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인간 배제

아빠와 함께 2026. 5. 17. 08:35

서울강의20260514a 요한일서 5장 16절(인간 배제)-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죄가 두 종류가 되었어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있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이 구절을 인간이 어떤 식으로 이용할 거냐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이걸 이해하고 해석할 거냐? 한번 적어볼게요.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이 둘을 인간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데 인간들이 이것을 구분할 재주가 있다면, 1번-사망에 이르는 죄, 2번-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이렇게 구분된다면, 인간은 어디를 선호하겠어요? 2번에 희망을 걸고 뭐 원 없이 성깔대로 고!고! 죄 지을 거예요. 백날 죄지어도 사망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안심 푹 놓고 죄를 지을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보는 어떤 심보냐? 이 성경구절,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인간이 눈으로 봤다. 쳐다봤다. 쳐다보고 샐쭉 웃는다 이 말이죠. 이 구절을 보면서 자기에게 끌어당길 때 여기서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해석’이 주어지죠. 이 해석에 기대하는 것, 이 해석에 대해서 ‘어떤 뜻으로 이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인간의 그 심보는?

성경말씀을 대하면서 성경말씀을 정보로 보고 그 정보, 성경말씀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는 식으로 수용하겠다는 그 심보는 출발점이 어디냐? 자기로부터 출발하죠. 자기로부터. 그런데 어제 수요일에도 했지만 창세기 3장 7절에 이미 인간의 눈은 밝아버렸죠. 인간의 눈이 밝다는 말은, ‘인간의 눈은 절대로 밝아서는 안 된다’는 그 시절을 인간은 이미 배제해버렸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싶어서 덤벼드는 거예요. 누가?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제끼고,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 자리에 자기가 있어서 그다음에 뭘 하느냐? 말씀을 보면서 그것이 나한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해석을 하게 되어버려요.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나’다 이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이 점을 잘 아셨습니다. 아시고 난 뒤에, 마태복음 17장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마태복음 17장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아, 여기 보면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그러면 예수님을 보여준 분이, 하늘에서 음성이 나타났으니까 하나님 아버지잖아요,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제시할 때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죠. 그러면 출발점이… 그때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누가 같이 보여야 돼요? 변화산에서 옆에 있던 모세도 보여야 되고 또 엘리야도 보여야 되는데 셋 중에서 모세, 엘리야는 잠시 등장했다가 그 무대에서 사라지고 누구만 보였어요? 예수님만 보였죠.

그러면 출발점이 모세이어야 합니까? 아니죠. 그럼 출발점이 엘리야여야 합니까? 아니죠. 모세부터 출발하는 것은 바로 율법에 대한 인간의 해석입니다. 모세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모세가 되는데 우리도 될 거야.’ 이러한 생각, ‘엘리야가 된다면 우리도 될 거야.’ ‘그럼 우리가 모세와 엘리야처럼 된다면 우리는 천국갈 수 있어.’라는 그 심보가 바로 ‘내가 여기 있다’를 스스로 포기 못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를 전제로 깔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해석해버리면 그 해석은 결코 그 선에서 못 넘어가는 거예요. ‘예수만 보이더라’는 그 상황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만 보이려면 성경말씀과 해석의 출발점이 인간이 출발점이 아니고, 예수만 보였으니까 예수로부터 해석과 모든 것이 새로 나와야 되겠죠.

그러면 과정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는 이 성경을 안다’는 과정, 그다음 과정은 ‘예수님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것을 경유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말은 ‘‘나는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 다시 말해서 구원 받는 거죠, 천국 가는 거죠 - 천국 가기 위해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내 생각이고, 그렇다면 예수님만 보인다고 했으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을까?’로 넘어가야 돼요.

넘어가면? 예수님한테 마이크를 넘길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하고 마이크를 넘길까요? 마이크를 넘길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예수님의 본모습을 다 드러냈기 때문에 ‘예수님, 잠깐만요. 예수님의 의견은?’하고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에요.

진짜 예수님은 우리 인간 손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심판의 골이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주 알기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나를 부숴버려요. 나를 부숴버리면 내가 조각조각 나겠죠. 그 조각조각 난 것을 다시 긁어모아서 예수님께 갖다 붙여서 천국을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부서지지 않는 한 나는 천국의 부분으로서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만 보이더라’와 ‘내가 여기 있다’ 사이에 경쟁이 붙어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을 죽였고 주님께서 “너 나 죽였지? 그렇다면 너의 본색은 드러날 대로 다 드러났지? 거기 가만있어. 내가 너의 모든 자아를 부숴줄게.” 그리고 망치로 아주 빠작빠작 부수는데, 그 부수는 무기가 뭐냐? 말씀이에요. “내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말씀으로 우리를 조각내버려요.

조각내버리면 내가 나 좋으라고 해석했던 것이 하나의 부스러기가 되어버려요. 부스러기가 되면서 부서진 부스러기가 스스로 자동적으로 힘을 모아서 이걸 다시 나로 조립할 수 없습니다. 이거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T1000이 하는 거예요. T1000 알아요, <터미네이터2>에? 분명히 죽였는데 액체 로봇인 지가 알아서 액체 금속이 뭉쳐져서 또 나오잖아요.

말씀은 우리를 부수는 용도에요. 망치. 부술 때 그냥 안 부서져요. “너의 해석을 나한테 해봐.” 이런 소설도 있었고 그런 영화도 있었어요. 제목을 적어볼 텐데 무슨 뜻인지 풀이를 해보세요.『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 장정일). 아, 옛날 소설이죠. 내게 거짓말을 해봐. 다른 말로 하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말을 걸어봐. 하나님이나 예수님께 말을 걸어봐. 전부다 거짓말인 것을 내가 들통낼게.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툭, 우리에게 던집니다.
“읽어봤지?” “예.” “그거 읽어보고 너의 소감을 나한테 이야기해봐.” 그러면 우리는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이렇게 해석해요. “죄에는 두 가지 죄가 있는데,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고 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게 무슨 뜻인데?” 물으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죄 지어놓고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이러면 용서가 되고, 어떤 죄는 ‘잘못했습니다.’ 회개해도 용서가 안 되는 죄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는 거예요.

땡-! 그게 틀린 거예요. 왜 틀렸죠? 뭐가 누락되었죠? 아시는 분? 이거 모르면 진도 나가기 곤란한데. 성경 그대로 읽었는데 이 해석이 뭐가 잘못되었어요? 뭐가 누락된 겁니까? 빠져있는 겁니까? (십자가.) 그렇죠! 아, 이거 난 모를 줄 알았는데… 십자가 사건. 인간 대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이 있다. 창세기 3장 24절, 하나님에 의해 낙원에서 추방되었잖아요.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누락된 거예요.

