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예수님의 호주머니

아빠와 함께 2026. 2. 9. 09:10

예수님의 호주머니

2026년 2월 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22-25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음을 명백히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출생을 자아의 시작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슨 계획에 의해서 출발하는지, 그리고 그 출발의 속성이 어떻게 스스로 완성해서 마감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의 세상 설계는 그 안에 인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 세상이 받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디모데가 옥에서 풀려나오는 현상입니다. 디모데를 옥에서 풀려나오므로서 디모데 및 사도 바울 및 이탈리아에서 온 성도 및, 그리고 이 히브리 편지를 보고 듣는 모든 성도의 위치가 같은 위치에 있음이 확인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말씀의 원형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경험에 합류하는 운명을 갖게 됩니다. 디모데가 옥에서 풀려나오고 이탈리아에서 온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 연락을 주는 현상이 이 세상이 주님의 은혜가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할 때,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분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리고 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법제도에 묶어서 옥에도 가시고 결국 사형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을 거쳐서 부활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녀가신 경로를 통해서 아는 바는 인간 세계는 자체적으로 감옥을 만들었으며 그 감옥의 특징은 일체 ‘부활의 능력’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즉 인간들이 일평생 고생하면서 수고하면서 한 모든 일들이 감옥을 만드는 일이고 그 감옥은 자기 자신마저 가두어두는 감옥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이 자폐증 환자로 넘실대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충실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 자체를 감옥으로 만드는 데 있어 협조자는 조건이요 요소로서 꾸진히 참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본인이 아는 자아를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천사로 만드실 작정이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
30) 인간이 천사 수준으로 격상되려면 기존의 인간 속성의 내부가 다 바뀌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져야 할가요? 그것은 예수님의 지닌 속성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속성에 대해서 히브리서 7:1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이 멜기세덱이라는 분은 왕+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 7:3에는 더 세밀해서 소개합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러한 속성을 현실적으로 구현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멜기세덱이라는 실제 인물은 예수님의 겨냥해서 모형과 그림자로서 미리 아브라함을 실제로 만나게 된 인물이었습니다. 왕이라는 신분은 누구를 초연하게 다스리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9:28에서 예수님께서 제자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즉 이미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과 더불어 왕의 신분으로 살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땅에 살고 있습니다.

땅에 있을 때는 제사장 기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2:9에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될 자들을 예수님의 모형과 그림자로 사용하셔서 그들 속에 뜨어들기 전에 앞서 이스라엘에 예언된 말씀을 남겼습니다. 왕직+제사장직에 대한 예언은 스가랴 선지자에게도 알려졌습니다. “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 3:3-5) 이 여호수아는 제사장직에 해당되는 기능입니다.

스가랴 예언에서 왕의 역할은 스룹바벨이 맡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천사의 예언은 이러합니다. “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슥 4:11-14)

이로서 이스라엘 내부의 12지파가 어떻게 레위지파(제사장직)에서 유다 지파(왕직)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이어져 왔는지가 드러납니다. 메시야는 이 유다의 자손으로 오셔서(롬 1:3) 스가야 4장의 예언대로 자신으로부터 기름을 부어,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의 등장을 성사시키십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주님에 의해서 성도는 자신의 무능성을 기뻐합니다. 마치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반복적으로 자기주의가 해체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은혜로 개입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나’라는 내가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음 출발점이 아니라 예수님이 처음 출발점이 되고, 이 땅에서 이미 구원받은 왕의 입장에서 죄사함의 열매와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는 뛰어가는 자가 아니라 지금 날아가는 중입니다. (출 19:4 “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가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에 주님께서 친해 말씀과 그 완성으로 개입함을 늘 반복해서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5강-히브리서 13장 22-25절(예수님의 호주머니) 26021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22-25절입니다.

히브리서 13:22-25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주체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 이게 바로 사도가 알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은혜를 빼요. ‘우리 인간들과 인간들이 함께 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한계인데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통제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릇이 있는데 그릇보다 뚜껑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라는 것 역시 은혜에 속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예요. 특별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이 율법인데, 그 율법이 옴으로써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고, 율법이 그것을 들춰내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오로지 범죄만 계속해서 생산되는 장터’라 할까요, 그런 공간이 되는데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어요.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뭔가가 있어야 돼요. 은혜가 은혜다우려면 뭔가 있어야 하는데 뭐가 있어야 하느냐? ‘온통 죄밖에 없다’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세상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허무라고 하는데 왜 이걸 허무로 이해하느냐? 뚜껑이 없으니까 그것을 허무로 이해하는 겁니다. 죄 사함의 은혜, 곧 뚜껑이 있다면 뚜껑의 뚜껑 됨, 뚜껑의 그 기능이 돋보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야 마땅한 겁니다.

