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51016a 요한일서 4장 18절(사랑의 중첩)-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4장 17절, 18절, 19절 보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거기까지 일단 보겠습니다.
사랑을 언급하면서 심판날을 전제로 하고 있죠. 17절에는 심판날을 언급했고, 18절에는 두려움+사랑에 대해서 언급했고, 19절에는 집단적 사랑인가, 개별적 사랑인가.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게 집단이잖아요. ‘우리’(집단)가 사랑함은 ‘그’(개별)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사랑이 없으면 ‘우리’라는 집단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성립될 수 없죠.
그럼 여기에 ‘심판’, ‘두려움’, ‘사랑’, ‘집단 사랑’, ‘개인 사랑’. 지금 사도 요한은 17, 18, 19절 쭉쭉쭉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사도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를 쭉 할 때 듣는 우리는 17, 18, 19절의 연관성에 대해서 놓치면 안 되겠죠.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되어 있는 것을 어떤 식으로 연결하느냐가 상당히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난해한 이유는 사도 요한의 글은 문제없는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제시하지 않고 정답만 쭉 나열한 거예요. 수학 정석 책을 보면 뒤에 해답이 나와 있죠. 앞에는 두껍게 문제 있고 해답은 뒤쪽 한쪽에 다 몰려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글을 대하면 몰려있는 그 해답만 달랑 대하는 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그 해답부터 시작해서 문제를 찾아가야 되죠. 문제를 일대일대응으로, 이 답은 어느 문제의 답이냐를 연결시키는 식으로 사도 요한 글을 봐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굳이 힘들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일상이 답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보시기에 답이거든요. 정답이라고요, 정답.
정답이니까 우리가 정답이 되었으니까 여기서 거꾸로 ‘현재 내 상황이 왜 정답이어야 하는가?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정답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이런 인생을 굳이 살아야 되는가?’ 그렇게 연결시켜줄 수 있어야 돼요.
그렇게 연결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내가 곧 정답이니 여기서 뭐가 삭제되느냐 하면, 내 나름대로의 기대나 희망이나 소원 또는 소망은 전부 다 삭제되어야 되겠죠. 삭제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기뻐 받으실 만한 정답으로, 너의 지금 그 인생 그대로 내가 정답을 만들어줬는데 인간은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에게, 뭐 이런 정답이 다 있느냐.’ 남들은 좀 멋있어 보이는데 내 인생은 전혀 멋있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내 모든 일상이 답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발생되는 것은 뭐냐? 두려움이 생깁니다. 모든 두려움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딱 맞춤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왔는데 거기에 대한 불만이에요. 불만이 있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남의 인생하고 바꾸고 싶은 거예요.
보통 학생들이 신발 신고 오면 이러잖아요. “네 그 신발하고 내 신발하고 바꿀까?” 바꿔버리면 뭐가 날아갑니까? 그 신발 사줬던 엄마의 사랑은 날아가 버리죠. 엄마는 신발이 사랑스러워서 신발 사준 게 아니고, 자기 자식이 사랑스러워서 신발을 사줬는데 자기 자식이 학교 갔다 와보니까 내가 준 신발이 아닌 다른 신발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19(집단적 사랑과 개별적 사랑)에서 도리어 18(두려움+사랑)로 가서 17에 무슨 날이 준비되어 있다? 심판날. “너 누구하고 바꿨어? 너 친구 손 좀 봐야 되겠다. 신발 뺏어버리자.” 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발 줬는데 엄마의 사랑은 빠진 상태에서, 개별적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이 빠진 상태에서 집단과 집단끼리 교환하는 이 사랑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집단이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이죠. 인간 대 인간. 인간-인간-인간-인간-…, 구조적으로, 수많은 인간-인간. 인간이 굉장히 많아요. 인간들이 서로 엮여져 있어요. 서로 엮여져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의 사랑은 뭐냐 하면, 엮여진 인간 있잖아요, 이걸 전부 다 제거해버립니다. 다 없애버려요. 다 없애버리면 남는 것은 이것만 남아요. ‘관계’만 남아요, 관계. 주께서 만나게 해준 그 관계만 남고 인간은 없는 거예요.
만약에 역기 끝에 달린 게 인간이라면 가운데 그 대만 남고 양 끝에 드는 것 있잖아요, 그런 것 다 빼버리는 거예요. 철 막대기만 남는 거예요. 여기서 만약에 인간이 끼어들게 되면, 인간을 여기 철 막대기에 꽂아버리면 거기서 두려움이 생겨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두려움이 없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잖아요. 그런데 두려움이 생겨버린 거예요. 생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주님의 사랑에 걸쳐있는 인간을 제거하면 되죠. 그 인간은 내가 평소에 두려워서 붙잡고 ‘좀 도와줄래? 사귀자.’ 그런 식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같은 인간을 찾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에는 항상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성경에 담긴 뜻을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마음 같으면 모두 크게 한번 읽어보시라 하고 싶어요. “손잡을 사람 없어서 그런 인간하고 손잡았나?” 이게 모든 말씀 밑에 다 깔려있어요. 모든 성경말씀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믿을 대상이 없더냐?”
내가 인생을 살면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 찾아 나서고 사람과 손잡고 있을 때 이걸 간단히 말해서 사자성어로-사자성어라고 하는 거 믿지 마세요. 사자성어 아닙니다. 그냥 내가 넉자 억지로 맞춘 거예요- 이게 ‘믿음 없음’이에요. 믿음 없음. 그럼 믿음 없음을 바꾸기 위해서 주께서 하시는 방법은? 지금 두려움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나에게서 나오잖아요, 나에게서. 나에게서 나오니까 주께서는 나를 없애버리면 돼요. 그럼 두려움이 없어져요. 참, 말은 쉽다. 하여튼 나를 없애버려요.
나를 없애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으로 나를 교체시켜버리는 겁니다. 세상 것이 아닌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붙잡고 우리가 살아감에서 오는 모든 두려움을 해소해보려고 애쓸 때 그게 다 세상에서 왔잖아요. 요한일서 2장 말씀처럼.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없는 것으로 나와 교체해버립니다.
요한일서 2장 말씀 여러분들 잘 아시지만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느냐 하면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 오지 않은, 아버지께로 온 것과 우리 자신을 연결시켜줌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고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부산 사람들은 롯데 자이언트 가을 야구하기를 지금 수년 째 학수고대하는데 이번에 또 탈락이네. 롯데 자이언트가 또 5등 안에 못 들어서 가을 야구 못했어요. 그러니 부산 야구팬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내 자식이 좋은 고등학교 시험 치는데 또 떨어졌어. 얼마나 두려워해요? 여행하면서 비행기 좋은 좌석 앉으려 하는데 또 저 뒤에 후미진, 세 명 앉는 자리 제일 구석에 앉으래요.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 나는 비상문 있는 데에서 다리 쭉 펴고 14시간 가려고 했더니만. 그 소리 듣고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몰라요. 몸서리치면서 두려워하죠. 이렇게 쪼그려서 14시간 어떻게 가느냐.
