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무능성 유지

아빠와 함께 2025. 12. 21. 19:46

안양20251211a욥38장25절(무능성 유지)-이 근호 목사

125페이지. 오늘은 <욥기와 한국교회>입니다. 욥기를 먼저 전체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여러분, 어릴 때 다 일기 써 봤지요. 어릴 때 학교에서 강조로 일기 쓰게 하잖아요. 그림일기든지 일기를 써 봤으면 써봤다는 것을 전제하에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나의 일기장이 보편적 의미를 지니는가요?” “나의 일기장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지요. 너무나 사적이고 너무나 개인주의잖아요. 욥기가 뭐냐 하면 욥은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보편적 계시로 하나님께서는 만드셔요. 하나의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긴 것은 욥의 친구들이었습니다.

“니는 니 사정 있고 나는 내 사정 있는 거야. 그러니까 각자 자기 사정대로 그냥 살면 그만이야.”라는 것이 욥의 친구의 입장이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너는 이런 게 욥 네가 문제다.” 이렇게 돼 있는데 욥은 친구들이 생각했던 욥 본인이 알고 있어요.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친구 보기에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 버리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인간이 인간에서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그 범주를 넘어서 버린 거예요.

넘어서 버리게 되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네가 하는 말, 내가 하는 말이 보편성 의미 또는 보편성 가치 또는 보편성의 하나의 계시 차원에서 이것이 갈라집니다. 둘로 이렇게 나누어져요. “네가 하는 말은 평소에 네가 인간들 속에서 같이 주고받고 했던 말, 남한테 먹혀 들어가는 말, 남들이 고개 끄덕이면서 납득 되는 그 의미에서 구성되어 있는 말을 현재 내가 그들을 대신해서 내가 대표해서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다.”

그런데 욥 같은 경우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한 것은 내가 평소에 말했던 말과 달라요. 이게. 이게 다르다고요.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욥기에 나와요. “니가 하는 말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니가 하는 말 말고,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는 나도 나한테 생소하다.”는 거예요. 생소하다.

이상하게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 돼요. 컨트롤이. “친구들아! 네가 나를 평가하는 건 좋은데, 지금 나는 그 평가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러면 친구들이 화를 안 낼 수가 없어요. “네가 뭐 통뼈냐? 네가 뭐 최고냐?” 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 차이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욥기를 포괄적으로 제가 설명해 드리기 때문에. 보편적 의미, 보편적 계시, 또는 보편적 가치 이거는 나의 일기장은 이건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에요. 나한테 적용되지만 너 나 할 것에 모두 다 적용되는 그 일기장은 나의 일기장이 아니에요. 그런데 욥의 일기장은 그게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욥이 써 내려가는 일기장. 이 욥기 보세요. 두껍잖아요. 욥의 일기장이에요. 욥의 일기장은 이거는 인간치고 누구든지 다 적용되는 보편적인 계시로서 하나님께서 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욥이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본인이 원한 건 아니에요. 본인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마귀와의 어떤 이야기하다 보니까 매개 거리로 자기가 거기에 말려 들어간 거고 동원된 거지. 본인이 “나의 말은 진리가 되어 지게 하옵소서.” 이런 것은 욥에게는 주제 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차이가 뭐냐? 자, 욥의 친구 욥기를 분석하고 욥기를 해석하고 욥기를 주석하고 욥기를 설명한 모든 사람들이 제일 큰 난제에 부딪혀요. 넘어설 수 없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욥의 친구의 주장과 욥의 주장과 차이점이 없다는 거예요. 요 점이에요.

욥이 이야기한 것을 욥의 친구가 앞서 막 이야기해 버려요. 그러면서도 최종적인 하나님은 욥의 친구는 틀렸고 욥은 맞다고 하니까 그 욥의 친구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욥의 친구를 조사해 보니까 욥이 하는 이야기와 욥의 친구 이야기가 다른 점이 없어요.

심지어 엘리후 같은 경우에는 엘리후가 마지막 네 번째, 4번 타자거든요. 네 번째 나오는 친구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그 전에 욥이 친구들하고 이야기할 때 나왔던 이야기예요.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인간은 죄만 나온다는 이야기를 욥의 친구도 이야기했고, 욥도 이야기했고, 욥의 마지막 친구, 욥이 아무 소리 못 했던 마지막 친구 엘리후도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면 그 세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발견되지 않아요. 그러니 욥을 건드리고 욥에게 뭐 진리를 찾겠다고 덤벼든 모든 사람들은 이 딜레마에 빠져 버렸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 욥 봤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간 저와 여러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이거 모를 거 같으면 욥기 그냥 넘어가야 돼요. 할 필요도 없어요. 그것도 모르는데 뭐 때문에 봐요. 알아야 돼요. 어떤 차이가 나느냐.

네가 하는 말, 내가 하는 말이 제3자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똑같은데 욥은 화내면서 이야기합니다. “네 말한 거 내 다 알고 있는데 너희들은 내 하는 말에 대해서 화내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이 화낼 만한 이유가 나한테도 내게 일어난 일이 생소하기 때문에, 낯설기 때문에.” 이 말은 “친구들아! 이것은 내가 너희들이 경험한 것처럼 내가 경험해서 나온 게 말이 아니야. 아니라고. 그게 아니야.”

그렇게 친구들 처음에 설득하려 하니까 친구들 하는 말이 자존심 있어 가지고 “뭐 네가 훌륭한 건 내가 인정하는데, 나는 모르고 니만 아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용납이 안 된다. 그냥 우리 말 들어. 니가 모르는 죄가 있을 거야. 그 죄 때문에 고난 받는다. 이렇게 우리 정리하고 그냥 넘어가자.”

욥은 “아니야. 그게 잘못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그거 아니라니까.” 친구가 “아니기는 뭘 알아? 이 세상이 인간과 인간에서 대화 안 되는 게 뭐가 있느냐? 다 되지.” 그 다툼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일기장을 계시로 제시합니다. 그 계시가 오늘날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지적을 우리가 받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선 해답부터 먼저 생각을 해야 되겠어요.

자, 생각해야 될 것은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혹시 빨간 거 혹시 있습니까? 빨간 거.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욥의 친구는 그림으로 이렇습니다. 긴 그림자를 지금 자기의 자아에 둘둘 말았어요. 긴 그림자. 과거의 그림자가 둘둘 말았고, 그다음에 뭘 보느냐 하면 거기서 모든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내다봅니다. 뭘 감고 있어요? 과거의 경험들이 아는 지식들이 감고 있어요. 저는 그 지금 겨울철 되게 되면 특히 시장에 재래시장에 가보면 겨울철에 어릴 때 아주머니들 또는 할머니들의 그 모습을 제가 연상하게 되거든요.

옛날 어릴 때 이제 60대 이상에 70대 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없고 그 당시 70하면 벌써 죽을 나이고. 제가 어릴 때에 한 60대가 이제 할머니들인데 그 장독에다가 이불 뒤집어서 쓰고 묶어 놓은 모습이에요. 겨울 되면. 뚱뚱해가지고. 꼭 재래시장에 보면 다들 뚱뚱해요. 다 뚱뚱한데 어릴 때는 그것이 보기 싫은 것이 아니고 푸근함으로 다가왔어요. 푸근함. 모든 것을 받아 줄 것 같은 푸근함. “아이고 내 새끼야. 내 손주야.” 해가지고 이불 같은 옷 안에 다 들어갈 것 같아. 장독 안에 과거가 이불처럼 감겨져 있어요. 욥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빨간 걸로. 욥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욥은 이리 있으면 이게 도마라면 도마 위에 욥을 세워 놓고 회칼로 과거를 잘라내 버립니다. 미래도 잘라내 버려요. 과거 잘라내고 미리 잘라내 버리면 여기는 욥의 친구는 뭐가 많으냐? 할 말이 많아요. 할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칭칭 감아 놓은 과거의 지식과 경험들이 상당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발산 못 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누구 걸리기만 해봐라. 할 말이 많은데.

욥의 할 말은요, “아니야. 아니야. 너희들은 아니야. 아니야.” 해야 할 뿐이지. 욥은 이미 자기는 미래가 없어요. 왜? 지금 죽어 있으니까 곧 죽을 테니까 곧 죽거든요. 죽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왜 죽이는지를 몰라요. 왜 죽이는지는 모르고 다만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 욥이 할 수 있는 것은 하소연뿐입니다. 하소연.

과거에 입각해서 지금 나한테 주어진 이 죽음이라는 이 처분. 처분은 도대체 물음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이걸 뭐로 보느냐? 처분으로 보지 않고, 처벌로 보는 거예요. 과거와 관련된 너의 처벌 받는다. 과거의 지은 죄에 대해서 처벌을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욥은 지금 내린 하나님의 처분이라고 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욥이 양보 안 합니다. 양보 못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처벌에 대해서는 이미 자기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이 과거로서 과거에 벽이 생겨서 이 과거에서 현재를 설명이 안 돼요. 지금 되어진 이 설명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뭐 미래는 없지요. 곧 죽을 거니까.

