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60312a 요한일서 5장 13절(넘어온 생명)-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3절에 있어서 ‘이렇게 하면 너희가 영생을 얻는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영생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에게 영생이 이미 있다.’ 영생을 주문해서 택배로 배달받는 게 아니고 영생이 이미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의 이 의식, 요한일서가 말하는 이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그 모든 방향이 달라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 또 요한복음까지 합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인정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존재를 인정해요. ‘네가 이렇게 하게 되면 네가 영생을 얻는다. 이렇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인정을 하는데 이미 요한일서에 들어가게 되면, 요한일서 뿐 아니라 히브리서도 그렇고 요한일서에 들어가 버리면 일체 우리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선(線, line)을 넘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선을 이미 넘어버렸어요. 이게 선이거든요, 선. 한쪽(선을 기준으로 왼쪽)은 ‘공백(∅)’이라고 하는 거예요. 수학의 집합론에서 공백을 ‘∅’로 표시합니다.
가운데 선에서 다른 한쪽(오른쪽)은,
1.인간이 있다.
2.생각한다. 인간이 있으니까 생각하죠.
3.행동에 나선다. 생각을 하게 되면 행동에 나선다.
또는 이것을 행위에 나선다고 할 수 있는데, ‘행동’하고 ‘행위’하고 약간은 차이 납니다. ‘행위’는 무의식적이고 ‘행동’은 실제 바깥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행위에 대해서는 타인이 알 수 없고 행동은 타인이 접촉 가능한 거예요.
‘물 줄까?’ 혼자 생각할 때 이것은 아무 행동이 안 나타나겠죠. 물 갖다 주게 되면 “아이구, 고맙습니다.”하고 상대방이 행동으로 접촉되죠. 이게 행동입니다. 행위라 하는 것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이렇게 해보는 거예요. ‘물 줄까말까? 줄까말까?’ 여기에 대해서 상대방이 알 길이 없죠. 알 길이 없어요.
어쨌든 간에 행위가 되든 행동이 되든 이것은 전제가 뭡니까? 인간이 있고 인간이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데 ‘인간이 있다’에서 생각할 때 이 생각의 구조, 체계가 언어로 되어 있어요, 언어로. 주어+동사+목적어, 주어+서술어 이렇게 언어로 되어 있다고요. 나는 저것을 뭐라고 생각한다든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의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있다, 생각한다, 행동한다’를 가지고 선 건너편으로 넘어설 수 없는 세계가 공백의 세계에요. 어떤 것도 선에서 도로 튕겨져 나와 버리죠.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이 선을 넘지 않아요. 아니, 넘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쪽은 ‘있다’지만, 선 너머는 ‘없다’에요.
없으니까 없는 것은 상대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인간이 있으니까 이 선을 넘어서 ‘없다’는 생각, 어려운 말로 ‘사유’라고 하는데, 이 선을 넘어보려고 ‘생각한다’로 시도는 해보겠죠. 출발점이, 내가 있으니까 출발해본단 말이죠. 이 선에서 출발할 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뭔가 상정 또는 뭔가 예상하고 출발점은 나에서 출발해서 다가가는 거예요. 상정하고 예상하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신(神)이에요, 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있다고 여기고 이미 모세로부터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대로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가가겠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데, 대표적인 의식이 뭐냐? ‘법이 있다-(법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법의 완성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 이 의식입니다. 이런 생각이 선을 넘지 않은 ‘내가 있음’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드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왔죠. 그래서 인간은 이 벽, 넘을 수 없는 벽에다가 성경 설정을 여기서부터 해요. ‘하나님이 계시다. 모세가 있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다. 우리는 그 율법 앞에서 죄인이고, 또는 열심히 지킬 때 율법에 영광이 된다.’ 출발점을 이 선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뭐를 놓치고 있어요? 이 선에서부터 출발하니까 선 너머(공백)의 낌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죠. 그런데 만약에 율법이 선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선을 넘을 수 없는 공백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법이 있다-나는 죄인이다. 법의 완성으로 나는 구원된다.’ 이것은 인간의 일방적 주장이 되겠죠. 마땅히 허물어져야 되죠.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율법을 줬다면 이렇게 됩니다. ‘법이 넘어왔다. (법이 법대로 해서) 죄가 살아나야 된다.’ 이렇게 되겠죠. 그럼 ‘법이 넘어왔다. 죄가 살아나야 된다.’가 공백에서 넘어온다면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뭐 빠지는 게 있죠. ‘법이 넘어왔다. 법이 살아있기 위해서 죄가 살아있어야 된다.’ 이 원리라면 여기서 빠지는 게 있어요. 뭐가 빠집니까? 뭐가 빠지겠어요?
인간이 빠지겠죠. 인간은 필요치 않아요. 인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법이 있다-나는 죄인이다. 법의 완성으로 나는 구원된다.’는 이 논리는 다 엉터리에요. 이 논리는 다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기껏해야 선 넘을 수 없는 인간의 사유, 생각하는 세계 안에서만 벽에다가 자기가 아는, 자기가 사유 가능한 꺼리를 줄줄이 하나의 낙서처럼 성경 전체를 이렇게 걸어놓고 성경과 상대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이 구원을 내게로 가져오려고 시도하는 것, 이게 엉터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빈 곳에서 넘어와야 돼요, 빈 곳에서. ‘법이 살아있으려면 죄가 살아야 된다.’ 그럼 죄 지으려면 인간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법이 없는 데서 넘어왔다면 죄도 어디서 넘어와야 돼요? 없는 데서 넘어와야 돼요. 인간은 필요 없어요. 다만 죄가 인간을 덮쳤을 뿐이죠. 왜 덮쳐야 되는가? 법이 살아있기 위해서. 말씀이 살아있기 위해서 인간을 덮쳐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넘어왔다는 이 기준점을 성경에서는 ‘여호와’로 봐요. 여호와가 ‘나는 나다.’라고 할 때, ‘나는 이런 하나님이다.’가 아니고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할 때, 이 안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빈 곳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인간이 있고 생각하는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서 포착할 게 있어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인간이 생각하는 여호와는 선에 줄줄이 막혀서 여기 쭉 나열되어 있지만. 갑자기 생각나는 게 동해안에 과메기 널어놓는 것처럼 교회 가면 이런 용어들이 과메기처럼 쭉 있는 거예요. ‘알아서 이해하고 구원이나 받으세요.’하는 식으로 쭉 나열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껏 인간의 사유 능력을 활용시켜서 ‘영생 받으세요. 천국 가세요.’라고 하나의 상품화를 시키는 거예요. 상품화시키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기로는 이 모든 성경에 나오는 견해가 없는 데서 나왔고 또는 죽은 데서 살아난 것인데, 없는 데서 나왔던 하나님과 연계된 개념이지 나하고 연계된 개념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 살아있다.’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본인이 딱히 원치 않아요. ‘나 여기 없어.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없어.’라고 하는 근거를 우리가 원하지 않아요. 그걸 요구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해도 이게 누구 이야기냐 하면 my story, 자기 이야기에요. 자기 이야기고 주님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내가 몇 년도에 예수 믿었고 어떻게 은혜 받아서 신학교 가서 목사 되었고… 전부 다 자기 이야기지, 주님 이야기는 여기 없어요. 주님 이야기는 일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3절에 보면 ‘이미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은 네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그 영생 자체가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 행동과 관계없이 이미 ‘없음’ 쪽에서 ‘있음’ 쪽으로 넘어와버린 거예요.
이제 우리가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이렇게 없는 데서 넘어왔을 때 ‘우리는 몰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하는 그러한 결과를 유도하겠죠. 유도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는 거예요. 이미 창세기 3장 24절에서 인간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죠. 그래서 생명나무 길, 생명나무가 있는 ‘쪽(side, part)’에 대해서 인간이 있는 ‘쪽(side, part)’은 어떻게 됩니까? 그쪽 세계에 대해서 알아챌 수 있거나 눈치 챌 수 있거나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게 신명기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율법을 듣고도 살아날 자가 있습니까’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신명기 5장 24절,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되어 있어요.
26절,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생존할 자가 누구니이까. 다시 말해서, 율법을 모세가 정해준 것이 아니고 불 가운데서 불을 배경으로 해서 말씀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면, 이것은 우리가 생존한다는 것을 따로 챙길 수 있는 그러한 환경, 시스템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불이 있다는 거예요.