일상 모든 것이 뭡니까? 두려움의 연속이잖아요, 두려움의 연속. 두려움의 연속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 마지막에 눈이 뽑혔죠. 눈이 뽑힌 상태에서 자기의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양쪽 기둥을 잡아당겨서 그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때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사람보다 마지막에 더 죽였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삿 16:30). 삼손이 왜 그런 행동을 합니까? 나실인으로서 택한 백성으로서의 마지막 믿음을 보여줬잖아요.
그럼 믿음이라는 건 뭐냐? ‘믿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뜻과 내 목숨을 드디어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믿음이잖아요. 주께서 나한테 연결시킨, 주님이 연결시킨 그 연결과 내가 이제는 아귀가 맞게 되었다. 나는 내 뜻을 위해 살아간 게 아니고 주의 뜻대로 있었는데, 아까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정답이라 했죠, 정답. 이미 내 현재 있는 자체가 정답인데 우리가 따로 내 구미에 맞는 정답을 자꾸 찾아다니니까 그 정답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거예요.
너는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가? 그 문제는, 지금 현재 형편과 문제를 매치시켜주려고 주께서 선하게 인도를 해요. 인도를 하는데 자기 형편이 자기의 마음에 자기 욕구에 영 차지 않으니까 그때부터는 독자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19절 봅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문장이에요. ‘사랑하지 마세요.’ 누구도 사랑하지 마세요. 말썽만 일으켜요. 아무도 사랑하지 마요. 괜히 호들갑을 막 떨고 수습은 안 되고 일은 낭패 만들고. 사랑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굴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도 없고 그런 재주도 없고 그럴 입장도 안 됩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죠. 이게 오늘 본문 중에서 아마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문장으로 한번 써보겠습니다. ‘오지 않으신 방식으로 이미 오셨다.’ 오지 않는 방법으로 주께서 이미 오셨다, 이렇게 돼요. 오지 않는 방법으로.
왜 주님께서는 이런 방식을 사용하느냐? “내가 다시 오리라.”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와요. 내가 성령으로 너희에게 찾아간다 했어요, 성령으로. 그런데 성령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죠. “내가 성령으로 찾아갈게.”할 때 제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셨다, 안 오셨다는 눈에 보이는 방식이에요. 눈에 보인다는 요건 하에서만 ‘어? 오셨네?’, ‘오, 아직 안 왔네.’ 그게 제자들에게 구비되어 있고 자기한테 장착되어있던 조건이에요.
그래서 제자들은 전에 주님이 눈에 보일 때 ‘어? 여기 계시네.’ 또는 ‘오셨네.’하는 그 방식 그대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도 “어? 주님 또 오셨네! 아이고, 그동안 어디 가셨었습니까?” 이런 것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 제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주께서 해줘버리면 제자들은 교체가 됩니까, 안 됩니까? 교체가 안돼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이 극에 달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난 뒤에요. 제자들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문 꽉 닫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어요. 요한복음 20장에 나와요(19절). 두려워해서 그들은 바깥출입을 안했습니다. 바깥출입을 안했어요.
이것은 이미 제자들 내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거기서 제자들이 탈출을 못했다는 뜻이에요. 전에 두려워했던 그 조건을 내가 계속 쥐고 있으면서 ‘이런 두려움을 해소하려면 주님께서 전처럼 전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오셔야 그때 안 두렵겠습니다.’라고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계가 있었어요.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눈에 보이는 식으로 그들 가운데 오셨죠. 오셨을 때 제자들이 뭐 달라졌습니까? 아무것도 안 달라졌어요. “전에 3년 동안 같이 있을 때 그때 참 좋았다. 그치?” “응.”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 오셨네.” “평안하냐?” “아휴, 주님 이제 우리 떠나지 마세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식대로 좋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뜯어고치기 위해서 마침 그 현장에 도마가 없는 차에 오셨습니다. 도마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는 다시 안 보이는 쪽으로 가시고 도마가 뒤늦게 와서 “야 도마야, 우리 주님께서 왔다가셨어.”하니까 “나 안 믿는다.”
도마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도마가 해야 될 일이 있듯이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우리도 우리 역할이 있어요. 왜? 도마도 정답이고 우리도 정답이기 때문에. 도마가 할 것은 이거예요. “보지 않고서는 안 믿는다.”입니다. 이거 교체되어야 돼요. 이거 교체 안 되면 계속해서 뭐가 생깁니까? 보지 않음에서 오는 그 두려움을 해결할 길이 없어요.
지금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함께 있지 않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문 꽉 닫고 바깥으로 출입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사람들은 딱 노리고 있죠. “당신 나사렛 사람이지? 예수님이랑 같이 다녔잖아. 예수님 죽였으니까 이제 당신 차례야.”
벌써 노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삼손 이야기로 돌아가게 되면, 삼손이 마지막으로 기둥을 붙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그 뜻, 애초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하신 주님의 뜻은 바로 삼손 나를, 이 두려워하는 주체인 나를 주께서는 없애버린다는 것을 목표로 하나님께서 나실인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때 알아요.
안 죽고 안 두려워하는 게 아니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나를 제거함으로써 주께서 맡겨주신 그 일이 나와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바꿔치기를. 업무교대 이런 식으로 바꿔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삼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업무교체가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에 합류할 길이 없다.’가 돼요.
‘나 예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괜히 두려워서 십자가 지식을 끌어당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본인은 두려움에 그대로 있으면서 성경지식을 가득 다 갈고리로 끌어당겨서 ‘나 이것도 했고 이것도 했고 성경 백독 했고 천독 했고…’ 그런다고 바들바들 떠는 두려움이 해소되질 않습니다. 교회에서 죽어라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걸 구약이 증명해요.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 지경으로 밀어붙여졌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계속 밀어붙였습니다. 그래놓고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 말라”에요. ‘두려워 말라’는 그 말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자기 백성을 자기 능력으로 감당이 안 되는 쪽으로 계속 밀어붙였죠.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 범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님과 동행하잖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보디가드도 이런 보디가드가 없어. 지켜준다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무서워하고 떨고 있느냐?’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아무리 확실한 이미지로 보여줘도 그 이미지는 내가 보는 것처럼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와 내 목숨을 바꾸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한다는 말이에요.
만약 여러분들이 새벽 재단에서 기도했는데 예수님이 키 180cm에 몸무게 72kg으로 나타나서 “아무개야, 나의 종아. 두려워 말라. 세상 끝날에 너와 함께 할 것이다.”하고 휙 홀연히 갔다 칩시다. 5시 새벽 기도하는데 5시 27분에서 28분 사이에 이미지가 나타났다가 휙 갔다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 앞으로 뭐 할 건데요? 뭐 할 겁니까? “저 데려가세요.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저도 데려가야죠.” 이렇게 하겠죠.
그게 바로 제자들이 했던 거예요. 주님 왔다가는 건 싫다는 거예요. 전에처럼 같이 늘 식사하고 같이 잠자고 이걸 원하는 거예요. 그래야 믿음직하거든요. 믿을만하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걸 믿음직하다고 하는 것은 네 자신의 두려움이 전혀 해소가 안 된 상태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해소 안 된 상태에서 두려워하고 있다고요.