너희들이 어떤 해석을 하든 인간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만든 그 인간형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추방되었을 때 어디로 추방되었습니까? 낙원이 아닌 곳으로 추방되었죠. 다른 말로 하면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추방되었고, 심지어 생명나무를 찾아오려 해도 하나님 쪽에서 적극 거부하는,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침범을 못하도록, 생명나무를 따먹을래야 절대로 따먹지 못하는 그 지점으로 추방했다 이 말이죠.

그 추방당한 인간들이 요한일서 5장 16-17절을 해석할 때 내놓는 해석은 그냥 언어 그대로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죠. 제시할 때 주님은 땡-, 그 해석이 틀렸다는 거예요. 글자 그대로 했는데 틀렸다는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주님, 내가 어떤 해석을 해도 그 해석과 무관하게 나는 잘렸습니다. 나는 천국 갈 위인이 못됩니다.” 그 고백이 나와야죠. 그래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살아날 것 아닙니까.

자, 율법, 구약의 말씀입니다. 율법을 주신 취지는 여러분 아시죠,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을 주신 취지는 특히 로마서 5장에… 여러분, 이 이야기 들으면 진짜 기절합니다. 분명히 성경에 있는데 그동안 성경을 보면서도 보지 못한 것을 안 보고 넘어간 게 있어요. 성경을 그대로 봤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은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빠뜨리고 싶은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로마서 5장 20절입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너무 충격적이고 너무 놀라운 구절이라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다.” 거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범죄를 더하기 위함이다.” 모세하고 한판 붙었던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 만나기 전에 그렇게 죄지을 마음이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는 그가 모세를 만난 순간부터 추가적인 범죄가 계속 쌓이고 쌓이게 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법은 뭐냐? “저 착실하고 죄 안 지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 너 더 맞아야 되겠다.” 율법을 줌으로써 지은 죄가 발각되는 게 아니고, 없던 죄도 주께서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더 부어주는 거예요, 죄를.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행동을 조심해서 있는 죄도 용서받고, 혹시 무의식적인 죄는 회개하면서 있는 죄가 나라는 평지, 나라는 지평 위에서 죄 부분의 퍼센트보다 그것을 반성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받은 의로운 퍼센트가 많아짐으로써 시커멓고 붉은 그 죄의 색깔이 서서히 하얗게 달라지는 그 광경을 우리는 상상하고 기대합니다. 착실한 만큼 우리는 보다 더 착해진다는 그러한 기대감.

그런 작자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죠. 거기에 매진했던 자, 탈무드나 여러 가지 율법해석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의가 과거보다 점점 더 증강되는 그런 것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죠.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너희들이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어디를 못 가요? 천국을 못 갑니다. 천국을 못가요.

그러면 내신 1등급 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천국을 돌파했습니까? 그 바를 넘어섰어요? 요한복음 8장에서 그들은 악마 자식의 선봉장이에요. 가장 악마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누구든지 바리새인, 사두개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을 못 간다 해서 마치 제일 착한 사람의 반열에 앞장 선 사람이 사두개인,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생각되는데 그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바리새인처럼 우리가 그렇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아니면 그 누구도 아무도 천국은 넘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천국은 인간으로서는 넘보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창세기 3장 24절,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못 따먹게 철저하게 철벽수비를 하는 그 취지입니다.

그럼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함이죠. 죄를 더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네가 알아서 자백할래? 수사 당할래?” 이걸 물어요, 율법으로. ‘죄인은 고개를 들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죄인은 고개를 들라. 어명이다. 사약을 받아라.” 장희빈은 “나 한약 안 좋아해!”하고 궁녀들이 사발 주면 던져버리고 주면 던져버리고. 그래서 여러 명이 입 벌리고 그냥 사약을 먹이는 장면이 영화에 나왔잖아요.

사약을 먹인 게 아니고 아가리 벌려서 뭘 먹입니까? 범죄를 먹이는 거예요. 범죄를 먹이는 그 근거가 뭐냐? 성경말씀 줬는데 주는 족족 빵점이에요. 뭐를 누락시켰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마땅히 지옥 가는 것이 주님의 조치에 부응되는 합당한 인간의 신세입니다.’라는 것이 우리 입에서 자백이 안 되는 거예요. 자백이 안 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주께서는 뭘 합니까? 수사에 나서야 되는 거예요. 자백이 안 되니까 수사에 나서는 거예요.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만날 때, 바로 왕은 점잖은 사람이에요. 범죄자가 왕 되고 이런 거 아니거든요. 그나마도 가장 윤리적일 때 왕이 돼요. 여러분, 민심을 잃어버리면 지도자의 자격이 안돼요. 한 달 뒤에 지방선거 있죠. 민심을 잃어버리면 권력이 흔들린다고요.

여러분 중에서 이 차이를 아는 사람 이야기해보세요. 헬리콥터의 비행과 거대한 여객기의 비행의 차이점은? 헬리콥터는 공기가 있어야 날아요. 그런데 큰 비행기는 공기 없어도 자체 내 연료에 의한 작용, 반작용의 힘으로 앞으로 날아간다고요. 큰 비행기는 공기 없는 높은 데서도 나는데 헬리콥터는 에베레스트는 못 올라가요. 있는 공기 헤친다고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윤리도덕이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기존의 공기가 있어야 헬리콥터 날잖아요. 인간 속에는 선과 악의 지식이 있는 조건 하에 인간은 헤엄치면서 ‘나 착하게 살래. 나 바르게 살래.’ ‘이번 일이 일어난 것은 이건 내 탓이 아니고 누구 탓이고, 이거는 내 잘못이 아니라 다른 데 원인이 있어서 내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헬리콥터 날 때 무슨 소리 납니까? ‘파닥파닥파닥’ 이런 소리 나죠? 인간은 마치 물에 빠져서는 헤엄쳐 살아나려고 파닥파닥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쟤는 나보다 못하고, 쟤는 나보다 착하지만 노력하면 쟤만큼 따라갑니다. 윤리적인 내신 성적은 내가 얼추 노력하면 됩니다.’하는 것. 자체적인 그 선악이라는 공기가 있어줘야 인간은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지 자체적인 자기 일기장에다, 회계장부에 장부 정리가 돼요.

그런데 비행기는 뭐가 없어요? 선악 자체가, 아예 공기가 없죠.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뭘 타고 애굽에서 나왔습니까? 뭘 탔습니까? 독수리죠.(4절) 독수리는 아주 높은 데서 날아요. 독수리에 어떻게 했어요? 독수리에 1번-매달렸다, 2번-얹혔다, 몇 번입니까? 얹혀서 가죠, 독수리에. 왜? 전적으로 무능하니까.

