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의 표준
2026년 3월 15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12-14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개인으로 세상 전부를 알 수 없고 먼 과거나 미래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식을 수집하려는 이유는, 여전히 ‘개인을 강화’하는 식으로 세상을 통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세상 통과’가 아니라 ‘시험 통과’입니다. ‘세상 통과’는 항상 최종 평가를 자신을 두고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시험 통과’란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에 두고 나오는 취지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서 철저하게 악마의 품성으로 세상을 대하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 잘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면 되느냐는 식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라는 의식 자체가 악마의 시험든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는 금지, 이러한 금지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쪽의 취지에 대해서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신으로 행세하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악마의 시험에 빠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생명나무 과실’은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창 3:22) 그런데 금지 자체가 안에 들어와 버리면 어떨까요? 그때는 생명의 면류관이 허락됩니다. ‘금지 안 자체’라는 것은 곧 ‘시험 받은 자 자체 안’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시험하는 자’ 즉 악마와 그 악마로부터 시험당하는 분, 곧 ‘예수님’으로 인해 금지 전에 품었던 실상을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과연 이미 금지 선 바깥으로 추방된 인간의 입장에서(창 3:24) 어떤 식으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까요? 그것은 ‘시험당하시는 유일한 분’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므로서 ‘금지 자체’가 악마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일입니다. 인간들이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이후에 인간 세계에서는 죄와 죽음과 하나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지식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는 죄사함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 너머 부활을 바라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는 말 잘듣고 충성된 종이 되어 하나님과 합류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두 개인적이로 개체적 의식에서부터 출발한 생각들입니다. 이 자체가 배후에 악마로부터 배운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그런 노력이 결코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어떻게 보편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아를 껍질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뭉컹한 내용물을 분리시키면 되는 겁니다. 껍질이 벗겨진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실상이 아니라 가상이요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노출시키게 됩니다. 이 껍질을 벗이는 힘은 특이한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마치 블랙홀 형상과 작용과 관한 원리를 닮았습니다. 불랙홀은 별이 죽음으로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별이 블랙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죽음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별 자체가 끝까지 끌어당겨 파괴하는 강력한 중력장이 그대로 끝까지 살아 있는 별의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폭파되지도 못할 정도로 강한 중력으로 작용하기에 별 근처에 있는 각종 먼지나 물들은 그 별 죽은 자리에 끌여들어가 맹렬하게 주위를 돌게 됩니다. 그래서 원반모습을 띱니다. 이것이 강착원반입니다. 빛조차도 중력장을 바로 돌아나오지 못합니다. 빛의 경로는 시공간 휘어짐을 경로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블랙홀 뒤편의 빛은 심하게 왜곡된 시공간의 모습을 이 지구인에게 보여줍니다. 블랙홀 아랫면도 마찬가지로 마치 아랫 입술 달린 것처럼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즉 ‘보지 못할 것’을 보여주므로서 마치 실상이 그런 양 오해하게 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인간들의 죽음과는 달리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의 완성형을 보여주는 특이한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인해 금지 조항이 현존했던 그 생명의 원칙과 작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 ⓵죄가 없다, ⓶죽음이 없다. ⓷신이 없다’ 이 원칙이 악마가 다스리는 세계가 접합을 하면서 드리어 ‘시험의 본질’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22:1-2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삭을 아버지 손에 죽을 지음에 제단 옆에 있는 양이 준비되어 있고 그 양을 대신 죽게 하므로서 생명의 세계는 죽음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금지의 폭 안에는 생명이 작렬하고 있었던 겁니다. 출애굽기 12:12에 보면,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들이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신들이 다 허상인 인간에게서 나오는 허상적 신임을 밝혀주십니다.
시편 51:3-5에 보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간음죄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고 난 뒤에 ‘나는 주께만 범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곧 자신이 저지를 수 있는 죄는 없고 보편적인 죄를 유일하게 알려주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 세계는 악마의 진두지휘하에 모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시험하고 핍박하는데 한 마음이 되어 움직입니다.
자칭 피해자로 자처하지만 자신의 개별적 인생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편적으로 합세해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하시는 하나님 말고 시험받는 하나님으로서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시는 것에 성공하십니다. 방금 귀신이 나간 성도를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쁘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가짜입니다. 나는 챙길 게 없는 허상입니다. 유일한 진리와 죄와 죽음과 생명과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에만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옳게 보여도 다 마귀짓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야고보서 1장 12-14절(시험의 표준) 26031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2-14절입니다.