우선 노래부터 한번 들어봅시다. 노래 틀면 또 유튜브에서 저작권 위반사항 지적하는데 할 수 없어요. 중요한 거니까. 가사가 있으니까 가사하고 같이 보세요.
Embers of your name(당신의 이름의 잔불)
I found a note you used to write between forgotten pages
잊혀진 책장 사이에서 당신이 쓰곤 했던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The ink had faded into time but not the tender phrases
잉크는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지만, 다정한 문구는 그대로입니다
Your voice returned without a sound in echoes soft and low
당신의 목소리는 소리 없이, 부드럽고 낮은 메아리로 돌아왔습니다
A warmth I thought was long retired began again to glow
오래전 끝났다고 생각했던 온기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Embers of your name remain, burning soft and slow
당신 이름의 잔불이 남아, 부드럽고 천천히 타오릅니다
Deep within my heart they rest with a steady glow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들은 일관된 빛을 내며 쉬고 있습니다
I move through days with gentle steps and peace I've come to know
나는 이제 알게 된 평화와 함께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Yet in the calm between the hours, your memory still flows
하지만 시간 사이의 고요함 속에서, 당신의 기억은 여전히 흐릅니다
Some flames never disappear
어떤 불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They rest beneath the years
그것들은 시간 아래에서 쉬고 있습니다
waiting in the hearts deep air beyond all loss and tears
모든 상실과 눈물 너머에, 생명의 근원이 있는 마음 안에서 기다리면서
Night settles in with tender calm
밤이 다정한 고요함과 함께 찾아옵니다
The distant lights grow thin
멀리 있는 불빛들이 희미해집니다
여기 보면 둘째 줄에 ‘fade’라는 단어가 있어요. ‘The ink had faded into time(잉크는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지만)’ 이게 성경에서 뭐냐? 인간은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존재하면 fade out돼요. 소멸한다고요. 영화에서 ‘fade out’이라고 하면 처음에 보이다가 점점 희미해지고 화면에서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fade out(영상은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검은 화면이 되고 음향은 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는 것).
이 ‘fade out’이라 하는 것은 ‘있다’라는 이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 있는 것 같지만 어디에 잠식된다? 이 빈 공백. 이쪽 인간들이 안다는 기존 세계-따질 수 있는 것, 판단할 수 있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것, 결정할 수 있는 것. 누가? 내가. 내가 선택한 이 세계-는 공백의 세계의 침투로 인해 서서히 fade out, 소멸되는 세계에요.
지난 오후 설교(260308 <피의 잔불>) 때 이 팝송 ‘Embers of your name’을 왜 제가 했느냐 하면 떨기나무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떨기나무에서 모세가 ‘아, 이쯤해서 하나님 만나야 된다.’ 이랬습니까?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간 게 아니에요. 누가 넘어왔어요. 생존할 수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생존할 가치 없다는 것…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 쪽에서와 인간이 사는 저주받는 세계 사이, 그 간격에 뭐가 돌고 있습니까? 불이 돌고 있죠. 화염검이 돌고 있다고요.
화염검이 돌고 있는 거기서 생명나무 쪽에서 가만있으면 되는데, ‘못 온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자.’ 이러면 되는데 그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거예요. 생명나무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거예요. 아직 작업이 안 끝났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살고 우리는 이 땅에 살겠습니다.’ 이 작업이 끝나지 않고 드디어 저쪽에서 침공하는 겁니다. 왜? 천국은 침공하는 거니까. 움직이는 거니까.
저쪽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운명으로 고착됩니다. 인간은 백날 설치고 축구하고 야구해봤자 그건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전쟁하고 돈 벌고 태어나고 열심히 공부하고 이건 움직임이 아닙니다. 딱 기다려! fade out 될 거야. 너 사라질 거야. 사라지는 거예요.
저쪽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움직일 때 떨기나무가지고 움직이면서 더 이상 모세의 존재는 없습니다. 모세의 존재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우선 신발을 벗어야 돼요. 신발을 벗으면 모세가 나름대로의 자기 발자국을 남긴다든지 자기 인생길을 가는 그것은 이미 떨기나무에 나타난 하나님에 의해서 전부다 강제로 강탈당해요. 모세는 자기 뜻대로 길을 간다든지 움직인다든지 생각한다든지 행위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모세를 신발 벗기고, 주님 손바닥 위에 모세를 딱 세워놓고, 주님이 움직이는 거예요. 주님이 움직이면 모세는 주님의 그림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은 안 보이지만 모세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모세가 갖고 있었던 지팡이를 드러나는 하나의 물체로 사용하고요. 그래서 홍해 가를 때 지팡이로 했잖아요. 열 가지 재앙 때도 지팡이를 사용해서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데 이 하나님은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이죠.
그래서 바로가 모세만 바라보고 말하죠. “너 누가 보냈어?” “여호와가 보냈어.” “여호와? 난 모른다. 여호와에 대해서 난 알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봐도 모세만 보이는 거예요. 모세만. 모세를 다루고 있는 하나님은 안 보이고요.
다루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세가 이렇게 합니다. 이름을 물어요. “내가 갈 때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Embers of your name. 당신의 이름을 뭐라 할까요? “너는 내 이름은 몰라. 다만 내 이름의 잔불은 알게 될 거다.” 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주의 이름은 신약에 나타나요. 전부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노래 가사를 보면 ‘당신의 목소리는 소리 없이, 부드럽고 낮은 메아리로 돌아왔습니다. (Your voice returned without a sound in echoes soft and low)’ 계속 모세에게 오시는 거예요. 함께 그냥 오시는 거예요. 모세는 자기가 그다음에 할 일에 대해서 본인이 알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모세가 잘했다, 못했다도 소용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왜? 법이 살아나면 모세가 살아나는 게 아니고, 법이 살아나면 죄가 살아나야 되기 때문에.
죄는 인간이 지을 수가 없어요. 죄는 건너와야 돼요. 죄의 근원. 죄는 건너와야 돼요. 이미 인간은 영적 세계에 악마와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죄져도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원치도 않는 죄를 인간은 계속 지어나가야 돼요. 인간이 지은 죄는 fade out, 소멸되어야 되기 때문에. 없어져야 되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뱀의 후손과 상대하죠. 어딜 거기 인간이 왜 끼어들어요? 구원이고 뭐고 간에 너 좀 빠져줄래?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래서 끼어들면 안 된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이렇게 선을 그으니까 여러분 좀 이해되십니까? 복음이고 뭐고 간에 전부다 없는 데서 넘어온 거예요. 없는 데서. 사도 바울이 애써서 전도했다,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건 엉터리입니다. 전부다 이쪽에서 넘어온 거예요.
넘어왔기 때문에 인간이 성경을 통해서 믿고자 하는 그 믿음은 인간의 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있음에서 나온 믿음은 믿음이 아니죠. 그럼 믿는다는 게 출처가 어디냐? 어디서 나온 믿음이어야 되냐? 그 다음 나온 게 “믿음에서 믿음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는 이거 설명하는 거예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건너왔을 때 건너왔다는 그 증거에 대해서 그 사실에 대해서 로마서는 설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뭐 ‘칭의는 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단번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하는 이 모든 이야기가 이쪽(선을 넘지 못한) 동네, 종교 동네에서 하는 이야기죠.
넘어온 것도 모르고 이쪽 동네에서 만들어낸 대표적인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도대체 신자라고 볼 수가 없어요. 신자라고 안 보이고 요령꾼. 성경가지고 요령부리는, 상대방에게 납득시키고 설득시키면 그걸로 오케이가 되는, 그래서 설득된 자들이 모여서 교회 만드는 데에 유리한 그러한 철학. 그게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모든 신학교가 다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사도신경은 모르겠는데 그 뒤에 나오는 신앙고백 있잖아요, 하이델베르그 개혁주의 전부다 그게 개혁주의에서 나온 거예요.
