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세 가지 세례

아빠와 함께 2025. 12. 13. 09:01

서울강의20251211a 요한일서 5장 8절(세 가지 세례)-이 근호 목사


‘새 인간의 등장=기존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을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합니다.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 이런 자신감 또는 단호함. 그것이 요한일서 5장 12절. 끝은 이렇게 끝나요. “…생명이 없느니라”

앞에 □를 비워놓고, 1장부터 지금껏도 그렇지만 예를 들면 5장 6절부터 따라온 사람에게 ‘이 □를 여러분들이 한번 채워보세요.’ 한다면? 마지막에 ‘( )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해놓고 이 괄호 안에 들어갈 인간은 어떤 인간입니까? 여러분들이 한번 채워보세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앞에 있는 명제, ‘새 인간이십니까? 당신이 새 인간이라면 기존 인간은 인간도 아닌 것 맞죠?’ 확인 작업 들어가는 겁니다. ‘기존 인간은 인간도 아니죠? 그렇지요?’라고 여러 번 확인 작업을 할 수 있는 명제,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 인간이 뭐 어때서? 새 인간 등장함으로써 이것은 인간도 아닌 걸로 이렇게 치부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관계망, 의미의 관계망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들끼리 인간이라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할 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말의 홍수’. 요새는 AI까지 합세해서 엄청난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들을 쏟아내는 기본 태도가 뭐냐? ‘나 인간이야. 너도 인간이야.’ 인간이라는 것은 따질 필요 없이 기본으로 깔렸고 그 인간에게서 끄집어내는 의미가 그물망을 형성하죠. 그물망을 형성하면 거기에 홍수처럼 그 그물망에서 쏟아내는 의미들로 인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현실이 구성됩니다.

형성되는 구체적인 현실은 결국 마지막에는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우리끼리는 다 everybody 인간이라는 것을 자꾸 확인하고 증명하는 식으로 의미가 확대되고 확산되고 생산되는 겁니다. 의미의 생산은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다 같이 서로 존중할 만한 인간이잖아.’라는 것을 기본전제로 하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뭐 양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말씀 앞에 왔느냐? 그러면 네 목숨은 이 앞에서 끝내자.” 왜냐하면 끝내야 말씀과 네 목숨을 바꿔치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 앞에 나와 기웃거리지 말고. 마치 백화점 쇼윈도 앞에서 그냥 옷 구경만 하다 가듯 하지 말고 백화점 안에 들어와서 말씀세계 안에 들어와서 기존의 모든 인간미를 벗겨내라.

인간미. ‘인간미’하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이름이 있어요. 김지미. 이름에 미(美)자가 들어가면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인간미를 벗겨내는 겁니다. 인간미를 벗겨내는 게 뭐냐? 그동안 나를 뒤집어씌워 왔던 말의 홍수, 의미의 관계망들이 얽히고설킨 채 그 안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 인간이잖아.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보자.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어디 있지? 인간이 없는데? 인간이 없어. 새 인간 등장하면 기존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무니다. 다시 말해서 새 인간 등장하면 기존의 인간에게는 뭐가 없는가? 영생이 없어요. 영생이 없는데 인간일까? 이게 사도 요한이 필터링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가지고 ‘인간인데 죽어서 천국가려면 어떻게 합니까?’하는 것을 쫓아내죠. 배격하는 겁니다.

자, 그럼 원인을 알아야 되죠. 왜 우리는 자신을 인간으로 간주하는가? 그 이유가 뭐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썩 훌륭하진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미 있는 인간에 속하잖아. 인간인 것은 부정할 수 없잖아.’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에게 달린 눈(eye)에 있어요.

눈이 어디에 달렸느냐? 우리에게 눈이 있거든요. 눈의 시선의 출발점부터가 우리 자신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눈이 어디 있다고 하는가 하면, 우리 눈은 만들어진 눈이고 보는 눈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눈을 만드신 이가 눈을 만들어놓고 우리에게 집어넣어요. 집어넣고 우리 안에 들어온 눈이 우리의 인간성, 의미의 관계망, 인간도 아닌 게 인간 행세하는 이걸로 인하여 평소에 뭘 보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눈이 뭘 보고 있는가? 첫째 후보는 자연. 자연을 봅니다. 자연을 봐요. 그렇죠? 화가가 그림 그릴 때 뭘 봐요? 자연을 보고 그리죠. 정물화나 풍경화 그릴 때 자연을 봅니다. 자연을 보니까 옛날부터 생긴 것이 과학과 철학이죠. 천문학, 과학, 철학이 발생되고 여기서 종교까지 발생되는 거예요.

내가 내 바깥에 있는 대상을 통해서 내가 본 시선을 쏘아서 그것을 다시 내게로 거두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보는 이 자연 안에는 누가 들어있겠어요? 나 말고 타인도 들어있죠. 남도 들어있는 거예요. 자식도 들어있고 부모도 들어있고 같은 동료도 들어있고 친구도 들어있고. 하여튼 출발은 어디서 옵니까? 내 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죠. 이 문제 같으면 문제도 아니에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눈이 시선을 날리는 이유가 ‘내가 고정점이다’. ‘내가 고정점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남들은 내가 보는 모든 것처럼 나의 고정점을 대체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쪽으로 시선이 작용합니다.

‘나는 신이다’ 이 말이죠. 나에게 박혀 있는 눈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최종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정리되는 것은 ‘나는 내게 있어서 내가 고정점이다.’ 내가 진리다 이 말입니다. 나 말고 다른 진리는 없다. 두 번째, 내가 고정점이다.

끝으로 하나 더 나갈게요. 1.나는 자연을 본다. 보는 취지는 2.내가 과연 고정점이다. 이미 이것은 결론 나 있어요. 결론 나 있는 것을 확인차원에서 보는 거예요. 연세 많은 분들 가는 노인정 가보세요. 노인정 가보면 화투치는 노인들 있잖아요. 가서 뭘 느낍니까? ‘아이고, 나이 들면 죽어야지. 저 꼬라지 봐라.’ 이게 뭡니까? 내가 고정점이에요.

이걸 더 확대해보겠습니다. 내가 고정점이라는 것을 확대하면 마지막에 ‘3.내가 현실이다.’ 여기서 이제 사달 나는 거죠. 내가 곧 현실이다. 내가 있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신뢰성 있게, 확신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한 현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요한일서 5장 12절 마지막에 괄호, ( )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 된 자는 생명이 없다.’ 네모를 네가 채운다면 뭐라고 채울 것인가?” 사도 요한이 묻는다면? 지금 눈을 가진 우리는요, ‘영생이 없다’에 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당연히 현실인데 현실에서 ‘내가 영생이다’하는 것을 우리가 현실적으로 확인 가능합니까? 확인 안 되죠.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확인되고,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는 것도 확인이 되고. 내가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현실은 바로 ‘내가 있는 나다’ 이것인데, ‘나에게 영생이 있다’ 이것이 현실화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현실이 안 되죠. 현실이 안 되는 거예요.

현실이 안 되는 것을 사도 요한은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그거 영생이 없는 거야! 너에게는 영생이 없는 거야.” 어떤 논리로 하든 뭐라 하든 너에게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에요, 영생이 없다. 그럼 영생이 있으려면 뭐가 되어야 돼요? 기존에 눈이 박혀있는 나를 버리고 새 인간이 등장할 때 비로소 영생이 있는 거예요. 새 인간이 있을 때 영생이 있다고요.