야고보서 1:12-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 ‘시험’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시험’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환경, 배경 전체가 시험 덩어리로, 시험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라는 전제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시험을 참고 견디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해서 모든 인간은 뭔가 통과 중인데 어디를 통과하고 있느냐? ‘시험으로 가득 찬 그 환경 속을 우리는 통과하고 있다. 그런 통과가 끝나고 난 뒤에는 주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할 것이라.’ 이렇게 했어요.
‘생명’이라는 것은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 곧 인간의 삶의 환경을 지배하는 두 개의 나무의 취지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했습니다. ‘이 나무는 따 먹으면 정녕 죽는다. 또 이 나무는 먹어도 되는데 이것은 생명나무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인간의 인간 됨’이라는 조건은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았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라는 장치, 조건이 있었는데 인간이 벌써 시험을 받았어요. 뱀이 와서 인간을 시험했습니다. 인간을 유혹했어요.
인간이 처음부터 있었던 그 자리에서 시험을 통과 못 했을 때 주어지는 결과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고 거기서 도리어 추방당한다는 하나님의 취지가 드러내는 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미끼로 사용하신 거예요.
시험을 받기 전까지는 인간은 자기가 왜 사는지도 이유도 몰랐죠.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있으면 그걸로 됐지 왜 생명나무라는 것은 있어야 하고,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의 나무가 굳이 인간과 더불어 동산 한 가운데, 그것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런 자태를 보이면서, 왜 인간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굳이 그 현장에 있어야 하는지? 그것과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 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뱀이 낙원에 들어오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했다는 거예요. 인간을 시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마귀가, 하나님과 인간만 산다고 여겨졌던 그 낙원에서까지 활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용납한 거예요. 왜? 그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한가?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는가?’ 이런저런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 속에 놓여있던 모든 조건들, 인간이 중심이 되면 안 되고 예수님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그 모든 장치, 뱀 같은 것이 다 용납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지만 인간은 몰랐습니다. 인간 중심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었던 그때 그 사건을 포기한 적이 없고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최초의 것이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뱀으로 하여금 인간을 유혹케 함으로써 인간은 그때부터 개체, 개별 위주, 자기 위주로 살았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그 상황 자체를 끌고 가면서 개인에서 보편으로 바뀌게 했습니다. 내가 보는 개인으로서의 나와, 보편적 환경까지 고려해서 전체 보편적인 나의 차이와 그 갈등이 어떤 식으로 대립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해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자기 쪽으로 의미가 소환되고 돌아와요. ‘이번 일을 통해 내가 이익을 봤나 손해를 봤나?’ 항상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보편이 아니고 자꾸 개인 쪽으로 자기한테 몰입되는 경향이 있어요. 날이 갈수록 자꾸 개인으로 압축이 되고 축소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에게 함몰되어 가는 나, 우리 자신을 보편으로 바꾸는 작업을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합니다. 개인이 개인에게 자꾸 함몰된다는 것은, 마치 손톱이 자라면 자랄수록 자기의 피부를 파고드는 것처럼 점점 고통이 가중돼요. 이 세상의 모든 상담을 한다는 것, 정신과를 찾아간다는 것, 심리 상담한다는 이게 뭐냐?
그만큼 자기가 단단하게 압축이 되어 있고 함몰되어 있다는 증거에요. “나 어떻게 살면 됩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 편하게 삽니까?” 그것은 개체 문제에요, 개인 문제죠. 상담가한테 찾아가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초기에 왜 인간과 함께 있었습니까?” 이걸 물어보는 고민남 고민녀 봤습니까? 보편에 대해서는 점점 더 도망치고 있어요. 전부다 개인 문제에요.
성경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모습이라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엔 네가 신처럼 된다’라고 했으니까 자기가 신인 줄 알고 점점 더 ‘내가 신인데 나는 왜 불행할까, 왜 행복하지 못할까? 나는 신인데 왜 불안하지, 나는 왜 초조하지? 나는 신인데 왜 남 의식을 그렇게 많이 하지?’ 자기 해결점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께서 ‘시험을 통과한 경우에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생명나무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조건은, 마귀의 시험의 장을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게 하고, 마귀의 시험이 어떻다는 것을 마귀의 시험장에 그대로 집어넣어서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 방법으로 하게 하면, 내가 피해자가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가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했거든요. 그리고 생명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시험을 받아서 개별자가 되면서 이제는 누구와 한패가 됐냐면, 시험받는 자가 아니고 시험하는 자와 한패가 되었어요.
