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본질
2026년 3월 8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9-11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도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형제와 높은 형제를 대비합니다. 이는 ‘사람의 사람다움의 조건을 유지하라’가 아니라 ‘형제의 형제다움의 조건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형제다움의 조건은 바로 이사야 40:6-8에 나오는 상황을 안에 품는 겁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즉 모든 인간들은 똑같다는 겁니다. 인간은 같은 인간끼리 비교할 거리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위력입니다. 즉 인간 이전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현실’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각 개인이 이 말씀이 출렁이는 파장에 해당됩니다.
높은 파고(波高)가 있을 수 있고 낮은 파고(波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높으나 낮으나 모두 동일한 본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처음 아담의 자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범죄한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 후손들은 태어나면서 ‘죽음의 씨앗’을 품고 나타납니다.
자기 인생을 살고자하는 바가 피곤한 이유는 이 ‘죽음의 씨앗’의 성격과 역행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형제, 즉 상대적으로 잘 사는 형제는 낮은 형제를 깔보는 이유는, 자신은 현재 그 처지를 벗어났기에 다행스럽다는 겁니다. 못 사는 형제, 즉 스스로 낮다고 자부하는 형제는 기가 죽는 이유는, 대외적으로 자랑할 것들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해결책은 바로 ‘분리’를 드러내는 용도로 각자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4:31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15:11에 보면,
“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 믿는 나라에 경제적으로 똑같은 형편에 있도록 해주시지 않은 겁니까? 그것은 형제와 형제를 결속시키는 요인이 결코 돈에 있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었음을 알고 난 뒤에 가인에게 나타났습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창 4:8-9)
즉 하나님 말씀에 위반하므로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마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위반사항을 겨냥하면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는 것이 현 인간의 본질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므로서(요 1:14) 인간의 위반성격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는지가 비로소 최종 밝혀집니다.
형제 관계라는 것이 자기 절대성으로 인해 성립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요소를 없애버리는 관계인 겁니다. “내가 나로 인하여 사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라고 하나님에게 대들게 되는 본성을 형제 관계로 인해 드러나게 됩니다. 육적인 형제란 육적인 요소를 넘어선 요소로 인해 복계열과 저주계열로 새로운 구분되어 정리되는 바탕이 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4-27)
이러한 구분은 육적으로 이스라엘이 구성되고 난 이후에서 연속됩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출애굽할 때는 모두 한 형제 같았습니다. 같은 바다를 건넜고 같은 반석에서 나오는 말과 같은 만나를 먹었습니다.(고전 10:2-4 “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원칙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혈육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형제가 신약 시대에 등장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6-28)
하지만 같은 같은 형제 중에서는 한 아버지, 한 주님의 취지를 모르는 자들이 발생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외치면서 약한 믿음을 가진 자를 얕잡아 보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형제들끼리 분쟁이 생겼고 더구나 안 믿는 재판관 앞에서 나가 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 받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6-7) 그렇다면 자기 절대성을 포기 못하는 이 죽음의 씨앗 본성에서 벗어날 해결책은 뭘까요?
출애굽기 14:14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즉 형제들 간의 대화에서 우리 자신의 말을 멈춰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사태를 일으키게 되면 이때 주님께서 친히 일하심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일에 관한 내용을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 현장에서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형제 간 사이의 대화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감산(빼기)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야고보서 1장 9-11절(형제의 본질) 26030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9-11절입니다.
야고보서 1:9-11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야고보가 이미 형제 된 사람을 또다시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미 형제가 됐는데요. 그 나누는 명칭이 뭐냐? 낮은 형제가 있을 수 있고 높은 형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형제로 이미 들어왔는데요. 영적인 형제라고 이미 간주하는데 낮은 형제, 높은 형제가 있는 거예요.
낮은 형제, 높은 형제가 있는데 주의할 것이 있어요. 10절에 보면 그 높은 형제를 두고 ‘부한 형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부자의 특징은 뭐냐? 9절에 보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라고 돼 있어요. 뭘 자랑하려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너 얼마 버는데?” “나 얼마 번다.” 이렇게 비교 대상이 되면 그 비교 자체에서 높고 낮음이 발생이 돼 버린 겁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형제 가운데 과연 높고 낮음이 성립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사도 야고보는 말하기를, 본래 성립될 수가 없는데 형제라고 하면서도 그런 것이 성립되는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겁니다.
