 우리 위신이 깎이겠다.” 해서 “가자. 가자.” 해서 “놀 위인이 아니다.” 그래가지고 전쟁이고 뭐고 싹 빠져 나온 거예요. 그만 둔 거예요. 전쟁놀이 그만 둔 거예요. 승자도 패자도 없이 그만 둔 거예요. 막장이에요. 막장. 김치싸데기 정도가 아닙니다. 막장 드라마에요. 극단적인 심각함이에요. 끝까지 겨우 인간은 자기 극단적인 심각함에 당도하게 되어있고, 거기서 자기 정체가 폭로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AI가 참 잘 소개해 주는데. 악마가 귀를 기울이고 있어요. 악마는 귀를 기울이고 있고, 여기는 인간은 놀래기! 자기의 극단적인 성의 표시! 자기 아들까지 바치는 극단적인 자기 파괴! 이 파괴를 자기 성의로 표시하는 것, 바로 옆에 악마가 있어요. 그래서 마귀는 알아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자기가 속상해서 마귀 쪽으로 오는데 이 선 때문에 넘어오지는 못하고 있어요. “다 내 식대로, 내 성깔대로 내가 심어준 성깔대로 하는구먼.” 그런데 넘어오지는 못하고, 탈출이 불가한 세계를 맞닥뜨릴 때, 인간은 악마가 심어준 악마의 본성이 폭발하게 되어있어요.
싸움도 어느 정도 상식 있어야 싸우지, 지금 이란이 이 작전하고 있잖아요. 이란이 이 작전하고 있다고요. 호르무즈 해협에다가 지뢰를 하면 누구 배가 부서져요? 자기 배가 부서지지만, 그거 묻지도 않아요. 이제는 갈때까지 가는 거죠. 국민이 다 죽든 말든 관계없어요. 완전 돌아버렸어요. 북한의 김정은하고 비슷해요.
(17) 하나님 이름만이 자랑 : 시20:7
자, 17번. 이런 세계, 마귀의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세계에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그걸 온몸으로 느끼시기 바랍니다. 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 다, 좋던데요.” 하면 그건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지요. 아직 성질이 다 안 풀린 것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고, 그건 아주 특이하다. 나한테 왜 그리 잘해주지. 굉장히 상대방에게 고맙게 생각하면 되지. 기어이 또 말씀 전하다가 성질 돋워가지고 악마로 만들지 말고요. 마귀와 싸워야지 인간하고 싸우면 필요 없어요.
시편20편7절,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것은 바로 시편안에 출애굽 당시의 사건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출애굽기15장 홍해바다에서 모든사람들이 그냥 이미 트여진 길을 걸었을 뿐이지 히브리인들이 그들이 자기 칼이나 활을 들고 뒤따라오는 애굽군사와 전쟁한 적이 없어요.
전쟁 뭐 했습니까? 전쟁은 안했는데 애굽군사 그들이 물에 빠졌다. 그러면 이건 백프로 누가 한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의 개입이지요. 그 보이지 않는 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분의 개입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지옥같은 세상이지만, 또 봄이라고 이렇게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한 미소를 또 띠게 하네요. 그 때 폭탄 터져봐야 봄이고 여름이고 다 날아가버리지요.
(18) 말씀 천지 : 시19:1~4/33:6
그 다음에 18번. ‘말씀 천지’ 아까 비슷한 거 하나 나왔는데. 말씀의 성실인데. 여기는 ‘말씀의 천지’. 시편19편1절에서 4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쉽게 말해서 바쁘다 이 말이지요. 누가? 보이지 않는 소리가 바쁘다. 바쁜 그 소리가 그게 세상을 돌아가게 합니다.)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편33편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 말씀으로 다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 현실은 예언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19) 가난 : 시37:14/49:6~8
자, 19번, 가난.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합니까?” 에 대한 질문. 시편37편14절,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다음에 시편49편6절~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준다는 것은 가난한 자가 구원받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악인으로 인하여 가난한 자가 구원받을 기회가 되는 겁니다. 이 가난은 왜 가난하게 되었는가, 가난이고 부자건 간에 구원받는 데는 아무 장애 되는 요소가 안 됩니다. 그러니 자기 가난에 대해서 자기 신세 한탄하고 집구석 망했다고 하나님 원망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것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니까 하나님의 생명 얻는데 영원한 문을 얻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에요.
