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51113a 요한일서 5장 6절(고정된 영생)-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5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요한일서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도 요한에게서 나왔습니다. 사도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해보겠어요. 구약이 있고 예수님 계시고 그다음에 사도가 있습니다. 구약의 전체내용, 예수님의 전체내용, 사도의 전체내용이 어떻게 equal, 일치될 수 있는가를 우리가 살펴봐야 돼요.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대로 왔으니까 일치되는 것은 당연하고 사도는 예수님의 사도니까 예수님의 내용과 사도의 내용이 일치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죠.
어떻게 일치되는가?
㉮구약의 전체내용은 ‘이스라엘의 실패’에요.
㉯그다음 예수님의 전체내용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마 15:24)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 사도의 전체내용은 ‘은사’ 내용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여러분들이 연결시켜볼 수 있겠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다’, ‘은사’다, ‘실패’다. 이 전체를 하나로 봤을 때 공통점이 여기서 나옵니다. 공통점은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일방적이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실패했다. 실패하도록 하셨어요. 일방적으로 실패하도록 하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왜 우리를 실패하게 합니까?”하면 하나님은 “나 너하고 상대 안 해. 난 너하고 말 안 섞어. 너하고 일 안 해. 이야기 안한다고. 나 너하고 이야기 안 해. 내가 실패케 했기 때문에 실패한 거야.” 그러면 은사는 뭐냐? “나 너하고 이야기 안 해.” 똑같은 거예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저 찾아주세요. 저 지옥 갈 겁니다. 주께서 찾아줘야 천국 갑니다.”하면 주께서 하는 말이 “나 너하고 이야기 안 해.”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전체내용이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복음서가 여기 포함되겠죠. 사도의 전체내용은 은사라 했잖아요. 은사를 둘로 나누면 하나는 사도 바울,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
사도 바울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당연히 은사 중심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은사는 뭐라고요? ‘나 너하고 이야기 안 해. 나 너하고 상대 안 해. 내가 그냥 은사 줄 거야.’ 끝.
사도 요한의 은사 내용은 뭐냐 하면 ‘승리했음을 서로 축하하라’. 다른 말로 하면 ‘서로 사랑하라’.
승리했다는 것은 요한복음 16장 33절인데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다 떠나고 나(예수님)를 혼자 둘 때가 왔다.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왔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무엇?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평안을 누린다는 말은 이거에요. ‘신났다’ 이겁니다. ‘일 다 마무리됐네.’ 이런 뜻이에요.
여러분들이 주택 인테리어 업자에게 모든 걸 맡긴다든지… 또는 차를 박아서 찌그러지고 고장 나서 카센터에 맡겨놓으니까 전화가 왔어요. “찾아가세요.” 그다음 뭡니까? “다 끝났습니다. 찾아가세요.”
그때 막 찡그리고 울고 이럽니까? “아휴, 나 어떻게 살아.” 막 이렇게 하는 거예요? 지금 내 연기가 별로 안 좋아서 실감이 안 나는데… “엉엉. 나 이제 더 못 살 것 같아. 나 불안해서 못 살아. 나 우울증 걸렸어.” 그렇습니까? 아니, 차 수리 다했다는데 뭘 우울증 걸려요? 도대체 고민할 게 남아있지 않다는데 왜 우울증 걸리고 난리도 아니냐? 가을되니까 슬프다 뭐… 세상은커녕 가을한테도 못 이기고.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평안을 누린다는 말은 평안을 줬다는 말이죠. 은사 뜻이 뭐에요? 선물이에요. 그냥 줘버렸다는 거예요. 어떻게 줬어요? 일방적으로 줬잖아요. 준 걸 그냥 누리는 겁니다. 보니 새 차라. 그 새 차가 오늘 본문 요한일서 5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새 것 뽑은 거예요, 새 것. 새 것 뽑아준 거예요, 새 것. 뭐 흠도 티도 없어요. 우리가 손댈 것도 없어요. 그냥 준 거예요.
줬기 때문에 성도의 특징은 영생 전하는 즐거움과 기쁨에 흠뻑 젖어 사는 거예요. “너희 영생 있어, 없어? 없지? 나한테 있어!”라고 자랑질 하는 겁니다. 자기가 애써서 얻은 건 아니고요. 공짜로 영생을 얻었으니. 기뻐할 때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영생 얻어서 기뻐하는데 ‘너는 나를 믿느냐?’ 뭐 기쁨으로 다 끝났지,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기뻐한다는데. 그런데 안 기쁘다 하면 이거는 뭡니까? 이거는 믿는 게 아니죠. 믿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12장 37-40절을 보면 주님께서 많은 표적을 저희에게 이야기했어요, 많은 표적을. 이렇게(첨부파일의 그림 참조) 정리했기 때문에 하나씩 물어가며 봅시다. 자, 주님의 표적은 무슨 표적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거예요. 이해돼요? 표적. 왜 잃어버렸습니까? 앞에 뭐가 있죠?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죠? 가만있으면 실패 안 해요. 율법이 왔기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하나님의 법이 오니까 그들은 법을 지키려고 했는데 지킨 결과가 꽝이다. 실패에요. 인간이 말씀에 실패했으면 어떻게 자기 정리를 하면 됩니까?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다’로 정리하면 되죠. 이게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내용입니다. 전체내용이에요.
이 전체내용이 equal, 동일하다니까요. 예수님의 내용 전체, 예수님의 전체 활동도 구약의 전체 활동도 사도의 전체 활동도 세 가지의 공통점은 ‘인간은 실패자다. 인간 자체가 실패자로 출생했다. 실패자로 태어났다.’ 실패자로 태어났다는 말은 ‘내 쪽에서 뭘 해봐야 그것은 실패다’ 이렇게 되죠.
그런데 실패했다는 그 내용이 기쁨이 된다는 말은… ‘실패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믿어서 성공을 기대해볼까?’ 이러면 안 기뻐요. 왜 안 기쁘냐? 실패한 나를 지워버리고 이제는 탈바꿈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패는 그만하고 이제는 성공한 나로 바꾸려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게. 내가 뭔가 가능성이 있어줘야 되죠. 우울증 걸리죠. 우울증 걸립니다.
여기 은사가 나오는데 항상 성경개념에서 이 개념의 뜻이 뭐냐 할 때 반대로 하면 돼요. 은사는 뭐냐? 은사가 뭐냐고 하면 잘 몰라요. 그냥 선물인데 뭘 선물로 줬는지 몰라요. ‘은사’의 반대말은 ‘복수심’입니다. 사람은 저것 때문에 환장하는 거예요. ‘내가 지옥 갈지언정 너한테 복수하고 나 지옥 갈란다.’ 인간의 오기는 그 정도입니다.
복수심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네가 내 것 건드려서 내게 흠집 내고 내가 소중히 아끼는 나를 잃게 했어?’ 그러면 거기서 뭔가 결핍이 생기고 모자람이 생겼죠. 그 모자람을 복수를 통해서 마저 채우려고 하는 그러한 의식입니다. 인간을 한평생 우울과 슬픔과 비극과 눈물과 통곡으로 지나게 만드는 것은 복수심이에요. 복수심.