높은 형제, 낮은 형제라는 현상이 드러나는 것, 부한 자들이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는 현상이 일어날 때 야고보는 편지를 보내서 ‘이것은 손댈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손대는 그 방법이 뭐냐? 11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쇠잔한다.’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죠. 이파리가 팔팔해도 가을비가 한번 쫙 뿌려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쇠잔하죠. 밟혀도 아무 반응 없는 별 볼일이 없는 무용지물의 존재가 되겠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전부 다 쇠잔한다는 거예요. 언제?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내가 너보다 낫다고 했던 조건 자체가 떨어져요. 찬란한 꽃도 떨어지게 되면 똑같다는 겁니다. ‘똑같이 대단하다’가 아니라 ‘똑같이 쇠잔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야고보가 하는 이유는, 그 끝부분에 일어나는 ‘똑같다’를 미리 앞당겨서 지금 여기에 적용하자는 거예요.
수입이 많은 자, 또는 집안이 가난한 자, 여기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을 하자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인간은 똑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내용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11절의 이 말씀은 이사야 40장에 나오는데, 주보에 적어놨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5-8).
모든 육체는 풀이요. 육체와 풀을 맞바꾸라는 그 말이지요. 나는 이 아무개, 김 아무개, 하지 말고 나는 김 풀, 이 풀, 최 풀 이렇게 보라는 말이지요. 풀인데 풀이라도 잠시 꽃이 필 수 있어요. ‘나도 20대 땐 참 예뻤다.’ 이런 거 있잖아요. 미장원에 갔다 온 다음에 갑자기 확 달라지는 것처럼이요. 풀인데 갑자기 꽃 비스무리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또 비교 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하여간 이상한 풀이에요. 자랑거리만 있으면 환장하는 거예요. 자랑하려 드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낮은 형제는 문제가 없는가? 낮은 형제도 마찬가지예요. 자기도 한 때는 아름다운 꽃을 갖고 있었는데 이 꽃이 졌거든요. 꽃이 지니까 낮은 형제도 마찬가지로 ‘부끄러워서 세상에 못 나가겠다. 내세울 게 없는데, 자랑할 것도 없어서 어디 나가기가 겁난다.’ 이런 태도입니다. 부자 형제도 문제지만 낮은 형제도 부자 형제와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겁니다.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풀이 풀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풀이 잠시 피어난 꽃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풀로 되어 있으면 여기서 한 번 더 바꾸자는 거예요. ‘인간이 풀로 되었다. 풀은 쇠잔한다.’ 그다음에 인간은 뭐로 바뀐다? ‘인간은 말씀으로 바뀐다.’ 이게 이사야에 예언된 겁니다, 이사야 40장에서.
그래서 인간으로 있을 때는 이 아무개, 김 아무개로 있다가 풀이 되면 이 풀, 김 풀, 하다가 그다음부터 말씀으로 바뀌면 이도 빠지고 김도 빠지고 최도 빠지고 다 빠지죠. 왜냐하면 말씀만 남으니까요. 말씀만 남는다는 말은, 말씀은 운동하고 있고 운동하면서 파동(波動)이 일어나요.
파동이 일어나는데 어떨 때는 잠시 높은 파장(波長)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잠시 낮은 파장도 있는데, 그 파장에 대해서 아주 실감이 나는 게 있어요. 여러분 친척 가운데 돌아가시기 직전에 요양병원에서 호흡기 꽂혀 있는 경우 있잖아요. 화면 보면 심장이 뛰는지 안 뛰는지를 파동으로 보여주잖아요. 박자처럼 쿵딱, 쿵딱, 오르내리다가 삐-, 일직선으로 보여주죠. 높고 낮고, 높고 낮고, 그러다가 없어지고 삐-! 그러면 의사가 “운명하셨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하지만 성경은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삐-! 하고 똑같은 거예요. 말씀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인간이 출생했다는 것은 그냥 출생했다는 것이 아니고 아담 이후의 모든 인종들은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거예요. 아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났어요. 그러면 아담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아담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관계없고 태어날 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아무리 살려고 애를 써도 죽음이 잡아당겨요. 죽음을 피할 길이 없어요. 죽음을 피할 재주가 없습니다. 인생이 피곤한 이유를 아십니까? 인생이 피곤한 이유는 살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나의 품성과 안 맞기 때문에 살려고 하고 애를 쓰다 보면 피곤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원래대로 돌리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해서 ‘정녕 죽으리라’하는 그 시점으로 돌리고, 거기부터 나머지 일은 하나님 내 손에 맡겨라, 내 손에 맡기라는 걸 다른 말로 하면 ‘말씀에게 맡기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말씀이 뭘 할 줄 아는데?” 이렇게 나오거든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떡을 먹고 배부른 자들이 예수님를 따라와서 “야, 이 떡은 어디서 구합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네가 나를 찾는 것은 떡 때문인데 이걸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 못하느냐? 네가 하나님 일을 해야 영생을 주지 떡 먹는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서 “그러면 수정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일을 하리이까?”라고 할 때 그때 주님께서 참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나를 믿는 것이, 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6-29).