이 무능을 집어넣어서 여러분 해석할 수 있어요? 성경말씀에 대해서 무능을 집어넣어서, 그걸 탈락시키지 말고 무능을 집어넣어서 해석하면 어떻겠습니까? ‘주여,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말씀이 자아내는 현실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게 어제 수요설교에 나왔어요.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친히 발생시킨 일이고, 그 일에 대해서 내가 거기에 주제넘게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이건 제가 못합니다.’라는 것으로 끼어들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거는 독수리 날개에 업히는 게 아니고, 독수리 깃털 하나 붙들고 또 나름대로 파닥파닥 말씀대로 살겠다고 온갖 힘을 다 쏟으며 파닥거리는 그런 모양새죠.

자, 죄는 무엇인가? 말씀대로 못 사는 게 죄죠. 그렇죠? 그러면 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해서 이 인간세계에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낯선 언어가 동원되어야 되겠죠. 그럼 낯선 언어가 동원된 율법이라는 것, 말씀이라는 것, 계시라는 것 등 낯선 언어가 동원되지 않을 때, 문제 나갑니다, 인간은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압니까, 모릅니까? 답변해보세요. 압니까, 모릅니까?

(알아요.) 아휴, 세상에… 율법이 없어도, 교회 안 다니고 성경 몰라도 불교, 유교, 그리고 무교 이 사람들이 선과 악에 대해서, 정의와 불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안 합니까? 하잖아요! 왜 몰라요? 그들은 정의라는 걸 알아요. 불의를 안다고요, 나름대로. 이게 빠졌구나, ‘나름대로’. 나름대로 한다고요. 윤리도덕책이 뭐에요? 그거잖아요. 철학이나 윤리도덕책이 전부 그거잖아요.

그러니까 십계명이 있다면 십계명에 대해서 그들이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해요? ‘나는 지옥가야 돼. 나는 또 십계명을 보면서 내가 지옥 가는 이유를 찾아야지.’ 이렇게 보는 게 아니고, ‘나는 평소에 얼마나 착한지 이걸 말씀 앞에서 테스트 한번 해봐? 내가 어디까지 착할 수 있는 것인지 내 솜씨 한번 보여 봐?’ 이런 자세가 되는 거예요.

그럼 실제로 실습에 나서봅시다. 출애굽기 20장 보겠습니다. 하여튼 인간은 부서지길 싫어해요. 자아라는 게 계속 유지가 되어야 돼요. 20장에 보면 여기 쭉 십계명이 나오는데 20장 12절 봅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보고 여러분들께 의견을 물을게요. 15장 3절부터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장로들, 최고의 율법 준수자라고 자부하는 장로들이 유대나라의 계급 서열상 정신적으로 최상위에 위치해 있어요. 어떤 위력 때문에 그들이 최상위에 있다는 것을 일반 대중들도, 백성들도 인정하는 거예요? ‘착함’이죠.

인간들 수준으로 보기에 ‘우리보다 더욱 더 완벽하게 말씀을 지켜내기 때문에 우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의 해석이 인간 보기에 최고의 해석이다.’라고 자동적으로 힘을 실어준 거예요, 그들에게. ‘당신은 우리의 스승이 되어서 우리보다 더 훌륭하고 똑똑한 당신이 무지한 우리들을 가르쳐서 우리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천국에 가도록 지도자가 되어주세요.’

그럴 때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장로들이. ‘나는 당신보다 똑똑하니까 가르칠게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뭘 압니까? 하지만 위대한 조상들이 있습니다. 그 조상들이 어떤 식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하는지 전통이 있거든요.…’ 죽은 조상의 권위를 업어서… 그래야 겸손해지니까요. 자칫하면 ‘너 나이 얼마야? 너 인생 얼마 살았다고 나를 가르쳐?’ 이렇게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럴 때는 내 인생보다 더 권위 있는 죽은 조상들의 해석이 있어요. 해석을 하게 되면 전통이 생기고 그 전통에 의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안 나와 있지만 마가복음 7장 1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는 ‘고르반’ 이야기가 안 나와요. 고르반(Korban, קָרְבָּן)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 이게 뭐라고요? 장로들이 이 고르반이라는 전통에 의지해서 ‘나는 당신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라고 근거를 제시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말씀을 믿으면 이것이 곧 부모를 공경한 게 된다는 거예요.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있다면, 이 돈은 부모를 공경하는 그 말씀이 잘 되기 위해서 협조하는 의미로 내가 하나님께 헌금, 돈을 낸다면 그게 고르반이에요. 이 돈은 하나님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말씀을 위해서 바쳐지는 돈이다. 그러면 그 돈을 하나님께 어떻게 바치느냐? 일단 바쳤다는 것을 믿고 그 돈을 누가 사용하느냐? 내가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사용한다면 이것은 부모한테 현찰 안 내도 이미 하나님께 헌물을 바친 게 되고, 다만 사유권은 아직 나한테 유효하다.’라는 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실천에 옮겼다는 식으로, 전통적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해왔던 거예요.

여기서 그런 전통, 그런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이 누굴 죽였다 했어요? 예수님을 죽였죠. 그런데 이제 어려워요. 너희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이런 식으로 지켰다는 것으로 왜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지적하는 겁니까? 왜 말을 하는 거예요?

말에는 그 인간을 때려 부수는 망치가 달린 거죠. 지적을 하는 것은 ‘자백할래, 내가 수사 들어갈까?’하는 원칙과 똑같은 거예요. “너희들의 주장을 내가 그대로 이야기했다. 자,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고 그것은 계명을 해석한 그냥 전통이다. 그런 말을 하는 나를, 너희들 나를 어떻게 처리할래? 뭐? 죽일 거야? 내가 죽어줄게. 죽여줄게.”

그렇게 나올 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장로고 서기관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아, 예수님이 오시는 이유는 우리 인간들에게 핍박을 받아서 우리 인간들의 자기 잘난 체 때문에 죽으시러 오셨구나.’ 하는 것을 간파하면 되죠. 십자가란 사건을 결과적으로 볼 때 그게 정답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장로들은 쑥덕쑥덕 모의해서 ‘저 인간 언제 죽일까?’ 이렇게 했죠.

이게 뭐냐 하면, 십계명에 있는 ‘부모를 공경하라’를 바리새인들은 자기에게로 돌렸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방향 바꿔 틀어서 누구에게로 가져옵니까? 요한복음 5장 39절, 모든 말씀은 누구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내게(예수님) 대해서 증거하죠.

