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지혜
2026년 3월 1일 본분 말씀: 야고보서 1:5-8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형제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흩어진 형제란 결코 혈육으로 맺어진 형제는 아닙니다. 이들은 하늘의 지혜로 엮이고 맺어진 형제입니다. ‘하늘의 지혜’란 위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이는 이 지상에서는 이 ‘하늘의 지혜’가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하늘의 지혜’가 주어지면 지상의 모든 지혜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즉 ‘하늘의 지혜’와 대비되어 ‘땅의 지혜’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땅의 지혜란 생소하지 않고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부 본성에 부합되는 지혜입니다. 설득력을 가지는 지혜가 땅의 지혜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하늘의 지혜가 땅의 지혜가 대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25장에서 나오는 나발과 아비가일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하지만 가는 운명이 다릅니다.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삼상 25:2-3)
그런데 이들 부부에 다윗의 일행이 덮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으며 그 당시 사울왕에게 몹시 쫓기도 있는 형편입니다. 우선 남편 나발을 통해서 땅의 지혜가 어떻게 발사되는지를 봅시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삼상 25:10-11)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시류에 합당한 발언입니까? 나발 자신에게 돈 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소나 개나 찾아와서 도와 달라 하면서 일일이 다 도와주어야 할까요? 나발에게 중요한 게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부유함에서 오는 자신의 가치입니다. 다윗이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은 다윗의 가진 권력이나 재산으로 측정하고서 도움을 주든 빌려주든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내 아비가일은 남편의 이런 지혜에 대해서 기겁을 합니다. 그것은 다윗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 이스라엘에게 찾아든 지혜는 다윗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나발은 철저하게 땅의 지혜, 세상의 지혜에 무장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에게 거지 행상처럼 나타난 다윗의 집단에 대해 충분히 무시할 만했습니다. 결국 나발은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아 죽습니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 25:38) 왜 아내 아비가일은 같이 안 죽은 겁니까? 아내 아비가일은 남편의 세계로부터 다윗쪽으로 귀순했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 25:29) 아비가일은 ‘하늘의 지혜는 땅의 지혜’에 대해서 심판을 행사한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의 대비는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이야기에서도 나옵니다. 라합은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집에서 그녀는 주변에 일어나는 온갖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민족을 멸망시키려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민족이 몰려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마침 기생 라합에 집에 선재적으로 이스라엘에 속한 두 정탐꾼이 찾아들게 됩니다. 여기서 기생 라합은 ‘땅의 지혜’를 버리고 ‘하늘의 지혜’로 옮겨 타기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라합은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포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로 나타납니다. 거짓말이란 곧 자기에 대한 자기의 위반입니다.
자기 존재 가치가 자기가 내뱉은 거짓말로 인하여 벌써 부정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지혜’에 의해서 ‘땅의 지혜’에 속한 자신이 선재적으로 심판을 받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신약에 와서도 이 대비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7: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왜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똑같이 낫게 하시면서 굳이 다시 찾아온 자와 안 찾아온 자를 구분지어시는 겁니까? 그것은 자신의 육신의 병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았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원이란 자기에 대한 관심사가 사라지는 관계로 엮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하늘의 기적이 병이 낫게 되면 어디까지나 자기 일의 일부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내내 병고침 받은 자기를 지키면서 포기를 하지 못합니다. 문동병자들은 자신들도 일반인들처럼 멀쩡해서 사람 집단에 합류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낯설고 생소한 존재가 아닙니다.
병 나은 자기보다 더 우선적인 존재에 합류되어버린 존재가 바로 ‘하늘의 지혜’가 원하셨던 바입니다. 창조물보다 더 우선적인 존재가 곧 지혜입니다.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잠 8:23-25)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와 12제자들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지혜가 하늘의 지혜에 의해서 심판받을 지혜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땅의 지혜의 한계를 말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3-35)
그래 놓고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찾아가시는 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늘의 지혜는 어떻게 땅의 지혜자가 알겠습니까? 그저 성도는 예수님만이 하신 사건을 지키는 지킴이로서만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우리 자신을 지키는 독종인 것을 이미 주님편에 서서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야고보서 1장 5-8절(낯선 지혜) 26030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5-8절입니다.
야고보서 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혈육 관계가 아니죠. 그런데 그 형제들이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느냐 하면, 야고보서 1장 1절에 보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흩어져 있는데 형제 관계다? 이것은 혈육적 관계 말고 다른 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 다른 관계가 뭐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서 맺어진 관계’가 형제라는 겁니다.