‘네 나름대로 일할 생각을 하지 마라. 나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예요. 그것과 관련해서 야고보서 2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다음에 나오는 20절의 말씀,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세상에서는 인간이 살다가 죽으면 흙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지금 성경에서는 형제들이니까, 성도니까, 형제들인 성도에게 이야기하기를 ‘인간이 죽는 것이 끝이 아니고 - 인간의 어디까지를 발견했느냐면 -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는 죽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 성경 말씀의 핵심입니다.
인간이 육체인데 죽어서 흙이 되면 ‘까짓거 흙이 되지 뭐. 어차피 피곤한데 흙이나 되자.’ 할 수 있는데 죽는 믿음은 지옥 가는 믿음입니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인데 죽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울산에서 차 태워주시는 이 권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지옥 가는 게 무서웠다’는 거예요, 옛날에 복음을 알기 전에는 그랬답니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한 게 아니고,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속에 담긴 내용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주니 저는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분 이야기 특징은 뭐냐? 전에는 신앙생활을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바뀐 것을 저한테 이야기합니다. 차로 40분 정도 가는 동안 그 이야기를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권사님이 이야기한 것을 내가 주일에 써먹을 테니까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지금 제가 써먹고자 하는 겁니다.
30년 지기 교회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그저 전도, 전도, 전도, 전도만 하는 거예요. 남편이 돈 잘 벌지,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 전도하는 걸 열심히 했단 말이죠. 그런데 전도를 하니까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회개하고, 병이 낫고, 이런 일들이 생기니까 굉장히 재밌단 말이죠.
그런데 권사님이 복음을 알고 서는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대요. 매일 같이 아침저녁으로 남편 붙들고 예배드리고 전도하러 다니는 30년 지기 친구가 너무 안타까워서 참다 참다가 이제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A4용지 넉 장인가를 써서 연습하고, 드디어 찾아갔는데 그 내용은 다 이야기 못 하고 세 가지만 이야기했답니다.
“남편하고 20년 동안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도 마귀 짓이고, 전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것도 마귀 짓이고, 당신 결국 마귀 짓으로 멸망합니다.” 그 이야기밖에 못 했답니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이제는 관계를 그만 끊겠다고 이미 다짐을 했고, 이야기 마치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예상 밖의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그분이 뭐라고 하느냐? “이 이야기는 적어야 해. 잊어버리지 말고 적어야 해. 다시 이야기해봐. 왜 그러는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때 권사님께서 작심하고 나온 말씀이 바로 로마서 10장입니다. 2-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게 이야기의 끝이에요.
그런데 그 권사님이 더 감사한 것은 내가 이렇게 해서 어떤 승리를 했다든지, 나는 아는데 넌 모른다, 이럴 수도 있잖아요. 그게 또 찝찝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넌 네 의밖에 몰라.” 하는 그 말씀이 자기에게도 적용이 될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는 거기에 대해서 또 답변이 궁금하다, 이 말이죠.
그 30년 된 친구분에게 당신이 그동안 하는 일은 전부 다 마귀 일이었다는 걸 분명히 이야기해서 “지금도 마귀 일 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멸망한다” 하고 관계 끊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적어야 해” 이렇게 나왔으니까 저한테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귀신이 하는 일과 귀신이 하지 않는 일이 어떤 차이가 납니까?” 그렇게 질문한 겁니다.
저는 뒷좌석에 앉았고 서목사님은 앞좌석에 앉아 있고요. 답변을 당장 안 해주면 그날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을 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귀신이 하는 일과 귀신이 하지 않는 일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그거 알아서 뭐 할 겁니까? 뭔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소유함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데 지장이 없고 단단히 하겠다는 의식 자체가 우리 안에서 자기 의로 작동합니다.”
그러면 주의 일은 뭐냐? 예수님이 다 하신 일을 내가 믿기만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의 일을 내가 왜 몰라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 일이 나에게 왔다’ 하면 그게 나한테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좋은 일이든지 내 운명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간과 인간을 비교하다 보니까 저 사람이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으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는 거예요. ‘이겼다. 나는 안다. 넌 모르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야고보 시절에, 흩어진 열두 지파 시절에 높은 형제와 낮은 형제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이미 사도 바울도 이걸 알고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로마서 14장에서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어요.
