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에돔의 존재

아빠와 함께 2026. 3. 15. 17:13

에돔의 존재
 
2026년 3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4:22

(4:22)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형벌과 형벌의 연쇄 현상이 이스라엘을 거쳐서 에돔에게까지 번집니다. 이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맹렬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대상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민족을 단번에 멸망할 수도 있는데 왜 에돔을 찝어서 멸망을 시전에 알리시는 겁니까? 그것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원리가 현제 나라 에돔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8-9에 보면,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혈육 출신들은 일체 천국에서 받지 않습니다.

오로지 약속에 준해서 태어난 자만 받습니다. 이는 귀한 약속의 효력을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그 안에 ’언약 완성체‘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삭과 이스마엘과의 차이점을 통해서 약속, 즉 언약 유무를 하나님께서 따지지고 거기에 맞는 현실을 조성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한 가정에서 나타난 질이 다른 두 종류의 자식입니다. 이 원리는 이삭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삭이 혼인한 아내 리브가는 불임여성입니다. 육으로서는 임신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임신이 됩니다. 자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먼저 난 장자는 에서, 곧 에돔 나라의 선조입니다. 동생으로 태어난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상속권이 없는 자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존재 이전에 계시부터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육적인 서열에 적용받지 않습니다. 육적으로 먼저 태어난 자가 장자가 아니라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끔 암호화된 운명을 지녔습니다. 육으로 이 암호를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암호이기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밝혀집니다. 언약의 새로운 면이 첨가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둘 다 같은 미래의 곳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창세 전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 언약의 사다리를 타고 이 지상에 내려와 현실을 구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야곱은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의미나 가치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형제이면서도 배제된 결과를 낳고 그 연유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두 자녀와 이삭의 두 자녀로 나뉘어지는 원리가 야곱에서 통합됩니다.

즉 이번에서 약속된 분이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27-30) 즉 야곱은 본인이 그동안 정상이 아니었던 점을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고 하나님을 초청해서 얻어낸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자신이 이상한 존재, 잘못된 존재라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기본은 이런 마음자세입니다. “나는 정상이 아니다. 나는 이상하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될 자에게 ’동행‘이라는 구조를 유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감사와 기쁨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정상이신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단독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아니됩니다. ’동행 구조‘가 깨어집니다.

우리가 정상이 아닌 이유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우리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입각해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매 간에 있어, 어린 여동생이 언니의 새 옷을 입고 돌아다닐 때, 언니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생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입고 나가 보려고 했는지 이상하게도 옷이 내 몸이 안 맞아 벗으려고 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은 이상하게 우리 자신의 소원과 맞지 않습니다. 이는 이 세상이 정상적인 예수님에 맞추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나의 위신과 명예, 나의 즐거움을 충족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되는 자들은 다음의 원칙에 의해 구원되는 겁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지 결코 우리 자신의 열매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체는 따로 계십니다. 동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체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하다가 먼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징벌은 에돔에게 갑니다. 그렇다면 구원은요? 이점에 있어 이사야 63:1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왜 구원자가 에돔에서 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이사야 34:6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륙을 행하심이라”

에돔을 크게 심판하는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시온에서 구원을 행하시는데 그 옷은 맹렬한 살육으로 인해 붉은 피를 그대로 입고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이래서 모든 인간은 다 심판받지만 시온, 즉 야곱은 특별한 혜택으로 인해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동행하시는 분이 또한 구원되지 못할 자를 봐주지 않는 심판주가 되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예레미야애가 4장 22절(에돔의 존재)2603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4장 22절입니다. 구약성경 1149페이지입니다.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아멘.