‘너 만나서 내 인생 조졌다. 너 이제 딱 기다려. 죽을 때까지 복수할 테니까. 내 바가지 바가지가 얼마나 센지 맛을 못 봤지? 너 만나서 내 인생 이렇게 뜻대로 안되었는데 기대해. (손가락 당겨가면서) 기대해. 피를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지게 해서 죽일 거야.’ 그거는 뭐 말로 안 해요. 평소에 잠복되어 있는 심리거든요. ‘네가 나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어?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는데 내가 가만있을 상 싶어?’ 먹고 말 거야, 치토스!처럼 ‘반드시 해내고야 말거야.’
복수심에서 소망이 나오죠. 목적과 희망과 기대가 나오는 거예요, 이 복수심에서. 그걸 좋게 포장하면 이렇습니다. ‘삶의 의욕이 나온다’. 내가 살아있음을 자극해줘요. 뭐가? 상실감이. 단, 조건은 내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돼요. ‘독’에 악센트 줘야 돼요. 독!하게 먹어야 돼요. 동맥경화증 걸릴 정도로 긴장 바짝하고 독!하게 먹어야 돼요. 그래서 매사에 나의 승리로 탈바꿈되어야 돼요. 내가 승리하는 것만이 내 인생에서 상실된 나를 보상하는 유일한 대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에 대해서 소설 써요. 소설을 매일같이 씁니다. 어제 설교에서는 그것을 ‘사연’이라 했어요. 사연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전부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어요. 내 사연은 나의 아픔을 다시 소환시키는 방법입니다. 사연이라 하는 것은 그냥 밋밋하면 재미없어요.
만약에 이웃집에 어떤 아저씨가 이사를 왔다. 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하다 보니 그 사람을 관찰하게 되었다. 관찰해보세요. 밋밋하고 재미 하나도 없어요. 무창, 드라마에 나오는 가상 마을이에요,에 어떤 선생님이 전근 왔다. 이름은 부세미. 불쏘시개 말고 부세미. 부세미 선생님이 왔을 때 그냥 보면 아무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연이 있다. 드디어 재미가 나죠. 자기보다 나이 서른 살 많은 재벌과 갑자기 혼인해서 <착한 여자 부세미> 드라마가 한편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인생의 사연이 밋밋하면 내 인생이 재미없어요. 재미없으니까 거기에 색깔을 칠하는 거죠. 드라마 못지않은 인생. 긴장과 흥미가 아주 넘치는 자기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거기에는 권선징악이 끼어들어요. 나는 피해자, 나를 피해자로 만든 누구. 그런데 그 자에 대해서 나는 드디어 생에 열의를 가지고 보란 듯이 복수해서 그 인간은 꼴아 박고 내 인생은 갑자기 성공했다. 음메, 기 살아! 저쪽은 나를 보고 음메, 기 죽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탈 때 인간은 짜릿함을 느끼죠. 그런데 그 짜릿함이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들었기에 무슨 항목에 포함되느냐? 그 짜릿함을 내가 지켜야 된다는 부담을 또 자기가 지고 있습니다. 내가 멋있고 짜릿한 인생 살았으니까 이 아름다운 내 인생, 멋있는 인생이 행여나 어떤 사건 벌어져서 완전히 쭈그러들지 않도록 또 바짝 긴장해가지고 그걸 또 지켜내야 돼요.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데.
어떤 인생은 뭐.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무(無)다. 허무다.’ 이럴 게 아니라 율법과 유일하게 만난 민족이 이스라엘이잖아요. 이스라엘이 실패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실패자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실패자기 때문에.
그러면 주께서 일방적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죠. 잃어버린 자를 찾을 때 그것은 주님의 절차입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할 때 분명히 예수님이 우리 자신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는 일을 우리에게 통보할 뿐이에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그럼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뭐냐?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냐’를 찾아지는 그 대상이 될 때 그 사람은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겁니다. “딱 기다려! 너 잃어버렸거든.” “그럼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너, 잃어버린 양인데 잃어버린 양인 너를 내가 찾는 양으로 전환시켜줄게.” 이겁니다.
그게 오늘 요한일서 본문에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 새로 난 자’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 새로 태어났느냐? 예수님을 경유했으니까 새로 태어난 거예요.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 정리한 것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처음에 구약이죠. 구약은 이스라엘의 실패담이에요.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류의 실패죠. 인류의 실패. 예수님의 시대에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 그럼 잃어버렸다는 이 규정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몽땅 가져와서 ‘잃어버렸다’에 집어넣는 거예요.
마태복음 15장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왔다. 그럼 이스라엘의 뼈대는 주께서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 뼈대가 유지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개념 있잖아요. 너는 내 아들이다, ‘아들’ 개념. 너를 택했다는 ‘택함’ 개념. 너를 통해서 내가 ‘영광’을 받겠다는 그 개념. 이 모든 개념은 예수님한테는 유효하죠.
적어보겠어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이 개념(아들, 택함, 영광)은 예수님에게는 유효하다. 효과가 유지된다 이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에게는 유효합니까, 유효하지 않습니까?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유효해요. 왜냐하면 모든 게 예수님의 일방적인 조치이기 때문에. 일방적 조치에요.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산수 숙제를 하시는데 “3+5=? 아, 이게 뭘까? 이게 뭘까?” 예수님이 고민한다 합시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예수님, 그것도 모릅니까? 3+5는 8입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아이고, 네가 맞구나.” 합니까, 아니면 “네가 내 일에 왜 간섭하냐?” 이렇게 나옵니까? 어느 쪽입니까?
내가 3 더하기 5가 8이고 아니고 고민을 하든 말든 너는 여기 내 일에 끼어들면 안돼요. 왜? 일방적이어야 되니까! 은사 자체가 일방적이에요. 은사 자체가 일방적인데 ‘주님,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잘되십니다.’ 이런 식으로 거기에 끼어들거나 관여할 자격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게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후딱 지나갔으니까 잘 이해 안 되실 수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실패케 하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기 실패한 것에 대해서 어떤 복수심, 짜증 또는 우울증 때문에 ‘하나님이 앞으로 일을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라고 이스라엘이 하나님 일에 끼어들 수 있어요, 없어요? 끼어들 수 없어요.