오늘 야고보 이야기는 원초적으로 처음의 구약 내용부터 가요. 왜냐하면 야고보 자체가 열두 지파부터 해서 열두 지파의 그 취지가 흩어진 열두 지파를 통해서 신약 시대에도 이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낮은 형제 높은 형제를 거론하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유하면 자랑질하게 되어 있고 가난하면 기죽게 되어 있다. 자랑질하는 것도 문제지만 돈 없다고 기죽는 것도 같은 문제다. 둘 다 똑같은데 왜 똑같은 걸 안 보고 상대방을 통해서 내 존재 위치를 정립하려고 하느냐?’ 그렇게 지적하거든요.
이런 내용이 야고보서 전체에서 계속 거론되는데 그것은 구약적 바탕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신명기 15장 9-11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7년 면제년이 되거든 빚진 것 다 무효시켜서 다 탕감해주라는 이야기거든요. 신명기 15장 7-8절에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면제년 되었다고 해서 빚진자에게 악한 감정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여호와 때문에 봐주지 안그러면 내돈 다 도로 받아냈어.’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상황은 뭐냐? 부자와 가난한 자를 하나님께서 일부러 뿌려놨다는 거예요. 잠언에도 나와요. 가난한 자나 부자나 사람 손에 달린 게 아니고 하나님 손에 달린 거예요. 그걸 세상에서는 ‘팔자’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팔자 맞아요. 똑같은 돈을 나눠줘도 부자는 부자 되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가 돼요. 돈을 4천만 원 똑같이 줘도 1년 뒤에 보면 하나는 다 날리고, 한 쪽은 40억 되어 있다니까요.
인간 세계에 일부러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와 부자를 구분해 놓은 거예요. 거기서 주님께서 연극을 하는 거예요. 부한 자들이 내가 잘나서 부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이 못나서 가난한 게 아니고 부하고 가난하고 할 것 없이 우리는 한 형제라고 하는 거예요. 형제 사이에는 형제 됨을 형성하신 아버지와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출애굽기 4장 22절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아들이라는 이름의 민족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직 하늘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런 이스라엘의 민족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만들어 놓고, 의도적으로 거기에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형성시켜 놓고, 그다음에 형제와 형제 됨에 있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든지, 네가 날 사랑한다든지 이걸 다 빼고,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키는 자,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우리를 형제로 엮어서 이끄는 그 말씀을 자꾸 실행에 옮겨야 된다는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 못났고 나 잘났다가 아니라, 잘나고 못나고 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라고 구성했던 형제의 원천이 어디 있느냐? 형제의 원천은 하나님 말씀이죠. 언약이죠, 언약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은 낮은 사람, 높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낮은 사람, 높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낮은 ‘형제’와 높은 ‘형제’를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모르는 세상 사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아프리카에 우물 파기, 우물 파는 돈 대주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연극이라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죠. 왜 그렇게 하는가? 인간 대 인간, 서로 형제지간,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한 형제면 서로 잘해주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창세기 4장에서 깨집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고 난 뒤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찾아와서 찾으시는 게 있어요. “가인아 너 어디 있니?” 이렇게 찾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오묘하게도 내가 할 수 있고 내세울 수 있는 걸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내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발로 밟아버리고 처단하고 장애물이라고 여기고 제거해버린 그것을 겨냥해서 노리고 하나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평소에 아벨이 죽기 전에 ‘네 아우가 잘 있느냐’고 물은 게 아니에요. 동생 아벨이 죽고 난 뒤에 그걸 보시고 찾아온 거예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 따먹지 말라고 하면서 찾아오신 게 아니고, 따먹고 난 뒤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고 찾아온 것처럼.