야곱,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매 맞았을 때, 아래에 있는 형제 나라 에돔은 아주 신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벌이 자기에게 올 거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온 인류가 망하고, 온 인류가 지옥의 심판을 받는 이것을 먼저, 일 번 타자로 매를 맞음으로써 먼저 정신 차리는 그게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작살나야 하죠. 죽는 것도 죄의 값이고 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왜 이렇게 착실하고 다른 욕심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왜 세상에서 하나님은 뜻대로 안 해주고 우리를 죽이고 아프게 하시고 가난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이스라엘만큼은 특화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그 이유를 인간이 명상하고 산에 가서 도를 닦는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말씀과 접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 공부, 원어 공부, 히브리어와 헬라어 이런 거 공부하면 되겠느냐. 말씀은 책에 있는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현상,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시시콜콜 일어나는 일이 말씀 사건이에요. 모든 게 말씀 사건이고, 어느 하나 말씀과 무관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몰랐던 일이 벌어지는 경우에, 그 사건을 추적해 보세요.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거기에 있을 거예요. “내가 일어나야 하기에 일어나게 해준다” 왜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너의 주제 파악이 안 되니까 그러죠. 자기 잘난체하고. 드라마 같은데 보면, 언니가 아르바이트해서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새로 산 옷을 본인이 몰래 입어요. 입다가 걸렸어요.

자매간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싸가지 없는 동생이 말하기를, “입어보니 나에게 안 맞더라”라고 하거든요. 당연히 안 맞지요. 언니 신체와 자기 신체가 같습니까? 안 맞지요. “입어보니 안 맞더라. 옷이 안 맞아. 그래서 내가 옷을 벗어 놓으려 했었어”라고 이런 이제 구차한 변명을 하는데,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과 이게 옷이 안 맞아요.

체형이 안 맞아요. 안 맞는데, 우리는 억지 억지로 이 세상을 그냥 어떻게 하든지, 그냥 살아내려고 무리한 짓을, 무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 맞으면 안 맞는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말씀을 안 보거든요. 말씀을 안 보고 그냥 욕심을 부리면서 안 맞는 것을 맞추려고 하니까 언니가 화내지요. 하나님이 화를 내세요.

말씀은 언니가 하는 말처럼, ‘그 원피스는 내 옷이야. 네 옷이 아니고 내 옷’ 하나님이 예수님을 입히려고 온 말씀을, 자기가 그 말씀을 입겠다고 하니 그게 무리수죠. 그게 억지스러운 거예요. 평생 살면서 억지스럽지 않을 때가 있던가요? 없어요. 모든 게 무리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성경 말씀을 볼 때, 이렇게 봐야 해요.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 자세는 시작을 이렇게 해야 해요. ‘내가 이상한 존재다. 내가 이게 정상이 아니야. 내가 뭐 이상해’라는 그거부터 출발해서 어디서 이상한지, 왜 이상한지, 정상과 이상한 나와의 그 격차,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거는 말씀을 통해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또 잊어버렸죠. 처음에는 뭐라고 본다고요? 내가 이상해. 내가 미쳤어.

출발점이 그것부터 해야 해요. ‘나는 정상이야.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라고 이렇게 하지 말고요. ‘난 저 사람보다 나았어. 나는 저 사람보다 못한 게 없어’라고 자꾸 남하고 비교하지 마시고, 성경 말씀 앞에서는 우리는 태어난 것 자체가 비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거는 부모도 손 쓸 수 없어요. 부모가 만든 게 아니고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비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왜 나를 낳았어요?’라는 이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따라서 이 이상한 내가, 이 세상은 말씀으로 하나님 뜻에 따라 정상적이에요. 근데 인간이 비정상이에요. 그래서 이 인간들은 세상을 살면서, 연세가 들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몸이 아플 때나 이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 고민거리가 생길 때, 이 세상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헤어지거나 떠날 수 없는 세상, 그래 세상은 엉터리야. 세상은 문제에 있어’라고.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발을 뗄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까? 코로나 때, 나는 마스크 안 쓴다고 버텼어요? 아니죠.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는, 마치 갇혀 있는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당연한 질문은 이래야 해요. ‘그러면 내가 문제 있고 정상이 아니라면, 그럼 정상은 뭐냐?’ 정상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처녀 시온아” 이게 정상이에요. 시온, 이스라엘,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후손이 국가를 만들면서 이름이 이스라엘 되는 거 아시죠? 야곱이 자기가 비정상인 줄 몰랐어요.

