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연속성과 단절

아빠와 함께 2025. 11. 21. 18:21

안양20251113a에스더4장16절(연속성과 단절)-이 근호 목사

오늘은 에스더. <에스더와 한국교회>. 122페이지. 거기에 첫째 줄에 에스더는 바사 나라에 잡혀 있는 유대인의 생존과 신앙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의 파견한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활약상을 기록한 책이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 대목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기 백성을 잡혀가게 만드느냐? ‘잡혀 있지 아니하면 구원이라는 것이 안 되는가’ 라는 생각을 해 봐야 돼요. 잡혀 있다하니까 누가 힘이 셉니까? 바사나라가 힘이 세지요. 잡혀 있으니까 누가 약하냐? 유대인들이 약하지요.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들, 언약 백성을 세상 나라보다 더 약하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긴 쪽에 속해서 어떤 성과를 자기 존재 가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인데, 하나님의 구원 문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있어서는 이기는 쪽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약하디 약한 쪽부터 거기에 그들을 두십니다. 약한 쪽에 둘 때 자기를 덮치고 있는 쪽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구원은 되지를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이 못 되지요.

그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언급한 민족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무엇을 알아야 되고 느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구원은 없다.’를 느껴야 됩니다. 구원은 없는 거예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이미 그전에 구원에 대해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에요. “너 구원해 줄게. 구원해 줄게.” 그 소식을 들은 민족이 내린 결론은 뭐냐? 구원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왜? “구원해 줄게.”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데, ‘현실적으로 왜 구원은 없는가?’ 현실적으로 구원이 안 되니깐 구원이 없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 이리 있다면 인간들이 모인 것이 이게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이 감각 하는 거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이 현실, 현실 벽입니다. 현실 벽. 이스라엘은 현실 벽이 없이 하나님하고 상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현실 벽을 뚫고, “내가 너희를 구원해 줄게. 구원해 줄게.”라고 왔는데 이 구원이라는 소식을 듣고 “예, 구원받겠습니다.” 하고 나가는데 턱 하니 어디에 걸립니까? 현실 벽에 딱 걸리는 거예요. 야~~ 현실 벽에 딱 걸리니까 현실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소식은 소리는 들려왔는데 본인이 나서려 하니까 현실 벽에 가로막혀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뭐냐? 구원은 없다. 구원 포기하자. 우리는 구원이 안 돼. 하나님보다 말씀을 구원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보다 뭐가 더 세다? 현실이 더 세다. 이런 것을 혹독하게 그들은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도 구원이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지금 애써 뭐를 부정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속해 있는 이 현실이라는 벽을 아주 무시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꾸 억지로 외면하기 때문에 구원이 있다고 그래서 우기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과 관련해서 제가 생각한 건데, ‘성도가 죄짓는 것이 그렇게 기특해요.’ 주님 보시기에. 너무 기특합니다. 요 죄짓는 것이 뭐냐?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이 돈 버는 거. 돈 버는 거예요. 나이 많은 사람은 이 죄지을 기회도 없다, 했지요. 어제. 돈을 버는 게 돈을 번다는 것 어디서 배웠습니까? 하나님께 배운 거예요?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배운 겁니까?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배웠지요. 그럼 현실이 우리에게 뭘 가르쳐줬습니까? “네가 돈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것을 실감 나게 우리에게 가르쳤잖아요.

그게 무슨 벽? 현실 벽이지요. 그러니 인간이 다급하고 시급한 일이 돈 있어야 산다는 이 너무나 절절하고 분명한 이 사실이 있는데 어디서 딴 생각을 하고 있어요. 구원이 이 벽이 이만큼 공고하고 견고한데 이 현실을 뚫고 누구 만난다? 지금 하나님 만난다. 하나님 만나는 게 급선무가 아니잖아요. 이게 다급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현실에서 살아남는 게 급선무잖아요. 살아남는 게.

어디서 위선적으로 구원을 언급하고 복음을 언급하고 성경을 하나님을 언급합니까? 다 위선에 불과하지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라. 하나님 믿을 때 기쁘던가요? 돈 많이 들어올 때 기쁘던가요? 돈 벌 때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띄웁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능력이 있다니!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이거는 너무나 간단한 거예요. 이거는. 분명히 이거는 수시로 기억해야 돼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게 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게 죄예요. 그러면 안 끊고 싶다 이리 하지요. 안 끊고 싶다. 안 끊고 싶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현실 벽에다가 내가 이 현실 밖에 나가서 내가 천사같이 되면 왜 하나님과의 그 관계를 안 즐기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는데. 지금 무엇이 지금 안에 갇혀 있어요? 지금 현실 안에 갇혀서 지금 하나님 구원, 뜻, 지금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죄를 의도적으로 짓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정황이나 상황. 나의 처지. 처지가 죄짓는 거 외에는 할 일이 없어요. 죄짓는 거 외에는 할 일에 없다고요. 그걸 무시하면 안 되지요. 이 현실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까 문제 던졌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강하게 강하게 승리케 하면 되는데, 왜 그들로 하여금 바사나라가 더 강하게 그 강하게 나라에 사로잡혀 있느냐, 이 말이에요. 잡혀 있는 이유가 뭐냐? 나라가 몽땅 망했어요.

망해서 사로잡혀 있다면 그게 어떻게 그게 구원이냐, 이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구원이냐, 이 말이지요. 죄를 아주 더 지으라고 독촉을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결국 여기서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이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줄게.”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이에요. “나랑 너랑 단절시켜 줄게. 단절시켜 줄게.” 이게 복음입니다. “단절시켜 줄게.”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왜 단절이 되어야 되는가? 우리 자아의식은 단절이 없어요. 자꾸 의식이에요. 의식. 계속 의식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열심히 돈 버는 것에 대해서 기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돈 한 번 벌고 말 거예요? 계속 벌었잖아요. 이거는 단절하면 내가 굶는데. 안 되잖아요. 연속해야 되잖아요. 연속적으로. ‘줄곧 돈 벌어 왔다. 오늘 또 돈 벌러 나간다. 내일 또 나가야지.’ 그게 주님 보시기에 기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단절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성도 자체가 그것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오늘 그 강의의 주제는 끊어짐. 단절이에요. 단절입니다. 사람이 끊어질 때 죽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안 죽으라 하는 이유가 단절되기 싫어서 그래요. 단절되기가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고 뭐 이렇게 죽을 뻔, 아플 뻔, 대장암 뭐 같은데 이렇게 내부 순환에 뭐 수치가 높다. 나이는 60인데 수치는 75이다. 이런 거. 뭔가 위태로움.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못 멈춥니다. 두려워서.

끈끈히 끈끈히 어떻게 하든 죽으면 안 되니까 있는 돈 다 떨어서라도 검진 받아가지고 이어나가야 돼요. 이어나가고자 하는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구원 있다, 하니까 인간들은 이스라엘 오해했어요. 끈끈히 이어가는 그것을 드디어 죽는 순간에 주께서 우리를 계속 내 바톤을 내가 쥐고 있던 바톤을 끈끈히 이어가던 바톤을 주께서 받아서 끈끈히 이어가서 그게 구원되는 줄 알았어요. 인간들이.

처음부터 죄로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라는 사실을 그런 것은 고려 안 해 보고 내가 태어난 거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끊어진 세계에 단절된 세계에 출생했다는 사실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계속 이어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를 단절을 통해서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로 만들겠다 했거든요. 이게 어디서 이야기한 거냐 하면 바로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를 통해서. 그러면 그건 뭐냐 하면은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더 이상 너희들이 이어질 어떤 여력은 절대로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계속 줄기차게 이어나오고 이어나오고 하는 그런 시도는 백날 해 봐야 단절된 것에서 탈피를 하지를 못해요.

힘들게 힘들게 산다. 힘들게 살면 낙이 있다. 아~~니, 그런 경우는 없어요. 현실은. 힘들게 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현실은 지옥 같다. 이게 맞아요. 이게 맞다고요. 딴 생각하면 안 돼요. 무슨 상상이라든지 뭐 기적 같은 거 생각하면 안 됩니다. 힘들게 산 인생은 지옥 같다. 그게 뭐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겁니다.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이방 민족에게 포로 잡히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이방 민족의 특징이 그들은 뭐를 포기했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마음 놓고 자기의 뜻을 펼치는 나라가 이방 민족입니다. “내가 해 왔던 대로 그냥 살게.” 그 주장이에요. 그 주장된 나라에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감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잡는 이방 민족의 성격이나 자기 성격이나 애초부터 처음부터 똑같았다는 거. 똑같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여호와를 이용하려고 했어요. 내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하나님과 주님을 그냥 끌어당겼지요.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단절을 통해서 구원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속에는 애초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을 하면 죄 안 짓고 구원받는 방법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이게 없는 거예요.