오롯이 온전히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돼요. 잃어버린 자. 주님께서 우리를 ‘잃어버린 양’이라 규정을 하고 그다음 작업도 역시 주께서 찾으러 왔잖아요. 잃어버린 것은 우리 솜씨가 아니고 그것도 율법의 기대치대로 잃어버렸던 거예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잃어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인류 전체가 망했기 때문에. 인류 전체가 망했어요. 그 인류 전체의 대표자들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 자체는 나라가 없었어요. 대표자 되는 것도 율법 또는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뽑힌 겁니다. 선택된 거예요.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일방적으로 잃어버렸던 양을 건지시고, 일방적으로 은사를 주시고. 모든 게 일방적이잖아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일방적인 행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이렇게 아신다면 그다음에 뭡니까? 사도에게는 은사죠, 은사. 이렇게 되면 은사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내 중심의 분위기를 제거하시는 기능’이에요. 내 중심의 분위기를 제거하시는 기능. 내 중심의 분위기를 제거하신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복해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주님이 은사 준 것을 다시 나의 의미로 당겨올 수가 없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은사에요.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내가 너무 기쁩니다.” “아니, 아니, 아니야. 네가 또 착각했구나. 거기 너가 왜 튀어나와?” 너를 무시하고 네게 기대하거나 너를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너를 사용한다는 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이 은사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영생을 알고 전하는 이 기쁨과 즐거움이 은사에 속해요. ‘내 것, 내가 영생한다’ 이게 아니라 영생을 위하여 내가 기뻐하는 거죠. 내가 영생을 가진 것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게 아니고. 영생을 위해서 내가 기뻐하고 그 일에 종사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은사잖아요. 사도 요한에서는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에요. 서로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랑받음에 대해서 서로 사랑하라 이 말입니다. 서로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까 이야기한, 우리에게 우울증을 낳게 하는 복수심이 없죠. 복수심도 없고 경쟁, 비교, 대조, 이게 아무 필요치 않아요, 우리한테는.
비교, 경쟁, 대조 여기에 전부 내 중심이 들어가잖아요. 그 내 중심을 빼버리니까 인간이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 방식이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돼요. ‘저 사람을 사랑해야지.’ 안돼요, 안돼요. 왜냐하면 내가 주님과 상대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같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는 사람 사이에는 이미 뭐가 형성되어 있어요? 서로 사랑함이 형성되어 있어요.
“왜 기뻐?”하면 “주님의 작업에 말려들어서.” “누가?” “당신이나 나나.” “어떤 작업인데?” 잃었는데 얻었다는 거예요. 그 대목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 되묻는 거예요. 주께서 물을 때는 강조할 때 묻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라고 이야기했어요.
묻죠. 묻는다는 것은 강조점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백 마리에 있다는 말입니까, 아흔아홉 마리에 있다는 말입니까, 한 마리에 있다는 말입니까? 어렵죠. 아흔아홉 마리에 있습니까, 한 마리에 있습니까? 한 마리에 있죠. 그럼 백 마리에 있습니까, 한 마리에 있습니까? 어느 쪽에 있습니까? 한 마리에 있죠. 한 마리.
백 마리에 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망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치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고… 여러분들 이런 거 생각 못해봤습니까? ‘이스라엘 만들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 모든 이방민족의 모든 공격과 그들의 유혹을 사전에 차단하고 모든 우상숭배를 사전에 차단해서, 한번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약속의 땅을 통해 하늘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이런 간단한 논리에 관한 일을 왜 하나님께서 하지 않았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만 이상한가요?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면서요? 사랑하면 패배하지 않도록 실패하지 않도록 율법을 지키도록 얼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권능과 능력을 줄 수 있잖아요. 신약에 와서 은사 주지 말고 아예 이스라엘 자체에서 죄 짓지 않도록 조치를 하면 되잖아요. 더 나아가서 마귀가 뱀이 에덴동산에서 깝죽대고 설치지 않도록 해주면 되잖아요. 왜 뱀이 함부로 나대도록 방치하신 겁니까? 뭐 뱀하고 주님하고 한 패에요?
그게 뭐냐? 제가 그냥 지어봤는데 이게 ‘말씀의 병목현상’이에요. 사거리에서 “야, 신호 바뀌었는데 빨리 안가?”하면 “가만있어봐. 앞에 차가 가득 있는데 어떻게 가?” 이런 게 병목현상이죠. 말씀에 대해서 주께서 차질 없이 이루시는 그 진행 작업에 있어서 인간은 감히 관여하거나 참여하거나 말씀 자체적인 흐름에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끼어들 수 없도록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말씀을 지키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구원이란 게 없어요. 왜냐하면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이 독점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을 만든 이유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영광 받을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유일한 영광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뿐이에요.
그 예수님의 은사에 의해서 신생아가 태어나죠. 하나님께로 새로 난 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런 작업에 대해서 굳이 하나님께서 되지도 않는 인간, 아무것도 아닌 인간하고 의논을 해야 되겠습니까? 의논할 필요 없죠.
나이 많은 어머니를 큰딸인 내가 섬기는데 그 집 둘째, 셋째하고 의논해야 되겠어요? 의논하게 되면 그들이 별 일하지도 않으면서 간섭질을 하려고 끼어들어요. 간섭질 하려고. 그래놓고 ‘나는 바쁜 가운데 내 할 일했다.’ 이런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죠. 그럼 그런 동생들보고 할 수 있는 것은, 너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환장을 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방어하는 이유는 나름대로 그동안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에요. 지금이라도 남은 것을 애써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전력을 다하여 내 것 내가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방민족들이 했던 거고, 또는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흉내 내면서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에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고 모든 말씀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끼어들지 말라.” 그게 선악과나무 아닙니까. 선악과나무를 어디 인간하고 하나님이 의논해서 4월 5일 식목일에 심었습니까? 아니죠. 일방적이잖아요. 일방적으로 나무 심어놨다고요. 나무 심는 것은 주님 자신의 일 추진의 일부로서 그렇게 심어놓은 거예요.
“까불지 마라. 네가 따먹을 과일 아니야. 내가 심어놨거든. 네가 안 심었지? 네가 따먹을 권한 없어. 그냥 ‘생명나무 따먹어라’ 할 때는 고마운 줄 알고 따먹고. 따먹을 거, 안 따먹을 거 네가 정하지 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시키는 대로 안했죠. 시키는 대로 안했습니다. 이게 인간 홀로 추진한 일이 아니고 배후에 악마가 있었죠.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을 아주 잡아 죽이려고 오신 게 아니고 마귀를 아주 멸하러 오셨다고 했어요.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범죄하였다.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너는 아니야’하고 천국에서 배제하기 위해서 지옥보내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요한일서의 전체내용을 보면 대단히 친절하지 않아요. 아무 설명도 없어요. 아무런 장식 없이 그냥 수학정석 제일 뒤쪽 해답지만 이렇게 끌어 모아놓은 거예요. 연결, 연결시킨 거예요. 그래서 해답지를 파악하려면 거기다가 예수님의 공생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 요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중간 중간 끼워 넣어야 돼요. 끼워 넣어야 이게 연결이 돼요. 통한다고요. 아주 불친절해요, 요한일서가.
요한일서 오늘 본문을 봐도 마찬가지에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이 연결 자체가 구약과 신약과 사도 바울의 편지가 아니면 연결 안돼요. 특히 6절을 봅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물과 피로 임하셨고 그다음 8절을 보면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게 얼마나 불친절한 이야기입니까, 그 자체로 봐서. 자,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왜 불친절한지. 궁금해요, 이유가? 그 이유가 요한복음 12장에 나와요. 요한일서도 사도 요한이 썼고요. 요한복음도 사도 요한이 썼잖아요. 사도 요한의 의사를 존중해야 됩니다.