인간은 위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위반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아담 이후에 인간은 항상 죽음의 씨앗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났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안의 죽음이 나보다 내 생존보다 더 세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형제가 아니고요, 낮은 사람 높은 사람의 공통점이 사는 데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WBC 야구 하다가 일본한테 깨지는지 이유도 몰라요. 뭣 때문에 손흥민이 공을 차는지 이유를 몰라요. 이란하고 미국이 싸우는데 이유가 없어요. 가자지역의 전쟁, 우크라이나의 전쟁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 하면서 관세를 왜 올리는지 이유가 없어요. 이 세상이 움직이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왜? 그것은 ‘사람’이니까. 자기를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성도 안에서 인간은 이미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는 죽은 자입니다. 목숨이 끊어져서 죽은 자가 아니라 결국은 삐- ‘쇠잔하리라.’ 쇠잔의 요소 강력한 쇠잔의 능력을 품고 우리는 이 땅에 나이 먹어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세 많은 사람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또 관절이 안 좋지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본질에 가까워져 가네요. 곧 가시겠습니다.” 이게 지금 욕 하는 게 아니에요. 제대 말년인 거예요, 제대 말년. 복역의 때가 끝나는 거예요. 감옥 생활이 끝나는 거예요. 젊은 사람은 멀었어요. 고생 더 해야 해요. 영양제 입에 털어 먹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그때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까?”(창 4:9) 나한테 동생이 필요 없다는 말은 나한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뱀에 의해서 죽은 믿음을 갖게 된 아담의 후손들은 나만 있으면 돼요. 나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하나님도 필요 없고 예수님도 필요 없고 나만 있으면 돼요. 내가 전부에요. 내가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의 가정에서 육적인 형제를 형제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을 다투게 하고 형이 동생을 죽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육의 형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주시하고 그것을 하나의 연극 재료로, 드라마 재료로, 어떤 역할로 삼기 때문에 창세기 9장에 보면 형제를 통해서 한쪽은 복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따로 구분하고, 또 한쪽은 저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저주받는 형제로 따로 구분 짓습니다.
이게 노아의 자식들, 형제들 사이에서 나옵니다. 잘 아시겠지만 창세기 9장입니다. 포도주 마시고 취한 아버지 노아가 정신없어서 바지를 훌러덩 벗은 모양이죠. 그걸 함이 제일 먼저 목격해서 자기 형제들인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그냥 그대로 언급했는데 셈과 야벳은 달랐스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 9:23).
이것을 셈과 야벳이 어디서 배웠냐 하면, 노아 방주의 의미에서 배운 거예요. 방주의 의미란 잘나서 방주에 탑승한 게 아니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게 방주의 기능이었습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방주 안에 함께 탑승한 짐승이 있는데 그 짐승이 해야할 일이 있어요.
죄 많은 인간을 위해 희생해야 할 그 짐승을 방주에 태웠는데 그 본질이 뭐냐? 그 본질이 거룩이에요. 거룩한 것을 소모시켜서 불결한 것을 거룩한 세계에 집어넣는 그 작업이 노아에게 주신 진정한 언약의 구원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 방식을 반복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저주받을 자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야 해요.
동시에 저주받을 자와 구분해서 구원받을 자를 같이 생산하는데 생산하는 그 첫 번째 자리가 형제예요. 어떤 형제? 육의 형제. 아버지가 같지만, 자식들의 갈 길이 서로 다른 거예요, 같은 형제지만 그렇습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그걸 체험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형제들 다 복음 알아요? 교회나 다니겠지요. 아예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들도 많고요.
관심 없어요. 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가인입니다. 자기 기분이 최고예요. 마지막 진리는 내 기분이에요, 내 기분, 나예요. 나만 있으면 돼요. 주님 그게 뭐가 필요한데요? 자기는 필요 없대요. 자기는 정신적으로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는 거예요. 의지가 강한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려 버리죠.
명절 때 보면 슬금슬금 놀려요. “오늘 일요일인데 명절이고 뭐고 교회 가야 안 되나?” 자기는 교회 안 가면서 “너 교회 가는 덕에 구원받자.” 농담인데 조롱하는 식으로 놀리고 있어요. “그래. 너는 좋겠다. 교회 열심히 가니까 천국 가고. 난 술 먹고 지옥이나 갈란다.” 보란 듯이 행패 부리고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성도한테 죽음의 씨앗을 목도하도록 만들어요. ‘아, 저게 죽음의 씨앗이구나. 나한테도 있을 수 있는데? 저건 좀 노골적이네?’