시험하는 자와 한패가 되다 보니까 그때부터는 이런 게 있어요. ‘인간에게는 생명이 없다. 인간에게는 죄가 있고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신이 있다.’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이미 개별자의 입장에서 따먹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생명나무를 노리면서 영원히 완전한 악마와 같이 신처럼 행세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때문에 자기한테 고민이 되어서 그런 걸 시도하는 거예요.
‘죄가 있는데 이 죄책감, 이 죄를 어떻게 해결하지? 예수의 피로 씻음받을까?’ 이런 거요. ‘내가 죽는데, 죽고 나서 영생이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지? 하나님이 계시니까 어떻게든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게 해서 하나님께 예쁘게 보여서 영원하게 살아야지.’ 그런 쪽으로 자꾸 생각이 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따먹지 말라고 이미 금지 명령을 내렸잖아요? 금지 명령을 내리는 그 자체의 취지, 금지 자체를 주님께서 자기에게 안겨버려요. 안겨버리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기 전의 상태에서 금지의 그 폭, 금지안에서 비로소 인간에게는 죄도 없고, 죽음도 없고 특히 인간에게는 신이 없는 거예요. 생명이 있는 곳에는 신도 없고, 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거예요.
인간은 이걸 왜 몰랐는가? 인간이 금지의 지시에 위반했을 때 비로소, 금지한 것을 위반하지 않은 세계에는 죄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잘 보이고, 어떻게 하면 죄 씻음을 받고, 어떻게 하면 생명나무 따먹고,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죽음의 공포가 없는 세계로 갈 수 있을까?’라고 개체적으로, 개별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체가 금지 조항을 위반한 시험 덩어리고, 마귀와 함께 있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는 거예요. 죽음이 없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시험을 실시하면서 발견이 되는데요, 창세기 22장 1-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서 왜 이 지시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누구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했는데 분명히 창세기 22장 1절에는 ‘하나님이 시험 한다’고 되어 있어요.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은 누구도 시험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대리자, “넘으면 안 돼. 넘으면 넌 죽는 거야”라고 하는,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금지안에 내용 자체를 그대로 품고 오신 하나님을 지상에 보내시면서 하나님은 뒤로 빠져버리는 거예요. ‘나는 아무도 시험 안 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시험받은 적도 없다’하고 뒤로 빠져버려요.
하나님이 한 분인데 둘로 나뉘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시험받으시는 분으로 와버려요. 왜? 이미 선악과 따먹고 악마와 한패가 된 이 세상 자체가…, 인간은 몰랐죠. 마귀가,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시험하는 주체자로서 마귀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 그 세계에 하나님의 아들이 뛰어든 거예요. 금지선에서 그 너머로 넘어갈 수 없는데 인간은 넘어갈 수 없는 금지 이전의 세계인 금지 저쪽의 세계에서 도리어 금지라는 그 폭을, 내용으로 가지고 주님께서 이쪽으로 뛰어든 거예요. 뛰어들면서 그때 구약 시대가 시작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루시는 미끼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개별자인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시는 겁니다.
이방 민족은 이미 마귀한테 물들어서 하나하나가 개체고 개별주의적이에요. 그들에게는 진정한 보편성이 없어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하나님이 생각했던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개체면서도 하나의 보편이 지배하고 있는 그런 환경에 있어요. 그 환경의 기초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든요.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이 원칙, ‘내가 너를 시험한다. 네 자식을 바치라’라는 이러한 원칙이 국가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시작하면서 ‘열두 지파’라고 되어 있죠.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구약의 열 두 지파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지금 점박이처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동일하게 적용을 시킨다는 겁니다.
적용시키는 그 원천은 바로 최초의 사건, 생명나무가 있었고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다는 그 사건, 그 현장을 고정된 원칙으로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간에게 밀어붙이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범죄하기 전에 어떤 존재인지는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예요. 몰라요!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찾아왔던,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확고한 조건으로부터 율법이 나오면, 그 율법, 하나님의 계시가 나오면 그 계시의 상황 안에서 ‘아, 인간은 이런 점에서 금지했고 이런 점에서 생명나무를 잃어버렸구나.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시험 든 상태구나!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하면 행복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 고된 세상에서 벗어나서 천국에 가느냐 하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마귀로부터 온 시험에 든 환경이에요. 구원받겠다는 것도 마귀의 제안이었고요, 천국 가겠다는 것도 악마가 인간을 시험하는 수단이 된 거예요.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죽음은 특이한 죽음이었어요. 그때 누가 죽이느냐면, 여호와의 말씀에 입각한 채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이끄는 지도자로 자부하는 자들에 의해 하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인간 자체가 허상이라는 거예요.
