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 통지서
2026년 2월 22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2-4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12지파가 해야 될 기능을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흩어진’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 기능이 신약의 성도들이 한다는 말은 더는 실패가 없는 신분자로서 이 기능이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미 천국에 합격한 자들입니다. 아파트 단지 등록되지 않는 차량이나 주민은 출입이 불허되는 것처럼, 신약에 와서 합격된 자들이 출현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천국에 거뜬히 합격한 것은 누군가 하늘에게 이들 사람들을 친히 데리려 오신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이란 지상의 인간들이 떼로 몰려온다고 해서 열리는 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단 한 명이라는 성도라면 천국의 문은 열마든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아담을 비롯해서 모든 아담의 후손을 자신이 결국 가야될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그 정당성을 늘 하나님에게 알렸습니다. 즉 “하나님, 그들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지옥에 처벌받는 것이 마땅합니다”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악마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이 사실을 숨깁니다.
인간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아직 남아 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구원 문제다. 미해결된 것이다. 노력하라. 그리고 쟁취하라”고 말입니다. 주님도 인간의 딜레마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러나 성도란 이미 천국에 합격된 자들이며 이들에게 있어 더는 미-해결된 문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규정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즉 이미 합격한 자를 곧바로 천국으로 불러올리지 않고 세상에 도로 보내어 남은 삶을 살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했던 그 시련을 같은 겪게 하시고자 합니다. 이 시련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천국에 합격한 상태이기에 시험으로 인해 시련을 당하면 도리어 기뻐합니다.
가룟 유다는 정신적으로 마귀에게 시달렸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 갈 길, 곧 지옥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천국에 합격한 자들은 이 ‘합격된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의 시험으로 인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비로소 대단치도 않은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대단치도 않는 존재로서 예비 지옥인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해서 무기징역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반면에 성도는 이 ‘대단치도 않는 존재’가 자신임을 알아 늘 실패할 마음 준비를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실패의 일관성으로 인해서 그 어떤 실패나 성공도 ‘이미 합격했음’을 취소시킬 수 없음에서 오는 기쁨을 만끽하게 됩니다. 반면에 성도가 아니면 성도를 흉내내는 가짜들에게는 악마가 작성한 가짜 합격통지서가 날아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착함과 나의 의로움이 나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한다”입니다.
즉 가짜의 특징은 항상, 자기 잘남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이스라엘가 국가적으로 출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위상을 통해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떠한 국가가 되어야 함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그 예가 출애굽기 4:6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모세의 돌출된 손은 멀쩡한데 품 속에 넣었다 빼니 문둥병 걸린 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로서 모세는 속과 곁이 따로 겹쳐진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스라엘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인간이 바깥으로 나온 신체적 움직임을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행동은 대외적 시선과 평가 때문에 늘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조정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행동을 나타내는 내부적인 행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치에 대한 폭발성으로 내부에 잠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아 마땅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수치성은 선악과 과실을 따먹으면서 필연적 후유증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즉 자신은 어느 때, 어디서나 수치를 지니고 다니는 존재가 된 겁니다. 이 수치를 덮고 지우기 위해 온갖 선행을 다 생각해보지만 삶의 환경이 보조를 맞춰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둘러싼 이 세상이 혼돈+혼돈+혼돈 이고 무질서+무질서+무질서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이 무질서와 혼돈의 일부가 타이밍 맞춰 잠간 굳어진 것에 해당됩니다. 이 우주의 골격과 뼈대는 무질서와 혼돈입니다. 인간은 자기 수치를 감추기 위해 억지를 부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이 억지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1
-44)
창세기 3:14에서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를 내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이 저주성을 모세에 담고 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담았습니다.
이 저주를 풀려나오는 것은 공중을 나는 두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의 새가 물 위에서 죽고 나머지의 새가 되어 도로 공중을 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완치되어 다시 진영으로 복귀할 때의 의식입니다.(레 14:5-7) 이처럼 성도는 이미 구원된 구조에 속하기에 이 지상에서 과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이로서 성도 자체가 주님의 지으신 노래의 가사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노래에서 같이 계시는 주님의 노래를 부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야고보서 1장 2-4절(합격통지서) 26022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2-4절입니다.