그러면 그 말씀이 예수님께 올 때는 예수님은 십자가 져야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가 성립되는데, 인간들은 예수님 빼놓고 인간에게 나오고 있는 철두철미한 해석집, 전통을 고수하면 이게 율법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을 자신감이 넘치는 거예요. 그리고 사울이라는 사람은 빌립보서에서 하는 말이 자기는 율법에 대해 흠이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어요.(6절)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는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율법에 대해 흠이 없다는 것이 내 몸에서 나올 때 그게 내가 몰랐던 나의 똥오줌이라는 거예요. 나의 배설물이었다.(8절) 누구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그동안 나는 분뇨로 꽉 차 있었던 거예요. 더러움으로 꽉 차 있었던 거예요.

 

서울강의20260514b 요한일서 5장 16절(인간 배제)-이 근호 목사


첫 번째 강의에 연이어 하겠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천국 찾아가기’와 ‘천국 되기’에서, 인간은 기껏해야 천국 찾아가기밖에 못해요. 천국 되는 것은…, 인간이 여기 있고 하나님이 저기 계시다면 인간은 방향이 천국 찾아가기밖에 못하지, 천국 되기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하는 거예요. ‘천국 찾아가기’에서 ‘천국 되기’로 노선을 바꿀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천국 되기’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요. 예수님을 보내서 예수님께서 ‘천국 찾아가기’ 인간들에게 살해당해야 천국이 되는 거예요. 인간을 지적하는 것에 하나님이 어떤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획은 한결같아요. ‘천국 만들기’입니다. 천국 만들기인데, 천국 만들기에서 인간이 배제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름이 있잖아요. 인간의 이름은 천국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천국은 주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만.

성경책에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70%는 주님이 지키고 30%는 인간이 지켜서 30% 지킨 사람이 천국에 합류되는 게 아니고, 어떤 인간도 말씀 지키는 데에서 인간이 배제되어야 돼요. 배제되고 남는 것은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내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다 지키러 오는 거예요.

지키러 오는데 그것이 산상설교잖아요. 산상설교 지킬 자신 있는 사람 손 들어봐요. 의도적으로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식으로 산상설교가 진행됩니다. 특히 산상설교에서 충격적인 것이, 인간을 배제하는 데에 가장 충격적인 것이 마태복음 7장인데요. 특히 목회자로 나선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움을 느껴요.

7장 22절,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는 사실은 본인만 아는 게 아니고 그 주변에 효과 본 많은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나설 수 있어요.

그런데 누가 봐도 귀신 쫓고 권능 행하고 말씀 전했으니까 누가 봐도 본인은 지옥 갈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천국 갈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천국 갈 거라 생각하겠죠. 그게 땡! 탈락이란 말이죠. 그것은 같은 엉터리 같은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속인 결과에요. 인간들의 호응이 있으면 구원 받는 겁니까?

몇 주 전에 그런 이야기했죠. 천국에서 받지도 않는데 왜 교회가 그 인간을 받아줘요? 하나님은 받지도 않는데 교회는 받아준단 말이죠. 교회는 왜 받아줍니까? 그 교회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있기 때문에 받아주는 거예요. 그럼 그건 동호회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칠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못해요.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해주세요.’ 이런 거.

어떤 말씀도 로마서 3장 말씀처럼 우리가 그 말씀을 지켜서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인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말씀과 율법을 준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에 말씀을 지키려한다면 그럴 때 누가 보입니까? 내가 자꾸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천국은 뭐냐? “예수만 보이더라”.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수님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주님의 존재로, 주님의 존재하심의 활동으로만 인간이 배제된 채 주님만 모든 것을 이룰 때 그 여파, 그 영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천국이 구현됩니다.

놀고 있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데려와 일꾼 삼았을 때, 노는 사람 불러줄 때부터 이미 천국은 시작된 거죠. 그러면 어떤 자가 천국에 최종 낙점이 되느냐? ‘제가 일했습니다’가 아니라, 그냥 불러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그걸로 모든 의미를 종결시켜버리는 거예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그걸로 모든 걸 종결시켜버리는 거예요.(롬 8:30) 거기서 우리는 내가 배제당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죠. 감사가 있어야 되죠. ‘내가 구원받는 데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를 반복시키면서 천국은 우리 안에서 구현시켜주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못했다’가 아니라. ‘그때 직장 다닌다고 바빴는데 내가 이제는 돈 좀 모아서 교회 나갈게.’ 지금 이런 기대조차도 하면 안돼요. 아무것도 못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일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헌금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전도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게 바로 납니다.’라고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재량이나 능력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없어요. 그게 없다고요.

인간을 배제하는 절정의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 초반부터 언급했었어요. 요한일서 봅시다. 지금 요한일서 5장하니까 1장은 다 아는 걸로 여겼잖아요?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제가 아까 옛날 지나간 소설 제목 이야기했죠.『내게 거짓말을 해봐』. 인간은 주님한테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거짓말쟁이에요. 거짓말해도 거짓말이고, 거짓말 안 해도 거짓말이고.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고. 죄 아닌 게 하나도 없음을 감사하는 사람, 그 사람이 주님의 인간을 배제한다는 취지에, 구조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저를 배제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이미 천국 구조에 들어온 거예요. “너 자백할래, 아니면 수사 당할래?” 이런 이야기할 때 그 피고는 알아들어야 돼요. “이미 저를 죄인으로 낙점했군요.” 그럼 이야기가 “다 이루었다”가 됐잖아요. 우리를 철저하게 죄인 만듦으로써 주께서는 천국의 근거는 이미 완전히 다 이루었어요.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자꾸 헬리콥터처럼 파닥파닥거리면서 죄인 안 되려고, 죄인이지만 쪼금 죄인-많이는 아니고, 죄인은 죄인이지만 회개할 줄 아는 죄인, 자꾸 이렇게 구실을 달아요, 구실을. 왜냐하면 용기가 없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이 되는 거기에 대한 용기가 없어요.

어제 수요일 설교 제목이 뭔지 혹시 아십니까? <놀라운 묘기>죠. ‘난 뭘 해도 죄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묘기입니까? 공중회전 세 바퀴 반 돈 것보다 더 묘기죠.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온 거예요. 내가 고백한 게 아니고 주께서 말씀 성취를 내 안에 잠입시키고 장착하니까 말씀 성취의 모양새로 그 자백이 나온 겁니다. ‘나의 모든 의는 배설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자, 그렇게 됐다면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까 이야기한 ‘부모를 공경하라’. 그거 찝찝하죠? 정답을 이야기할게요. 정답을 말씀드리죠. ‘부모를 공경하라’의 바른 해석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에요.

참 쉽죠? 이게 로마서 13장에 나온 거잖아요. 모든 율법이 있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마 수백 번 들었던 이야기에요. 탕자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비법은? 없어요.