저는 욥의 사정을 제가 일단 어느 정도 사정인지 한번 적어 보고 지금 여러분의 사정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친구하고 욥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욥은 어떻게 내가 뭐 미래에 되고자 하는 게 없어요. 지금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미리 내가 요 거 한 말은 나중에 계시용으로 사용해야지.’ 그런 생각도 없어요. 지금. 죽을 판에 무슨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시하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욥의 고난의 증상을 제가 한번 적어 보겠어요. 열한가지인데 제가 한 번 적어 볼게요. 욥의 증상. ⓵번째, 19장 7절에, 고약한 입 냄새 ⓶번째, 2장 8절, 미치도록 가렵다. ⓷번째, 2장 12절, 얼굴 형태가 바뀐다. ⓸번째, 7장 5절, 육체가 썩어들어간다. ⓹번째, 7장 19절, 밤잠을 못 잔다. 한 숨자고 깨고, 한 숨자고 깨고가 아니라 연발 적으로, 연속적으로 밤잠을 못 잔다. ⓺번째, 16장 16절, 시력을 잃는다. ⓻번째, 19장 20절, 체중이 감소된다. ⓼번째, 3장 19절, 관절염이 있어요. ⓽번째, 30장 30절에 피부 색깔이 검게 바뀐다. ⓾번째, 13장 17절, 쉴 틈이 없이 찾아오는 고통. 번째, 3장 19절, 서서히 진흙이 된다.

지금 욥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욥의 이름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욥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아뿐입니다. 자아 빼놓고 그 껍질 있잖아요. 그 껍질은 마지막에 흙으로 변하고 있어요. 욥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신나는 게 아니고 욥 자체가 계시가 돼요. 욥 몸뚱아리. 이런 열한가지 증상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게 모습이에요.

욥이 보편적인 계시거든요. 욥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든 인간에게 공히 그렇게 이렇게 일어나야 돼요. 일어나면 안 된다가 아니라 가끔 일어난다가 아니라 필히 하나님이 하나님다우면 이렇게 일어나야 돼요.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어나게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일어나는 이유를 뭐냐 하면 모든 게 욥의 탓이 아니고 마귀 탓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절대로 내 탓으로 하지 마세요. 인간은 니 탓, 내 탓. 인간이 내 탓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좋아할 줄 압니까? 진짜 패 죽인다. 니가 니 인생에 니 인생은 이렇게 끝났어! 그런데 왜 자꾸 니 탓이라고 하느냐, 니 탓! 내가 그 때 그렇게 안 했으면 좋을뻔 했다고? 아~~ 이거, 그런 것은요, 욥의 친구들이나 하는 이야기에요.

이거는 우리 인생에 참 이랬으면 참 좋을 뻔 했는데 그때 실수했다. 이런 것은 도대체 인간에게는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마귀 탓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누구 탓이라고 합니까? 천주교는 마귀 종교지요. 마귀 종교.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문장 쓸게요. “너는 너를 모르고 있다.” 너를 모르고 있다. 이 대표적인 사람이 욥의 친구들이에요. 욥의 친구. 구원받지 못한 강도 옆에 예수님이 십자가 달렸잖아요. 강도가 주님 앞에 나를 구원해 주면 어떻게 믿을 용의가 되어있다. 할 때,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너는 강도가 돼도 너는 네 자신이 누군지 아직 모르고 있다.”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어요.

왜? 우리는 보편적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보편적 계시가 아니에요. 내게 일어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우리는 아니에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게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데 대목인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성인부터 출발, 이게 틀려먹었어요. 우리는 뭐냐, 응애, 응애. 아기부터 출발해요. 아기부터 출발한 거예요. 성인부터 출발한 것은 뭡니까? 아담이잖아요. 아담. 아기부터 출발한 것은 예수님뿐이에요. 진정한 아기는.

응애, 응애해서 생각나는데, 부산에 강의하는데 차로 저를 데려주시는 분이 “행애 집사님 잘 계십니까?” 하길래 행애 집사님이 행애 집사님이 계신가? 행애 집사님. “행애 집사님 잘 계십니까?” “그런데 행애가 누구지요?” 형애. 이건 아주 정답인양 강하게 주장하는데 행애로 발음해 버려요. 옳은 발음인양 강렬하게 나왔어요. 행애 집사님 연락한 번 해야겠다. 연락 왔어요? 아, 헷갈릴뻔 했다. 행애 집사님 따로 계신다.

인간은 처음부터 아이로부터 출발합니다. 아이로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아니에요. 내 탓이요. 웃기고 있네. 계약 상대자도 아닌데 무슨 내 탓이 왜 들어갑니까? 내 탓이. 계약 상대자가 안 되는데. 계약 상대자는 누구냐 하면 성인부터 창조한 아담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거예요.

아담은 성인부터예요. 아담이 어릴 때 그런 거 없어요. 출발이 성인이에요. 성인. 이브도 성인. 하와도 성인부터 출발한 거예요. 이미 성인부터 계약 상대자가 됐는데 이 계약이 파괴됨으로써 그다음부터 태어나는 모든 아기는 결국 아담이 성인 때 결정된 상황에 거기에 함몰되고 거기에 그냥 빨려 들어갈 그러한 인생만 있을 뿐이지 단독으로 내 인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약 상대자가 아니거든요. 주께서는 계약을 새로 해요. 아이부터. 죄 있는 아담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부터 계약을 새로 하지요. 예수님께서 아이부터 시작해서 33살 성인이 될 때에 바로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게 아버지와 나의 맺은 언약이다. 그 어떤 언약? 새 언약이다. 계약이 그렇게 체결됩니다.

따라서 지금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 도마 위에서 인간들이 도마 위에 세울 때에 항상 인간은 칭칭 감고 있는 것이 바로 과거에 내가 안다는 거. 내가 이만큼 경험상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정도는 내가 빠삭하게 꿰뚫고 있다는 이것이 전혀 욥의 계시한테는 먹히지를 않았던 겁니다. 안 먹혔던 거예요. 그래서 너는 너를 모른다. 또는 도무지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욥의 일기장이 계시가 된다는 말은 계시 아닌 자를 계시 세계 속으로 넣는 과정 가운데서 욥에게 이러한 열한가지 아주 혹독한 시련이 찾아옵니다. 아까 이야기잖아요. 이 혹독한 시련이 찾아오는 이유는 전부 다 누구 탓이요? 인간 탓이 아니고 누구 탓입니까? 사탄 탓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원래 죄의 시작이 사탄부터인 것을 사탄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서 이게 욥을 사용하신 거예요.

욥에게 이익이다, 손해다. 그거는 욥에게는 그건 해당 사항이 전혀 없어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벌써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가운데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욥은 이미 배제된 상태예요. 이 말은 하나님과 아담의 이야기에서 계약 상대자는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고 처분에 의해서 하나님의 제대로 계약할 사람을 이 아담 사탄의 지배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새롭게 제조해요. 새롭게 창조해 냅니다.

그 창조하는데 그 창조하는 환경이 열 한가지의 어려움이에요. 자, 열한가지 구체적으로 쭉 한번 봅시다. 여러분들이 이제 여러분들이 여기서 한번 테스트해 보세요. 나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다,를 한번 보세요. 어디까지. 1번 단계에서 입에서 고약한 입 냄새난다. 양치질하면 되겠지요. 할 수 있지요. 미치도록 가렵다. 벌써 2번 단계에서 다 떨어져 나가요. 어느 지점이 가려우면 그걸 긁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미치도록 이란 말은 특정 지점을 모르는데 랜덤 식으로 아침에는 여기 간지럽다가 오후에는 여기 간지럽다가 밤에는 여기 간지러우면 긁다 보면 피부 세포 다 뜯어져 나가지요. 균 들어오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지금 범위를 딱 지정을 못 하잖아요. 나를 간지럽게 하는 그 범인. 색출이 안 되네요. 간지러움이 돌아다니면서 간지러움을 유발시키는 것 같아. 온 전신을. 혈액 내부를 혈관 내부를 다니면서.

첫째는 내가 조치를 할 것 같아요. 그러나 2번째로 갈수록 이건 뭐냐 하면 내게 일어나는 증상은 내 손을 이미 떠났다가 되죠. 이거는 내가 하소연은 할 수 있지만 내가 치료할 수 있는 나는 아니에요. 내가 치료를 못 해요. 만약에 내가 치료가 돼 버리면 나는 뭐냐 하면 과거에 잘려진 과거 잘려진 미래는 나한테 성립 안 돼요.