야고보서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형제’라고 하는 것은 열두 지파의 연속성입니다. 열두 지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부터 흘러 내려오는 겁니다. ‘열두 지파로 옛날의 이스라엘이 했던 그 기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그 구약의 열두 지파는 인간들의 모든 부족한 것, 잘못된 것, 불신앙, 우상 숭배 등을 발휘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절에 보면, 그 열두 지파가 흩어져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흩어져 있는 상태지만 열두 지파가 해야 할 그 기능은 멈추지 않고 지금껏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혈육에 의한 열두 지파는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혈육적인 열두 지파는 실패로 끝났지만 열두 지파의 그 기능은 연속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천국에는 보안 시스템이 있어서 아무나 넣어주는 게 아니에요. 어떤 회사나 보안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건물, 관공서나 법원 건물은, 사람들이 우우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 문이 열리는 게 아니에요. 심지어 주민 차량이라는 표식이 없으면 아파트의 주차장에도 못 들어가잖아요? 그게 보안 시스템의 일종인데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천국의 보안 시스템이에요.
사람들은 자꾸 오해하는데요, 많은 사람이 교회 나오면 그 교회의 천국 문은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가볍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여러 명이 밀어붙인다고 천국 문이 열리는 게 아니에요. 교회 숫자 많다고 천국 문 열어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천국 문은 열리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등록된 사람이기 때문에 문이 닫힐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르르 떼로 몰려가면 하나님께서 좋아라, 하고 문 열어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망했어요. 그런데도 야고보서 1장 1절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있고 그들에 대해서 2장 1절에는 “형제들아” ‘형제’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예배 시간에 늦더라도 형제가 오면 얼마나 좋아요. ‘형제들아’라고 언급이 되어 있단 말이죠. 형제라는 말을 한 것은 합격한 사람입니다. 천국에 합격한 사람이에요. 문이 열리는 거예요, 이제는. 그 사람은 언제 오더라도 센서가 달려 있어서 천국 문이 자동으로 쫙쫙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거든요, 주님의 형제, 그리고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중에 한 사람, 합격 된 사람이죠. 합격 되는 것은 “나 합격했다”라고 우긴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통지서가 와야 하죠, 합격했다는 그 통지서. 그 통지서에 대해서 야고보서 2장 2-3절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하면, ‘시련’입니다. 합격통지서가 ‘시련’이에요.
‘시련’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시험’과 관련되어 있어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시련’은 고생이 아니에요. 고생이 아니고 ‘시험’과 관련되어서 주님이 당했던 그 시험조차도 너끈하게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시험하는 자는 누구냐? 시험하는 자는 마귀예요. 마귀의 시험이 오고, 그것이 본인에게 시련으로 닥치고, 그런데 그 시련이 바로 합격했다는 통지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험’이 없는 자, 다른 말로 해서 ‘시련’이 없는 사람은 통지서를 못 받은 사람이에요.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마귀가 그대로 남은 열두 지파인 형제들에게도 테스트하는 겁니다. 시험하는 마귀의 진면목은, 가룟 유다 속에 들어온 악마로 보면 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마귀의 시험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포기하게 만들고 팔아먹게 만드는 식으로 악마가 우리에게 찾아오고, 그렇게 찾아올 때 성도한테는 합격 통지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운 말이죠?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쉽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생합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있으면 고생 A, 고생 B, 고생 C,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사는 게 다르지만, 고생한다는 것은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고생해야 할 이유는 창세기 3장에 나와 있습니다.
16-19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네가 땅에서 종신토록 죽을 때까지 수고해야 한다. 이 땅 자체가 저주를 뿜어내는 땅이기 때문에 넌 그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넌 죽을 때까지 고생해라.’ 그래서 고생이 오죠. 불신자한테는 그 고생이 와요. 그런데 신자한테는 고생이 오는 게 아니고 ‘시련’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자칫 잘 못 생각하면 ‘고생 많이 했으니까 천국에 넣어주겠지. 이만한 고생을 누가 하겠냐? 이 정도 고생했으니까 편히 쉬라고 하나님께서 구원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고생은 누구나 하는 거예요.
