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수(數)
2026년 2월 15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1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하나님과 예수님, 이렇게 두 분의 등장은 이미 창세 전에 두 분 간의 약조하신 바가 따로 있었고 그 약조에 따라 세상의 모든 일이 발생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숫자로 하면 ‘2’가 됩니다. 이 ‘2’께서 결정하신 바를 지상에 실행하기 위해 한분 곧 ‘1’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따라서 지상에서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숨어계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것은 인간쪽에서 따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나 생각들은 모조리 가짜요 오류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일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0’이 되는 겁니다. 부활하심으로서 ‘0→1’되시고 성령을 주시므로서 이 지상에서는 ‘12’가 생겨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12지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흩어진 12지파’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흩어진 12지파’ 아닙니다. 단일화된 12지파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 ‘흩어짐’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단일화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육성으로 인해 근원적으로 ‘1’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주신 율법을 토대로 해서 어떻게든 하나된 민족, 하나된 나라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자신이 자기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 내부에서 욕망이 한번 타오른다면 인간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거의 발작을 합니다. 발작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조차도 자신을 말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성상 각자도생입니다. 오로지 자기밖에 모릅니다. 심지어 소위 복음만 외친다는 복음적인 교회에 나가서 아무리 ‘십자가 피’, ‘모든 성경은 예수님만을 증거한다’를 들었다고 해도 그것조차 ‘행운을 시험’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인 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규정은 그냥 ‘흙’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 3:19)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흙에 불과한 존재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닿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으로서는 짐작도 못할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 사람은 빠지고 양이 하나님의 심판을 마주하게 되고 그 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심판내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초과’입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극복해서 도달하는 초월이 아니라, 전혀 인간으로서 예상 못할 일이 덮쳐서 인간으로 하여금 생소하고 당황하게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초과’기 있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초과가 없는 사람입니다.
초과가 있는 사람은 이미 자기 파멸을 당연시 여기면 감사합니다. 반면에 초과가 없는 사람은 충격적인 사태에 몸서리쳐야 될 자들입니다. 초과의 예는 고린도후서 5:15에도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는 십자가를 정면으로 모독하는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십자가를 찾고, 천국을 찾고 온 식구의 구원을 원해도 그것조차도 자기 부인이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자기를 위한 일’에 불과한 겁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죄가 무엇이냐 대해서,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⓵내가 죽어서 천국 가기 ⓶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도 천국가기 ⓷ 자기 몸이 건강하기를 ⓸재물이 여유분이 있어 마음껏 불우한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수 있기를 ⓹내 가족, 내 식구가 대외적으로 칭송받고 인정받고 부러움을 제공받기를 원하는 것.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간결하고 명료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하나님께서는 ‘수에 칠 가치 없는 자’들에게 특별한 언약적 수를 부여하고 할당하시는 조치를 취하십니다. 일단 ‘자기를 위한’ 삶을 파괴하고 해체합니다.
결코 자기 이름을 걸고 살지 못하게 하십니다. 인간의 이름 ‘0’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7-18)
‘0’으로부터 시작해서 ‘12’에 이르게 합니다. 그 방법은 인간이 아는 숫자 ‘1’ 옆에 또 다른 ‘1’을 붙여서 ‘2’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죄를 발생시키십니다. 죄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죄가 육에서 나오기에 다음과 같이 조치를 취하십니다.
“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 새로 붙은 ‘1’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겁니다. 야곱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남편과의 동침에서 자식을 낳겠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편 야곱을 언약의 사람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자식 모두가 언약으로만 잉태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창 30:1) 그런데 이들이 12 자식으로 멈추는 것은 아내끼리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 바가 라헬의 죽음으로 멈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12가 나온 겁니다.
이 12의 출현으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언약적 숫자가 부여되는 자들을 통해 이미 나타나 버린 겁니다. ‘12×12×1000=144,000’이라는 숫는 언약이 12로 개시되고 12로 끝나고 그들은 이미 1000이라는 영적 세계에 속해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수직으로 표현해서 노아 때처럼 심판 속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 위에 떠오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새롭게 시작된 ‘흩어진 12지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모두가 똑같이 죄인되었음을 고백하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야고보서 1장 1절(언약 수(數)) 26021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절입니다.
야고보서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숫자로 하면 ‘2’가 돼요. 그런데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숫자로 하면 ‘12’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이 ‘2’가 ‘12’로 번져나갔는가? 그것을 생각해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약속’이라는 것이 담겨있습니다.