또 7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예수님을 내용으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9절에 보면 “낮은 형제는”, 같은 형제 가운데 낮은 형제가 있고 높은 형제가 있는데 어쨌든 간에 형제들 사이가 엮어지려면 항상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로 서로 맺어져야 하는 겁니다.
위에서 온다는 그 내용은 1장 17절에 나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구약 때 혈육적인 열두 지파가 있었는데 이 혈육적인 열두 지파의 한계는 바로 육에서 나왔던 인간적인 지혜, 세상의 지혜로부터 억지로 집단을 이루려고 애를 쓴 것인데 그게 실패로 끝났어요. 그 민족은 멸망했습니다.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그 취지는 여전하게 지금도 흩어져있는 상태에서 지속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멸망했던 이스라엘을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되게 했던 그 원리는 뭐냐? 이게 이질적인 것이고 생소한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비시킨 거예요.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그 지혜와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들이 알고 있는 지혜와의 차이점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지혜는 레위기, 민수기, 출애굽기를 통해서 봐도 그것은 거룩한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받을만하고 깨끗한, 거룩한 거고, 세상 지혜는 추잡하고 더러운 거예요. 인간에게 나오는 어떤 지혜도 추잡하고 더러운 겁니다. 그 추잡하고 더러운 지혜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철학과 과학이라는 거예요. 과학이 추잡하고 더러워요. 철학은 인간의 윤리와 관련되어 있고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하늘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생소하고 이질적인 지혜를 받음으로써 왜 세상 지혜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가, 어떤 점에서 추잡하고 더러운가를 들춰내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위에서부터 내려온다는 말은, 다른 세계가 도래한다는 뜻인데 다른 세계의 도래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온 지혜를 받게 되면 우리는 내가 아는 나 말고 나 자체가 다른 존재로 달라져야 해요. 바뀌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지혜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들었던 어떤 노래에 이런 게 있어요.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나는 반딧불>(황가람, 2024)
나는 내가 별인 줄 알았는데 반딧불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것이 허무하다. 그리고 또 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보면서 알았던 ‘나는 누구냐, 나는 그냥 죄인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너무 상투적이죠. 지혜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나는 누구냐? 나는 세상 지혜의 일부다.”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세상 지혜가 자꾸자꾸 나오는 겁니다. 육신은 땅에 속해있으니까요.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받게 되면 우리는 형제가 되고, 예수님이 맏이가 되면서 같이 연결되어 있는 형제로 구성됩니다. 오늘 예배 전에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아내의 어머니 기일인데 아내에게 물었던 거예요. “지금 장모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저 같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디 계시는가?’ 얼마 전에 또 우리 집사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그 아버지가 지금쯤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질문,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에요. 그 질문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질문이 이렇게 바뀌어야 해요.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질문해야 해요.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한테는 ‘어디 있다’는 자체가 해당 사항이 안 돼요. 그 이유가, 인간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몰라요. 죽음을 모를뿐더러 인간은 안 죽어요. 왜냐? 예수님이 죽는 죽음만이 진짜 죽음이지 나머지 죽음은 가짜 죽음입니다. 그것은 파생된 죽음이에요.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까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데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왜냐하면 주님이 이 땅에 몸으로 왔을 때 그 몸 안에 들어있는 죄만 죄에요.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할 때 그게 죄에요. 아버지로부터 관계가 끊어진 그게 죄에요.
그래서 인간은 진짜 죄도 모르고 죽어가면서도 죽겠다, 죽겠다, 죽는다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다 인간의 지혜에서 온 거예요. 죽어가면서도 인간은 실은 안 죽어요. 인간은 예수 밖에 있든지, 예수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지 안 죽어요. 한쪽은 예수 밖에서 살아있고 한쪽은 예수 안에서 살아있는데 예수 안에 살아있는 걸 천국이라고 하고, 예수 밖에 살아있는 걸 지옥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예수 밖에 있으면 그 사람은 벌써부터 지옥 삶을 시작했고, 비록 그 사람의 숨이 끊어져도 그냥 예수 바깥에 있는 거예요, 지옥에 가 있는 겁니다. 왜? 죽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살아있을 때부터 예수 바깥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이 위에서 오는 지혜를 얻을까요? 얻은 적 없습니다, 얻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늘에서 온 지혜는 이질적이고 굉장히 생소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이미 세상 지혜로 친밀해진 관계거든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주님 없이 나 혼자 살래.” 이게 가장 설득력 있는 감성입니다. ‘센티멘탈벨류 Sentimental Value’ 2026년도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른 영화에요. ‘감성적인 가치’입니다.