‘시련’은 뭐냐? 예수님의 형제, 천국의 백성이고 이미 합격 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왔던 시험,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던 그 동일한 시험이 특화되어 그 사람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예수 포기해라!” 쉽게 말해서 이런 거죠. “믿을 만큼 믿어봤잖아. 믿어 봤는데 뭐 소득이 있었어? 별 소득이 없잖아. 이쯤에서 발을 그만 빼지? 별 이익도 없는 데 왜 계속 발을 걸치고 있어?”라는 식입니다. 가룟 유다가 마귀로부터 늘 당한 그 속삭임, 그런 시험이 하나님께 합격 된 자에 국한해서 계속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합격이 되지 않았으면서 합격 된 것처럼 느끼는 경우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합격 된 적은 없어요. 합격 된 적이 없는데 합격 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 이것을 저는 ‘문제 미해결 된 자’ 구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라고 하는데, 이런 자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구원은 따내야 하겠는데 역량은 모자라니까 ‘하나님이여, 내 구원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용을 쓰고 애를 쓰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결국 실패합니다. 성공하지 못해요.
그러면 성공한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나 구원받았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상태에서 도로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 이미 문제가 해결된 사람입니다. 이게 로마서 10장 15절에 나오는데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이 나와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주님께서 예수님이 살았던 이 저주받은 땅에 합격 된 자를 파견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까지 어떤 수모와 시련을 받았는지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합격 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통지서에요.
사도행전 19장 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악귀는 마귀지요. 진짜 마귀가 귀신같아요. 합격 된 자, 이미 천국 아파트에 주민으로 등록된 자와, 아파트에 들어가서 거주하려고 애쓰는 자를 마귀가 이미 알고 있어요. 구원되려고 애쓰는 자와 이미 구원이 되어버린 자의 차이를 마귀가 알고, 그것을 아는 마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귀로 하여금 택한 백성에게 시험 하도록 허락을 한 거예요.
이것은 욥기와 똑같은 거예요. 욥은 이미 구원된 자이기 때문에 마귀로 하여금 마음 놓고 유린하고 시험 하도록 허용을 한 겁니다. 욥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사람이거든요. 오실 예수님이 어떤 수난과 고난을 마귀로부터 받는지를 욥이 자기 시대에 먼저 앞서서 자기 몸을 통해 발산했던 겁니다.
그러면 오늘의 성도는 뭐냐? 성도는 이미 합격했어요.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분이잖아요.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몰랐는데, 주님께서 이 시대에 마귀를 보내서 ‘예수님이 이런 시련을 겪었고, 이런 인내를 가졌구나.’ 하는 것을 우리로 체험하는 기회를 허락하는 것, 이게 바로 합격 된 자에게 주어지는 통지서에요.
천국에 합격 됐다는 말은, 구원 문제에서 이미 해결을 봤다는 거예요. 이미 해결을 본 거예요. 해결을 봤기 때문에 미해결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미 합격 된 자가 이 땅에 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체험을 하느냐? 실패하는 체험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 가운데 혹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변호사 시험 준비하는 그분이 만약에 성도라면, 이미 천국 아파트에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그가 다가서면 천국 문이 자동으로 쫙 열리게 되어 있는 그런 합격자라면, 천국이 자기 집이라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것 자체가 실패입니다.
왜냐하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천국 패스(합격)를 취소할 수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지금 머리 나쁜 분들 이해 못 합니다.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변호사 시험 준비해서 합격했을 때 ‘아, 이게 실패구나.’ 새삼스럽게 실패를 느끼는 거예요.
나이 서른 중반 되었어도 딸이 시집을 안 갔는데 어느 날 구정에 어떤 남자와 함께 와서는 “이 남자 좋아합니다. 이번 가을에 결혼합니다. 예식장 다 준비했어요” 할 때 ‘저게 노처녀로 늙어 죽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휴~, 실패했구나. 드디어 실패했어. 드디어 딸을 내 소망대로 시집보내게 되었구나. 제대로 실패했네.’