그럼 요한일서에서 새 인간은 누구입니까? 아버지께서 친히 준비하신 새 인간은 누구에요? 그것은 아버지의 아들이죠. 아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등장한 것은 예수님만한 인간은 없고 예수님만한 인간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뭐가 없다? 영생은 없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 이런 말이 제일 힘든 건데.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지금 나쁜 짓했다고 탓하는 게 아니고, 원래 없어요! 인간에겐 원래 영생이 없다고요. 천국이 없어요, 원래. ‘아이고,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앞으로 잘하라는 말이 아니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하겠습니다,… 그 박힌 눈가지고 잘해봤자 자기가 현실인데 잘할 게 뭐가 있어요? 아예 없어요. 아예 없다고요.

이것을 가지고 이제 오늘 본문 6절에 가면, 6절부터 해서 8절까지 “물과 피로” 이게 세례라는 거예요, 세례. 세례는 필터링하는 거예요. 필터에요, 필터. 탁한 물 나올 때 집에서 필터링해서 먹는 물로 만들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반해서 왔던 그 모든 사건을 ‘세례’라는 이름의 필터링을 사용해서 영생의 나라에 갈 자와 가지 못할 자를 구분하는 작업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세례가 필터링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그러면 구약부터 이 일을 어떻게 했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금지합니다. 우리 인간이 금지의 대상이 되었어요. 창세기 이후에. 금지의 대상이라는 것은 뭘 하나 뭘 안하나 뭘 해도 금지당한다는 거예요. 이걸 안했다 해서 금지당하고 했다고 해서 금지당해요.

인간 쪽에서는 이미 대책이 없습니다. 이 대책 없는 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죠, 요한일서에서. 대책이 없는 것. 인간 쪽에서 내가 영생을 얻을 대책은 주께서 필터링, 다른 말로 하면 단절, 끊어놨어요. 대책이 없습니다.

물과 피와 성령이 하나라 되어 있죠. 6-8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어떤 분이 저한테 아주 진지하게 물었어요. 그 질문을 여러분들께 전할 테니 여러분들이 답변해보세요. 질문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십니까?’ 바싹 입술 마르죠? 하나님이 한 분이십니까? 답변해보세요. 질문을 아예 적을게요. 질문 적고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답변은 의외로 간단해요. 제 딸이 저한테 물었어요. 수요예배 마치고. 한 분이냐고. ‘한 분이십니까?’ 존댓말 안 해요. “아빠, 하나님은 한 분이야?”

질문: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까?
답변: 인간 보기에는 세 분이고, 하나님 보기에는 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한테는 세 분이 되는 거예요. 인간한테는 세 분인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여긴다는 것은 기존에 있는 인간들의 의미망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증거는 세 분의 하나님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여기서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올 수 있어요. ‘한 분으로는 왜 증거가 안 되느냐? 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증거해야 되는가?’

눈이 세 개거든요. 인간 눈은 하나지만 하나님 눈은 세 개잖아요. 하나님이 한 분이니까 증거하는 것도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인간이 자기 눈을 고정점으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눈이 하나잖아요. 시선이 하나잖아요. 나에게서 나오니까. 남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남이 뭘 하든 나는 오직 나에게서 나와야 의미가 있어요. ‘아휴, 믿음 좋습니다. 주님 살아계십니다.’ 백날 해도 내가 그걸 믿어야 되고 내가 확신해야 돼요. 남 하는 거 따라가는 것은 본인 논리로도 안 맞죠. ‘아, 그 영화 재밌다고.’ 내가 재밌어야 돼요. ‘그 음식 진짜 맛있다고.’ 내가 맛있어야 돼요.

고정점은 나에요. 나는 항상 하나를 원한다고요. 하나. 하나를 원하는데 하나님 뜻은 이거예요. “하나님, 저 하나의 증거를 원합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하나를 원해? 그럼 새 인간 등장할게. 새 인간 등장하면 새 인간 예수님은 세 개의 증거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게 물과 피와 성령이에요.

요한복음 1장 잠시 보겠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을 전제로 해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6절의 말씀을 하고 있어요. 요한일서를 쓴 사람이 사도 요한이에요. 요한복음 1장 31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물 나오죠. 물로 뭘 줍니까? 세례 주죠.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 증거하는 것이 뭐로 나타났습니까? 물로 나타났죠. 물로.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에서도, 그 분은 물과 피로 임하신 자라. 물 들어가요.

그럴 때 요한복음 1장 32절,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무엇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죠. 아직 피는 안 나왔어요. 피는 최종적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 하기 때문에.

여기 처음에 물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다.’ 이게 상식이잖아요. 왜냐하면 그것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자기에게 각자 자기 눈이 있으니까 시선이 있으니까 자기의 고정점이 있어요. “나는 봤다. 너 봤어?” “나도 봤어.” “뭘 봤는데?” “예수님이 세례 받은 거 봤어.” 그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내 고정점, 내 시선, 나에게 눈이 박혀있고 내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다는 그걸 왜 포기 못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포기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어요. 보기 때문에 영생이 없는 거예요. 보는 걸 믿기 때문에 영생이 없는 겁니다. 내가 본다는 것은, 영생은 내가 보는 식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을 감안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세례 받을 때 내가 보는 그것, 세례요한도 포함이에요, 내가 보는 것과 거기에 동반해서 누가 등장했습니까? 성령 등장했죠. 성령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가? 인간들한테는 그게 잠시 보였더라도 소유화될 수 없고 포착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바람같이 되어서 사람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대로 협조를 안 해주기 때문이에요. 성령이 협조를 안 해준다고요.

예수님이 물로 세례 받았다. 시~작! 이제 주의 일 시작이거든요. 주의 일 시~작할 때 뭘 시작? 뭘 시작한다고요? 인간의 구원? 아니죠.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일을 예수님이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과 더불어서 거기에 붙어있는, 사람 눈에 띌 수 있는, 사람에게 박혀있는 눈에 목격될 수 있는 게 뭐냐? 물이었고 세례요한이 본 게 뭡니까? 성령을 봤다는 거예요, 성령. 요한복음은 그걸 기록했고요. 성령이 오심을 봤죠. 성령 오심을 봤단 말이죠, 세례요한이.

그럼 물 봤고 성령 오심을 봤죠. 여기서 나오는 질문은, 성령이 왜 오셔야 됩니까? ‘아, 저 분 메시아다. 믿으면 되는데.’ 성령이 끼어듦으로써 ‘저 분이 메시아다. 믿어야지.’라는 그것이 원활하게 되지 않도록 다른 조치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다른 조치가. 왜냐하면 물과 피와 성령이 하나가 되면서 누가 빠져요? 인간의 시선, 인간의 확신 이런 것은 다 빠지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이 빠지느냐 하면 세례 자체가… ‘세례란 죽음 현상’입니다. 물에 빠졌다는 것은 이 세상과 작별하는 거죠. 옛 인간이 박혀있는 눈으로 새 인간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새 인간을 받아들이려면 새 인간에게 나오는 증거에 의해서 옛 인간이 작살나야 되고 죽어야 돼요.

이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 맞잖아요. 모든 인간은 죽으면 사라지니까. ‘사라진다’가 결국 메인이라면 ‘나는 존재한다’는 이것은 보조가 돼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게 보조가 된다고요. 지금 사람들은 사라지고 난 뒤에 그다음 뭐냐를 모르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잖아요, 인간은. 맞잖아요. 인간의 시선으로도 이게 맞는 이야기죠.

그런데 인간의 시선은 어디서 끝납니까? ‘사라진다’로 끝나죠. 사라지고 난 뒤에 뭐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시선은 모릅니다. 몰라요. 이것을 누가 이용하느냐?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는데 이런 인간의 한계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사용하면서 들어가는 게 뭐냐? “너희들은 알아, 몰라?” “사라지면 모르겠습니다.” “성령은 알지롱!” 성령이 거기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모르는 것을 성령이 오면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모르지만, 나는 모르지만 성령 오시면 된다고 할 때, 나는 여기 있고 ‘나+성령=온전한 나’ 이런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건 안돼요. 왜냐하면 중간에 ‘피’가 들어가기 때문에. 중간에 피가 들어가기 때문에요.