언약이 이렇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현장성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 계속해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모세에서 특히 노골화가 되는데 모세에게 지팡이가 있어요. 모세의 지팡이가 뭐냐 하면, 육에 속한 자들과 언약에 속한, 소위 영에 속한 자들을 분리하는 작업이 바로 이 지팡이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지팡이를 통해서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과 연결을 한 번 시켜봅시다. “높은 형제도 문제고 낮은 형제도 문제인데 다시 형제가 형제답게 말씀과 일치되기 위해서는 우린 뭘 하면 됩니까?” 성경에서 ‘우리를 그냥 다 풀같이 쇠잔하게 하신다. 비를 맞고 떨어진 볼품도 없는 낙엽 같은 존재로 우리를 다룬다’면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할 수가 없는데, 안 되는데 어떡해요?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벌써 모세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모세가 지팡이 든 손을 내밀면 같은 인간이지만 애굽의 인간과 같은 인간이지만 히브리인이라는 인간에게 어떤 차이를 일부러 부여했는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차이를 부여한 거예요. 받을 만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그 차이점이 뭔가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 차이점이 부여됐을 때 진짜 차이점을 아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모르는 자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가 구분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뜸 들이지 않고 미리 이야기할게요. 가만히 있으라. 출애굽기 14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문제는 우리가 가만있지를 못해서 문제에요. 자신의 구원? 자신의 운명? 자신의 미래? 자신의 생존? 생계? 이게 걱정이 되어서 가만있지를 못해요. 지금 낮은, 형제 높은 형제가 서로 자랑하고 미워하다가 갈라섰다는 이 말은, 요즘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둘 사이에 대화가 없다는 거예요. 말이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 나오는 대로, 낮은 형제와 높은 형제, 부한 형제와 가난한 형제가 있는데 한쪽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만 있지 둘 사이에 동등된 입장에서 대화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한쪽은 비판하고 한쪽은 변명하고, 비판하고 또 변명하고, 이것만 있지 대화라는 게 안 돼요.
대화가 되려면 일단은 가만히 있어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뭐가 보이느냐? 아까 출애굽기 14장 1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 앞에 나오는 게 뭐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이 말은 주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겁니다. 주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은, 나는 가만히 있고 주께서 일하심이 주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내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가가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낮은 형제든 높은 형제든, 부자든 가난하든 관계없이 대화가 주님이 하신 일만 대화로서 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그걸 누가 방해했습니까? 잘난 내가 방해했잖아요. 이건 높은 형제뿐만이 아니라 낮은 형제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지금 말 해봐야 돈도 없는 게 말한다고 얼마나 놀릴까?’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자괴감을 갖고 ‘나는 입 다물고 있는 게 최고지. 자랑거리도 없는데.’
누가 자랑하면서 “우리 애가 또 백 점 맞았어.” ‘우리 애는 빵점 맞았는데? 나는 입이나 다물어야지.’ 그런 식으로 입을 다무는 게 아니고 둘 다 입을 다물 때 비로소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우리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스피커 통으로 사용하신다, 이 말입니다.
금요일에 장례식이 있었잖아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차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굉장히 제가 마음에 새겼어요. 전에 김 집사님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장지가 창녕이었거든요. 자기는 그걸 창원으로 들었답니다. 문자 한 개 차이거든요. 창원을 쳐보니까 100km 이상 차이가 나요. 다시 우리 교회 게시판 들어 가보니까 창녕으로 되어 있어서 큰일 날 뻔했어요. 창원에 장례식장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사실은 창녕이었어요.
인간의 말은, 그 출발점이 자기로부터 나와요. 자기의 자랑거리를 품고 이야기하게 되어 있지 “내 죄를 좀 알려줘. 제발 부탁인데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좀 알려줘.” 이걸 의도하고 그걸 목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는 죄인이야. 나는 못났어.” 이것도 자랑이거든요. 이것도 자기 의잖아요. 이것도 자기 의라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줘요. 그 상황 속에서 항상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입 다물어, 입 다물어, 입 다물어!” 그리고 상황 속에서 네가 몰랐던 새로운 경험을 할 때 “입을 열어, 입을 열어, 입을 열어, 입을 열어!” 그럴 때 ‘형제였어, 형제였어, 형제였어’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흩어진 12지파의 관계입니다. 사건이죠.
그 사건에 대해서 신약에서 몇 군데를 찾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모세의 지팡이 역할을 하는 것이 히브리서 10장 9-11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나님의 뜻’이라 했지요. ‘내가 일할 테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할 때의 그 하나님의 뜻이 구약의 홍해 갈라질 때부터 신약까지 계속 쉬지 않고 이어져 온 거예요. 그 뜻이 뭔가를 한번 보세요. ‘내가 하나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시고 그 뜻이 뭐냐?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다. 첫 것이 뭐냐? 율법이에요. 율법을 딱 주니까 ‘나는 율법을 지켰다. 너는 못 지켰지? 나는 율법을 지키는데 너는 율법을 범하는구나. 너는 신앙도 없어. 하지만 나는 신앙이 있어.’ 율법 때문에 낮은 형제와 높은 형제가 발생돼 버린 거예요. 율법 때문에요.