내 소망, 은근히 내가 기대해 온 모든 것이 또 하나의 파동, 실패의 물결 중의 하나로 다시 체험되는 거예요. 이게 실패의 일관성이에요. 그 실패의 일관성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실패, 실패, 실패….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찜을 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천국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육적인 이스라엘은 다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고대했어요. 특히 예수님을 잡아 죽였던 그들이 얼마나 메시아를 고대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의 성공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알았어요. 마태복음 5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이 천국 가기 위해서 자기 의와 자기 착함을 유지하고 챙기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의 천국 가려는 그 노력 자체가 반드시 실패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고, 자기 노력에 실패하는 자만이 이미 천국 입성에 성공한 자, 합격한 자라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던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것이 실패하게 만드는 그 작업을 위해서 지금도 마귀는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마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모든 노력을 실패로 만들어요. 의사 시험 합격이라는 실패, 편한 데서 지내다 군대 제대하는 실패,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업하는 실패, 엄마 아빠가 걱정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실패, 자기가 알아서 아파트 장만하고 독립해서 “어머니 아버지, 병들어도 제가 내내 모시겠습니다” 하는 효도라는 이름의 실패, 그 모든 실패에서 오는 환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왜? 세상에서 성공으로 이해하는 그것은, 천국의 합격이라는 기쁨을 앗아가기 위해서 땅에 속한 육신이 만들어내는 마귀의 시험 거리였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합격시킬 때는 조건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도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과 피로서 천국에 합격시켰다면 그 가치가 나의 기대에 의해서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면 안 되거든요. 그저 실패와 실패의 일관성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에요. 우주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주 자체가 ‘혼돈+혼돈+혼돈+혼돈…= 질서’에요. ‘무질서+무질서+무질서…=질서’입니다.
혼돈이, 무질서가 우주를 이루는 골격이요, 뼈대입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종잡을 수 없어요. 종잡을 수 없는데 우주는 지금도 뱅글뱅글 돕니다. 우주의 별들과 천체는 다 돌고 있어요. 안드로메다 은하계부터 해서 지구도 돌고 있고, 달도 돌고 있고, 전부 다 돌고 있어요.
그런데 왜 도는지를 인간이 몰라요. 왜 도느냐? 말씀드려요? 설명해 드려요? 혼돈과 혼돈이 쌓여서 돌고, 무질서와 무질서가 쌓이고 만나서 도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라는 것 그 자체가 무질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 내 인생이 정리됐다고요? 그것은 혼돈입니다.
사람이 ‘나는 이렇다’고 나름대로 정립해서 제시하잖아요? 그것은 혼돈 속에서, 소위 찻잔 속에서 파도치는 거예요. 숱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에 하나의 타이밍을 잡아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그냥 타이밍이에요. “왜 내 사업이 망했는지 모르겠다.” 이러거든요?
사업 잘되는 것도 타이밍이고, 못 되는 것도 타이밍이고 이것은 내가 손댈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저 사람인데 왜 다른 남자랑 결혼했지?’ 사랑할 때, 미워할 때, 죽을 때, 살 때, 헤어질 때, 만날 때가 전부다 타이밍입니다. 모든 것이 각자 때가 있어요(전 3:1-11).
내가 죄를 지어서 망한 게 아니에요. 타이밍이 잘 맞았으면 성공했을 거라고 여기는데 타이밍이 잘 맞아서 성공하는 게 아니고요, 성공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모습의 혼돈이죠. 역시 무질서에요. 인간은 대단치 않아요. 며칠 전에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인간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대단치도 않은 인간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무기징역이 뭐냐? 기한이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기한이 없이 대단치도 않은 이 세상이라는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살고 있습니다. 전부다!
왜 모든 인간은 죄수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는가? 마귀가 이렇게 제안합니다. 마귀가 하나님한테 “인간 모두를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내가 가는 곳으로 끌고 가겠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일부는 내가 데려갈게.” 이게 질서입니다. 이것만이 혼돈이 아니고, 이것만이 질서예요. 주님이 악마에게 내린 지시 사항,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에게 있던 약속, 그게 질서고 그게 혼돈 아닌 거예요. 나머지 모든 것이 전부 혼돈이고 무질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리면, 야고보서 1장에서 열두 지파부터 이야기해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했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되 지금은 어떤 상태냐? 신약의 흩어진 열두 지파가 옛날 열두 지파가 했던 기능을 이어받아서 계속해서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
야고보서 1장 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악마가 도전하고 부정하고 의심했던 그 시험이 형제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열두 지파로 확정된 자들에게 찾아가게 될 것이다. 찾아가는 그 시험을 너희들은 온전히 기뻐하라.’ 그게 야고보서 1장 2절에 나오죠. ‘예수님이 당했던 그 시험을 받거든 기쁘게 여기라.’ 그 통지서가 날아왔거든요.