쉽게 말해서 내가 박혀있는 눈으로 ‘하나님 저 분 맞다. 확인해서 나 저 분 믿어야지.’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갈 수 있는 영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관계망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까. 손님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사람들 다 사라질 사람들이에요.

그럼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이 말이죠. “당신은 사라지면 어디 갑니까?” “나 천국 간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 다음을 물으면요? “그걸 어떻게 알지? 지금 이 땅에 있지만 나이 많아서 사라지게 되면 난 천국 간다는 그걸 어떻게 알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야기한다 해도 다 구라에요. 왜냐하면 본인은 안 사라지고 있으니까. 본인에게 박혀있는 이 눈은 안 사라졌으니까.

인간에게 눈이 있기에 본다 했습니다. 첫 번째 뭘 본다 했습니까? 자연. 두 번째는 뭘 봐요? 두 번째, 내가 고정점이에요. 왜냐하면 ‘어? 보이네. 오네. 가네.’ 모든 동사, 명사 규정을 누가 해요? 보고 있는 내가 규정한다고요. 내가 규정해요. “김지미가 85세로 사라졌다.” “너 어떻게 아는데?” “내가 뉴스 봤으니까.” “누가 봤는데?” “내가!” 내가 봤다니까요. 그럼 김지미 죽고 난 뒤에 이 현실은 어떤 현실? 김지미가 없는 현실. 왜? 내가 고정점이니까 판정을 내가 내리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판정내린 내가 만약에 사라진다면, 현실의 전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현실을 판단하는 내가 사라지면 현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해요? 모르죠. 모른다면 성경에서 ‘영생이 이런 경우는 있다. 이런 경우는 없다.’는 그 말씀 자체가 옳다, 그르다를 판정할 수 있는 본인은 어디 계십니까? 없죠. 성경말씀을 판정할 수 있는 내가 없다니까요. 판정해서 옳으면 믿으면 되는데 문제는 내가 없어진다고요. 없어지는 내가 무슨 판정을 내립니까?

그래서 지금 사도 요한은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고 그 새로운 인간이 영생 갈 사람을 영생 가도록 만드는 증거 세 가지를 제시했다 이 말입니다. 아이고, 쉬워라. 이제 쉽죠? 성령 받은 물세례는요, 예수님이 물세례 받을 때만 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 안 왔어요. 성령이 비둘기같이 와서 비둘기 한 이천오백 마리 와가지고 사람들한테 가게 되면 세례요한이 헷갈려요. 도대체 누가 메시아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누구야? 양이 너무 많아. 이천오백 마리나 되니까 모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로 왔다고요. 하나, 하나, 하나 더하기하면 3이 아니고 하나+하나+하나=하나가 되죠. 셋은 하나다. 인간 보기에는 셋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다. 그게 흔히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에요. 증거가 그렇게 돼요. 증거가.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삼위일체라 하니까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인간까지 보태니까 어떤 사람은 사위일체라 해요, 삼위일체도 아니고. 증거입니다. 활동, 기능성으로 셋이 돼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결국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영생하고는 관계없다. 관계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자연 상태는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새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 인간이 아니에요. 새 인간이 아니고 옛 인간 같으면 ‘영생은 없다’의 원칙에 좀 따라주세요. 우리 인간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5장 12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지금 제 말이 맞는지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하! 생명이 있다는 조건이 뭡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생명의 조건이 아니죠. 누가 있을 때 생명입니까? 아들이 있다. 왜 아들이 등장합니까? 아버지의 아들이죠. 아들이 왜 등장합니까?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의하면 아버지의 자기 증거 때문에 아들이 있는 거예요.

그럼 아들이 있는 사람은 ‘나는 여기 있다’가 아니라, 주의 증거로서 주님의 증거용으로서 성령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새 인간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아들이 작용하고 있는 증거용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마치 비둘기 같이. 사실은 그때 비둘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 “비둘기같이” 내려왔거든요. 비둘기같이.

이것을 이렇게 표현해보겠습니다. ‘증거의 확대’ 또는 ‘증거의 연속적인 생산’. ‘아들이 있는 자만 영생이 있다’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이 자기 백성에게 들어오게 되면 자기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또는 하나님 아버지의 증인,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증인이 되면서 새 인간의 등장으로서 한결같이 증거하는 내용은 뭐냐? ‘기존 인간은 인간도 아닙니다.’ 기존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도 아니니까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 말의 홍수에 담긴 의미의 관계망… 저는 관계망보다 그물망이 더 좋아요. 왜 그물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느냐 하면 이게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거든요. 기존 인간들이 내뱉은 의미망이 우리를 완전히 넝마주의로 만드는 거예요. 거미줄 있는 오래된 창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머리에 온통 거미줄 뒤집어쓰죠. 훠이, 하면서 털어내잖아요. 털어내죠.

여러분도 직장생활하고 집에 오면 훠이 훠이,하고 털어내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루 동안 직장생활하면서 들었던 모든 의미는요, 전부다 인간들이 주고받는 내용들이에요. 그것이 우리에게 피곤을 유발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니까요. 인간도 아닌 게 내뱉은 말에 그렇게 피곤해할 필요 없어요.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로봇을 샀어요. 어떤 유튜버가 인공지능 로봇을 샀는데, 실실 사람을 약 올리는 기능이 작동하는 그런 로봇을 샀어요. 처음에는 막 참아줬어요. 참아주다가 도저히 안돼서 “너 맞을래?” 하니까 “한번 때려봐. 때려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로봇이. 사람이 아니라 기계잖아요. 기계를 샀는데 왜 그렇게 진지해? 기곈데. 기계에 열불내고 왜 그래요? 아무리 인공지능이지만. 그렇게 인공지능한테 화내고 할 필요가 없다고요. 성질나서 가슴팍을 좀 패버리니까 수리비는 몇천만 원 나왔는데 로봇 장사하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손해 봤다고 15억 물어내라고 했어요.

인간도 아닌 기계 잔소리 들었다고 해서 그걸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까? 이걸 이렇게 명제로 세워봅시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의미는 무시하는 게 마땅하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은, 영생이 담기지 않은 말은 무시해버리자.’ 참 어렵긴 어렵다, 정말. 이걸 우리 본문대로 하겠습니다. 물과 피와 성령을 경유하지 않는, 주의 증거니까, 하나님의 증거니까,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는 그런 의미가 실린 것은 의미도 아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인간들은 눈이 자기한테 있으니까 자기가 고정점이죠. 고정점이니까 내가 현실 되는 거예요, 내가 현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연을 본다→ 내가 고정점이다→ 나에게 현실이다’ 이것을 반대로 뒤에서부터 공격하고 들어옵니다. 현실은 따로 있다. 이것이 뭐냐? 물과 피와 성령. 현실은 따로 있다. 현실이 따로 있으면서 내가 현실이라는 이 현실, 이것은 굴레 씌인 거예요. 마귀한테 속아서 굴레 씌인 겁니다.

제가 언젠가 이야기한 것 같은데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언급해보겠습니다. 1972년에 괌이라는 섬에 요코이(Shoichi Yokoi)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2차 대전 끝난 뒤 28년 동안 괌에서 혼자 미국하고 싸운다고 버티고 있었어요. 28년 동안 괌에서. 누가 찾아온 사람도 없었던 모양이라. 그 사람이 결국 28년 뒤인 1972년에 발견되어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람이 제일 먼저 한 말이 “부끄럽게도 제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살아 돌아온 게 참 부끄럽습니다. 내가 일본 조국을 위해 죽어야 되는데 살아서 미안합니다.”