‘인간은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살고, 기분 따라 산다’는 거예요. 인간의 기분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 토대가 기억에 있어요.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 기억을 해석했던 해석의 여정들, 해석의 집합체가 지금의 인간의 지혜를 구성하고, 그 지혜의 일부가 자아, 내가 되는 거예요. ‘그때 참 좋았다.’ 혹은 ‘그때 참 기분 나빴어.’ 이것이 센티멘탈벨류에요. 자기 가치인데 감성적인 기분의 가치, 정서적인 가치, 그 가치예요.
그런 가치가 있는 자에게 설득력 있는 것은 뭐냐? 기억 자체가 기분 따라 살기 때문에 내 기분에 맞춰 준다면 혹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과 한통속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부산의 연주회에 갔다가 올라오는 기차에서 전화를 받는데 터널을 지나느라 소리가 안 들려서 제대로 못 받았어요.
나중에 문자가 왔는데 “희생이 뭡니까?” 간단한 질문이었어요. 그래서 집에 가서 전화로 희생이 뭔지를 설명했어요. 희생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일체 기대하지 않는 게 희생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줬으니, 당신도 이만큼 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기대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에요. 그것은 상대를 지배하기 위한 하나의 수작이에요. 희생이라 하는 것은 타인의 기분에 놀아나지 않는 거예요. 같은 세상의 지혜의 일부가 아닐 때 놀아나지 않는 겁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에겐 저 사람은 내 편 아니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게 굉장히 이질적이고 생소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천국 가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세상 보는 해석이 생소하기 짝이 없어요. 생소하기 짝이 없으니까, 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미쳤구나.’
그래서 교회와도 마찬가지예요.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자기의 센티멘탈벨류, 자기 감성의 가치죠, 내가 남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도 나한테 잘해 줄 거고, 그러면 세상 사는 맛이 난다는 그런 것, 이런 사람들이 교회 수십 년 동안 쭉 다니면서 가끔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저도 수백 차례 받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뭘 할까요? 복음도 알고, 성경도 알고, 이제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았는데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뭘 할까요?” 그러면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일단 네가 뭔가를 해봐. 네가 뭘 하든, 뭐가 됐든 내가 다 무의미하게 만들어 줄게. 그럼 너는 거기에 대해서 격분하고 분노할 것이고, 그때 나는 너의 분노와 격분으로 인하여 아픔을 겪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을 너에게 알려 줄게.” 그게 바로 하늘의 지혜입니다. 그게 십자가 지혜에요.
십자가 지혜는 일단 ‘위반’을 해야 해요. 우리가 모든 말씀에 대해서 지킬 생각을 하지 말고 위반해야 합니다. 말씀 지킨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잖아요.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부터 태어났단 말이죠. 혈육에서 태어나서 이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으면서 되게 아는 척을 하고 있다고요. 못 알아들으면서도 아는 척을 했기 때문에 뭔가를 자꾸 해요. “하나님이여, 이게 주의 뜻입니까?” 한다고요. “해 봐.” 해보면 하는 족족 안 돼요. 다 무산돼요. 무산될 때 비로소 우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나 주님 없이 혼자 살래.’ 그 생각을 진작에 해야 할 것인데 그걸 감추면서 산다고 그동안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걸 감추면서 교회 나오신다고 애 참 많이 쓰셨습니다. 늘 자기 위주로 살면서 아닌 척하고 있는 것. 그래서 세상 지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나온 인생의 모든 사건들을 꼼꼼하게 내가 지키는 것, 이게 세상 지혜고 나의 지혜입니다. 내가 뭘 했고, 내가 뭘 했고, 내가 뭘 했고, 뭘 했는데…, 거기에 대한 내 보상과 결과와 이익, 내가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얼마나 챙겼는지 계산하는 것, 이게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지혜, 위로부터 온 지혜는 그것과 반대입니다. 주님의 사건을 지키는 것, 주님의 사건을 지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하나님입니다. 지금 현존하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스라엘이 아니니까요.