‘믿음에서 믿음으로’에 대해 설명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바로 영생과 관련해서 믿음, 요한일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마태복음 15장 27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잔불이 또 나와요.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려서 엄마가 대신 나와 예수님께 낫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그 대목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나는 이방 여자한테 안 간다.” 이렇게 했으면 그 이야기 듣고는 그 뒤에 예수님 이야기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뻔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잖아요. ‘아, 예수님이 단호하구나. 그런데 이방 여자가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어떻게 거기 끼어들어?’ 그 정도로 마감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끝에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되어 있고요. 15장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부스러기”. 부스러기가 잔불이죠. 그 부스러기의 원형이 이스라엘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로부터 배척받은 이방 여인의 입에서 ‘부스러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럼 너도 구원 받아라’가 아니라 28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여기 ‘믿음’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럼 믿음의 원형에서 본래 떡을 먹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이스라엘 중에서 믿음의 원형을 찾는 게 아니고, 거기서 배척받은 이방 여인에서 “이게 믿음이지. 그래, 이래야 되지.”라고 할 때 그 여인은 자기를 뭐로 봅니까? 그 부스러기로 보는 거예요. 떨어지는 부스러기.
‘부스러기’라는 말은 ‘내 처음 조건은 내가 마땅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그 자체가 자기 속에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 점에 대해 분명히 예수님께서 여자한테 주의를 줬어요. “너는 해당사항 없어.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
그렇습니다. 지금 믿음의 원형은 인간 있음의 세계 모두를 부정할 때만 넘어온 그 믿음이 빛이 나는 거예요. 이쪽의 모든 것이 부정당할 때. 이쪽의 모든 것이 부정 당한다는 말은 내 쪽에서 뭔가 하나님 이용해서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이건 하나님의 뜻과는 안 맞는, 하나님의 원래 취지와 안 맞는 이야기라 하는 것을 알게 되죠.
그렇다면 여인의 믿음, 자기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아는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기 딸이 귀신들린 것이 어떤 겁니까? 1.재수 없다, 2.잘하면 나을 수 있겠다, 3.당연한 것이다. 몇 번이겠습니까? 당연한 것이죠. 왜? 자기가 삭제되었으니까.
귀신이 와서 내 딸을 덮친 것도 그 귀신이 어디서 넘어온 거예요? 공백 쪽에서 넘어온 거예요. 귀신이 이쪽에서 넘어와서 인간을 덮치는 이유는 법을 살리고, 그 다음에 죄를 살리고, 그 다음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화목제물을 살리기 위한 장치에요, 장치. 시스템의 장치거든요. 천사도 피조물이니까. 장치에요. 그 장치에 필요한 부속품, 배치물로써 인간뿐만 아니고 귀신들도 다 있는 거예요.
문제는 인간은 fade out, 사라지지만 귀신은 안 사라지기 때문에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누가복음 4장 41절, 또는 마가복음 3장(11-12절)에서 귀신 나갈 때 귀신들이 그냥 나간 게 아니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도행전 같은 경우에는 사도 바울보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6:17)할 때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 입 좀 안 다물래?”
왜냐하면 귀신을 구원하는 게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미 귀신은 선 너머에서 왔기 때문에 자기의 운명은 이미 지옥으로 확정 난 존재에요. 확정 난 존재라고요. 귀신에 의해서 물들은 인간 속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잃어버린 양들이 있다고요. 그 잃어버린 양의 전형적인 모델 케이스로써 본 이스라엘인들이 등장한 게 아니고 누가 등장했어요?
예수님에게 차갑게, 아주 냉정하게 “나가! 어디 네가 여기서 껄떡대?”하고 배척받은 그 여자를 통해서 믿음이라는 것은 넘어와야 될 문제지, 이것은 주님을 이용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처음에는 여자가 이용하려고 왔을 수 있죠. 그러나 예수님의 그 배척하는 말씀, 그 말씀이 계기가 되어서 여인에게 주님이 정작 실시하려는, 생산하려는 믿음이 여인에게 발생된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믿음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벽바닥에 붙어있는 이 믿음은 벽 너머로 이 선을 넘어야 되고 이 선을 넘어서 다시 와야겠죠. 믿음을 넘을 때, 내가 믿음으로 나는 어디 간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나는 어디에 가요? ‘지옥 간다’를 인정해야 되죠. 내가 예수 믿음으로 지옥 간다. 쥐나 개나 다 믿으니까 마땅한 거 아닙니까.
‘내가 믿었습니다.’가 뭐로 바뀌어야 돼요? 잔불로 바뀌어져야 되겠죠. 그래서 여기 가사를 보면 오래 전 끝났다고 생각했던 온기가 어떻게 됩니까? ‘began again to glow’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계속 한번 들어봅니다. 이 노래 좋네요. 본래 노래는 자기 애인에게 하는 얘기죠. 이렇게 성경 관련한 것은 제가 일방적으로 하는 거고요.
Embers of your name(당신의 이름의 잔불)
I found a note you used to write between forgotten pages
잊혀진 책장 사이에서 당신이 쓰곤 했던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The ink had faded into time but not the tender phrases
잉크는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졌지만, 다정한 문구는 그대로입니다
부스러기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전체가 들어있는 거예요. 부스러기 안에. 양이 많고 적음은 아무 소용없어요. 나는 부스러기라도 충분해요. 구원받는 데에 지장 없을 정도로 넉넉한 믿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Your voice returned without a sound in echoes soft and low
당신의 목소리는 소리 없이, 부드럽고 낮은 메아리로 돌아왔습니다
A warmth I thought was long retired began again to glow
오래전 끝났다고 생각했던 온기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Embers of your name remain, burning soft and slow
당신 이름의 잔불이 남아, 부드럽고 천천히 타오릅니다
Deep within my heart they rest with a steady glow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들은 일관된 빛을 내며 쉬고 있습니다
일관된 빛, 이것은 양(量)이 아니고 질(質)적으로 동일한 복음이에요. 동일한 복음. <별이 빛나는 밤에>가 아니기 때문에 노래 듣는 것은 이쯤하고요. 그 다음에 가사를 보면,
Some flames never disappear
어떤 불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They rest beneath the years
그것들은 시간 아래에서 쉬고 있습니다
waiting in the hearts deep air beyond all loss and tears
모든 상실과 눈물 너머에, 생명의 근원이 있는 마음 안에서 기다리면서
Night settles in with tender calm
밤이 다정한 고요함과 함께 찾아옵니다
‘밤’이라 했는데 깜깜한 밤이라도 ‘밤’에 주님을 집어넣으면 ‘주님의 다정한 고요함이 같이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은혜라 했죠, 은혜.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집합(set)으로 한번 표현해봅시다. {a, b} 집합인데 그 원소는 a와 b죠. {a, b} 이렇게 집합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네 사람 중 두 사람 a, b. 그럼 짬뽕 먹고 싶은 사람 c, d를 묶죠. {c, d}. 그럼 {a, b}와 {c, d} 이것들은 뭐냐 하면 ‘분별’. 다른 말로 하면 ‘차이’.
공백(∅)이 아니고 있음의 세계에서의 모든 의미는 차이에서 오는 거예요. 분별이 가능해요. 식별이 가능하다고요. 식별하는 것 중 제일 식별 가능한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믿는다/ 안 믿는다.’, ‘나는 죄를 지었다/ 안 지었다.’ 전부 다 뭐에요? 식별이죠. 식별하는 것은 어디에 가두어둘 수 있습니까? 집합(set)으로 세트화시킬 수 있어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한계를 보여주느냐? {a, b}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집합(subset)이 몇 개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a} 하나 나오겠죠. {b}도 하나 나오고요. 네 사람이 가서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 두 사람이 짜장면을 먹었어요. 짜장면을 먹었는데 먹고 나오면서 이야기를 해요. 인간은 있으니까 인간은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말을 하잖아요. 아까 생각은 기초가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언어, 말을 하잖아요. “이번에 미국-이란 전쟁, 미국이 잘못한 거잖아.” 이렇게 나왔다. “그러면 석유를 이란이 지배해도 돼?” 둘이 밥 먹고 이쑤시며 나오다가 어떻게 됩니까? 둘로 따로 나눠지는 거예요. 짜장면 먹은 사람 중에서 미국파, 이란파 나눠지겠죠. 그렇죠? 식별입니다. 식별.