“주님이여, 제가 뭔데 주님이 당했던 그 시험을 주시는 겁니까?” 이렇게 기쁘게 여기라는 것. 왜? 천국 합격은 우리의 어떤 실패에도 취소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이미 합격 된 자의 합격성, 그 합격의 능력은 네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타이밍상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몸소 체험해라’ 그 말입니다. ‘아, 이래도 합격이고 저런 일이 일어나도 합격이구나.’
천국에 이미 합격했다는 것, 천국이라는 장소와 구조가 이 땅에 있는 힘과 역사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이미 되어진 결과를 증명하는 과정 속으로 주님께서는 흩어진 열두 지파를 보낸 거예요. 우리는 그 과정 속에 있는데 그 과정은 뭐냐? ‘이미 합격했습니다’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계속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시련이라는 것은 ‘천국 합격은 취소되지 않는다’라는 것, 그러나 마귀가 취소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겪게 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이게 마귀 입에서 나온 이야기거든요. 사도 바울은 그걸 알았으니까 편안하게 살았을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 고린도후서 11장, 12장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고생을 얼마나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생을 그렇게도 했지만, 마귀가 알아봐 줘요, 사도 바울이 이미 합격한 자라는 것, 비록 그에게 무시무시한 인생의 고난과 고생이 온다고 할지라도,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사도 바울에게 내려진 생명의 면류관을 취소할 수가 없다는 것, 합격 통지서를 취소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대단치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걸 조금 더 심화시키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합격이 되지도 않았는데 합격 됐으면 좋겠다, 좋겠다…, 하다가 ‘합격 됐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거는 사람에게는 뭐가 주어지는가?
마귀가 만든 가짜 합격 통지서가 주어집니다. 이걸 또 아셔야 해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을 같이 겸하여 앎으로서 진리 됨이 부각 되거든요? 가짜 합격 통지서의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회사에 취업 지원서 냈는데 불합격된 사람에게 회사 이미지를 생각해서 보통은 좋게 이야기하잖아요?
불합격 통지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함께 일하게 되지 못한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너 잘렸어, 너 떨어진 거야.’ 그런 이야기잖아요. ‘함께 일하지 못하게 된 점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안타깝게 여깁니다.’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지옥 가는 사람에게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안타깝다는 겁니다.
“차라리 넌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마 26:24).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가룟 유다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난 너하고 함께 일할 생각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합격 통지서를 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넌 내 형제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고 열두 지파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와 같이 일하게 된 것을 굉장히 기쁘게 여겨라.” 그 말입니다.
자, 여러분, 이제 감이 오십니까? 천국에 불합격된 사람의 특징은, 합격 되나 불합격되나 자기밖에 모른다는 점, 역시 모든 의미가 홀로 자기에게만 소환된다는 그 점입니다. 반면에 합격 된 사람은 이제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곁의 주님이 나보다 더 소중하고 근본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에게 의미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타이밍 맞춰 이런 일들 저런 일들이 생겨난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합격 된 사람의 특징은…, 지금 졸고 계시면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기 인생의 어떤 경우에도 본인이 책임질 일은 일체 없습니다. 본인이 책임질 일이 일체 없어요. 합격 된 자에게만은 그래요.
그런데 합격 되려고 애쓰는 사람, 합격됐으면 좋겠다는 사람, 교회 다니고 복음 알아서 죽고 난 뒤에 반드시 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자기 몸에 콜타르 같은 것, 찐득찐득한 콜타르 같은 것들의 정서가 붙어있어요. 이게 안 떨어집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뒤범벅이 된 사람이에요. ‘나 어디까지 착하나?’ 애들 놀이에도 있잖아요. “어디까지 왔~나?”
악마에게서 온 가짜 합격증 내용은 이렇습니다. 악마가 발급한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발급할 때는 나름 자신만만해요. 불합격된 자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이에요. ‘너의 착함과 의가 너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한다.’ 이겁니다. 다시 한번 읽어드릴까요? 이게 마귀로부터 왔는데요, ‘너의 착함과 의가 너의 행복한 미래를 보증해 준다.’