자, 이 사람의 발언, 언어의 관계망은 어느 시점입니까? 1972년도입니까, 1945년도입니까? 1945년에 그대로 머물러있는 거예요. 아… 환경이라는 현실이 인간을 얼마나 조작하는지 아시겠죠? 지금 우리 자신을 어떤 현실이 조작하고 있습니까? 조작당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이미 전쟁 끝났어요, ‘다 이루었다’해서. 성령이 왔다는 말이 뭡니까? 너를 위한 전쟁 그만해! 그렇게 안 해도 돼. 너는 옛사람인데 너라는 옛사람을 위해서 전쟁하는 그런 부질없는 짓은 이제 그만 해. 이제 새 사람의 영, 성령이죠, 예수님이 새 사람 되어서…. 아까 했던 것 다시 해보세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뭐가 있고? “생명이 있고”. 그것만 하면 안 되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뭐가 없다? “영생(생명)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세상 2025년도는 영생이 없어도 사람 구실한다고, 다 사람이라고 우기니까… 영생이 없어도 사람이라고 우기는 그 현실 속에서 우리는 돈벌이하고 있다 이 말이죠. 거기서 상처받고 힘들고, 그들 마음 맞춘다고 아부하고, 집에 오면 뻗어버리고. 힘들어가지고, 스트레스 받아서. 온 진상 손님 다 찾아오고. 그리고 돌아오면서 완전히 ‘존재의 이유’죠.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무슨 현실을 전제로 그런 생각을 해요? 어떤 현실? 1945년도입니까, 1972년도에요?

또 한 사람 더 있어요. 1975년도, 그러니까 3년 후에 오노다 히로오 이 사람은 필리핀 루방섬에 있다가 투항한 사람인데 이렇게 말했어요. “그동안 상관의 직접 명령을 듣지 못해서 나는 안 믿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오노다 이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의 상관이 누구십니까?” 상관(上官)? 1945년도에 상관은 자기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상관이에요.

지금 2025년도에 목숨줄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누구 명령을 따릅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영적 전쟁을 했던 마귀겠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마귀에 속한 인간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이라면 여러분 어떤 조치를 내리겠습니까? 현재 사람들은 다 마귀에 속했다. 그러나 주께서 자신을 증거하고 그 중에 건질 자를 건진다. 그러면 내릴 조치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이 하는 모든 일, 모든 일을 금지시킨다.’ 잘해도 안받아주고 못해도 안받아주고. 의미 없다는 거예요. 기존의 의미 틀, 관계망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들이 가만있지 않고 뭐라고 하겠어요? “그럼 의미 있는 게 뭡니까?” 이렇게 나오겠죠. 12절에 나오잖아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고. 끝. 게임 끝났어요.

뭘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참,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데요. 예수님께 성령이 왔잖아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이거에요. 예수님이 물세례 받았다. 받았죠. 예수님이 물세례 받았습니다. 그럼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비교해보세요. 물은 물질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물질이잖아요. 주께서는 물질부터 시작했어요. 물이라는 물질. “물세례 들어가라.” “들어가지 뭐.” 세례요한 당시에 사람들이 물속에 들어갔잖아요.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보여줄 선지자니까 물속에 들어갔단 말이죠. 성령은 물질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이라는 물질을 뒤집어쓰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물세례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작점이 물세례였어요. 물세례부터 받았어요. 물로 시작해서 피까지 가는데 그 모든 과정에 성령님께서 동행했죠.

그럼 예수님께서 물로 해서 십자가 가는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다. 피도 물질이죠. 보이는 물, 보이는 피.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뭐가 보이지 않죠? 성령. 보이지 않는 환경, 보이지 않는 분이 주도해서 예수님을 물과 피로 인도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주도성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물세례 받고 십자가 질 때 성령을 통해서 했어요. 예수님이 그냥 십자가 진 게 아니에요.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예수님의 육신을 가지고 움직여나갔어요. 부활할 때도 성령으로 부활했고.

그런데 인간에게는 뭐가 빠졌어요? 보이지 않는 게 빠져버리니까 보이는 것은 인간에게 달린 눈으로 보는 물과 피. “예수님 죽었대.” “그래? 아이고, 안됐다. 난 고기 잡으러 가자.” 끝나버리죠. 성령이 안 오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뭐냐? 여전히 환경이 1945년에 머물러 있는 일본의 패잔병하고 똑같은 현실감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주께서 어떻게 영생을 주는가 하는 이야기는 제가 안 했습니다. 그것은 두 번째 시간에 할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할 건데 지금 제가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뭐냐 하면 왜 ‘물세례 받아라’ 이걸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안 받아주느냐 하는 문제에요. 물세례 받으면 이것은 왜 안 받아주는가? 우리가 나를 안 죽이고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성령 없이 내 결심과 내 각오와 내 결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물세례에요.

예를 들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피 흘렸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필리핀에서 하고 있지만, 만약에 ‘영생 준다. 그런데 조건이 뭐냐? 십자가 지라.’ 한다면 십자가 지고 영생 얻을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많~이 나옵니다. 오픈 런할 거예요. 아니, 그거 좀 아프지 뭐. 아프지만 뭘 얻어요? 영생을 얻잖아요. 아프지만 좀 참으면 되지. 그 정도야 좀 아프고 나중에 약 바르고 링거 하나 맞으면 원기회복 되잖아요. 십자가 지고 영생하고 맞바꿨다. 하지 뭐. 그걸 못할 게 뭐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 지는 것을 누구만 인정하고 그 외에는 거부했습니까? 예수님에게만 십자가 지심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거부했어요. 강도가 십자가 져서 구원받은 게 아니거든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철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옛 사람을 옛 사람으로 규정해서 새 사람과 떼어놓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만약에 내가 해버리면 나는 나의 증인됩니다. ‘내가 이거 이거 했다’가 돼요. 이걸 철저하게 강제로 떼놓는 작업이 필요한 겁니다.

이거 하나 말씀드리고 첫째 시간 마칩시다. 요한일서 또는 이서, 삼서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통용하는 그 단어, 어떤 단어의 조합으로 사도 요한은 편지를 쓰느냐? 이렇습니다. ‘생명, 사랑, 피, 성령 또는 영, 죄, 하나님, 믿음, 아들, 진리’ 이 단어가지고 다 짜깁기 해놔버렸어요. 이 단어가지고.

왜 그럽니까? 이 단어의 특징이 뭐에요? 인간 쪽에서 뭘 실시할 수 있는 것은 전부다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증거는 예수님 증거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다른 증거는 섞이면 안돼요. 예수님이 했던 증거, 물과 피와 성령으로 증거를 확산시키고 확대하는 것, 그것이 지금 영생을 확산시키는 주께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거라는 거예요.

신기하죠? 우리보고 뭐 독촉을 할 수도 있는데 생명, 사랑, 피 도대체 어느 것 하나 기존에 눈 박힌 우리의 현실, 나의 고정점으로 다가갈 수 없어요. 예를 들면요, 사랑? 어? 사랑해봐야지. 사랑이 됩니까, 안 됩니까? 사랑하게 되면 누가 이걸 튕겨내느냐? ‘네가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이미 사랑이 너에게 있다’라는 것을 성령께서 너에게 알게 하시리라.