나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되었다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도 가운데서 제일 주의해야 될 것이 바로 그 점 아닙니까? 요렇게, 요렇게 했다면 요렇게 해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게 내 소유로 그다음에 잔존처럼 남아 있으면 큰일 날 문제예요. 왜냐하면 늘 우발적이어야 되는데 갑자기 우발적에서 우연에서 아까 필연으로 갑자기 굳어져 버리면 진짜 귀신 달려듭니다. 지나가는 귀신 오다가던 귀신 다 달려들어요.

“괜찮은 너 오랫동안 유지해.” 그것은 이제 이 욥의 보편적 계시 아니에요. 그거는 갑자기 보편적 계시에서 나 이렇게 잘됐다. 개별적 계시로 넘어와 버리면 계시 아닌 것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계시 쪽으로 넘어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귀 일곱 귀신 들어와가지고 계시 아닌 쪽에서 넘어가지를 못하고 도로 계시 아닌 쪽으로 개인적인 개성으로 개성 자리로 다시 돌아와 버리면 이거는 뭐 보편적 계시에서 탈락하는 거죠. 그리되면 안 되겠지요.

그다음에 얼굴 형태가 바뀐다. 요것도 할 말이 있어요. 얼굴 형태가 바뀐다는 말은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행복은 어떻게 만들어지죠? 행복은.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행복이란 나를 인정해 주는 그 주변 사람 안에 행복이 들어 있어요. 나를 알아주는 사람 안에 그 포근함이 행복이에요.

그래서 애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행복해요. 될 수 있는 대로 행복해요. 왜냐하면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오기 때문에. 바로 집에 와요. 집에 왜 옵니까? 행복이 있는데, 가정에서 벗어나면 불행이잖아요. 행복 있는데 행복 안으로 안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요. 주변 사람이 있는데.

우리 외손녀가 멜로디언하고 제 딸이 옆에 반주를 했어요. 독일교회에서. 지난 주 부산에 있는 독일 교회에서 했는데. “오 거룩한 성”을 그걸 크리스마스라고 연주를 죽 하고 있는데 한참 동영상이 돌아가고 있어요. 연주해가지고 애가 바바밤 빠바바 연주 잘하고 있는데, 중간에 그 동생이 떡하니 나와가지고 자기가 설자리 앉을 자리도 몰라 그냥. 처음에 반주하는 엄마 자리에 자기가 몸이 관객들 앞에, 교인들 앞에 보이다가 앉아 있다가 나중에는 일어 서가지고 누나하고 같이 나란히 서있으면서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는 한 조다.” 이 말이지요. 내가 있을 자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안에는 나는 안 떠날래. 떠나지 않을래. 그럼 행복은 뭐냐? 나를 인정해 주는 그런 자리. 비닐하우스거든요. 포근한 비닐하우스. 찬 바람 불어도 다 막아주는. 그 안에서 나는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를 지켜주는 이 타인, 주변 사람이 뜯겨져 나가요. 뜯겨져 나가면 친구들은 이제 빗나가기 시작합니다. 행복의 자리가 없으니까 행복의 자리는 없으면 누가 만들어요? 본인이 행복의 자리를 만들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나쁜 친구 만나고 난리 나는 거예요. 그 나쁜 친구가 남들이 보기에는 나쁜 친구지만 본인한테는 무슨 친구예요?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평소에 행복이라는 것은 나의 인정받는 거거든요. 나의 가치가 살아있는 게 행복의 자리 아닙니까?

그걸 할 때 나쁜 친구끼리 담배 피우고 술 먹고 돌아다니고 가출하고 이리되면 뭐냐, 남들 보기는 이상하지만 저희들끼리는 굉장히 행복한 거예요. 으샤! 으샤! 해서. 행복하다 결국은 어디서 파토 나느냐 하면, “그래, 돈 벌어서 니돈 다 떼어먹고 매니저 주나?” 이래 가지고 결국 기필코 마지막에 뭐로 파토나요? 사회에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게 결국 어디 장벽에 부딪혀서 깨져 버립니까? 돈. 돈에서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부모들은 자식이 이렇게 집에 나오고 또 며느리가 삐져서 나오면 “야야, 육계장 끓여놨다. 들어오너라.” 그건 코미디지만. 니 좋아하는 육계장 맛있게 끓여놨으니 빨리 집에 들어오너라, 든지 아들아! 오늘은 맛있는 수제비 해 놨으니까 이제 오너라, 하든지. 여보, 당신 좋아하는 해장국 했기 때문에 빨리 집에 들어오라고. 빨리 주변에 나를 인정해 주는 나의 가치가 좋은 가치라고 인정해 주는 그 주변에 비닐하우스 구멍 난 비닐하우스들을 전부 다 끌어 모아야 이게 행복해지는 거예요. 이게 행복이죠.

그런데 지금 욥기의 계시는 뭐냐? 친구들이 논쟁하다가 지쳐가지고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어떻게 돼요? 우선 가족 다 날아갔죠. 마누라는 이 하나님 저주하고 죽으라 해가지고 욥이 제일 싫어하는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은혜를 부정하는 아내로 돌아섰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내가 나 보고 “나는 네가 싫어.” 이런 뜻이에요.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난 네가 싫어. 나는 네가 박혀 있음에 나의 행복의 조건은 나 무너졌어.” 이거다 말이지요. 아내 떠났지요. 자식 다 죽었지요. 그리고 “아이 있어도 돈 가지고 살지.” 돈 다 날아갔는데요. “아이고 뭐 돈 하나 없어도 이 몸 하나 건강하니까 내가 다시 목축하든지 양 키우던지 다시 일궈 내면 되지.”

그런데 주께서는 뭡니까? 열한가지 이 육체가 내 통제를 관할을 벗어났지요. 그러면 결국 뭡니까? 욥은 욥에게 행복은 어떤 경우라도 행복의 조건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행복 조건은 다 날아가 버렸어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욥을 누가 천히 여기고 불쌍히 여깁니까? 욥의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지요. 욥의 친구들이.

이제 여러분, 욥기 내용이 이제 서서히 밝혀집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이렇게 행복이라고 보지 않고 그 상태를 뭐로 봅니까? 불행이라 보지요. 왜 불행을 보느냐 하면 자기네들은 지금 뭡니까? 지금 행복 안에 있어요? 불행 안에 있어요? 자기네들은. 행복 안에 있잖아요. 행복 안에 있을 때 욥은 뭐냐 하면 불행한 자로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의 전도는 뭐냐? 선교는 뭐냐? 행복하지 않는 욥을 뭐로 잡아당겨요? 행복한 옛날에 같이 친구로 지내던 초반에 친구예요. 친구로 지내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자. 돌아가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처분을 받는 게 아니고 처벌을 받으니까 오늘 제목을 미리 정해야지. 나중에 잊어버려. <처분과 처벌>

욥은 지금 처분 받고 있는데 욥의 친구들은 처벌받고 있다고 자꾸 오해를 하면서 빨리 처벌의 요소를 빨리 없애 버리면 하나님의 징벌이 스톱이 될 것이고 그러면 뭡니까? 다시 옛날처럼 행복해질 것이라는 거예요.

자,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계시는 노선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소유가 아니고 노선이에요. 계시 아닌 곳에서 계시가 되는 노선에 대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과거를 아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노선과 그 절차, 노선 절차 또는 순서. 불행한 인간이 행복에 대한 그 순서와 하나님이 생각해 놓은 마련해 놓은 그 복된 나라의 순서하고는 완전히 대조적이죠. 극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욥은 거기에 대해서 또는 욥의 친구에 대해서 네가 다시 행복을 찾고자 한 그 노선은 벌써 어떤 것인지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내 답답해 미치겠다. 뭐 새로운 거 없나? 내가 아는 거 말고. “새로운 거 없나?” 이래 이야기했어요. 그 점에 대해서 욥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계란 흰자 이야기해요.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요. 하나는 계란의 흰자가 6장 6절이에요. 욥기 6장 6절에 “계란의 흰자에 소금 안치면 맛이 있나? 없나? 너희들 하는 말이 맛이 하나도 없다.” 또 한 가지는 뭐냐? 너희들이 하는 이야기는 이미 채광이 끝나 버린 텅텅 비어 있는 광산과 같다. 욥기 28장 1절에서 3절 그리고 12절. 분명히 금이 있는 거 알고 은이 있었는데 이미 채굴이 끝났어요. 그럼 그 안은 굴밖에 없어요. 텅 빈 굴밖에 없어요. 거기서 나온 소리는 굴에서 울리는 왕~ 왕~거리는 그 있잖아요. 공허한. 이미 익히 아는 상투적인 메아리의 반복.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같은 여고 동창생이나 아는 일가친척이라든지 오래된 친구하고 오랜만에 한번 만나자 해서 만났습니다. 만나 가지고 자식 이야기하고 남편 이야기하고 뭐 이런 이야기하다가 점점 30분 지납니다. 그다음부터 나올 말은 30분 이후에서 계속 나온 말은 결국 뭐였습니까?