근데 밤중에 창세기 32장에서, 얍복 강가에 하나님이 찾아오고 난 뒤에, 자기가 정말 대단히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잘못된 사실 정도로 이게 시시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그 밤에 알게 되었어요. 살 수 없는데 그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살려주지 않고 이스라엘로 바꿔서 살려줘요.

이게 뭐냐 하면은 야곱은 본인만 생각했어요. 자기만 생각해서 내가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고 안 나오고 다 떠나서, 모든 인간이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본인만 최종적으로 잘 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거는 야곱 때고, 이스라엘은 내가, 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뭉쳐서 다니는 인생을 만들겠다는 그게 정상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에녹도 동행했지요, 노아도 동행했지요. 아브라함도 동행했지요. 이제는 야곱도 동행하면 야곱이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어서 동행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이냐? 야곱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야곱은 그 육적인 야곱 본인의 이름이고. 야곱이라는 그 비정상을 이스라엘이라는 정상과 같이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틈, 그 격차, 그 차이에서 야곱의 사명이 나와요. 야곱의 기능이 나오고.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의사고 야곱은 간호사고. 의사가 없다고 간호사가 진단서 내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간호사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정상적인 하나님이 무엇이 정상이냐 하는 것은, 비정상인 야곱이 자기의 육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아, 나는 아니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정상이다’라는 그 격차,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이유입니다.

그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예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늘 생각하지 않고, 늘 주님 생각 안 하잖아요. 성경 말씀 생각 안 하죠. 세상에 나갈 때, 그 야곱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지 않습니까? 진짜 발휘합니다. 남 만났다 하면 앞부터 앉으려고 발악부터 하는 거예요. 끝나고 나면, ‘이겼다’ 뭐 이런 거. 그게 야곱이 씨름한 이유예요.

‘나는 누구한테 지고는 못 산다’라는 이거잖아요. 그게 야곱의 본성이 아니고 아담에서 내려온 야곱 본성이 우리의 DNA에도 남아있는 거예요. 이거 비정상입니다. 게임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란하고 미국하고 전쟁하는데 다른 나라는 재미있어요. 왜? 누가 이기고 우리는 어느 편에 서면 되느냐는 지금 그거 하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기름값이 확 올라가고.

구경꾼 하다가 구경꾼 넥타이 붙들려 그 현장에 지금 끌려가게 생겼어요. 호르무즈 해협에 지금 우리나라 군함이 파견 요청받고 있습니다. ‘너희들 구경만 하지 말고 참전해라. 혜택만 보지 말고 너희들도 희생 감수하라’는 이런 판이에요. 그래서 지금 저나 여러분들이나 그 차이, 나는 죄인이라서 이런 저지레, 이런 실수투성이밖에 못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죄사함으로, 오늘 오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 자체가 일체 죄에 대해서 묻지 않고, 죽는 것도 묻지 않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도 묻지 않고, 하나님 자체가 우리를 생명으로 장악해 주는 것 그게 사랑이죠.

그게 바로 오늘날 동행의 효과입니다. 그걸 미리 보겠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5장 1~2절, 잘 아시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생명나무 과실, 선악과 과실, 또 이제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과실, 과실... 그러니까 인간은 우리는 태어날 때 주체로 태어났지만, 이거는 어디까지나 비정상인 마귀가 우리한테 교육시키고 세뇌한 거예요. 지금 손자가 초등학교 1학년 올라갔는데 걱정이 늘어집니다. 모든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이 주체 교육이에요. 네가 알아서 잘하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뭐냐? 열매 교육이에요.

‘주체는 따로 있다, 따로 있다, 따로 있다’라는 교육을 하는 겁니다. 네가 뭐 인생 망했다, 어렵다고 하는데, 왜 너는 열매인 주제에 네가 왜 나서냐고. 네가 너를 그렇게 가르쳐 주더냐? 너는 어떤 경우도 네가 책임질 수 없는, 그냥 대롱대롱 달린 열매예요. 오늘 낮에 열매 먹어 보셨지요? 딸기. 우리는 딸기 같은 존재예요. 우리가 농사꾼이 아닙니다.