어제인가 누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누구한테 전도해야 하는데 어떤 순서로 전도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전도 방식에 대해 제가 나름대로 설명을 해줬습니다. 1번과 2번 3번, 1단계 2단계 3단계로 설명을 했어요.

1단계는, “하나님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전도하는데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이미 하나님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요한복음 1장 5절을 그분 보고 받아 적으라고 했어요. 여러분들은 받아 적을 필요가 없죠. 적어봤자 다 잊어버리니까요. ‘어디에 적었지?’ 적은 그것마저 잊어버리니까요.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에서부터 출발하라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전도라고 하는 것은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알아요. 하나님은 아는데, 정작 하나님 본인이 이 땅에 왔는데도 이 세상은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전도가, 주님이 이 땅에서 일하는 과정과 동일해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나온 그 결과가 예수님을 사형시킨 겁니다. 보통의 같은 인간인 줄 알았으니까요, 하나님인 줄 몰랐으니까요. 알았으면 사형을 안 시키죠, 경배했겠지요. 몰랐으니까 죽였습니다.

죽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은 딱 찍어서 오직 예수님만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2단계입니다. 죽었다가 소생한 사람 말고, 부활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열매, 알파요 오메가니까, 주님 보시기에 새로운 시작의 첫 열매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케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더욱더 확실해졌죠. 확정되었고 확실해졌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우리는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킴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것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그 알려준 것을 받아들이면 구원됩니다.’ 이게 3단계라고 했어요. 다시 1단계, 세상은 하나님이 와도 못 알아봤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다.

2단계,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하셨는데, 인간이 저지른 일을 전제로 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새로 살리셨다. 3단계로, 그 살렸다는 사실의 그 통보가 도달한 사람, 이것이 바로 전도고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죠. 전달할 때 이 능력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일방적인 찾아옴이니까, 통보니까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뚜껑이 죄지은 우리 자신보다 더 크고, 넓고, 더 풍성하고 넘쳐나요. 은혜가 넘쳐난다고요.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3장 23절에 보면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라고 했는데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거죠.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것을 아주 쉬운 말로 하면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 그런 말입니다.

그다음에 24절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달리야에서 온 사람들이 또 있다는 거예요. 이달리야의 사람들은 그 당시에 기독교를 핍박한 자들이에요.

기독교를 핍박한 자들이 있는 곳에서 왔다는 말은, ‘우리가 이달리야에서 이주했다.’ 이 정도가 아니고 ‘복음을 들었는데 죽을 뻔했고, 이제는 그 복음을 기뻐하고,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되어서 사도에게 찾아와 감사한다’라는 내용으로 연락을 해줬겠죠. 그래서 ‘그 사람들도 이제는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여러분들에게 문안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통점이 있어요. 디모데가 옥에서 풀린 사실, 핍박이 있는 이탈리아에서 복음을 알고 그곳을 떠나 사도 쪽으로 온 사람, 그리고 모든 성도들, 이 세 부류의 공통점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를 여기 23절에서는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집약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그 전제가 뭐냐? ‘너희는 갇혀있다’는 겁니다. 디모데가 옥에 갇혔지만 사실은 더 넓게 이야기해서 이 세상 자체가 감옥이에요.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했잖아요. 감옥에 집어넣었잖아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도 감옥에 갔습니다. 사도행전 5장 18절에서 사도들이, 12장에서 사도들과 특히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습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5:18-19, 12:3-5, 16:22-26).

이렇게 옥에 갇혔는데 아시다시피 천사가 개입해서 옥에서 풀려났어요. 문제를 유발하는 그 시발점은 감옥에 갇힌 원조, 곧 예수님의 인생 말로가 결국 갇혀서 사형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은혜가 은혜로서 작동하는 원형이 되는데, 이 세상이 감옥이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된 일이라는 말이죠.

디모데는 옥에서 풀려났으니까요.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바울과 디모데가 같이 등장하는데요, 감옥 동기죠. 은혜를 알고 싶다? 그러면 세상을 좀 넓게 보자. 세상을 넓게 보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규정이 떠오르냐 하면 ‘세상은 감옥이다. 세상은 감옥인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처넣는 감옥이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보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해서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되 말씀은 못 가둔다.’라고 되어 있어요.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게 되면 ‘관심사가 말씀에 있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 다시 말해서 감옥의 운영자, 관리자와 한패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체적인 감옥을 만드는 운영자요, 관리자요, 설립자인데 그들끼리 나서서 또 죄수까지 만들어내요. 이 세상은, 인간이 스스로 자폐 증세를 보이면서 자기가 자기를 가두는 감옥을 만드는 겁니다. 인간들이 평생에 거쳐 이루는 과업은, 자기가 감옥 운영자며 관리자며 거기에 갇혀있는 죄수인 겁니다.