그러면 인간의 본래의 위치 ‘너나 나나 둘 다 쪼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쇠잔 해야 해. 중요한 것은 말씀,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살리는 거야.’ 그 일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율법으로 인하여 높은 자, 낮은 자가 있게 되었으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그 율법을 어떻게 해야 해요? 폐기해 버려야 되죠. 그래서 첫 번째 것을 폐기해야 하는데 그 첫 번째 것인 율법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그 폐기된 율법이 어느 한 분에게 집중이 돼요. 그게 두 번째 겁니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전에 율법이 있을 때는 ‘내 안에 내가 있다’에요. 두 번째 것은 ‘그분 안에 내가 있다’ 입니다. ‘이것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그분이 하셨다’에요. ‘내가 기도했다’가 아니라 ‘그분이 기도했다.’ ‘내가 헌금했다’가 ‘그분이 헌금했다.’ ‘내가 내 인생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로 하여금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신다.’ 내 쪽에서 그분 쪽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바로 옛것과 새것의 구분이에요. 그러면 ‘옛것’은 뭐고, 새로운 것은 어떤 효과를 주느냐? 그 뒤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옛것은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지켜도 추잡하고 더러운 것이 돼요. 속된 것이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은, 예수 안에 계시는, 그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거룩함이 돼요.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으니까 이 거룩함을 얻은 가운데서 뭐가 발생되는가? 새로운 형제가 나옵니다. 새로운 형제가 이 땅에 왜 나와야 하는가? 그게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해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의 이야기죠. 막달라 마리아가 있고 열두 제자도 있잖아요. 구약 때는 ‘형제’라고 이야기했어요.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 바울의 편지 초반에 항상 “형제들아”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 야고보 사도도 형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3절에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쓴 야고보예요. ‘형제들아, 내 말을 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육적인 형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도바울이나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렇게 해서 하나의 형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형제 중에서 또 형제를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게 무서운 거죠. 눈에 보이는 형제 맞는데 ‘형제’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형제 중에서 형제 아닌 자를 솎아내는 작업을 이 말씀이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우리 보고 ‘형제’라고 할 때 “사도 바울님, 우리 형제 맞지요? 예수님이 맏아들이니 우리 형제잖아요”라고 한다면 땡, 이에요.
왜 그러냐? “이제 우리는 형제예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너에 속한 네가 없고, 말씀에 속한 네가 있지?”라고 묻는 식으로 ‘형제’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걸 듣는 우리는 여전히 내 안에 구원받고 싶은 내가 들어 있는 식 그대로 우리가 그 말을 반겨버린다면, 최종적으로 말씀 안의 새로운 형제가 주님에 의해서 발생되는 그 효과가 날아가 버린 사람이 돼요.
그 말씀 자체의 효과가 없어진 사람이 된다고요.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교인들 간에 소송이 일어났어요. 교인끼리 소송이 일어나니까 사도 바울이 아주 탄식하며 안타까워합니다. 6장 2-3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그런데 왜 형제가 형제 보고 소송하느냐는 겁니다. 세상 재판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간다? “왜 소송을 해서 세상 재판관들의 판단을 구하느냐?” 고린도전서 6장 6절에 보면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형제라는 본질을 너희들한테서는 왜 찾을 수가 없느냐? 형제 맞기는 맞아?’ 이런 뜻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형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26-29).
너희들 가운데서 돈이 있든 없든, 배웠든 못 배웠든, 신앙이 약하든 강하든 관계없이 바라보는 것은 뭘 바라보느냐 하면, ‘십자가 지신 주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새로운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규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해놓았는데 분명히 주님 쳐다본다고 해놓고 막상 자기한테 환경적으로, 상황적으로 일이 터지니까 ‘소송으로 가자. 돈 들여서라도 최고의 변호사 대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6장 다시 보면 6-7절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사기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속임을 당해라. ‘속임을 당하면 형제고, 속이는 자는 형제 아니라’는 그 말이죠. 그만큼 우리는 건성으로 성경에서 배웠던 용어들 있잖아요, 형제, 복음, 피, 예수님, 구원, 죄 사함, 이런 것은 잘도 활용하면서 우리의 본성은 바로 가인 같은 본성, 돈에 미쳐 있는 본성, 남한테 지고는 못 산다는 악바리 근성, 자랑거리를 만들어서 내뱉어야 속이 시원하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 저주받은 자의 근성과 본성이 그대로 우리한테 포함돼 있습니다.