자꾸 사적으로 완전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나의 열매를 걱정하거나 생각하지 마세요. 나의 열매는 누구와 대인관계에서 누가 잘났나 그거 할 때는, ‘내 열매와 네 열매 중, 누가 빨간 딸기냐?’라는 그거 할 때 하지만, 우리는 거저 받은 거예요. 거저 얻은 건데, 따로 내 인생, 네 인생이 어떠니 저떠니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에 대해서 질적으로 가타부타 네가 토 달지 말라. 어떤 열매든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인데, 그 열매의 기원이 뭐냐? 에베소서 1장에 그게 창세전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창세전이라는 문제가 로마서 9장 8절에 나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육신의 자녀, 다시 말해서 개별적으로 우리 가정에서 태어난 육신의 자녀는 잊어라. 육신의 자녀는 안 받는다. 뭘 받느냐? 약속의 자녀를 받는다고 했거든요. 육신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이스마엘이고, 약속의 자녀는 육신으로서는 이미 잉태치 못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그 하나님의 개입, 세 명의 천사의 개입 이후에 나타난 자식, 이삭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왜 등장하고, 이스마엘이 왜 등장하느냐에 대해서, 이스마엘은 거부당하고 저주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봤는데 그 이삭이 어떻게 잘하고 그런 건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똑같은 원리가 이삭의 아들들에게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오늘 본문의 에돔, 에서 나오고 그다음에 야곱 나옵니다.

방금 설교를 쭉 들어봤어요.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세상의 육체는 계시 없는 종자이기 때문에, 그거는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요. 이삭의 부인 리브가는 아기를 못 낳습니다. 계시의 개입 전에는 아기가 없어요. 계시 후에 아기를 낳아요. 그것도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뭐가 궁금하냐? 계시 후에 낳은 자식은 구원받습니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계시 후에 나타난 자식을 통해서 왜 육의 자식은 안 받는가 하는 이유가 나타나요. 에서는 먼저 맏이로 태어나지만, 상속권을 쥐고 태어나지만, 그 상속권은 박탈당하고 없어지고, 누구한테 그게 돌아가는가. 상속권이 없는 동생 야곱에게 상속권이 주어지는 이 원리가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을 모집하는 원칙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겁니다.

그때 야곱과 에서가 나오고, 에서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에돔이거든요. 에돔과 그리고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오늘 예레미야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벌받으니까, 누가 옆에서 좋다고, 고소하다고 여기느냐 하면은, 바로 에돔이 고소하게 여겼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이 벌받는 것은 복이고 은혜입니다.

왜? 결국은 모든 인류가 그렇게 될 걸 미리 앞당겨서 예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경험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그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거나 만나거나 사귀고, 한 가족을 이룰 때, 안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뭐 가봐야 알지’라고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나중에 가봐야 알지. ‘너는 나에게 뭐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마. 나 딱 듣기 싫어. 가봐야 아는 거야’ 그럼 우리는, ‘우리는 미리 알았는데’라고 하죠.

‘그걸 어떻게 미리 알아?’라고 하죠. 그러니까 이게 은혜, 은혜를 받은 거예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작살나는지를 미리 앞당겨 아는 자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이미 지나가 버렸어요. 이게 유월절이에요. 죽어야 할 것을, 양을 대신 잡아서 우리의 최후에 죽어야 마땅함을 알려 주듯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써, 예수님의 운명과 그리고 부활 후의 모든 삶이 바로 우리에게 예비적으로 미리 맛보게 하는 그 정상적인 동행의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같이 내주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는 말이, 대화의 모든 것이 다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참 잘 봐주셨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굳이 야곱 앞에 에돔이 설정될 이유가 없지 않냐고 생각이 드는데, ‘야곱아, 에돔은 버렸어. 야곱아, 너는 사랑한다’라고 이러면 끝나는 문제인데, 왜 에돔을 굳이 비교해서 야곱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느냐. 그것이 약간 어렵습니다.