누구에게 갇혀있는가? 본인이 본인에게 갇혀있는 꼴, 그게 인생의 끝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갇혀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자신한테 빠져나올 수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전부 다 자폐증 환자 같아요. 온 세상이 자폐증 환자로 넘실거립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이유를 밝힙니다. 그 이유가 뭐냐? 물리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입자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의 단단한 질량을 가진 입자로 보는 이 존재를 뭐로 해체해야 하느냐? 파동으로 해체해야 돼요.

파동으로 해체하는 그것을 히브리서 8장 5절에서는 ‘모형’과 ‘그림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나’라는 것은 모형과 그림자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자기가 진짜 실체를 갖고 있는 몸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8장 5절에서는 “너희들은 모형과 그림자야.” 어떤 인간이 거울 앞에 비친 자기 모습이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을 자각하겠어요? 그걸 인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몸을 만지면 단단하니까, 그리고 아프면 고통이 있는데 이게 진짜지 모형과 그림자라는, 하나의 마네킹 같은 하나의 가짜로서 있을 수 있느냐? 이것은 진짜가 따로 있는데 가짜가 진짜라고 그동안 우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온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내용대로 인간은 결국 살아온 것이 안개로 해체됩니다.

안개로 해체된다고 이것을 허무하게, 허망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세상도 같이 없어져요. 내가 봐왔던 이 세상은 무대 세트인데 이 무대 세트도 같이 없어집니다. 없어지는 무대 세트를 성경에서는 감옥이라고 이야기해요. 성경 전체가 감옥이라고 규정하는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인간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가뒀다는 그 감옥에 모든 힘이 있는데 이 세상에 집결된 힘, 그 힘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서는 안 되었던 하나님이라면 반대로 ‘이 세상이 감옥이고, 그 감옥은 스스로 자기 착각에 빠져 자기를 가두는 감옥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체포 당시에 예수님과 빌라도가 마주했는데요. 빌라도는 세상 권력이 자기 안에 집약된, 지금으로 말하면 당시의 대통령이죠. 대통령으로서 마주했습니다.

그때 심문을 하죠. 교도소장으로서 예수님을 죄수로 규정해서 심문하는 그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빌라도가 자기 권세의 여유분을 활용할 의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 말 잘 들으면 너 풀어줄게.” 이렇게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8장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십니다.

천사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빌라도야. 너는 지금 나를 심문하면서 네가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을 자각 못 하고 있는데 내가 진짜고 네가 가짜야.” ‘내가 진리고 넌 가짜’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진리를 위해서 왔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경상도 말로 “진리가 뭐꼬?” ‘진리가 뭔데?’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교도소에서 빼내 준다는 거예요. 갇혀있는 곳에서 빼내 주는 것, 이게 출애굽, 이게 바로 구원이고 구출입니다. 그 구출을 모형화시키고 형식화시킨 것이 바로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에요, 사건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현재 우리가 평소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뭔가 무심코 살아가는 것은, 본의 아니게 이미 우리는 이 세상 감옥 건설에 하나의 요소로서 아무 소리 못 하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번영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학교에서 배우잖아요?

이걸 교정해 드리겠습니다. 고치겠어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감옥 건설에 여러분이 지대하게 기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냐?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감옥에서 여러분은 점점 더 옥죄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은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그걸 한 마디로 성경에서 “육은 육이요”(요 3:6)라고 합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는 게 ‘육’이에요. 육안에서 윤리와 도덕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체적으로 교도소 운영에 필요한, 감옥 운영에 필요한 법칙들을 인간들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가수 김호중이 교도소에 잡혀있습니다. 2026년도 11월에 아마 나올 거예요. 그런데 이 김호중이라는 가수의 체포에 대해 제일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보라색 깃발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김호중의 팬들. 이것은 불법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김호중 팬들의 관심사는 뭐냐? 이 대한민국의 번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좋아하는 김호중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거죠. 김호중이 말씀이라면 오직 말씀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김호중 팬들 입장은 “아니야. 억울해. 벌금 정도면 끝날 일을 교도소에 집어넣나? 이건 무슨 국가적 음모가 있어서 희생물이 되었다.” 이런 식인 거죠.