네가 교회 나갈 때마다 착한 일이 ‘바를 정(正)자’처럼 추가되고, 헌금 하거나 전도하거나 봉사할 때마다 착한 일이 계속 추가되는 거예요. 예배 참석도 30분 전에 일찍 와서 또 추가될 뻔했는데 오늘 마라톤 경기로 늦는 바람에 삭제가 됐어요. ‘아, 마라톤 대회만 아녔으면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이게 콜타르처럼 찐득찐득해서 떨어지질 않아요.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교회 안 다니는 내 자식에게 분명히 좋은 행운이 따를 것이라는 거예요. 내 자식은 교회 안 다니지만 나라도 교회 열심히 다녀서 그 업보 - 불교 용어에요 – 그 업보가, 이 행운이 나에게 오고 넘쳐서 교회 안 나가는 내 자식에게까지도 도달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남편은 교회 안 다니고 아내가 교회 다니니까 “열심히 교회 다니래이! 니 교회 다니는 거 내 안 막는대이.” 열심히 교회 다니고 착해서 얻은 그 복이 나에게 덤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교회 안 나가도 교회 잘 나가는 우리 엄마 아빠가 날 지켜줄 거라는 의식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합격 되지 못한 불신자의 특징은, 항상 모든 이익과 의미가 어디에 쏠린다고요? 나 단독자에게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 착한 사람을 원해요. 내가 원하는 이웃은, 착한 이웃이고 착한 친구입니다. 어느 정도로 착해야 하는가? 내가 어떤 짓을 하고, 어떤 화를 퍼붓고, 어떤 횡포를 부린다고 할지라도 그 친구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기를 원해요.
“네가 그렇게 성질을 내도 난 널 믿어. 넌 원래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잖아. 네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난 널 인정해. 네가 이상한 짓을 한다 해도 그럴 만해서 그랬을 거야”라고 이해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친구로 또는 배우자로 찾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욕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잘못한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 붙들고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네가 용서 해줄 거지?”라고 이야기할 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어요. 내가 너한테 용서를 구함으로써 ‘나는 남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네가 증명해 줘.’
남편의 폭력을 감수하는 아내가 이혼해 달라고 할 때 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나는 술 먹고 성질이 나서 널 때리기는 했지만, 곧장 돌아서서 백 사주고, 다른 선물도 사주면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게, 라고 내가 충실하게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과했다. 나에게 그런 착하고 순수한 진심이 있다는 것을 네가 빠져버리면 누가 증명해 주나? 넌 나의 우수함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내 곁을 떠나면 안 돼.’라고 요구하는 남편, 아, 인간이 이 정도로 못됐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지옥 만드는 이유가 이제 납득 되시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기의 착함을 포기 못 하는 게 인간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또 예를 들겠습니다. 아프리카의 튀니지라는 나라에서 민족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 계기가 있어요.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ed Bouazizi, 1984-2011)라는 어떤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행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경찰이 와서 “등록증 좀 봅시다.”해서 행상 등록증이 없다고 젊은 애를 때리고 다 부수고 벌금을 매겼습니다. 그래서 그 부아지지라는 20대 청년이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붓고 자기를 불태웠어요.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튀니지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나 독재자가 쫓겨났어요. 그것이 2010년 12월 17일의 일입니다.
또 하나 있어요. 이름도 어려워요. 1963년도에 틱꽝득(Thích Quảng Đức, 1987-1963)이라는 남베트남의 승려가 분신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남베트남이 천주교를 국교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불교를 탄압하니까 그 승려가 미 대사관 근처 거리에 나가서 휘발유를 자기 몸에 붓고 불을 붙여서 저항했습니다. 그다음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남베트남 정권이 쫓겨났어요.
자기 몸에 불이 붙었는데 다 탈 때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대로 있었어요. 불교의 위대함, 불교의 고집 같은 거지요. 이것은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과 똑같아요. 스스로 목매서 자살한 그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왜 사람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전제로 살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입니다. 수치스럽기 때문이에요, 수치. 수치에서 공포가 나오고 공포로 인해서 남에게 폭력을 행하지 못할 때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해요. 그게 자살이에요. 모든 공포는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행동의 출발점은 수치스러움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무질서하다는 그 자체가 수치스러운 겁니다.