이걸 우리 힘으로 제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말씀을 지키라, 가 아닙니다. 인간은 못 지켜요. “말씀이 직접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일치시키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네가 감 잡아라.” 그래서 제가 아까 ‘가만히 있으라’ 한 거예요.
요한복음 20장 17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좀 안다고 만지려고 했어요. 성경에서 이 대목이 굉장히 신비로운 대목입니다. “오, 주님!” 반가우면 만지잖아요. 만지려고 하니까 요한복음 20장 17절에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다시 말해서 ‘내게 아직 남은 할 일이 있는데 내 아버지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형제라는 것을 말씀으로 만들어내게 되면 비로소 내 아버지가 만들어낸 형제가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나를 만질 생각하지 말고 네 형제나 만져라. 형제한테 잘해주는 것이 곧 나한테 잘한 것이다.’
그러면 형제한테 다가설 때는 어떻게 다가선다고 했습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나를 빼기’ 하는 거예요. 감산(減算)하는 겁니다. 빼기입니다. 자랑거리를 더 보태서 나가는 게 아니고, 자랑거리 때문에 혹시 형제가 상처받을까 봐서 감산, 자랑거리를 빼고 이야기하면 자랑거리는 하나만 남습니다.
전도했다, 선교했다, 헌금했다, 예배드렸다,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처음부터 ‘뭐 예수도 필요 없고,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인간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은 믿음’이 끝이에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로 알고 믿고 떠는 거예요(약 2:19). 이제 귀신이 떠는 그 세계에 그 죽은 믿음을 처리하지 못한 인간들도 같이 영원토록 떨게 돼 있어요. 지옥에서 무서워서 떨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 설교를 들었으니 응용 문제를 낼 테니까 속으로 한번 답변해 보세요. 이렇게 쭉 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모든 것을 주께서 하신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오게 되면 그 상황은, 까불려고 했던 나를 잠재우고 주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타이밍으로 새로운 상황들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제가 이렇게 먼저 해답을 드렸습니다. 해답을 드렸으니까 이제 문제를 맞춰보세요. 문제 나갑니다. 나이가 30살인데 4년 동안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는 딸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그걸 가지고 상담합니다. “어미인 나도 사람인지라 도저히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4년 동안 밥만 넣어준 거예요. 세상이 꼴 보기 싫고 말도 하기 싫다고 방에서 안 나오는 거예요.
집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집에 있으면서 가출하는 것도 희한한 현상이에요. 여러분이 해결책을 제시해 보세요. 이게 문제입니다. 설교 들었으니까요. 설교 실컷 듣고 세상에 나와서 그런 문제 있을 때 아무 소리 못 하죠. 제가 정답을 말씀해 드리겠다. 정답 아까 말씀드렸는데 또 말씀드릴게요.
감산하세요, 감산. ‘나는 네 어미고 너는 내 딸이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돼’라는 관계를, 그 육의 관계를 없애야 합니다. 육의 관계를 없애야 해요. 그리고 밑으로 집어넣던 그 양식을 철거해야 돼요. 그 양식 주님이 주신 겁니다. 그걸 철거해야 돼요.
그렇게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딸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물론 자살하는 현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살은 안 해요. 뭐냐? 결국 마지막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한테는 어미도 없고, 아빠도 없고, 세상도 없고, 나는 나한테만 충실하다는 자기의 죽음의 씨앗, 죽은 믿음이죠, 악마가 집어넣은 죽은 믿음, 내가 절대자라는 죽은 믿음, 그거 하나 남을 거예요.
그러면 해결책은? 해결책은 엄마가 내지? 관계 끊어진 엄마는 해결책이 아니에요. 엄마와 그 딸에게 붙여준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상황이에요. 해결은 주님이 하지 엄마가 하는 게 아니에요. 엄마가 해결하려고 하니까 해결이 더 안 되는 거예요. “아이고, 불쌍해라, 불쌍해.” 뭐가 불쌍해요? 내가 보기에 엄마가 불쌍해요. 엄마가 불쌍하다고요.
해결책은 뭐냐? 엄마든 자식이든 부모든 형제든 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주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길 거예요. 주의 일, 모든 인간은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자기밖에, 절대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일을,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는 상황 속에,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멸망이다, 파멸이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벌써부터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을 왜 우리는 진작 몰랐는지요? 하나님 믿는다고 멸망 안 하는 줄 알고, 예수 믿는다고 지옥 안 갈 줄 알았던 우리, 우리에게 속한 우리, 이것이 바로 죽은 믿음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