약속이 담겨있으면 그 ‘2’가 이 땅에서 ‘12’가 됩니다. 그걸 성경 전체로 이야기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 ‘2’가 지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1’이 돼요. 그 ‘1’에서 ‘12’가 됩니다.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망했어요. 그럼 그 ‘12’가 제로, 0이 돼요. 아무것도 없어요. 구원받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롬 3:10)어요. 다 죽어 마땅합니다. 다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0’이 ‘12’가 돼요. ‘0’에서 ‘12’가 되는데 그 중간에 예수님이 죽은 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0’이 ‘1’이 되고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삼음으로써 ‘12’가 되는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올라가면서 예수님 몸에서 ‘끈’이 나와요.
그 끈 자체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거기서 풀려나오는 끈이 지상에 번지면서 그게 ‘12’가 되는 겁니다, 펄럭이는 끈. 그 ‘12’에 의해서 땅에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펄럭이는 끈의 일부가 되고 그 끈의 연속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어디에 합류하느냐?
‘2’에 합류가 돼요.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 합류됩니다. 그러면 교회까지 합쳐서 3이 되지 않느냐, 3은 안 돼요. 왜냐하면 끈이기 때문에 이미 확보한 ‘1’과 ‘2’ 사이에 예속이 되고 포함이 되기 때문에 숫자로 치질 않습니다.
‘2’에서 ‘1’이 되고 ‘1’에서 ‘12’가 되고 ‘12’에서 ‘0’이 되고 ‘0’에서 ‘1’이 되고 ‘1’에서 ‘12’가 되고 ‘12’에서 ‘2’로 회귀하는 하나님의 일련의 그 과정을 로마서 11장 36절에서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상에는 그리스도의 몸만 생기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몸으로는 갈 수가 없어요.
해외여행 갈 때 캐리어에 이름 붙이잖아요. 전부 자기 이름이 붙어요. 그러니까 구원받는 사람은 자기 이름을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 이름은 제거될 이름이고, 없어질 이름이고, 죽을 이름이에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이름을 죽이시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나를 죽이시는 이름.
어떤 분이 소개했어요. 대전의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 괜찮다고 했어요. 제가 괜찮다고 하는 그 목사의 설교를 꼭 들어봐요. 안 들어보고 평하면 안 되니까요. 들어보니까 내용이 이래요.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받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고, 헌금이나 어떤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다 듣고 ‘아, 사기꾼 하나 또 생겼구나.’ 성경에서 십자가 언급하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게 복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말은, 원래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흩어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흩어지지 않게 되어 있는데 야고보서 1장에서는 흩어졌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나로 결속된 이스라엘이 무너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구원에는 필히 뭐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본인들이 무너져야 해요. 그런데 그 목사 설교 들어보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가 십자가 피를 흘렸다’라고 하는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죄가 뭐냐는 거예요, 죄가? 그래서 제가 한번 뽑아봤어요.
내가 보기에는 죄인데 기존교회에서 죄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 많이는 못 뽑고 한 5가지를 뽑아봤어요. 지금부터 제가 죄의 항목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떤 게 죄냐?
①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 이게 죄입니다.
②나만 구원받지 않고 온 가족이 구원받겠다, 이게 죄에요.
③ 내 몸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이게 죄입니다.
④ 재물이 좀 여유분이 있어서 마음껏 남에게, 불쌍한 이웃에게 선행을 베푸는 게 좋겠다, 이게 죄입니다.
⑤ 나와 내 식구와 내 가족이 사회적으로 남한테 존경받고 인정받고 부러움을 사는 것, 이게 죄입니다.
그런데 교회 나올 때 이런 기대 안 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 있습니까? 다섯 가지나 되니까 복잡하잖아요.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죄고, 온 가족이 구원받겠다는 그것이 죄고, 내 몸이 건강하겠다는 게 죄고, 재물이 여유가 있어서 마음껏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는 게 죄고, 나와 내 식구와 내 가족과 내 손자가 대외적으로 부러움 사고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게 죄다.’ 이게 죄라면 그러면 교회 왜 나옵니까? 이런 것들이 죄라면 말이지요.
겨울 수련회 고린도후서 했잖아요? 여러분, 다 들어보셨지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게 마태복음 16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에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전제가 ‘자기를 부인하고’예요.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뭐냐? ‘왜 내가 나를 위해 살면 안 되는가?’ 거기에 대한 분노, 반발 같은 것이 폭발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내 인생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내 생각도 내가 컨트롤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자신이 기대하는 욕망은 본인이 컨트롤이 안 돼요.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백화점에 좋은 가방이 있더라. 그때부터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밤에 잠을 못 자요. ‘저 가방을 남이 낚아채기 전에 내가 빨리 가서 사야 돼. 대출을 받아서라도 어떻게든 사야 해.’ 내가 뭔가 노리고 있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요, 인간이 자기 몸을 컨트롤 못 합니다.