벌써 잠 오면 곤란한데요. 그래서 제가 하나 준비했습니다. 인간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을 적절하게 잘 설명한 게 있어요. ‘블랙홀’이라는 게 있는데, 물리학에서 블랙홀이라는 것은 어떤 별이 죽게 될 때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어떤 별은 중성자별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중성자별이 되는 것 말고, 또 어떤 별은 갑자기 강력한 중력으로 별을 죽음에 몰아넣는데 그 중력이 강력하다 못해 그대로 살아 있으면 별은 없어져도 그 살아있는 맹렬한 중력에 의해 바깥에 있는 가스나 물질이나 천체가 원반처럼 수평으로 돈다는 거예요.
제가 준비한 모형이 여기 있습니다. 이게 옆으로 자른 원반형 베이글입니다. 안에 구멍처럼 되어 있는 이것이 블랙홀인데, 그냥 구멍이 아니고 이 안에 강력한 중력이 있어요. 거기로 온갖 물질, 질량이 다 빨려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게 원반처럼 되어 있단 말이죠. 이게 별의 죽음이에요. 별의 죽음이 중력으로 강력하게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당기는 데 빛은 어떻게 되는가?
강력한 중력에 의해 빛의 경로가 휘어집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아야 할 빛이 심하게 꺾이면서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런 모양이 됩니다. 이 블랙홀이 천문학 위성사진에 찍혔어요. 그러면 이 원반형의 베이글 위와 아래쪽에 입술처럼 붙어 있는 반토막 난 베이글 두 조각은 뭐냐? 이게 허상이에요.
실상은 못 보는데 그 실상을 전달해 줄 빛이 없어요. 중력이 너무 강력해서 중력을 타고 휘어진 빛이 시공간을 통해 지구에 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블랙홀의 위에 있는 것도 허상, 밑에 있는 것도 허상입니다. 본래 원판에서 그 중심은 못 보는 거예요. 못 보는 이 죽음, 이 죽음이 실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특이성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정녕 죽으리라’의 실체기 때문에. 그 금지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따먹지 말라는 것을 어겼다고 해서 인간이 금지의 그 취지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고 몰라요. ‘뭔가 넘어왔는데 판이 다르네? 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어봤는데 왜 부끄럽지? 옷으로 가려야겠다.’
금지안에 있는 내용, 도대체 무엇을 금지했는지, 어떤 내용을 금지했는지에 대해서, 인간은 모릅니다. 지금 인간은 마귀와 짝짜꿍 한통속이 되어서, 자기의 행복과 구원과 영생에 정신이 팔려서 천국에 가서 자기 행복할 것만 생각했지, 금지안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금지했지? 금지의 내용은 뭐지?’ 금지의 내용 안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죄가 없고, 죽음이 없고, 신이 없어요. 그게 바로 금지 저편에, 금지된 우리 인간 편이 아니고, 개체적 인간 편이 아니고, 개개인이 신이라고 자부하는 이 세계 말고 보편적인 저쪽 세계에는 죄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신도 없어요. 오직 뭐가 있느냐? 영생이 있을 뿐이에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신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 할 거예요. ‘아,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뭐 불교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거예요.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데,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그분’이 결국은 ‘이 땅에서 시험을 받는자로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예비적으로 아브라함에 얹혀서 미리 보여준 겁니다. 어렵죠?
“아브라함아, 너 똑똑히 살아. 바르게 살란 말이야. 너 시험한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지시함으로써 이제는 아브라함 속까지 들어간, 장차 모든 인간으로부터, 마귀로부터 시험받을 당사자로 아브라함 안에 미리 들어가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름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기 경과를 보여주는데 장차 이 땅에 와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잡는데 그 아들 대신 수풀에 양이 있었잖아요. 그 양을 대신 잡으니까 죽을 뻔한 이삭은 죽음이 없어요.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방식을 통해서 금지 이전에는 애초부터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신이 없다는 것, 이것은 출애굽기 12장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인간이 이미 개별자가 되고 악마와 한통속이 된 인간은 아무리 부정하고 부인해도 신을 찾게 되어 있는데요, 절대자를 찾게 되어 있는데 그 절대자를 자기의 모든 소원과 희망을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자로 간주해서 신으로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중이든 신부든, 종교가 없다는 사람이든…, 만약에 올림픽 선수로 나갔다든지 혹은 음악회를 한다든지 할 때 제일 먼저 국민의례가 있죠?