멸망했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의 사고방식이 일치되거든요. 둘 다 세상 지혜에 입각해서 살아가니까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움직일 때는 하나님의 지혜로 움직이다가 약속의 땅에서 고정이 되고 난 뒤에는 갑자기 이질성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리고 생소함이 날아가고, 우상을 섬기는 주변 나라와 더불어 똑같이 잘 먹고 잘사는 쪽으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우상이 막 들어오죠. 겉으로는 여호와인데 내용은 전혀 여호와가 아니고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 바알 종교,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이방 종교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겼다는 이유 때문에 선제적으로 미리 하늘의 심판을 이스라엘에 때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 땅의 지혜에 대한 공격과 심판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의 말씀은 위반 뒤에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위반했을 때 따라오는 겁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이 성도냐? 말씀을 보면서 매사가 죄 아닌 게 하나도 없음을 새삼 발견해야 해요. 성경 말씀을 보면 십계명부터 해서 모든 말씀이 내가 위반자가 된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성경 말씀의 위반자가 되느냐 하면,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우리는 금지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넘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금지가 작동합니다. 인간은 끝까지 나를 신뢰하고 싶어요. 끝까지 신뢰하고 싶은데 끝까지 실패합니다. 왜? 우리는 늘 금지를 넘어선 사람인 죄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금지를 넘었다는, 선 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경 말씀이에요.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마치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평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아무리 옷을 바꿔 입어도…, 어디 외출할 때 옷 입는 데 남자는 3분 걸리잖아요. 여자는 옷 입는 데 30분 걸리거든요. 한 열댓 벌 가져와서 “이게 맞나?” 잘 어울린다고 하면 안 믿어요. 본인도 신뢰 안 하지만 자기를 평가하는 상대방도 신뢰 안 해요.
결국 다른 옷 입고 나가요. “이게 더 예쁜 것 같지?” “응 예뻐.” 자꾸 옆에서 예쁘다고 하는 이유가 빨리 나가자는 뜻이거든요. 안 믿어요. 30분 걸립니다. 옷이 안 맞아요. 이 일 해도 내 적성에 안 맞고, 이걸 해도 또 내 몸에 안 맞아요. 직장 또 옮겨보죠. 직장에 오래 있는 거 보면 희한하다니까요? 월급을 많이 주는가? 다른 데 갈 데가 없어서 그런가?
자꾸 바꿔도 내 몸에 안 맞아요. 직장만 안 맞는 게 아니에요. 배우자도 안 맞아요. 사귀는 대상도 안 맞아요. 맨날 바꿔요. 맨날 솔로야. ‘사랑은 계속된다.’ 솔로 출연자 또 바꾸고요. 그래 놓고 남 탓해요. “나는 상대방을 못 믿겠어.” 상대방을 못 믿는 게 아니고 정확하게 하세요. 본인을 못 믿어요. 본인이 나에게 안 맞는 본인이에요. 그래서 자꾸만 뭔가 시도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는데 그 지혜는 뭐냐? 그 지혜를 받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심판하고 멸망함으로써 지혜는 인간이 모르고 있는 죄의 근원을 정확하게 찾아가는 식으로 우리에게 도달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죄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성도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있어요. 성도가 아닌 사람은 성경 말씀을 보고 난 뒤에 자꾸 죄책감을 가져요. ‘이번 일이 안 되는 것은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구나. 하나님, 앞으로는 잘할게요. 다시는 이런 나쁜 짓 안 할게요. 제가 반성합니다. 회개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저를 세게 몰아붙이지 마세요. 이번 일 안 되면 저는 정말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 한 번만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뭐냐? 모든 게 죄가 될 때 비로소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성도는 새삼스럽게 그때그때 마다 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분명히 내가 죄를 지은 게 맞는데 정죄함이 없어요. 내가 죄를 지었는데 죄가 없어요. 이것은 하늘의 지혜가 옴팍 뒤집어씌운 거예요.
하늘의 지혜는 마치 화산의 마그마가 올라오는 거거든요? 마그마가 올라와서 지평을 적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특징이 뭐냐? 이스라엘에는 율법이 있었어요. 이스라엘이 움직일 때마다 그 지표면에 다른 민족에게 율법을 쏟아냅니다. 그 율법은 이질적이고 초월적이에요.
대표적인 경우가 기생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기생 라합의 직업이 유흥업소 종사자잖아요. 유흥업소 종사자니까 손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 듣는다고요. 꼭 택시 운전하는 사람처럼 온갖 세상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밀려오는데 이스라엘 앞에 있는 모든 민족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어요. 기생 라합은 직업상 듣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심판의 소식을 들은 거예요. 기생 라합은 심판하는 그 민족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았는데 정말 우연히, 이건 하나님의 은혜고 사랑이죠, 우연히 그 심판하는 민족의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왔어요.