현실 자체가 현실에서 태어났고 현실 자체가 우리에게 죄를 요청하고 죄를 요구하는 세계거든요. 그 세계 속에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쉬지도 않고 숨 쉬는 것처럼 쉬지도 않고 죄를 꾸준히 연속으로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지어야 이 세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리 정리하면 제일 쉬워요. “나에게는 구원이 없다.” “하나님에게는 구원이 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돼요. “나에게는 구원이 없고, 하나님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다는 말을 어디서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이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럼 구원이 있다고 왔으면 나에게는 뭘 정리해야 됩니까? 나에게는 구원이 없는 걸로 정리가 돼야 됩니다. 그걸 바로 이방 민족의 포로 잡혀서 그걸 아주 실감해야 돼요. 그게 이제 예레미야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너희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거든 딴생각하지 말고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그냥 거기서 집 짓고 그냥 그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아.” 이걸 부탁했다고요. 이걸 부탁했어요.

여호와 없는, 하나님이 없는 나라 백성과 네가 본질상 똑같으니까 그들 사는 식으로 그냥 살아. 이걸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당부를 했다고요. 괜히 약속이 땅에 들어오려고 그거 애쓰지 말고 지 주제 파악도 안 되는 걸 뭐 그리 애쓰느냐.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가 ‘아, 나한테는 구원이 없구나. 그냥 세상 사람하고 다를 바가 없구나.’ 그런데 말입니다. 구원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 구원이 갑자기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한테는 없는데 하나님한테 있는 구원은 뭐냐? 이사야 65장 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한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한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에서 내가 여기 있노라. 여기 있다.”이 이사야 65장 이게 되려면 친히 누가 방문해야 돼요? 구원이 아예 없는 이 세상에 누가 와야 됩니까? 구원 자체가 이 땅을 방문하는 그 모습이 이사야 65장 1절입니다. “내가 왔잖아. 내가. 구원 자체가 왔잖아. 너는 구원이 없어.” “구원해 주세요.” 아, 구원 안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땅에 와서 구원을 해 주시는 거예요.

그 구원 업무 작업은 누구 전공입니까? 하나님 전공이지요. 누구 전공? 인간 전공이 아니에요. 찾지도 않은 자에게 내가 찾아냄이 된다는 거. 찾아서 찾으면 찾아냄이 아 그건 찾아냄이 아니잖아요. 찾지도 않는 자에게 찾아냄이 되려면 “나 여기 있지!”라고 누가 이야기해야 돼요?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면, 끝! 끝나는 겁니다. 통보를 해 주면.
인간은 갈 수 없는데 주께서는 이 현실 속에 들어왔다. 그럼 주께서 현실 속에 들어올 때에 뭐를 끌고 들어오겠습니까? 하나님이 현실 속에 구원이 단절된 상태에서 구원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려면 뒤에 경과, 절차가 뒤에 따라오겠지요.

<헨젤과 그레텔> 그 동화에 보면 분명히 그 계모가 와서 애 둘이 전처 아들 둘을 쫓아냈는데 “우리끼리 삽시다.” 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안방에 애 둘이 들어왔어요. 애 둘이 들어올 때 그냥 들어온 게 아니고 그들이 찾아올 수 있는 길을 그들이 품고 온 거죠.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하게 되면 온다. 그 방법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방법이. 주님께서 올 때 그냥 온 게 아니고 찾아냄을 당한 자가 진짜 단절됨을 이어져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 되려면 예수님이 가지고 왔던 그 절차를 그대로 따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따라가면 되겠지요. 따라가면.

그 따라가는 방법은 인간의 일체 행함은 필요 없습니다. 죄짓는 행함 이거, 돈 버는 행함 이거 어디에 쓸데 있다고 아무데도 쓸 데 없어요. 그럼 뭐냐?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에요. 뭘 믿음? 자기를 자기 믿음은 이거는 사기고요. 예수님이 끌고 온 방법에 대한 인정, 수긍, 동의, 수용, 수용이 좋다. 수용하는 겁니다. 나는 안 되는데 주께서 가져온 방식에 대해서 수용하는 거예요. 수용하게 되면 남는 것은 뭐냐? 싱글벙글. 싱글벙글 쇼! 하는 거 있잖아요. 라디오에서 낮에. 싱글벙글. 싱글벙글한 거죠.

무엇 때문에 싱글벙글입니까? 인간은 현실 벽이 두꺼워서 빠져나가지 못하지요. 자기 사는 게 급한데 언제 하나님 찾을 수가 있어요. 벽이 두꺼워서 빠져나갈 생각도 없고 빠져나갈 마음도 없고 빠져나가도 소용없고요. 그게 연속성이지요.

이 연속성을 이 단절된 것을 주님은 단절을 뚫고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단절을 뚫고 주님의 연속성을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은 누구한테 있어요? 예수님에게만 있지요. 그 방식을 수용하면 된다, 이 말이에요.

이제 여러분, 바사나라에 에스더, 모르드개, 유대인이 갇혀 있는 이유를 알겠지요. 인간의 생존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함부로 노력해서 벗어날 수 있는 그게 아닙니다. 그게 생존이 만만치 않아요. 나는 모든 것을 무소유해도 나는 뭐 굶어 죽겠다. 이 굶으라 할 때는 대장내시경 할 때나 그렇고. 그 빈말을 거짓말을 왜 자꾸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없고 주께서 이제 오시는 겁니다.

자, 오실 때, 예수님께서 그 에스더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고 뭐 이랬습니까? 에스더에 메시아가 나와요? 안 나오지요. 메시아는 마지막 때에 와요. 마지막 때 신약에서 오기 때문에 메시아 안 나오는데 메시아가 안 나오는데 뚫고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그들이 에스더 그 시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느냐,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신기한 걸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메시아도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이 구원이 되는가?

그전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원을 뭐라고 규정을 했냐 하면요. 하나님도 했고 이스라엘 백성도 동의한 게 구원은 만남의 장소에서 만나는 것, 이게 구원이었어요. 만남의 장소. 보통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만남의 장소 있지요. 만남의 장소가 뭐냐 하면 성전이었습니다.

왜 성전이 만남의 장소냐? 이게 먼저 주님의 이름이 거기에 상주해 계시기 때문에. 상주라 하는 것은 연속이지요. 연속. 연속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8장 35~37절에 보면 성전의 주님의 이름은 연속적이에요. 연속적인데 그 성전 바깥에서 일상 유대인들이 생활하는 데서는 이게 뭐냐 하면 그들은 의식으로서는 연속적인데 주님 보시기는 뭐냐 하면 연속, 연속, 연속적으로 돼 있다고 그 유대 이스라엘은 일상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연속을 주장하지만,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의식의 연속성 때문에. 어제 나와 오늘 나가 동일하다. 이게 연속적었어요. 그런데 이게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중간에 뭐가 끼어드냐 하면 죄가 끼어드니까 이게 하나님 보시기는 단절이 되는 겁니다.

그 열왕기상 8장 35절 36절에 보면,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죄라는 것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게 죄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은 관심사가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에 대해서 도통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 또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신명기 8장 19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8장 19절을 보게 되면, “네가 만일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쫓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며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멸망이니까 단절되잖아요.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킨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에 청종치 아니함이었다.” 청종을 해야 하도록 청종의 연속성을 유지했는데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만약에 하나님께 연속적으로 언약이라는 말씀의 율법에서 관심이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돼요? 연속이 아니고 그냥 단절시킨다. 이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이 신명기 말씀을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 관심을 두면 되잖아.” 이리 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부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네가 속해 있는 이 현실 자체가 하나님께 관계가 끊어진 세계 속에서 네가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하고 싶어도 이 인간의 그 본 자체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까지 마음이 거기다가 마음을 하나님께 관심을 돌릴 수가 돌릴 여력이 없어요. 처음에 뭐 조용할 때 하나님 섬기다가 나중에 뭐 돈벌이 나가면 그거 다 없어져요.

그런데 오늘 열왕기상 아까 봤던 거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정을 하죠. 인정을 하고 뭐라고 합니까? 성전을 준비해가지고 네가 세상에 나와서 죄를 짓거든 네가 단절돼 있거든 연속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상주하니까 연속성이 성전에 있잖아요. 이 성전에서 빌게 되면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심을 둔다는 조건하에 연속성이 구원이 유지가 된다, 이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에스더 시대에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성전 어디 있지요? 불타고 없는 거예요. 누가 불 질렀습니까? 바벨론이 불 질렀거든요. 바벨론은 이방 나라죠.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통해서 자기가 계시는 성전을 치워 버렸어요. 불태워버렸어요. 그걸 방화지요. 방화. 일종에 방화. 자기가 거하는 집을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치워 버렸어요. 치워 버렸다. 이 말이에요.