거기서 부르는 노래가 뭡니까?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다음에 나오는 가사가요, “하느님이~” ‘하느님’이라고 하죠. 초등학교 입학식 할 때 다 들었어요. 태극기 바라보면서 “나라와 국가에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한다”고, 국민의례 다 했어요. 외손자가 지켜보는데 뭐 안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우하사” 거기에 거부감이 왜 안 일어나죠? 왜 거부감이 없죠? 그게 바로 인간의 자기 투영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아가 신의 확장으로서, 자기와 끊어지지 않는 신을 자기 쪽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름을 예수로 붙이든, 여호와로 붙이든, 성령으로 붙이든 관계없어요.
신은 없습니다. 신은 없어요.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활동하는 신이 계시죠. 왜 인간에게 신이 없어야 되느냐 하면, 신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그 구역에서 금지 자체를 쥐고 품고 넘어왔기 때문에 인간의 신은 다 거짓이라는 것을 고발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것은 신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신의 이름으로 사형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인간들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거예요. 그다음에 세 번째, 죄가 없다는 거예요. 죄가 없다는 이것은, 역시 선지자죠, 다윗의 시편 51편 3절에서 5절에 나옵니다. 3절에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가 없다면서 다윗은 죄가 항상 자기 옆에 있다고 되어 있네?’ 이렇게 되겠지요? 다윗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는데, 그런데 왜 죄가 없다고 했을까요? 시편 51편 4-5절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여기서 나옵니다. “주께만 범죄하여.” 주님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 내가 생각한 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예요. 주님과의 만남 외에는 죄가 없는데 왜 나는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이미 시험 들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귀가 나에게 죄의식을 심어준 거예요.
“네가 살인했잖아. 네가 우리야를 죽였잖아. 네가 간음했잖아. 이게 죄잖아. 빨리 제사를 드리든지 회개하든지 무슨 대책을 세워. 교회를 가든지 해. 반성하면 혹시 알아? 하나님이 용서해 줄지.” 이런 식으로 교회, 성당, 절간, 온갖 종교가 마귀가 활동하는 장소가 되어서 마귀가 계속해서 시험해 온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성신을 받고, 지금으로 하면 성령을 받았죠, 성령을 받고 알게 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죄가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진 게 아니고, 인간은 죄 자체를 몰라야 한다는 거예요.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때 처음 등장한 게 죄에요.
왜? 금지의 폭, 금지의 그 내용은 모든 인간에게는 가려졌고 오직 주님과 마귀만 알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죄도 아닌데 마귀가 인간을 들쑤셔서 죄책감을 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기껏 이호선 교수나 찾아가 상담하고요, 그래서 상담이 요새 그렇게 범람하고 있습니다. 왜? 죄책감을 자기의 선한 행위로 어떻게 커버하려고 해보는 거예요.
일본의 지장보살, 조그만 인형 같은 거 만들어 놓고 옷을 입혀서 비는 거예요. KBS <성물>이라는 시리즈 보면 나와요. 비는 이유가, 내가 어릴 때 배 안의 아기가 지워졌는데 거기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아기 귀신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걸로 보상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가 하는 짓이고, 그 마귀가 하는 짓이 교회와 성당에서 똑같이 진행되고 있어요.
죄는 없는 거예요. 죄도 없는데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시험을 통과하는 중인데 시험을 통과하는 그것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동안 마귀가 우리 껍질 부위를 굉장히 강화시켜 왔습니다. 똑바로 바르게 하고, 훌륭하게 살고, 말씀 지키고…, 그게 두꺼운 껍데기예요.
마치 랍스터 껍데기처럼 하도 단단해서 그 두께 속의 내용물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 껍질 부위와 안의 내용물을 분리시킵니다. 껍질 부위가 단단해지면 이건 개별자, 개체자로 더욱더 강화되는 거예요. 손톱이 자라서 내 살갗을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내가 더 바르게 살고, 반듯하게 살고, 더 철저하게 살고, 완벽하게 살면 살수록 나에 대한 나의 찌름은, 그리고 그 고통은 더욱더 심화되는 거예요.
바로 유대인들이 그런 짓을 했고, 지금 교회와 성당과 절이 그렇게 하고 있고, 일반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이요. 자기를 찌르고 또 찌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물컹물컹한 내용물을 분리시키는 거예요. 분리시키면서 껍질을 어디에다 집어넣느냐? 그 특이한 별의 죽음, 별의 죽음에 말씀으로 끌리게 해서 그 블랙홀…, 모형을 다시 보여드릴까요?