수치스럽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안이 뭐로 무장되어 있느냐? ‘나는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분석하기에 절대로 나는 수치스러운 존재로 드러나면 안 되는 가치 있는 인간’이에요.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래요. 본인이, 나는 착함이 뭔지를 알고 선함이 뭔지 알고 악이 뭔지 알기 때문에 반성도 할 줄 알고 회개도 할 줄 알기 때문에 수치스러우면 안 돼요.
그런데 실제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나의 착함과 의로움에 대해서 제때 타이밍 맞춰서 인정을 안 해주니까 그게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그것이 평소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여기서 좀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그것은 점잖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명분이 있어요. 그것을 ‘행동화’라고 해요. 명분도 없고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나는 것, 그것을 ‘행위화’라고 해요.
일단 행동과 행위로 나누는 겁니다. 행동이란 외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위는 숨어 있다가 ‘내가 왜 이런 행위를 하지?’라고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울컥, 하고 나오는 그것은 행위인데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면 행동이 되는 겁니다. 행동은 신체와 관련되어 있고 행위는 정신과 관련되어 있어요.
주님께서는 정신을 보거든요. 인간의 모든 정신은 이미 마귀로부터 장악 돼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세상을 나 중심의 질서 잡힘, 나 중심으로 규격에 맞는 세상, 나와 친한 사람이라든지 식구나 내가 원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실패 없는 행복한 인생 살기를 원하는 그 질서, 그것을 강력하게 하나님께 요구하면서 우기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만한 주장을 할 권리가 있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은 혼돈이라 했지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했지요. 모든 것은 수치스러워야 마땅한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구약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몰랐어요.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지만 자기의 정신만은 율법에 맞출 수가 없었어요. 행동은, 형식으로는 제사를 드렸지만 그 마음만큼은 자기가 컨트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로 만들어지기 전, 12지파의 국가형태로 되기 전, 애굽의 노예로서 히브리인으로 있을 때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고 율법의 취지를 모세의 행동화로 보여줬습니다. 행동이라는 것은 신체와 관련해서 외부로 나타나는 것이고, 행위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의 취지를 모세를 통해서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출애굽기 4장 6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뭔가 어떤 소스를 찍어 먹는 장면과도 같지요. 모세의 손이죠, 신체입니다. 그 손을 품이라는 신체 안에 집어넣었어요. 품은 내부고 손은 외부로 나타나 있습니다. 외부의 것을 신체 내부에 집어넣었다. “빼보아라.” 빼보니 문둥병이 되었어요. 문둥병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제일 기피하는 저주의 모습입니다.
문둥병은 못 고쳐요. 고칠 수가 없습니다. 평생 남들의 기피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진 밖에서, 거룩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거룩에 반대되는 저주받은 모습으로 살아야 마땅한 것이 문둥병입니다. 모세의 내부는 문둥병자고 바깥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양면성이 서로 겹쳐져 있어요. 겹쳐진 그 모세의 모습을 열두 지파의 모습으로 주께서 확산시키고 확대시켜 나갑니다.
풍선 불 듯이 모세를 통해서 훅, 하고 바람을 불면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로 전이되는 겁니다. 그 안은 문둥병자고 바깥은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모세를 따라나온 이스라엘이 해줘야 할 것은 뭐냐? 간단해요.
‘나는 왜 저주받아 마땅한 문둥병자인가?’ 이것을 알면 돼요.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모세율법을 통해서 알게 해주신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레위기 11장 41-4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구분해 주셨는데요, 그렇게 구분하는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찌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찌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이것은 뭐냐?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뱀 속에 들어왔거든요. 송아지도 있고 코끼리도 있고 호랑이도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뱀 속에 들어오게 했는가? 뱀으로 하여금 땅을 기게 함으로 말미암아, 땅에 더욱더 밀착하는 그 기능이 악마가 인간의 정신을 장악하는 목표점이고 방향성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저주를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창세기 3장 14에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으로 하여금 땅을 기면서 먼지나 먹도록 저주했던 겁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보게 되는 뉴스나 유튜브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땅을 기는 이야기에요. 다 더러운 이야기라고요. ‘문둥병자입니다’라고 광고하는 이야기들이에요. 미국의 트럼프나 한국의 정치 이야기가 다 그 이야기에요. 여행 가봐야 땅에 관한 이야기만 보여요. 철저하게 마귀 사람이나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은 먹고 이것은 먹지 말라고 할 때 얼마나 귀찮게 여겼겠습니까? 너무너무 귀찮게 여겼을 거예요.