치워 버리고 바벨론 제국이 끝나고 난 뒤에 그다음 제국이 뭐냐? 바사나라에요. 바사나라가 바로 이제 올 에스더가 살던 그 시대의 나라가 바사나라입니다. 뭐 이집트까지 정복했으니까 바벨론보다 더 큰 나라였어요. 엄청난 큰 나라를 통해서 그들은 보호를 받게 되어있어요. 바벨론도 마찬가지고 바사나라도 마찬가지고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보호를 해 준 겁니다.

그 유대인을 보호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보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이 어느 나라 이방 나라라는 조건을 통해서 언약을 새롭게 보호하는 그러한 체제로 하나님이 돌입했다. 돌입했다는 거예요. 자,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어서 이제 성전이 불 탔습니다. 이 이스라엘을 누가 보호하느냐? 이방 민족이 보호해요. 보호 기간은. 보호 기간은 어디까지냐? 바사나라가 멸망되기 전까지만 보호해요.

그다음에 헬라 나오잖아요. 그 남아 있던 유대인들도 작살납니다. 그들도 더 이상 견디다 못해 가지고 전 세계로 다 퍼집니다. 바벨론부터 퍼졌지만.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아주 씨를 말리는 작업이 헬라 더 나아가서 로마까지 유대인들을 씨를 말려 버립니다. 보호하는 것도 바사나라까지 보호해요. 바사나라까지 보호해요. 이스라엘을 보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께서 계속 유대인을 통해서 유지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유대인들을 어느 나라에 있든지 보호함으로서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너희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는 점을 너희들은 비록 이방 나라에 포로 잡혀 있지만 내가 늘 너희에게 너를 구원한다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는 계속 연속되도록 하나님께서 에스더 시대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에스더라는 사건이 일어난 그 취지를 여러분들이 이제 아시겠지요. 어쨌든 간에 이 성전이 있으면 되는데 성전이 이제 불타 버렸다 이 말이죠. 성전이 불타버렸어요. 성전이 없어요. 그러면 성전이 없으면 성전형 성전과 비 성전형 성전 둘로 이제 나누어지는 겁니다.

솔로몬 성전처럼 생긴 성전은 이제는 없어요. 바벨론 이후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만남의 장소는 있어요. 이게 건물 형태는 아니지만 이 성전이 있는 겁니다. 성전이 있어요. 그러면 성전은 성전형 성전을 계속 그걸 만약에 기대하고 고대한다면 이거는 파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성전형 성전을 없앴다는 그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그 교회에 대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 마태복음 16장 18절 그리고 마태복음 16장 23절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뭐냐하면 “베드로야! 너를 이제 시몬이라 아니하고 이름을 베드로라 할게. 너 위에 교회를 짓는다.” 베드로 위에 뭘 짓습니까? 교회 짓는다. 그러면 이게 왜 충격적이냐, 마태복음 23장에 베드로가 뭐냐하면 “사탄아!”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에요.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 자다.” 이리 하였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 반석됨으로서 주님께서 누굴 유인하느냐 하면 악마로 하여금 베드로마저 지배하도록 유인책을 책을 쓴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는 교회는 두 가지 있지요. 성전형 교회와 비성전형 교회가 생기겠지요. 이 성전형 교회가 오늘날 교회라는 거예요. 이제 기독교에서의 이 교회 천주교에서의 교회라는 게 이겁니다. 이들은 자체에 대해서 연속성을 이끌기 위해서 뭘 하느냐, 교회 역사라는 것을 쥐고 있습니다.

이 교회 역사가 말씀보다 더 우세하다고 하는 단체가 천주교입니다. 성경이 있기 전에 교회가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천주교에요. 역사가 성경보다도 우선된다. 그게 아니다. 말씀이 교회보다 먼저다. 라고 등장했던 것이 바로 개신교였습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개신교가 비성전형 교회가 아니고 도로 어디 왔습니까? 성전형 교회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천주교가 틀렸다, 라고 주장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성전형 우리는 괜찮은 교회가 된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 교회를 무슨 교회라고 하느냐 하면, 어제 수요일도 했지만, 이걸 교회를 개혁 교회라 해요. 개혁교회. 개혁주의 교회라 하는 거예요. 총신, 합신, 장신 전부 다 개혁주의. 개혁주의 교회에요.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이 신학의 뿌리는 루터와 칼빈이에요.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받아야 돼서 루터 칼빈 신학 하면 그것도 화내요. 그럼 우리는 어거스틴부터 한다. 주로 어거스틴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화내요. 우리는 사도 바울부터 한다. 또 이래. 그렇게 주장하는데 어쨌든 간에 이 성전형 교회는 뭐냐 하면 마귀의 토지 위에 서 있는 거예요. 그 마귀가 딴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귀가 뒤집어 씌우도록 주께서 유도하신 겁니다.

왜? 하도 인간은 자기의 잘남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케이. 그렇다면 내 너희들 소원대로 연속적인 거 해 줄게. 해 줄게. 해놓고 그걸 마귀한테 그걸 허락을 해 버리면, 다른 말로 하면, 이방 나라한테 허락을 해 버리면 그들은 이방 나라한테 사로잡혀 가면서 무엇을 그리워하겠습니까? 옛날 솔로몬 때 좋았는데, 다윗 때 좋았는데, 빨리 우리가 정신 차려서 바르게 살아서 옛날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그러한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 성전 있는 것이 있으면 참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요.

이렇게 자꾸 자기의 그 이방 민족 안에 압제당하면서 그러한 꿈과 희망을 거기에다가 힘을 쏟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마귀가 세운 교회입니다. 하겠지요. 교회. 그러면 비성전형 교회는 어디 있습니까? 마귀가 세운 교회 바로 뒤쪽에 있어요. 같이 붙어 있는 거예요.

성전형 교회를 부정하지 않으면 그 뒤에 있는 비성전 교회가 안 나와요. 그런데 성전 교회는 마귀가 세운 교회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받은 우리끼리 세우자. 그게 또 그 마귀 교회예요. 성령 받은 우리끼리 같이 우리끼리 하는 거 없어요. 전부 다 성전형 교회예요. 돈벌이 하는 재미에 빠졌는데 무슨 교회입니까? 그걸 가지고 어떻게 교회라 할 수 있습니까? 마귀한테 지배를 당한다는 것을 그걸 섭섭하게 여기면 안 돼요. 주님의 구원의 방식이 그 절차에 그게 포함이 돼 있다고요.

아까 이야기 한번 다시 해 볼까요? 현실 벽은 우리가 통과를 못 해요. 현실 벽을 통과해서 하나님 못 만납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현실을 뚫는 것은 우리 쪽이 아니고, 우리 외부에서 주님이 우리를 뚫고 들어왔다, 이 말이에요.

주님께서 뚫고 찾지도 않은 자에게 찾아냄을 당한 자를 만나기 위해서 뚫고 들어왔잖아요. 뚫고 들어왔으면 그 주님의 방식이 있다 했잖아요. 제가. 기억하십니까? 주님이 이걸 뚫을 때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방식 있잖아요. 그 방식이 뭐냐? 이 세상에서 희생물이 되는 거. 이 권세에 이 세상에서 저주받고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예수님 죽일 때 주모자들 누구였습니까? 이방 민족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죽으라고 기를 쓰고 죽으라고 했던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아닙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냥 서버에요. 메인은 뭐냐 하면은 바로 마귀의 자식 다른 말로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들이 메인이고 본디오는 그냥 서버에요. 보조에요. 보조라고요.

이 세상에서 마귀가 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 그 최종성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에요. 최종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자기가 하나님으로 자처해요. 하나님으로. 그래서 이 하나님을 인간들이 추종하도록 그렇게 유도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을 하느냐? 인간의 정신적으로요. 돈이나 물질보다 정신적으로 인간은 신을 찾는 인간이에요. 존재보다 인간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방법을 누가 먼저 접수했어요? 악마가 먼저 접수를 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방 민족이 잘 보여 주지요. 하나님(하나님=힘)은 뭐가 되냐? 힘. 권세. 권세가 힘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은 뭐냐하면 법률이 나오지요. 법률이 나오고. 하나님 힘, 권세, 법률이 나오는데 이 법률을 제정하는 신을 대리하는 일이 뭐냐 하면, 아하수에로왕. 왕이라는 왕의 위치. 하나님을 대리해서 법 제정자가 되는 법 제정자. 이게 바로 이방나라고 마귀가 이 세상을 통치하는 형식입니다.

여기에서 에스더 모르드개는 무슨 수로 이걸 뚫고 지나갈 수 있습니까? 못 뚫어요.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둘 다 짜고 뭐를 집중하느냐 하면 오직 뭡니까? 생존에 집중하자! 생존에 집중하자는 거예요. 생존은 사는 거잖아요. 그냥 살자. 그냥 살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간에 이런 것은 에스더랑 모르드개로서는 이거는 아예 생각이 없어요. 그냥 살만큼 살아야 되는 거예요.