김호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할 거예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께 문제를 내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3절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감옥에 있었는데 풀려났습니다.’라고 했지요. 여러분의 일상에서 디모데 풀려난 것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쓰면서 살았습니까?

자기 아들 제대하는 거나 신경 쓰지, 자기 아들 군에서 풀려나온 거나 신경 쓰지 ‘디모데가 풀려나온 것과 현재 내 운명이 연관성이 있다’라고 평소에 생각합니까?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을 본다는 것이요, 은혜의 작동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 근처도 안 갑니다. 하루 일과 끝나면 수입, 돈 계산하기 바쁘지 언제 말씀을 생각합니까? ‘이번 달 지출이 왜 이렇게 많아?’ 이런 거죠.

제가 이야기한 것과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디모데가 감옥에서 놓인 것과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연관되어 있다, 관련성이 있는 사건이고 또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 내가 갇힌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이라면 여러분, 은혜라는 것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걸 지금부터 제가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히 13:25)라고 하는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그 은혜의 내막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1절, 그리고 10절에 나와요. 히브리서 7장 1절에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라고 나옵니다.

멜기세덱 이야기를 해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멜기세덱 그 내용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 히브리서 5장 11절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라고 하는 거예요. ‘해석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설명할 테니까 잘 들으세요’라는 말이에요.

히브리서 7장에서 설명을 시작하면서 ‘그는 왕인데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초반부터 어려워요. 왕이라는 것은 초연한 위치에서 누굴 다스리는 기능이에요. “꼼짝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게 왕이에요. 왕은 서열로 밑에 있는 사람이 함부로 평할 수 없는 초연한 자리에 있는 거예요. 초연한 자리, 그게 왕입니다.

어떤 드라마에 보면 그게 나오거든요. 어떤 사람이 열심히 달려요. 왜 그리 열심히 달리느냐, “우리는 열심히 달릴 수밖에 없다.” <판사 이한영>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그런데 그걸 보고 저는 출애굽기 19장 4절이 생각났습니다. 성도는 열심히 인생을 달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고 있는 사람이에요.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나(하나님) 있는 곳에 오게 하는 거예요. 달리는 사람은 주님 있는 곳에 못 갑니다. 더구나 빡빡 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못 가요. 날아가는 사람이 주님께 옵니다.

이 말은, 인간은 두 다리가 있어서 단지 걸을 뿐이지 날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인간의 무능성입니다. 은혜가 은혜 다우려면 우리는 계속 무능해야 돼요. 기껏해야 빡빡 기는 것, 기껏해야 달리는 것, 뛰는 것, 피곤하면 걷는 것,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예요. 이게 무능성입니다.

이러한 무능성에 대해서 요한복음 4장에 한 여인이 나와요. 어떤 분은 ‘우물가의 여인’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찬송가 가사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보기엔 ‘우물가의 여인’이 아니고 ‘예수님 가의 여인’이에요. 왜냐하면 여인은 인간이지만 모형이어야 하니까요.

무슨 모형? 끊임없는 물이 나오는 샘, 우물의 대체물로 쓰여야 하니까요. 그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발견한 것은 자기의 무능함이었습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능하다는 그것이 여인에게 어느 정도로 기쁜가?

그 여인은 격렬하게, 정말 가열 차게 기쁜 거예요. 가열 차게 기쁘다는 게, 자기가 우물에 무엇 때문에 왔는지, 자신의 그 계획과 기대감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자기에게 인생 스케줄이 있었을 게 아닙니까? 내가 어디에 취직해 돈을 번다든지, 앞으로 주식을 어디에 투자한다든지, 이사를 어떻게 한다든지, 애는 커 가는데 앞으로 내 인생 노후 대책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자기 계획이 있잖아요. 그 계획은 우리에게 우울증을 낳습니다. ‘그냥 열심히 한 번 달려가 보지.’ 그저 달려가는 것뿐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이게 기쁨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바뀌느냐? 목숨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목숨을 회수해서 열매로 바꿉니다. 요한복음 4장 36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요 4:31)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하셨고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요 4:33)라고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고 하시지요.