그 다음에 {a, b}. “이번 전쟁은 역시 미국이 잘했어.” 오? 마음이 맞네? 그럼 a, b 같이 갈 수 있겠죠. {a, b}의 부분집합 안에 {a, b}가 들어있죠. 그 다음에 이게 들어있어요. {∅}, 공집합(empty set). 공집합이 들어있어요. 공집합이 들어있는데 공집합의 공리가 뭐냐? 원소 없는데 원소 없는 게 원소가 되어서 하나의 집합을 형성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원소가 2개 있을 때는 부분집합의 개수가 2²=4개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공집합이 생뚱맞게 왜 나왔는가? 공집합은 이런 뜻이에요. 인간이 아는 세계가 ‘있음’인데 있음에서 볼 때 저쪽 세계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생각할 수 없잖아요. 생각할 수 없는데 인간이 여기 있으므로 여기 있는 모든 변화들에 대해서 인간이 카운트를 해요. 셈을 한다고요. 카운트할 때 0을 카운트 못해요. 왜? 없으니까. 그럼 1부터 나가요.
1부터 셈하게 되면… 책상 위에 음료수 병이 있고 물 컵이 있다면 여기 지금 물체가 몇 개 있어요? 두 개가 있죠. 이걸 2라고 하지 않습니까, 2. 2가 되려면 1이 있을 때와 2가 있을 때 차이가 나야 돼요, 차이가. 차이가 난다고요. 분별해야 되니까. 식별해야 카운트가 돼요.
만약 똑같은 게 2개 있다.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같은 컵이 있더라도 보통 2라 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게 다 달라요. 식별은 끝도 없고 계속 추적해보면 뭔가 차이나도 차이가 난다 이 말이에요. 하나는 작년에 산 거고 다른 하나는 올해 샀다. 차이나니까 인간이 사는 현실세계, 인간이 판단하는 세계는 무한대로 계속 숫자를 붙일 수 있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야 인간들은 숨을 쉬고 삽니다. 카운트하면서 사는 거예요. 왜? 카운트할 때마다 의미가 생기니까.
그런데 없는 세계를 인간이 전제로 하게 되면 ‘더하기’가 아니고 ‘감산’을 해요. 빼고 빼고 다 빼면 아무것도 없는 게 남아있겠죠. 없는 게 남아있는 게 바로 공집합입니다. 공집합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수학의 집합론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뭐가 있다, 없다’를 그냥 하지 말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엄밀성을 수학적 표시로 다 동원해서 그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인간 손에 장악하기 위한 학문적 방법이 이 집합론이다 이 말이죠. 문명은 그렇게 발달하니까요.
그러면 신학이라는 게 뭐에요? 신학도 이 집합론하고 똑같은 거예요. ‘요거는 구원론, 요거는 신론, 요거는 조직신학’ 분별하는 거예요. 분별하는데 거기에 반드시 분별하는 그것은 계속 무한으로 무한으로 쪼개지고 또 쪼개지겠죠. 그럼 그렇게 하는 그것이 어디에 접근합니까? 결국은 공백에 접근하는 거예요. 따지고 따지고….
일반 성도들이 신앙생활 한번 잘해보려고 애를 쓰잖아요. 애를 쓰고 애를 쓰는데 결국은 신앙생활 40년, 50년 오래 해보다가 나중에 손들어버려요.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더 이상 뭐 어떻게 더 세밀하게 해? 어떻게 더 철저하게? 할 도리 다하고 십일조고 뭐고 다 했는데 아이고, 내가 지금 몸이 아파서 옛날처럼 못하겠다. 봉사도 많이 했다.’ ‘마이 묵었다. 고마 해라.’ 이런 식으로. 본인이 스스로 무한에 접근하는 데에 패배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실패하는 거예요. 나가 떨어져버리죠. 나가 떨어져요.
그런 인간에게 사도 바울은 복음은 건너온 것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고 그걸 십자가로 봤죠. 십자가의 특징은 뭐냐? 인간이 이렇게 집합론으로 따지고 분별하는 것으로 접근이 된다, 안 된다? 접근이 안 되고 오히려 인간들은 그것을 어리석게 보는 거예요. 그 어리석음이 선 건너온 어리석음이에요.
인간이 ‘아, 이것은 신의 영역이다. 우리는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까? 아니면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는 거예요?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는 거죠. ‘우리 시대에는 이 문제, 난제를 해결 못하겠다. 나중에 더 똑똑한 천재가 나타나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 이게 과학이고 이게 학문이에요.
학문은 항상 따라가다 지쳐서 다음 세대 천재가 나타나서 못 채운 간격을 마저 메꾸길 원하지만, 십자가는 뭐에요? 십자가는 미래에 최종 결정 난 판결문을 십자가에서 우리 앞에 먼저, 미래가 현재에 있는 우리를 그냥 심판해버린 게 십자가에요. “이 어리석은 인간아.”
“아니, 알려고 노력하는데….” 노력해도 어리석어요. “십자가 믿으려고 했어요.” 믿으려고 해도 어리석어요. 왜?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우리가 존재할 때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이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리석은 거예요. 십자가 아는 것도 어리석은 거예요. 어떻게 알아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그것도 뭐가 돼요? 어리석은 거예요.
이미 영생은 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고백이 나와야 돼요. 와 있다면 우리는 “나는 참 어리석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죠. “불신자들아, 십자가가 어리석지? 나는 지혜롭기 때문에 난 십자가 믿을 거야.” 이런 경우는 인정을 안 해줘요. 인간 중 어느 인간도 자기의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재주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를 믿는 것은 내 사유의 결과다, 아니면 믿음에서 믿음이다? 믿음에서 믿음이다. 내 믿음이 작살나고 저쪽에서 건너온 믿음. 그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뭐로 봤습니까, 요한일서에서? 자신을 ‘제물’로 봤죠. 제물이 뭐에요? 제물은 어떤 현상을 보여줍니까? 죽어서 fade out, 죽어서 소멸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20장을 설교시간에 했죠. “만지지 말라”(17절)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가 존재하니까 예수님을 사랑해서 만지려고 했어요. “만지지 마라. 네가 만질 대상이 이제는 아니다.” 전에는 만졌어요, 안 만졌어요? 막 떠밀고 만지고 이랬죠. 만지지 마라. 이미 나는 선을 넘어서 선 넘은 채로 다시 올 것이다.
그걸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는 ‘기름 부음’이라 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 주님이 건너간 코스대로 갔다가 인간은 갈 수 없는 곳에 있으면서 닭 쫓던 개 신세 되어버렸는데 저쪽에서 주님이 다시 넘어오는 것. 모든 완성된 개념을 가지고 넘어오는 것. 그것을 기름 부은 자라 합니다.
10분 쉬고 그 기름 부은 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서울강의20260312b 요한일서 5장 13절(넘어온 생명)-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가 ‘고난 받는 십자가’라고 다 알고 있죠. 누가 고난을 줬죠? 누가 고난을 준 게 아니고요. field에요. 고난 주기로 작정된 장치가 있어요. 그 장치에 인간이 출생을 한 거예요. 그 장치에서 신은 마귀고, 마귀가 장악한 데서 태어난 인간마다 누구나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해서 핍박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특히 구약 같은 경우에는 그 해당시대에 선지자가 와요. 선지자가 앞서서, 메시아가 받는 고난을 그 시대에 해당되는 사람들로부터 받게 돼요.
그럼 선지자가 고난을 받으면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아까 공백의 선, 없는 데서 넘어온 이 원리가 발생되고, 구약의 그 시대 사람들이 그 원리를 적용받게 됩니다. 그것이 잘 정리된 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라 되어 있죠. 믿음의 선진들이라 해서 나왔던 11장의 그 모든 내용들은 신약입니까, 구약입니까? 전부다 구약이에요.
전부다 구약인데 그들의 특징은 모두 다 자기 존재가 비어있다는 거예요. 텅텅 빈 거예요. 비어있고 그들에게 실상이 주어졌어요. 그런데 그들이 사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다수의 세계에요. 차이나는, 식별이 되는 세계. 분별이 되는 세계. 너 다르고 나 다르고, 너희 삼촌 다르고 우리 삼촌 다르다는 것. 전부다 분별되는 세계, 다수의 세계에요.
다수의 세계에 대해서 일어나는 이러한 언약적 행위가 우리 보기에는 어떻게 보입니까? 다수로 보이죠. 다수로. 다수의 세계니까 다수로 보이는데 그것 하나하나가 전부다 잔불이에요. 하나에서 나온 잔불이에요. 그것을 ‘증인’이라 하죠. 단독자 하나에서 나온 증인들입니다.