자기 사촌 여동생을 그 현재 자리가 비어 있지요. 한 자리 비어 있지요. 왕비 자리가 비어 있잖아요. 미스 바사대회에 출전시킨 이유는 그건 누구를 모방한 거예요? 이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바사나라가 이 권세 힘에 의해서 생존이 가능한 그런 나라라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한 겁니다. 힘없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에스더 끝까지 이야기가 뭐냐 하면, 힘없으면 죽는다. 힘없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 왕에게서 나오지요. 왕에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걸 알아야 돼요. 처음에 왕비가 누구였습니까? 처음 왕비가 와스디였어요. 와스디. 처음에 와스디였죠. 와스디는 그 자리가 왕한테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자리가 법 아래에 있는 자리로 쫓겨난 거예요. 법 아래.

왕비가 왕에게 와스디가 쫓겨나도 아하수에로왕에 권력구조에 빵꾸가 구멍이 났어요? 안 났어요? 안 났어요. 멀쩡해요. 왜냐? “왕비는 너는 내 법에 의해서 너는 내 자리에서 추방해. 저거 왕비 쫓아내!” 이래도 그 법률 체계는 어떻게 돼요? 멀쩡하고 너끈해요.

그런데 에스더와 와스디의 차이점은 에스더가 왕비가 됨으로써 완벽해 보이던 절대적으로 보이던 그 법률 그 권세의 체제가 법입니다. 그 법에 구멍이 나 버린 거예요. 구멍이 난 거예요. 왕이 절대적이고 완결적인 왕이 왕의 권력에 빈터가 생긴 거예요. 뭐 때문에 생겼습니까? 에스더의 미모 때문에 발생했죠. 에스더의 미모 때문에.

에스더의 인물은 맨 똑같은 인물이에요. 그러나 그날 밤에 어떤 밤인지는 모르지만, 그날 밤은 유난히도 에스더는 별처럼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운 미모 앞에 왕이 갖고 있는 모든 권력은 이거는 쓰레기 같은 권력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요. 순위를 제2순위로 돌려놨다 했지요. 왕이 에스더가 권좌에 앉고 그 남편 되는 왕은 뒷전으로 밀려난 겁니다. 이걸 하만이 눈치를 챈 거예요. 지금 왕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왕은 안 건드렸는데 왕비 건드리다가는 사단 난다는 것을 하만이 감을 잡아요. 이 세상에 권력보다 더 센 권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느낀 겁니다.

평소에 뭐 늘 이쁘면 만나보면 될 텐데, 왜 갑자기 그날 밤에 왕은 왜 갑자기 자기 아내의 에스더의 미모가 그렇게 아름다웠을까요? 그거는 왕이 갖고있는 권력보다 더 센 그 왕의 권력, 지가 믿는 하나님보다 더 센 분이 더 센 분과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만나고 있다는 거예요. 뭔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래요.

성전 없는 비성전인 형식인데 주께서는 자기가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서는 만났어요. 그 만나니까 그것은 단절이에요? 연속이에요? 연속적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더 모르드개는 기존의 현실 벽을 통과할 수 있어요? 없어요? 통과 못 합니다. 지가 무슨 수로 데모해서 구데타 일으켜서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못하는데 못하는 것을 누가 해요? 그 연속 끊어진 연속성을 누가 끊어진 단절을 누가 연속합니까? “나는 구원이다.” 해서 구원의 하나님이 그 바사나라 시대에 개입을 해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이 끊어진 게 아니고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에스더 모르드개에게 연결을 취해 버립니다.

연결을 취해 버리니깐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사로잡히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어가는지를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구원은 없어요. 구원은 없는데 구원이 없기 때문에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것. 구원이 있으면 구원이 안 이루어져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이 없어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생존에 집중하는 겁니다. 생존에 집중해요. 이거 벽을 이 현실 벽을 뚫어낼 수가 없어요. 믿음으로 무슨 뭘 해도 못 뚫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뚫도록 내버려 주지 않아요. 절대로 우리는 차단되게 막히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방법이 없게 해요. 교회라는 형식 세운다고 그걸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 구원된다는 그건 마귀 교회예요. 마귀가 그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권세에 딱 들어붙어서 권세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이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주께서 찾아와서 바로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주님께서 해내 버립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 산다는 것은 그렇게 힘든 게 아니에요. 그냥 하시는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살아나는 대로 사시면 돼요. 유난 떨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은 버리기로 작정 되어있어요. 언약에 의하면 버리기로 작정 되어있습니다. 버리기로 작정 된 이방나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의 약속이 성취되는 겁니다. 교회가 망함으로서 비로소 그때 교회가 등장하지요. 교회가 망함으로서.

교회라는 특정 것을 통해서 주께서 만난다는 이 인식. 그 인식이 잘못된 거예요. 주께서 교회를 통해서 만나는 게 아니고, 이미 만나고 있었어요. 우리를. 만나고 있으면서 우리의 형편에 대해서 우리가 인정하도록 하는 겁니다. 내 힘으로 현실에 벽, 생존의 이 요건은 우리가 뚫어낼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에스더는 여기서 에스더는 뭐냐? 에스더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희생물이지요. 여기서 그 유대 그 에스더 시대의 세상이라는 세상은 유대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에스더의 금식을 유도하기 전에 모든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금식을 해야 돼요. 그 사촌 오빠가 이야기하죠. 다 금식하고 있다. 그 마지막 금식은 이제 너다. 금식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했어요. 유대인과 똑같아요. 이방인과 똑같은데 모르드개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것이 특별히 미움을 받는 계기가 발생 되었어요. 에스더에서. 그렇게 해서 그 미움받는 그 리스트에 네가 왕비라는 이유 때문에 거기 누락 될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애굽에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으로 했잖아요. 그 어린 양이 어떻게 됩니까? 만남의 장소에서 성전이 있는 자체가 맨 제사가 반복되니까. 그것이 성전이 없는 성전 형태가 없던 만남의 장소라도 그 희생 제물은 어떻게 됩니까? 여전히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반복되는 요소로서 개입되어 있습니다. 계속 반복돼요.

금식은 뭐냐? 금식은, “현재 내가 밥 먹고 사는데 여기에 여력이 없고, 지금 다른데 지금 신경을 써야 돼.” 이게 금식이에요. “밥 먹고 사는 것은 이거는 평소에 하는 거고, 이제는 그게 아니고 지금이 비상시국이다. 내가 지금 엉뚱한 데 신경 썼구나. 하나님의 구원에 신경 써야 되는데, 지금 내 생존에 신경 썼구나!”를 환경을 변화할 때, 밥 먹을 맛조차도 없지요. 이게 금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금식이 에스더가 에스더에서 집중하고 에스더가 금식한 유대인의 대표자 어린 양의 희생물로서 드디어 아하수에로 왕을 만나게 됩니다. 그거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51113b에스더4장16절(연속성과 단절)-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질문 하나 하지요. 무교회주의가 성전형 교회입니까? 비성전형 교회입니까? 무교회주의가. 무교회주의가 당연히 성전형 교회지요. 왜? 교회라는 건 주께서 찾아와야 되는데 주께서 찾아왔다고 여기던 사람의 집단 그게 바로 마귀가 세운 교회입니다. 자꾸 어떤 연속성, 교회라는 이름의 연속성을 따로 내세우려고 하면 안 돼요.

이제 금식이란 무엇인가? 금식의 특징은 금식은 나에게 구멍 내는 거예요. 나의 존재의 구멍을 내 버리니까 자기의 연속성이 어떻게 돼요? 자기가 단절이 되지요. 자기의 연속성을 여기서 중단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구멍 낼 때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대인들이 여기에 전부다 참여했지요. 에스더의 구멍을 참여했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과 결혼했어요? 안했어요? 혼인 했지요. 결혼했잖아요.

그런데 이 결혼은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다룰 때는 악마의 목구멍 속에 들어가서 악마의 구멍을 내는 거예요. 그 혼인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에스더에게 혼인 자체가. 와스디한테는 혼인이 의미가 있지만. 에스더는 금식이라는, 와스디는 자기에게 빵구가 안 났지만, 에스더 자체가 자기가 껍질이 되고 자기 안에 내용은 없어요. 왜? 금식했기 때문에. 그게 뭐냐? 죽으면 죽으리라.

죽음이라는 내용을 껍질은 뭐냐 하면 그냥 이거는 에스더예요. 에스더. 에스더라고요. 자기가 쉽게 해서, “나는 이쁘다. 나는 이쁘다. 왕, 너는 나에게 반했나?” 이거는 에스더에게 성립 안 됩니다. 금식할 때 이런 거 성립 안 돼요. 미모로 한번 승부를 걸어 봐? 미모 같은 소리. 그런 건 소용없어요. 만약에 에스더가 만약에 왕하고 좋은 관계 되어버리면 에스더는 악마의 왕국에 구멍을 못 냅니다. 그냥 어떻게 되느냐? 그냥 왕에게 사랑받는 왕비가 될 뿐이에요.