이게 병목현상이에요. 병목현상이라는 것은 차와 차들이 딱딱 붙어있어서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말씀 전체가 다 그래요.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12장 37절에서 40절까지. 이것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이것은 은사, 사도 바울의 은사, 그리고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승리한 자들의 그룹이라 한 것과도 관련되어 있어요.
승리했다는 것이 요한일서 5장 4절에 나오잖아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겼잖아요. 그러니까 슬픔, 비극, 불행이란 말이 성도한테는 해당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이겼으니까. 이긴 자는 환희, 기쁨, 고마움, 감사 이거잖아요. 면류관, 완성, 드디어, 제일 좋아하는 말, 합격. 합격이죠.
오늘 수능일에 국회의원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플랭카드 붙여줬어요. 우리 동구청 앞에도 붙였는데 그 플랭카드를 보고 내가 속으로 약간 웃었어요. ‘수험생들아 침착하라’. 덤벙대지 말고 침착하게 되면 네가 수능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제가 왜 웃었느냐 하면요. 자기 성적 오르는데 침착함의 영향이 몇 퍼센트나 되겠어요? 기초도 안 된 애들도 침착할 수 있어요.
‘침착하라.’ 또 다른 사람은 ‘열심히 하세요.’, ‘정성을 기울여서…’ 뭐 여러 가지 할 수 있죠. 지금 이 세 사람에게서 이렇게 하는 심보가 성경과 얼마나 다른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알아 맞춰보세요. ‘물에 약을 탄다./ 약에 물을 탄다.’ 어느 게 맞습니까? 물에 약을 탑니까, 약에 물을 탑니까?
물에 약을 타죠. 일단은 맞췄어요. 두 번째, 물에 약을 탈 때 물을 위함입니까, 약을 위함입니까? 약을 위함이죠. 지금 이 세상 인간의 모든 삶은 자기를 위함이에요. 자기를 위한 예수, 자기를 위한 하나님, 삼위일체를 믿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강도(强度)가 이렇게 세요.
아담이 생명나무를 잃어버렸잖아요. 아담이 잃어버릴 때 자기가 실수했습니까, 마귀가 꼬신 거예요? 마귀의 유혹에 빠졌죠. 그러니까 승리라는 게 세상 어두운 권세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가 이긴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이긴 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이게 이긴 거야’하고 우리의 멱살 쥐고 세상에다 자랑질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게 은사에요. 나의 속성을 제거하는 겁니다. “네가 이긴 것 아니야. 내가 이겼어.” 그것을 증거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우리가 덮었다. 덮었다 하면 남는 게 뭡니까? ‘Calm down. 침착해. 열심히 해야지.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뭔가 일이 이루어질 거야.’ 이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나를 지키기 위한 복수심이에요. 나의 결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성공가지고 내 결핍을 메꿔서 그래서 온전한 나를 사수하고 방어하기 위한 평생의 마귀짓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지키다가 망한 거예요. 교회가 교회 지키기 하다가 몽땅 지옥가는 것처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지옥가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주께서는 친절하게도 요한복음 12장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찬찬히 해볼게요.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다음에 나온 말씀이 뭡니까? “저를 믿지 아니하니”
표적을 행한 이유가요, 표적을 행한 예수님을 어떤 점에서 믿지 않는가를 티내기 위해서 표적을 행한 겁니다. 사람들은 표적으로 생각 안하고 이적으로 받아들여서 주님을 따르면서 이용할 생각을 했죠. 그러나 그 표적이라는 것이 이적이 아니고 표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은 나한테는 일체 나올 수 없다.’를 들추어내는 게 표적이에요.
왜 그러느냐? 38절, 차근차근 해봅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것은 뭐냐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거예요.
39절,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절,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얼마나 적극적인 거부에요. 주님 쪽에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한다.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은사가 오면 어떻게 오느냐? ‘내 힘으로 내게 주어진 이 영생은 제가 믿거나 깨닫지 못했습니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 솜씨가 아니고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나는 내 복수에 미쳐가지고 싸대고 돌아다니는 그게 내 모습인데 어떻게 이런 나에게 영생이… 이게 웬 떡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이 정도로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악마로부터 승리케 하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주시니 이게 웬 은혜인지…’
이런 사람끼리는 그 자체가 이미 서로 사랑이 되고 그 자체가 새 계명이 발현되는 그런 모습들이죠. 새 계명이 발현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자가 고민할 필요 없죠. 우리는 물입니다. 약을 약답게 하기 위해서 그냥 물을 사용한 거죠. 물을 사용한 거예요. 물에다가 자기가 원하는 색깔 타지 마세요. 그냥 물은 투명해야 마땅합니다. 물은 투명해야 마땅하죠.
그 물을 물답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은사를 통해 우리에게 지적해주죠. 그 지적하시는 은사가 성령의 은사입니다. 우리를 지적하는 겁니다, 말씀으로.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주는 기쁨과… 사도 바울은 육을 언급하거든요. 육. 사도 요한은 그게 없지만 사도 바울은 육을 언급해요. 사도 요한은 노골적으로 마귀를 언급해버려요. 사도 바울에 있어서의 육, 그 육이 주는 기쁨과 성령이 주는 기쁨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평소에 네가 보라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구분이 안돼요. 내 기쁨이 성령의 기쁨인줄 알고 있어요. 성령의 기쁨은 내가 잃어버린 자라는 절차를 겪었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려야 마땅함이 유지되는 가운데 나오는 기쁨이 성령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가 되죠.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자에게 주는 혜택은 혜택대로 전부다 안겨주고 더욱더 안겨주고 안겨주는 거거든요.
로마서 5장 15절 읽어보고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15절 초반만.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범죄와 같지 아니하다는 것은 이미 성령 받은 사람만이 이게 동의가 돼요. 아, 내가 죄 지은 것 맞지만 주께서 잃어버린 자를 얻는 은사는 이건 족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쁨을 준다는 거예요.
죄 지은 건 인정하는 거예요. 나는 내 중심이라는 거 인정해요. 모든 게 내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그 시선이라는 그건 다 인정하는데.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걸 인정하면서도 웬 은혜인지 죄 용서, 은혜, 사랑, 하나님의 의가 은사, 선물로 주어지는데 이 선물은 범죄와 양이나 모든 면에서 같지 아니하다 이 말이에요. 그 같지 아니한 은사를 받았으니 신바람 이 박사죠. 최 박사, 김 박사. 아주 신나죠.
둘째시간은 그 은사를 은사되게 하기 위해서 은사의 활동이 우리를 시체로 만든다는 그것부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51113b 요한일서 5장 6절(고정된 영생)-이 근호 목사
‘받은 은사가 없으니 재주(=움직이는 것)를 피운다.’ 받은 은사가 없으니 인간은 재주를 피웁니다. 내 재주에 박수쳐라 이 말입니다. 내 달란트에 박수쳐라 이 말이에요. 재주를 피운다는 것은 대외용이에요. 타인의 호응에 의해서 나를 재평가하겠다는 거예요. ‘남들이 어떻게 나를 알아주는가로 나를 재평가하겠다.’ 이게 재주피우는 겁니다.
