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위력
2026년 3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4:1-6
4: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4:2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워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4:3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4: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4:5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4: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인간들은 자기 처지에 몰두합니다. 가까운 환경은 마치 자기에게 전적으로 협조되어야 마땅한 환경이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러다 보니 자꾸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인지를 자꾸만 놓칩니다. 단지 찡찡거리기만 합니다. “도대체 언제쯤 내 삶이 확∼펴지겠습니까”라고 항의성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근원적으로 인간 속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 들어가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입니다. 이게 들어가면 인간은 더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아니. 짐승보다 못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오늘 본문에 인간을 대비해서 짐승이 나옵니다. 그것이 타조입니다. 광야의 타조는 알을 낳고서는 무책임하게 내팽개지고 내몰라라 하면서 현장을 떠납니다. 참으로 야속한 어미 타조입니다. 하지만 유다 나라에 덮쳐진 환경은 소위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을 이런 짐승과 같은 레벨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유다는 그 원인을 모릅니다. 자기 안에 들어있으면 안되는 것이 들어 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자꾸만 환경 탓하고 하나님 탓합니다. 즉 자신들이 뭔가 잘못된 게 있으면 알아서 시정하고 반성하는 식으로 이 재앙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쉽게 말해서 현 유다는 이 세상을 떠나야 될 세상인 것을 모릅니다.
그냥 이 세상에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도 행복하게 말입니다. 선악 의식은 각자의 마음 안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웁니다. “착하게 살면 복받고 나쁜짓 하면 벌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논리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성전이 하나님께서 부추기신 이방민족의 손을 통해서 불태워버리는 이유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이 계신다는 그 건물을 전소시키시는 이유를 알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전소하는 식으로 자신이 새롭게 되는 방식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처참하고 황폐한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예언 때문입니다.
예언은 인간이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언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킬 때, 인간들의 손에 맡겨진 것과 어떤 차이가 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들어온 선악 인식에서 도저히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 정신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최후의 방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방마저 깨뜨리므로서 인간이 어미 값도 제대로 못하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타조가 자기 알을 방치하듯이 심판받은 유대도 자기 자식에 대해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 안에서 무능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같은 무능함이 유다인에게, 혹은 오늘날 성도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은 애굽 나라에서부터입니다. 자연스럽고 곱게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폭력을 동반했으며 심지어 막상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 히브리인들 본인조차 애굽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애굽을 마치 자신이 기거할 최후의 방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익숙하게 지내오고 있었던 겁니다. 즉 비록 힘들지만 이 거대 국가 애굽을 떠나서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한 겁니다. 비록 힘든 애굽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람다운 가치는 유지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아직도 자신의 본모습에 대해서 무지한 겁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예전의 ’나‘를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우기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압박의 공세를 가중시키십니다. 학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서 히브리인들을 따로 특별관리해 주시겠다고 낌새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출 9:25-26) 문제는 그들이 애굽을 떠나 정착할 땅에 참으로 모호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들의 현 그들의 고통에 대한 보상책으로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자기에게 돌아올 행복의 분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그동안의 고생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지 모호했던 겁니다. 그런데 마음 자세가 여전히 안에 선악의식이 안 지워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을 마지막으로 가로막고 있는 최후의 막은 인간 자신들이었던 겁니다.
이러한 경향은 야곱의 두 아내에서도 보입니다.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창 30:14-16)
합환채는 임신능력을 증강한다고 소문난 식물입니다. 결국 인간은 선악을 따기지 이전에 자신의 욕망조차도 이기도 못합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욕망이라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면 선악의식으로 그 욕망을 뚫어보려고 헛된 수고를 한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예언은 몽땅 예수님이 다 가져가시고 인간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욕망을 뚫어 아버지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선악의식이 장착된 그곳은 같은 인간의 환경으로 찢겨나가게 하시고 이 과정에서 성도는 자신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임을 파악하게 됩니다. 또한 무능한 자로 인식됩니다. 근원적으로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일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떻게 해서 구원이 될까요?
그것은 바로 말씀 자체가 지닌 예언의 능력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 예언을 가지고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가심으로서 십자가라는 생명 사건만이 모든 예언의 완성인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예언의 완성‘이 선악과 있는 자리를 대체하시므로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데 성공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착함으로 주님의 예언 완성이 가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예레미야애가 4장 1~6절(예언의 위력)2603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4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149페이지입니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아멘.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방 민족,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에 의해서 잿더미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분이라는 그러한 등식, Equal(=), 그 방정식이 다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행복을 주는 분이 아니고, 비극을 주고 불행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받아주기에는 선뜻 자신의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거예요.