여러분들 그 저 출애굽을 할 때 애굽 나라에서 히브리인들이 탈출할 때 모세와 아론을 보냈잖아요. 모세와 아론을 보낼 때에 처음에는 모세는 오해해 가지고 뭐 혁명 일으켜서 구출해 볼까 하다가 그게 실패를 끝나고 이제 자기가 목자로 살다가 다시 이제 재투입하는 거예요.

재투입할 때에 그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을 반겼습니까? 안 반겼습니까? 안 반겼지요. 이미 그들은 기존의 현실이라는 힘의 체제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어요. 다만 완화되기를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돌봐사 이렇게 보호해 주사 좀 이렇게 살만큼 살도록 압제를 완화시킬 정도만 해도 충분히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동의하고 믿을 의사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히브리인들의 보편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구원이 없지요. 자기의 생존의 안위와 삶의 보장 그 벽을 히브리인들이 뚫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뚫어요. 그저 행복이에요. 편안한 생활, 여생 그것뿐이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구원이라는 것은 그냥 행복하다 그것뿐이지 진짜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우리를 행복해 하는 조건 자체를 철폐해 버리고 그걸 뚫고 생각지도 예상치도 못한 다른 세계의 이전. 이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을뿐더러 있어도 무서워요. 두렵습니다. “하나님 저 좀 가만히 놔두면 안 돼요. 좀 가만 놔두세요. 그냥 살도록.”

마태복음에 이제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 마태복음 24장 38절 39절에 있어요. 거기 보면 사람들이 마지막 때가 되어도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사고 팔고, 장가가고, 난리도 아니지요. 인자의 날을 모르고 그냥 그 틀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 틀 안에서. 그 틀 안에서 익히고 배우고 습득하고 관행이고 습관화되고 자기가 아는 자기가 살리게 하는 모든 정보는 거기서 얻은 거예요. 그 정보에 의해서 그 어제 수요 같으면 그 힘의 권세에 맛들어가지고 거기서 그냥 조용하게 살고 편하게 사는 거 그게 인간이 신과 하나님께 이용하는 그 심보잖아요. 바람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하냐? 그걸 구원이라고 해요. 구원.

부산 강의에서 약간의 이러한 취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소속이 다르면 개념도 달라져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것은 죽으면 안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틀린 거 알고 제가 질문하잖아요. 그런데 답변 못하는 것은 왜 틀렸습니까? 물을까 봐 답변 못하는 거죠.

아까 이야기했지만, 천국 있고 지옥이 있고 죽으면 안다. 는 것은 여기서 연속성이 계속 깔려 있어요. 연속성. 이거는 가짜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자만이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걸 비로소 알지요. 자기의 죽음을 거기에다가 집어넣어야죠. 산채로 죽어서 그다음에 살다가 죽고 난 뒤에 그때 눈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아! 있네. 천국있네. 아! 지옥도 있네.” 이런 것은 이건 가짜입니다. 그 가짜 체험을 임사 체험이라 합니다.

기도 가운데 은혜받아 죽고 난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고 특히 그런 소리 하면 좀 또 유튜브 잘 안 보니까 누구누구는 지옥가 있고 누구는 천국가 있다. 이걸 해줘야 이게 점궤가 나오니까 이게 상당히 이게 용하다 해가지고 또 이제 쭉 이제 찾아올 거 아니겠습니까? 조회수 많아질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현재 죽음을 인정할 때, 그때 천국과 지옥은 나랑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 상관없이 이미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금식이에요. 금식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살까가 아니라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모르드개는 어떤 상황이 와도 자기가 이 권력을 뚫어 낼 수 없다는 걸 상황을 인정을 하고, 이 상황을 유대인들은 이미 날짜가 정해졌어요. 그 등록 유대인이 등록하게 하고 그 등록리스트 되는 자는 12월 13일과 14일 날 일괄 죽이기로 이미 하만에 의해서 그 권력 그 지도층에 의해서 이미 확립된 사실이에요.

처음에 그 모르드개가 에스더한테 미스 바사나라 갈 때 출신 성분을 알리라고 했습니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발설하지 말라고 했어요.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지금 자기 여동생을 거기에다가 참가시켰다는 자체가 권세에 붙는 게 자기의 생존하는데 유리하다는 그 생각이기 때문에 그래요. 괜히 유대인 해가지고 말씀의 소지의 거리를 만들 이유는 없다, 이 말이지요. 뽑는 조건이 이쁘면 되잖아요. 그 이쁜 것에 자신이 있으니까 참가해서 결국 당첨되어서 왕하고 혼인했습니다.

왕하고 혼인해 봤자 그거는 생존 차원이지 제국 전체에 구멍을 뚫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 말이지요. 빌어 먹으면서 더 여유있게 살 수 있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 믿는 유일한 살 수 있는 어떤 조건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뿐이지 제국 자체를 엎어뜨리고 자빠뜨리고 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걸 왜 모르드개가 신경을 쓰고 에스더가 왜 그걸 신경 씁니까? 자기 혼자 밥 먹고 살면 되지. 그게 우리의 한계예요. 우리의 한계.

주님이 왔다 가던 어떻게 가던 그건 주된 관심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주관심은 뭐냐하면 이 세상에서 여유롭게 사는 거예요. 편안하게 사는 거. 아까 이야기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거 그게 우리 인생의 현실을 인생 무대 세트장의 합판이 마주치는 그 자리 아닙니까? 그 무대에 합판 무대에 둘러 쌓여 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비성전형 성전에서 뭘 하냐? 만남의 장소를 만들려고 해요. 만남의 장소를. 어느 쪽에서? 하나님쪽에서. 만남의 장소를 뭐라 했습니까? 구원이라 했죠. 만남의 장소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간이고 시간입니다. 공간과 시간으로 해서 만남의 장소를 합니다.

공간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르드개, 하만, 그 중간에 에스더가 들어옵니다. 에스더가. 에스더가 구멍을 내버려요. 모르드개는 취직을 했어요. 왕실인데 저 하급 공무원으로 취직이 돼 있습니다. 취직이 돼 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아하수에로왕을 모회하기 위해서 시위를 할 때, 신고를 해 가지고 그 왕의 목숨을 잃지 않도록 차단했습니다. 차단을 했어요.

그게 왕실 일기장에는 있지만, 일지에는 일지만, 사람들은 잊혀지지요. 장소가 왕실입니다. 왕실 자리에서 일어난 뭐가 일어났어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러면 이 공간이 뭘 만나는가? 시간을 만난다. 시간을 만난다. 공간과 시간이 만나게 되면 시간은 뭐냐하면 사건에 의해서 접합도 되고 끊어지기도 하고 이 접합이 돼요. 사건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그 공간 왕실이 있었던 사건. 사건이 그다음에 시간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이 왕이 위험할 때 “누가 도와줬지?” 가 뒤늦게 어떤 뒤늦게 일어나지요. 타이밍이 아주 절묘합니다.

그 타이밍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공간은 이거는 단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을 통해서 이렇게 만났잖아요. 그런데 기존에 이 세상 권력은 법적으로 연결 연속을 유지합니다. 법적 연속. 이게 뭐냐? 권력의 연속성이지요. 권력의 연속성.

어제 그 수요일 날에 꿈 이야기. 당회장이 앉아야 될 쇼파 의자에 지가 원로 목사가 떡하니 앉아 있어요. 그 수렴청정하겠다는 뜻이지요. 반짝반짝 빛나는 뭐 준비 다 했어. 놀 준비 다 해서 앉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꿈일 때는 꿈이라는 생각을 못 해요. 그게 현실 전부입니다. 생생한 현실감 전부예요. 꿈일 거야. 그런 거 없어요. 그냥 현실이에요. 그 현실에서는 나의 행위와 처신에 대해서 요청받지요. 아이~ 꿈이 얼마나 충격적인지요. 뭐 계획 의지 필요 없어요.

권력 앞에 소용 없어요. 그 권력 누가 갖고 있느냐? 하만이 갖고 있어요. 하만이. 하만이 바보 같은 아하수에로에게 아부를 하니까 하만에게 아하수에로 왕은 넓은 공간을 통치를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충실한 나에게 그렇게 충성하니까 충성 하나를 믿고 내 권력을 네가 해라. 권력을 이양을 해 버렸어요. 그 반지를 해 줘가지고 하만에게 이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이거 왕은 이제 들러리고. 지가 실권자가 되고 말은 거예요. 실권자가 되니까 이거는 왕실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왕실이 자기는 이제 권력의 연속성을 위해서 왕실에 있는 이 권력이 내가 실제로 실권자라는 것을 바깥에 나가서 떠들 광고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돌아다니면서.