대학에서 같은 과를 나왔다. 공기업에서 ‘교수가 한 사람을 추천하면 무조건 합격된다’는 소식이 왔다 합시다. 4년 동안 같은 대학 다니면서 “우리 친구 아이가!” 하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만약에 딱 한자리뿐인 공기업 취직자리에 나의 친한 친구가 교수 추천을 받아서 합격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왜? 내가 바라는 거였잖아요. 그 자리는 내가 바라고 있었다고요. ‘취직만 되면 결혼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할 것인데 네가 내 인생 앞길을 막았다.’ 이게 용서가 됩니까?
직장의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남자 둘이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내가 친하게 지내던 그 사람과 3월 5일에 결혼한다고 청첩장 돌릴 때 함께 직장 다니기가 곤란하죠. 이것은 직장뿐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 하나 두고 청년 둘이 좋아했는데 그중 하나랑 눈이 맞아서 결혼한다고 하면 다른 한쪽은 교회 나오기 굉장히 어려워요.
그것이 뭐냐? 아,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너무 몰라요. 자기에 대해서 모릅니다. 자기에 대해서 모르면서 아까 이야기한 것들을 바랍니다. 죽어서 천국 가고 싶어요, 온 가족이 구원받고 싶어요, 내 몸이 건강하고 싶어요, 재물이 많아서 착한 일 많이 해서 인정받고 싶어요, 내 식구들이 사람들에게 욕 얻어먹지 않고 존경받고 싶어요.
그런데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들은 답변을 이렇게 해야 해요. “나는 나만 챙기는 지옥 갈 자입니다.” 그 고백이 나와야 해요. 내가 왜 지옥 가느냐? 고린도후서 5장 15절 때문입니다. 내가 나만 챙기고, 나만 구원받겠다는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라는 거예요.
개뿔도 십자가도 모르면서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고 좋다고 “믿습니다!”하는 거예요. 저는 그걸 믿음이라고 간주 못 합니다. 저는 그게 행운을 시험하는 걸로 보여요. 교회 나와서, 50년, 60년 교회 다니면서 뭘 했는가? 행운을 시험하는 거예요.
‘나에게 행운이 올지 안 올지 일단 다리라도 걸쳐 보자. 안 오면 그만이고 오면 괜찮고, 복권을 꼭 당첨되려고 사는 건가? 교회도 꼭 구원받으려고 다니나? 다니다가 얻어걸리면 가고 못 가면 말지.’ 이것은 나를 포기 못 하겠다는 거예요. 천국도 얻어걸리면 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것은 ‘내가 누구냐’에는 관심이 없고, 그러한 의도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12지파를 앞에 두고 ‘흩어져 있다’는 거예요. ‘깨져 버렸다, 해체됐다, 망했다, 전부 날아갔다, 원래는 흩어지면 안 되는데 흩어졌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위적으로 결속하고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서 잘 해보려는 그 모든 의도가 십자가의 원수였다,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 투톱, 숫자로 ‘2’, 그 숫자 ‘2’, 둘 사이에 하신 일의 연속과 연장으로서 비로소 죄도 나오고 구원도 나오는 겁니다. 죄가 뭐냐? 혹시 어떤 사람이 여러분 보고 “죄가 뭡니까?”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를 묻거든 이렇게 답변하세요.
“죄란 주님이 바라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 사이의 격차가 죄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과 주님이 바라는 것 사이의 그 틈이 바로 죄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외면받고 하늘로 갔다는 말은, 틈을 냈다는 거예요. 죄 아닌 게 없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죄 아닌 게 없다. 그래서 틈이 생겼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그 틈을 두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구원받겠다는 것,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구원받는 지식을 확보하는 것, 제가 보기에는 얍삽한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구원은 소유가 아닙니다. 구원은 소유가 아니고, 그저 인간들이 추구하는 거죠. 정의도 마찬가지죠. 정의라는 것, 사회정의, 국가의 정의라는 것은 누가 소유하면 안 돼요. 소유하면 독재자가 됩니다. 소유는 하지 못하고, ‘저만치 저 어딘가에 정의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방향을 추구해 보자’라고 하는 것, ‘그냥 가보자’ 그렇게 추구하는 것, 그게 정의죠. 그게 선이에요.
인간은 그 틈을 아무리 따라가도 메울 수가 없어요. 행복은 마치 파랑새와 같아요. 저 파랑새가 아름다워서 잡아보면 썩은 냄새가 나듯이, 뭔가 있는데 다가설 수 없는 그런 간격이 있는 것, 인간은 이처럼 꿈만 찾다가 끝나는 인생입니다. 실재가 아니에요. 그래서 자꾸 시도해 보는 거예요.