그렇게 하고서 ‘양식은 추수할 때 생기는데 어떻게 생기느냐?’ 요한복음 4장 35-36절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물가의 여인이 아니고 ‘예수님 가에 있는 여인’이 뭘 발견했느냐? 그전까지는 ‘내가 뭘 해야 되고 내 장래는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하는 식으로 자기 일에 몰두했다면 여인이 발견한 것은 ‘주님이 뭘 하고 있다’는 데에 눈이 뜨인 거예요, 내가 뭘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나는 그릇이고 주님이 뚜껑이라면, 나는 행함이고 주님이 은혜라면, 그 은혜가 나의 행함을 엄몰 해버렸어요. 산사태가 일어나버린 거예요. 홍수가 나버린 겁니다. 홍수가 났으니까, “어푸!” 하고 주님의 넘치는 은혜가 덮여버리니까 갑자기 ‘내가 그동안 남자를 여섯 번째 사귀고…’ 하는 이런 것들이 문제 거리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껏 열심히 살았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살 것이라는 기존의 나의 프로젝트 자체가 이제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그냥 은혜가 넘치고 넘칠 뿐입니다. 함께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4장 37절에 보면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여기서 ‘무능성’과 ‘단독성’이 나와요. 주님의 모든 은혜는 단독적으로 행하신 거예요. 다른 말로 선물이죠, 은사, 선물로 우리에게 그저 제공되는 방식이죠. 지금 ‘무능성’과 ‘단독성’까지 이야기했어요. 주님께서 일을 하늘에서 계획하시고 땅에서 실천했어요.

이게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신다.’ 땅에 있는 자는 모두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거든요?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어요. 왜 못 빠져나오는가? 본인이 본인에게 갇혀있으니까요. 남에게 갇혀있으면 ‘쇼생크 탈출’을 하든지 뭘 할 텐데 세상 감옥에서 나와 봤자 자기라는 감옥에서는 못 빠져나와요. 도 닦아도 안 되고, 절에 가도 안 되고, 머리 깎아도 안 되고, 마음을 낮춰도 안 되고, 몽골에 선교사로 가도 안 돼요.

이렇게 몸부림치고 저렇게 몸부림치고 어떤 수를 써도 자기로부터 빠져나오는 수는 없습니다. 그런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해결책은 뭐냐? 해결책은 은혜를 주시는 것뿐이에요. 은혜를 주실 때 하나님께 계획된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이 모형과 그림자이니까 그 모형과 그림자의 원판, 원 모델을 인간에게 삽입시키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뭐냐’고 누가 묻거든요, 단출하게 이렇게 답변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뭔데요?”라고 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 약속의 개입이다.” ‘언약의 개입’이라는 것, 왕 될 자가 이 땅의 제사장 기능을 하는 것이 하나님 언약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올 때 그게 개입하는 거죠. 아브라함은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인데 ‘네가 왕이 될 것’이라고 언급을 해버려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창세기 14장에서 누굴 만나는가? 그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나요. 역시 그 사람도 모형이죠. 진짜 멜기세덱 기능자의 모형으로서 멜기세덱을 만난 겁니다.

진짜 멜기세덱은 예수님이니까요. 히브리서 7장 2절에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되어 있고요, 3절을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편지를 하면서 ‘내가 멜기세덱을 언급할 때 너희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분명히 단언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뜸 들일 때 ‘아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이렇게 생각했겠죠.

저도 여러분께 뜸을 들이는 이유가, 일단 여러분들은 무능해야 하고, 그다음에 여러분들은 모형이어야 되고, 여러분들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은혜를 받았다면 자기 위신, 체면, 명예, 목숨을 본인이 지키겠다는 이 모든 것이 무능자로 들춰지는 기쁨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목숨을 지키는 그것을 떠나면, 비로소 주님의 열매가 되죠.

누구누구의 열매가 된다는 말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는 가지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그 가지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나는 너희를 가지로 규정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는 나한테 종속되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네가 너로서 마감되면 그건 네가 너한테 갇혀있는 꼴이니까 너를 탈피해서 너 밖으로 나와서, “날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왜?”라는 분과 컨택되어야 해요. 전화 통화가 돼야 합니다. ‘어, 발신자가 뜨네?’ 이런 현상, 주님과 통화가 되면서 발신자가 뜰 때의 그 기쁨, 그 기쁨에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버리고 “난 메시아를 만났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성도의 원형이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그런 혜택을 입은, 은혜를 입은 자들의 결과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 아들 같다, 복음이 낳은 아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데살로니가 3장 2절에서도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했어요. 새롭게 창조된 내 형제라는 뜻이죠.

계속해서 왕과 제사장이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인데 이 땅에 제사장 되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제사장의 그 취지는 히브리서 2장 9절에 나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먼저 인간을 건드렸다는 말은, 인간이 어디서 빠져나오지 못하느냐? 자기의 죽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건드려줘서야 아는 거예요. 인간 세계에서는 ‘사람은 죽는다’가 되잖아요. 그러나 복음에서는 ‘사람은 죽음에 갇혀있다.’ 이렇게 돼요. 그 발상의 차이가 납니다.