그러나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피를 흘려요. 피를 흘려서 땅을 추구하는 자의 죄는 땅에서 흘린 희생 제물의 피로써만이 사함을 받아요. 그 외에는 사함을 받는 경우가 없어요.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이 땅에 오신 겁니다. 땅에 뭘 자꾸 흘려요. 레위기 12장에 보면 여자는 남자보다 곱빼기나 더럽다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월경 때문입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문둥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둥병 들린 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스라엘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합니다. 불합격이에요. 저주받았으니까요. 그런데 그 저주받은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자비로 깨끗하게 되었는지 아닌지 제사장이 진찰합니다. 진찰해서 깨끗해졌다 싶으면 그제야 문둥병에서 온전히 완치되었다고 판정을 내리고 이스라엘의 진으로 복귀하게 하는데 그냥 들어오면 안 되고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마중나오는 그 사람이 문둥병자였거든요. 3-4절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고칠 수가 없고, 고침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입어서 천국에 합격이 되는 경우는 제물 되신 분을 통해서 모든 율법이 완성되어야 성립되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게 땅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다시 레위기 14장으로 가서 보면 제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4-7절에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찌며.”
이게 무슨 뜻이냐? 문둥병자가 치료되었잖아요. 치료된 문둥병자를 놓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미 천국에 합격했으니까, 이미 구원된 구조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 문둥병자가 보여주는 것은 합격된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거예요. 문둥병자의 그 시작점에는 문둥병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제물이 되신 예수님이 함께 합니다.
마귀가 “모든 인간은 제가 다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보고 “아니다. 다는 아니고 일부는 내가 데려간다.” 예수님이 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데려갈 사람과 함께 시작해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함께하신 예수님이, 내가 담당할 수 없는 죄 씻음의 율법의 희생을 대신 담당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물 위에서 잡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서 피를 흘립니다. 그 흘린 피를 우리한테 발라요. 그 때 우리는 피 묻은 옷을 입게 돼요. 예수님이 벗어놓은 옷을 입는데 그 옷은 피 묻은 옷이에요. 지난 수요일에 엘리야 엘리사의 관계와 기능을 말씀드렸잖아요. 주님의 피 묻은 옷을 입게 된 거예요.
그리고 새 두 마리중에서 나머지 한 마리는 어디로 갔는가? 하늘로 가버렸어요. 새는 원래 하늘을 날게 되어 있으니까요. 하늘로 갈 수 없는 자의 운명이, 동반했던 분의 최종 운명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통지서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그 말이지요. 그때는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가사 누가 썼습니까? 누가 썼지요? 어떤 유명한 작사가가 썼습니까? 천사가 부른 노래인데 그 노래 가사는 누가 썼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썼지요. 하늘나라에서 쓴 가사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그 내용에 저와 여러분이, 합격 된 자가 들어간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소환될 의미는 없어요. 주님의 찬송가 가사로 빠져들어 가는 겁니다. 거기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룰루랄라~, 노래하는데 그 모든 노래가 “합격 됐어요! 주께서 합격시켜 줬습니다”라는 가사 내용이 성도의 남은 한평생의 모습이라는 그 말입니다. 어디서 뭘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 전부 “너 같은 인간도 내가 합격시켰다”라는 가사 내용으로 앞으로 주님 만날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이어질 겁니다.
그게 유일한 질서에요. 우리 생각은 혼돈입니다. 혼돈 가운데서 우리를 주님께서 주님의 가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주님이 만드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가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바로 흩어진 열두 지파가 해야 할 일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도저히 생각도 못 한 생각을 하게 해주옵소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게 하옵소서. 땅을 박박 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생각, 공중의 새처럼 하늘을 날고 거기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자들의 생각, 이 모든 것이 주님 찬송가의 가사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