그럴 때 이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통해서 자기가 살던 지혜를 포기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그 하늘의 지혜로 옮겼습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박살 난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거짓말하는 것을 본인이 안다는 것은, 내 스스로 자기를 정죄한다는 말이에요. 정죄하면서 자기 위치를 ‘난 이 민족이 아니다’라고 옮기는 겁니다.
이 민족은 멸망하는데 이 멸망할 민족에 내가 적(籍)을 둘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심판하러 오는 그 정탐꾼의 나라로 호적을 옮긴 거라고 보면 돼요. 적(籍)을 옮긴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밀려오는 하늘의 지혜에 흡수 통합되는 것, 그게 바로 기생 라합의 태도였습니다. 중간에서 자기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유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 해명할 필요가 없는 자유가 가장 큰 자유예요.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왜? 나도 나에게 온 지혜가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소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지식에서 나온 지혜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그 지혜에 포함된 사람은 흔쾌히 나를 파괴합니다. 내가 부서지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 비슷한 예가 사무엘상 25장에도 나와요. 사무엘상 25장에 한 부부가 나옵니다. 2-3절에,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그 부자 이름이 나발인데 나발의 부인은 다윗의 가치를 알고 나발은 전혀 모릅니다. 나발이 다윗에 대해서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나발의 의미는 미련하다, 멍청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부자예요. 사무엘상 25장 10절에,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이게 바로 하늘의 지혜로 볼 때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거예요. 하늘의 지혜에서 봤을 때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 신이 골리앗을 이겼던 다윗과 함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 하늘의 지혜로 볼 때 미련하고 멍청한 인간이에요. 그러나 자기의 소유나 자손, 요즘 같으면 6천까지 올랐다는 그 주식, 펀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 된 입장에서 쫓겨 다니고 있는 다윗을 볼 때 대번에 나오는 지혜가 뭐냐? 인간적인 지혜가 나와요. “다윗이 누군데? 요새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여러분, 얼마나 이게 합리적이고 명석한 겁니까? 똑똑한 거예요. “어디서 내 돈 빼먹으려고?” 이게 얼마나 마땅한 거예요? 여러분, 성경은 일방적 이야기에요. 성경은 하나님 쪽의 일방적 이야기라고요. 하나님의 거룩한 일방적 이야기고, 성경을 모르는 우리는 아무리 똑똑하고 박사 학위가 12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하고 더러운 거니까, 죄밖에 나오지 않는 발언을 우리 입에서 쏟아내는 겁니다.
“다윗이 누군데?” 애굽의 바로 왕도 그랬어요. “여호와가 누군데?”(출 5:2) 요즘 신약에 와서 “예수가 뭔데? 예수가 밥 먹여 줘?”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출생 자체가 세상 출생이기 때문에 세상의 친숙한 상식과 당연한 이해에 푹 빠져 있는 우리에게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성경을 볼 때 우리는 근원적으로 위반자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우리 중심이니까, 똑똑한 나 중심이니까, 잘난 나 중심이니까 잘난 내가 어떻게 더 잘난 존재로 살아남는가, 여기에 치중하니까 굳이 하늘로서 오는 지혜, 여호와께 지혜를 구하고 주님에 대해 알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니까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 없이 나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요. ‘예수가 뭔데 내가 믿어야 해?’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요! 합리적이라고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 복음을 이야기하면 남들이 우리보고 얼마나 미쳤다고 욕하겠습니까? 요즘은 뭐 미쳤다는 소리 듣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죠? 양다리 걸치고 있는데 양쪽에서 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진짜라는 그 이야기를 하는 그런 사람도 교회에서 거의 찾기 힘들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제적으로 받은 거예요. 먼저 심판을 받아서 멸망한 겁니다. 멸망하고 난 뒤에 나온 게 흩어진 형제, 흩어진 열두 지파에요. 그러면 성도라는 것은 간단해요. 성도는 뭐냐? 성경을 보면서 모든 말에 대해 어느 하나를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위반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내가 한시도 분노를 멈춘 적이 없다는 겁니다.
성경은 보면 화가 나요. 성깔이 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사람답게 사는 것, 그런 평가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집요하게 몰아붙여서 ‘네가 한 것은 죄짓는 것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할 때, 자꾸 성경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발을 끊게 만들어요.