이 말은 어느 정도냐 하면, 수능 만점자 5명이 수능을 출제한다고 합시다. 그럼 수능 만점자 5명이니까 얘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하겠어요? 한 개 틀리는 거 안돼요. 삼성 그룹의 아들은 안 돼. 한 개 틀려서 안 돼. 만점자 5명이 문제를 내게 되면 그들만의 세계가 되겠죠. 그런데 만약 국어 5번 문제를 6번째 인간이 출제하자 하면 누가 반대해요? 누가 반대합니까? 이 5명이 반대해요. 왜? 만점자가 5명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만약 집사님이 영생에 합격된 자라면 나중에 사도 요한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요한일서가 사랑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래야 네가 합격될 수 있기 때문에. 성령 받은 자만 합격되고 나머지는 반드시 탈락해야 돼요. 자기의 잘난 옛 사람이 자기를 증거하는 것은 일체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면 말할수록 신비롭기 때문에 할 수없이 10분 간 쉬고 가실게요.

 

 

 

서울강의20251211b 요한일서 5장 8절(세 가지 세례)-이 근호 목사


강의를 하는 제 입장에서도 요한일서에 대해서 아까 얘기했듯이 ‘사랑, 생명, 피’ 어느 것 하나 접근할라 치면 “너 성령 받았어? 성령의 허락 받았어? 없으면 통과 못해.” 튕겨져 나오는 겁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둘째 시간 초반부터 할 수 없어요. 요한일서가 어렵기 때문에 어렵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받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왜 세례 받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를 받느냐? 세례 받는 이유가 뭐냐?

‘새로운 현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의 관계망’이죠. 새로운 의미의 관계망이 요한일서 2장 25절에 보면 “약속”이라 해요. 약속.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영원한 생명이니라” 약속을 우리가 흔히 아는 구약적 용어로 하면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보통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 같으면 구약에 있는 개념들이 거기에 많이 담겨져 있어요. 녹아져 있다고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일체 그게 없어요. 그게 있질 않아요.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세례 받음으로서 세례에서 누가 배제되는가? 인간이 배제돼요. 같이 물세례 받아도 비둘기같이 오신 성령은 오직 누구만 지목합니까? 예수님께만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께만.

그리고 마치 우리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게 간편하지 않아?” 네가 애쓰고 노력하고 그거 기껏 해봐야 너 잘났다 뿐이 안 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께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첫째 시간부터 이야기했지만 요한일서 내용대로 하면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요일 1:8-10) 우리를 이미 죄 있는 자로 출발시키는 거예요. 죄 있는 자로.

죄 있는 자이기 때문에 죄 있는 자가 아무리 노력을 하든 게으름을 부리든 열심을 부리든 간에 주께는 금지대상이에요. 금지대상. 금지대상을 노리는 그 배후에는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주님 보시기에 금지대상이에요. 요한일서 3장에 그게 나와 있죠.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8절)

요한일서에서, 죄 없다 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분이 안 되려면 누가 죄인 되어야 돼요? 우리는 애초부터 죄 있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은 거짓말 안하는 분이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누구 편듭니까? 시선이 누구 쪽이에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시선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시선에 대해서 계속 대립시키고 마주치게 만들고 갈등을 일으켜서 이렇게 하면 영생은 없고 이렇게 하면 영생은 있다고 계속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싫으면 말고, 뭐 이런 식이죠.

요한일서에서 몇 군데 나와요. 구약 전체를 요약한 게 아까 ‘약속’이라 했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화목제물’입니다. 화목제물이 요한일서 2장 2절에도 나오고 요한일서 4장 10절에도 나와요. 2장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라고 되어 있고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되어 있죠.

자, 그럼 여러분한테 중요한 것 물어봅시다. 요한일서를 보고 기뻐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동원되었다’라는 이야기에요? 어느 쪽이에요? ‘내가 주인공으로서 내가 기쁘다’가 아니라 ‘이것이 사랑이다’. 어느 쪽이에요? ‘이것이 사랑이다’ 쪽으로 가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게 챙기고 도망칠 수 있는 여지를 우리에게 주질 않아요. ‘영생 얻었으니까 잽싸게 낚아채서, 난 영생 얻었다~하고 이제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이게 요한일서에서는 도대체 허용이 안돼요. 어디를 내빼? 도저히 내뺄 수가 없습니다.

구약 언급을 다시 한번 시작하면서 정리해봅시다. 세례 받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현실을 소개합니다.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의미의 관계망입니다. 그런데 이 중심은 뭐냐? 하나님이 세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았던 그 세례의 세계 속에 인간의 모든 활동은 여기서 배제됩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시는 거예요. 여럿이 달려드는 화목 제물은 없습니다. 화목 제물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모든 것도.

자, 그러면 아까 나왔던 개념 중에 ‘피’. 이 피는 내 피입니까? 아니죠. 내 피가 아니고 누구 피입니까? 예수님의 피죠. 내가 만약에 주를 위해서 죽겠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 하면 그 피는 예수님의 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죠. 들어갈 수가 없어요. 철저하게 아들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아들이 사랑이고.

아까 했던 것 다시 보여드릴까요? 이건 여러분들도 딱 보면 아는 거예요.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게 뭐냐? 생명. 그다음에 피,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가끔 등장하는 것이 적그리스도. 그리고 사랑. 죄도 등장하지만 주로 등장하는 것이 ‘생명’과 ‘피’, 그리고 ‘아들’ 예수님, ‘사랑’. 하나, 둘, 셋, 넷 이 네 개. 나머지는 보조로 있는 것이니까 이 네 개로 설명이 다 된다 이 말입니다.

새로운 의미의 그물망, 관계망이 네 가지의 주요 개념으로 다 설명된다면 오늘날 우리도 평소에 이 네 가지 개념으로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어야 되죠. 하나님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 세례가 확장되죠. 확장되면 이것은 새로운 현실이 되고 새로운 현실은 우리에게 덮치는 새로운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 환경은 아까 이야기한 생명, 피, 아들, 사랑으로 설명이 다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의 단어, 사랑, 피, 아들, 생명에 인간으로서 어떤 인간도 접근 불가에요. 인간의 힘으로 접근하면 튕겨져 나오죠. 거부당하죠. 누가 거부합니까? 이걸 둘러싸고 있는 게 누구죠? 성령. 성령께서 감시망을 작동시켜서 “네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네가 생명을 노리고 들어가면 안 되고! 네가 피 흘렸다 하면 안 되고!” 이런 거예요. “네가 적그리스도의 개념을 알려고 한다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거쳐야 이런 단어들의 진실이 드러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이걸 우리가 인정한다 치고요. 4장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예요? 이미 사랑 안에 들어온 사람과 사랑 바깥에 있으면서 사랑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거예요.

“무서워? 그냥 무서워해! 나중에 지옥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 그거는. 그건 네 몫이야!” 강제로 내쫓는 그런 기능도 말씀이 하고 있는 거예요. 베짱 장사라니까요. 금지의 확대. 금지의 확대는 인간을 삭제하죠.

요한일서를 대한다면 성도의 고백은 이러해야 합니다. 이렇게 외쳐야 됩니다. 문장으로 만들어 볼게요. ‘나에게서 인간미를 빼세요.’ 나에게서 인간미를 빼라는 말이 왜 성립되느냐 하면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입니다.’를 뿜어내고 있거든요. 냄새피우면서. ‘나 봐. 나 이성적이잖아. 나 정신 차리고 살잖아, 봐. 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 제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고.’ 이게 뭐가 돼요? 인간미. 이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인간미입니다.

주님께서 이 인간미를 배제해야 되는데 우리는 왜 인간미에 대해 고집하느냐? 인간미가 타인에 대한 공격용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욕하거나 험담, 공격을 하는 이유는 자기의 수치를 그런 식으로 감추기 위해서에요. 비행청소년들이 이야기하면서 괜히 의도적으로 욕을 섞어 넣죠. 의도적으로. 그냥 점잖게 이야기할 것을 과도하게 욕을 섞죠. 그건 자신의 수치가 남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방파제, 방어막을 치는 방법이에요.