그럼 탕자가 돌아왔을 때 가락지하고 잔치를 벌이게 된 이유는 순전히 누구의 의지였습니까? 그냥 돌아오기만 기다렸고 돌아와서 기쁘다는 아버지의 기쁨이죠. 그 아버지의 기쁨 앞에서 탕자는 괜찮은 아들이어야 돼요? 영원히 탕자이어야 해요? 영원히 탕자이어야 하죠. 탕자. ‘아무것도 아님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에 나는 계속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쭉 가겠습니다.’는 그 자백, 그 고백. 이 얼마나 귀한 겁니까.

이 귀한 것이 로마서 13장에 있는데 나중에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도장 찍듯이 한번 봅시다. 로마서 13장 8-10절입니다.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 율법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에요. 그 율법이 율법의 능력을 갖고 있는 그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예수만 보이더라’죠. 예수만 보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천국에 있는 모든 능력이 누구에게서만 흘러나온다는 말입니까? 보이는 예수님에게서만 흘러나오겠죠.

그리고 예수님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구름 속에서 나온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7:5) 변화산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있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사랑의 관계가 예수님이 말씀을 이룰 때 사랑의 보따리가 터진 거예요. 그 사랑이 터져서 선물이 되어서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그 외에 다른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하는 모든 계명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나를 주께서 사랑했다는 그것으로 사랑은 구현되는 거예요. 사랑은 구현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을 부부에 적용시켜봅시다. 부부에 적용시키면 되는데요. 아내가 하는 말이, “내가 바빠서 설거지해놓으라 했는데 설거지해놓은 꼬라지가 이게 뭐냐?”라고 할 때 남편은 어떻게 대답해야 돼요?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려고 했다.” 그러면 아내가 “열심히 한 게 이 꼴이냐?” 이렇게 되겠죠.

그럼 “설거지 이게 뭐냐?”라고 할 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돼요? “나는 설거지도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럼 아내는 어떻게 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게 남편보고 바가지 긁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아주 좋게 마무리 지어져야죠. 제가 예를 든 거예요. 실현 불가능한 예지만 예를 든 거예요.

제가 이런 예를 들 때,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했는데 저쪽에서 ‘그래, 앞으로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나올 경우에는 나만 손해가 아니냐?” 이렇게 되겠죠. 그럼 아까 처음에 한 전제는 깨져버렸죠.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고르반이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으면 나는 뭔가 된 것처럼 꼼수를 쓴 거죠, 꼼수. 그것 때문에 부인을 옆에 둔 거예요. 꼼수 쓰지 말라고.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다른 사랑이 더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자식 사랑, 부부 사랑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요. 그럼 옆에서 바가지를 긁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어디에 천착하고 어디에 의지하게 만듭니까? ‘역시 믿을 것은 주님밖에 없구나.’ 매달리게 만들죠.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5절).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원하지 않는 것.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단지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인 것 같은데… 사랑이나 옆에 붙어있는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거침없이 매일같이 죄를 쏟아낸다고요. 쏟아내는데 사랑을 이미 아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어요. 이미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이 말씀 요한일서 5장 16-17절이 실현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60514c 요한일서 5장 16절(인간 배제)-이 근호 목사


세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인간은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요. 전제가 아니고 반드시 그렇게 되죠. 주님이 온 율법을 다 이루는 데 있어서 인간은 방해물로 나서는 겁니다. 그럼 주님께서 인간의 방해를 피하고 제대로 주 아버지의 뜻대로 다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는 죄나 의 개념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독자적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죄와 의의 개념이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죄, 의 개념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새롭게 정립되면서 그걸 펼치는 겁니다. 펼쳐버리면 이 ‘죄’에서 뭐가 구성되느냐 하면 ‘지옥*’이 구성되고, 이 ‘의’에서 ‘천국*’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이 지옥과 천국은 기존의 인간들이 성경해석을 통해 알았던 지옥을 이 ‘지옥*’이 공격하고, 인간이 생각했던,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천국을 ‘주님의 완성된 천국*’이 공격하게 되죠.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이 ‘나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는 그런 생각이 없이 ‘내가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주의 말씀대로 준수하면 나는 율법도 지키고 구원 받는다.’는 전제에서 나온 천국과 지옥 있잖아요. 그것은 배후에 누가 그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나도록 조성했습니까? 누가 했습니까? 마귀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을 배제하고 누구와 싸워요? 인간은 배제하되 배제할 수 없는 원수가 있어요. 그게 누구냐? 악마입니다. 악마에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에게 사탄을 넘기길 허락했죠. 사탄은 아예 열두 제자 안에 스며들어 있어요. 안에 있다고요. 제자들이 붙든다고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안 죽으시는 게 아닙니다. 가룟 유다 때문에 십자가 죽을 수밖에 없죠.

예를 들어볼게요. 질문 던질 테니까 누가 답변해보세요.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죠. 만약에 남자가 먼저 선악과 따먹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일은 없죠. 이미 여자가 먼저 따먹은 걸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이 자기가 자기에게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역사나 성경말씀을 자기 쪽으로 생각하기보다 먼저 선수를 치는 거예요. 인간들이 성경을 가지고 이렇게 했으면 저렇게 했으면 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마귀와 상대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은 누구와 상대합니까? (여자의 후손.) 네, 남자의 후손과 상대 안 해요. 여자의 후손과 상대해요. 악마가 여자의 후손과 상대한다고요. 여자의 후손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다가 성령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새롭게 만들어버렸죠. 만들어버렸다는 자체가, 인간하고 상대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수립이 안돼요. 그런데 악마는 인간 뒤에서 자꾸 밀어붙이는 거예요. “네가 말씀 있잖아. 십계명 있잖아. 너 복음 있잖아. 열심히 해봐. 네가 구원될 거야. 누가? 너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네 구원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뒤에서 자꾸 부추겨주는 거예요. 누가요? 악마가.

그래서 주님이 밝혀내신 죄라는 것은 악마의 품성이에요. 악마의 품성과 본성, 추구하는 것, 이게 죄입니다. 이게 죄에요. 의는 이 죄를 정죄하는 게 의에요. 악마의 품성과 자질과 본질을 정죄하는 게 의에요. 그래서 ‘주님의 의는 인간의 의에 대해서 공격적이다.’ 이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뭐냐 하면 선물입니다. 사랑은 거저 주는 거예요. ‘사랑은 선물이다.’ 만약에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는데 ‘사람이 산다’는 조건에 다 골고루 주게 되면 그건 선물의 가치가 떨어져요.