‘나는 우리를 저주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옥 보내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라는 이게 인간의 입에서는, 이 두 모순된 내용이 좋게 좋게 나오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간격이 생겼거든요.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은 멸망인데, 우리는 은근히 하나님에 대해서 행복이 보장받기를 원하는 이 틀어진 잘못된 개념의 하나님을 어떻게 일치시키느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해답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면서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우리도 같이 해답을 모르면 안 되겠죠.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에 신약이라는 해답이 있기 때문에, 해결이 가능합니다. 어떤 식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신구약을 통해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현실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근데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니까, 불행이 온 것은 죄 때문에 왔고, 이 죄는 내가 행동을 잘못하고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 자체가 잘못됐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몰라야 한다고 한 그거, 네가 몰라야 한다는 그것을, 마귀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착한 자는 복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그러한 생각이 이거는 하나님께서 준 게 아니에요. 인간은 그거 몰라야 해요. 몰라야 하는데, 인간의 심보 안에 그게 들어 있다고요. 그게 하나의 마음 형태로서, 프레임으로서 들어있어 버렸어요.
무슨 행동을 해도 ‘이거 내가 나쁜 짓에서 벌을 받는 게 아닌가?’ 또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역시 착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고 복을 주게 돼 있어’라고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마귀가 사주해서 그래요. 마귀가 집어넣어서 그래요. 그러면 방법은 그걸, 착한 일만 하면 복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이걸 빼야 해요.
이걸 삭제시켜야 합니다. 삭제시키는데, 이걸 삭제하는 데 있어서, 같이 삭제되는 게 누구냐 하면은 우리 자신입니다. 이걸 우리 자신을 남겨놓고 이러한 생각과 의도만 따로 뽑아낼 수가 없어요. 이미 우리는 한통속이 돼 있기 때문에, 그 선악 구조를 찢으면서 우리도 같이 찢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은 바로 출애굽 해서 생긴 나라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생긴 나라예요. 그러면 애굽에서 그들이 ‘우리가 이제 애굽에서 나오자’라고 이렇게 회의해서 나오기로 했었냐.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안 나옵니다.
그들은 나오면 개고생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이 잘 살 때, 자진해서 미국 시민권 포기한 사람 없습니다. ‘난 미국 시민권 포기하고 나이지리아로 가든지 안 그러면 저 이란으로 갈게. 이란 대통령 죽고 국방부 장관 죽고 다 죽어버렸는데, 나는 이란 가서 살래. 아니야, 나 미국 포기하고 북한 갈래’라고 이런 사람은 없어요.
사람이 어디로 옮길 때는 더 잘 사는 동네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더 잘 사는 동네에서. 자식들이 가끔은 부모한테 이런 생각을 해요. ‘왜 나로 하여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게 했는가’ 그건 뭐 달리 말해서 ‘엄마는 왜 나를 만들었습니까?’라는 이 질문,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게, 엄마가 만든 게 아니에요. 엄마라는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었죠.
애매한 사람 보고 자꾸 따지지 마세요. 내가 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라는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 낸 거지, 엄마가 나를, 아빠가 나를 만든 게 아니에요. 그때는 아빠 엄마도 답변 제대로 하세요. ‘내가 안 만들었다. 자꾸 나한테 윽박지르지 마라. 내가 안 만들었다. 나는 네가 밥 달라고 해서 밥 주고, 젖 달라고 해서 젖 먹이고 그랬을 뿐이지, 내가 젖 먹이고 밥 주면서 한 번도 너는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라고 이렇게 부모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못 해요. 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에. 너는 내 거라는 생각을 했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금껏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오늘 본문에 보면 타조 이야기 나옵니다. 타조가 여기 3절에 보면,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이 광야의 타조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가?
타조는 알을 낳아놓고 도망쳐요. 아주 잔인한 거예요. 새끼 낳아놓고 자기는 나 몰라라고 도망칩니다. ‘네가 알아서 깨든지 나 모르겠다’라고 도망쳤다고요.
물론 풍족할 때는 모르지만, 이 광야에서 자기 먹이 얻기가 힘들 때는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타조 저거는 짐승이지만, 진짜 짐승 같아. 어떻게 자기 새끼를 버리느냐’라고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 3절에 보면,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4절에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사람이 사람이면 사람 구실을 해야지, 세상에 짐승보다도 못한 게, 어떻게 자식이 배고픈데 어미가 자기만 먹고 자식은 내팽개치냐. 너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이야. 정말 짐승 같아’라고 아직도 욕하는 것은, 아직도 인간의 밑바닥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짐승만도 못합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해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인간이 자꾸 인간인 척한다고 했는데, 인간인 척해 봐야, 인간은 인간인 척한다고 인간이 인간 되는 거 아니에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이 인간의 가면을 쓴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주변에 사람 같은 행동을 하고, 사람 같은 그러한 태도를 보이거든, 고맙게 여기셔야 합니다.