그럼 여기에 반대해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건 제가 지어낸 건데,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욕조 배출구=죽음 안내판’. 이게 죽는 겁니다,하고 안내하는 기능을 성도가 할 수 있어요. ‘이리 오세요.’ 욕조 배출구의 특징이 뭐냐 하면 혼자 죽는 게 아니고 물살이 급해서 다함께 몰살하죠.

모든 세상 현실은 뭐냐? 다 같이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어요. 물살이 아주 세요. 그들의 의미의 연결망 속에서 의미를 주고받으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그냥. 이렇게 살면 사람 제대로 사는 것처럼 느끼면서 살아가니까 그게 욕조의 배출구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성도는 ‘바로 그게 지옥으로 가고 있는 쪽입니다. 이쪽이 죽는 쪽입니다.’하고 안내해주는 거죠. 그 일을 주님께서 먼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먼저 했어요. ‘이쪽으로 가는 길이 저주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제가 몇 가지 성경구절을 들고자 합니다. 그전에 먼저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성경구절을 찾아봅시다. 성도는 이게 굉장히 즐거운 거예요. 막 욕하고 다녀도, ‘그랬어요?’ 그게 바로 지옥으로 통하는 죽음의 출입구죠. ‘아, 저렇게 자기 수치를 가리는구나. 자기 허점을 저런 식으로 가리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버리면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알게 되면 ‘기존의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는 것이 확실하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지옥의 출구를 소개하는 성도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두 가지 질문을 상대에게 던져보면 되죠. 직접 물을 수도 있고, 속에서 우회하는 표현으로 물을 수 있는데 두 가지 질문입니다. 1.당신은 뭐가 부럽습니까? 첫 번째 질문입니다. 말로 해도 되고, 안 그러면 넌지시 물어봐도 되고. 당신 뭐가 부럽냐 이 말이죠.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굉장히 유사하지만 약간의 뉘앙스가 달라요. 2.도대체 당신은 뭐가 되고 싶습니까? 비슷하죠? 비슷한데 좀 달라요.

당신은 뭐가 부럽습니까? 부럽다는 것은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고 부러워죽는 거예요. 될라 하니까 노력도 많이 들어가고 귀찮으니까 ‘아휴, 부러워 죽겠다. 부러워 죽겠다.’를 하면서도 뭔가 실행에는 옮기지 않아요. ‘그래도 그들 나름대로 가정에 가면 다 어려운 점이 있어.’ 이런 식으로 막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는데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예요.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가? ‘네가 하는 일이 어떤 포인트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절차이십니까? 지금 하는 노력이 쌓이면 당신은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에요.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러한 고백을 하고 이러한 소망을 갖는 사람이 현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뜯겨져 나가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쓸데없는 짓거리가 아예 통째로 뜯겨져 나가요. 뜯겨져 나간 그것이 예수님이 평소에 했던 말씀의 내용이에요. 이제부터 그걸 찾아보는 거예요.

“당신은 뭐가 부럽습니까?” “나는 이게 부러워요.” “나는 그 근처도 못가지만, 부러운 쪽에 가지도 못하지만 이 비슷하게 되는 게 내 마지막 소원입니다. 소망입니다.” 내 자식 잘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거죠. 남의 자식 잘 돼서 그렇게 부러운데 내 자식도 잘 되면 좋겠다, 이런 거. 꿈은 이루어집니다. 꿈✩이루어진다, 그런 거.

주께서는, 주의 세례로 말미암아 세례의 의미가 확장되죠. 확장되면서 파장을 드러내죠. 예수님이 이렇게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독으로 있는 줄 알지만 예수님 주변으로 뭐가 있어요? ‘세례 받음’이 있죠. 세례 받음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새로운 현실, 새로운 환경이죠.

여러분 잘 아는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예수님 여기 있습니다. 제자들 다 떠났어요. 누가 봐도 예수님 혼자 있어요. 그런데 여기 누가 왔습니까? 어떤 여인이 물 길러 왔죠. 물 길러 왔을 때 여인은 물 긷고 집에 가는 것을 지금 소망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시한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새로운 환경이었습니다. “너 물 떠가도 또 목마를 건데? 내가 주는 물은 목마르지 않다.”

하여튼 예수님은 말씀만 하면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아예 기대나 바람 자체도 된 적이 없는 엉뚱하고 생뚱맞은 이야기. 평소에 노릴 만한 내용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금지에요. 뭘 해도 지금 주께서 한 환경에 섞일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명한다. 뭘 해도 금지할 거다. 금지할 것을 네가 계속 하고 있다.”

지금 물 뜨러 왔다. 물 뜨러 왔는데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준대요. 그러니까 그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물 이야기와 더불어서 자기가 뜯겨져나가죠. 뭐가 뜯겨져나갑니까? 남자 다섯 명 사귀었고 여섯 번째 만나고 있다는 것이 뜯겨져나가요. 뜯겨져나가니까 여자가 주섬주섬… 자기 수치가 드러났잖아요.

자기 수치가 드러나니까 얼른 동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조상 때부터 얻었던 종교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수치를 덮습니다. “당신 선지자군요.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그리심 산, 예루살렘 어느 쪽이 맞습니까?” 이러니까 “성령으로 예배하는 날이 올 것이다. 성령으로.”

뜯어내고 덮고. 내가 내 식대로 수치와 더러움을 덮으려하는 그걸 강제조치로 뜯어내고 성령으로 덮어버리고. 바로 요한복음 4장에서 그렇게 했거든요. 그럼 그 물동이 이고 온 여자가 물동이 버려두고 ‘야, 성령 받았다!’고 이야기합니까, 안 그러면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죠. 메시아를 만났다(29절).

왜냐하면 아직도 예수님은 피 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몰고 오는 물의 환경을 확산, 확대시키고 십자가까지는 가지를 않았어요. 십자가까지는 가지를 않으니까 그 여인은 ‘~를 만났다’가 되는 거예요. 누구를 만났다. ‘~를 만났다’가 되면 어떤 단점이 있느냐 하면 자기가 굳이 제거될 필요가 없어요. 그 분도 몸이고 나도 몸이니까 좋은 관계 이루면 되잖아요.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 혼인 잔치.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보고 포도주 떨어졌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전에 설교시간에 언급을 했는데요, 물을 뜨게 하고 물이 포도주 되게 했죠.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포도주를 제공하되 전혀 관련 없는, 인간의 의미망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물을 동원하고 떠먹어보니까 포도주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물을 가져온 사람은 하인들이었고 포도주 마신 사람은 사람이다. 둘 다 사람인데 여기에 누가 끼어듭니까? 예수님이 끼어든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 되게 했다’ 맞아요, 틀려요? 안 맞죠. 예수님이 몰고 온 환경이 물을 포도주 되게 했어요.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에요. 장차 오실 피, 예수님의 피, 마지막 최종 표적을 위해서 그 당시의 상황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이렇게 주님께서는 예수님 자기 환경의 때를 미리 앞당겨서 그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이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보게 되면 성전에서 비둘기 내쫓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제자들이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 고백이 희한해요. 부활하고 난 뒤에 ‘이 성전이 사흘 만에 지어진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한 육체를 가리킴이었다.’ 이렇게 돼요(요 3:22).

무슨 그런 해석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그런 해석이 나옵니까?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부활하시고 난 뒤에 보니까 예수님이 말한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육체가 됨이라. 그러니까 46년 동안 지었던 이것은 허물어지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예수님 몸이 곧 성전이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죠.

성령 받지 않고 그 해석을 따라올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그 해석을 따라옵니까, 안 따라옵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해석을 따라올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의 성전이 함께 있기 때문에. 주의 성전이 함께 있기 때문에 뭘 알아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 자체가 주의 증인으로서 쓰여지는 겁니다. 환경 자체.