신앙은 시도해 보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행운을 시험하는 거죠. 그러면 신앙은 뭐냐? 이미 사태가 터졌어요. 이미 벌어졌어요. 이건 믿고 안 믿고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계획한 대로, 현실대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밀어붙이는 겁니다. 일은 벌써 터졌어요. 십자가 사건은 이미 터져버렸어요. 부활 사건도 터져버렸습니다. 믿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교회 나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요.
오히려 분명히 간격이 있고 틈이 있어야 하는데, 고린도후서 5장 15절이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게 함’이라는 그 말씀이 훅, 하고 들어온 거예요. 그냥 갑자기 난데없이 우발적으로 훅 들어와 버리면 누가 놀라야 하느냐 하면, 본인이 놀라야 해요. 이것은 일종의 백신을 맞는 거예요. 대상포진 백신처럼 미리 주사를 맞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늘로서 말씀만 해도 됩니다. 그러면 심판밖에 없잖아요? 일부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친히 방문하신 것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것과, 달성할 수 없는데 그것을 해냈다는 것을 우리 안에, 자기 백성 안에 담기 위한 거예요. 지난 원주 특강에서 그것을 두고 ‘초월’이 아니고 ‘초과’라고 했어요.
초월은, 내가 신이 되는 것을 바라는 거지요. 마귀가 인간에게 심어준 것인데 초월이라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욕망이에요. 그런데 초과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냥 훅 들어와서 오히려 내 쪽에서 당황스러운 거예요. 초과가 뭐냐?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갔다.’ 이게 초과입니다.
이게 왜 초과냐 하면, 사람하고 상대를 안 해요. 네가 어떤 인간인지, 10년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네가 혼자 사는지 같이 사는지, 그런 것도 안 물어요. 네가 어느 대학 나왔느냐, 현재 수입이 얼마냐, 몸이 아프냐, 그런 걸 전혀 묻지 않습니다. ‘초과’는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상대해서 결정 해놓고 그냥 우리 속에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초과가 들어있는 사람과 초과가 없는 사람, 두 종류입니다. 초과가 없는 사람은 충격적인 사태에 몸부림칠 준비를 해야 해요. ‘세상이 이렇게 끝나고 내 운명이 이렇게 끝날 줄 몰랐다. 교회에서,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도 난 대충 생각했는데 이렇게 충격적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초과가 있는 사람은 말씀이, 성경 자체가 그냥 초과니까요, 말씀이 오게 되면 ‘아하, 내 속에 나를 위해 사는 이것은 필히 망해야 한다’는 것, ‘나의 나 됨, 내 이름을 쥘 자격도 안 되고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초과가 있는 사람이고, 초과가 없는 사람은 자기가 인간인 척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같잖지도 않아요.
여러분들이 사람 만날 때 이 두 종류로 분류하면 딱입니다. 자기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하거든요. 흙이거든요. 성경에서는 네 마지막 모습을 미리 이야기한다고요. “아담아, 네 이름 자체가 흙이야. 알았지? 그러니까 네가 흙이 되기 전부터 넌 흙이야. 명심해! 너 흙이니까 난 널 사람으로 대우 안 해.” 이게 초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어서 흙이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주위 사람들 다 알잖아요. 결국 화장터에서 불살라진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기가 사람인 척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람은 없어요. 전부 사람인 척을 하는 사람만 있어요. 나도 인간인데 인간의 존엄성이 어떠니…, 성경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떠니…, 뭐 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도무지 자기 부인이 전혀 되질 않는 발언들을 마구 쏟아내는 거예요, 자기 부정이 안 되는 발언들을!
그래서 이사야 5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이사야 54장 1절을 제가 읽어드릴 테니 여러분 나름대로 한번 해석해 보세요.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임신도 못 하는 여자의 자식이 임신해서 자식이 많은 그 숫자보다 더 많다.’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뭔가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임신이 가능한 자에게 하나님이 그 틈, 간격 있잖아요, 도저히 접근 못 하는 그 간격을 앞장세워서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초과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초과적인 현상은 제가 방금 설명했어요. “하나님 저 인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인 척하지 마라. 너 인간 아니야. 흙이야.” “그래도 저는 인간이고 싶고요, 제가 인간인 걸로 줄곧 알고 살아왔습니다.” “네가 초과 맛을 한번 봐야겠구나.” 거기에 이사야 54장 1절을 툭 던져줍니다. “잉태치 못한 자의 자녀의 수가 잉태하는 여인의 자식보다 더 많다. 해석해 보거라.”