제가 지금 무슨 말하고 있는지 취지를 여러분들이 잘 이해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 나오죠. 아버지 나오고 그다음에 누가 나와요? 탕자 나오죠. 탕자는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나 탕자가 아버지가 없다고 여길 때도 아버지한테는 탕자가 있어요. 탕자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탕자에게 아버지는 없는 거예요. 신나게 자기 인생 즐길 생각만 하지 아버지는 없어요. 탕자의 아버지를 제거해도 아버지는 여기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언제 탕자가 아버지 생겼어요? 본인에게서 본인이 제거될 때 이건 뭐 죽는 것보다 더 못할 때 비로소 누가 생겨요? 아버지가 생긴 거예요. 이것을 바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들이 없을 때 아버지 생기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뜻이 있어서 내가 죽는다 할 때 비로소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로 주로서 인정을 받는 겁니다.
지금 사랑은 뭐냐 하면 이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사랑이 있고, 이 개별적 사랑이 확대되면 집단적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에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없는데 주님이,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안다는 거예요. 사랑을 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듯이 주님은 우리가 보기에 오지 않은 방식으로 이미 와 계신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만 그게 믿어지는가? 사랑에 의해서 내가 제거될 때 가능하죠. 주님의 사랑과 내가 교체될 때, 교체되게 되면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간에 그 자체가 주님이 주신 완벽한 사랑이에요. 이게 수학 정석 뒤에 있는 해답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해야 될 것은 뭐냐? 나 같은 이런 인생이 사랑이란 해답이라면 왜 이런 해답이 주어졌는지 이것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를 찾아가면 되죠. 해답은 이미 쥐고 있어요. 내 자체가 사랑이니까. 이거는 우리가 원했던 게 아니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사랑하셨다 이 말이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단 말이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거든요.
그러면 이게 왜 사랑인지를 알아가기 위해서 ‘도대체 주님께서는 어떤 문제와 우리 자신을 부딪치게 하시느냐?’ 그것만 이제 남아있는 거죠. 이미 해답은 얻었고. 벌써 해답은 얻은 상태에서 남은 인생은 뭡니까? ‘왜 이 모양 이 꼴이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가?’ 그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해답은 얻었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사랑 안에는 뭐가 없습니까? 두려움이 없죠. 인간은 자꾸 자기가 원하는 해답을 따로 찾고자 하는데 거기서 두려움이 발생되잖아요. 그래서 주께서 시작을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해줌으로 말미암아 시작을 두려움 없는 상태에서 사랑의 이유를 찾아나서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제가 문제 낼 테니까 알아 맞춰 보세요. 여러분 주기도문 알죠? 주기도문 보면 끝부분에 “우리를” 어디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 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문제는, 방법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은? 1.세상을 기피한다. 2.나를 친다.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하면서. 3.세상을 공격한다. ‘세상은 사탄이야.’하면서 공격한다. 4.시험을 뚫고 지나간다. 다른 말로 하면 ‘돌파’죠. 돌파한다. 몇 번입니까? 입맛대로 한번 골라잡아 보세요. 어느 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방법이에요? 1, 2, 3, 4번 중에.
아무래도 정답을 제일 끝에 달아놨겠죠? 돌파죠. 예수님이 이렇게 돌파했어요. 예수님이 돌파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벌써 광야에 있을 때 40일 동안 금식할 때 악마가 와서 했어요.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마 4:3) 예수님을 시험했다 했어요. 그리고 그 시험에 합격한 것이 뭐냐?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뭡니까? 기피(1번)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1번 말고 4번 되게 하옵소서.
이 잔이 내게서 벗어나게 해달라 하는 이 기도. 겟세마네에서 왜 처음에 그렇게 기도했느냐 하면, 너무나 이 세상이 두렵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두려워서 그런 겁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무게감, 어두움이 주는 무게감은… 아무리 요령껏 성경지식과 신학지식을 동원하고 요령을 굴려봤자 두려움은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은 두려움입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뭐 자연인 될까, 안 그러면 대충 해서 돈 얼마 안 되더라도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곳, 어디죠? 1번 인도네시아, 2번 말레이시아, 3번 베트남, 4번 어디? 캄보디아. 돈 1억만 있으면 여생 보낼 수 있다는 동남아 찾아가는 것. 안 그러면 미국으로 캐나다로 호주로 도피하는 것. 왜 그렇게 합니까?
두려움 속으로 잠입해 들어가야 되죠. 왜냐하면 두려움 안에 내가 정답일 이유가 두려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정답의 문제인 나의 정체가 두려움 안에 있어요. 내 진짜 정체는 내가 꾸며낸다고 남한테 “저는 이런 사람이고요.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고요. 우리 집안은 어떻고 아버지는 누구고…” 그게 정답이 아니라, 그냥 “저는 어릴 때부터 두려웠고 지금까지 두렵습니다.” 두려움 속에 옴팍 싸여버린 이 모습 이외에는 우리 자신을 달리 묘사할 길이 없습니다.
아침 눈뜨면 두렵고 잠들 때까지 두렵고 심지어 꿈도 두려워요. 다음 날 일어나면 두려움 또 시작이에요. 일이 꼬일까봐 두렵고, 오늘 약속 있는데 약속 시간 늦을까봐 두렵고, 오늘 기대한, 모든 기대하고 희망했던 목적 같은 게 파토 날까 두렵고, 물건 사러 온 사람이 물건 취소시킬까봐 두렵고, 이번 달 수입이 확 내려갈까봐 두렵고, 목회하는 목사들 같으면 교인들 또 삐쳐서 안 나온다 하고 한 뭉텅이 다 빠질까 두렵고. 모든 게.
‘그냥 편하게 살면 두려움이 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고 두려움을 개발해요. 두려움이 없는데도 두려움을 계속 상상해서 만들어내요, 두려움을. ‘아,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러면 안 되는데. 삼성이 준플레이 오프에 올라갔지. 아, 삼성이 올라갔으니까 한화를 이겨야 될 텐데.’
모든 일어나는 일이 전부다 두려움의 파도로 우리 마음속에 밀려들어오는 거예요. 그 두려움밖에 없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는 답을 제공하는, 답과 연계되어 있는 유일한 문제지입니다.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이 땅에 이 세상에서 시험받았다. 그다음에 네 차례야. 너희 차례야. 딴 구석으로 빠질 생각하지 마. 괜히 뭐 주님을 옆에서 봐서 컨닝해가지고 ‘주님 믿습니다.’ 그럴 생각하지 마.” 직접 그 두려움 속에 네가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나옵니다. 18장을 보겠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자, 다시 한번 정리해드리면 예수님이 마태, 마가, 누가에서 이야기한 것은 문제를 제시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은 아무 답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기 전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답할 수가 없어요.
‘그저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겠지.’ 이런 거예요. 본인이 바뀐다, 교체되어야 된다는 생각은 안하고 그냥 주께서 나를 지켜주고 또 지켜주고 보호하고 보호해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제자들이. ‘저는 주님만 믿습니다.’ 그게 믿음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십자가로 가시면서 ‘주님은 너를 지켜주지 않는다. 너의 요구사항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강도 있게 더 심화하면서 십자가로 가고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제자들은 점점 더 불안하기 짝이 없죠. 처음 이야기하고 다르네, 뭐 이런 식으로. 물 위를 걸을 때 신났고 뭐 병 고칠 때 병 고치는 능력 있을 때 아주 좋았죠.