구멍이 안 보이지요. 그 중심은 안 보이는 데 이렇게 보이는 게 있다는 말은 뭐냐? 이게 허상인 거예요. 인간은 허상이면서도 내가 실상인 줄 알고 실상인 척을 하고 살아온 겁니다. 허상이 실상인 척을 하니까 항상 시험거리가 뭐냐? 내 인생 챙기는 그것이 시험거리였어요. 모든 의미가 내 인생 챙기는 것, 그리고 남하고 만날 때는 내 주변에 강력한 자기장을 발동시켜서 ‘여기까지만 오고 여기부터는 넘어오지 말라’고 강력하게 내미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대인 관계에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너 사람 만날 필요가 없다.” 성도는 사람 만날 필요 없어요. 사람 만났다 하면 자기 의가 발생되니까요. 자기장이 있어서 사람 만날 때 넘어오지 말라고 자기방어를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주께서 제대로 죽이는 데 별의 죽음으로 당겨주는, 그래서 별이 죽었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하는 강력한 중력장에 의해 끌려가도록 하는 거예요.
끌려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뭐냐? “내가 허상입니다!”하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실상이 아니고 가짜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 3절이에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가짜가 가짜인 걸 모르고 자꾸 실상이라고 하니까, 성경을 백 독하면서 배운 것이 뭐냐? ‘영생을 얻어야겠다. 죽고 난 뒤에 천국 가야 되겠다. 죄 사함받아야 해결되겠다.’ 이런 거예요. 그러나 ‘죄, 그리고 생명,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세상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여기서 시험하는 자는 마귀예요.
마귀가 겨냥해서 직접적으로 시험받는 자는 유일하게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을 때 그때 나오는 개념이 뭐냐? 죄와 죽음과 생명이고, 그리고 하나님이고 그런 거예요. 예수님만 그 개념을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래야 예수님의 특이한 십자가 죽음에서 당겨주는 힘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너 가짜다.” 가짜가 어떻게 진짜처럼 행세하면서 온전한 진짜? 괜찮은 진짜? 착한 진짜? 그런 건 애당초 너에게 없고 마귀가 너를 귀신 씌우듯이 씌워서 나온 거예요.
껍데기와 내용물을 분리하는데 적절한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옛날 제가 어려서 날 추울 때 포장마차에서 멍게와 해삼 파는 사람이 있었어요. 대구 비산동 131번지, 서문시장에서 내려가는 길에서 팔았어요. 그 현장에서 손질하는데 우렁쉥이 있잖아요, 멍게, 그 멍게를 칼로 자르니까 물컹물컹한 내용물이 나와요.
이것은 고체가 아니고 액체 같아요. 물컹물컹함으로써 특징이 뭐냐? 자기 형태를 못 갖춰요. 이것은 액체적인 자아, 액체 자아,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물컹물컹한 것, 그게 바로 보편이에요. 주님의 보편을 만날 때는 그렇게 해서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 미끄럽지? 네 죄 없지? 네 몫은 아예 없지, 그렇지? 네가 믿는 신 없지, 그렇지? 누가 너의 껍데기를 분리시켜 줬는가?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넌 마귀와 한패고 내가 바로 유일하게 마귀로부터 제대로 시험받는 자, 테스트받는 자, 유혹받은 유일한 분 예수님이에요. 다른 사람은 해당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는 거예요.
그 마태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간이 사는 이 세상 자체가요, 마귀가 지배하는 거예요. 마귀는 생각이 이래요. ‘밑에는 인간 세계인데 내 권한 밑에 지배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관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하나님끼리 사시고 땅은 내 지배하에서 내 세상으로 살게 해주세요.’ 이게 마귀가 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님께서 하늘을 뚫고 성령을 통해 이 세상에 왔잖아요. 누가 먼저 시비를 건 거냐 하면, 주님이 먼저 마귀한테 시비 건 거예요. 하나님이 함부로, 하나님이 함부로 인간 세계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지배하는 마귀하고 인간 전부는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온 그 낯선 존재에 대해서 온 힘과 온 지혜를 다 동원해서 죽음을 통해서 추방시키는데 생각을 같이하는 거예요. 마음을 함께 하고 같이 하는 거예요.