‘교회 그만 나오지, 이제? 너도 어지간히 할 만큼 했잖아. 마이 묵었다, 니! 성경공부 오래 했고 헌금도 숱하게 했을 걸? 다 복리로 계산하면 엄청 될걸?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그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 이 점은 베드로나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랑 똑같아요.
신약 성경에 보면, 이것은 상당히 재밌는 이야기인데요. 마태복음 26장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뭐가 우습냐면 이게 우스운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주를 버리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입니다. 교회를 십 년 이십 년 다니든, 목사든 집사든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은 베드로를 거쳐야 해요.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는 이 허세, 반드시 그 허세를 거쳐야 합니다. 허세를 거치지 않은 것은 전부다 가짜입니다.
내가 세상 지혜에 푹 빠졌다는 것을 거치지 않으면 하늘의 지혜를 굳이 찾을 이유가 없어요. 내가 아는 상식 내에서 얼마든지 이 땅에 살아가는데 뭐가 답답해서 하늘의 지혜를 찾겠어요? 베드로가 자기의 본색을 예수님과 다니면서 드러내는데, 그것이 예수님이 베드로를 택한 이유입니다.
“네가 나를 버린다.”
“죽어도 안 버립니다.”
“버리게 되어 있어.”
“안 버리게 되어 있다니까요!”
“네가 너를 몰라. 버린다.”
“주님은 나를 몰라요. 내가 얼마나 단호한 믿음이 있는지 주님은 내 마음을 몰라요. 난 안 버립니다.”
“네가 반드시 버린다. 세 번이나 버린다.”
그리고 난 뒤에 주께서 베드로를 찾아갑니다. “봐. 버린 것 맞잖아. 네가 널 모르는 거 알았지?” 이렇게 찾아가는 게 주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구원되는 거예요, 그렇게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발의 말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옳은 말입니다. “요새 내가 부자라는 소리 듣고 돈 빌려달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이런 식이죠. 그런데 아비가일이 이상해요. 그 부인이 이상하다고요. 부인 아비가일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 나발이 다윗을 매몰차게 버렸을 때 자기 남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입니다.
사무엘상 25장 25-26절에,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남편이 미련한 곰탱이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그다음에 사무엘하 25장 28, 29절,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찌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기에 ‘생명 싸개’ 곧 “보쌈, 영생의 보쌈이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온 지혜가 다윗 당신에게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이러한 내용을 도대체 아비가일이 어디서 알게 되었는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알았겠죠.
잠언서 8장 22-26절에 보면, 그 지혜를 가지고 솔로몬이 원천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곧 창조자가 계시는데 그가 지혜가 된다는 겁니다.
지혜가 뭐냐? 처음에 창조의 원리, 근원적인 지혜가 있고 그 숨어 있던 지혜가 화산의 마그마가 지표에 표지듯이 덮쳐서 퍼져 나가는 거예요. 그 퍼져 나감에 걸려든 자들은 지혜자가 되고, 그 지혜자를 앞장세워서 하나님께서는 이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 지혜를 심판하는 기능을 맡겼습니다.
잠언 8장 35-36절에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여기 이 지혜로부터 뭐가 나오는가? 아브라함의 언약이 나오는 거예요.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나를 저주하는 저주를 받는다’(창 12:3)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이 택한 자를 통해서 지혜가 스멀스멀 지표면에 깔리면서 흘러 내려오게 하는데, 제가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게 너무나 생소하고 낯설고 이질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를 비롯해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갔죠.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자기 목숨이 더 귀하지요, 예수님의 목숨이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신약에 와서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대목에서 약간 충격적인 것은 ‘병 고침 받는 것은 구원과 상관이 없다’에요 ‘내가 예수님한테 혜택받아서 병 고친 것은 전혀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에 속해요. ‘내 병을 고쳐줄 수 있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기적으로 받겠다’라는 그게 출발점이 뭐냐? 나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서 열등한 존재는 그보다 우월한 존재를 호출할 수 없어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열등한 존재가 하나님을 향하여 도와달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수상하고, 그것은 죄로부터 요구하는 것이 돼요, 죄로부터 요구하는 것이 된다고요.
