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잔불
2026년 3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4:11-13
4:11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4:12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4:13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렀도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하나님의 집을 부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쪽에서 철거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만들어내신 나라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손에 의해서 폐지되는 연유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도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그 이유를 밝힙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는 겁니다. 흔히들 나라가 망한 것이 왕 때문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기상하에 그렇게 나옵니다. 하지만 왕은 어디까지나 국가 단위에 포함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국가 단위를 언약적으로 새롭게 완성하는 것은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다가서십니다.
즉 특정 개인 단위가 국가 단위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똑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선지자는 극히 개인적인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아니하면 제대로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국가 정책상 율법이나 제도를 퍼뜨리기 위한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선지학교가 일찍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공무원들입니다. 국가에서 월급을 줍니다. 자연적으로 현 왕들의 정책에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결정한 바가 백성들 사이에 의견 분열없이 원활하게 깊이 적용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줄에 왕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는 바를 지적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왕상 22:6-8)
제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십일조하지 아니하면 굶어죽어야 될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십일조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 제사장들을 세워두신 겁니다. 이처럼 참 선지자나 제사장들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제사장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죽을 수 없는 없는 상황 속에 나타난 자들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이들의 계보를 따릅니다. 이들이 해야 할 것은 통과이며 그 목적지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곧 유일하신 ‘의인이 피흘리시는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모든 인간들은 가짜이고 엉터리임이 최종 폭로됩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과해서 예수님에게로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신발을 벗어나야 된다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이는 자기 주도 하에 통과해야 될 앞으로의 여정을 허락하시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4-5)
팝송에 이런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Embers of your name” 즉 너의 이름은 잔불입니다. 인간에게 불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자기 존재의 잔불로 여기셔서 모세와 더불어 움직이십니다. 불이란 인간이 감히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모세로 하여금 자기 존재 중심을 허락하지 않게 하는 상황입니다.
이점은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6:5-8에서는 불이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에게 사명이 부여되는 장면입니다.
우선 존재에 대해서 이사야는 새롭게 제공받습니다. ‘인간 있음’은 항상 ‘하나님 있음’을 훼방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경우, 자기 존재를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자인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전체가 망하는 자들이고 자신도 그 중의 일부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 존재로서 사명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화저에 있는 숯불에 의해서 악과 죄를 사함 받습니다. 죄라는 인간이 악마와의 관계에서 나온 효과입니다. 인간 존재가 이미 악마에게 매달려 있는 형편이라는 겁니다. 악과의 관계를 끊어내면 그때부터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죄가 자기 몸을 통해서 생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와 면은 형태상 달라보이지만 위상학상 같습니다.
하지만 도넛같은 것은 구(공)하고는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 가운데 구멍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존재 한 가운데를 제단의 숯불을 지지므로서 구멍나게 만들고 그 빈 자리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가 이사야의 존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라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존재), 제가 가겠습니다.(사명)‘” 받듭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3:6-9에 보면,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악(=악마)로부터 풀려났기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존재에 구멍이 났으며 그 구멍의 효과로 자신이 하던 모든 것이 ’죄‘라는 이름의 배설물인 것을 압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만이 의인됨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경우라도 새언약 안에 예수님의 피와 살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예레미야애가 4장 11~13절(피의 잔불)2603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4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1149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아멘.
예루살렘 성,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그 부동산의 소유주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불을 질러 버린다는 이 모순. 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시온을, 친이 세우신 시온을 불살라서 없애버리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라고 딱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로 인하여 백성들도 같이 망한다.
그러면 여기 왕의 죄, 우리가 보통 구약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이나 유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그 선지자의 잘못이나 제사장의 잘못이 아니고, 왕의 잘못으로 열왕기 상하와 역대 상하에 그렇게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사람들은 누구 탓을 하느냐면, 지도자 탓을 해요. 그 지도자가 뭐냐? 대통령이 제대로 정치를 해주셔야 합니다.