마치 “목사님은 오셔도 되는데 예수님은 우리 교회 오지 마세요”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허상이 되기 때문에. 내가 날 구원하는 모든 시도가 다 가짜라는 게 들통나기 때문에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뭐냐? 우리가 모든 일은 주님을 핍박하는 일인데, 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 개별자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자기가 마치 이 세상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피해자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 때문에 인생 조졌습니다.” 이런 거, 그러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평생직장에서 퇴직했습니다. 자, 이제 퇴직했다. 처음에는 산으로 놀러가고 다 해요? 나이 60 넘어 퇴직하면 그렇게들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를 행복하게 지키려는 일을 하지 마시고 자기 목숨, 자기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세요.”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면 돼요.
그런데 퇴직하고 난 뒤에 꼭 자기 목숨, 고생 많이 했으니까 스스로 셀프 위로하는 그 일을 하고 있다고요. 셀프 여행 가고요.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껍질을 떼고 물컹물컹한 알맹이만 쥐고, 바로 금지하기 전에 있었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과 두 개의 나무의 환경에서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에다가, 물컹물컹한 채로 자기를 거기에 던져 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물컹물컹하니까 ‘주님,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그렇고…’ 하는 그 자아 자체가 날아가 버렸으니까, 껍데기가 벗겨졌으니까, 주께서 시키는 대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감사, 감사만 나온다는 말이죠. 내가 아프고, 내가 어떻다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평생 살아온 것, 퇴직하기 전까지 살아왔던 이 ‘나’라는 껍데기, 그동안 그거 지킨다고 얼마나 고생했어요?
‘돈 벌려고 하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해.’ 이런 껍데기, 마귀가 그걸 누구한테 실시했는가? 광야에서 예수님한테 실시한 거예요. 실시한 이유는 뭐냐? “당신이 누구든 간에, 어쨌든 간에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일단 들어왔으니까, 이제부터 너는 나의 시험대상이다.” 성령께서 일부러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귀로부터 시험받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시험의 내용이 뭐냐? 시험의 내용은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서 17절에 명쾌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 매매는 이미 누가 장악해서 누가 힘 있게 관할하고 있다? 짐승, 짐승이 관할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 짐승 중에 네 번째 짐승, 영원히 망하지 않는 네 번째 짐승인 로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어요. 로마 제국이 분산된 거예요.
지금 이란하고 미국하고 싸우는 것은 뭐냐? 허상과 허상의 싸움이에요. 실상은 몰라요. 실상은 그들이 알 수가 없어요. 가짜가 가짜하고 싸우니 결과도 가짜예요. 짐승은 국가예요. 백성이나 국민들에게 관여해서 매매하는 방식까지도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광야의 세 번째 시험이 뭐냐? 악마의 말을 제가 대변해 볼게요. 악마가 지금 예수님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이 세상은 우리 악마가 쥐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인간들이 나한테 복종한 것처럼 당신도 나한테 복종하게 되면 이 부귀영화를 같이 누릴 수 있다.”
이게 마귀의 마지막 시험이에요.
성경에는 ‘마귀’로 돼 있잖아요. 이걸 ‘국가’로 바꾸어 보세요. 이 세상을 국가가 장악하고 있고 국가가 장악하지 않은 그런 세상은 없어요. 그리고 모든 국가는 악마가 지배하고 있어요. 악마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모든 민족과 국가는, 특히 이방 민족의 특징은 뭐냐 하면, 국가는 무조건 옳다는 거예요. 국가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개인이 뭘 알아? 나라가 알아서 잘할 거야. 국가의 지도자가 다 알아서 잘할 거야.”
구약에서 하나님이 쥐고 있는 이스라엘과, 인간이 지도자를 뽑아서 다스리는 국가인 이방 민족과의 전쟁과 승부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여호와 말고 저쪽은 우상’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신이 없는 게 아니라 신이 있어요. 짐승이 신까지, 종교까지 만들어 놓고 인간을 지배한 겁니다. 최종적으로서는 국가가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고, 더 놀라운 사실은,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 달지 않고 옳다는 겁니다.
뭐가 옳은가? 매매를 하게 해 주니까 옳다는 거예요. ‘국가는 옳다’는 말은 국가의 대통령을 바꿔도 국가는 옳고, 나라를 바꿔도 나라가 옳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국가가 없이는 못 살도록 하는 시스템이 이미 작동하고 있습니다. 국가에 뭐가 주어지는가? ‘화폐 발행권’이 주어졌어요.