해석이 됩니까? 해석이 안 되죠. “해석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아직도 네가 고집부리고 있어서 네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최종 종점이 자기 초월에 있어요. 숫자로 치면 ‘1’이라는 그 숫자에 자기를 할당하고, 자기에게 할당한 그 ‘1’ 빼놓고 나머지를 다 제거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에 열두 지파로 뭉쳤다고 했잖아요? 그게 실은 뭉친 게 아니에요. 독고다이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밖에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이스라엘은 애써 감추면서 “우린 혈육적으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단결하고 힘 있게 결집해서 다른 이방 나라와 차이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 정체성을, 그 동질성을 우리가 유지하자, 같이 노력하자!” 이렇게 나왔던 거예요.
그게 구약 성경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같은 형제고 열두 지파의 한 핏줄이기 때문에 절대로 헤어지면 안 되고, 하나님의 모세 율법에 의해서 하나로 결집해 살아야 이방 민족에서 버텨 나갈 수 있다.’ 이거 주장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사건과 사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 주장들이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을 하는 데서 나왔고, 자기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들이 광야에서 어려울 때는 결집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척’한 거예요. 그러나 막상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까 독고다이였습니다. 각자도생이었어요.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가 발생했습니다. 출애굽 할 때 분명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자들, 다시 말해서 없는, 무(無)가 되는, 하나님 그 ‘1’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 없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그러한 언약적 관계로 맺어진 채로 출발해서 애굽을 나왔단 말이죠.
애굽에서 그렇게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굽 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보이기 위해 초과적인 어린 양을 주셨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린 양을 주니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심판의 사자가 그냥 넘어간 거예요. 그 어린 양의 피를 볼 때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나옵니다.
어린 양의 혜택, 어린 양의 효과를 보려면 넌 제로(0), 숫자로는 제로가 되어야 해요.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할례를 받아야만 피를 흘린 그 어린양의 몸통을 네가 뜯어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예요. 몸통은 뜯어먹고 그 피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 피를 제공하는 어린 양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 붙잡은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 자는 할례받는 자에게만 국한되는 거예요.
여기서 할례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육으로 만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육과 육으로 만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육이라는 숫자 ‘1’에 하나를 더 보태요. 그러면 숫자가 ‘2’가 돼요. 다른 모든 민족은 혈육적 관계에요. 설 명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족이 뭡니까? 한 조상 밑의 한 식구들이잖아요. 단결된 거라고 여겨지죠.
그러나 식구라는 게 만나면 살벌하고요, 흩어지면 살 만 하고 그런 거예요. 나중에 명절 끝나면 “휴~ 숨 좀 쉬자.”그렇게 됩니다. “형님요, 아재요~” 정종 들고 찾아오면 ‘죽었다….’ 궁둥이 쳐들고 제사할 때 보면 한 몸 같죠? 전부 한 식구 같습니다. 만나서 반갑다고 막 울죠. 나중에 헤어질 때는요, 또 다른 의미로 울어요.
가장 진리, 돈 없는 것은 가족이 아닙니다. 애써 이 진리를 자꾸 외면하려고 하지 마세요. 돈 없는 인간은 그저 짐이에요, 짐입니다. “형님, 우리 애가 이번에 대학 합격했습니다. 연세대 들어갔습니다.” “그래? 잘됐네. 공부 잘했던 모양이네.” “공부 잘했습니다.” 이야기 이렇게 끝나면요, 원수죠. “공납금 많이 나오지? 아재가 돼서 가만있을 수 있나? 그래 알았다. 내가 그 비싼 공납금 다는 못 대주고 조금은 보태줄게.” 이렇게 돼야 그다음부터 가족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두 지파도 마찬가지예요. 뭉쳤는데 그게 뭉친 게 아니에요. 그들은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독고다이, 각자도생이라는 악마의 본성을 애써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이방 민족, 다시 말해서 나만 잘되면 끝, 언약이고 뭐고, 약속이고 뭐고 다 치우고 ‘나만 부자되고 잘 되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그것을 주변 이방 민족의 바알 종교가 노골화시키고 가르친 거예요. 정성 바친 당사자가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하늘에 정성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설 명절만 되면 늘 생각나는 게 우리 할머니예요. 식구들 다 자고 있는데 우리 할머니가 새벽 네 시에 옷 갈아입고 부엌에서 뭔가를 해요.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뭘 하시나 몰래 봤어요. 할머니가 옷 정갈하게 입고, 부엌으로 가요. 깨끗한 물 떠 놓고 빕니다. 손을 이렇게 송편 빚듯이 비비면서 빌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니까 “우리 온 식구 남산 위에 노루 새끼가 뛰어노는 것처럼 열심히 뛰어놀게 해주시고…” 하면서 종이를 태우니까 종이가 위로 잠시 위로 뜬다고요. 하늘로 종이가 뜨는 이게 무슨 초과적인 현상인가…, 그걸 보면서 비는 거예요. “남산 위 노루처럼 잘 뛰어놀고, 공부 잘하고, 돈도 잘 벌고…” 설날이 그 의식으로부터 시작이 돼요. 그렇게 개시가 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보니까 자기 가족이에요. 남의 식구, 예를 들어 ‘트럼프가 잘 되게 해달라’ 그런 것 없어요. 오직 자기 식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그게 빵꾸나야 해요. 잉태 했으면 무효화시켜요. 잉태했으면 무효, “우리 새로 시작하자.” ‘육’이라는 그옆에 또 붙는 게 있어요. 초과적인 언약이 붙어요. 그러면 ‘2’가 되는 겁니다.