왜 대통령이 정치를 잘해야 됩니까? 왜? 그게 수상한 거예요. ‘대통령님이 참 대통령답게 잘 해줘야 합니다’라는 그다음 말이 없어요. 왜?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내가 잘되어야 하니까. 내가 잘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정신 사고가 자신의 행복을 빼고 이야기하지를 못해요. 다른 재주가 없어요. 다른 기술이 없어요. 나는 불행하면 안 돼요. 왜?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나는 아프면 안 돼요. 왜? 이유가 없어요. 내가 왜 아프면 안 돼? 남은 아파도 나 아프면 안 되는 이유가 뭔데? 없어요. 좀 더 욕심을 내시죠. 남들은 한 해 지나면 나이 먹는데, 절대로 나는 10년이 지나도 나이 그대로 여야 한다는 뭐 이런 고집 같은 거 좀 부리세요. 좀 더 노골적으로. 연세 얼마입니까? ‘연세가 70인데, 30입니다’ 이런 거. 그거는 왜 주장하지 않지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사명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없습니다. 지금 선지자, 제사장, 이 사람들을 구박하는 것은, 왕은 제도적이에요. 정치적이고 제도적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왕 같으면 아들이 왕이에요. 굳이 사명을 논할 자격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사명이에요. 사명 없으면 거짓 선지자 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어떤 사람이 왔느냐 하면, 세상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사명 받은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그냥 놀던 대로 노세요. 그냥 당신은 신학교 갔으니까 직업 하나 가졌네. 무슨 직업? 목사. 목사로서 그냥 목사질 해서 사세요. 주님께 간섭하지 말고’라는 그런 식입니다. 제가 어떤 강의를 했는데, 울산 강의에서 했어요.
말씀에 대해서 제일 관심 있는 시기가 목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에요. 신학 교수도 아니에요. 목사도 아니고 신학 교수도 관심이 없어요. 신학교에서 가장 관심 있는 사람은 신학교 1학년생들이에요. 1학년생들. 왜냐하면 방금 기도원을 거쳐서 왔거든요. 감람산 기도원에서 ‘주여, 이 목숨 바쳐 아골 골짜기도 복음 들고 가고’라고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찬송가 355장-부름받아 나선 이 몸)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주저 없이 가겠습니다. 20년 동안 한 번도 안 불렀던 찬송가인데요. 그 가사를 잠시 볼게요. 가사에 보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이걸 누가 막습니까? 신학교 2학년이 막아요. 요거는 1년 차입니다.
1년으로 끝나서 신학교 2학년 가게 되면, 우리 동기 가운데 누구는 큰 교회 전도사로 초빙받을 때, 전도사로 초빙받으면서 그 사람은 취업이 된 거예요. 조기 취업이죠. 부러워 미쳐요. 조기 취업이 되면 4대 보험 주지요, 이제는 자기 사모님한테 할 말이 생겼어요. 이제 백수 끝. 잘만 버티면 다른 교회 부목사로 초빙받고, 그다음에 당회장 되면 당신은 나하고 결혼 참 잘한 거야. 이제는 밥 먹고 사는 거야. 애 키우고, 남들처럼 피아노 레슨도 시키고, 남들처럼 할 만큼은 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뭐가 날아갔습니까? 신학교 2학년이 뭘 삼켰어요? 사명을 삼켰습니다. 그것을 누가 아느냐. 교인들이 알아요. 교인들이 안다고요. 교인들도 귀신 들린 사람이거든요. 귀신 들린 사람이라서 아주 귀신같이 다 알아요. 왜 선지자의 죄와 제사장의 죄인가.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땅이 없어야 해요. 그다음에 부동산 재산이 없어야 해요. 그냥 뭐로 사느냐. 십일조로 사는데, 십일조를 안 낸다.
제사장 끝입니다. 제사장의 사명은 십일조 없는 바닥에서 굶어 죽는 게 사명이에요. 백성들이 십일조를 안 낸다는 사실을 주께서 뻔히 아시고 모든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치라는 율법을 주신 것은, 그 두 개가 아다리, 만남으로 인하여 제사장은 결국 죽음으로써 제사장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선지자도 마찬가지고요. 이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 학교가 생기면서, 사명 있는 선지자와 사명 없는 선지자들 사이에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명 없는 선지자는 국가 공무원으로서 국가에서 월급이 나오고, 사명이 있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로부터 핍박받는 상태에 놓여서, ‘이 사명 감당할래, 굶어 죽을래?’를 양단간에 압력받는 자리가 참 선지자입니다. 400대 1. 미가야 선지자는 400대 1이었어요. 엘리야는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나무 밑에서. 그 까마귀 없었으면 그날로 끝났어요. 까마귀가 물어다 줘서 살았죠.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의 핵심은 이거예요. 지금 건물이 문제가 아니고, 제사 제도가 문제가 아니고, 제사를 몇 번 해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 인간이 뭐가 문제냐. 인간은 자기 자리가 지옥인 줄을 모르고 있다. 내가 있는 자리, 태어난 자리가 언약을 핍박하고 언약을 무시하는 자리이고, 그러한 권력 안에서 인간은 태어났습니다.