‘사람은 죽음에 갇혀있다.’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 죽어봤자 죽음 안에 맨 갇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탈출에 성공한 것처럼 자기와 똑같은 인간들을 열매로 생산해 내는 겁니다. 죽음이 있기는 있는데 죽음에서 탈출할 사람을 친히 자신의 성과, 복음의 성과로서 능력을 제공해서 그들로 하여금 나의 열매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히브리서 7장에서는 예수님의 열매를 멜기세덱의 열매, 또는 멜기세덱의 후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후손을 이야기하면서 왕이 어떻게 제사장…, 왕이니까 누굴 지배해야 되거든요? ‘누굴 지배하고 다스려야 하는데 지배당하는 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런 사달이 나올 수가 있느냐? 그건 모순된다.’라고 생각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 중에 마태복음 19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왕의 위치입니다. 이것이 왕의 위상이에요. 변변치 않은 열두 제자를 왕의 자리에 앉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앉았던 그 자리에 같이 앉아서 왕 노릇을 한다는 거예요. 이 소리 듣고 열두 제자가 신났죠. 그런데 제자들이 뭘 이해 못 하느냐?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말씀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서로 모순되는 왕과 제사장이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하나의 신체 안에서 두 기능이 복합적으로 만나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되면 안 되고 천사와 같이 돼야 해요. 그 천사와 같이 된다는 내용이 스가랴 3장과 4장에 나옵니다.

스가랴 3장 1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나와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거기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나오고요, 스가랴 4장 중간에 보면 스룹바벨이 나와요. 이 사람은 왕이에요.

그 왕과 제사장 여호수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이스라엘, 성전 중심의 새롭게 만들어진 나라의 투톱이죠. 두 개의 지배자로서, 그 바탕으로서 등장하게 돼요. 여호수아의 옷은 벗겨지고 깨끗한 옷으로 입힐 그때 천사가 뭔가 비난하려고 했어요. 악마는 법을 다루니까 “저 사람은 이런 잘못, 저런 실수, 그런 행패와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 옷은 더러운 옷입니다. 평생 입었던 저 옷이 먼지로 더럽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했어요. “옷 벗겨라! 악마야, 사탄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 옷을 벗겨라!” 옷을 벗기고는 전혀 때 묻지 않은 흰옷을 입혀버려요. 그리고 사탄에게 “또, 또, 또, 시비 걸고 송사하고 고소하려면 고소해 봐.” 고소했다가는 흰옷이 너를 가만두지 않아요. 이게 여호수아예요.

스룹바벨에게는 어떤 천사가 계시했는데, 양쪽에 두 감람나무가 서로 상반되는, 대립이 되는 두 방향에서 동일한 한 장소로 감람나무 기름이 부어집니다. 그러면 그 장소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장소예요. 이것은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바로 성도를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그래서 양쪽으로 서로 대비가 되는 두 가지의 요소, 기능이 한 장소의 인격체에 쏟아져서 만나게 되면, 곧 기름 부음이 주어지게 되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끝!

왕과 제사장직이 한 장소에서 만나는 이것의 원형으로서 멜기세덱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냥 왕이에요. 왕인데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이 창세기 22장에 보면 자기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갖다 바쳐야 해요. 분명히 그의 지위는 왕, 만국의 아비이고 그의 부인은 어미입니다. 그래서 ‘사래’가 ‘사라’로 바뀝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은 이 땅에서 자기가 희생자가 되는 거예요. 죽음을 맛보는 거라고요. 이거 누가 합니까? 이것을 인간이 한다? 인간은 못해요. 인간은 못합니다. 인간은 못 하게 돼 있어요. 왜? 인간은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냥 이미지 생성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실체인 걸 알리기 위해서 미리 모형과 그림자 되는 자들을 만들어 놓고 그 만들어진 자에게 자기의 속성을 입혀서 기름을 붓고, 그 기름 부은 자를 주님의 자기 호주머니 속으로 확 집어넣지요. 오늘 설교 제목은 <주님의 호주머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예수 안’이라고 했어요. ‘십자가 안’ 곧 ‘예수 안’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그릇이 크게 덮이죠. 어떻게? 넘치도록, 넘치도록 덮이는 거예요, 넘치도록!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성도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이런 죄도 용서받는 겁니까?”
“군소리하지 마. 주는 대로 받아, 인간아.”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오신 그 주님은 그 원형인 멜기세덱의 속성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히브리서 설교가 오늘로 끝납니다. 히브리서 7장을 다시 보는 거예요. 거기 보면 멜기세덱 안에 ‘왕’과 ‘제사장’ 기능, 이렇게 기능이 두 개 있으니까 제사장 기능을 해야 할 지파를 만들고, 또 왕 기능을 해야 할 지파가 따로 나와요.