채광이 끝난 공허하기 짝이 없는 다 아는 이야기, 뻔한 이야기, 조진웅 이야기. 앞에 하면 뒤에 무슨 이야기할지 뻔히 다 예측이 되는 이야기. 결국 그 이야기를 함축하고 이렇게 부두 비지 짜내면 꽉 짜면 딱딱하게 되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나의 행복 조건 아직 살아 있다! 너도 행복하니?” 결국 이 이야기에요. 욥의 친구 이야기. 그러니까 욥의 보편적 계시에 맞지 않아요. 욥에게 일어난 어떤 일 상황도 이 세상 상황도 욥의 상황을 못 벗어나요. 보편적 계시니까요. 욥은 본인도 모르게 지금 욥은 큰일하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큰일 한다는 그 결말은 좋은데, 욥을 보세요. 욥 한번 보세요. 아예 작살났잖아요.

자, 여기서 욥은 왜 이렇게 심하게 육체가 박살이 나야 굳이 박살이 나야 이게 보편적 계시가 되느냐? 왜 이러한 육체적인 이게 없이는 왜 보편적 계시가 안 되느냐? 그 이유를 아셔야 돼요. 그 이유를. 그 이유는 악마가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제시한 조건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어떤 의미에서 이건 나쁜 게 아니고 인간적 입장에서 섭섭한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시비를 걸은 거예요. “욥 봤냐? 믿음 좋다.” 이리 나왔다고요. 이거는 뭘 건드린 거예요? 사탄의 독립성을 건드린 거예요. 시비를 거는 거예요. 시비. 시비 알죠? 가만히 있는 사람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하는 말이 인간에 대해서는 제가 좀 알거든요. 알지요. 인간은 뭘 건드리면 인간은 자기 부하가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이미 실시했잖아요. 인간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를 좋아합니다. 두 번째 인간은 자기 몸을 좋아합니다. 그 말을 하나님이 유도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욥으로 하여금 악마의 족쇄 안에서 풀려나오려면 악마가 인간에게 걸어놓은 모든 락 족쇄에 적용 족쇄에서 벗어나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성인이 만들어져야 악마 안에서 그다음에 신약으로 하면 예수 안으로 천국 안으로 옮겨 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려면 악마가 제시한 조건을 다 견딜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한 거죠. 다시 말해서 악마가 혀를 내둘도록 “하다 하다 나는 너 같은 인간은...정말. 내가 인간을 알거든. 모든 인간은 내 수하거든. 내 통제 아래에 있다고.” 왜냐하면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하다 하다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다. 아휴! 나, 몰라. 몰라. 너 가. 가. 가. 가버려! 가란 말이야. 가란 말이야.” 낙엽 막 던지면서. “저리가. 저리가. 나 학을 띠겠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악마에서 풀려날 수 있는 인간 제조의 근본을 욥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근본은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욥은 뭐라고요? 장차 올 예수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얼굴 형태가 바뀌었다, 라는 것은 아까 행복 이야기했지요. 행복의 타인이 나를 보고 싫어 버린바 되어서 그다음에 뭡니까? “니 얼굴 보니 아우 도대체 어떻게 됐지? 안 됐다.” 해놓고는 두 번 다시 안 만나요. 치매 걸린 친구를 누가 만납니까? 걸려서 가만히 있는데 욕 막 하는데요. 욕 얻어먹으려고 문병 갈 필요까지 없지 않습니까. “야야, 우리 그 저 옛날 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 있잖아. 벌써 치매 걸렸대.” “우이 되었데?” “몰라 나보고 막 욕을 하데.” “아이, 그럼 나도 안 갈란다.”

사람이 친구가 뭡니까? 말이 통해야 친구지요. 한쪽이 욥의 얼굴이 망가져 버렸는데. “누구세요?” 이러고 있는데. 욥의 친구들은 놀랬지요. 같이 일주일 동안 울어줬습니다. 그만하면 충분하게 친구 값 했잖아요. 일주일 울 거 같으면 얼마나 그동안 같은 행복 조건 안에서 같은 피라고 놀아줬겠어요. 그러니 얼마나 정이 많았겠습니까.

그다음에 육체가 썩어 들어간다. 야~~ 이거요. 밤잠을 못 자요. 이거 안정액 가지고도 안돼요. 이건. 밤잠을 못 자요. 밤잠 못 자는 이유는 뭐다? 스트레스. 아닙니다. 밤잠 못 자서 스트레스예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다가 아침 되면 양 26만 5천마리에 최고 찍고 잠 한 숨 못자요. 밤잠을 못 잡니다.

원인은 욥에게 제일 고민은 뭡니까? 밤잠 못자는 원인을 욥이 알아요? 몰라요?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모릅니다. 그동안 내가 누군지를 알았거든요. 나는 부자고, 신앙생활 잘하고, 자식을 위해서 제사를 잘 드리고, 자기에 대해서 규정할 조건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고난은 결국 뭐를 삭제시킨다? 욥의 진짜 알고 있던 과거에 자기 얼굴을 삭제시킵니다. 어제 수요 설교 마지막에 그 이야기했죠. 나봇이 알고 있는 얼굴 말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그 죽음의 측면 어린 양의 얼굴로 교체가 되지요. 밤잠을 못 잡니다.

시력 잃는 거. 요거 뭐 시력이 있는 거 주사도 해갖고 뭐 라식수술도 요거는 간단합니다. 체중이 감소한다. 나중에 맛있는 거 먹으면 찌겠지. 이러면 되는데. 그다음에 뭡니까? 그다음에 관절염. 집구석에 앉아 있지 뭐. 돌아다니지 말고. 그다음에 피부 색깔이 검게 된다. 이거는요, 사람은 속에는 위암 걸리고 대장 걸려도 사람의 자존감은 안 다쳐요. 그런데 자존감이라 하는 것은 타인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타인이 인정해줘야 있잖아요.

그런데 피부는 나의 외부에 포진해 있습니다. “아이구, 니 요새 얼굴 색깔이 왜 검지?” 이리 되면 이거는 내 안에 시커먼 거 생각보다도 자존심 팍 상한 거예요. 우리 만나지 말자. 피부 색깔이 이렇게 검게 나오면 이게 나의 전부가 돼요. 나를 표상하는 표상 전부가 피부 색깔로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여자 분들이 돈 많으면 이 피부 색깔에 몰빵을 해요. 몰빵을 한다고요. TV에 홈쇼핑 보고 피부 색깔 화장품 비싼 화장품 써요. 그다음에 이 고통은 간지럽다 이게 아니고 아프다는 것은 없잖아요. 이건 쉴새없이 아파요.

그다음에 자기가 이제 욥이 마지막은 자기가 자기를 판정을 내립니다. 내가 그냥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흙이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내가 목격하는 절차로 나를 사용한다는 멀쩡한 인간이 죽음까지 이를 때에 어떤 과정으로 이게 몰락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래도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욥에게 남아 있어요.

자, 욥에게 뭐가 남아 있을까요? 뭐가 남을까요? 자. 아, 여기서 욥에게 일어나는 인간의 자아와 욥의 육체는 이렇게 결국은 따로 떼놓고 생각해야 된다. 왜? 자아는 마귀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자아는 마귀가 집어넣은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하고 욥하고 이야기할 때 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생명치고 조형물 치면 원망할 것입니다. 악마가. 그러니 악마가 조건을 안 걸었으면 욥이 이런 고생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욥이 계시적으로 보편적 계시성을 갖는 것은 하나님 그 계시를 알고 있는 하나님과 사탄만 알고 있는 그 세계에 욥이 그냥 도우미처럼 끼어든 거예요. 도우미처럼. 재벌 둘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있는데 도우미 한 번 부를까? 이런 난데없이 이런 그들 노는데 이쪽이 그냥 끼어들어 가지고 완전히 개판된 모습이에요.

거기서 나온 결과는 뭐냐 하면 악마가 집어넣은 자아는 심지어 몸이 다 망가지고 죽는다 할지라도 자아는 멀쩡하게 하나도 손상가지 않고 더 뭡니까? 독하다 할까요. 더 표독스럽게 남아 있는 거. 이 자아 문제 어떻게 할 거예요? 이 자아 문제 해결 안 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지옥 가고,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10분 후에 대책 봅시다.