재주피운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움직이는 거죠. 움직이는데 요한일서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주님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주님은 움직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6절에 피와 물과 성령으로 임했잖아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과 피라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움직여봤자 물과 피라는 고정의미로 환원되는 거예요.
뭘 하기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그럼 움직이는 건 누가 움직입니까? 성령이 움직이죠. 돌아가신 분은 예수님인데 돌아가신 분 예수님은 움직이지 않아요. 이제는 은사 또는 증거하는 분, 성령이죠. 성령이 뭐를 증거하느냐? 움직이지 않는 분의 물과 물세례와 움직이지 않는 분의 피, 십자가의 피를 증거한다.
증거해서 뭐할 건데? 질문입니다. 증거해서 뭐할 건데요? 증거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믿을 것은 확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믿는다는 것은 변화가 아니고 고정적인 것. 영원히 고정적인 것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그게 뭐냐?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확정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 이루시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움직이는 것은 그 다음부터 누가 움직인다? 성령 또는 다른 말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가 움직이는 거예요. 은사가 하나로 모아지기 위해서. 하나만 믿으라고. 너 믿지 말고! 재주피우는 너 믿지 말고. 여러 가지 재주할 줄 아는 너 믿지 말고 그냥 움직이지 않는 것을 믿으란 말이죠.
움직여가지고 사람 둘 죽고 중상 여섯 명, 열두 명 경상당한 사건 있죠? 부천중앙시장에. 뉴스를 안 봐. 트럭이 지나가가지고. 그거 왜 사람 두 명 죽고 부천중앙시장에서 왜 사람 다쳤어요? 트럭이 가만있는데 다치고 죽었어요? 다친 이유가 뭡니까? 트럭이 움직였잖아요. 인간이 왜 사고 칩니까? 가만있지 않고 움직여서 그래요, 움직여서.
왜 움직이는데요? 날 위로해주고 날 인정해줄 사람 찾아다니는 거예요. 나 어때? 미장원 다녀왔는데 내 머리 잘 나왔어? 모든 게 ‘나 어때? 너 보기에 어떤 거야?’ 묻는 이유가 있어요. 나의 믿음은 오직 나에게만 꽂혀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고정된 절대자 되기 위해서. 그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생긴 건데요, 내가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절대자라고 꽂혀있는 거예요.
내 육체에다 ‘나 잘남’이라는 오뎅 꽂아놓고 그거 들고 ‘나 어때요?’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마귀가 오뎅 장사를 시작해가지고 인간들은 전부 다 자기가 자기한테 맛있는 오뎅들이 되었어요. 어묵이 되었어요. 그래서 만약 누가 자기를 나쁘게 말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호응이 없으면 ‘복수할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9절 읽어보세요. 이게 얼마나 우리의 일상이 되었는지 아셔야 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 갚지 말라는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경유하면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백날 줘도 원수는 본인이 갚는다는 자기의 죄성이 원수 갚는다는 율법 안에서 깊이 있게 다 노출되기 때문이에요. 꼭 율법이 이야기하는 것과 대조적이고 반대되는 세력이 인간 속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말은, 결국 이스라엘은 다른 신만 섬기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는데 너무 중요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부산강의에서 했는데 부등식 또는 부등호. 인간보다 누가 더 세냐?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세죠. 인간<하나님. 이거 우상숭배입니다.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인간보다 뭐가 더 세냐? 죄가 더 세요. 인간<죄. 시편 65편 3절(“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죄의 권능이 우리를 이기었사오니” 이 대목이에요. 죄의 권능. 그런데 그 죄보다 누가 더 셉니까? 누가 이겼습니까? 우리 주님이 이겼잖아요. 하나님이 이겼잖아요. 인간<죄<하나님.
이 ‘인간<죄’를 뺀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인간보다 죄가 세다는 이것을 빼버리면 이게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왜 이걸 빼냐 하면 내가 성경대로 예수를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 바로 죄가 되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것은 어떤 것도 죄의 권능을 이길 수 없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죠. 신학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은 교회에서 자기 의지를 발동시켜서 예배드리고 찬양, 헌금하는 모든 게 뭐가 돼요? 죄가 되죠. 개혁주의 신학은 그것을 안 받아들입니다. 안 받아들여요.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이 교회를 잘해보려고 나온 신학이기 때문에. 교회가 우상이죠. 개혁주의 신학에 철두철미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부정적인 것.” 부정적이라 하는데 아직 멀었어요, 부정적인 건. 이 정도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에요.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인간이 통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십자가는 취소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가 박힌 겁니다. 십자가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수 없어요. 신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에 사건은 이미 터졌어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이미 터졌어요. 그걸 어떻게 이해하냐, 해석하냐 하는 것은 네 마음대로 하시고 그 해석을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이 십자가는 터져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죄를 돌파할 수 없다는 게 확정적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와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주듯이 주님께서 산상설교로 산위에 올라가서 말씀하시면 주의 일은 시마이, 끝났습니까? 끝났어요? 마태복음 5장, 6장, 7장으로 마태복음 끝났습니까? 이게 산상설교잖아요. “누구든지 네 말대로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의 집처럼 무너진다.”(마 7:26-27) 그걸로 끝난 거예요?
8장에 들어가면 뭡니까? 8장에 들어가면 드디어 산에서 내려오면서 누구를 만나는가? 문둥병자를 만나요. 문둥병자를 만나고 일방적인 은사를 베풀었어요. 문둥병자가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인 은사를 베풀어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뒤에 나온 말씀이 뭐냐? “나는 죄를 짊어지러 왔다. 네게 있는 죄를 내 쪽으로 옮겨놓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17절)고 이야기해요.
그럼 죄가 뭐냐? 산상설교에서 이미 율법을 이야기했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잃어버린 양을 찾는 방법은 우리를 시체로 만드는 거예요. 시체의 좋은 점은 시체 팔자는 이미 시체로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고정된 거예요. 백날 재주피우면서 움직여봐야 그것은 움직이는 것으로 간주 안 해요. 이미 죽은 자가 춤을 춘다고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확정된 사실이 분명히 있잖아요.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잖아요. 죽었다는 이야기를 수천 번 해도 사람들이 와닿지 않는 이유가 유월절을 경유해서 죽었다고 생각을 안 하고, 말씀하고 저하고 다이렉트로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왜 말씀은 죽었다고 하느냐는 거예요.