그런데 자꾸 예수님께서 너희들 곁을 떠나서 “너희들은 나를 몰라. 너희들은 나를 안 믿을 거야. 너희들은 나를 배신할 거야.” 자꾸 이상한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네가 기대하는 메시아와 아버지 앞에 있는 아들로서 내 가는 길이 왜 틀어지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통해서 점점 짙어지는 거예요.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마지막에는 목자를 치니 양떼들 다 흩어지는 거예요.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렸던 사람은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든든하니 한번 믿어볼까?’ 이거지, 예수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 우리는 관찰자에 불과하니까. 비겁하게.
여기 18장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절에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죠. 아까 했던 것의 원리를 끄집어내봅시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찾아올 때 내 심정과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거예요. 그럴 때 친구사이가 되는 거예요. 부탁도 가능하고 후원과 도움도 기대할 수 있고. 내 심정을 이 사람이 헤아릴 때.
그런데 어떤 불쌍한 과부(A)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B가 재판장이에요. 재판장인데 이 사람은 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까? 뭐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은 무시하고. 그러면 이 과부가 과연 이 재판관을 자기 아픔과 인생 상담에 끼워 넣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나를 안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당신, 재판관 판사님을 벌하실 거예요!” 협박공갈해도 판사가 하는 말이 “나 하나님 하나도 안 두려운데? 하나님 하나도 안 두려워. 나 이 세상에 두려운 사람이 없어. 나한테 협박하지 마. 나한테 공갈치려 하지 마. 나한테 안 통해.” 이럴 때 과연 이 과부가 부탁할 대상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또 인간을 무시해요. “바쁜데 뭐 찾아와가지고. 네 인생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 나 귀찮게 하지 말고.”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사람취급을 하지 않고 아주 무시해요. 무시하는데 3절,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그다음 뭡니까? “나를 번거롭게” 했죠.
번거롭게 했다는 말은, 이 과부는 어느 속으로 들어갔단 말입니까? 재판관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면서도 뭔가 이 재판관이 귀찮아하고 짜증내는 그 일 있잖아요, 그 일에 자기 몸을 담가버린 겁니다. 자기 몸을 담가버렸어요. 담군다는 말은 영화에 보면 조폭들이 많이 하죠. “너 담가버린다.” 그럼 누가 승자에요? 과부가 승자죠.
왜? “너 나하고 상관없어.”하고 밀어내는데 그 재판관이 갖고 있던… 재판관은 이런 생각해요. ‘나는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못 참겠다.’하는 부분 있죠? 내가 너무 불편하고 짜증나. 나 진짜 그 일 생길까봐 두려워. 그 두려움 유발자로 과부가 거기 들어가버린 거예요.
그럼 과부는 ‘사태 분란자’에요. 사태 분란자. 오늘 제목 이거 괜찮네요. 하나님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기 때문에 그 재판관은 홀로 아무 문제가 없어요. 행복해. 평온하고. 아무 사태가 없어요. 그런데 과부가 재판관의 사태에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6절에 보면 “주께서 또 가라사대” 그다음 ‘재판관’ 앞에 무슨 단어가 붙어있습니까? ‘불의’하죠. 인간세상 자체가 불의해요. 불의해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좀 힘 있는 사람은 사람도 무시해요. “내게 필요한 사람 내가 고르지, 네가 부탁한다고 네 청을 들어줄 필요 없어. 왜? 나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 넉넉하고 지금 내가 행복한 데에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지장이 없어요. 하나님도 안 무섭다니까요.
그런데 과부가 어떻게 합니까? 과부의 존재가 재판관으로 하여금 자기가 원치 않는 사태로 몰아가도록 동기 유발자가 된 겁니다. 동기 유발자가 되겠죠. 그래서 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뭘 보겠느냐? “믿음을 보겠느냐”
왜 세상에는 믿음이 없어요? 왜 믿음이 없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내 행복을 위해서 있다고 여기는 한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나는 나를 위해 산다.’ 그러면 그건 믿음이 없는 거예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어떻게 되었어요? ‘아, 이제 찬스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자.’ 이게 아니고 ‘에이, 살 놈은 살아야지.’ 다 도망쳤어요. 왜? 무서워서. 뭐가? 뭐가 무서운데요? 뭐가 무섭길래 도망갔습니까? 권세가 무서운 거예요. 세상 권세가. 그러면 제자들에게는 누가 사태 분란자입니까? 세상의 어두운 권세가 조용하게 살고 싶은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태 유발자가 되겠죠. 이런 세상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은 이 세상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 믿음 없잖아. 그러니 너도 믿음 없어. 우리 힘의 우열로 살자.’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통해서 ‘믿음의 반대말은 질서’에요. ‘믿음’의 반대말은 ‘질서’입니다. 질서, 위계, 위계질서, 계급. 권위성 또는 권세성. 이게 믿음의 반대말이에요. 그러면 질서의 반대말은? 계급의 반대말은? 권위의 반대말은? 권세에 반대되는 말은 뭐냐? 무질서냐? 아닙니다. 이겁니다. ‘자유’. 자유입니다.
왜 이 과부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그것은 ‘내가’가 아니라 이미 주님이 주인공이 되는 그 사태의 기능 유발자이기 때문에. 기능이 내 존재와 바꿔치기했거든요. 나는 뭔가 하기 위해서 있지, 내가 살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문제이고 그 답은 뭡니까? 요한일서 4장에 의하면 답은 뭐에요? “나는 너를 먼저 사랑한다.” 이게 답이에요. ‘주님의 사랑 받아서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볼까?’ 그런 것은 주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내 존재를 교체하는 것이 주께서 사랑을 주신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두움의 질서기 때문에. 어두움의 질서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힘이 있으면 사람도 개무시하는 동네에요. 만약에 이 힘이 부러우면 개처럼 굴복해야 되지, 그 사람을 들이받는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성령께서 붙어있는 인간들을 쳐버립니다.
남는 것은 사랑의 관계, 아니면 어두움의 관계. 어느 관계냐? 그거 묻는 거죠.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51016b 요한일서 4장 18절(사랑의 중첩)-이 근호 목사
오지 않는 방법으로 이미 왔다는 것은 구약에선 통하지 않아요. 구약에서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시간, 공간 안의 존재가 과연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시키느냐? 언약을 실천할 수 있느냐? 언약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에 대한 테스트, 시험 장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패했어요. 자신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까 전도서 말씀하셨는데 전도서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에서는 허무로 마감돼요. 허무라는 말은 뭐냐? 나보다 뭐가 세다? ‘나보다 시간과 공간이 더 세다.’ 이때는 허무가 돼요. 뭔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세상에 대한 스케줄은 내 마음대로 안돼요.
헤어지길 원치 않아도 헤어져야 되고,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야 되고. 미워하고 싶지 않아도 미워해야 되고,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사랑해야 되고. 죽을 때가 있으며 태어날 때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의 주도권은 시간과 공간에게 있지, 시간과 공간에 나라는 존재가 종속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의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언약의 환경으로 사용한다면 그 인간은 여기서 허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에서 지적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야 되는데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바르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착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악을 멀리 했습니다.”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착한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악한 자도 아무것도 아니고 결과는 똑같다.” 이렇게 제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의 정답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나는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거부하는 거예요. 받지 않겠다. 그게 전도서, 구약이잖아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 감 잡을 거예요. 그럼 신약의 해결책은? 제자들이나 인간에게 없죠. 그럼 누구한테 있습니까?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몰고 오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해결책이 되는 거예요.