‘1’이 아니고 ‘2’가 되면서 그 두 번째 것이 앞에 있는 것을 망하게 해요. 없애버리는 겁니다. 죽게 만들어요. 야곱의 아내가 두 명이었어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내가 두 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인간인 척하는 것, ‘인간이기에 이 정도는 압니다’라고 인간인 척하는 것 하나와, 그리고 그 인간인 척하는 것을 ‘인간인 척하는 것’으로 완전히 규명해서 “이젠 인간 없다” 하고 새로운 인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덧붙여진 그 언약으로부터 새로 개시하겠다는 것, 이렇게 둘이 돼요. 그 둘을 통해 ‘12’가 나왔던 겁니다.
노아의 언약도 마찬가지예요. 노아의 언약 역시 둘로 나눠지는데 ‘뜨는 자와 가라앉는 자’를 구분하는 게 노아의 홍수였습니다. 노아 방주의 특징은 뜬다는 데 있어요. ‘배니까 뜨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지금 유원지나 어떤 강에 놀러 온 게 아니에요. 그 방주 안에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번창해야 할 모든 요소가 집대성되어 함께 뭉쳐져 있어요.
그 외에는 전부다 방주 밖의 심판 안에서 가라앉고 있습니다. 뜨는 쪽과 가라앉는 것, 수직적이죠, 그 수직적인 것을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수평적으로 바꿔서 생각한 거예요. 노아에서도 숫자로 표현해요. 가라앉는 것은 ‘쌍(雙)’이니까 숫자로 ‘2’가 되고 합치면 ‘1’이 돼요. 그다음에 위로 뜨는 것은 ‘7’이 됩니다. 경건한 것은 일곱 쌍으로 ‘7’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흙인데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숫자를 제로(0)로 만듭니다. 그게 이사야 2장 22절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여기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너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수에 칠 가치가 없다.’ 수에 칠 가치가 일체 없습니다. 수에 칠 가치가 없으니까 제로(0)가 되죠. ‘0’이 되는 겁니다. 고대에는 마이너스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의 수(數)로 한다면 마이너스가 되는 거예요.
야곱에게 아내가 둘이라고 했지요? 그 여자 둘 다 하나를 고집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지만, 자식을 낳고 안 낳고는 하나님의 일에 속한다고 창세기 30장에서 야곱이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30장 1-2절에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인간이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동침을 할 수 있지만, 자식을 낳고 안 낳고는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것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해서 남들 보기엔 그저 육이지만 거기서 초과적인 언약의 효과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 여자들 둘 사이에서 죽어라고 미워하고 질투해요.
인간 남편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두 아내가 서로 미워하는데, 그 사이에 자식 몇 명을 낳았느냐? ‘12’명의 자식이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왜 열세 명이 안 되고, 열네 명은 안 되었는가? 서로 질투하던 여자 중 하나가 죽었어요. 라헬이 마지막 열두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계속 살았으면 열넷도 되고 열다섯도 될 뻔했어요.
주께서는 바로 그 숫자 ‘12’로 천국 백성을 마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인간은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언약이 개입하면 인간에게 숫자가 할당돼요. 숫자가 할당되는데 그 숫자로 뭘 만드느냐? 천국을 만듭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천국을 하나의 정육면체로, 하나의 봉쇄된 건물로 설정을 해놨어요. ‘12×12×1,000’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6-17절에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모든 것이 ‘12’로 되고, 그다음에 그 ‘12’ 뒤에 ‘1,000’이 붙는 것은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한, 곧 인간의 육에서 나오지 않은, ‘하나님의 초과적인 언약에서 나온 자가 많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의 자녀가 잉태한 자의 자녀보다 많다는 겁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
‘곱하기 1,000’ 유한이 아니고 무한에 관한 숫자로서 ‘천’을 붙여요. 창세기 5장에서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그 특징이 있어요. 9백몇 살, 또 9백몇 살…, 하지만 ‘천’은 못 넘어요.