이 다수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인간들이 생각해서 만들어낸 것이 ‘일자(신)’이죠. 이 신은 곧 우상입니다. 신이라는 자체가 그들의 우상이에요. 나름대로의 자기 존재가 여기 있고 우리 사는 게 의미 있다는 것을 일자를 경유해서 그걸 정당화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만큼 지혜롭고 똑똑하죠. 그리고 그들은 기적을 놓치지 않아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 십자가죠. 그럼 십자가는 인간이 생각하는 지혜에 속합니까, 안 속합니까? 안 속해요. 기적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속하지 않습니다.
기적 빼고 지혜 빼면 인간 자체가 빠져버려요, 거기서.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두 개 빠지면 다 빠져요. 왜? 인간은 성경을 보면서 기적과 지혜를 구성하기 위해서 성경을 참조로 하기 때문에. 그거 다 빠집니다. 기적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그것도 같이 빠져버리죠. 빠지면 누가 빠져야 돼요? 본인이 날마다 빠져야 되죠. 본인이 날마다 fade out, 소멸되어야 되죠.
이랬던 자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선조들은 본인이 원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건.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건과 성경에서 말하는 사건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건은 5․18 사건처럼 인간들이 말하는 사건은 ‘인간들 손에서 진리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냐’와 관련된 사건들이에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사건은. ‘이럭저럭해서 놀라운 사건과 사건의 연속으로 이만큼 우리는 놀라운 문명을 이뤘잖아.’ 이게 바로 인간들이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사건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기존에 몰랐는데 사건 터지고 새로 알았다.’ 이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건이에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세계가 수학의 집합론으로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α)(∃β)[……]
∀, ∃은 집합론에서 양(量)을 드러내는 양화사(量化詞, 명제 안의 변수가 얼마나 많은 범위를 차지하는지(수량)를 나타내는 기호)라 해요. 영어로 Quantifier라 하는데 이것을 양화사라 해요. 수학식으로 표현하여 엄밀하게 규정함으로써 어떤 사건에 대해서 모든 일어난 사건과 존재에 대해 하나하나 다 집어넣어서 이게 진리값이냐, 오류값이냐를 규정하기 위해서 수학에서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A를 거꾸로 한 ∀(universal quantifier, 전칭 양화사)은 all(모든)이라는 뜻이에요. ∃(existential quantifier, 존재 양화사)는 존재한다(exist)는 뜻이에요.
(∀α)는 ‘모든 것에 대해서’라는 뜻이에요. 이게 무슨 뜻인가? 너만 있는 게 아니다. 네가 있기 위해서 네 부모님이 계시고 네 친구도 있고. 이 세상에 너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있는데 네가 있다. (∃β)는 ‘β가 있다’. 그럼 이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 ]에 γ를 집어넣으면 모든 것은 frame, 범주를 정해서 각자 있는 범주에 따라서 네가 있는 범주를 더 큰 범주로 두를 수 있다는 말이죠.
(∀α): 모든 α에 대해서
(∃β): β가 있다
[……]: α와 β가 충족해야 하는 구체적 조건이나 관계
예를 들어서,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두 사람이 짜장면 먹었어요. ‘두 사람이 짜장면 먹었다.’보다 더 큰 범주는 ‘둘 다 남자였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는 범위가 더 큰 범위가 되면 이것은 더 큰 집합이 되겠죠. 모든 게 집합.
자꾸 수학의 집합을 사용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엄밀하게 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인간이 헤아려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바탕을 인간 쪽에서 만들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중구난방 자기주장이 옳다고 해서 엉망이 돼버리거든요.
엉망이 되니까 우리가 엄밀하게 해서 “네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이 공식에 맞는 이야기야? 그래, 그렇다면 내가 동의할게.” 우리 둘이 동의하게 되면 우리는 진리값이 된다는 거예요. 동의하지 않으면 이것은 엉터리다, 이것은 오류가 있다,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인간의 지혜가 어디까지 옳고 어디까지 그른지 판정내릴 수 있는가를 수학적으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사건은 뭐냐? 사건은 최초의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수로 봤던 범주, 범위가 더 좁아질 수도 있고 넓어질 수도 있는 계기가 된 것을 ‘사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기존의 원칙은 일체 포함되지 않는 것. 양화사로 표현하면 사건은 이렇게 됩니다.
∃χ(χ∈S)
∃χ: 사건(χ)이 있다
χ∈S: χ는 새로운 상황(S)에 귀속된다(∈)
사건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χ(χ∈S∧-P(χ))
∃χ: χ사건이 있다
χ∈S: χ는 새로운 상황(S)에 속해있다
∧: 그리고
-P(χ): 기존 원리에 속하지 않는(반대되는)
사건: 새로운 상황에 속해있으면서 기존 원리에는 반대되는(속하지 않는) 것
보통 사람들은 이걸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가?’ 하겠죠. 그런데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가만 따져보면 사건이 뭐냐에 대해서 너, 나 의견이 다 다르니까 엄밀하게 하나로 모아보자는 거예요. 70억 인간들이 기존에 알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 계기적인 것, 그게 사건이죠.
그럼 이 사건은 ‘-(마이너스), 없다’가 되죠. 기존에 없던 게 되죠. 없으니까 기존의 원칙과는 단절되겠죠. 단절되나 마나 그들은 단절된 채 이제는 새로운 원칙이 드러나고 그다음 어떻게 됩니까? 계속해서 가는 거예요. 계속 가서 남는 게 뭐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다수의 세계.
이것을 바로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보이는 것은” 그다음 뭐라고 되어 있어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다수의 세계는 나타난 세계와 같은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봅시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다시 말해서, 보이는 것에서 추론해서 보이는 것을 탐구해서 나타난 것을 나타나게 한 것으로 넘어갈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저 공백의 세계에서 넘어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넘어올 때 ‘우리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식을 더했구나.’ 자꾸 이렇게 생각하지, 나를 심판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왜 심판한다는 생각을 못하는가? 나타난 십자가는 바로 제물이기 때문에. 죽음을 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입니까?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죽음이죠. 왜? 다수의 세계에서 조사를 해보니까 죽을 때는 다 어떻게 돼요? 숨이 끊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은 숨 끊어져서 시체가 되는 거다. 흙이 되는 거다.’ 이게 인간이 내린 결론이에요. 그러나 십자가는 뭐냐? ‘죽음이란 아버지께 저주받는 것’ 이게 죽음이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다르죠.
아까 떨기나무 잔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봤습니까? ‘나는 나다.’ ‘나는 나다’에서 신약에 오면 뭐냐? ‘나는 죽는다.’에요. ‘나는 나다’가 이름이죠. 이름을 구체화시킨 것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굉장히 반겼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예수님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그들이 부탁했습니다.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주님, 언제 버림받습니까?’ 한 거예요.
별세에 대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생각했다는 말은 그 둘의 특징이 선지자거든요. 선지자는 앞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선지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언을 완성시킬 것은 오직 ‘죽음’밖에 없다. 누가 죽는다? 사람이 죽으면 안돼요. 누가 죽어요? 하나님이 죽어야 돼요.
이게 바로 출애굽기 24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제단을 쌓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제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는 제단이에요. 거기 제단이 나오죠? 4절,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그렇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에는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가 준비하게 하십니까? 율법을 통해서? 죽으신 분이, 주의 이름이 준비하게 해서 내 이름-이름이 있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이죠, 내 존재를 여기 두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사건은 인간 존재를 전제로 할 때 예상 못한 법칙이 일어나면 그것을 사건이라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함으로써 인간과 단절시키는 사건, 그 사건이 최후의 유일한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나와요. 믿음도 나오고 소망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그런데 나오게 된 그 근거는 출애굽기 24장과 20장 24절에 의해서 그 제단에 이름이 함께 있고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출애굽기 24장에… 율법과 무엇이 만나죠? 양푼에 담아 율법책에 피를 뿌림으로써 장차 이러한 구성요소로서 ‘나는 나다’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나는 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나다”라고 할 때 여기다 내용을 일부 공개했어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자기가 던진 언약을 자기가 성취하면서 자기에게로 회수함으로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볼 수 있어요. 다 이룬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런 사실이 신약에 와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야고보서 4장 1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 생명은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죠. 그러면 여기서 누가 빠져요? 나. ‘너희’라고 하는 나. 나는 하나님의 의미체계에 끼어들 수가 없죠. 소멸되어야 되니까.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파생된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의 파생된 사건은 뭐냐 하면, 사라질 존재들을 일찌감치 십자가를 위하여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태어나게 했고 살게 했다는 거예요. 인생은 나의 스토리가 아니고 주님 스토리로 바꾸는 작업이에요. 그 작업을 하고 나 있는 자리와 십자가 자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편지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 거예요.