‘저게 짐승인데 왜 사람 같은 행동을 하지? 이건 주의 은혜다’라고 이렇게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해요. 자신의 그 짐승 같은 본성 나온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놀라지 마세요. 인간은 그게 본모습입니다. 이게 냉혹하지만, 성경은 이미 인간은 짐승만도 못하다고 성경에 예언돼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해서 짐승보다 못하다고 이미 성경에 예언돼 있거든요.
그래서 이게 해결점은 뭐냐. 어떻게 선악 논리를 내게서 빼낼 수 있는가. 그것은 말씀이 예언으로 찾아와요. 예언으로 찾아오면 예언이 예언대로 되어버립니다. 아침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고 했잖아요. 세 번 부인한다고 할 때 베드로는 장담하면서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했어요. 베드로가 이제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왜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냐 하면, 베드로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의 사랑이라든지 결심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에 예언의 위력을 놓쳐버린 거예요. 예언의 위력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그렇게 부인한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하고 빠이빠이 된 상태에서, 예언 자체가 찾아가야 해요. 예언 자체가.
베드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에게 찾아간 그 예언의 말씀이 구원될 때, 덩달아 베드로에게 선악과가 떨어져 나가고 예언의 말씀이 붙어 있으면서 그렇게 덩달아 베드로가 구원받아요. 세상에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이라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구원받지 못해요. 그런데 뭔가 들러붙어요. 하나님 예언의 말씀이 들러붙는다고요.
예언의 말씀에,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예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학대받는 자의 경우에만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 학대하는 자는 누구냐? 애굽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는 이스라엘 아니고 히브리인들이죠.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면서, ‘야, 우리끼리 탈출하자’라고 이렇게 인간은 사는 환경에서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사는 환경이 그 사람의 전부예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이 동네 말고 다른 동네 가자’라는 이런 생각이라는 것은 인간 머리에는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그 히브리인들이 악을 쓰고 참으면서, 애굽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좀 완화되기를 하나님께 요청했는데, 하나님께서 막상 찾아서 보내신 예언자는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잘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온 게 아니에요. ‘떠나자’입니다. 여기서 누가 반대를 했는가?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어요. 우리가 그동안 살았던 이미 익숙했던 이 환경을 떠나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너나 가라’ 안 갑니다. 못 갑니다. 아니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불확실한 세계에 투기할 수가 없어요. 모험을 걸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그들은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자기에 대한 신뢰와 믿음도 애굽이라는 조건, 그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그 바깥에 나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낌새를 줬는지 10가지 재앙을 내리면서 “그거 봐. 애굽인이 사는 동네는 다 이렇게 재앙을 받았지만, 우리 고센 땅, 우리 히브리인들이 사는 동네는 재앙도 안 내렸잖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걸 통해서 특별 대우하시니까, 그만 하나님 말씀 듣고 떠나라고 할 때 그냥 떠나”
히브리인들은 안 떠납니다. 아니 못 떠납니다. 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어요? 보지 않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떠날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하면, ‘천국 가자’ 안 갑니다. 그럼 뭘 하느냐. 교회 다닐래! 천국 가는 대신 은혜로운 교회 다니기를 원해요. 왜? 그 교회에 자기 존재의 기반이 있기 때문에, 존재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이 세상의 환경을 떠나는 것을 최후의 마지막 공포로 느낍니다.
못 떠납니다. 이게 못 떠나는 이유가, ‘착하면 되잖아, 바르게 살면 되잖아, 하나님 말씀대로 훌륭하게 살면 되잖아’ 계속 선과 악, 선과 악이 작동해서, 바르게 살면 복이 올 거고, 바르게 살면 나중에 천국 보내준다는 선악 구조가 안에 자리 잡아서, 이게 어떤 경우라도 뜯겨나가지를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예언 했어요. 히브리인들을 하나의 점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점으로 만들어요. 점은 지점이 없어요. 지점이 없는 지점이 점이에요. 점인데 질량도 없고 크기도 없고, 없어요. 없는데 그냥 점이에요. 점이 있다는 말은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점이라는 것이 찍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끝까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점이 되기를 싫어하고 마지막에 그들이 가는 곳은 뭡니까? 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방을 원해요.