그런데 차별화 되어서 어떤 사람한테는 선물 놓고 가고, 어떤 사람한테는 선물 안 놓고 가고 이렇게 될 때, 받은 사람은 이게 뭐가 돼요? ‘와, 역시 내가 노력했더니만 상을 주는구나.’ 이런 발상이 아니고 ‘왜 이게 나한테 오지?’ 선물이죠. 그 사건이 유월절 사건이에요. 이스라엘 히브리 백성인데 조건이 있어요. 내가 뭐를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선물 주기 전에 인간이 선물을 요청할 수 있는 나 자체가 아예 죽어버리게 하는 요소, 능력이 바로 주님이 주신 선물 안에 들어있는 요소가 되는 거예요.

어린 양을 왜 잡아요? 자기 집에서 친하게 지내던 어린 양을. 여러분 집에 있는 개 잡을래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 옆에다 발랐다는 말은, ‘우리의 기둥 되는 맏이는 우리 집안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표시를 했다고 일방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해석한 거예요.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히브리인들은 그냥 모세 시키는 대로 양 잡고 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다, 이렇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 유월절 어린 양의 취지가 이스라엘 역사가 망하고 난 뒤에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러 오셨다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 선물을 주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지옥가야 돼요. 지옥가야 되는데 지옥가야 될 악마를 공격해서 물리쳤을 때 물리친 결과가 뭐라 했습니까? 의라 했죠. 악마에게 승리한 결과가 뭡니까?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의. 그러면 죄와 의가 주님에 의해서 이미 확립되었죠.

그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아까 헬리콥터와 높이 뜨는 비행기와의 차이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비행기는 자체적인 연료로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방향을 정해서 앞으로 날아간다 했죠. 그러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의의 작용에 의해서 우리는 이 의의 작용을 확립하신 주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비행기가 되어 날아가는 거예요. 앞에 공기가 없어도, 나의 윤리도덕 없어도 내 자체적으로 완전하게 다 확정된 죄와 의로 날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누락돼요? 나의 구원은 있어요, 없어요? 없고 우리 자체는 주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에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생명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용서될 수 있는 죄와 용서되지 못하는 죄가 우리 성도한테는 자각되는 결과가 선물로 주어졌다 이 말입니다.

자, 이렇게 제가 강의했잖아요. 강의했죠? 그럼 물어봅니다. 생명(사망)에 이르는 죄와 생명(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뭡니까? 물어보면, 그 차이가 뭐지? 성경에는 있으니까,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성경에 있으니까 그 차이를 알아야 된다 그 말이거든요. 차이가 뭘까요? 실컷 이야기해도 물으니까 막상 답변이 궁하죠.

그럴 줄 알고 제가 여기서 그림 하나 그리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순환구조에요, 순환구조. 의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아버지께 버림받았죠. 저주받았잖아요. 의가 죄 되고 다시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의 의로 갔죠. 의→죄→의, 이 순환구조가 주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껍데기 같은 우리의 인생이 의에서 죄, 죄에서 의가 순환구조로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육신이 살아있는 한 예수님의 부분, 예수님의 지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 차이를 우리의 한평생을 통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저주받은 죄를 지셨다는 것은 육신에 죄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지은 죄는 아니지만 백성들의 죄를 대신했기 때문에 여기서 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굉장히 고민도 하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셨죠.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했다고 예수님이 부활 안 되었습니까? 아버지 재회 못했습니까? 했잖아요.

그러나 겟세마네 기도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다음 나온 말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했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이 성경구절이 성도한테는 그 안에 장착이 돼요. 그럼 성도는 예수님이 고난 받던 이 세상에 살면서 수난을 받죠.

수난을 받으면서 고민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이 있으니까. 마귀가 우리를 자꾸 부추기잖아요. ‘너 행복 안할 거야? 너도 구원받아야지.’ 마귀가 자꾸 우리를 들쑤셔가지고 ‘네가 그래가지고 구원받겠어? 더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부추긴다 이 말이죠.

그럼 ‘아휴,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감사 날아가죠, 기쁨 날아가죠, 받았던 선물 다 잊어버리죠. 남은 것은 오기밖에 안 남은 거예요. ‘하나님이여,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왜 저한테 이런 시련이 옵니까?’ 이런 거. ‘왜 금목걸이는 잃어버립니까?’

그런 시련들이 오는 거예요. ‘내가 왜 그런 실수를. 내가 그런 잘못을 왜 했을까?’ 이게 목걸이처럼 죄와 의가 한 목걸이로 안 달려있으면 거기서 탈락되는 거예요. 주께서 마귀 사람을 탈락시키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았는데 교회에서 사람을 받더라 이 말이죠. 격려해주고. 그런데 주님 쪽에서는 안 받죠. 교인들에게 신앙의 대장이라고 해도. “네가 뭐 목회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강의를 다녀? 나 너 모른다.”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나 모른다 할 때에, “잘하셨습니다!”하고 끝나는 문제에요. 왜? 주께서 이 순환구조, 나를 배제하고 주께서 장착시킨 이 선물은 기어이 선물이 의에서 어디로 가게 해요? 결국은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의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욱 더 많이 알 때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죠.

그게 에베소서 3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대목에서 17절, 잘 들어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오늘 강의 실컷 들어도 또 무효 되면 곤란한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할 때,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여, 제 마음에 찾아오시옵소서.’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땡이라 이 말이죠. 그게 탈락자라 이 말이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이 말씀을 우리를 통해서, 껍데기, 아무것도 아닌 나를 통해서 이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19절, 사랑의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고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지금 말려든 거예요? 한번 사랑받으면 사랑이 그걸로 땡입니까? 아니죠. 이 몸이 살아있는 한 점점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충만함이 넘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예상했어요, 예상 못했어요? 예상 못하죠. 그러니까 성도는 맨날 실패하면서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의가 내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새롭게 새롭게 나의 충만함을 알려주는 데서 기쁨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걸 성령의 열매라 합니다. 10년 전의 열매, 그거 안돼요. 그건 지나간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는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시달리고 좌절하고 절망으로 ‘나는 끝났어, 끝났어. 나 지옥이야.’ 하는 그 순간을 말씀 자체가 경유하게 만들어요. ‘주님의 의’라는 목걸이에 우리의 10대, 20대, 30대, 40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꼴이다 이 말이죠. 나 이제 말씀 알았으니까 정신 차리고 바르게 한다고요? 바르게 안돼요.

아까 받은 것 가사 한번 봅시다. 오늘은 이태리어입니다. 푸치니의 단막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에요.

[O mio babbino caro]-내 사랑하는 아버지-

O mio babbino caro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Mi piace è bello, bello
저(한테)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Vo'andare in Porta Rossa
포르타 로사에 가서
A comperar l'anello!
반지를 꼭 사고 싶어요
Sì, sì, ci voglio andare!
네, 그래요 정말 가고 싶어요
E se l'amassi indarno
제 사랑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그러니까 제일 초반을 보세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 했으니까 그 뒤에 것을 모른다 치면 이건 아버지를 공경하는 내용처럼 그렇게 짐작하겠죠. 그런데 실제로 그 다음 내용을 보면 공경하고는 완전 상관이 없어요. ‘제 사랑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협박 들어갑니다.