 

 

 

안양20251211b욥38장25절(무능성 유지)-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욥의 마지막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욥의 마지막이 어떻게 됐는가, 인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욥이 맞이하게 되는데요. 그 욥이 마지막에 그 행복한 순간에 맞는 특징이 뭐냐, 자신의 무능함 자각이에요. 무능함이 되기 위해서는 뭐가 작살났는가? 나의 역사가 제거된 나의 역사가 긴 긴 역사가 잘려져 나갔어요.

그 잘려져 나가면 뭐가 되느냐? 새로운 아담으로 등장된 거예요. 매 순간 새로운 아담이에요. 옛날 구닥다리 아담이 아니고, 새로운 아담으로 만듭니다. 새로운 아담은 주님의 계시덩어리에요. 주님의 계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의 계시는 뭐냐하면 욥은 빠져요. 욥도 빠지고 욥의 친구도 빠지고 엘리후도 빠져요. 뭐가 빠지냐 하면 하나님과 그리고 사탄의 내기의 승리의 결실. 승리했다는 그 결실이 또는 증표 이걸로서 그 욥이라는 새로운 아담이 등장하게 됩니다.

새로운 등장하는 인물은 아담은 욥의 특징은 뭡니까? 무능하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없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욥에게 나타나서 결정타를 던지는데 그게 두 가지 사실을 던져요.

하나는 뭐냐 하면 둘 다 비유에 관한 건데, 욥기 38장 25절 26절에 보게 되면 네가 폭우가 내릴 때에 네가 길을 폭우가 내려서 땅 위에 흐르는 길을 네가 미리 길을 마련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요. 있느냐? 라고 하나님이 폭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에게 물어요. 아~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왜 어려우냐 하면, 아담이 찾아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질문을 던지는데 그게 크게 쓸게요. 그게 뭐냐하면 딱 이거예요. ‘문제성 생산’이에요. 하나님에 속한 사람은 살아가면서 내가 뭐가 문제냐가 자꾸 문제가 등장해야 돼요. 정답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문제지지. 문제지 역할로 끝나지. 우리가 정답 알면 정답 아는 내가 얼마나 또 자고하고 또 자랑질 하겠습니까?

정답은 필요 없어요. 정답은 내가 안 갖고 있어야 돼요. 우리는 다루워질 뿐이지 내가 정답 갖고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자격자는 아니다, 이 말이죠. 문제를 생산하는 거예요. 자꾸 문제를 생산하는 거예요. 문제를.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지?’ 문제의 연발, 문제의 연속. 이게 계시의 연속이에요. 계시가 연속됩니다. 그러면 욥은 바로 문제의 그 지점에 등장했고요. 그러면 욥의 친구는 다시 옛날로 자꾸 돌아오라는 거예요. 옛날로.

자, 욥의 친구 이야기하겠습니다. 욥의 친구. 좀 복잡하지만 여러분 이제 견딜 수 있어야 돼요. 욥의 친구. 욥의 친구는 질서, 혼돈, 질서입니다. 욥의 친구는. 세상은 자연 질서 안에서 질서 있게 규정되어 있다. 이게 욥기가 욥기 내용은 이스라엘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이에요. 이방인.

이방인들의 신의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나,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방인들은 질서 있는 자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뽑아냈어요. 하나님 우리가 신이 천지를 만들어 놨는데 그 하나님 쪽에서 찾아온 게 아니에요. “아담아! 어디 있느냐?” 이런 게 아니에요. 그냥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찾을 때 중간에 질서, 자연 질서를 통해서 찾는 겁니다. 자연 질서가 그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내부 정신 질서에 자리 잡는다. 이것이 이방 민족의 신학입니다.

이방 민족의 신학이 오늘날 철학이고 오늘날 윤리, 도덕이고 이게 선악 체계에요. 내부에 자리 잡은 이 자연 질서를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세 자로 양심상. 또는 두 자로 하면 양심이라 해요. 내가 양심대로 살면 하늘이 돕는다. 여러분 어릴 때 많이 들어봤지요. 사람이 선하게 살게 되면 하늘이 다 도와주게 되어있다. 무슨 말입니까? 반대로 악하게 살면 무슨 벌을 받는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지금 욥은 천벌 받고 있는 게 아니고 뭡니까? 처분을 받고 있어요. 다루어지고 있어요. 직장 생활하다가 갑자기 동원 예비군 초청받아 훈련받고 있습니다. 본인이 요청한 거 아니에요.

인간은 나로부터 해서 신을 신에게 나아갈 때 이게 자연 질서를 통과해서 신에게 나아간다는 거예요. 인간은. 욥도 마찬가지에요. 욥도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적인 계시가 없다, 이 말이에요.

율법적 계시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아느냐? 그러니까 욥부터 해서 욥의 친구 모두가 하나님을 모르지요. 모르는데 욥기는 이게 다루워지고 있는 거예요. 그들 네 명 다 다루워지고 있는 거예요. 계시 없으면서. 그 다루워지고 있는 것이 유대인의 책 이스라엘 율법 책. 이 욥기에 거기에 들어가 있다. 하나님의 계시로 이미 들어가 있어요.

나로 출발해서 신에게 나갈 때 자연 질서를 갖고 나온다. 그런데 이건 욥도 알고 있는데 욥은 여기서 굉장히 낯설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 자연 질서 앞에 자기는 신학적 양심이 있을 거 아닙니까? 뭐든지 하나님이 우선이다. 하나님 이거 주권 사상이 이게 나온 것이 뭡니까? 이방인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슨 사상? 하나님의 주권 사상. 모든 종교가 다 여기 주권 사상이에요.

여기 개혁주의뿐만 아니고 모든 종교가 이게 로마서 1장 21절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안다는 건 존재하는 게 아니고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부터 펼쳐져서 질서 정연하게 돌아간다. 이걸 그들은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알고 그것이 그 자연 질서를 안다는 거. 그 안다는 게 얼마나 그게 자랑스럽겠습니까? 그 자랑스러움이 자기 내부에 자기 의로 장착돼 있어요.

나는 교회는 안 나가지만 얼마나 바르게 산다고. 여러분, 안 믿는 남편들 맨날 하는 소리가 그 소리 아닙니까?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내 싫은 소리 하나 안 들었다. “만약에 천국이 있다는 건 모르겠는데, 있다면 나는 절대로 천국 갈 사람이지 지옥 갈 사람이 아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보고 자꾸 전도하지 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바르게 살고 있어.”

왜 바르게 살아요? 여러분 죄는 발견하는 게 아니고 발명하는 겁니다. 죄는 발명해요. 욥도 양심상 믿음 좋지요. 그런데 믿음이 욥이 믿음이 좋다. 이 세상 욥 같은 인간이 없다는 것은 이건 일방적인 누구 규정입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을 했고 그것으로 사탄의 심기를 건드린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누구 손아귀에 있어요? 사탄 안에 있잖아요.

사탄 안에서 예외 없이 전부 다 인간은 사탄의 종이잖아요. 종인데, “욥만큼은 종이 아닐 걸!” 하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보는 거예요. “네가 세상에 한번 다녀 왔나? 욥 같은 믿음 좋은 사람 없지?”라고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뭐냐면 하나님이에요. “사탄은 네 생각에 모든 인간은 니 손안에 있다고 니는 믿나?” “믿습니다.” “그런데 다 아니거든.” 거기에 여기 사탄은 가만히 있을 사탄이 아니죠. 열불 난 거예요.

“도대체 내 국가에서 누가 빠져나갔지? 나는 그런 사람 없는데”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 거예요. 문제성이 제기돼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고요하고 아무 없는 것도 거기서 뭐가 되냐? 균열이 생기고 문제가 발생 되도록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해요. 그게 사건입니다. 말씀 사건이에요. 꼭 나봇 같아. 그냥 포도농사 지면 되는데 괜히 아합왕에게 탐을 내게 해가지고 사건이 유발하는 사건의 그 유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건 유발자 하나님입니다. 아까 제발 내 탓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지금 그거는 마귀가 준 거예요.

그러면 지 탓 아니면 그럼 지가 어떻게 해결을 볼 수 있어요? 회개하면 된다. 회개하는 것은 보편적 계시가 될 수가 없습니다. 보편적 계시는 내가 무능해야 되지. 갑자기 무능한 내가 신앙적으로 유능한 사람 돼보면 이건 보편적 계시에 자기 의가 섞여 들어가는 거예요. 이건 마귀가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발명하도록 허락하세요. 죄를 발명하도록. 이게 욥을 보면서 많은 주석가들이 제가 보기에는 주석가들이 얼마나 이게 참 엉터리인지 분명히 사탄 말이 맞아요. 그 재산 뺏고 그 건강 뺏어 버리면 원망합니다. 사탄은 장담했다고요.