‘Room’, 방. 젊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원룸, 원룸 얻어서 독립하는 거예요. 원룸이 뭐냐. 룸. 방이잖아요. 내 방. 집에 강아지도 자기 방이 있는데, 자신은 자기 방이 없네. 내 방이 없어. 집 안에 방이 3개나 있는데, 방 하나 준다고 해도 싫어요. 내 방. 아무도 눈에 띄지 않고, 부모도 눈에 띄지 않는 내 방. 부모는 그냥 월세만 다달이 보태주고, 나 혼자 독립하는 내 방, 그 방을 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유대인들, 멸망한 이스라엘은 끝까지 우리가 최후로 살 수 있는 마지막 나의 방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방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 방 자체도 있음이 되거든요. 여러분께 질문 던질 테니까 속으로 한번 답변해 보세요. 텅 빈 것과 가득 찬 것, 어느 것이 환상에서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방식이 되겠습니까?
가득 찬 것과 텅 비어 있는 거, 어느 쪽이 나의 환상을 깨뜨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되겠습니까? 텅 빈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점(點), 텅 빈 이 텅 빔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순환하게 만들었어요. 공백의 순환, 빈터의 순환입니다. 빈터가 자꾸 순환하는 거예요. 저 경주에 가면 포석정이 있죠. 포석정에 가면 술잔이 있습니다. 술잔이 이렇게 자동으로 흐르며 돌게 돼 있어요.
귀족들이 차례로 술잔을 옆으로 흘려보내며, 술을 먹잖아요. 회전식 부패 식당처럼. 어떤 사람은 무한 리필 회전식 일식집에 가서, 70접시를 먹었답니다.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일식집에서 고발한다고 올렸는데, 그러니까 무한 리필을 왜 해서. 양쪽에 35접시씩, 70접시 올려놨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한 이유가 이 세상을 떠나는 기쁨이에요.
이 지옥과 헤어지는 기쁨이 바로 가장 큰 기쁨인 것을 계속 모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메시아이신 분이 오셔서, 아버지께로 갈 때 이 세상을 떠나서 만났거든요.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떻게 떠났느냐. 학대받으면서 떠났어요. 이게 출애굽이에요. 출애굽. 그런데 그 출애굽 할 때 히브리인들은 가기 싫은데 억지로 나왔어. 억지로. 그 출애굽을 아는 사람은 그 당시에 모세밖에 없었습니다.
나와서 맨날 틱틱거리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언제 언제 도달되느냐, 언제 도달되느냐?’라고 맨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근데 중간중간에 미디안 민족이 있어서, 자꾸 유혹하는 거예요. ‘너는 행복할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라고 조금만 이야기해도 그 사람들은 거기에 막 푹 빠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 방을 원하지, 내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점, 점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예언과 더불어, 함께 가느냐면, 결국은 천국을 가로막는 그 당사자가, 천국을 막는 것이 사람들은 환경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환경이 안 좋은 게 아니고, 마지막 천국을 가로막는 최후의 막인 커튼은 우리 자신입니다. 선악을 지니기 때문에, 본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아는 양심이라는 것을 마저 포기하기가 겁이 나는 거예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채, 천국 가는 것이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끝까지 뭔가 대단한 존재이고 싶어요. 제가 지난 토요일 날 부산에 아주 대단한 연주회가 있어서 내가 참석했습니다. 참석을 해서, 연주자가 연주하는데, 피아노 연주하는 무대와 내가 앉은 장소가, 이게 몇 미터냐 하면은 1미터 떨어져 있어요. 세상에 어느 참석자도 연주자와 1미터 떨어져서, 1미터 너무하다 싶으면, 1.5미터, 그 정도 떨어져서 연주 듣는 장소는 없습니다.
1.5미터를 사이에 두고, 두 대의 피아노가 쾅 하고 연주를 하는데, 그 강한 음으로 말미암아 내 주체가 소멸하면서 갑자기 희열의 눈물이 빵하고 쏟아지는 거예요. 연주자는 전혀 몰라요. 연주자는 악보대로 한다고 보면서 정신없이 연주하는데, 강한 음이, 그 환경이 강하게 때려버리니까 내가 사라질 때의 그 희열, 기쁨, ‘나 울고 싶어라’가 아니라, 이거는 그 음이 때려주는 강력함이 울고 싶지 않더라도 내 의지하고 관계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기쁨의 눈물이에요. 기쁨의 눈물. 왜 기쁜지도 몰라요. 그냥 기쁨의 눈물이에요. 평소에 그 기쁨을 누가 막았습니까? 나의 윤리가 막은 거예요. 나의 윤리가, 나의 착함이 막은 거예요. 나의 의가 막은 거예요. 내 의보다 더 센 게 오게 되면, 우리는 아낌없이 내가 없어지고 사라지는 그 희열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상대로 인하여 내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대 있으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다는 이게 성경의 아가서에서 나옵니다. 당신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다는 거예요. 우리는 나를 지옥 보내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 못 떠나는 거예요. ‘착하면 되잖아. 착하면.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하겠지’ 이 세상 환경 자체가 지옥인데, 거기서 바르게 산들 그게 바르겠습니까? 바르지 않아요.