Andrei sul Ponte Vecchio
차라리 베키오 다리로 가서
Ma per buttarmi in Arno!
아르노 강에 몸을 던지고 말거예요
Mi struggo e mi tormento!
정말 고통스러울 거예요
O Dio, vorrei morir!
오 이런, 저는 반드시 죽고 말 거예요

누가 고통스럽단 말입니까? 본인이 고통스럽단 말입니까, 아버지가 고통스럽단 말입니까? ‘아버지가 고통스러울 거예요. 오 이런, 저는 반드시 죽고 말 거예요.’ 이 노래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보세요. <내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공부한 것을 다시 한번 여기 비춰보면 인간은 누구 위주다? 철저하게 자기 위주다.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너는 시체인데 마귀가 있다. 마귀가 관리하는 육신이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이 마귀에 속한 나를 주님께서 자기의 십자가 선물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하느냐’ 이거 아시면 오늘 합격입니다. PASS에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누가 주체입니까? 주님이,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죽을 때까지 철저히 사용해주시는 데에 대해서 멈출 수 없는 고마움과 감사. ‘주여, 제가 뭔데 주께서 주님의 다 이루심에, 사랑에,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에, 의에 저를 넣어주시고 활용해주십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받거나 지옥 간다,가 아니라 지옥과 천국은 주께서 탈락시키면 지옥, 주께서 탈락 안 시키면 천국. 이 일을 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 그게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지혜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놀라운 묘기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게.

그래서 교회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주님이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을 교회에서 안 받아주는 식으로 나가야 되겠죠. “이래도 교회 나올래요? 이래도 계속해서… 야, 끈질기네. 아직도 교회 나오십니까? 교회 나오긴 나오는데 인상이 좀 더럽네요. 뭐 짜증나는 일 있습니까? 다음 주엔 안 나올 인상을 하고 계신데.”

어차피 천국과 지옥은 누가 다 이뤘어요? 결정해놨어요? 주님이 이미 창세 전에 결정했잖아요. 누굴 배제한 채? 나를 배제한 채. 그 배제를 거꾸로, 나중에 일이 끝나고 난 뒤에 구원받고 난 뒤에 그 배제의 취지를 감사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철저하게 배제시켜주신 것에 대해서 참 일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떤 처녀가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한테 이런 협박조로 이야기할 때,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처녀가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열두 살 때 아버지한테 이렇게 협박했습니까? 안했죠. 나이 들어 결혼할 때 돼서 사랑하는 사람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 성향에 좀 반대될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이런 협박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그 여자가 스물다섯 살에 그 남자와 결혼하려 했다면 그 여자는 25년까지 자기가 아버지한테 어떤 태도를 가질지에 대해 그동안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의 사태입니다. 사건입니다.

권사님 팔십 넘었잖아요. 팔십 오년 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겠어요? 모르죠. 그 사건은 누가 일으켜요? 주님이 일으켜요. 어떻게? 너의 구원은 너의 행동하고 아무 상관없이 주님이 미리 너에게 주님의 순환코스를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좀 쉬어가는 타임으로 노래를 들어봅시다. 어떤 노래인지. 우리나라 소프라노 김순영 씨가 불렀어요. 노래 참 잘 하죠.

아까 했던 것 다시 확인 들어갑니다. 우리가 ‘천국 찾아가기’입니까, ‘천국 만들어지기’입니까? 천국 만들어지기에요. 지금껏 우리가 ‘~하기’로 살았잖아요. ‘~하기’가 아니고, ‘~되기’에요. 뭐가 되는데? 내가 말씀되기. 또 다른 말로 하면, 사랑되기. 사랑되기에 대해서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확정된 사람에게 성경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탈락자를 가려내야 되니까.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여러분 다 외우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뭐가 주어집니까? 교회 몇 년 다니고 집사, 장로 소용없어요. 누구든지 과거에 좀 사랑했다, 그거 소용없고 누구든지 지금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가? 저주를 받는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단 말이죠.

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것은 탈락자와 탈락되지 않는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에 대해서 기쁨과 감사가 오는 사람은 합격이고 ‘열심히 사랑하려고 애쓸게요.’ 이런 사람들은 지금 바리새인하고 똑같이 됐죠. ‘~하기’가 아니고 “이 말씀이 납득이 되고, 이 말씀은 사람의 머리에서 안 나온 주의 말씀, 진수라는 것을 네가 딱 느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또 ‘저는 느껴요!’ 이렇게 되면 시비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느낍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본인이 이미 알아요. 우리 속에 있는 성령께서 ‘이것은 내가 할 일이 내 안에 남아있지 않고 주께서 하실 일만 나라는 것을 구성했구나.’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러면 우리의 남은 일은 주님의 가신, 당했던 고난과 그 서러움 있잖아요. 그런 비난, 특히 억울함, 곡해. ‘너는 왜 남들에게 너의 잘난 장기를 발휘하지 않느냐’는 이러한 기존 사회에서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주춤하고 소극적일 때 그때 남들에게 날아오는 그 비난. 그게 우리에게 슬픔이 될까요, 안 그러면 반대로 기쁨이 될까요?

처음에는 뭐가 되겠어요? 짜증이 확 올라오죠. ‘주님, 뭐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하다가 성령의 순환구조니까 이미 하나님의 의가 왔는데 우리는 그걸 뭐로 느껴요? ‘아, 내가 또 죄지었구나.’ 죄로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는 다시 의로 순환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될 마귀의 본성을 배설물로 내놓는 계기가 되면서 나중에 추후에 다시금 반복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거저 받은 선물로 사랑으로 사랑의 사람이 되었구나.’ 또다시 그걸 반복해서 되풀이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 지키기’가 아니고 ‘말씀되기’죠. 말씀이 되면서 ‘말씀 지키기’가 주님의 안목으로 새롭게 성립됩니다. 처음에 ‘말씀 지키기’는 실패로 끝나고 ‘주의 말씀되기’가 되면서 ‘말씀 지키기’로 나가는 거죠.

부산강의에서 했던 것 잠시 해보면 제가 부산강의하면서 이거 참 너무 중요하다 생각되어서 다시 한번 거론합니다. 부산강의에서 모든 인간은 유신론자거든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잖아요. 로마서 1장 21절, 하나님을 알죠. 유신론자가 뭐로 바뀌어야 돼요? 무신론자로 바뀌죠.