곧 인간은 지옥 출생자들입니다. 지옥에서 나왔어요. 지옥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지옥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그걸 알 수 있는가? 사명이 있는 선지자가 애꿎은 순교를 당할 때, 그게 오늘 본문에서는 의인의 피라고 했어요. 오늘 13절에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의인인데 미움을 받아서, 처참하게 피 흘리면서,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모습, 그냥 곱게 죽는 게 아니고 망가진 모습으로 죽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그러한 예가 되겠죠.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거예요. 심지어 이 길로 가야 구원받는다고, 천국 간다고 아무리 외쳐도, 100이면 100명이 그 말을 들었어도 안 갈 수밖에 없는 길이 바로 이 의인의 피예요. 피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겁니다. ‘피가 현실이다’ 그냥 피가 아니죠. 예수님의 피가 곧 현실을 쫙 퍼뜨렸다. 현실을 짜냈다.
공장에서 하나의 실이 섬유를 짜듯이, 섬유 공장에서 섬유를 짜내듯이 피가 흐르고 흘러서, 이 세상은 피로 짜인 언약의 세계를 주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어느 팝송의 제목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Embers of your name’이라는 이 노래의 가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Embers of your name, 당신 이름의 잔불. 잔불이라 하는 건, 불이 타고 난 뒤에 불이 꺼졌잖아요. 불이 꺼졌는데, 거기에 잔불이, Embers, 불의 잔불이 퍼지는 거예요.
출애굽기 3장에 떨기나무 같은, 떨기나무의 그거 같아요. 하나님께서 불로써 나타나고 하나님 스스로 불이면서, 그 불의 잔불 하나하나가 퍼져 나가는 그 잔불, 잔불이 모세부터 나오죠. 모세가 그 떨기나무에 다가갈 때 뭐라고 하냐. “신발 벗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에 너 자신의 존재가 방해돼서는 안 된다. “신발 벗어라” 신발 벗고 너는 아까 제가 말한 팝송 가사에 의하면, 너는 내가 불이면, 내 불에 남아 있는 잔불이어야 한다.
불의 조각 조각이어야 한다. 그러면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무슨 관계냐. 너는 감히 불 앞에서 죽었다는 것을 먼저 알아라. 아는데, 죽었는데, 주님의 사명이 죽은 나를 살리죠. 나는 늘 증발하고, 증발할 때마다 나의 사명은 불타오르듯이 다시 타오르고, 이게 성도의 일상의 삶이잖아요. 그래서 그 사명의 내용은 뭐냐? 사명의 내용은 세상을 통과하는데요.
그렇게 통과할 때, 어디로 통과하냐. 막다른 골목을 바라보면서 통과하는 거예요. 나만 죽을 수 없다는 이런 뜻이죠. 내가 하나님의 잔불로써, 가면서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은, 말 타고 가면서 외친다고 봅시다. 서울 강남에 어딘가 가면, 그 밤중에 이태원이라든지 어떤 유흥업소에 난처한 그림이나 사진들이 있는 유흥업소 광고 딱지를 오토바이 타고 가면서 뿌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요새는 많이 구속되고 했는데, 그 오토바이 타는 모습을 보면, 오토바이 타면서 가는데 뭐가 휙휙 날아오는 거예요. 통과하는데, 통과하면서 ‘이리로 오세요’라고 하면서, 유흥업소 여자들 활동하는 그걸 소개하듯이, 선지자는 그냥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라는 그것을 막 뿌리는 거예요. 그걸 감당해야 해요.
이사야 6장에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이것을 연관해서 다시 한번 봅시다. 우선 불이 나타나요. 이사야 6장 6절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옵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숯불이 붙어 있는 그 숯을 내 입에 딱 대니까, “네 악이 제하여졌고” 악이 제하여 졌어요.
참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요. 내 죄가 사해지는 게 아니고, 내 악이 사해지는 거예요. 죄와 악이 구분되는 거예요. 악은 악마고 죄는 악마의 영향력 때문에 나의 몸에서 습성으로 파급되어 나오는 그 악의 잔불이 죄가 되는 겁니다. 악의 잔불이. 주께서는 어디를 하느냐 하면, ‘앞으로 죄짓지 마라. 바르게 살아. 말씀대로 살아야지’라는 이걸 규정하는 게 아니고 나의 몸에서 나온 이 죄, 이 죄의 근원이 되는 악, 악마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이걸 죄와 악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요. 로마서 6장 2절 같은 경우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라고 할 때는 죄악을 의미하는 겁니다. 일부러 구분하면, 죄와 악을 구분해야 하지만 보통 같이 봤어요. 하여튼 그 악마의 관계를 끊어버려요. 그러면 악마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은, 끊었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우리의 행함을 통해서 아는데, 우리의 행함은, 인간의 행함은 홀로 서는 방식입니다.