그렇게 되려면 이것(기존 환경과 그에 속한 나)이 뜯겨져 나가죠. 뜯겨져 나가면 ‘내가 세례 받았다’가 아니라 주님이 세례 받음으로서 오는 환경이 내 쪽에서 뭘 하는 것을 주께서는 금지시키고요. 금지시킨다는 것은 뭘 하지마라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의미 없다 이 말입니다.

또 하나 예를 계속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이것은 아까 안양강의에서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39절, 긴데 제가 짧게 축약하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제 여러분들이 알았으니까 여러분들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고 뭘 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죠. 환경이, 말씀환경이 우리를 이렇게 조성해내는 겁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 힘으로서는 이 말씀대로 못 살아요. 역시 벌벌 떨어요. 그런데 벌벌 떪을 통해서… 추울 때 옷 벗겨버리면 벌벌 떨잖아요. 벌벌 떠는 내 모습을 말씀에 입각해서 노출시켜버린다니까요. ‘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별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그냥 무섭고 두려워 떠는 것이 진짜 내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죠.

그다음에 34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분란을 일으킨다 이 말이죠.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걸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키죠. 못 지키는 거예요. 못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라 이 말이죠.

왜 못 지키는가? 우리에게는 시각이 있고 눈으로 보는 시선이 있으니까 시선은 내 고정점이에요. 내 중심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되느냐?’ 이걸 고정적으로 갖고 있으니까 이 말씀으로 이걸 뜯어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 잘 지키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고 ‘나는 주님보다도 내 가족 못 버려.’ 이걸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말씀은 그 지붕 자체를 뜯어내버려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말씀에 대해서 위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환경 자체가 기존 환경을 유지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제목으로 한번 해보자. 해봐야 소용없어요. 다 잊어버리니까. 제목을 ‘기존 환경’이라 해봅시다. 아까 제목 지어놨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Please, 제발 나를 지워주세요.’ 세상에서 만든 내 환경을, 나를 뜯어내주세요. 지워주세요. 뭐로? 뭐로 지워줍니까? 말씀으로. 또는 주의 세례 환경으로. 물과 피와 성령으로 나를 뜯어내주세요. 뜯어내주게 되면 뭐가 덮칩니까? 주님이 가져온 영생이 우리의 삶을 장악하죠. 장악하는 겁니다.

중간에 퀴즈 하나 나가겠습니다. 이것은 일방적 질문이기 때문에 제가 답변합니다. 질문 자체가 너무 일방적이라. 세례의 반대말은? 과학이죠. 이래야 실감나는 거예요. 과학은 나의 이성과 나의 지혜가 집결된 거예요. 집약된 거예요.

세례는 생뚱맞고 엉뚱한 거예요. 그것도 나의 세례 같으면 종교적으로 도움 되겠지만 나의 세례가 아니고 하나님이 세례 받았어요. 하나님이 받은 세례. 물, 피, 성령. 이것은 한 분을 증거한다. 셋인데 하나라.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증거하기 위해서 세 개의 세례 증거가 이 땅에 이미 주어졌습니다.

세례 증거. 요한일서에서는 세례 증거 세 가지. 이거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이거 부정할까요? 이거 못 들은 걸로 할까요? 안 들은 걸로 할까요? ‘안 들을란다~’ 코미디에서 하는 것처럼 애써 외면할까요? 외면한다고 이 세례 증거가, 십자가 피와 물세례와 성령 오심이 날아갑니까? 사라집니까?

감당 못합니다. 그런데 감당 못함을 통해서 이 세 가지가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한 거예요.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 사고방식이 글러먹은 거예요. 이걸 내가 왜 감당합니까? 이것은 주께서 홀로 하신 일인데 내가 왜 감당을 해요?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증인이 되니까.

이걸 마귀가 알고 있죠. 적그리스도가 알고 있어요. 요한일서에 나온 적그리스도가 주장한 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게 확실하잖아요. 피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뭐가 있다? 피 흘린 게 거짓말 안 되려면 우리에게 뭐가 있어야 돼요? 모든 게 뭐가 되어야 돼요? 한 거, 안 한 거 모든 게 죄가 되어야 돼요. 이 명백함을 누가 막 억지를 부려서 안 들은 거로 하려 하는 게 누굽니까? 적그리스도에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다 이 말입니다. 예수께서 육체로 뭐 놀러왔습니까? 물세례 받고 피세례 받고 성령세례 받은 게 예수님 오신 일이잖아요. 그걸 가린다는 것은 마귀 입장에서 가릴 만해서 가리는 거예요. 왜 가릴 만하냐? 인간 자기 혼자 잘난 맛에 살도록 좀 놔두라 이 말이죠. 이게 연세가 80이 넘고 90이 되도 이거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말을 잘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니고 이걸 아는 사람이 드물죠. 끄집어내면 전부다 자기 과거 이야기.

사도행전 보겠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 이야기가 아니고 사도 바울 이야기인데요. 사도행전 하기 전에 시편 79편 6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여기서 개인적으로 묻습니까, 집단적으로 묻습니까? 제 질문입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개인이 아니죠. 뭡니까?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그 다음 뭡니까?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이것은 뭐냐? 인간은 인간끼리 단합하는 공동체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환경이 생기니까. 나를 지켜줄 환경이 생기니까요.

‘아이고,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게 거짓말일 리가 없어. 그건 진리일 거야.’ 인간들은 기성세대의 움직임에 민감해서 그 비스무리하게 살게 되면 얼추 잘 살았다는 그러한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놀아요. 어떤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면 그게 진리가 되고, 소수가 이야기하면 이것은 위험한 발언처럼 생각되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걸 아시고 집단적으로 주의 노를 퍼붓습니다. 그 내력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4장, 17장에 있는데 우선 14장부터 보겠습니다. 14장 15-16절, 사도 바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한번 봅시다. 사도 바울이 돈벌이도 했지만 사도 바울이 천막장사해서 재벌 되겠다는 그런 희망은 없었죠. 그건 하나의 수단이고 정작 사도 바울이 관심 두는 것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뭐하고 살았어요? 엉뚱한 질문이지만, 사도 바울은 뭐하고 살았습니까? 1.무직, 2.직업이 있다. 그 직업이 뭔데요? 세상적인 직업은 없어요. 잠깐 했던 천막장사는 임시직인 거고. 고정 직업이 있어요, 없어요? 백수죠. 예수님의 직업이 뭡니까? 목수 아닙니다. 목수의 아들이지 목수는 아니에요. ‘어릴 때 뭐 배웠겠지.’ 그것은 지어낸 거고요. 예수님의 직업이 없어요. 직업이라 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건데, 예수님은 죽고자 하잖아요. 그런데 무슨 직업이 있어요?

사도행전 14장 15-16절,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이것은 루스드라라는 터키, 지금의 튀르키예 한복판에 있는 루스드라에서 했던 설교거든요.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저 별거 아니에요. 여러분하고 똑같아요.’ 이런 뜻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 뜻인데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야… 아주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돼요.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인데 나에게 일어난 어떤 변화가 뭐냐?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무슨 일? 헛된 일. 다른 말로 하면 허사죠. 헛된 일을 버리고. 그럼 헛된 일 아닌 게 뭡니까? 헛된 일이라 했으니까 헛된 일 아닌 게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헛되지 않은 일이 뭐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럼 듣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 뭐냐?” “우리가 하는 것은 썩어질 양식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영생” 갈라디아서 6장 8절.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영생. 주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영생. 영생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죄를 사함으로써 거저 주어지는 게 영생이죠. 이것만이 헛된 일이 아니다. 지금 직업 버리고 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직업 및 모든 일이 영생에 비하면 무슨 일에 해당됩니까? 헛된 일에 해당되죠. 헛된 일 많이 하세요. 더 많이 해야 돼요, 헛된 일.