왜냐하면 내가 알았던 신은 우상이며, 내가 믿는 신은 예수가 되었든 삼위일체가 되었든 무조건 뭐가 돼요? 우상이에요. 그 원인은 뭐겠습니까? 말씀이 잘못된 게 아니고, 원인은 내 속에 구원에 대한 탐욕이 있었던 거예요.

내 자신에게 문제 있는 걸 모르고 ‘하나님 믿으라 해서 믿고, 예수 믿으라 해서 믿고, 피 믿으라 해서 피 믿고, 언약 믿으라 해서 언약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믿었다.’ 그래서 뭐? 유신론자에서 무신론자로 전락하면서 다 믿었는데 결국 남는 것은 예수 믿는 ‘나’가 그대로 배제되지 않고 남은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님의 성령이 역사해버리면…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성령이 와요.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성령이 온다고요. 그러면 성령 안에는 뭐가 있습니까? 인간의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성령의 선물로 구원받는다고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잖아요.

2절,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그러면 듣고 믿으면 되잖아요. 듣고 믿어봤자 그건 믿는 주체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그건 성령으로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3절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말씀을 딱 들으면 탈락자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이 선물을 잘 지키는 용도로 내가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나오겠죠. 그게 탈락이죠. 왜 탈락이냐 하면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은 결국 육체로 마칠 리가 없음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안 믿어지니까 누가 열심히 개입되어야 돼요? 성령으로 주신 것에 내 열심이 거기다… 90% 주님이 한다면 10%는 누가 해야 돼요? 내가 나서야 안심이 된다는 말은 이건 마귀의 종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의 의와 사랑과 구원, 영생은 완전히 우리를 배제하고 줬는데 마귀의 습관이 있는 우리는 그걸 마중 나오면서 계속 뭘 섞어 넣어요? 내 행함, 그 행함도 자꾸 통밥을 굴리는 거예요. ‘나는 부족합니다. 내 행함을 나는 저주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건 행함 아닙니까? 그것도 행함인 거잖아요.

이걸 집어넣는데 이걸 집어넣는 것이 꼭 필요해요. 왜? 집어넣으면서 아, 죽었다고 여겼던 내가 펄펄 살아있다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를 새롭게 아는 데에 활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또 활용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성경의 어떤 말씀도 벌벌 떨 말씀이 하나도 없어요.

어디 뭐 숙제합니까? 백 문제 내놨는데 두 문제 풀고 나머지 구십 여덟 문제 못해서 나머지 공부한다고 마지막에 남은 구십팔 문제가 다 채워지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이 모든 성경말씀을 십자가 안에서 사랑받은 자로 보게 되면 이 성경은 나를 이용해서 내가 주체가 아니라 주께서 이 말씀이 말씀대로 실현되도록 나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기쁘게 느끼도록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조금 전까지 그래요. 카메라 꼬라지하고는, 이런 식으로. 카메라 고장 안 날 때는 몰랐는데.

그러니까 아까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아버지한테 협박한 여자는 자기가 결혼할 남자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 아버지를 이용한다든지 하는 건 아이고, 딸로서 그럴 리 없어. 내가? 아이고, 나도 양심이 있고 적어도 윤리도덕 알고 가정교육 잘 받았는데.’ 했는데,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 모습 아닙니까.

조금만 더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다시 봅시다. 자꾸 걱정이 돼요, 또 무슨 뜻인지 모를까봐. 요한일서 5장 17절, “모든 불의가 죄로되”. 동의되죠? 모든 불의가 죄라는 말은 아까 요한일서에서 죄 없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거잖아요(1:8). 그래서 모든 것은 죄죠. 맞잖아요. 이건 뭐 동의가 되면서 기쁘죠.

그러니까 죄인 주제에 구원받겠다, 이게 뭡니까? 죄잖아요. 구원받는데 나의 착함을 동원해서, 내 믿음을 동원해서 구원받겠다는 이게 뭡니까? 죄죠. 죄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그다음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하는데 인간이 사망을 압니까, 몰라요? 인간이 아는 사망은 사망이 아닙니다.

죄든 의든 천국이든 지옥이든 사망이든 누구만 독점하고 있습니까? 주님만 독점하고 있어요, 주님만. 주님만 독점하고 있어서 이 말씀을 지키려 하면 우리는 뜻을 알아야 지키죠, 못 지키거든요. 못 지키는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는 이 말씀을 남아있는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앞으로 주께서 알려줄 거예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제 복음 알아서 죽음을 이긴다 했는데 막상 “3개월 남았습니다.” 권위 있는 의사가 그런 이야기할 때, ‘나는 기뻐. 기쁜데 왜 이리 슬퍼, 갑자기? 난 복음 아는데 무서워, 정말.’ 그걸 경유하셔야 돼요. 복음을 아는 내가 나의 승리로 마감되면 안돼요. 마감되면 안 됩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생각해봅시다. 요한복음, 어제 수요일에 했는데 제가 길게 못했어요. 요한복음 16장 이거하고 여러분한테 테스트합니다. 테스트 안하고는 못 견디겠어요, 제가.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가 너희에게 뭐로 주어지느냐? 두려움이 없고 평안함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묻습니다. “평안합니까, 주님이 이겼는데? 평안하십니까?” 그럼 우리는 일단 성경말씀이니까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평안합니다.” “언제?” “오늘.” “몇 시에?” “8시 4분에 평안합니다.” “그래?” “한번 두고 볼란다!”

그럼 내일 되어가지고 무슨 대목이 나오느냐? “환난을 당하나”의 대목이 와요. 환난을 당하나. 분명히 오늘은 환난이 없다 했는데, 환난을 당할 때, 환난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주님이 당했잖아요, 환난을. 주님의 환난에 우리가 참여되어야 돼요, 안 되어야 돼요? 중간에 빠지면 돼요, 안돼요? 안되죠.

주님이 당하는 환난을 겪게 합니다. 환난 겪으면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나의 구원에 나의 의지나 나의 이성적인 생각이, 나의 감정이 배제되어야 되는지를, 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지를 환난 중에서 기쁨으로 우리에게 제공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있죠. 말씀이 살아있어요. 나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나는 말씀을 지키게 된다.’에요. 여기서 ‘나’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활용해서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영화는 들의 꽃같이 피었다가 사라지지만, 모든 것은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하리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리라”(사 40:8) 주께서 이루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주제파악도 안된 채 생명나무도 못 따먹어야 마땅한 주제에 감히 건방지게 천국이 어떠니 지옥이 어떠니 마구마구 지어냈습니다. 이제는 환난 가운데서 정말 천국을 새삼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일방적인 선물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서울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과 말씀의 만남  (1) 2026.04.19
넘어온 생명  (0) 2026.03.15
세 가지 세례  (1) 2025.12.13
고정된 영생  (1) 2025.11.16
사랑의 중첩  (0) 2025.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