그래서 사람들은 왕, 임금님에서 뭐로 관심을 돌리는가? 권력이 임금님 권력에서 연속적으로 하만이라는 나한테 이 국무 총리한테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면 백성들은 어디를 쳐다보게 돼 있습니까? 하만 자기를 쳐다보게 돼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사실은 왕한테는 감추겠죠. 왕한테는 감추고 왕에게 온갖 뇌물을 다받쳐요. 왕은 가만있어도 하만이 챙기는 뇌물 받고 있으니까 왕도 좋고 하만도 좋고, 하만은 뇌물 주고 그 모든 바친 뇌물을 어디서 뽑아내고? 지 권력으로 착취하면 되니까. 일종에 왕의 매니저에요. 요새 매니저가 문제에요.

결국 다른 사람은 다 고개 들고 ‘예, 예, 이제 권력이 이제 이양됐구나!’ 하고 있는데 딱 바로 딱 뜨고 모르드개는 절을 안 하는 거예요. 모르드개가 왕실에 근무하다 보니까 이 부당한 권력의 구조의 허술함을 알지요. 알면서 모르드개는 뭐를 믿느냐 하면 왕에 대해서 이게 아에수에로왕이 이방 왕이지만 그런 거 이방 믿느냐, 하나님 믿느냐, 지금 모델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생존의 권력에 빌어 묵어야 자기가 살 수 있고 그게 유대인이 안 죽는 거예요. 이게 나약한 모습이라 하지 말고 가장 자기다운 인간의 본원적인 모습을 그들은 피력한 겁니다. 그 현장이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사는게 중요하지 뭐 여호와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아요. 실제로 우리 몸은 그걸 우리가 이 세상에 얼마나 단절된 것을 몸은 기억하잖아요.

그래서 똑바로 서서 안 쳐다본 이유가 이게 구조가 이러한 권력 구조가 이게 부당하다고 느낀 겁니다. 모르드개가. 저렇게 될 인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노출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걸 인하여 노출되지 말아야 될 게 노출되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쟤 누구야? 출신 어디야?” “포로 잡힌 유대인입니다.” “그래, 유대인 다 죽여라.” 이리 된 겁니다.

이게 모르드개가 의도 했는지 아닌지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왜냐? 모르드개는 믿는 구석이 있잖아요. 왜냐? 전에 왕이 죽었을 때 자기가 살렸잖아요. 나도 백이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런데 설마 그 백까지 해 가지고 그렇게 곧게 선 건 아니고 다시 말해서 모르드게는 왕이 지나가는데 절을 했다? 안 했다? 왕이 지나가는데 절을 했지요. 왕이 지나가니까 절을 하는데, 하만이 지나가는데 고기를 안 숙인 거라 이 말이지요. 하나님 앞에 절을 안 한다, 그런 종교적 차원 아니라 말이지요.

이게 어디서 엉뚱한 게 권력행세 하는가, 부당한 권력이다. 부당한 권력. 나는 니가 권세자라고 너 혼자 주장하지. 나는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겠다. 대장동 재판 남아 있는 한 나는 당신을 대통령 인정 못한다. 똑같은 겁니다.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 모르드개 개인의 결의 아닙니까? 결심이거든요. 너한테 절 안 한다. 그런데 이게 여기 불이 짚었죠. 하만이 유대인을 뭐로 하면 희생 제물로 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권력에 굴종하지 않은 자는 내가 얼마나 권력이 있다는 것, 힘이 있다는 것은 처벌로 통해서 밝혀집니다. 처벌이 없으면 법은 법도 아니에요. 처벌함으로써 그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어요. ‘아, 처벌한 자가 권력이 집중되어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옛날에 그 가정에서는 그 자식들이 부모 말에 대해서 순종했어요. 물론 자기에게 필요한 용돈 같은 것도 다 주지만 어떤 의식에서 연속성을 이루냐 하면 아버지가 안정되어야 우리 집안이 안정된다는 것을 그들은 안 가르쳐도 알았어요. 그렇게 해서 가정이 지탱이 돼요. 가정이.

못난 아버지라도 가정 지탱이 못난 아버지보다 우선되는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소속이 흔들리면 누가 흔들려요? 내 존재의 기초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완벽하다, 훌륭하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기를 살려 줘야 그 소속이 안정되고 소속이 안정되면 나도 내 심적으로 내 자아성도 내 정체성도 안정 돼 있다, 이리 봤어요. 이걸 가장의 권위라 해요. 권위. 권위라 하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권세지요. 권세. 가장의 권세가 이게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이유는 엄마가 따박따박 아빠한테 대들었거든요. 자식 없을 때 대든게 아니고 자식이 있는 데서 대들었어요. 벌써 그때부터 자식들은 내 소속의 안정성의 권력의 추가 어디로 넘어갔는가를 감 잡게 돼요. 내가 누구 편에서야 내가 용돈 많이 따내고 내가 생활하는데 내 자유의 영역이 확보되는가 해 봤어요. 해보니 아빠에서 엄마로 바뀝니다.

그런데 엄마가 나에 대한 태도는 뭐냐? 엄마가 나한테 순종해요. 고분고분해요. 이거 사달라 하면 다 사주고 저거 사달라 하면 다 사주고. 별로 뭐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만 해도 뭐 너 맛있는 거 뭐 해 줄까? 치킨 사 줄까? 이리 되니까. 이제는 가장은 누구 소속이 누구냐 하면 가장은 자식들이 가장의 권위로 추가 넘어갔어요.

이제는 추가 이미 구데타에서 계엄에 성공했잖아요. 계엄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집에 눈치는 볼 식구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제는 바깥에서 지가 놀고 싶은 친구하고 놀면서 바깥에 눈치가 집에 눈치보다 더 중요해요. 밤 10시되면 오너라. 안 들어와요. 밤12시 넘어서 와요. 친구가 나하고 놀자해서 들어왔다는 거예요. 부모로서는 어떻게 됩니까? 개판이지요. 그 자식 보기에는 드디어 자아를 찾았다. 이러고 있다, 말이지요. 자아를 찾은 거예요.

하만의 잘못은 이거예요. 하만의 잘못은 영속성 또는 연속성 이걸 쥐고 있었던 겁니다. 연속성은 뭐가 없다, 했어요? 이게 구멍이 없지요. 구멍 난 게 없지요. 단절되지 않았죠. 단절되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왜?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는 단절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인간 세계는 힘만 있으면 자기의 권력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허용이 되고 용납되고 그걸 오히려 부러워하는 세상이 이 세상이에요.

그 세상에 누가 잡혀 있습니까? 현재 유대인들이 잡혀 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연속적인 만남을 하고 싶어도 권력의 벽이 너무 두꺼워서 세서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어요. 그냥 세상 사는 것과 더불어서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모르드개였고 사촌 누이 동생을 미스 콘테스트에 참여시킨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하만이 드디어 자기 권력의 연속성을 위해서 유대인들을 다 색출해서 색출 등록을 숫자로 등록해서 유대인의 숫자뿐만 아니고 재산 가옥 이런 것까지 다 조사해서 12월 13일나 14일 이틀 동안에 모조리 다 척결하도록 확정하고 그걸 누구한테 제가 받았는가, 왕한테 이미 제가는 이미 받았어요. 왜? 반지가 있으니까. 자기 이름으로 그냥 자기 이름이지만 왕 이름이지만 자기 이름 내 가지고 전국에다가 전부 다 그 시행 날짜에 맞춰서 다 죽여 버리라고 결정을 한 겁니다.

그러면 이 유대인은 유대인 이름 자체로 12월 13일 14일 안 돼도 이미 어떤 목숨이에요? 죽은 목숨이에요. 그게 유대인의 뭐가 됐어요? 뭐가 왔어요? 유대인의 연속성은 끝났고, 유대인은 이제 이스라엘은 단절된 겁니다. 단절이 되는 그 순간 그 타이밍에 하나님께서 만나 주는 거예요. 구원의 하나님이 구원이 실세하는 공간과 시간은 그 단절의 순간이에요. 이것을 신약에 봐도 이게 나와 있어요.

요한계시록 12장에 한번 봅시다. 12장 14절. 자,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그 여자가 큰 독수리에 날개를 받아 광야 저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대를 양육 받으매” 감사합니다. 야~ 어려운 이야기지요.

제가 다시 읽어 보면, 그 여자가 큰 독수리 날개를 받아 독수리는 언제 등장하느냐, 출애굽기 19장에 등장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독수리의 날개로 실어서 이동시켰다. 자기 백성을 보호해서 이동시켰다. 독수리 날개는 땅을 기는 게 아니죠. 독수리는 어디 갑니까? 하늘이죠. 하늘나라 항공모함. 항공모함 거기에 자기 백성들 실어서 날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들은 뭡니까? 피터팬처럼 날아다닌 게 아니고 하루하루 힘든 행군길을 갔지요.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그런데 독수리의 날개로 옮겼다는 거예요. 그 인식의 차이. 소속이 다르면 개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독수리 날개로 옮겼다는 말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불평을 했습니까?