딱 물어봅시다. 욥이 하나님께 원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모호해요? 아니에요. 모호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원망했습니까? 안했습니까? 했잖아요. 그럼 누가 이겼어요? 사탄이 이겼잖아요. 사탄이 이겼다고. 사탄이 하나님이 이겼잖아요. 사탄 말이 맞잖아요.

그러니까 욥기를 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욥기에서 진리를 얻을까 해서 욥기를 보는 사람들은 전부 다 사탄에게 패배하게 돼 있어요. 욥기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해석할 때 나의 은근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욥기를 본 것 자체가 욥기의 그 현장성을 접근하지 못한 거예요.

욥의 현장성. 아까 열한가지 아프지요. 그럼 열한가지 아프면 우리가 그 욥기 욥의 현장성에 합치됩니까? 안 됩니까? 아파도 안 돼요. 열한까지 다 아파도 욥의 그 현장성 참석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십자가 현장성 우리 알아요? 몰라요?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수난을 받아도 십자가의 현장성은 몰라요. 왜? 몰라도 되기 때문에.

알아야 된다는 게 사탄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뭐를 유지하느냐? 제목이 바뀌겠다. 제목이 바뀌면 안 되는데. 무능성 유지. 죽을 때까지 이거 주장하세요. 이거 유지하세요. 무능성 유지. 어떤 말씀을 공부하고 어떻게 해도 우리는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요. 나 자신이 통제 안 됩니다. 무능합니다. 다만 나 자신이 주님의 문제거리 된 것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문제 삼았다는 것 자체가 무능성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자, 이제 욥의 친구 이야기하죠. 욥의 친구는 하나님을 찾을 때 자연 질서를 통해서 찾습니다. 그래서 욥기에 이 두꺼운 욥기에 거의 중간에 나오는 많은 욥의 세 친구 1번타자 엘리바스 2번 타자 빌닷 3번타자 소발. 1번 타자 엘리바스. 아, 굉장히 점잖게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빌닷은 유명한 말을 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소발은 이 사람은 제일 비리비리한 친구에요. 맨날 하는 소리가 욥이 네가 너무 말이 많다. 그 이야기. 엘리후는 경계선을 갖고 있다. 양쪽을 다 갖고 있는 사람. 욥의 친구를 칩니다. 근거 없이 욥을 비방했다. 근거 없이.

그러니까 욥처럼 고난 받지 않은 주제에 왜 욥의 고난에서 건강한 입장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한계를 좀 지켜라. 한계. 엘리후가 욥을 칩니다. 네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만 왜 하나님을 원망하느냐? 그건 네 욥의 내부에서 지금 문제가 해결 안 됐다는 증거밖에 안 된다. 왜 원망하느냐? 네 몸 아픈 거 우리가 동정할 수 있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거는 네가 풀어야 될 문제를 네가 풀지 못하고 누구 탓으로 돌린다?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 나는 의로운데 하나님이 이렇게 나한테 억지를 부리니까 내 탓이 아니고 하나님 탓입니다. 따라서 엘리후가 듣기에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결론을 냈으니까 네가 거기에 대해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책을 못내 제시 못하는 것이 이게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욥의 친구 다시 돌아와서 보면요, 욥의 친구가 질서에서 혼돈으로 해서 지금 혼돈은 욥을 말합니다. 질서 잡힌 데서 혼돈했기 때문에 다시 질서로 돌아와야 된다는 것이 욥의 친구예요. 그런데 요것은 누구도 안다고 했습니까? 욥도 알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연 질서가 안정되어 있는데 지금 욥의 마음은 뒤죽박죽이죠.

그러면 자연 질서와 욥의 마음과의 이게 뭔가 불균형이 일어났다. 이 말이지요. 그런 노래가 있잖아요. 팝송에.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왜 햇빛은 빛나고 있느냐, 왜 파도는 치느냐, 해는 왜 그렇게 빛나는가? 옛날 팝송이에요. Skeeter Davis . 짜증난다, 이 말이죠. 같이 울어 줘야지요. 내가 아프면 해가 어두워지든지 뭐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요, 계시의 보편성이 아니에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해가 어두워지지 우리 죽는다고 해서 해가 어두워지고 그런 거 없어요. 그때는 갑자기 구름이 끼었겠지 뭐. 아버지 돌아가실 때. 그러니까 욥과 욥의 친구와 그리고 욥의 엘리후도 마찬가지지만 전부 다 이게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구체적인 율법과 계시가 없어요.

계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나타낸 게 계시예요. 그런데 이거 욥의 친구는 찾아오잖아요. 찾아오니깐 그냥 자연 질서의 안정성이 곧 신의 안정성으로 보는데, 욥에게는 그 자연 질서보다도 자기의 마음이 깨졌잖아요. 자연 질서는 멀쩡한데 마음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욥의 친구가 지금 자연은 믿을만 한데 뭐는 믿을지를 못 하겠다? 욥의 친구 욥의 네 마음은 못 믿겠다. 이게 바로 욥의 친구의 한계입니다.

나중에 욥기의 끝부분에 보면 자연 질서를 믿는 그래서 자연 질서를 안전하게 해주는 신을 믿는 욥의 친구들을 불러 가지고 욥을 믿으라. 너희는 니는 잘못됐고 욥은 옳다고 이야기했어요. 따라서 제물을 예물을 욥에게 갖다 바쳐서 “내 인생 좀 어떻게 좀 해줘!” 그렇게 욕했던 욥의 친구한테 얼굴 완전히 망가진 욥에게 몸이 망가진 욥에게 갖다 바치면 욥이 그 욥의 친구가 준 예물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면 욥의 친구의 죄가 사해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친구는 바로 네 사람이 아니고 1번 2번 3번 타자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엘리후는 잠깐 등장했다가 중간 존재로서 경계선 존재로 빠져 버려요. 양쪽 다 그냥 삽입해서 빠져 버려요.

엘리후는 일종의 천사 같은 존재라면 욥은 예수님 메시아 같은 존재예요. 그냥 욥을 섬기기 위해서 천사가 동원된 것처럼 주인공은 욥입니다. 욥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언약의 구체성이 등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봅시다. 아담에서 혼돈에서 질서 되잖아요. 욥은 뭐냐? 질서 다음에 혼돈 다음에 질서가 아니라, 혼돈을 품은 질서 2. 이 말은 결국 굉장히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 알면 아는 이야기예요. 도마에게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준 분만이 부활하신 분이에요. 창자국 없고 못자국 없는 예수는 가짜 예수입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은 일종에 수표 같으면 위조수표에요. 위조 지폐. 인간 자연 질서 안에서는 통용이 되는데 하늘나라는 전혀 통용되지 못한 헛말 헛주장만 난발하고 있는 게 욥의 친구예요.

지금 우리가 욥에서 제일 난해한 부분을 우리가 접어들었는데 어느 정도 난해한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인간이 죄지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고 착하다고 달라질 게 없다.” 라는 요 이야기 한번 적어 볼게요. 인간이 죄 지었다고 인간 말고 인간 말고요.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영향이 있겠는가? 인간 말고. 하나님께. 요거에 대해서 첫 번째 엘리바스가 이야기합니다.

4번 타자 엘리후가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욥이 이야기합니다. 생각이 다 달라요. 똑같은 문장, 똑같은 성경 구절, 똑같은 성경 구절을 아나운서 해가지고 동일하게 해도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다든지 말씀이 계시니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 똑같은 이야기 했더라도 하나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네가 무슨 자리에서 무슨 입장에서 그 성경을 이야기했느냐를 물을 경우에, 그것은 한쪽은 “이 성경 말씀을 제가 말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제가 느낀 것으로 말했습니다.” 이거하고 “이 성경 말씀이 저에게 없는 죄도 죄를 발명해 내었습니다. 그 도구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거론합니다.”

완전히 다 다르죠.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기초 하에 지금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하고, 아, 십자가 이건 몰랐네. 이건 최고네. 이건 믿어야지. 십자가 성경 구절 대볼까? 뭐 여호와증인처럼 내비게이터처럼 달달 외우면서 하는 거. 그거는 욥의 친구죠. 욥의 친구입니다. 자기 유능성에다가 더 유능성을 보탠 것밖에 안 돼요. 지식 자랑하는 것밖에 안 되죠.

엘리바스 같은 경우에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없지 않느냐, 이 말은 철저하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 사상. 초칼빈주의. 이걸 영어로 하면 하이퍼칼빈주의. 쳇GPT에 이근호사상 쳐 보세요. 이리 나와요. 초 칼빈주의. 하이퍼 칼빈주의. 모든 것이 신의 주권에 달렸다.