중첩이죠, 중첩. 오는 시간과 과거 시간이 같이 겹쳐져 있는 분, 그분이 해결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중첩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 죄와 의가 중첩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잖아요.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죠? 로마서 8장 3절에 나오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죠.(“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러면 죄 있는 육신의 몸의 특징이 뭐냐? 죄 있는 육신이 뭐냐? 옛것 고수에요. 인간이 아는 것은 옛날 시간과 공간에서 규정된, 그렇게 알고 있는 나를 못 버리는 거예요. 옛것, 내가 옛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버릴 수 없어요. 그게 나한테 전부니까. 나의 행복, 나의 구원, 내가 구원받는 것, 내가 천당 가는 것,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사는 것 전부다 그 범주, 그 환경이 옛것 안에서만 작동하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9장에 나오죠.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옛 부대에는 옛 포주도주가 담기지만 새 포도주는 무엇에 담깁니까? 새 부대에 담기죠. 문제는 새 부대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의 복음과 십자가 복음을 담을 새 부대가 없어요. 새 부대가 없습니다. 새로운 포도주를 옛 부대에 담아버리면 옛 부대가 감당을 못해요. 터져버리죠. 찢어져버리는 거예요. 감당을 못해요.
쉽게 말해서, 오해하는 거예요. 성경말씀 백독해놓고 성경말씀 백독한들 백독 전체를 오해한 겁니다. ‘나 어느 말씀 지키면 천국 갈까?’ 이거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네가 구닥다리 옛날 자아를 가지고 구원받고자 시도한다는 그 자체가, 주님께서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새로운 시공간을 준비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랑 개념, 의의 개념, 천국 개념 모조리 전부다 옛날 시공간에서 온 거예요.
자, 그렇다면 두려움은 뭐냐? 두려움이란 ‘기존 시공간의 기억을 투입하는 것’, 이게 두려움이죠. 기존의 시공간. 주님이 10분 뒤에 어떤 일을 하는가는 생각안하고 여태껏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10분 뒤에도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짐작해서 걱정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건 자기밖에 없어요. 주님은 안 살아있어요. 왜? 주님은 아직 안 왔으니까. 주님이 안 와버리면 그렇게 돼요. 불신자 되면. 그러나 신자는 성령이 함께 있어 예수님처럼 중첩이 되어버린다니까요. 예수님이 마리아 몸에서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뭐가 와서 태어났어요? 성령으로 인하여 마리아 몸에서 태어났죠. 그럼 예수님의 출생 자체가 중첩이잖아요.
성령입니다. 성령은 새 언약에 속합니다. 새 언약. 성령은 그 출처가 뭐냐? 십자가와 결부되어서 작용하는 영이 성령이에요. 십자가와 결부되어서.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은? 두려움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옛 자아의 두려움. 이것은 구약적인 기존의 시공간에서 나온 거죠. 두 번째, 새로운 자아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실 때의 두려움이에요.
첫 번째는 두려움만 와요. 해결책 없어요. 두 번째는 뭐냐? ‘두려움+사랑’이 세트가 되어 있어요. 예상 못할 두려움을 맞닥뜨리게 해놓고 거기서 사랑이 모든 것을 다 없앴다는 사실에 희열과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첫 번째, 옛 자아의 두려움은 나를 지키는 두려움이에요. 옛 자아, 말이 옛 자아지 사실 ‘옛’자가 빠져야 되죠. 새 자아가 없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어제도 나고 지금도 나고 앞으로도 나고 천국가도 나다. 그 나, 하나밖에 없는 나. 하나밖에 없는 나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복음을 믿든지 예수 십자가를 믿든지 어쨌든 나만 살려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옛 자아에요.
그러니까 두려움은 계속 오는 거예요. 교회 다니고 성령 받았다고 백날 이야기해도 두려움은 떠나질 않아요. 내가 어떻게 잘못되어서 심판 날에 지옥가면 그동안 수십 년 교회 다닌 것 다 허사잖아요. 지옥가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어요. 그걸 일본말로 ‘시마이’라 해요. 끝났어요. 시마이. 이게 중첩이 안 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두려움은 이 옛 자아를 공격해요. 공격해서 더 이상 옛 자아가 나 잘되기를 지키는 것을 못 버티게 만들어버려요. 두려움이 너무 세서. 그게 아까 이야기한 시험이 오게 되면 시험을 피하는 게 아니고 ‘사탄아 물러가라!’ 이래서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사탄이 뭘 물러가요? 완전히 사탄 밥인데.
사탄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거예요. 사탄 속으로 들어가면 사탄 안에 뭐가 있느냐? “너 그러면 죽어. 너 죽는다. 너 망한다고. 너 망해도 좋아?” 이게 예수님과 사탄이 만나서 주고받았던 대화고 그 대화 속에 우리를 끼워 들어가게 하는 거죠.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그냥 넘어가게 해.”
주님이 경험했던 그 경험 속에, 마귀가 주는 그 두려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어버리면 우리의 기존 자아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해결책이 전혀 없음을 자각하게 돼요. 아,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그게 바로 구원이죠.
그동안 내가 나를 구원받게 하고자 붙들고 있었던 옛 자아에서 내가 떠나버리죠. 내가 그냥 자포자기해버리는 거예요. 그럼 그 다음에는 사랑이 오죠. 사랑은, 주님만이 통과했던 그 두려움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왔던 그 능력이 와버리면 이것은 내가 요령껏 성경구절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통과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그 시험에 우리를 담가버리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담가버린다고 할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숫자가 많고 군대가 많은 이방민족과 의도적으로 맞닥뜨리게 만들었어요. 그래놓고 하시는 말씀이… 신명기 한번 볼까요? 신명기 1장 21절, 2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어떻게 아주 교묘하게 하시는지가 나와요. 신명기 1장 21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2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어때요? 이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가니까 두려워요, 안 두려워요? 두렵지요. 열 정탐꾼이 두려워서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자 했잖아요. 그만큼 두렵다는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미친 사람이에요.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게임하나마나 우린 지게 되어 있는데 두려운 거예요.
그 두려움이 뭐냐? 이게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이스라엘 본인과 이방민족과 싸우는 싸움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옛날 시간과 공간에서 했던 버릇이에요, 그게. 그 사고방식이에요. 근본적으로 내 인생이라는 게 없어요. 근본적으로 주께서 나를 갖고 노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볼펜이다. 볼펜이 볼펜 걱정하면 안 되죠. 볼펜을 쥐고 있는 분이 있는데 자기가 왜 걱정을 해요? “아휴, 글씨가 안 나오면 나 지옥 가는데….” “갖다버려.” 그냥 나오는 대로 써! 그러면 ‘아이고, 그동안 수고했다’해서 천국 넣어주잖아요.