(20) 찬양 : 시108:2/148:5
성소에서 찬양(시150:1)
그 다음에 20번, 찬양. 찬양은 시편에서 엄청 나오지요. 시편 대부분 앞에 찬양부터 먼저 나와요. 시편108편2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노래가 들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노래가 이미 이 세상에 침투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시편113편1절~3절,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찌로다 해 돋는데서부터 해 지는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이 노래 있지요. 가스펠송. 이건 뭐냐, 찬양이 바로 하늘의 천사 담당이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복음2장에서 목자들이 양 칠 때, 찬양이 어디서 됐습니까? 목자가 한 게 아니에요. 누가했습니까? 하늘에서 나타난 천사가 찬양을 통해서 한 거예요.
천사는 왜 찬양하느냐, 완성된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입만 띠면 다 찬양이 되는 거죠. 그 찬양에 우리가 합류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시편150편1편에 보면, 그 합류하는 장소가 나오지요. 찬양으로 합류하는 장소가 어디에 나오느냐,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래서 다윗은 성가대를 만들었어요. 만들고, 예배할 때 성가대가 필히 행사를 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그걸 본받아서 교회에 루터부터 해서 그전에는 찬양을 따로 했어요. 신부나 수녀들이 했는데 이제는 루터가 종교개혁 해가지고 온 성도가 다 찬양대를 해서 같이 찬양하는 거예요. 요새 큰 교회는 찬양은 단독 찬양은 소프라노 나옵니다. 예종 음대 출신들.
(21) 우상 : 시115:8
21번, 우상. 시편115편4~8절,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걸 의지하는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다 그와 같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취급 안 하겠다. 우상이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상을 섬기고 믿는 자도 나는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22) 죄사함 : 시25:7/32:1~2/51편
짐을 대신 지심(시68:19)
그 다음에 22번, 죄사함. 시편25편7절,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기 재미있는 것은 그냥 죄를 사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뭐를 근거로 죄사함을 하느냐,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약 있는 볼펜은 줄을 그으면 볼펜 약을 통해서 선이 그어지잖아요. 인자하심이 죄 위에 인자하심이 죄사함으로 덮힌다 이 말이지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인자하심으로 죄를 덮어버리면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한 것처럼 그렇게 인자하심으로 대체한다.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해도 되고 인자하심이 나를 덮쳤다. 하는 말도 되고, 이런 뜻입니다.
시편32편 1절에서2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에 뭐가 있다? 복이 있다. 시편1편에 복있는 자는 이렇게 했지요. 복있는 자는 율법 안에 나온다. 그 율법 안에 나오니까 시편32편에 뭡니까. 죄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가 이게 땡잡았다! 이 말이지요. 땡 잡았다!
시편51편에는 마찬가지로 아까 했고, 시편68편19절, 왜 이렇게 죄사함의 근거는 뭐냐, 왜 내가 죄는 다 지었는데 죄는 없어지는가, 근거가 뭐냐, 시편68편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기 때문에 그래요. 학실합니다. 학실해요.
(23) 주의 의 : 시31:1/37:5~6
그 다음에 23번, ‘주의 의’ 시편31편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그 죄사함. 대신 짐을 지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었다.
시편37편5절~6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이걸 당장 받지 마시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안에서 믿는 자안에서 주의 의가 되는 거예요.
(24) 갈급한 심정 : 시42:1
낙망(시42:11)
시험들 뻔(시73:1~5)
그 다음에 24번, 갈급한 심정. 시편42편1절은 정말 교회 한 번 발 걸친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이건 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노천명 시가 생각이 났어요.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얼마나 갈급했으면 모가지를 뺐을까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찾을 수밖에 없지요.
