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말씀과 말씀의 만남

아빠와 함께 2026. 4. 19. 08:25

서울강의20260416a 요한일서 5장 15절(말씀과 말씀의 만남)-이 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을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여기에 ‘담대함’이라는 말이 나와요. 담대함.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담대함을 주께서 우리에게 줬다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어느 설교에서 이렇게 표현했죠. ‘수용체’. 쉬운 말로 하면 ‘쿠팡함’. 새벽에 쿠팡으로 택배 받으려면 밖에 내놔야 되는 게 있죠. 함에 반납할 물건을 담아서 내놓거나 함을 내놓으면 거기에 물건을 담아주거나 그러잖아요. 이걸 자기 거라고 바깥에 들고 다니면 안 되겠죠?

쿠팡함. 쿠팡함은 주문하는 자의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쿠팡 회사 거잖아요. ‘여기에 담으세요’ 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수용체’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담대함’이라고 했어요. 쿠팡함, 담대함이 빠져버리면 우리 인생은 뭡니까? 아, 아슬아슬해요. 불안 불안하고. 왠지 초조하고. 아무 문제없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미리 또 초조하고.

그것은 뭔가 내게 있어서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것이에요. 담대함이죠. 외부적인 담대함이에요. 세상을 이긴 그 담대함, 쿠팡백 같은 게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인생 문제를 내가 처리하려고 하니까 이건 뭐 평안해도 걱정이고 문제 생기면 ‘우짤꼬? 어찌할꼬?’ 이렇게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수용체’라 하는 것은 ‘뭔가 외부에서 와 달라붙을 때, 하늘의 것을 받아줄 수 있는 그 수용체 안에서 우리 만나자.’ 이렇게 되겠죠. 어떻게 만나자? ‘담대함으로 만나자.

수용체, 쿠팡 물건을 집어넣는 함은 우리가 제조한 게 아니잖아요. 이 수용체가 뭔지 알기 위해서는 같은 사도 요한이 썼던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그게 뭔지 볼 수 있죠.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짐을 했어요. 분명히 언질을 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니까 가짜 수용체는 어떤 것이 되겠어요? 내가 주님을 결정해서 믿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가짜죠. 이걸 제거해야 돼요. ‘야, 이거 예수 믿으면 나중에 천국 갈 수 있겠네. 한번 믿어봐야지.’ 그것은 거부당합니다. 그걸 빼야 돼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이것은 벌써 인간의 의도를 다 꿰뚫어보시면서 하시는 이야기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수용체가 주어지면서 교체될 게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헌 집 다오 새 집 줄게’ 있잖아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다오 새 것 줄게.’

서울은 모르겠습니다만, 주택가나 빌라에 음식찌꺼기 담는 통을 나눠줘요, 동사무소에서. 수용체죠. 그리고 재활용 망을 또 줘요.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몰라요. 그러면 금요일 밤에 그걸 내놓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재활용 플라스틱 같은 걸 내놓는다고요. 그게 바로 수용체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담대함. “네 거 아니잖아. 내가 담으라고 줬잖아, 내가. 네가 왜 벌벌 떨고 있어? 이상하네. 내가 담으라고 준 거야.” 담대함을 제공한 거예요. 그 담대함은 뭐냐 하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야, 저 분 믿어야 되겠다,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다음 뭡니까?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4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죠. 성경을 보면 성경 내용이 점점 더 추가적으로 보충되고 보충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14장 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어디에 꽂히느냐?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라’ 여기에 딱 꽂혀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꽂혀 있으면 안돼요. 어디에 꽂혀야 되느냐? 13절에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는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을 인하여 영광을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습니다. 기도하는 나 당사자로 인해서는 영광을 안 받아요. 담대함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기도하는 것이 옮겨짐으로써 옮겨진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거예요. ‘나는 이걸 원하지만, 쿠팡함에다 이걸 옮기겠습니다.’ 이걸 옮겨놓는 거예요. ‘불안 불안한 우리를 담대함으로 옮겨놓습니다.’ 옮기는 거예요. 옮기는 것을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는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함이라. 이미 주어진 과실이 이제 너희에게까지 파급되게 함이라.