그 평을 하는 사람들이 주권 사상에 캘빈주의 개혁주의 신학 주권 사상에 매여 있으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세네.” 이래 가지고 붙인 게 초칼빈주의 붙인 거예요. 엘리바스입니다. 엘리후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욥과 엘리바스 두 가지 요소를 다 겸하기 때문에 엘리후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욥을 지적하기 위해서 욥의 의를. 욥의 의를 가지고 공격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욥이 이런 이야기한 것은 욥이 그게 엘리후가 마지막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순서상 사실은 엘리후가 3번이고 욥이 2번 들어가요. 엘리바스 이야기하고 욥도 지지 않고 욥이 이야기했다고요. 욥기 읽어 보게 되면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을 반복해서 욥이 대응하면서 반복해서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니가 알고 있는 깊이 신학적 깊이를 나도 깊이 있게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쓸데없는 거 말고 내가 고난 받는 이유나 좀 대봐라. 니 아는 선에서 말고 니가 나의 고난을 경유해서 새롭게 욥은 고난 받는다 하지 말고 내가 고난 받는다면 왜 받을까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로 삼아라.” 해서 욥이 친구 보고 지적하면서 이야기했다고요. 지적하면서.

아까 끄집어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폭우의 길과 황무지. 폭우의 길은 비가 내려올 때에 비 얼른 빠지세요. 라고 누가 미리 길을 낸 사람이 있느냐고 하나님이 물어요. 이 하나님 묻는 것은 어떤 그 세트장이 어떤 세트입니까? 자연 질서죠. 그 어떤 질서 안정된 자연 질서를 가지고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비, 번개 그리고 북극성, 풀, 하마, 동물, 이게 뭐냐 1, 2, 3, 4, 5, 6일에 창조된 거잖아요. 자연 질서. 자연이 아주 멀쩡하다는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기 것을 욥에게 지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걸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설명하니까 욥이 그중에서 몇 가지 답변했습니까? 많은 질문 가운데서 답변했어요, 안 했어요? 답이 하나도 못 했어요. 놓친 거예요. 놓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야기 감당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걸 제가 뜸을 먼저 드리는데요. 먼저 뜸 드리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하던 놀이 있어요.

요만한 손에 한 15cm 놀이판인데 여기 조각난 번호들이 있어요. 조각 난 번호들. 1. 2. 3. 4. 5. 6. 7. 번호가 새겨진 작은 게임판. 이 게임판이 이동하려면 요 빈칸이 요로 오려면 어떻게 돼요? 이렇게 올리고 해야 되죠.

다른 말로 하면 공토 마련. 인간들이 자연 질서를 알고 자연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께 인간들은 하나님께 바르게 살고자 애를 썼어요. 바르게 살고자 애쓴 순간 뭐를 많이 남깁니까? 내가 점점 모르고 있는 빈 공터가 남는 거예요. 빈 공터가 빠져 있는 게 있어요. 빠져 있는 거.

그런데 그 빠져 있는 거 가지고 주께서 우리를 공략해서 찾아와요. 왜? 우리의 무능함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네가 세상에 대해서 다 알아?” “모릅니다.” “모르면서 왜 화를 내?” “죄송합니다.” “네가 왜 모르면서 화를 내? 지금 니 웃기지도 않네.” “나 아는데 진짜 왜 나 아는 식으로 세상이 왜 이렇게 안 됩니까?” 이거는 화를 내면 모르는데. 욥이 그래서 지금 친구들에게 화내고 하나님께 원망했거든요. 아까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지요.

그 원망함으로써 사탄이 승리한 게 아니에요. 그 원망했잖아요. 보세요. 자연 질서입니다. 언약에 의하면 자연 질서는 붕괴돼요. 그러나 이건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연 질서는 든든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연 질서 그다음에 뭡니까? 혼돈이죠. 친구는 혼돈이 아니죠. 왜? 바깥에는 해도 잘 뜨고 있고, 자기 내부의 양심도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는데, 지금 욥에게는 난리 났어요. 난리 났는데 그다음에 질서로 돌아오라 하는 거요, 친구 이야기잖아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데 이 질서는 뭐냐 하면 질서가 없고 공터가 되는 거예요. 공터가 되는 거예요. 공터. 이 공터 속에서 욥은 공터 속에서 뭘 잃어나? 그렇게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는 뭘 잃어버려요? 자아를 잃어버립니다.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치 그 볼펜 매직 쓰곤 난 뒤에 손에 침 묻히고 아예 그냥 문대 버리는 거예요. 문대 버리면 내 자아가 있던 그 자리가 없네! 내가 없네! 내가 없어요. 죽기 전에 10초 전에 아 23초 전에 “야, 아들아! 땅 너 하고, 둘째 아들 집 너 해라. 여보! 그동안 고생했어. 미안해. 미안해.” 여보! 여보! 전부 다 폼 내고 있고. 아버지! 하고 과도한 애도를 하고 난리도 아니죠. 속으로 형아 씨~ 동생한테 땅 주고 나한테는 나는 뭐 옛날 집 뭐. 티내면 안 되니까. 아버지! 아버지! 난리 났다 말이죠.

그러면서도 내 니 표정 보고 있으면서 5초전 5초, 4초, 3초, 2초, 1초. 나 어디가 있습니까? 알아요? 몰라요? 이방인들은. 계시 없는 이방인들은 알아요? 몰라요?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이방인들은 뭐가 없기 때문에? 부활이 없어요. 부활의 영역이 없어요. 사망아! 사망을 못 이겨요. 욥도 마찬가지고 욥의 친구도 마찬가지고 인류도 마찬가지고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이방인도 그렇고 계시가 무르익을 전까지는. 이스라엘도 부활의 개념이 없어요.

부활의 개념은 반드시 뭘 거쳐야 됩니까? 천국은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천국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능함이 돼야 돼요. 자아는 무능함이고 공터인데 여러분들이 그동안 행복했던 것은 내 인정해 준 사람을 끌어 모았잖아요. 그런데 인정해 준 것을 끌어 모아서 행복이라 하는데 그거는 욥의 친구의 질서 체제입니다.

그러면 어떤 행복이냐? 무능한데 왜 저 사람은 나를 인정해 주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나에게 찾아오고 전화해 주고, 아이고 집사님이 훌륭하다. 하고, “나 엄마 좋아해” “여보 당신 좋아해”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잽이 됩니까? 아니 쨉이 돼요? 나는 내 이익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그것으로 남들 행복에 못지않게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은데, 그건 욥의 친구 아닙니까? 남이 어떻든 간에 내 안에서의 나만이 질서만 잡으면 땡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여태껏 살아왔잖아요.

무능하게 되게 되면 거져주심이 선물입니다. 공터가 되게 되면 나를 공터로 만들면 공터를 만들기 위해서 애썼던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이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있음에 나는 비로소 공터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요게 공터가 뭐냐? 천국입니다. 이게 이미 시작된 천국 생활이에요.

“지금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라고 이야기하는 거 이거는 엘리후한테 욥이 욕 얻어 먹을만 해요. 엘리후가 나중에 이야기해요. “지금 굉장히 너한테 예민하다. 너 니 자신이 굉장히 민감해. 너 지금 모르고 있지. 내가 보기는 굉장히 민감해. 그런데 네가 민감할 그만한 자질이나 자격이나 권리나 너한테 있는 줄 알아? 없어. 그런데 니가 왜 민감해?”

그리고 난 뒤에 폭 풍 가운데 하나님이 오셔가지고 “야, 민감한 욥 이리와. 니가 황무지에 비 내리는 거 알아? 채소밭도 없는데 비는 왜 내리지?” “모르겠습니다.” 입만 띠면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말도 안 해. 공터는요. 무예요. 없음이에요. 없음.

그렇게 말을 많이 하던 욥이 입을 다물었어요. 입을 다문 것도 모자라서 재를 뒤집어썼어요. 이게 저한테는 어울립니다. 합당합니다. 재를 뒤집어썼어요. “주는 거나 먹어. 그냥. 주는 대로 먹고 그냥 뭐만 나오라? 내가 집어준 말씀에 집어준 그 죄만 나오면 되는 거야. 죄만.” 하나님께서 마귀를 잡기 위해서 마귀를 잡기 위해서 욥을 동원시켰죠. 동원시켰는데 지금 사탄은 악마는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인간 치고 자기의 고난 밖으로 벗어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분명한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발상은 악마가 악마의 자기 것을 다 집어넣어 준 거예요. 근데 이질적인 거 욥도 마찬가지에요. 악마는 말합니다. 하나님께. 어떤 인간도 만약에 뺏어 버리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이 말을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탄은 하나님 당신에게 늘 원망할 마음 준비가 돼 있고 거기에 필요한 자질은 내가 벌써 인간 앞에 다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어떤 인간도 욥이 아니라 누구 욥이라도 원망하게 돼 있습니다. “내기 할까?” “합시다.” 이리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이 원망을 했거든요. 그러면 사탄이 이겼잖아요. 그러면 사탄이 이기면 사탄 세계에서 못 벗어나고 구원을 받지 못해야 돼요. 못해야 되는데 원망은 원망대로 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구원은 구원대로 하는 거예요.