어떤 연락책이 오고가고 있는지, 주님 십자가 쪽에서 뭐가 흘러나오는지, 뭐가 흘러나와서 나로 하여금 있어도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이 가벼운 인생, 무겁지 않은 인생을 만들어주셨는지, 도대체 뭐가 쏟아져 나왔는지를 소개한 것이 바로 로마서, 갈라디아서부터해서 여기 야고보서입니다. 예를 또 한번 들어보면, 베드로전서 4장 11절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일 누가 말하려면” 본인이 말해요, 누가 봐도 본인이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이게 대체하라는 말이 아니고 벌써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거예요. 사태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란 말이죠. 말하는 자가 말하면서도 내가 존재함으로써 이야기하고 이렇게 말하는 행동을 한다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전부다 부정당하는 식으로 해줘야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는 거예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가 아니라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고 이해해야 된단 말이죠. 그럴 때만 이 본문이 돼요. ‘뭐 하나님이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들어가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되죠. 우린 닫혀있으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하는 일에 대해서는 건너갈 수 없으니까, 봉쇄되었으니까.
봉쇄되었으니까 ‘이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말하지 말고, ‘이것은 바로 십자가 지신 사건이 파생되어서 퍼져서 하나의 사건에서 나온 자투리, 아까 말한 대로는, 부스러기로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된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다음 뭡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고백한다고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 아니죠. 본인이 살아있는데 무슨 영광이 돼요. 존재가 되죠. 존재는 일체 fade out, 사라지기 때문에 존재는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존재는 뭐냐? 사건을 유발하신 그분만이 영원한 알파요 오메가로 유일한 존재에요. 다른 존재는 없어요. 예수님만이 존재해요.
왜? 그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다른 사람은 형상 아니에요.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보이지 않는 형상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모든 창조는 그 분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거든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5-16)
에베소서 1장 10절에,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통일되니까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잠시 야고보서 4장을 보게 되면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여기서 ‘주’가 누구죠? 주가 누굽니까? 주님입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주님이 강림한다. 기다려라. 온다.’ 했거든요. 주의 뜻이면, 존재하신 주께서 계속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 사건에 의해서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떡볶이 장사도 하고, 치킨 장사도 한다 이 말이죠. 노래방도 하고, 애 셋이나 낳고, 어떤 사람은 둘 낳고.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에요? 아니에요. 주의 뜻이라니까요.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 이러면 하나님 뜻이 되지만, 주의 뜻은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게 내 죄인데 죄를 위해서 죄 씻음이라는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애를 넷이나 낳은 거예요.
“이번에 어디 갔다 왔습니까?” “두바이로 여행 갔다 왔습니다.” “왜 갔습니까?” “주의 뜻입니다.” “왜 갔습니까?” “십자가에 떠밀려서 갔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에요. “그런데 왜 못 갔습니까?” “주의 십자가에 의해서 이란에 전쟁 일어나서 못 갔습니다. 그 대신 중국 갔다 왔어요." 이러면 된다고요, 모든 게.
십자가에서 나왔기 때문에 십자가로 소환되고 십자가 사건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까 제가 노래 가사 보면서 언뜻 이야기했죠. 잔불은 얼마나 남든지 부드럽게 타오르잖아요. (‘당신 이름의 잔불이 남아 부드럽고 천천히 타오릅니다. Embers of your name remain, burning soft and slow) 잔불은 양의 문제가 아니고 질의 문제란 말이죠. 잔불이 많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잔불이 아니고, 작다고 해서 잔불 아닌 게 아니고, 모든 것은 십자가 사건으로 그 안에 동질의 그물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도를 만나잖아요. 성도를 만날 때 성도끼리는 어떤 대화를 해야 되는가? 그 요령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요령이니까 참고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와 성도끼리 만날 때는 무슨 대화를 하느냐? 이거 하면 돼요. ‘비-파괴검사(NDT, Non-Destructive Testing. 물건을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고 그 내부나 표면에 결함이 없는지 확인하는 검사방법)’. 부수지 않고 쏘면서 그 내용이 드러나는 거예요.
A라는 성도와 B라는 성도가 만났습니다. “이번에 류현진이 WBC 야구팀에 나갔는데 왜 한 번도 던지질 않지?” “나이가 많아서 자칫하면 홈런 맞을 수 있다.” 남들 보기에는 어떤 대화입니까? 너무나도 평상적이고 상식적인 대화죠. 그런데 WBC 야구 이야기, “이번에 어떻게 돼서 8강 올라가가지고 마이애미 가서 지금 몸 풀고 있단다.” 이런 이야기한단 말이죠. 십자가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어 보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종교 개념을 거론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일상에 자기 관심사, 느낀 것 그대로 하면 돼요. 신앙 이야기한다고 해서 안 죽는 게 아니거든요. 안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이번에 이왕 참석한 거 류현진이 한 번 던졌으면 좋겠다.” “류현진 늙어서 안돼.”
이들은 다수의 세계에 속하죠. 다수의 세계는 뭐해요? 분별하죠. 분별한다는 말은 너와 나의 ‘차이’를 끄집어내는 거죠. 차이를 끄집어내니까 야구 이야기하다가 ‘의견 안 맞음’이 드러났죠. 의견 안 맞음이 드러날 때 비-파괴 검사인 거예요. “너하고 나하고 20년 지기 친구이지만 어지간히도 안 맞다. 너 짬뽕?” “난 짜장면.” “거 봐. 안 맞잖아.” 어지간히도 안 맞다.
안 맞는데 왜 만나게 했을까요? 만나면 이게 존재가 되지, 사건이 안돼요. 그래서 쏠 때는 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안 맞는 것만 쏘아댈 때 “너나 나나 쪼다긴 마찬가지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이건 십자가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좀 적어놓으세요. 좋은 게 늘 오는 게 아닙니다.
가족끼리 맞추겠다는 게 엄청나게 마귀적이에요. “아휴, 자식이 말을 안 들어요.” 둘 다 fade out, 사라지는 가운데서 왜 자식이 말을 들어야 되죠? 말을 들으면 이것은 집합에서 귀속 단계가 돼요. 부모 안에 자식이 있다, 이렇게 돼요. 그것은 이 다수의 세계, 현실세계에서나 통하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로 비-파괴검사해보면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 굳이 일어나야 될 이유가 됩니다. 내 중심으로 내 뜻에 맞는 자식, 맞는 가족, 내가 원하는 가정 화목과 행복, 그걸 안 놓치고 있음을 그대로 노출시켰잖아요. 그게 혼자 있으면서는 ‘나는 믿음도 좋지만 자식 교육도 잘 시켰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럴 때 B라는 성도가 와서 “자식 교육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하고 붙으면 둘이 차이를 발견하죠. 결국 남은 결론은 뭡니까? 둘 다 fade out당해야 마땅함이 등장해요, 둘 다. 둘 다 어느 누구도 정답이 아닌 것을. 둘 다 내가 끼어있다는 자체가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것만큼 마귀적인 생각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 본인은 십자가 졌다고 했어요, 안 졌다고 했어요? 나는 너희를 위해 십자가 진 적이 없다고 했어요.(“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전 1:13) 따로 있어요. 공백에서 넘어온 십자가에요.
요한일서 보기 전에 야고보서 4장 16절 보고 합시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다” 뭡니까?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악한 것이니까 우리가 좌절할까요?
‘왜 나라는 존재가 십자가 사건에 자리를 비워주고 나는 사라져야 되고 안개처럼 없어져야 되는가?’ 그 이유를 날마다 알게 해주는 것이 현재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예수 안에 들어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 왜 내 주장은 뭘 해도 엉터리인가를 주님 안에서 발견하는 거예요.
요한일서 봅시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 영생에 대해서 언급을 했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요한일서 2장에 보면 이미 나와 있어요. 23절부터 2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여러분들이 설명을 통해서 이 말씀이 장착되게 되면 ‘이것은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우리 살아있는 현실세계 속에 벌써 넘어왔구나.’ 이렇게 파악이 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생각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하면 ‘나는 아버지 이전에 아들부터 야무지게 믿어야지. 왜? 아들부터 야무지게 믿어야 아버지도 따라서 같이 덤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이런 계산을 해요. 그 계산을 왜 합니까? 십자가 사건을 위함입니까, 존재를 위함입니까? 나라는 존재를 포기 못한 모습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이 존재가 받음으로써 이 존재는 구원받는다는 이런 노림수가 있다고요.