그 점을 누가복음 17장에서 언급하는 겁니다. 분명히 10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어요. 일단 10명의 문둥병자 모두의 소원은 한결같아요. 이 병을 낫게 해달라는 거예요. 왜 저주받은 문둥병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의도는 뭐냐, 그 인간의 지혜는 뭐냐? ‘내 병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왜? 병이 낫게 되면 저 인간 같은 인간, 건강한 세계의 집단에 합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합류해버리면 그 사람도 정상이지만 병들었다 나았으니 나도 정상이 되는 거예요. 그 바탕이 똑같이 세상적이에요. 그저 세상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셔야 할 하나님의 몫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구 생각에? 그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거예요.
‘성경에 나오잖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랑이잖아. 그래서 우리끼리 사랑하게 되면 그게 하나님의 주특기잖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바로 구원받지 못한 채 병은 고침을 받고 지옥 가는 인간, 지옥 갈 문둥병자가 병 고침 받아서 멀쩡한 채로 지옥 가는 문둥병자들의 고백이에요. 지옥 가기는 마찬가지고, 구원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예요.
목적이 뭐냐 하면, 병 고치는 거예요. 굳이 예수님은 병 고쳐주는 자잖아요. 병은 하나님께서 고치는데 그 병 고침을 하나님께 받았으니까, 이제는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가면 돼요. 병 고침 받고 그냥 가면 되는 겁니다. ‘참 고맙습니다. 역시 용한 분이야. 가자.’ 이제 볼 일은 다 봤다는 거예요. 볼 일 다 보고 다시 내 소원의 자리로 되돌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사람은 왜 되돌아옵니까? 이게 문제에요. 여기서 이상한 거예요. 이질적이에요. 생소해요. 병 고침 받았으면 자기의 본전을 찾았잖아요. 본전을 찾았으면 다들 가는데 합류해서 신난다, 하고 가면 되는데 왜 예수님을 찾아오느냐는 말입니다.
왜 찾아올까요? 그 찾아오는 이유, 내력은 누가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마태복음 8장 17절에 나타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짐을 지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랑이라서 우리의 아쉬운 것, 어려운 것, 병 난 것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고칠 의무도 없고, 고쳐줄 필요도 없는데 또 다른 하나님이 지혜 자체가 되어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우리의 모든 죄와 질병을 대신 담당하셨다. 내 고통과 아픔을 대신 담당하심의 그 결과로써 우리에게 병 나음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내가 원했던 것, 나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병 낳았다는 이것은 나의 사건이에요. 나의 사건, ‘내가 잘한 짓이다’라는 그 나의 사건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지혜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뭐냐? 주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내가 지키는 거예요.
주님이 일어난 사건은 뭐냐? 내가 몰랐던 것, 내가 무지하고 미련한 것을 대신 지켜준 그 사건을 지키는 거예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목사님,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을 다 지키신 주님의 그 사건을 지키는 거죠.
드라마에 보면 사건 현장에 폴리스라인 치죠. 폴리스라인 쳐 놓은 거기에서 하급 경찰관이 뭐 합니까? 잠바 입고 삐딱하게 서 있는 형사가 “손대지 말고 저리 비키세요.” 드라마 주인공 아닙니까? 시체 보면서 “여기저기 많이 찔러서 죽였구나” 하고 가면서 또 뭐라 합니까? 증거 훼손 못 하게, 폴리스라인 아무도 못 넘어오게 잘 지키라고 하죠.
그 지킴이에요, 그 지킴! 사건은 주님이 일으키고 우리는 그 사건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내 사건, 내 인생 지키는 게 임무가 아니라 주님의 사건을 지키는 게 임무에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을 지키는 게 우리 임무라고요. 그게 빠져 있는 것이 뭐냐? 인간에게 지혜를 제공했던 악마가 하는 짓거리가 바로 그 짓이었습니다.
악마가 교회 안에서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한번 보세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사도행전 16장 16-18절에,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이 대목 보세요. 그 귀신이,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귀신이, 마귀가 그 이야기했다고요. 이 말 틀렸습니까?
바른 소리잖아요. 바른 소리인데 왜 사도 바울이 괴로워합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동네 협조가 잘 되네.” 이래야 하는데 왜 괴로워합니까?
교회를 몇 년 다니고, 신학을 몇 수십 년 해도 이 내용을…, 저는 신학교 다닐 때부터 신학자들을 안 믿는 이유가, 이 마가복음 3장 11절과 누가복음 4장 41절을 아무도 해석 못 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 10-12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귀신이 나가면서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이 고백한 게 아니에요. 귀신이 고백했다고요? 왜 귀신이 고백하는 겁니까? 그러면 귀신도 구원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4장 40-41절은 더 노골적입니다.