홀로 서는 능력이 행함이에요. 인간의 행함은 마귀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악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기에, 항상 홀로서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다 필요 없어요. 나 혼자 서면 그걸로 그게 친밀하고, 그것이 적합한 내 삶의 모습이에요. 아주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홀로서기를 하는 거. 결국은 여기서 그 제단의 불이 이사야의 악을 제하여 버려요.
악을 제해놓고 이걸 죄 사한다고 해요. 같이 쓰니까요. 악을 제해놓고, “네 죄가 사해졌다” 이제 죄와 악이 어떻게 연관되는 건지 아시겠죠? 악이 악마이고 악마로부터 끊어진 거예요. ‘이미 아시겠죠?’라고 할 문제가 아니고, 좀 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9절까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지금 사도바울이 교회 핍박을 많이 했어요. 3장 5~6절을 잠깐 보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이것이 출처가 어디냐 하면, 악마가 출처였다는 사실을 그때 악에 속했을 때는 이걸 몰랐어요.
자기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줄 알았어요. 진짜,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게 사탄에 속한 일인 줄 몰랐어요. 이게 나의 의인 줄 몰랐어요. 한국교회가 다 그러니까, 그렇게 다수가 하는 것이 진리인 줄 알았지요. 문제는 자꾸 교회 탓이고, 세상이 나쁘고, 교회가 바르게 해야 하는데, 근본적으로 뭐냐?
그렇게 ‘교회는 바르게 해야 해. 한국교회는 대통령을 잘 만나야 해. 잘 찍었어야 해.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는데, 문제는 내가 악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왜 그동안 몰랐냐는 이 말이죠. 지금 남 문제가 아니고 나예요. 이사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망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이사야에게 다가와서, 이사야 개인의 문제라고 지목하면서 숯불이 날아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사야가 하는 말이 “내가 많은 백성 중에 나도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거든요. 저쪽이 잘했다가 아니라, 나도 같은 한 통속이라는 것을 인정해 버렸어요. 왜? 몸이 그러니까요. 나의 몸은 내가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서는 이 능력, 그거 외에는 자랑할 게 없을 정도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모든 결정을 내가 하는 거,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게 막상 하나님의 성전에서 만나보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악이요, 말도 안 되는 죄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라는 그런 고백을 할 때, 그다음에 사명이 나와요. 그렇게 해놓고, 이사야 6장 8절에 보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건 뭐 주님께서 괜히 아시면서 둘러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말이야 나를 위하여 누굴 보내지? 누굴 사명자로 보내지?”라고 하니깐, 이게 죽이 맞죠. 이사야 하는 말이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존재에 대해서 선행하는 존재, 자기가 자기 존재의 출발점이 아니고 내 존재를 존재케 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먼저고,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이 계셨던 그 활동성이 나에게 닥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성이 나한테 이입이 된 거죠. “나, 여기 있습니다”가 성립되면서, 그다음에 “나를 보내소서, 내 안에 주님 계심으로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런 뜻이에요.
‘내가 있으니 내가 목회하겠다. 목회하겠다. 내가 뭘 하겠다. 전도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신앙생활 하겠다’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성에 근거한 거, 그냥 내가 뭘 하겠다가 아니라, ‘나를 그냥 보내소서. 그냥 원통으로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자기는 뭐냐? 자기 존재는 거기서 빠지지요. 사명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옛날 자아를 새로운 자아가 매일 구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빌립보서 계속 이야기한다면 그랬던 내가,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에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 안에 있는 새로움으로 인하여, 옛날 내 안에 있었던 나, 그때는 뭐 마귀에 속해 있는 줄도 몰랐죠. 그냥 내 안에 내가 있는 줄 알았죠.
내 안에 있는 나, 절대적인 자아한테 복종했던 주체, 어렵게 말하면 나에게 복종하는 식으로 이 사회에서 말하는 주체가 활동했던 나를, 새로운 나가 뭐로 여긴다? 똥으로 여긴다. 오물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 이게 바로 사명감입니다. ‘딱 기다려. 내가 전도해 줄게’라는 이게 사명이 아니고, 사명은 내 안에서 계속해서 작동하는 겁니다.