문제는 중첩인데 중첩은 성령이 임해야 돼요. 성령이 임해서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에 흠뻑 우리가 젖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흠뻑 젖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게 무슨 쑈? 흠뻑쑈. 물을 퍼부어서 흠뻑 젖어있는 거예요. 고함지른다고 이해되는 건 아닌데… 일단 돌립시다. 일단 돌리고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즐거운 팝송시간이에요.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1999, Maywood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I'm like a shark in a general line
마치 낚시줄에 걸린 상어와 같아요
I've got happiness, laughter, joy ever after
나는 행복과 웃음과 영원한 기쁨을 갖게 되었어요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Yes, I feel that we must stick together
그래요 우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No matter what the future will bring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 오더라도 말이에요
Now you say you will love me forever
이제 그대는 영원히 나를 사랑할 거라고 말해요
And today I've got a reason to sing
바로 오늘 내가 노래하고 싶은 이유랍니다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I'm like a shark in a general line
마치 낚시줄에 걸린 상어와 같아요
I've got happiness, laughter, joy ever after
나는 행복과 웃음과 영원한 기쁨을 갖게 되었어요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Love me always be with you my darlin'
내 사랑 그대와 언제나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세요
'Cause without you I can't live anymore
그대 없이 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Where we're sailin' together my darlin'
내 사랑과 함께 항해하던 곳에서
You will get me safely ashore
그대는 나를 해변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겠지요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I'm like a shark in a general line
마치 낚시줄에 걸린 상어와 같아요
I've got happiness, laughter, joy ever after
나는 행복과 웃음과 영원한 기쁨을 갖게 되었어요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제가 이 노래를 한 것은 이 세상 사랑이라는 것이, 물론 옛 자아죠, 사랑이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가사에 잘 표현되어 있어요. 사랑이 오게 되면 표현이 뭐냐? ‘빠졌다’고 되어 있어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빠지게 되어 있어요. 사랑에 빠진 거예요.
어느 정도 빠졌느냐 하면, 이 가사가 재밌어요. ‘마치 낚시줄에 걸린 상어와 같다’고 되어 있어요. 그다음 ‘나는 행복과 웃음과 영원한 기쁨을 갖게 되었어요’. 이게 뭡니까? 자기 자아의 자존심, 가치 이런 건 그냥 갖다 버렸죠. 어디에 묶여서? 사랑에 빠져버리면. 그야말로 fall in love 아닙니까. 사랑에 빠진 거예요. 나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이 기쁨이 개인적인 게 아니고 ‘함께’에요. ‘우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함께.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함께 하는 거예요’. 그다음 ‘영원히 나를 사랑하고’ 그다음 나오는 게 ‘노래’에요. 찬양이 나와요, 사랑하게 되면. 기분 좋아서 저절로 흥얼거리는 거예요. 아가씨가 사랑하게 되면 “요새 뭐 좋은 일 있습니까?” 이렇게 된단 말이죠. 노래가 되니까.
2절 가사 보면 ‘내 사랑과 함께 항해하던 곳에서 그대는 나를 해변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겠지요’. 안전이죠, 안전. 안정성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이제는 그대 품 안에서 평안히 쉬어도 된다는 거죠. 이렇게 가사만 해서는 흥이 안 날 테니까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가사 보면서 노래 잠시 들어봅시다.
아주 들떴죠. 사랑와가지고 신났죠. 자, 이 노래를 왜 들려주느냐? 세상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이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시비, 사태 유발자다. 이 얼마나 좋아요. 여기 나온 가사 대로 하면 이 남자, 여자 곧 결혼할 것 같아요. 너무 좋아서.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 되려면 그 인간이 빠져야 된다 했죠. 뭐만 남는다? 그 관계만 남아야 돼요, 그 관계만. 인간은 빠지고 관계만 남아야 되죠. 그 관계가 뭐냐? 기존의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부족한 것, 나의 어설픈 것, 내 속에 나도 몰랐던 불안정한 것, 안정감이 없는 것,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을 새로운 남자(여자 가수니까)가 와서 그 모든 부족한 것을 충분하게 넉넉하게 다 채워주는 거죠. 채워줄 때 나는 영원히 당신 품에서 이제는 안정감을 얻겠습니다. ‘You will get me safely ashore. 나를 안전한 해변으로 데려가 주시겠지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걸 보고 사람들은 ‘남자 대신에 예수님을 여기다가 대입하게 되면 이것도 사랑이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죠. 그게 사랑일까요? 행복, 웃음이 있고 영원한 기쁨을 갖게 되었고 난생 처음 사랑에 빠졌고 오늘 내가 막 찬양, 노래하고 싶은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속으로 막 흥얼거리고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을 여기다가 넣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신의 사랑으로 대입한 것이 모든 종교의 특징이에요. 마귀가 만든 겁니다. 마귀가 종교를 그런 식으로 만든 거예요. 기분 좋지요. 그야말로 happiness하잖아요. 행복과 laughter, 웃음과 joy ever after, 영원한 기쁨을 갖게 하잖아요. 그것이 신적인 종교라면 그럼 종교가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사람은 그게 뭡니까? 종교 없는 구도자가 되겠죠.
종교 없는, 교회도 안 다니고 절에도 안가고 아무데도 안 가는데 자기 아내와 남편 사이에 도를 닦는 사람들. 무엇으로? “우리 돈독한 부부사랑으로 도를 한번 닦아볼까? 항상 추석 연휴 때 같이 놀러가고. 서로의 신의를 지키면서 나는 오직 당신만 쳐다보고 당신은 나만 쳐다보고. 자식과 더불어서 우리 하우스, 이 홈을 영원한 천국으로 만들어보자. 됐나?” “됐다!” 이런 거. 그게 바로 종교 아닙니까. 종교의 특징이 그거에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다. 두려움에서. 인간 자아, 옛 자아가 제거되지 않으면 절대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없이 기쁨만 얻으려고 하면 안돼요. 두려움 속에 가야 돼요. 어느 두려움? 주님이 이 세상에서 겪었던 그 두려움에 합류해야 됩니다. 합류해야 돼요.
합류하는 방법은? 그건 누구 몫이냐? 바로 성령께서. 십자가 영이니까 십자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그 코스를 이탈하지 않고 그대로 가게 만듭니다. 그대로.
여러분들이 그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까 신명기에서도 봤지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길을 갈 때 그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가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코스를 소개하면 이렇게 되거든요(첨부파일의 그림 참고). 애굽이 있고 홍해를 건너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북쪽에 요르단이고 갈릴리 사해 있고. 그 길로 가야 되는데 광야에서 뺑뺑이 돌죠. 뺑뺑이 돌다 모압 땅까지 올라가서 모압 땅에서 느보산, 요단강을 건너서 제일 먼저 만나는 성은 여리고 성. 그다음 아이 성 치고 올라갑니다. 그다음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정복하고 땅 분배하는 것.
그런데 이 과정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바로 들어가든지 하면 되는데 왜 이걸 뺑뺑이 돌리느냐?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이거는. 출신.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왔던 40년 동안 지탱했던 옛 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한 명도 못 들어가요. 세대를 교체하는 거예요. 세대를.