제사장 기능을 할 지파가 뭐냐?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어디서 나오는가? 레위는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하나죠.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가 이삭이에요. 이삭과 누가 관련돼 있는가? 이삭의 아버지와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결과물이 바로 이삭이에요. 아브라함의 결과물이 이삭, 이삭의 결과물이 야곱, 야곱의 결과물로서 나오는 것이 두 속성인데 하나는 레위 지파 곧 제사장, 또 하나는 왕 지파인 다윗 지파예요.

여기서 다윗 지파가 12지파를 통할해서 단독성으로 치고 나옵니다. 그게 뭐냐? 유다가 나머지의 모든 12지파를 대표하는 왕의 홀, 왕위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왕위를 갖고 있기 위해서는 레위 지파가 했던 그 기능, 제사장 기능을 누가 인수인계받아야 되는가 하면, 왕이 인수인계 받아야 해요.

제사장 기능을 하는 레위 지파, 모세가 레위 지파죠, 레위 지파는 죽음을 맛봐야 하고, 죽음에 참여하는 그 레위 지파의 기능과, 또 유다 지파인 그 당사자는 이미 왕으로 등록돼 있다는 이 신분에 변함이 없다는 그 두 가지 기능을 합쳐서 유다의 족속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2-4).

그게 복음이에요. 은혜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다시 돌리는 거예요. “왜?” “우리는 모르니까.” “왜 모르는데? 뭐 머리가 나빠?” “머리가 나쁜 게 아니고 우리는 자체가 모형으로 끝!” 우리는 모형으로, 그림자로 끝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몰랐어요.

주님의 그림자가 나를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창세 전부터 우리를 드리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는데 주님의 성령이 오니까 나의 처음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고, 나의 처음을 예수님이 가져간 거예요. 나의 첫 출발을 예수님이 가져가서 예수님의 첫 출발 속에 우리를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기능은 바로 멜기세덱의 기능, 왕이고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천사같이 돼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요. 이것은 호로자식이에요. 물론 족보도 없고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지난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성도한테는 뭐가 없다 했어요. 수명이 없다 했죠. “나이 몇 살 먹었다고 이게! 민증 한번 까?” 민증 깔 것도 없어요. 10살이 됐든 90이 됐든 성도한테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인생 이 나이까지 산다고 애 먹었다.’ 아니에요. 그 나이를 빼세요. ‘서른 즈음에’? ‘서른즈음’같은 소리하고 있네. 교도소 생활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교도소 안에서 살았는데.

그 입자가 문제에요. 모형과 그림자로 남아야 되는데 마귀가 ‘너는 이제 선과 악을 아니까 네가 신이야.’ 자꾸 어떤 단독성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자꾸 독촉하고 있어요. ‘세상에서 뭐라 해도 네가 제일 중요해.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너는 너를 지키는 데 몰두하면 돼. 나라 생각하지 말고 너만 챙기면 돼. 비트코인이나 챙겨서 도망치면 돼. 그냥 돈이나 벌어서 캐나다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든지 해서 네 가족 데리고 잘 살면 그게 인생 남는 거야.’

여행 다녀 보면서 말레이시아로 갈까, 하면서 적당한 노후의 안식처 한번 찾아도 보고요. 안 그러면 저 그리스의 휴양지 “바라바라바라바~” 하는 데 있잖아요. 지중해의 하얀 집들이 있는데 거기에 가든지.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에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의 인생에서 나를 내 힘으로 해방할 수 있을까? 예수 믿을까? 예수 믿지 뭐.’ 이런 거요. 천국의 위병소에서 다 걸립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구원받으러 왔습니다.”
“무슨 백으로 오셨습니까?”
“나는 나의 믿음을 믿습니다.”
“가던 대로 지옥에나 가세요.”

지난 금요일 날 원주에서 특강했는데 그때 갈렙과 여호수아를 이야기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동일한 시력을 가진 동일한 정탐꾼 자격으로 충분히 다 조사 했어요. 그랬는데 ‘그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이미 어떤 소유주가 이미 있더라. 그들이 덩치가 너무 커서 우리 힘으로는 거기 못 들어간다.’ 거기에 대해서 정탐꾼 12명 모두 다 동의 했어요. 하나라도 누락이 없어요.
전부 다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못 들어간다.