악마로부터 지식과 양심이라는 그 영혼을 받았고 자아를 받았던 모든 인간들이 모든 인간이 다 총동원해서 짜낸 그 지혜 바깥의 지혜가 욥의 지혜예요. 하나님의 지혜고 욥을 다뤘던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못 빠져나왔는데 빠져나왔어요. 빠져나왔다는 거 증거 대라. 증거 대야지요. 그 증거가 드디어 욥의 제일 마지막 장면입니다.

딸 세 명을 낳아요. 아들 이야기는 없어요. 딸 세 명이 나온다고요. 첫째 딸 이름이 여미야. 이름이 비둘기. 그다음에 두째 딸 이름이 긋시아. 향나무. 세 번째 딸 이름은 게란합북. 최게란합북 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름다운 뿔. 아름다운 뿔. 향나무. 비둘기.

자연 질서를 초월한 질서. 천국의 질서의 표상으로 욥에게 이 세 딸이 나왔습니다. 욥의 세 딸이 나왔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내가 원망은 하되 아내가 욥이 재혼은 안했다. 왜냐 그 원망하던 아내하고 같이 딸을 낳았다 뭐 짐작은 합니다만, 그 내용은 안 나와 있으니까 중요하지 않은데.

이 비둘기, 향나무, 아름다운 뿔, 요것은 특혜를 받은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인데 이것은 무슨 선물이냐? 바로 욥의 무능성이 합류된 하나님의 특별성, 욥의 무능성을 전조로 한 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 그 무능성.

그렇다면 ‘욥이 이렇게 고난 받다가 나중에 복 받았다는 기존의 해석하고 뭐 다를 게 뭐가 있느냐? 똑같은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그 점을 한번 봅시다.

이것이 욥이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 된통 당했다가 다시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 하는 욥은 역시 믿음은 이것은 욥의 승리가 아니고 누구 승리입니까? 욥을 채택한 하나님의 승리죠. “사탄아! 원망했지? 원망 했는데 니 말이 맞지? 니 말 맞고 구원된 사람 없어야 되잖아. 니 말 맞고 니 셋이 있는데 내가 욥 구원했잖아. 너의 철통 방어가 깨졌잖아. 너는 이제 이 욥에 대해서 더 이상 건드릴게 없어. 손 못 대. 내가 승리했으니까. 네가 하나님을 너무 네 선에서 너무 만만하게 봤어. 네 선 밖보다 더 월등한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은 네가 상상도 못했잖아”

욥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 같으면 그냥 이방인들이 믿음 생활했다 이래 보겠는데, 이게 성경책에 유대인의 성경책에 이게 들어가 있잖아요. 어떤 요소냐? 그 요소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에 나오는 어떤 요소가 이게 성경 안에 유대인 이스라엘 성경 안에 하나의 계시로서 당당하게 하나의 계시로 들어갈 수 있는 이유가 뭐냐? 그게 바로 후견인입니다. 후견인.

후견인 고엘 사상. 고엘 사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욥이 말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 구원하소서. 가 아닙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욥이 어떤 태어났는지 아직까지는 잘 몰라요. 왜냐? 욥은 그때 하나님 만나기 전이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 전이기에 자기 억울함만 자꾸 드러낼 뿐이에요. 하지만 내가 죽고 난 뒤에 누가 계시냐? 바로 후견인이 살아 계신다는 거예요.

그럼 후견인이 몇 가지 요소가 있어요. 어제도 잠깐 언급했지만, 후견인. 전체적인 것은 대신 채워 주심이에요. 요거 이상 하죠. 후견인이. 대신 채워 준다는 말은 나가 있으면 지금 욥이 뭐라고 하냐 하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는 자도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욥은 자기 소유를 자기 소유로 보지 않았어요. 자기 소유로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보통 후견인 같으면 뭐냐 하면, 내가 잃어버린 것을 내 것을 보충해 준다 하잖아요. 내 것을. 내 것을 보충하면 이 보충된 것은 누구 것입니까? 도로 내 것으로 왔잖아요. 이런 후견인은 없습니다.

룻기에서 엘리멜렉 나오고 나오미. 분명히 룻이 애기를 낳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나오미가 자식을 얻었다. 왜 며느리 아기를 지 아기로 하느냐. 이게 족보 엘리멜렉이고 보아스는 후견인인데, 그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것을 대신 채워주지 내 것을 채워주는 게 아니에요.

내 인생 행복하라고 하나님이 찾아오는 하나님은 그건 이방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는데 채워주는 것도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이라고 언급하는 그 내용과 합류해서 우리에게 채워주지. “야아~ 역시 하나님은 복을 채워주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내 것을 안 채워줘요.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린 죽어야 되는데 뭘 죽을 인간을 뭘 채워줘요. 대신 채워줘요. 땅이라든지 이런 것을 대신 자식이라는 것을 채워주는 거.

 

첫 번째 두 개만 이야기할게요. 후견인은 대신 내가 잃어버린 가문, 자식, 그다음에 내 재산을 대신 채워 주는 거 룻기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대신 복수해줘요. 보복해 주는 거. 요게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에요. 전쟁을 대신함으로써 나라는 내가 존재하는 확장을 전쟁터로 확장시켜 버려요. 의미 전쟁터로. 영적 전쟁터로. 내가 불행하다, 행복하다, 이런 사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이 벌리는 전쟁터에 하나의 용병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성도는. 영적 전쟁 군사니까. 용병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 대신 다 이루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열매로 우리를 승리하시는 열매로 간주하십니다.

요점에 대해서 보복한 것은 민수기 35장 19절 후견인 중에서 대신 채워주는 것은 레위기 25장 25절 그리고 또 신명기 25장 5절에서 10절은 유명한 시형제 결혼법. 시가집 혼인법은 뭐냐 시가집에 빠져 있는 결여된 것 씨를 내가 들어가서 이 씨를 대신해주고 나는 빠지는 거. 요게 이제 후견인 제도에요. 시형제 결혼법.

원래 야곱의 언약에 해당되는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기 씨. 그 씨는 이렇게 고엘 또는 후견인 제도에 의해서 계속해서 보완되는 거예요. 그 재산 문제 가정 문제는 바로 출애굽할 때 그 히브리인들이 갖던 많은 재산들 잃어버렸잖아요. 잃은 것을 약속의 땅에 들어감으로써 그것을 보충해 주는 거예요. 보충할 때 내 것 아니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생각을 해 줘야 됩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말씀을 대충 정리하겠습니다. 자, 욥기2장 9절, 그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욥의 아내가 아내는 멀쩡합니다. 아무 탈 없어요. 남편만 작살 난 거예요. 멀쩡한 아내가 작살난 남편 보고 뭐냐 하면 아직도 당신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그다음에 뭐냐? 하나님을 그냥 죽어라 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니까? 하나님에게 욕하고 죽어라. 그 욕하고 죽으면 속이 좀 더 시원한 겁니까. 어떤 겁니까?

그러니 욥의 아내는 뭐냐? 몸이 건강한 사람들의 바탕에는 하나님을 언제든지 욕할 수 있는 자질이 포함되어 있다. 깔려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죠. 지금 욥의 아내 문제 삼으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제가 언급한 것은 마태복음 27장 19절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총독이 재판자리 앉을 때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 가로되, 야~ 급했어요. 급했어. 남편 재판을 급해서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되어있지요.

자, 제가 문제 나갑니다. 아내가 급하게 쿠팡이라든지 뭐 배민 해가지고 급하게 사람 보내가지고 저걸 어젯밤에 꿈이 보통 꿈이 아닌데 저 사람한테 손대지 마세요. 라고 전달을 보냈다 말이지요. 제가 지금 질문합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그 꿈을 참작해서 예수님을 풀어 줬습니까? 못 풀어줬습니까? 못 풀어줬죠.

이게 인간의 아는 징후의 한계입니다. 백날 설치고 나대고 몸부림 쳐도 모든 것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지 애쓴 만큼 보상해 준다든지 애쓴 만큼 참작해 주는 것은 우리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그리고 기도도 하지 말고 절대로 내 탓도 없어요. 우리는 말려들어간 거예요. 말려들어간 겁니다.

이 자연 질서는 주님의 손에 담겨 있습니다. 욥이 딸 이쁜 딸 낳았다고 욥이 우쭐되고 그런 욥은 이제 없어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것을 주님이 채워 준 것뿐이지, 우리는 그것을 그냥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끝까지 없어지지 않는 이 자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훌쩍 뛰어넘고 자아의 어설픔, 무능함, 못남, 어리석음, 그걸 뛰어넘고 주께서 다 이루심에 그걸 겸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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