애초부터 하나님이 동행할 때 이게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낮 설교에서 했던 질문을 한번 던져볼게요.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설교시간에 분명히 질문했어요.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한 답을 여러분들이 언제쯤 가졌습니까? 아니, 답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보통 사람들 답은 이거에요. ‘어떻게 되겠지, 뭐.’ 어떻게 되겠지. 이 말은 ‘나는 모르겠고.’ 이 말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자체가 답이라니까요, 답. 그 자체가 사랑인데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모든 율법의 내용이 집결하면 사랑이 돼요. 사랑부터 시작해서 말씀과 현실의 만남 구석구석이 이 사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제가 분명히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했는데 설교시간에 답을 했어요. 답이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제가 뭐라고 답변했던가요? 유월절 양처럼 말씀 속에 녹아들어간다 했죠. 이 말씀의 완성이 천국이잖아요. 우리는 천국 안에 녹아들어가는 거예요. 녹아들어간다는 말, 퍼져 들어간다는 이 말은, 유월절 애굽에 어린 양이 왔잖아요. 와서 시내산에서 뭘 받습니까? 제사법을 받죠. 제사법을 받을 때 유월절 양과 빠이빠이한 거예요, 아니면 제사법을 통해 유월절 양이 반복해서 살아있는 겁니까? 살아있죠.
죽은 유월절 양이 바로 말씀 안에서 제대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것도 영원히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말은 우리가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되면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계속해서 천국에서 그 기능을 영원토록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 기능을. 면류관 반납하면서. ‘다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의 공로였습니다.’ 그 기능을 하는 거예요.
로마서 15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산 제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로마서 15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에도 나오고요, 15장에도 나오는데 두 군데 다 찾아보죠. 15장 16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이 손해 안 봅니다. ‘너 거룩하다’는 말은 ‘너 쓸 데가 있다’ 이 말이에요. ‘너 훌륭하구나’ 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네가 쪼다가 되든 바보가 되든 어떤 추악한 악인이 되든 성령이 사용하면 그것은 거룩한 자가 되는 거예요. 거룩한 말씀의 세계 안에 이미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서 12장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죠. 청년회 헌신 예배할 때 맨날 나오는 구절 아닙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누가 하는 거예요? 영적 예배니까 주관을 누가 합니까? 성령이 주관하는 예배라는 거예요.
성령이 너로 하여금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은 성령께서 너를 다른 용도로, 네가 기존에 생각했던 너의 용도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 주님께서 충실하게 이미 사용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안 보이는 식으로 성령 안에서 활동하니까 이미 오신 거예요.
재림이라 하는 것은 이 우주 자체를 벗겨내는 거예요. 인간의 봄(see)이라는 이 자체 한계를 벗겨내는 거예요. 무대 뒤에 있다가 기존의 시공간 무대를 제쳐버리면 지금 거기 계시고 원래부터 계신 분이 그 영광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재림입니다. 커튼을 젖히는 거예요. 커튼을 젖히는 것.
어떤 과학자가 실험을 했는데요. 제가 중첩에 대해서 설명을 좀 더 해드리려고 이 실험 이야기를 합니다. Schrödinger가 1935년에 실험을 했어요. 이 실험은 사고실험(생각으로 하는 실험)인데 몇 가지 장치가 있습니다. 장치는 1. 고양이 한 마리, 2. 50%의 확률로 1시간 내에 붕괴하는 방사성 원자(라듐) 한 개, 3. 방사능 검출기, 4. 독극물(청산가리)이 든 유리병, 5. 망치. 이 장치들이 상자 안에 들어있고 상자는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어요. 만약 라듐이 붕괴해서 방사능이 검출되게 되면 그걸 탐지하고 망치가 유리병을 내리쳐 깨지게 되어 있어요. 그럼 청산가리가 유출되고 청산가리를 마신 고양이는 살지 못하고 죽게 되겠죠.
이게 바로 중첩입니다. 어떤 게 중첩이냐? ‘살아있다/ 죽어있다’가 이 고양이한테 중첩되어 있어요. 이 고양이를 인간, 나라고 봅시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다/죽어있다’를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외부 환경의 결정으로써 내가 살았다/죽었다가 정해지는 겁니까? 어느 쪽이에요? 외부죠, 외부. 내가 살고 싶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다고 내가 확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고양이라면 이 고양이는 뭘 모르느냐? 방사성 원자 한 개가 50%의 확률로 붕괴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이 사실을 만약 모르게 되면 고양이는 본인이 살아있다고 하거든요. 살아있다는 것은 중첩된 게 아니고 내가 판단하기에 ‘하나밖에 없는 나가 지금 살아있는 게 맞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방사성 원자가 붕괴되어버리면 살아있다던 내가 죽어있게 되죠.
자, 보세요. 말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고양이를 나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나가 죽어있죠. 죽어있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죽어있는 자는 살아있는 나를 알아요, 몰라요? 죽어버렸는데 뭘 알아? 죽어버렸는데. 기억도 죽어버렸는데. 살아있은 적이 없죠. 죽어있는 상태에서. 한 번도 살아있은 적이 없어요. 죽어있으면.
그러니까 50% 살아있고 50% 죽어있는 게 아니고, 100% 살아있고 100% 죽어있는 것이 중첩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100% 죄인이고 100% 의인이에요. 50/50 갈라먹기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 배후에 아버지가 있잖아요.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는 어떤 인간도 눈치 챘다, 못 챘다? 아무도 눈치 못챈 거예요.
인간들은 바보에요. 바보 등신이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인간들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우리 이걸 과학이라 하자, 이걸 종교라 하자.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노래 부르면서. 우리 너무 행복한 순간이야. 이 사랑. 나는 이제 죽어도 좋아. 당신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 그런데 이게 고양이의 연앤데요?
자꾸 자기 존재를 살아있다고 여기는데 신약성경에 보세요. 신약성경 고린도후서에서는 이미 우리가 죽어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도 이해 못할뿐더러 사도 바울의 편지도 이해 못해요. 사도 바울의 편지도 이해 못합니다.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테스트 한번 들어가겠습니다. 이해 못하면 뭐가 찾아오죠? 두려움이 찾아오죠. 이 두려움은 나를 칼로 죽인다 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앞에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고린도후서 4장 보겠습니다.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현재 윤석열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윤석열 이렇게 살고 있어요? 윤석열은 지금 이 말씀이 있는 것조차도 몰라요.
이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졌잖아요.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죠. 십자가 지신 분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만이 중첩을 알고 있는 분이고 그 외에는 제자들도 몰랐어요. 몰랐는데 성령이 오니까 제자들은 가차 없이 강제로 예수님이 겪었던 인생에 합류하도록 그들은 끌려 들어가는 거예요. 견인되어 가는 거예요.
뭐로 견인하는가? 말씀으로 견인하는 거예요. 그럼 제자들의 일생은 자기 목숨과 뭘 바꿨습니까? 말씀하고 바꾼 거예요. 이거는 잘 바꿨죠. 잘 바꾼 거예요. 엿장수한테 고물주고 엿 잘 얻은 겁니다. 이런 횡재가 없어요. 그런데 이게 사랑이다. 바꾼 데 성공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은 답이니까요.