천국? 있다면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못 들어갈 곳이라고 만든 거예요. 그리고 실체는 못 들어가요. 그러나 주님의 모형과 그림자는, 자기의 모형과 그림자로 만들어낸 그 실체를 만나야 해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지금은 희미하게 보여도 그 때는 직접 만날 거예요. “주님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라고 할 수 있는 그분을 만나야 돼요. 우리가 ‘만나자’가 아니라, 그분이 끌어당겨요.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요. 왜? 주님의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으니까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맞다.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가는 게 맞는데 하지만 들어간다.”라는 거예요. 왜? 이게 우리 일이 아니니까,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니까. 천국 위병소 “통과!”입니다. 우리의 몸,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멜기세덱이 활동하는 장소 제공자에 불과한 거예요.

주께서 마음껏 활동하도록 하세요. 이미 구원받은 자인데 이 땅에서는 십자가 죽기까지 어린 양이 되는 그 두 가지의 모순된 기능이 우리 속에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감당 못 합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감당할 수 없는데 주님의 은혜가, 말씀에서 나온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감당케 하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저분이 성도인지 아닌지’가 제 관심사는 아닌데요,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할 거니까요, 그런데 제 느낌상 ‘저분은 성도 같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입에서 ‘언약’이 나올 때입니다. 입에서 언약이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뿌리 부분, 그 몸을 언약에 담그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물위에 떠 있는 파라핀 양초가 있지요. 파라핀이 남아 있으면 불꽃이 계속 있고 그것이 끊어지면 불이 꺼지잖아요. 그 뿌리가 말씀에, 언약에 담기면 그 뿌리에서 줄기와 열매에까지 파급되어서 언약 이야기가 나와요. 나는 무능한데, 나는 무능한데 주님만의 단독 행위가 내 몸을 통해서 표출되고 있는 거예요.

바둑 다 두고 난 뒤에 ‘아, 저렇게 놓으면 안 되었는데, 이렇게 두어야 했는데!’ 바둑 한 수 잘못 둬서 5억이 날아가 버렸어요. 농심배 바둑대회에서요. 상금이 5억짜리 한 수 잘못 둬서 다 날아갔어요. 일본 선수. 그런데 바둑 프로기사는 뭘 생각해야 하느냐?

바둑 다 뒀잖아요. 그러면 바둑판의 그 바둑알들을 다 치워버립니다. 다 치우면 남는 것은 황량한, 아무것도 놓이지 않는 그 바둑판밖에 안 남아요. 아버지 장례 치르고 아버지 사는 집에 가보세요. 거기에 아무도 없어요. 왜? 아버지를 보내버렸어요. 물론 누가 보낸 게 아니고 알아서 가셨지만, 하여간 거기 없잖아요.

그게 누구 이야기입니까? 우리 이야기예요. 나는 모형과 그림자요, 안개였던 겁니다. 김광석이라는 가수는 이걸 어떻게 알았던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것은 주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입자가 되었다가 다시 파동으로 해체되고, 파동으로 해체되었는데 ‘나 구원받았어’라고 까불면서 다시 입자로 변하고, 이렇게 ‘썼다, 지웠다’ 하면서 놓쳤던 주의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이 나의 행함보다 더 세고, 더 깊고, 더 완벽하고, 더 포괄적이고, 더 넓은 안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걸 반복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히브리서를 끝내면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 다 와! 가족사진 찍자.” 같은 친족이니까, 은혜가 임하니까, 가족사진을 찍는 데 그 특징은 뭐냐? 원래 주인 되시는 주님이 없어요. 왜? 주님은 은혜 쪽이니까 살아 있는 가족들 모이는 거예요.

그래서 <최후의 만찬> 그 그림은 잘못된 그림이에요. 최후의 만찬을 제대로 그리려면 거기서 예수님이 빠져야 돼요. 12 제자만 모여서 가족 기념사진 찍어야 해요. 주님이 빠져 있는 쪽에서만 은혜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우리 모임들 가족사진 찍고 싶어요.

“자, 카메라 보시고, 다들 십자가 보시고, 김치~” 해서 찰칵 찍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가정, 집에 가서도 그렇게 하세요. 주무실 때도 그렇게 하세요. 늘 가족사진 촬영을 반복하세요. 보이지 않고, 없으신 분, 그 주님 자신의 호주머니 안인 것을 확인시키는 쪽으로 우리를 살려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의 취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위치, 내가 누군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굳이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이 모든 기능이 완료된 십자가 복음에서 필요해서 나오는 기능인 것을, 곧 주님 복음의 증인으로서 이루어진 상황인 것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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