말씀은 유월절의 취지로 십자가에서 완성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거든요. 그러면 유월절 양은 살아있을 때 효과 봤어요, 안 봤어요? 죽어서 피 흘릴 때 효과본 거예요. 그 유월절 양은 누구하고 동질로 여겨서 죽었던 겁니까? 그 죄인과 동질로 여겨서 죽은 것이 어린 양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유월절 양을 통한 주의 뜻은 뭐냐? “딱 기다려! 내가 너 죽여줄게.” 이거잖아요. “기다려. 율법으로 죽여줄게. 말씀이 와서 죽여줄게. 더도 덜도 말고 네가 유월절 양과 같이 되어라. 양에 통합되어라. 거기에 결합해라. 합류해라. 그게 바로 정확한 네 모습이다.” 그게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정확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제대로 된 X-ray 사진이죠. 정확한 내 증명사진입니다. 오늘 제목으로 ‘증명사진’.
정확한 증명사진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강도가 그 모습에 같이 겹칩니다. “예수님이여, 저를 생각해 달라. 십자가 달린 당신의 세계에 제가 합류되었음을 제가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성공했다’ 이 모습을 믿는 게 아니고, 고정되어 있다니까요. 십자가로 고정되었어요.
그 십자가 달린 분이 승리한 분임을 증거하는 것은 누구 몫이라 했습니까? 누가 움직이죠? 성령이 움직이죠. 성령이 움직이는데 그걸 사도 바울 식으로 하면 뭐가 움직인다? 은사가 움직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과 로마서 11장 29절을 같이 봅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렇게 따먹지 말라고 제켜놓은 영생인데 그게 예수님의 은사로 말미암아 영생이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6장 초반에 조건이 있죠. 뭡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조건 하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죽은 자는 뭘 달라 할 권한이 없어요. 다만 같이 죽었던 예수님의 선물이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선물을 제공한 겁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으니까 내가 편하게 이런 이야기합니다. ‘못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저도 힘들어하는데.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사실이니까요. 못 믿는다고 안 전할 수도 없고요.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그다음 뭡니까?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아,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은사 주는 게 아닌데.” 이런 게 없단 말이죠. 후회함이 없다. 취소가 성립되지 않는다. 어디에는? 하나님의 은사에는.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은사와 하나님의 은사를 분간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죠.
반드시 은사는 십자가에서 확정된 나의 본질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은사가 주어지는 거예요. “너는 십자가에서 나랑 죽었잖아. 그러니까 너는 영생이야.”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은 주님의 은사인데, “너는 이 땅에 죄 짓고 죽을 뻔했잖아.” 이거는 은사가 아니죠. 이건 은사가 아닙니다. “아, 식겁했네. 자칫하면 진짜 지옥 갈 뻔했네.” 너 원래 지옥 가. 뭘 지옥 갈 뻔했어? 지옥, 천국은 우리가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다시 한번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 해보겠습니다. 잃어버렸다 얻었다 한 것 기억나죠? 그 점을 성경본문으로 확인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5절, 이것도 역시 되묻는 말씀이에요. 되묻는 말씀에는 강조가 들어있어요.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자, 빠진 쪽은 어디입니까? 아들이나 소죠. 누구 소유입니까? 소는 소 소유가 아닙니다. 아들은 아들 자기 소유가 아니죠. 아버지의 소유죠. 소 주인의 소유인 소가 자기가 나쁜 짓해서 빠졌다고 ‘네 팔잔데 내가 무슨 책임 있노?’ 이런 소 주인이 없단 말이죠. 주인이 가만두지 않고 안식일이냐 아니냐 관계없이 끌어내지 않겠느냐.
따라서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는 작업을 안식일에 한다. 그게 사랑이고 그게 자비다. 자비를 베푸는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에만 하는 게 아니고 안식일의 의미가 확장되면 ‘안식일에 자비를 베푼다.’에서 ‘자비를 베푼 모든 날이 안식의 완성 날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의 활동입니다.
아까 했는데 요한복음 16장 33절,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후회 없습니다. 주께서 한번 평안을 주면 평안을 주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 이 말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요.
왜 은사가 한번 오고 안 오는 게 아니고 계속 와야 되는가? 사도 바울은 아직까지 죽음에 넘기우지 않은 목숨이 붙어있는 육의 속성을 하나님의 은사가 계속 까발려서 까발려질 때 마다 십자가의 은혜가 더 풍성케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이 육이 살기 바쁘다보니까 이런 평안이라든지 세상을 이겼다는 생각이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사님 설교는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내가 고정자가 아니잖아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믿게 된 것, 은혜 받은 내가 절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절대자가 아니거든요. 이 육은 회수당해야 돼요. 이 육 때문에 자꾸 가리워져요. 말씀의 은혜가 자꾸 가리워지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육에 대해서 굉장히 여러 가지 심도 있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중 하나가 디모데후서 1장 6절요. 성경 너무 많이 찾는 것 아닌가. 이래서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닌지… 디모데후서 1장 6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어떻게 합니까?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사도가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는 이유는, 그 말씀이 완전히 죽어버린 불씨를 다시 우리 속에서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뭡니까? 화롯불이죠. 말씀이 피어났다가 사그러졌다가 피어났다가 사그러졌다가. 그걸 보여주는 화롯불이죠.
주님의 은사가 활동하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확정된 거예요. 확정. 고정된 겁니다. ‘승리의 세계에서 고정된 사실’이에요. 이미 이겼어요. 이겼기 때문에 사도 요한 같으면 성령, 사도 바울 같으면 은사가 무엇을 주느냐 하면 여기서 평안을 주죠. 평안을 주고 그다음에 불일 듯 하는 거예요. 불을 자꾸 지피는 거예요. 사그러진 불을 자꾸 지피는 겁니다. 평안과 이미 승리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자꾸 불일 듯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끝인가? 복음서에서… 아까 한 것 다시 할게요. 시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계속 하겠습니다. 인류는 망함. 그의 대표자 이스라엘의 실패. 잃어버린 양을 찾기. 아무나 찾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는 자를 찾는 게 아니고, 진짜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을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 나오는 것이 뭐였습니까? 사도의 은사죠.
인류는 망함-이스라엘의 실패-잃어버린 양 찾기-은사
여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부정적 경우들을 설명합니다. 부정적 경우들은 여러 가지 있지만 첫째는, 제자들 사이의 알력. 투쟁. 내부 권력투쟁. 하늘나라 가면 누가 더 높겠습니까? 하는 것. 부정적 경우에요. 두 번째,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 대표적으로 나온 것이 요한복음 6장. 오병이어 먹을 때 수많은 제자들이 따라왔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 끝날 때 되니까 아무도 그와 같이 있지 않겠다 했죠(66절). 그들은 도대체 왜 갑니까? 예수님이 고정적이 아니고 여전히 자기가 고정적이에요. 자기 판단이 고정적이기 때문에 떠나간 거예요.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생각한 거죠. 그걸 요한복음에서는 “너희는 육에서 났으니 육이다”고 이야기하죠. 사도 바울도 육이라고 했지만 요한도 육이라고 언급을 했어요. 육에서 난 것이 육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려운 것이 있어요. 예수님은 물과 피와 성령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물과 피는 고정되어 있고 성령은 확고한 이것만을 증거하죠. 성령이 증거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증거할 게 없습니다. 증거하는데 이 고정과 동반해서 요한일서에서는 잘린 자, 마귀에 속한 자도 덩달아 고정적이에요.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죠.