‘믿음, 소망, 사랑’에서 사람들은 ‘믿음, 소망’이라 하는데 믿음, 소망은 어디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믿음, 소망의 근거는 어디입니까? 믿음에서 나온 게 아니고 소망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어디서 나왔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
사랑에서 나왔는데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잖아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주님의 존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사랑이 찾아오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 앞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이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지고 느껴지는 거예요.
잔불이니까. embers니까. 잔불. 본불이 아니고, 불똥이 튀다 보니까 그 중에 하나 얻어걸린 거죠, 우리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위해서 사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고린도후서 5장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걸 사람들은 ‘주를 위해서 산다’ 이렇게 하잖아요. 주를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라는 내용이 포함된 사건을 위한 그분을 위해 산다 이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한테 ‘나 이제 저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런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살지 않도록 해주신 분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도록 해주신 분.
‘그럼 나냐, 예수님이냐? 이제 나를 버리고 예수를 선택해야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어요. 지금 그것은 자기의 선별이고 차이성을 파악하는 거예요. 인간은 공백에서 넘어온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분별하거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불가능해요.
나는 카운트에 포함이 안 됩니다. 카운트에 포함도 안 되는데 이름이 있을 수 없죠. 없는 이름이 옴으로써 이 세상은 사달 났어요. 모든 것에 인간은 이름을 붙였잖아요. 아담이 이름을 붙였잖아요. 이름의 세계에 아무 내용 없는 이름이 이름 있는 모든 세계를 불로 싸질러버리죠. 그 이름 중에 우리 이름이 포함되어 있고요. 불 안 나더라도 안개처럼 사라져가고 있고.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비현실적입니까? 이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거예요, 제가? 아니죠. 모든 인간이 죽어 사라지잖아요. 이순신 장군도 죽었잖아요. 세종대왕도 죽었잖아요. 하메네이 차남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머리에 부상을 당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골판지 들고 나타났어요. 코미디도 아니고요. 지도자가 없으니까 지도자 사진이 있는 골판지 들고 우리 지도자라고 나타난 거예요. 미국이 골판지 폭파시킬 거예요. 오늘 뉴스에 나왔어요.
그 모습을 볼 때 우리가 골판지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 이름을 쓴 골판지. 비바람 불면 없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자기 이름이 없어지는 게 소원이었어요. 내가 없어지고 내 이름 말고 주의 이름으로 합류하는 것,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게 내 소망이라고 했어요. 그 소망은 억지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소망이에요.
‘살아있으면서 믿음생활 잘해야지.’ 이게 소망이 아니고, 내가 없어지는 게 소망이에요. ‘신앙생활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해야지.’ 이게 소망이 아니고, 없어지는 것에 늘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게 소망이에요. 그게 사랑이 차고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자신을 감산 또는 다른 말로 비워내게 하는 것입니다. 다 마이너스, 빼기를 해요, 빼기. 우리 권사님 지금 빼기를 많이 했어요. 머리카락 까만 것 다 뺐어요, 지금. 계속해서 빼기할 때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안은 텅텅 비어있고 그다음부터 우리가 하는 말, 봉사는 누가 하시는 겁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믿음으로 능력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류현진이 던진다, 안 던진다 그 말을 누가 하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못난 놈끼리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그것, 그것조차도 그 못난 것까지라도 뭡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어나게 했던 그 배경과 환경의 요소, 장치에 필요했던 모든 재료를 우리라는 빈 그릇에 꽉꽉 눌러 담아주는 거예요.
죄는 우리가 죄지어서 죄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죄가 율법과 더불어 넘어오잖아요. 율법 조항 하나마다 죄가 딸려서 넘어온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그것을 산상설교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자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죄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죄에요.
거기다가 엉뚱하게 ‘내가 안 했습니다’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했다, 안 했다를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비판하지 말라’ 이거 죄죠. 그러니까 우리는 결과물이에요, 결과물. 넘어온 죄의 결과물이지, ‘이건 앞으로 내가 회개해야 돼. 고쳐야 돼.’ 그럴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회개도 안 되는 걸 회개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서 그들은 자기 의로 구원받겠다고 열심히 애썼던 자들이잖아요.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서 또 그 사람들 흉내를 내고 있는 겁니다.
집합으로 말해서 ‘나는 모든 것을 내게 귀속시킨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내게 귀속시키죠. 주님은 인간세계에 ‘귀속’되는 게 아니고 ‘포함’이 되어 있어요. 여리고 성에서 정탐꾼 둘은 귀속되었습니까, 포함되었습니까? 정탐꾼 둘이 여리고 성에 왔잖아요.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여리고 성에 왔잖아요. 여리고 성에 왔을 때 그들은 여리고 주민이에요, 아니면 스파이입니까? 스파이지만 그 기간 동안은 함께 살았잖아요. 함께 살았는데 그 스파이는 절대로 귀속이 안 되고 잠시 포함되었다가 거기서 기생 라합을 끌고 구원시켜버렸죠.
이렇게 귀속되지 않고 포함될 때는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묶어낼 수 없는 초과적인 게 있어요, 초과적인 것. 성도와 성도의 만남일 때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같은 성도끼리. 하지만 반드시 잔여로 남는 것은 초과적인 십자가 사건이 나와요.
“우리 둘이 오늘도 두 시간 반 동안 전화했는데 우리 둘 다 쪼다지? 그렇지?” “그럼!” 같이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참 쉽죠. 안 만나면 자존심이 안 깨지는데 만나서 자존심 다 깨지는 거예요. “너는 내가 그렇게 설득해도 못 알아듣나?” 이렇게 나오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네 말을 들어야 돼?” “야, 친구 사이에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우리 한 판 싸울까?” “그래, 한번 싸울까?” 이게 뭡니까? 아름다운 싸움이죠.
우리가 죄의 찌꺼기로 지금 존재하고 있고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그 현장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그 두 사람 다 뭐냐? 그 현장을 통해서 주께서 하게 하신 만남을 통해서 초과적인 것이 나오는 겁니다. 그 초과적인 게 뭐에요? 십자가죠.
이제 요한일서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 요한일서 보세요. 벌써 5장하고 있잖아요. 5장 하고 있는데 다시 1장 3절을 보니까 이게 또 어렵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일단 우리끼리 만나고 추가적으로 예수님 있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 있다고 치자, 지금 이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왜 그런 문제가 아니냐 하면 바로 1장 10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뭐로 만드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은 가짜였어요.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죄를 계속 개발하고 발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율법이 넘어올 때 죄도 같이 넘어왔죠. 율법의 완성이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죠’. 오늘부로 없습니까, 내일 되면 생깁니까? 아니죠! 없던 사랑이 생기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라는 이 사실을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 주님을 믿은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소망한 적이 없다. 돈이나 소망하지, 무슨 주님을 소망해요. 사랑이 없다는 이 사실이 내가 몰랐던, 넘어온 새로운 소망이에요.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계되어서 이 현장성을 유지하는 거예요. 그게 말씀의 현장성이에요.
그래서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그다음에 뭡니까?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게 존재론적이 아니고, 우리 존재 쪽에서 사건과 만나서 우리 존재에 사건이 계속됩니다.
왜 존재와 존재라고 안 하느냐? 존재가 되어버리면 이 절단성, 끊어짐이 없어요. 사건은 ‘끊어짐’입니다. 내가 만약에 어제 은혜 받았으면 오늘은 내가 은혜 받은 존재로 계속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어제 일은 어제로 마감되었어요. 경리 사원이 한 달 되면 장부 정리하잖아요. 그처럼 하루치는 하루치로 장부 정리가 되어서 끝나요.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내야지, 내일로 넘기면 안돼요.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될 것이다.’ 그건 누구 마음대로에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내일 되면 내일 또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아침부터 눈 뜨게 만드실 것인데 눈 못 뜨면 그만이고요. 그건 우리 소관 아니죠. 복음의 잔불, 십자가의 잔불이 내일까지 이어지고 안 이어지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죠. 주님 소관이에요.