그래서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묵인했다는 뉘앙스는 뭡니까? 지금 봐주고 있다는 거죠. 어떻게 봐주는가? 그것은 사도행전 17장을 봅시다. 사도행전 17장은 아테네에서 한 설교에요. 그 당시 아덴, 아덴에서 한 설교입니다.

거기도 묵인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17장 30절부터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허물치 아니했다는 말은 묵인했다, 또는 많이 봐주고 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어떤 사람이 한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개기고 대들어보겠습니다. “복음 안 받아들인다. 어쩔 건데? 어쩔 건데?” 이렇게요. “당신이 말한 복음 나 거부한다. 왜? 거부하면 안 돼? 거부한다. 어쩔 건데? 어쩔 건데?” 이렇게 해본단 말이죠.

그럼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겠어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답변을 두 가지로 해봅시다. 좀 단순한 답변과 깊이 있는 답변, 더 근원적인 답변. 단순한 답변은 뭐냐? “안 믿어? 세상은 불 심판된다.” 근원적인 답변은 뭡니까? “죄인을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 여기 ‘피’가 나오죠. 피. 피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답변을 지워버리면, 답변 둘 중에 하나만 꼽으라면 뭡니까?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 이유는? 모든 인간은 인간도 아닌, 영생 얻을 자격도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흘림이 진짜라면, 진짜 일어난 사건이고 이게 거짓이 아니라면 인간이 ‘나는 착한 일 했다’는 자체가 사기가 되고 마귀의 거짓말이 돼요. 나는 착한 일하니까 나는 인간이라고 우기는 것은 완벽한 사기고 거짓입니다. 가짜 인간들이 하는 짓이에요. 뭐로 증거한다? 피로 증거한다.

그러면 피가 진리가 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피가 나에게 진리로 못 와요. 막혀있으니까. 여기에 누가 등장하는가? 물과 피와 그 다음에 성령. ‘이 성령께서 피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듣는 사람이 또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성령을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성령을 안 받아들이면?”

사도 요한의 답변은 “성령을 안 받게 되면 그것은 영생 없는 인간, 인간도 아닌 인간이다.” 그럼 듣는 쪽에서 “나는 영생 얻고 싶은데 성령 받는 방법 없냐?” 이렇게 나오겠죠. 그럼 사도 요한은 간단해요. “받지 마!”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주는 게 아니니까.

예수님이 한 모든 말씀은요. 자기의 피 공로가 같이 있는 쪽에만, 값어치를 계속 유지하는 쪽에만 그걸 성령을 통해서 전달하게 되어 있지, 자기 자신의 가치를 그냥 쥐고 있는 사람한테는요, 영생은 안 와요. 뜯어내야 되니까. 죄를 들추어내니까. 죄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그 죄인 되어서 피와 만나기 때문에 내가 멀쩡한 인간 되기 위해서 성령까지 수입하려고 하는 그것은 성령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장 계속 봅시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자, 작정했습니다. 아까 단순한 답변이죠.

단순한 답변만 있는 게 아니고 근원적인 답변은 뭐였습니까?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뭡니까?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 하니라” 다시 살렸잖아요. 더 근원적인 답변과 거기서 파생된 단순한 답변을 섞어서 지금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섞어서.

세 가지 성경말씀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20절, 여기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그다음 뭡니까?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죠. 10장 29절을 보게 되면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이야기를 우리가 남한테 이야기해도 소용없다니까요. 이거 안 들은 걸로 하면 끝나는 거예요. “성경에 그런 구절 있어.” “어어어~ 나 안 들었다.”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럴 때 “내가 방금 이야기했는데 너 거부해?” 화낼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성이 이 성경말씀을 거부하게 되어있는 본능이 우리한테 있었던 거예요.

이게 새로운 환경,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걸 뜯어내보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위인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쉬운 정도가 아니고 쉬운 것보다 더 쉽게 받아들이죠. 쉽다는 말조차도 장애가 될 정도로 그냥 집어넣었죠.

“이 말씀,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성령 이게 믿어지나?” “믿어지네.”하면 끝나는 이야기에요. “이게 확실하냐?” “확실하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어떤 것보다?” “내가 여기 있고 네가 여기 있다는 그것보다 더 확실해.” “내가 여기 있는데 이게 왜 더 분명해?” 존재하는 것은 뭐한다 했어요? 존재하는 것은 사라지니까.

아까 안양강의에서 했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에 둘러싸인 건데 그 분들이 늙어서 돌아가시네요. 자꾸 돌아가시는 거예요. 고모하고 놀던 거, 이모한테 선물 받은 거, 삼촌과 너무 좋게 지냈던 거, 형님하고 잘 지내던 거. 그런데 그 분들이 하나 둘씩 죽어서 내 곁에서 없어져요. 죽어 없어지니까 사랑했던 나의 인맥들, 관계망이 뜯겨져나가니까 갑자기 결핍이 생기잖아요. 행복에 구멍이 뚫린 거예요. 그걸 뭐로 메꿉니까? 뭐 이 세상에서 메꿀 수가 있어요? 떠나버렸는데.

그래서 맨날 하는 거짓말이 뭐냐? ‘나 빨리 죽어야 된다. 눈 수술 하지 말고 빨리 죽어야 되는데.’ 맨날 하는 거짓말이에요. 감기가 들려도 ‘나 죽어야 돼.’ 안 죽습니다. 왜 죽기 싫은 줄 알아요? 우리 인간이 왜 죽기 싫은가? 불행해도 죽기 싫은 그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 내부에 뭐가 있느냐 하면 가룟 유다가 마지막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 나는 평생 하나님, 예수님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해 살았어.’ 이러한 악마가 집어넣은 심지. 이 가시 못 뺍니다. 못 빼요. 그냥 예수님의 피로 덮을 수밖에 없지, 이거 빼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죽어가면서 자기 잘난 체 하는 이유가 가룟 유다잖아요. 죽어가면서. 자기반성하고. 내가 스승을 팔다니. 쇼도 아니고요.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4장 14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성령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령 때문에 이 본문을 제가 채택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행)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덮쳤다)” 너희 위에 새로운 환경으로 있다.

그러니까 고난 받으면 성령 온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있게 되면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발언했다는 이유 때문에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는 거예요. 욕 얻어먹음으로써 구원받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욕이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너는 왜 달라야 되는데? 우리하고 왜 다른데?’ 이런 욕들을 받는 거예요.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님이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거든요. 선지자도 마찬가지고. 다음에 우리 차례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가짜 인간이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이고. 예수님, 아들이 있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영생이 없다.’는 이 발언을 헌법 조항에 차마 넣지를 못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 발언을 못해요. 그러면 뭐 대다수가 손들고 ‘나는 예수님을 찾아가려고 하지, 예수님 안에 이미 들어있는 건 아닌데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달려들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쫓겨나가야 돼요. 성경대로 이야기했는데 쫓겨나야 돼요. 사람들 자기 쪽에서 영생 얻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 속에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 있고 없음은 ‘성령 있다’로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인간도 아닌 인간들에게 욕 얻어먹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마세요. 그래야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남 욕하지 말고 나에게서 나 다움, 인간다운 면을 지워버리고 삭제하고 제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전에 있던 나의 인간적인 관계망을 대체하는 말씀의 관계망 속에 놓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서울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과 말씀의 만남  (1) 2026.04.19
넘어온 생명  (0) 2026.03.15
고정된 영생  (1) 2025.11.16
사랑의 중첩  (0) 2025.10.18
환승통로  (1)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