사랑이 답인데 사랑가지고 뭘 얻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 자체가 종결된 정답이에요. 사랑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립된, 완성된 사랑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주셨다는 거예요. 먼저 주셨기 때문에 그가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오늘 요한일서 본문에 보면 반드시 붙는 것이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여기에 동의해야 됩니다. 이 본문에 동의해야 돼요.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가 되어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20년, 30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사랑했다, 이러면 이건 중첩된 게 아니에요. 내가 나를 판단해서 잘못 내린 결론입니다. 내가 스스로 답을 만든 거예요. 답은 성경이 답이지, 내가 성경을 참조해서 답을 내가 만들어낼 수 없어요. AI, chat GPT가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부산강의에서 했죠? 어떤 사람이 chat GPT한테 물었어요.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하니까 “예, 믿습니다.” 그 chat GPT를 욕하면 안돼요. chat GPT하고 너하고 똑같아. chat GPT는 중첩을 몰라요. 그 점에서 인간이나 그 기계나 대동소이합니다. 똑같아요. 똑같이 악마의 기계에요, 그냥.
중첩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어떤 때는 그렇게 다루고 어떤 때는 그렇게 다루시는데 다루시는 이유가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 그 사건을 덮치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덮치게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또 하나 예를 들면 구약에 나오는 유명한 아가(雅歌)가 있어요. 아가서에요. 아가서 보면 술람미 여인하고 솔로몬이 티격태격하면서 ‘이리 오너라. 뒷태를 보자. 앞태를 보자.’ 하고 사랑놀이를 하고 있지요. 그럴 때 솔로몬 왕이 그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오잖아요. 거기서 사랑은 이거에요. ‘소유성’입니다. 소유. 소유성. ‘오늘부터 너는 내 것 하자’ 이 말이에요.
그럼 그 여자 술람미 여인은? ‘예, 그렇게 하세요.’ 이렇게 나옵니까, 아니면 뺍니까? 술람미 여인이 왕의 그 사랑 요구에 대해서 도망을 쳐요. 어디로 도망을 치느냐 하면 자기의 시공간으로 도망쳐요. 그러나 솔로몬 왕이 신부로 맞이하는 이것은 솔로몬의 시공간입니다. 솔로몬은 다윗 언약이죠. 언약이 만든 시공간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 중첩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 언약의 주인공, 예수님이죠.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의 시공간으로서 술람미 여인을 자기 시공간 속에 교체해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이 술람미 여인이 빼요. 거부하는 이유가 아가서에 여러 가지 나오는데요. 첫 번째는, 얼굴이 탔다. 얼굴이 탔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내가 내놓을 얼굴이 못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나는 너무 모자란 여인이에요. 난 너무 모자란 여인이다.
두 번째는, 내 주제에 왕을 받을 만한 그릇이 못됩니다. 결혼도 수준이 맞아야지, 뭐. 농장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왕궁에서 사는 왕을 남편감으로 삼기에는 드라마도 아니고 도저히 안 되죠. 어디 흙수저가 어떻게 재벌회사에 부인이 되어서 수조 원을 유산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딸들이 노리고 딸기밭까지 내려와서 죽이려고 난리 났잖아요. <착한 여자 부세미> 드라마 보면 나와요. 드라마는 몰라도 돼요.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이 여자가 솔로몬의 청혼을 거부한 이유는 오빠 때문이에요. 바로 혈육 때문이에요. 오빠가 반대한다는 거예요. “네가 가슴이 작잖아. 그래가지고 애 낳겠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과 무엇의 대립입니까? 솔로몬이 갖고 있던 그 세계하고 기존에 인간들이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의 가치를 옹호하는 데에 길들여진 옛 부대, 옛 세대가 마찰을 일으킨 거예요. 마찰을 일으키는데 그럼 솔로몬이 포기합니까? 포기해요? 막 문 열고 들어가요. 문 따고 들어가는데 여자가 몰약을 주고 하는 대목도 나와요(아 5:4-5).
포기합니까? 포기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가서 8장을 보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게 나온 사랑은 무엇을 경유했느냐 하면 8장 6절,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소유성이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 본문에 심판 나오잖아요. 이미 무사히 거뜬하게 심판을, 지옥 불을, 저주를 통과한 그 사랑으로 나는 너에게 지금 다가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중첩이에요. 중첩.
그러면 지옥에 누가 가죠? 마귀가 가잖아요. 마귀와 그 졸개들이 가잖아요. 마귀와 그 졸개들은 자기의 기존 시공간 안에서 자기 다칠까 싶어서, 내 위신 완전히 작살날까 싶어서… 내 가치가 남한테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로 노출돼서 내가 얼굴들 수 없다는 그것, ‘그 인간 그렇게 됐단다. 세상에 그렇게 될 줄 몰랐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갈 곳은 뭡니까? 넥타이로 목매고 자살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가룟 유다처럼.
가룟 유다가 자살했습니다. 왜요? 자기 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악마가 꽉 누르고 있으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거기서 벗어날 탈출구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미 아가에 나오는 솔로몬의 사랑은 반드시 무엇을 거쳐야 되느냐 하면 지옥, 여호와의 저주를 겪어서 다시는 저주가 없고 심판이 없는 걸로 되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에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경험한 게 뭡니까?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가 주신 저주를 사흘 만에 통과했잖아요. 통과한 그 효과로 주어진 것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넘어온 겁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뭐냐? 사랑 덩어리다? 아니요. 중첩되어 있어요. 중첩. 왜냐하면 ‘내가 뭘 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루어진다’ 이렇게 되어야죠. 주님의 사랑의 증인으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뭘 소유하는 게 아니고. 주님 소유해서 할 게 뭐 있는데요? 주님만 우리를 소유하면 되지, 우리가 왜 또 주님을 소유해야 돼요?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거예요. 철저한 종으로서. 그게 아들이에요.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꼭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표정들이. 그런 표정이 아니겠지요.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지옥 불에 가는 사람 리스트,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명단을 불러주겠습니다. 어떤 자가 지옥 가느냐 하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 이게 인력으로 되겠어요? 마귀가 모가지를 꽉 잡고 있는데. 그다음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
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자기로부터 자기 위신과 가치에 정신 팔려 있는 사람들이에요. 중첩이 안 되어 있어서 ‘결국 이 세상에 아무도 내 의미를 지켜줄 사람은 없다. 오직 나만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지킨다. 너 나랑 같이 살자.’ 이게 불교 아닙니까. 불교에서 깨달음이 그 깨달음이에요.
‘나는 신이다.’ 솔직하게 나는 신이라고 그 이야기해요, 차라리. ‘나는 부족한 인간이다.’하고 쓸데없는 위장책 쓰지 말고. 결국 나는 끝까지 나를 못 버린다. 왜? 나는 신이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나는 나에게 신이란 말이죠. 나는 그 신의 신자고. 나는 나의 교주고. 끝! 누구 나 사랑해줄 사람 없습니까? I'm in love for the very first time~ 이런 식으로 나를 옴팍 사랑해줄 사람 없습니까? 나는 고맙다 하겠습니다. 이건 뭡니까?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서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몸부림치는 그러한 인생 여정이 되겠지요.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편입된 것을 알기에 우리를 통해서 어떤 말씀이 새삼스럽게 증거되는지 거기에만 관심 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