그 불평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의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거예요. 연속성. 그런데 실제로는 인간들은 매일같이 원망이기 때문에 뭡니까? 단절이죠. 단절을 통해서 연속성을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돈 벌다가 맨날 돈 벌 때 언제 뭐 하나님 생각하고 예수님 생각 십자가 생각 안 하잖아요. 이건 뭐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단절이에요. 단절이지만 그 사건 타이밍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시간 공간을 통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이 모습에 우리가 한계를 느끼게 만들어요. 내가 돈 벌고 밥 먹고 사는데 이게 분명히 이게 다가 아닌데..., 이게 다가 아닌데..., 그런 뜻 느끼죠.

자, 여기 인간이 내가 있다고 합시다. 뒤에 빨간 걸로 한번 볼게요. 이 빨간 걸로 합시다. 뒤에 숨어 있어요. 앞에 있는 것은 나의 구원,

나의 연속성이 있어요. 연속성. 지금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 연속돼 있죠. 그런데 이게 한계가 있어가지고 이게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 이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지적해요. 너는 맨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하고 아 결혼했다고 그거 좋다고 하고 뭐 딴 생각하지도 않고 이것밖에 생각 안 하죠. 그러나 이것이 지워졌을 때 이것이 느낄 때 내가 이게 성도가 아닌데. 라고 있을 때 여기 누가 나타납니까?

사건을 통해서. “내가 있잖아.” 너는 단절되어 있지만, 누구는 연속되어 있어요? “주님의 구원의 의지는 한결 같잖아.” 라고 이게 그때 느껴지는 거예요. 우리가 한계를 느낄 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물어봅시다. 중요할 때 물어봐요. 그러면 내가 이 빨간 하나님의 연속성 이걸 내 모습에 주께서 주신 내 이 구원받은 내 모습을 붙들면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있다? 없다? 없어요. 사건이 일어나야 되지 우연적인 사건이 발생 되는 것이지 내가 사건을 유발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기존 교회는 성전형 교회라서 우리는 그런 교회 하지 말고 우리는 택한 백성 거듭난 사람만 모이자. 이거는 누가 그렇게 시도하는 거예요? 무교회주의자가 그렇게 시도하잖아요. 무교회주의자. 그렇게 시도한다는 자체가 이미 그 마귀 교회다, 이 말입니다. 그거는. 그걸 왜 시도해요? 주께서 그럼 할 줄 몰라서 안 합니까? 주께서 아이디어만 주고 실행은 우리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구원받는 겁니까? 믿음 더하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아니지요.

여기 껍데기에 있는 이 껍질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껍질을 이용해서 주께서 만남의 장소를 우리를 만들었다는 거. 이걸 가지고 고린도전서 3장과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이걸 가지고 뭐냐하면 성전이다. 너희는 내가 거하는 뭐다? 너희는 내가 거하는 성령이 임하는 성전이다. 이거는 주님의 일방적인 생각이에요.

성전 되기 위해서 뭘 하자 하는 게 이게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성전해서 만남의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주의 일방적인 자기 결심입니다. 이 결심을 우리는 살다 보니까 수시로 이게 자꾸 잊어버리고 놓치는 거예요. 그때마다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다시 한번 우리의 연속성은 여기 껍데기에 있는 게 아니고 나이 몇 살 되고 78세 되고 이게 아니라,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이미 우리를 택했다는 이 사실에 있다니까요. 이 사실에.

이게 바로 이렇게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활동하느냐를 보여주셔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지금까지 우리를 지금 살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존재가 필요한 거예요.

계속 에스더이야기를 계속 해보겠는데 이제 어려운 이야기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독수리의 날개로 해서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누가 나와요? 뱀이 나오지요.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 두 때 반때잖아요. 한 때 두 때 반때 특징이 뭐냐? 시간이 쪼가리 난 거예요. 단절 끊어져 있는 겁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거기에 반해서 세상 시간은 이 세상 시간은 끊어짐이 없어요. 내 잠잔다고 시간이 시계도 같이 잠자고 그럽니까? 자고 일어나면 벌써 6시네. 이러잖아요.

나는 자도 시계는 안 주무시고 졸지도 안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위에서 나를 지켜보는 자가 시계다 이 말이지요. 시간은 끊어짐이 없다는 것이 이 인간 세계에서의 상식이고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간은 끊어집니다. 끊어져요. 그 끊어짐의 반복, 되풀이. 연속 되어있는 세상 시간을 사건을 통해서 끊어내면서 거기서 구원이 양성되고 생성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때. 잠깐 설명이 더 필요하겠지요?

하만, 현실. 현실의 연속성. 현실은 복음이 뭐든 십자가 뭐든 예수님 뭐든 마지막에 징벌이 하늘에 불이 오든 간에 모든 인간들은 느낌상 그 본능상 현실은 계속 쭉 간다. 쭉 간다. 현실이 계속 쭉 가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자본주의는 세상이 끝이 있으면 자본주의가 성립이 안 돼요. 계속 세상은 계속 있기 때문에 신용 가지고 계속 돈을 빌리면 그 돈 가지고 돌려막기 하면 또 돈 빌리고 또 돌려막기 하면 된다는 거예요.

왜? 세상은 계속 가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국가의 부채가 350경이거든요. 제일 부채가 많은 데가 미국이 5억경, 중국이 3억경 우리나라도 막 7천 얼마 조에 부채를 갖고 있어요. 이 부채가 이리 많으냐, 이거는 국채입니다. 국가가 진 채무예요. 그 국채를 왜 하느냐? 은행한테 빌리죠. 은행은 나라에 돈 빌려줘가지고 은행 지 먹게 살고, 나라는 어려우면 또 국채 발행하고 그렇게 해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기를 못 맞추면 베네주엘라처럼 망하고. 진바부에라는 나라에는 계란이 하나 얼마냐, 달걀 하나가 600억이에요. 교사 월급이 20조입니다. 진짜 계란이 웃지요? 이거 웃기지도 않아. 백인 국가 철폐하고 흑인 국가 되어 이 난리 났어요. 3%의 백인의 농장이 90%의 그 나라의 농업 생산을 다 차지합니다. 그것을 이제 백인이 팔고 흑인이 담당하니까 농사 지을 때 그냥 짓습니까. 기술의 연속성이 없어요. 다 망해 버렸어요. 지가 할 것 같으면 지가 다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농업경영도 기술이 필요한데 지가 하니까 다 말아먹었어요.

그러니깐 뭐니 해도 권력은 권력의 맛은 독재에 있어요. 중구난방 싸워봐야 소용없어요. 야당이랑 싸워봐야 소용없어요. 독재가 있어요. 그러니까 조선사람은 패야 맛있다 하는. 패야 말 듣는다. 여자하고 조선사람은 북어로 패야 한다는.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권세는 한 곳에 모여야 나라 꼴이 되는 거예요. 이게 권세의 속성입니다.

여기에 감히 누가 대들었습니까? 모르드개가 대들었지요. 그럼 어떻게 돼요? 모르드개가 나중에 대통령 왕 입후보 후보감입니까? 아니잖아요. 왜 대들어요? 권세는 하나가 돼야 나라가 되고 나라가 돼야 살기가 좋아요. 왜? 권력이 하나의 중심으로 돌아가니까요. 이걸 전제 군주라 해요. 전제군주 통치거든요. 하나의 왕이 있어야 돼요. 왕. 왕이 있어야 된다고요. 입헌군주국처럼. 의회가 있더라도 왕은 하나예요. 태국이나 영국처럼.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왕이 있는 거예요.

모르드개가 왜 끼어들었어요? 왜 끼어드느냐? 모르드개는 이미 뭡니까? 이미 구멍이 나버렸어요. 날 죽여라. 나는 이미 내 속에는 내가 없어. 그게 금식 아닙니까. 내 속에 내가 없어요. 그냥. 그냥 사건이에요. 하나님의 사건은 단절시키는 사건은 뭐냐면 내 속에서 나의 것이 있으나 마나 이거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사건. 그 사건이 성령의 사건 아닙니까?

밥 먹고 사는 죄인 주제에 뭘 내세울 자기 의가 있어요? 없어요. 그냥. 없다고요. 지가 뭐 착하고 훌륭해서 뭐 기억한다고 너나 기억도 못 하면서 뭐 남을 가르쳐서 뭐 바른 교회 하겠다고. 지도 같은 한 통속인데. 권력을 교체하려는 것도 그것도 하만이에요. 권력에 구멍이 나야 되지. 내가 이 권력 쥐면 나는 잘하겠다. 하는 말은 그건 잘못된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개뿔도 없으면서 권력 쥐고 있는 걸 가지고 이걸 어려운 말인데 이걸 상징적 존재라고 합니다. 상징적 존재. 왕.