관객들이 그렇게 희열을 느끼는 것을 연주자 본인도 몰라요. 이것은 하나님이 예언대로 말씀을 연주하는 거예요. 주께서 연주하시고 나는 그 연주의 가사가 되는 거예요. 창세기 30장 14~15절에 보면, “맥추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지금 이 내용을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 이 생뚱맞는 이야기가 왜 이게 등장하느냐 하는 거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남편, 남자 하나 두고 두 여자가 질투심으로 서로 싸우는 거예요. 남편의 사랑을 얻겠다는 게 아니에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겁니다. 독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남편 된 야곱에게는 아내가 1 플러스 1로 해서 2명이 되었잖아요.
두 명이 되었으니까, 아이가 12명이 생기고 12지파가 된 거예요. 그런데 12명이 되는데, 그 둘이 사랑을 얻겠다는데, 사랑을 얻는 그 정표가 뭐냐. 야곱이 말했어요. “내가 사랑을 해도 자식 낳는 것은, 자식이 있어야 사랑의 정표라고 생각하는데, 낳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이다”라고 야곱이 분명히 라헬에게 나무랐다는 이 말이죠.
나무랐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두 여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누가 자식을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남편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많이 받는가 그걸 이제 시합을 한 거예요. 그 대목이라 이 말이죠. 그 대목에서 순번이 돌아온 거예요. 순회하는 거예요. 공백이 순회하는 거예요. 빈터가 순회하면서 이제 자식을 못 낳는 두 여인에게 하나님이 자식을, 순번 돌아가면서 정해서, 자식을 딱딱 던져주는데, 그러면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은 내 차례다. 하나님께서 혹시 합궁해서 자식 줄 줄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면 나는 언니보다 자식이 더 많다’
여기에 집중해야 할 그 동생 라헬이 갑자기 집중하다가 어디에 빠졌느냐 하면 합환채에 빠진 거예요. 그 뭐, 합환채는 이거 식물 종류 아닙니까? 그걸 레아의 아들이 갖고 있으니까, 그게 탐이 나서 갑자기 달라고 하니까, “너는 내 남편 뺏는 것도 모자라서 그래 내 아들 합환채도 뺐느냐?”라고 레아가 그러니까, “그럼, 좋다. 오늘 밤에는 네가 내 남편한테 가고 나에게 합환채 달라”라고 라헬이 그게 탐난다는 이 말이죠.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런 이야기잖아요. 하나님, 남편 사랑, 나는 하나님, 남편 사랑 백날 외쳐도, 내가 원하는 내 욕망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나는 저 부채로 사용하는 저걸 나는 원하고 싶다는 이 욕망은, 내가 몰랐던 나를 둘러싼, 나를 사로잡았던, 나에게서 나온 나의 욕망이었습니다. 욕망이라는 환경이었습니다. 이것을 인간은 탈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하나님 백날 외치고, ‘주여’라고 백날 외치고, 뭐 예수고 삼위일체고 뭐 성경이 어떻다 해도, 나를 둘러싼 욕망으로부터 내 힘으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 대신 벗어날 수 없는 내 욕망을 주께서 홀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어질 예언의 말씀을 거두어서, 예수님 홀로 자신의 그 말씀을 가지고, 죽음을 뚫고 나갑니다. 선악과를 뚫고 나갑니다. 선악과를 뚫어야 생명나무가 보이거든요.
홀로 생명나무 뚫어놓고, 생명나무 근처에 가서, 다시 말씀을 완성했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줘버려요. 선물로 주게 되면, 내 힘으로 뚫을 수 없었는데, 주께서 우리가 홀로 할 수 없는 것을 선물로, 이 짐승보다 못한 나에게 선물로 이렇게 주셨다는 것을 아셨을 때, 우리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함으로써 말씀이 오고, 다음으로 도착함으로써, 그 말씀 안에 거기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탈피할 수 없는 나 자신과 자신의 욕망. 그런데 주께서 이런 인간도 천국에 이미 넣어주시고 다시 우리가 어떤 어설픈 존재인 것을 되돌아보면서, 주께만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다시는 내 잘남과 내 의와 내 옳음과 착함을 주장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