‘천’을 넘는 것은 언약을 완성했다는 증거로서 숫자를 붙여줄 때 ‘천’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천’ 단위에 숫자 화 되어서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백성으로 기입된 거예요. 그게 바로 ‘14만 4천’입니다. ‘12×12×1,000’이에요. 하나님의 ‘12’라는 것은 언약이고, 언약이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파생되는데 그 질서가 뭐냐? 하늘나라 언약의 완성에서 나온 질서가 뒤에 ‘1,000’이라는 숫자로 붙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에요. 이미 천국에 속한 인물이 설쳐 대면 천국은 곧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천국이 이미 와 있는 거예요. 천국에 속한 사람들이 이렇게 이 땅에서 같이 살고 있으면 천국은 벌써 개시가 된 겁니다.
인간치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살아요. 그런데 이미 초과적인 요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그 정도로 내가 할 것은 없고, 볼 것도 없고, 어린 양의 피만 본다’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에게는 초과적인 요소가 있고, 그 초과적인 요소가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나에게서 나올 것은 죄밖에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육이 살아 있는 한 내 속에서 계속 죄만 나오는 거예요. 아까 5가지 죄를 이야기했는데 아마 빠진 대목은 없을 거예요. 이제 생각해 볼 것은, ‘12×12×1,000’ 그래서 ‘14만 4천’으로 해서 그들에게 언약의 요소가 있다면 그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방금 이야기했어요.
천국에 이미 들어온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가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굉장히 고맙게 여기고 감사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도 역시 독고다이 아닙니까? 자기 구원 아니겠어요? ‘아, 이제 언약이, 초과가 훅 들어와서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렇게 된다면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흩어져 있는 12지파”라 했어요. 주보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은 구약 때의 바벨론이 아니라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킨 제국이 바벨론이요 그 바벨론의 최종 모습이 로마제국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나라가 인류 최후의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제국은 없습니다. 현재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가 로마의 행정 체제를 인수하게 되면 그것이 로마입니다. 이것은 상식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데요, 전 세계가 로마의 행정을 다 공유하고 있다는 말은, 그들이 어떤 독재자가 통치하든 그래서 어떤 짓을 하든 명목상 ‘우리는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하고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고 하는데 그게 로마 공화정의 평의회, 로마의 제도에서 나온 거예요.
로마는 네 번째 마지막 짐승이에요. 그 어떤 나라도 이 네 번째 짐승에서 탈피를 못 합니다. 거기서 떨어져 나가서 어떤 새로운 짐승의 나라를 만들 수가 없어요. 자, 전 세계가 이미 하나의 로마이고, 거기에 케이크 위의 건포도처럼 각자 뿌려져 있는 그걸 가지고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12 지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흩어져 있는 12지파’가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주장할 텐데 그러면 안 되거든요. 구약에서는 다 엉망이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같이 결속돼야 한다는 말이죠. 결속되는 그 관계망, 결속하게 하는 그 요인이 뭐냐를 알아야 해요.
구약 사사기에 보면 마지막에 이렇게 돼 있어요. 사사기 21장 24-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12지파로 돌아가면서도 그들은 자기 생각을 포기 못 한 채 겉으로는 우리 가족, 우리 지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속마음은 뭐냐? 그들은 왕을 원했던 겁니다. 여러분, 천국은 왕이 필요 없습니다. 왕이 필요 없어요! 어떤 경우라도 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짜 정의고, 가짜 천국입니다. 교회도 왕이 있으면 안 돼요. 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에 의하면 뜨는 족속이거든요. 가라앉는 족속이 아니고 뜨는 족속이에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보면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했어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는 “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약간 틀겠습니다. 땅에는 우리의 소속이 없습니다. 왜? 위로 뜨는 존재니까요. 휴거를 그린 그림을 보면 대개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한쪽 팔 쳐든 모습으로 해서 위로 솟아오르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고 오히려 노아처럼 생각하면 더 좋다 싶어요. 그냥 뜬다는 것, 마술사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 위로 띄우는 것처럼 붕 뜨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해바다에서 몸이 뜨듯이 주께서 강제로 뜨게 만듭니다. 마술사가 위로 뜬 사람과 침대 사이에 손을 막 집어넣고 휘저으면서 “없지요? 아무것도 없지요?” 하듯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떠요. 말씀이 잡아당기니까, 끈의 일종이니까 그냥 잡아당기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뜨는 자의 특징에 대해서 에베소서 3장에 잘 나와 있어요. 성도 보고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물을 때 그 답변이 에베소서 3장 17-19절에 나옵니다. 제가 설명을 먼저 해드릴게요. ‘나는 누구다’ 하는 이것은 독고다이 정신이죠. 자기밖에 모르는 것, 자기가 숫자 ‘1’이죠.