왕은 뭐냐 옛날 우리 가부장 세대 누구냐, 아버지예요. 아버지는 뭐 돈도 안 벌고 이제 별 할 것도 없어. 그냥 아버지가 있어야 엄마가 자식들에게 교육이 돼요. 지금 아버지 화내신다. 실제로는 본인이 화내면서. 아버지 화내신다. 아버지가 든든히 있을 때 가정 꼴이 된다는 거예요. 가정 꼴이. 그걸 상징적 존재라 합니다. 상징적 존재. 아무것도 없어도 있음 그 자체로서의 권력을 잡아 주는 거. 어떻게 잡아 준다?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이 되죠.

그런데 연속성은 뭐가 됩니까? 이게 마귀의 일이 되죠. 단절은 누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죠. 연속성에 길들어진 인간들이 자진해서 내가 이 세상에 나그네처럼 고아처럼 과부처럼 아무 중심도 없이 그렇게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로 만든 겁니다. 어떤 상징성 때문에 그렇습니까? 시편 2편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강의 이해 잘 안 되면요. 다시 올려 놓으니까 다시 보시면 됩니다. 2장 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에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의 권력은 연속성으로 권력과 권력의 투쟁이 이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그 권력 자체에 구멍을 뚫는 일을 하거든요.

한 쭉 시간이 끊어져 있는 게 아니고 한 때 두 때 반때로 끊어지는데 한 때 두 때 반 때 끊어질 때마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 개입되니까 이게 시간이 끊어져 버린 거예요. 시간이 반 때가 된다는 그게 말이 돼요? 한 때면 한 때지 반때가 무슨 반 때에요? 반때가 어떻게 성립됩니까? 반때가 된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권력은 하나의 동질의 권력으로 모아지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권세를 가지고 이제 권세를 가지고 그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고자 하도다. 그때 4절에 보세요. 하늘에 계신 자가 뭐 한다 했습니까? 피식 집어넣겠죠. 피식 웃으시며 그다음에 그들을 코웃음 치시면서 비웃으시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주님께서 비웃었다 했지요. 그러면 권세도 아무 권세도 없어요. 하나님은 권세가 없어요. 이 땅에. 예수님 무슨 권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의 권세지 이 땅의 권세가 없어요. 본디 빌라도가 예수님께 협상을 제시할 때 협상을 거부했잖아요. 이 더러운 세상 권세하고 내 뜻하고 관계없다고요. 예수님이 그랬지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전략이에요. 그들로 하여금 권세의 한계를 드러내요. 한계를. 우리 아까 그 빨간 파란 거 우리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이게 이 한계를 드러낼 때는 말씀으로 지적을 해야 되는데 지적하는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네게 그거 없어도 너는 이미 구원받았잖아. 왜 그래? 내가 너 한테 비웃어 줘.” 이리 되죠.

누가복음 6장 25절,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웃는 자여 애통하며 운다는 말이 있어요. 웃는 자여. 어느 자리에서? 연속적인 시간에서 웃는 자여. 단절된 시간에서 사건에서 너는 애통할 것이다.

주님께서 그냥 여호와가 그냥 상징물로 생각했는데 그거 비웃음을 유발하게 하고요. 비웃음을 유발토록 하시고 전략이니까. 그다음에 비웃음에 대해서 뭐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진노가 임해요. 이게 바로 시편 2편에서 예언되었거든요. 시편 2편을 그대로 몸에다가 짊어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냐 바로 희생물이에요. 단절케 하기 위해서. 내 인생에 단절시키고 세상 권세에 단절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시편 2편에 여러분 제가 이야기 안 해도 되겠지요. 철장으로 저를 깨뜨리는데 누가 철장을 깨뜨리냐? 그 아들이 와서 철장으로 모든 것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시편 2편 12절에 보면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한다. 길에서 망한다.

하만이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하만은 그걸 몰랐어요. 왜? 자기의 권력 연속 때문에 권력에 편입시키려고 애를 썼지. 편입시키는 방법은 그를 자기 가진 권력으로 완전히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무것도 아닌 모르드개 그 유대 민족 그거는 비웃음의 대상이에요. 비웃음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그 설정을 비웃음을 당할만해서 비웃어 넣고 거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왕비 에스더를 통해서 하만의 집안을 아주 작살을 내버렸습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던 그 장대에 하만 집안 열 아들이 다 달려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면 아하수에로왕은 뭐냐? 그건 뭐 허수아비냐? 이미 허수아비지요. 왜? 자기의 권력까지 자발적으로 갖다 바칠 생각을 했으니까. “나라의 반이라도 드리겠나이다. 이 미모의 여신이여.” 뭐 이러고 있다, 이 말이지요.

이제는 남편 아내 관계 아니에요. 혼인 관계 아닙니다. 자기의 상관이 되고 말았어요. 에스더가. 그러면 사람들이 에스더가 그렇게 이쁘냐? 에스더는 이쁜 게 아니고 자기의 구멍이 났지요. 나는 왕비로서 연속 돼야 돼. 왕비의 연속 자체를 포기했다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왕비 만들고 아름답게 만들었지만, 그 원래 것은 주께서 단절된 자, 단절된 자로 충분히 주께서 스스로 활용 자기의 미모를 활용한 거예요. 이뻐서 이쁘다해도 이쁜 거 봐도 아주 자꾸 보면 또 식상해서 안 이뻐요. 그게 이쁘다 하는 것은 이쁘게 보이는 것도 한 사건이에요.

남편이 어느 날 “야~~ 너 오늘 따라 굉장히 날씬하고 이쁘다.” 이거는 하나의 사건으로 여겨야 되지 내가 뭐 설화수를 발랐나? 화장품을 바꿨더니만. 그런 식으로 자기의 연속성을 취하지 마세요. 두 번 다시 그런 사건 안 일어날 거예요. 두 번 다시.

시간의 단절은 공간에서 만남에 비성전형 성전이 생기는 사건이 됩니다. 그걸 뭘 표현하냐? 부림절. 만남의 공간이 인물이 되면서 그 인물이 외치는 찬송에 의해서 부림절이라는 게 부림절이라는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만남의 자리가 된 겁니다. 그다음부터 부림절 지킨다고 또 만나는 건 아니에요.

이 구약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어떻게 아무 권력도 없는데 아무 권력도 없이 스스로 설 수도 없는 미약한 권력자가 어떻게 임금까지 감화 감동해서 그 실제적인 권력자 하만까지 완전히 나락에 빠지게 하시는가? 그게 바로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만남의 장소가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요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지옥 갈 자를 지옥으로 보내는 작업 중에 하나입니다.

자, 요한계시록 누가 크게 한번 읽어 보세요. 요한계시록 9장 1절입니다. 크게 한번 읽어 보세요.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아멘. 감사합니다. 떨어지는 거. 무저갱. 떨어짐. 우리나라 말로 하면 나락. 또는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추락.

떨어지는 방향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거침없이 떨어져요. 어디까지? 무저갱. 무저갱은 바닥이 없어요. 바닥이 없어요. 이 무저갱의 이 바닥에 가는 것을 이 바닥을 옆에서 중간에 차고 떨어지는 추락하는 도중에 차고 들어오는 게 이게 만남의 장소, 이게 성전입니다.

이 성전 바닥에는 뭐냐? 이미 떨어질만큼 충분히 떨어진 저주받을만큼 충분히 저주받으신 십자가 사건이라는 게 그물이 되어서 자기 백성을 떨어진 방향도 모르고 떨어지는 가운데서 받아내어서 만남의 장소를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온전한 이스라엘을 구현해 내십니다.

그러니까 이건 이스라엘의 성전에 생겼다는 말은 다른 이렇게 건짐을 받아내지 못하고 제외된 모든 사람은 지금 어디로 지금 질주하고 있습니까? 지옥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부라보! 치얼스! 이렇게 하면서 드디어 핵잠수함 만든다고 좋다고 관세 조정 잘됐다고 좋다 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어요?

그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에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멈출 수 없는 권세 하고 싶은데 이거 참는다. 멈출 수 없는 연속성을 지닌 권세에 밀려서 지옥이 밑바닥에 있는데 이렇게 수직으로 바닥에 있다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은 어디를 보느냐 하면, 수평으로 봐요. 내가 태어났다. 어느 학교 출신이다. 결혼 언제 했다. 아파트 샀다 팔았다 팔다가 망해가지고 다시 또 빌라 갔다. 이렇게 하다가 죽으면 천국 가야지.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이것을 고추 세우세요. 다시 세워 버리면 그것 자체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자체가 지옥 가는 뜻이에요. 중간에 뭔가 받아주면서 내가 지옥 가는 것을 주께 십자가의 희생물로 내가 받았다는 이 고백이 바로 이미 이스라엘 천국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내 소속에 속해서 모든 게 잘못된 개념으로 체제 잡고 있고, 구조 만들고, 세상을 해석해 왔습니다. 성경도 그런 식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텅텅 비어 있는 구멍 난 희생물로서 주께서 하신 구원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어디로 추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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