약간 어려운 거, 이거 설명하고 마칠게요. 이사야 63장 1절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이 성경 본문을 보는 분들은 납득이 안 되는 이유가 구원이라는 것은 시온에서 오고, 구원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나타나는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잖아요.

맞습니다.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오는데, 그 출발점이 에돔에서 온다는 거예요. 이사야 63장의 예언에 의하면 에돔에서 와서, 시온에 와서 자기 백성을 건진다. 왜 출발점이 에돔이냐? 여기서 사람들은 참 굉장히 어려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왜 에돔이냐? 에돔 이거는 창세전에 저주받기로 돼 있어요. 아까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로마서 9장 10~13절에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거예요. 안양강의 제목이 이랬어요. [학실히! + 치아라!]입니다. 왜 이 사투리, 표준말은 ‘학실히’가 아니고 ‘확실히’ 예요. 왜 사투리인 ‘학실히’라고 했느냐. 제가 강의하는 김영삼이 흉내를 내면서 ‘학실합니다. 학실하게 책임지고’라고 했거든요. 마지막에 ‘치아라(치워라)’ 하는 건 뭐냐. ‘나도 그냥 네 남편이고, 네 아내니까 나도 같이 천국 넣어줘’라고 나중에 와서 심판받을 때, 손 내밀고 하면, ‘치아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시편 나와요.

‘치아라! 뭐 나중에 가봐서 안다고? 나는 미리 알았어. 이제 뒤늦게 뒷북치고 낌새 봐서 다리 하나 걸치려고? 치아라!’ 그 ‘치아라’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심판이죠.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냥 에서는 창세전부터 이미 지옥 가고 야곱은 창세전부터 천국 가면, 그걸로 끝나야 하는데, 왜 에돔에서 구원자가 오느냐는 이 말입니다.

그게 이사야 34장 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륙을 행하심이라” 에돔 땅에서 큰 살육을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모독했고 조롱했던 에돔 나라에서 그냥 큰 살육을 한 거예요.

칼로 이렇게 살육하다 보면, 그 칼로 베다 보면 거기에 뭐가 묻습니까? 피가 묻지요. 피가. 이스라엘 구원자의 옷에 피가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돔이라는 뜻이 뭐냐? 붉다는 뜻이에요. 야곱의 형 별명이 피부가 붉다는 뜻이에요. 마치 야곱이 붉은 피로 심판하는 것을 에돔에도 행하고 세상에 행하듯이 그리고 이스라엘에 행하듯이, 주님께서는 심판부터 먼저 실시하고, “전부 다 구원받을 자 없지? 있어, 없어? 없지?”

없다고 확정 지어 놓고 그다음에 그 심판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만을 골라서 건질 때, 에돔에서 한판 전쟁 치르고 작살내고, 그 힘에 근거해서 시온에서, 처녀 시온, 자기 남편으로서 처녀, 자기 신붓감을 고르러 오신다는 예언이 바로 이사야 예언입니다. 필요 없는데 필요 없는 게 아니고, 이 세상 사람들 지옥 가는 건 뻔한데, 그들이 필요 없는 게 아니고 지옥 가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을 감행하면서, 주님 만나기 전에 벌써부터 성도는 ‘주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구나’라는 낌새를 채는 그들이 바로 야곱과 관련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야곱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안 보면 본인이 굉장히 정상인 줄 알지만, 성경 말씀을 보고 이걸 보니까, 우리가 설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설치는 거예요. 주님이 설치니까 우리는 졸지에 야곱이 되고 비정상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찾아와서 성경의 이 현실을 우리의 현실로 일치시키면서 동행하시니까 우리가 이제 증거 할 것은 나 잘났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우리의 할 일이 생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활동만 생각하며 따지지 말고, 현재 이 시간도 주님께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 그것이 동행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마음 곳곳에 넘치도록 퍼져서 가득 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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