‘네가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나 안 받아줘.’ 이게 돼요. 물론 사도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이걸 정리하는 것이 처음부터 제가 이야기한 거예요. 은사라 하는 것은 갈 사람에게만 가는 거예요. 아무나 달라고 한다고 다 주는 게 아니고, 누가 합격, 패스된 사람인지 불합격 된 사람인지 그것은 이미 위쪽에서 다 정해놓은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만약에 반발한다면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시체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도 판단력 있고 나도 내 운명, 내 팔자를 결정할 권한이 여전히 나한테 남아있습니다.’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게 너무나 육적이에요. 육에 속한 육적인 겁니다.
그래서 아까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는 부르심에 뭐가 없다 했습니까? 후회하심이 없죠. 후회하심이 없어요. 이것은 고정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의 말씀처럼 ‘나는 구원받을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살린다.’는 말이에요.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할 자는 반드시 살려주지 않는다.’에요. 그건 애초부터 배제된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토 달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시큰둥할 생각하지 마라. 그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고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야기가 끝났잖아요. 끝났는데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남아 있느냐 하면 육의 고정성에 대해서 제가 언급을 안했어요. 인간의 육은 어디에 영향을 받느냐?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아요. 베드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을 했건만 물 위를 걷게까지 해줬지만 막상 공간적으로 어둠의 권세에 둘러싸이니까 베드로가 주저하지 않고 ‘나 저 사람을 저주한다.’ 했죠.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베드로가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할 때 내가 그런 질문했잖아요. 주님이 진짜 베드로를 떠났습니까? 안 떠났잖아요. 왜 안 떠납니까? 나(예수님)는 너 말 듣고 일하는 존재가 아니다. 얼마나 이게 우리에게 감사와 자유함을 줍니까?
의성 사투리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남들이 들으면 욕하는 줄 아는데 의성 사투리에요. 욕하는 게 아니고. ‘지껄인다’는 말이 있어요, 경북 의성 사투리에. 남들이 보면 욕하는 것 같은데 욕하는 게 아니고 말한다는 뜻을 격하게 표현한 건데요. 주님은 베드로가 뭐라고 지껄이든 ‘네가 지껄이는 것보고 내가 대처할게.’ 이런 게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육은 ‘내가 어떻게 믿느냐 행동 여하에 따라서 주님께서 삐쳐서 나를 구원했다가 버릴 수도 있다.’ 이게 육의 고정성이에요. 이건 무지무지하게 무서운 이야기에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을 은사로 안 받아서 그래요. 믿음을 은사로 안 받았으니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가 표적이 되어서 막혀있는 겁니다. 깨닫지 못한 거예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은사가 와서… 은사가 오는데 누구한테 온다고요?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은사가 와서 그다음에 어떻게 된다고요? ‘나는 내 힘으로는, 내 믿음으로서는 구원될 수 없었다.’를 그야말로 영생 얻은 기쁨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주제에 내 판단과 내 행위로 절대로 구원은 성립 안 된다는 것을 두고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아주 신났죠.
그런데 성령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또는 성령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후회 없는 성령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흉내를 내는 거예요. 아주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데 결국 한계에 부딪쳐요. 할대로 다 하고 해볼 대로 다 해봤는데 주님 떠나면서 이런 소리합니다. ‘주님, 저 같이 고집 세고 마귀 들린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안 되죠?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저 같은 인간 못 고치겠죠? 주님, 속 시원하게 포기하시고 나는 내 갈 길로 가겠습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자기 고정성이죠.
히브리서 6장 4-6절 보겠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썼다고 보는데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대목을 교회 교인들에게 다 던져주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대목에 대해서 각자 해석을 해보세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해석을 해보라는 것은 해석을 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즐거우냐, 아니면 갑자기 낙담되고 불안을 느끼느냐 그걸 보는 거예요. 계속 그 기쁨이 살아 있느냐, 아니면 갑자기 우울해져서 회색 얼굴을 하고 있느냐 그걸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표정 관리하지 마시고요.
그 해답의 힌트를 드리기 위해서 제가 문장을 하나 쓰겠어요. 얼굴 낯색이 변하느냐 그걸 보자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주님 것 건드려도 아무렇지 않다./ 내 것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된다.’ 주님 것 건드리면 아무렇지 않은데 내 것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된다. 평소 일상에서 긴장도의 근거가 주님 거였습니까, 내 거였습니까? 긴장도. 바짝 긴장해서 신경 바짝 쓰는 것. 코인이 주님 겁니까, 내 겁니까? 주식이 내 겁니까, 주님 겁니까? 바짝 긴장하는 긴장도.
성경을 던져주고 ‘해석해보세요.’하면 자기가 감추었던 자기 본색으로부터 출발해요. 자기 본모습으로부터. 그러면 이 말씀,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고도 환하게 기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생의 기쁨이 소멸되지 않고 환하게 기쁜 사람은 이 성경해석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그 말씀의 강조점, 포인트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고정성이에요. 이 십자가의 고정성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경우도 십자가의 고정성은 인간에게 양보 없다는 점에 같이 기쁨으로 동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6장 4절에서 6절을 따라가려면 우리 자신을 뭐로 가상하느냐? 십자가를 현저히 욕보이는 나, 나라고 가상을 해서 ‘십자가 욕보여서 내가 지옥 불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십자가만 멀쩡하다면 그것이 나의 변치 않는 기쁨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할 거예요.
자기 것 건드려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안 건드리면 십자가만 확보된다면 주님께서 날 건드려도 저는 좋아요.’가 되는 거예요. 또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도대체 어느 수준까지 높아져야 그게 가능합니까?’ 하는데 지금 이건 수준의 문제가 아니에요. 종류가 달라요. 신생아, 새로 태어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기존에 있는 자아가지고 성경말씀 땜질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신차 아닙니다. 새 차 아니에요. 중고입니다. 중고는 하늘나라에서 받지를 않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로 희게 되었다는 말은 유월절 양에 같이 흡수해서 유월절 양이 너를 대체했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유월절 양이 대체되어야 될 텐데 유월절 양 믿는 내가 유월절 양을 제치고 내가 대체물로 등장한다면 그건 가짜 은사죠. 가짜 은사에요.
그래서 ‘은사, 성령 전부다 십자가 하나 붙들고 그거 증거하는데 은사가 십자가에서 나온다.’ 그 이야기를 이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이렇게 꼭 써야 될 이유가 십자가나 성령과 복음가지고 자기 이익 챙기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있는 겁니다. 어떤 단어를 언급해도 끝까지 나는 내가 나를 지킨다는 그걸 사수하는 사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럼 여기서 왜 육은 꼭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끝까지 지켜야 되느냐? 여러분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얼굴이 환하게 핀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육은 안돼.’라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킨 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바로 시공간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공간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창조에서 나온 시간과 공간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서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나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새롭게 둘러찬 시간과 공간이에요.