“해 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이게 무슨 이야기예요? ‘당신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모르고 귀신은 알고. 그런데 그걸 아는 귀신에게 “입 다물어! 조용히 해. 조용히 하란 말이야.” 귀신에게 이 입 다물라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아이고 그래요? 그럼 잘됐네. 우리 같이 복음 전할까요?” 이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입 다물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의 지혜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은 다들 세상 지혜자들이에요. 추잡고 더러운 이야기만 해요. 그런 사람들이 주석 책을 백날 만들고 신학을 해도 이 문제를 풀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귀신이 고백했는데 그걸 높이 사지 않고 입 다물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모든 구원되는 인간은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만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구원됩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병 고침과 기적을 보면서 “놀라워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못 고친다.” 이런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9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했습니까? 좋아했습니다. 미워했습니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볼일은 끝났어요. 왜? 자기 나름대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나 이제 멀쩡하다. 난 사람 취급해 줘. 나 밀어내지 마. 이제 나는 문둥병자 아니야. 하나님의 은혜로서 고침받았어.’ 이게 세상적 입장에서는 기존에 멀쩡한 사람과 합류되어 있기 때문에 멀쩡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 문둥병자는 뭐냐? 하나님을 바라본 게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거예요.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겁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중개하는 자가 아니라 진짜 우리 창조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병 고치려고 하는 그 자체도 내가 누군지를 몰랐던 것인데 주님 바라보고 난 뒤에는 이제는 내 병을 고쳤다, 가 아니라 나는 이제 누구 편에 서야 하는 자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병 고침 받은 내가 나한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나는 일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최초로 일깨워주고, 처음으로 일깨워주신 분은 바로 우리 주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혜와 함께 있는 겁니다. 심판받아 마땅함에서 오는 크나큰 자유를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생입니다. 심판받아 마땅하고, 주님의 지혜로 심판을 받았기에 더는 내가 나를 정죄할 필요도 없고, 어떤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모든 죄책감이 사라지는 이 기쁨, 나를 방어하거나 사수할 이유도 없이 된 것, 나는 그저 폴리스라인 치고 거기에서 파수꾼이 되는 거에요.
나 볼 것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이 대신 죄를 다 대신했어요. 죽음이 뭔지를 모르고, 그다음에 죄가 뭔지도 몰랐는데 이분의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인간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는 인간에게 하나의 환상, 꿈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요셉을 그 꿈에서 배설했어요.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 딴 사람이 이야기했다고요. ‘내가 메달 따기 전에 부인이 똥 꿈을 꾸었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아버지도 똥 꿈을 꿔서 메달을 땄다’고 한 겁니다. 똥 꿈이 왜 귀한 꿈이냐? 똥 꿈을 꿨다는 말은, 배설한다는 거예요. 나에게서 내가 똥처럼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게 자유 아닙니까? 이게 자유잖아요. 나를 신뢰 안 해도 돼요. 왜? 주님이 나에게 찾아왔으니까.
“너 세 번 부인했지?”
“아닙니다.”
“몇 번 부인했는데?”
“살아 있을 동안에 내내 주님 부인했고, ‘나는 주님 없이 혼자 살래’가 끊임없이 나오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요! 얼마나 감사한지!”
내 본성은 뭐냐? 주님 없이 나 홀로 사는 것, 나의 시건대로, 내 확신대로 사는 것, 이것이 살아가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끝으로, 그러면 아까 그 질문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아까 그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 질문에 답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전도서 9장 7-9절에 나옵니다.
잠언이든 전도서든 아가든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이 쓴 거예요. 남방 여왕이 지혜를 찾아왔다고 했잖아요(마 12:42). 예수님을 찾아온 그 사람들처럼 남방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어요. 전도서는 솔로몬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찌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벌써,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찌니라…” 향수 뿌려라, 그 말이에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이겁니다. “그냥 살아, 그냥 재미나게 살아! 모든 것에 구애받지 말고 즐겁게 살아.” 그 ‘아멘’을 끝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아버지! 아, 지독하게 짝이 없는 우리의 자기에 대한 집착, 사람 구실 하려고 노력하는 나에 대한 그 애틋함, 자기 사랑. 차라리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내가 얼마나 독한 존재인 것을, 독종인 것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살려주신 그 주님의 사건을 지키는 지킴이로 살아가는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