제사해 주지요, 자비 주지요, 의롭다 해주지요, 우리가 주를 도와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지요, 불침번 서듯이 지켜주잖아요. 졸지도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이런 좋은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좋은 하나님이여 하다가 돈 좀 들어왔다 하면 싹 얼굴 색깔 바꿔버리고. 돈 들어오고 하니까 아까 그 이미지처럼 마귀가 “내 성질 효과 있을 건데!” 귀 기울이고 있어요. 판이 얇아요. 바로 뒤에 있어요.
그 다음에 낙망. 시편42편11절, 이것도 참 하도 교인들 가운데 우울증이 많기 때문에 우울증 정신적 치료제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가 만약에 신부라면 삐딱하게 서가지고 처방전 내리는 거예요. 시편42편11절 그거 딱 5번 읽으세요. 다음 사람!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지가 낙망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시편73편1~5절, 아, 이건 또 제가 많이 했던 거예요. 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래도 이 대목은 정말 지키기 힘들어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1절에서 5절까지 그 모습을 얼마나 우리 속에 마귀가 이걸 집어넣어가지고, “되고 싶지? 되고 싶지? 응? 니가 그렇게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니가 교만 안 하면 되잖아.” 거만 안 할 수 있습니까. 이 정도되면. 타인처럼 고난도 없고, 타인처럼 재앙도 없는데 교만이 안 할 수 있어요? 교만이 저절로 올라오지요. 교만이 저희 목걸이고 강포가 저희 옷이다. 남한테 잘난체 하는 거예요.
(25) CCTV : 시94:9
그 다음에 25번, CCTV. CCTV가 성경에 나옵니까? 저는 나온다고 보고 이렇게 CCTV라고 했어요. CCTV 이거 중국방송 아닙니다. 시편94편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이건 감시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건 지켜주신다는 뜻이에요.
(26) 인간의 노동 : 시127:1
끝으로 26번, 인간의 노동. 시편127편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이 대목 볼 때마다 꼭 생각나는 게 부동산 투기 함부로 하면 안된다. 경매 함부로 낙찰 받으면 안 된다. 그런 뜻으로 마구 생각 나지 않습니까. 투자 함부로 하면 안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다 뭡니까? 헛되다. 그럼 헛되니까 취직도 하지 말고 집에서 놀까요? 인간은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니에요. 뭐든지 설쳐야 돼요. 안 설치면 본인이 불안해서 초조해서 못 견뎌요.
그럴 때 뭘 보느냐 3절을 보라는 거예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식이라 하는 것은 주의 기업이고, 모든 게 거저 줬잖아요. 거저. 마찬가지로 재물도 모든 것도 거저주신 것이다.
주께서 거저 주신 것이 있을 때, 5절에 누구를 만나도 원수를 만나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복음은 바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로마서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렇지요.
로마서1장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걸 우리는 자꾸 살면서 자꾸 까먹어요. 이걸. 까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누가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 가지고 정신을 자꾸 딴 데 팔게 해서 타인과의 비교하게 하는 것. 내 소망이 작살났다는 것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자꾸 유도하는 심령으로 우리에게 자꾸 우리 마음에다가 화딱지 나도록 만들어 버려요.
이제 전체 내용을 말씀드리면, 전체 내용을 시편1편에서 다시 한 번 찾아봅시다. 이리 보시고, 여러분이 힘들게 성경을 집중해서 보셨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하지만, 시편1편에서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악인을 부러워하지 마라. 다 껍데기다 말이지요.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학실하게 보내주지요. 죄인이 그 다음에 뭡니까?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그 때가서 “여보~~” <미워도 다시 한번> 마지막 장면나오잖아요. 여보!! 해도 경상도 말로 “치아라! 치아라! 어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어.” 이걸 아까 제목에서 “학실히!” 했지요. 하나 더 추가합시다. “치아라! 치아라! 손 치아라!” 요게 우리들 마음속에 들어있어야 돼요.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 이게 필연적입니다. 주께서 반드시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이 시편 전체에 대해서 시편1편이 대표로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와 고마움 밖에 달리 나올 게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게 세상에 주께서 말씀으로 뿌려놓았고 지금도 부지런히 말씀이 활동하면서 시편1편의 내용대로 착실하게, 현실화 시키는 이 작업을 이제는 온몸으로 감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감사와 고마움이 늘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