자, 결론 맺겠습니다. 결론은 뭐냐? 결론은, 이 말씀이 결국은 내가 있던 존재의 자리에 우리를 죄로써 다 끄집어내고 요한일서로 꽉 채우면 된다. 요한일서로 꽉 채우니까 요한일서의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죠. 이게 바로 주께서 성도를 부르는 목적입니다. 너는 껍데기만 제공해라. 내용은 내가 채울게.
말씀이 어떻게 채우는가? 말씀을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요한일서 2장 27절 봅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기름 부음”. 원래 기름 부음이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메시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메시아에게만.
그런데 기름 부은 메시아는 핍박을 받았죠. 그럼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핍박받은 메시아의 기름 부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육신을 가진 인간한테 핍박받았다는 사항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있으면서 그 관계가 우리한테 닥치게 되죠. ‘핍박받음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졌다’라는 사실을 껍질에 해당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요한일서 2장 27절로 내용을 꽉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까?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기름 부음이 어떻게 활용할까? 수명이 어느 정도 되고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까?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그러면 자아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느냐? 그냥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에요.
사건이란 추후에 의미가 발생돼요. 일이 지나고 난 뒤에 발생돼요. 그러면 ‘나는 나름대로 잘한다고 했는데 돌아서면 나는 ‘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잘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죄가 됩니까?’라는 질문이 성립되겠죠? ‘나는 죄인이고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나한테 죄가 됩니까?
그때는 죄가 안돼요. 추후에 죄가 돼요. 내 자아가 살아있으니까. ‘그때 내가 참 잘하기는 잘했어.’ 갑자기 뒤돌아보면 이게 또 생긴다고요. 또 생기는 것을 감사해야 된다고요! 또 생기는 것을. 만약에 ‘그때 역시 잘했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이렇게 되어버리면 시간 관리를 주님이 하는데 내가 내 찬란한 미래를 내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거죠. 그러면 누가 우상이 되겠어요? 내가 우상이 되겠죠.
그래놓고는 ‘다시는 이런 우상 짓 안해야지.’ 그거는 오늘로서 계산 끝내세요. 내일 되면 또 주께서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겁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그것조차도 죄 지으란 말이 아니고,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죄를 발굴하는 일이 있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나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가 추후적으로 감사가 되면서 의미가 생기겠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다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가 아니고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1-33). 이것이 사도 바울에 와서는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 되어서 주님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이 잔불처럼 파급됐다고 보는 거예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그 믿음이 우리의 행위를 부정하죠. 그래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했단 말이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있죠. 없는 데서 자식이 생기고, 그 자식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 했잖아요. 죽은 데서 수풀에 있는 그 양 때문에 살아났잖아요. 없는 데서 생겼고, 그 생긴 것이 죽어야 되는데 죽음을 경유해서 살았다. 그 이삭이 바로 로마서 4장 끝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아브라함을 빗대어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태를 그리고 세상을 크게 보게 하여주시옵소서. 나는 이익 봤다,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잘했다, 나는 못했다,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의 성령의 시선으로서 우리 자신을 세상을 넓게 봐서 이 모든 것이 어느 하나 고맙고 감사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강의 보충 설명 *
부분집합에서 공집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다수만으로는 ‘다수’ 자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학자들이 ‘없음(공집합)’을 집어넣은 거예요, 모든 있음에. 다수가 다수를 설명하면 무한으로 다수가 쪼개져요. 스톱이 안 된다니까요. 스톱이 안돼요.
그것을 원소라 하는데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개, 강아지가 있다. 강아지란 뭐냐? 강아지는 털이다, 강아지는 발톱이 있다,… 뭐 이렇게 하려면 강아지를 다 쪼개야 돼요. 인간은 뭐냐? 인간의 요소가 뭐냐? 인간의 요소는 뭐 엄청나죠. ‘웃을 줄 안다, 성격 좋다’ 이런 것도 있지만 ‘키가 몇 cm다’ 다 들어가려면 엄청나단 말이죠.
집합으로서 모든 걸 설명하는데 공백을 집어넣은 것은 인간의 사유에서 ‘없음’을 사용해서 이 무한한 카운트를 마감 짓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없음’에서 나왔다는 걸로 카운트를 마감 짓자. 그래서 부분집합이고 그 부분집합은 현재 있는 집합을 초과해요. 초과한 것이 신비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부분집합은 ‘귀속(belonging, ∈)’이 되지 않고 ‘포함(inclusion, ⊂)’이 된다고요. 이런 말이 어렵습니다, 집합론에서. 그런데 귀속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역량이 전부에요. 예를 들어서 ‘~는 내 아들이다’ 이것은 귀속이잖아요. ‘나는 엄마한테 귀속되고 엄마는 나한테 귀속돼.’ 귀속의 옳음은 언어가 돼요. 스톱이 된다고요. 그게 한계에요.
그런데 포함은 한계가 안 된다고요. 그걸 ‘공백’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모든 인간의 사건이라든지 모든 물질에는 공백이 있어서 인간이 무한으로 쪼개고 구분 짓는 것을 공백이 멈춰 세워주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뭐냐? 공백이 있으니까 공백을 근거로 해서 ‘저 사람은 철수다’, ‘영희다’ 구분이 되는데, 그걸 구분하지 않고 그걸 큰 프레임, 큰 범주로 집합을 만들 때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두 사람이 있으려면 개인인 ‘철수’, ‘영희’는 사라져야 되잖아요. 사라질 때 무엇을 통과하냐? 공백을 통해서 보내버리는 거예요. “너나 나나 공백이잖아, 마지막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강의 중 부분집합의 예시에서, ‘짜장면 먹은 사람, 남자’라는 원소 옆에 공백을 집어넣으면 숫자가 됩니다. 이제는 물리적인 질점(質點)이 돼요. 이제는 남자, 여자, 짜장면 관계없이 1, 2, 3, 4, 5, 6,… 카운트가 된다고요. 그게 수학이에요.
수학이라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이는 쪽에서 정리하려고 하는 겁니다. 정리하다 보면 공백이 있으니까 차이와 관계없이 공백을 기본으로 깔고, 원소들의 차이에 의해 인간들은 구분을 하고 그 구분 하나에 자기 지시와 언어를 갖다 다 붙여놓는 거예요.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기어이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수학이 스스로 수학을 보존하는 방법이고 철학이 스스로 철학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강의 중에는 과메기로 예를 들었는데요. 그런데 과메기보다 더 적절한 것은 남산타워에 산책로 따라 쭉 매달려있는 자물쇠들이에요. 자물쇠 매달린 것. 그거 넘어가면 안돼요, 절벽이니까.
절벽을 앞두고 ‘사랑의 자물쇠’가 쭉 매달린 것처럼 성경에 있는 용어, 개념을 전부다 벽에 그라피티(graffiti, 공공장소에 하는 낙서)하듯이 벽에다 낙서만 하고 돌아서는 거예요, 인간은. 그게 바로 신학이에요. 골라잡으라는 거죠. 골라잡아서 천국이나 가라, 이런 식이에요. 그게 인간의 존재, 사고, 행위,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걸 근거로 해서 교회라는 것이 장사를 하고 그렇죠.
그리고 ‘Embers of your name’의 가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fade out, 인간이 소멸한다는 거예요. 인간이 소멸한다, 곧 공백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실선이 점선으로 되고 점선이 점이 되는 겁니다. ( ― → … → ․ )
공백으로 가면서 실체가 허상으로 바뀌어가는 과정, 그걸 그 노래가 표현한 거예요. ‘페이드 아웃(fade out)’으로. 그것을 수학의 집합론으로 설명하면 공백이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뚜렷한 선 경계가 소멸되는 거예요. 기억과 더불어서. 그런데 잔불(embers)은 뭐냐? 그런 가운데서도 빛이 타오르는 거예요, 그 가사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만날 때, 하나님은 없거든요. 없는데 ‘없는 것’을 ‘있음’으로 표시한 것이 ‘지팡이’였어요. 그러니까 모세가 신발 벗고 주님 손바닥 위에 얹혀서 이동하는 것처럼 모세 본인에게도 낯설어요, 주어진 모든 앞일이.
모세 본인에게도 낯설어서 모세가 반석을 가리켜야 되는데 막 두 번 쳐서 깨고 하잖아요. 그게 모세의 한계죠. 그러나 주님한테는 한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