그런데 기존 창조의 시간과 공간은 뭐냐? 창조에서 나왔다. 창조에서 나왔으니까 인간의 육도 기존에 창조된 거잖아요. 흙에 속한 거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흙에 속한 육이죠. 육이니까 이것은 항상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탈피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탈피할 수 없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예요.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어떤 사람은 성격상 그렇다 하는데 성격의 문제가 아니고 본성에 관한 문제에요. 점잖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영생의 기쁨은 선악과 지식에서 나오는 모든 기쁨과 비교해서 능가하고 초과하고 초월합니다. 영생의 기쁨은. 왜냐하면 영생을 받았으니까. “너 그게 믿어져?” “이상하게 믿어지네. 이상하게.” 도저히 육으로서는 못 믿어요. 선악과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데 이상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 ‘이상하게’가 뭐냐 하면 바로 성령의 은사가 되는 거예요. 이상하게 믿어져요.
꿈에도 생각 못하고 내가 원하지도 않는 영생이 주어졌을 때 이 사람의 남은 생애는 능가하고 초과하고 초월하는 그런 경험을 성령을 통해 하게 됩니다. 그럼 능가하고 초과하고 초월하려면 여기에 능가해야 될 대상이 있어야 되겠죠. 그 대상이 뭐냐? 기존의 육. 주변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있는 이 육신이 그 대상이 되는 겁니다. 늘 비교가 되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흔들기를 시도합니다. 깜짝깜짝 놀랄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나죠. 수십 번 일어나요.
다시 한번 요한복음 12장 봅시다. 12장 40절에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을 바꿀 테니까 바꾼 것하고 이 구절하고 어떻게 차이 나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출세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어떻습니까? 어떤 차이 있죠? “저로 하여금 돈 벌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차이입니까?
지금 말씀의 관심은 돈 벌고 건강하게 되고 자녀 잘 되는 이게 목적이 아니고, 어떻게 뚫을 수 없는 난관이 뚫려서 영생이 주어졌음이, 하나님의 은사로 영생이 주어졌음이 어떻게 믿어지냔 말이죠. 이것은 내 쪽에서 뭘 해서 믿어진 게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로 은사가 주어졌잖아요. 영생이 주어지는 은사에는 후회함이 없다 했잖아요. 아까 봤죠? 범죄함보다 뭐가 우세하다? 범죄함보다 은사가 우세하다 했잖아요. 은사가. 거저 주시는 영생이 나의 어떤 죄보다 우세한 거예요.
그런데 그걸 뭐로 막아요? 현재 우리의 육신이 놓여있는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각종 각양의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세한 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다 덮어버린 거예요. 화산재처럼. 얼굴이 떴어, 누렇게. 수심이 가득해. 왜 그렇게 수심이 가득한지 물어보면 생각이 나서에요. 무슨 생각? 이 시공간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생각이 나서 그래요.
제가 지난 부산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과학은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이다.’ 예를 들면, 3+5=8. 이거 맞습니까? 이게 수학 논리잖아요. 누가 봐도 맞죠. 맞아서 막 기쁩니까? 막 즐겁고 이거 하나 맞았다고 ‘이제는 나 죽어도 좋아.’가 됩니까? 영생은요, 너무 기뻐서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영생의 기쁨은 빼앗기지 않아요. 모든 육의 시공간을 능가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능가해야 돼. 믿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물이 아니요, 나는 피가 아니에요! 성령은 나에 대해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고정된 분,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죠. 여기 물이라 하는 것은 물세례를 말해요. 예수님은 물로서도 임하고 십자가 피로서도 임했다. 물로서도 임하고 피로서도 임했다. 이게 물세례고 피세례인데 그것은 예수님은 실제로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물세례에 들어가고 심지어 피를 흘려냈다 이 말입니다. 피를 낸 거예요. 그런데 그 피에서 피가 나에게 영생이 된다는 사실은 나의 육으로 인하여 막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쉽습니다. 지금 방금 생각한 건데요. 예수님이 정상입니까, 내가 정상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는 내가 정상이에요. 예수 믿는 내가 정상이에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내가 정상이 아니에요. 내가 정상 같으면 피 믿으라는 말씀만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피를 흘렸다 하잖아요, 피를. 피를 흘렸다고요.
피를 흘리고 피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믿을 위인들이 아니에요. 그다음 누가 있어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피 흘린 분 따로 있고 성령은 따로 있어서 성령이 움직여서 나로 하여금 피로 확정되었음을, 영생 주었음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공로는 뭐냐? 예수님이고 예수님께 나온 성령께 공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 기쁨의 공로는 그분께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건드려도 별 거 없다가 나 건드리면 우리는 가만있지 않죠. 그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우리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그게 육이니까 그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야 돼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영생 준 기쁨은 소실되지 않아요. 마모되지 않아요. 왜? 난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좀 뻔뻔하죠. 아직 멀었어요. 뻔뻔함의 극치는 아직 멀었어요. 살아가면서 계속 그 뻔뻔함은 더욱 더 커져야 됩니다.
이제 끝으로 에베소서 3장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17절부터 설명해드릴게요.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서 설명해드릴게요. 3장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어있죠. 이 믿음, 우리한테는 이런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찾아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 거예요. 우리 허락도 없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차출해서 우리 안에 주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오시면 바깥으로 어떤 새로운 변화, 예상도 못한 다른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그 현상이 뭐냐?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게 되어 있죠.
터키 여행가면 단골 코스가 있어요. 해 뜰 때 벌룬, 열기구 풍선을 띄우죠. 거기 탄 인간보다도 풍선이 얼마나 큽니까? 굉장히 크거든요. 너무 크다보니까 자기 자신이 작다는 것을 흔쾌히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나에게 내 인생에 일어난 일은 시답잖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믿음의 풍선이 그렇게 부풀어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 살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에게 더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서 시답잖고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늘 시달려야 되겠죠. 전에는 ‘아이고, 이거 심각하다. 나 칵! 죽어버릴까? 이렇게 사는 게 뭐냐?’ 온갖 것을 시공간 속에서 다 겪게 해요. 육이니까. 겪게 하면서 내가 얼마나 나만 지독하게 믿고 내 이익만 지키는지 느끼면서,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는 이걸 겪게 해요.
이게 과정이구나. 칵 죽어버릴까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고 얼굴이 막 침울해가지고 어두워진 그것도 풍선의 헬륨가스, 사랑의 헬륨가스를 부풀게 한 그 과정이구나. 나의 이 육적인 못남 없이는 부풀지가 않아요. 날마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튀르키예 풍선보다도 날마다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풍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딱딱한 내 속에서 나를 자아를 내가 지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의 생각조차도 믿음이 오고 성령이 오니까 반드시 일어나야 될 하나의 절차요, 과정인 것을 깨달아서 나를 작게 여기고 아무것도 아니게 여기고 주님만 크게 느껴지는 우리의 남은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