내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거예요. 사명이라는 게. 남 이야기할 거 없이 ‘너나 잘하세요’라고 그러는 것처럼, 내 안에서 주님의 존재가 활동하면 사명자고, 내 안에서 내가 활동하면 사명자 아니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이거예요. 의인의 피인데, 그런 의인이 왜 죽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명자다. 사명자 티내려 하면 어떻게 하느냐. 사람들아, 날 좀 핍박해 줘. 핍박 좀 해줘’
금요일 날, 이상규 집사님 장례식장에 가니까, 질문을 해요. ‘목사님의 옛날 박사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걸 들었다. 박사 교회에 전하신 그거 다 들었는데, 지금과 차이점이 뭡니까?’라고 물으셔서, 제가 답변했어요. 옛날에 박사교회 있을 때나, 또 옛날에 복음 전할 때는, 기존 한국교회가 썩었으니까, 그 썩은 것을 외치면 그게 복음인 줄 알았습니다. 옛날에는. 그리고 그 썩은 것을 내가 두고 볼 수 없어서, 우리 십자가 복음만이 옳다고 외쳤다 이 말이죠.
이게 사명이니까. 그때는 그런 복음이었는데, 지금은 한국교회가 썩었다고 외쳤다는 그게 복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피가 현실이지, 내 속에 작동하는 이 나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하시는 그 주님의 피가 현실이지, 복음 전하는 내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나를 핍박을 해야 하는데, 나는 바른 소리를 했다는 걸 자부하는 그 자세가 또 복음의 반대자였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 멋있어 보이지만, 그 내용에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근거가 바로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여기 고린도후서를 내가 언급하면서, 의인의 피를 언급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아무도 바른 복음 전한다고 핍박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의인의 피는 아니라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스데반이 피를 흘리는 거 맞아요.
사도바울이 순교한 건 맞지만, 그 어떤 인간의 순교도 예수님의 피를 대체할 수는 없고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이요, 예수님 피만이 새 언약이지, 같이 걷는다고 해서, 같이 그 언약의 피에 끼어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의인의 피는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끝나는 겁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화목 제물이 되지, 그 외에 예수님 때문에 순교했다고 ‘나도 끼워 넣어주세요’라는 그런 거는 안 됩니다. 어디 거기다가 건방지게 끼어들어 갑니까? 못 끼어들어 가요.
형태는 비슷해요. 예수님도 순교하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의인들이 많이 순교해요. 순교하는데, 수학에서 구와 면은 형태상으로는 달라도, 위상학 상으로는 똑같다고 해요. 구도 면적이고, 면도 면적이고, 동그란 구도 면적이 달라붙으면, 축구공이 그런 식으로 면적을 둘러쳐 붙인 거잖아요. 이거는 보면 평평한 것과 동그란 것처럼 형태는 달라 보이지만, 따져보면 전부 다 동일해요.
그런데 다른 게 있어요. 도넛. 도넛의 특징은 뭐냐 구멍이 뚫렸어요. 우리의 존재에 화저(부젓가락.). 제단에서 날아오는 피가 우리를 구멍 뚫어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나한테 사명을 주면 안 돼요. 내가 나한테 지시하면 안 돼요. 내가 나한테 명령하면 안 돼요. 내가 나한테 판정하면 안 돼요. 옳고 그른 그거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도넛의 특징은 뭐냐? 구멍 뚫린 거예요.
갑자기 던킨도너츠가 먹고 싶네요. 구멍이 휑하게 뚫려야 해요. ‘누구세요?’라고 하면 나는 구멍 뚫려서 나라는 게 없습니다. 거기 뭐 있던데? 그건 배설물이고. 구멍 뚫린 분이, 구멍 뚫린 분으로서 기존에 ‘나’가 있었던 그 안에서, 그 악과 죄의 배설물을 생산하는 그 역할을 주님이 하시고, 우리는 그걸 가지고, ‘누가 그렇게 했는가?’ 주님의 십자가 피, 피만이 현실이니까, 현실이 흘러넘쳐서 내가 그렇게 구멍 났다는 사실을 전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선지자, 성도입니다.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와요.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잠깐 보면,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다음에, 그건 당장 선언이 아니고 뭔가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해요. 뭐가 들어와야 하지, ‘좋다’하고 끝나면 안 되고, 그 근거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죄를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가 죄라는 것을 규정하시면서 우리에게 들어오신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우리는 ‘의’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 의인의 피의 효과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신하신 분의 효과로써, 그분이 의인이고 그분의 피가 하나님의 완전한 새 언약의 근거라는 사실, 이것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는 새로 세워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오래 교회 다녔다고, 성경 좀 안다고 해서 의인이 아니라, 애초부터 의인이 된 적도 없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의로 인하여 만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