그런데 이미 자기의 환경이 ‘12’에요. 그냥 ‘12’ 아니고 ‘12×12×1,000’ 앞에 있는 ‘12’는 개시된 언약 ‘12’, 뒤에 있는 ‘12’는 그 언약의 결과로서 ‘12’ 그래서 최종적인 그 완성이 ‘1,000’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환경이에요. 그 환경에 의해서, 그 환경에 맞춰서 내가 거기에 일부로서 소속된 것으로 ‘내가 누구냐’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3장 17-19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은 뭐냐? ‘내가 그 사랑의 충만함에 푹 젖어 나오도록 십자가에서 나온 그 초과적인 능력이 지금도 우리를 이렇게 감싸고 있고, 품어주고 있고, 늘 덮쳐지게 한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우리의 죄를 다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우리의 환경은 오직 사랑, 사랑뿐입니다.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 사랑 속에 보쌈 쌓이듯이, 사랑이라는 보자기 속에 우리가 그냥 폭 감쌈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
인간인 척하는 인간들은 내가 누구냐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잠깐만요!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 있네!” 마치 금붕어가 “너 뭐야?” “어항 속에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어항 속에 주님의 물고기처럼 저는 사랑의 사랑을 만끽하면서, 사랑을 뿜어내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요.”
사랑이 뭔데? ‘12×12×1,000’, ‘다 이루었다’가 사랑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정방향, 정육면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용상 ‘정12면체’입니다. 그게 이미지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정육면체로 보면 돼요. ‘정12면체’라고 한다면 축구공 같지요. 모든 면과 모든 내용이 똑같은 거예요.
그 ‘12×12×1,000’에 속한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이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출신 학교가 뭔지, 가정 환경이, 어떤지 수입이 어떤지 관계없이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왜? 똑같이 수에 칠 가치가 없는데 언약적 수(數), 그 수를 할당받았으니까, ‘12’라는 수를 분배받았으니까요.
언약의 수를 분배받았으니 똑같아요. 그래서 성도는 ‘너 잘났다, 나 잘났다’가 아니라 똑같음을 확인하면서 성도로서 대화가 이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 똑같은데요? 못났다는 점에서 똑같고, 죄만 내세운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어떤 행운을 시험할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확정되었거든요.
이미 벌어진 사태, 십자가와 부활의 벌어진 그 사태로 말미암아, 그 사태의 여파가 사랑이라는 것으로 와서 우리를 덮쳐버리니까 어떤 인간이든 똑같아요. 기도를 하나 안 하나, 헌금을 하나 안 하나, 전도를 하나 안 하나,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든 피어나든 다 똑같아요.
다 같이 열심히 주님처럼 올라가는 중이에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까 제자들이 멍하니 보고 있다는 말이죠. ‘아, 우리 놔두고 그냥 가시면 안 되는데?’ 천사가 와서 나무랍니다. “너희들은 지금 성령의 끈이야.” 다시 말해서 “주께서 지금 너희가 보는 대로 다시 오실 텐데! 쳐다보지 마. 주께서 약속대로 오실 거고, 너는 주님께서 계속 하시는 일의 연속성으로서 네 할 일 하면 돼.”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주께서 우리 할 일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그 풍부함 속에서 이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언약의 인격화. 출애굽기 39장 8-14절에 보면 제사장이 나오는데 가슴에 붙이는 흉패를 제작합니다. 12개의 보석인데 3×4로 12개 새겨넣고 거기에 이름을 다 붙여놨어요.
“그가 또 흉패를 공교히 짜되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하였으니 그것의 장이 한 뼘, 광이 한 뼘으로 네모 반듯하고 두 겹이며 그것에 네 줄 보석을 물렸으니 곧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 첫 줄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세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네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이라 다 금테에 물렸으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 곧 그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라 인을 새김 같이 그 열 두 지파의 각 이름을 새겼으며”(출39:8-14).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님의 피부예요. 예수님 몸 따로, 이것 따로가 아니라 딱 붙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 몸의 확장으로서의 12지파가 바벨론이라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각자 흩어져 있는데 특징이 뭐냐? 그들은 한결같이 ‘벌써부터 그들은 이제 뜨고 있다’는 거예요. 하늘을 향하여 주님 계신 곳으로 뜨고 있습니다.
끝으로 베드로전서 2장 9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주께서 여러분들을 사랑으로 보쌈을 시킨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우리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고, 언약의 수(數)로 불러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뜻이고,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초과적인 언약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못난 존재이고, 죄만 짓는다’는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회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