‘화폐 발행권’이 주어졌고, 그 발행권이 있으면 ‘모든 채무는 국가가 다 받을 테니까 너희들은 국가가 발행하는 새로운 화폐를 부여받아서 그것 가지고 너희들은 부자 된 것처럼 풍성하게 소득을 높여라. 너희들의 모든 무거운 짐은 국가가 나중에 알아서 다 처리할게.’
알아 처리하는 게 뭐냐? 국가는 국채를 발행하고, 제일 먼저 발행한 국채를 받는 자가 누구냐? 시중은행인데 그 시중은행이 국채를 담보로 해서 나라에 돈을 빌리면 은행은 서민들에게 대출해 줄 수가 있어요. 그러면 서민들은 대출을 받아서 필요한 부동산을 사거나 투자를 하거나 하겠죠.
그러면 국민들의 소득은 많이 나아지고요, 특히 국가가 돈을 퍼주면서 하는 것이 뭐냐? 기초 생활을 위한 자금을 주고, 복지 시설, 복지 대책에 돈이 많이 써요. 전기 같은 에너지 사용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 비용을 경감시켜 줍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 사는 데 돈을 써요.
그러면 국민들은 ‘역시 나라가 옳게 행동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너무나 당연하게 하지요. 우리는 그게 시험인 줄 모르고, 그게 이 마귀의 전략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이렇게 행복한 실상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그 포만감이 어디서 다 막히느냐 하면, 물가가 소득보다 더 상승하는 것을 통해서 은연중에 체감하고 있어요. 국가는 그럴 때마다 또 돈을 찍어 내면 돼요. 옛날에는 금본위제라 해서 보유한 금의 양에 맞춰서 화폐를 발행했지만 지금은 그냥 국가가 돈을 찍어 내요. 돈 찍어 내면서 “나만 믿어라. 나라의 빚이 많아져도 국가만 믿어라. 차차 다 해결해 줄게”라고 하는 겁니다. 해결 못 하면 또 돈 찍어 내면 되니까요.
국가에서 하는 교육, 그리고 국방, 세금, 에너지값이 오를 때 쓰는 세금 경감 제도, 이 모든 것은 누가 하느냐? 살아 있는 국가가 하고 그 살아 있는 국가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 아무 걱정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국가가 허상이듯이 우리 자체도 허상이라는 거예요. 그게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악마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이 뭐였는가? 종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생 줄게, 기적 줄게, 죄 용서해 줄게, 그리고 죽음에서 벗어나서 부활에 이르게 해 줄게.” 그것도 악마의 시험이었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13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시험은 개인적으로 감당 못 한다는 뜻이에요. 기도 빡세게 하고 신앙생활 잘해서 감당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감당 못 하는 이유가, 이 세상의 멸망과 인간의 죽음 이후에 인간에게 금지했던 금지 그 전의 사정을 꿰뚫어 아시는 하나님께서 특이한 죽음을 통해서 죄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신도 없고, 너를 지켜줄 신을 의도적으로 네가 모실 이유도 없는 세계, -오직 뭐만 있다? 생명만 있는- 그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돌파할 수 없는 시험을 돌파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작용해 주신다는 거예요.
뭐로? 생명의 힘으로! 생명의 힘으로 하는 거예요. 따라서 껍질이 벗겨진다는 말은, 우리에게서 귀신이 나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이 나갔다는 뜻이에요. 마귀와의 연이 끊어졌다는 겁니다. 따라서 방금 귀신 나간 사람을 존경하세요. 그 사람은 자기중심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성에 입각한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가짜였어, 나는 가짜였어. 나는 그동안 주님을 핍박했어. 주님을 시험했어. 나는 시험하는 자인 마귀와 한패였어.’ 이걸 거침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이게 너무 감격해서 털어 놓는 사람,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8절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스스로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 그 자체가 마귀의 권세에서 못 빠져가는 참된 모습인 것을 미처 알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의 독특한 죽음의 능력이 찾아옴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알고 보았던 모든 것이 허구였고, 가짜였고, 허상인 것을, 우리 자신부터 그런 것을, 이 껍질이 그걸 보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쁨으로 알고, 이 벗어난 것에 의해서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예수님의 열매로써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댓글
이하림 블랙홀이 별을 삼키는 영상입니다
https://youtu.be/MYlSghRyKAI?si=9A96719Ehgyk4Gsw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거대한 별이 빨려 들어갈 때 우리 눈에 보이는 휘어진 빛의 경로가 허상이고 곧 내가 허상이라는 말씀이 실감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