요새 성주 참외 맛있어요. 장날에 가서 만원 어치 사니까 작은 거 한 개 더 끼워줬어요. 열매죠, 작은 거. 그런데 작은 게 더 맛있는 거 같아요. ‘너희 과실을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과실인데, 우리 것까지 신경써가지고 아버지와 아들의 열매가 우리 안에도 맺히도록 조치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과실은 네가 갖고 있지 말고 쿠팡함에 담아서 나한테 이전시키라. 그러면 너로 인하여 영광 안 받는다. 누구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영광 받는 그 구조, 확정된 틀, 그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성경의 논리를 따라서 이렇게 같이 봤는데요. 그것하고 오늘 요한일서 5장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씀과 연관을 시켜놨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대목에 와보면 뭔가 중간에 막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막혀있는 거예요. 어떤 점이 막혀 있느냐 하면, ‘보편성’이 막혀있어요.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든 이유는 주님이 힘든 게 아니고 이것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게 안돼서 힘들어요, 눈에 보이는 것.

아까 짜장면 먹으면서 우리 권사님이 이야기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뭐냐 하면, 이란 전쟁이에요, 이란 전쟁. 이란 전쟁이 없다면 한국 경제문제라든지 정치문제 이런 것들이 있겠죠. 또는 이웃집이 새로 이사 왔는데 층간소음이 있다. 이게 다 뭐에요? 눈에 보이는 거죠. 딸이 교회가지 마라고 한다. 이게 뭡니까? 딸의 존재가 뭐에요? 눈에 보이는 거죠. 이사를 가야되는데 집이 안 팔린다. 이게 뭡니까? 아까 짜장면 먹으면서 한 이야기들 내가 다 써먹습니다.

이게 뭐에요? 눈에 보이는 거죠. 이것 때문에 고민이라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조마조마하다는 거예요. 불안 불안해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문제는 이것 잠재우면 이게 터지고 이거 잠재우면 이게 터져요. 그렇다고요. 세상 전부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삼성하고 한화하고 야구하는데 5대 0으로 이겼다가 5대 6으로 졌어요, 한화가. 볼, 볼, 볼, 볼, 볼, 볼, 볼, 볼. 김경문 감독이 짜증 확 올라오면서 아마 이런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나이도 많으니까.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언제까지 시달려야 하는가?’ 이런 거죠.

이것은 비트코인도 마찬가지고 주식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을, 극뽁!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오늘 쇼부(승부) 한 번 내봅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극복하는 것, 이게 오늘 말씀이 주는 혜택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딸 문제, 이사 가는 문제, 모든 문제. 어떻게 극복하는가?

간단하죠. 저한테는 간단해 보이는데, 그게 뭐냐 하면 노아홍수입니다. 노아홍수 때 남자 열 따로 서고 여자 열 따로 섰습니까? 어린아이 열 따로 어른들 따로 구분했습니까, 노아홍수 때? 물이 막 지배하다가 ‘이건 저택이니까 피하고 가자’ 뭐 이런 게 있습니까? 홍수라 하는 것은 죄가 있는 곳은 다 덮어버렸어요.

그 노아홍수를 그대로 빼닮은 것이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히브리인이든 애굽인이든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전부다 덮쳐요. 그런데 출애굽한 유월절 밤에 천사가 장자들을 다 죽이는데 유일하게 장자 죽이는 업무를 안 하고 넘어간 집이 있죠? 그건 뭐냐 하면 “이 집은 벌써 죽었다. 이 집은 벌써 죽었어. 우리가 죽여야 될 것을 어린 양이 대신 죽여버렸다. 어린 양으로 대체되어 있다. 넘어가자. 애들아, 넘어가자.”하고 넘어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건 히브리인이라도 안 살려줘요. 추가적인 담대함, 안정성이 한방파스 붙이듯이 붙여져서 이게 넘어가줘야 돼요. 어린 양 앞에서는 어떤 차이가 없이. 노아홍수나 어린 양의 심판의 특징은 뭐냐? ‘차이 없음’. ‘보편성 유지’죠, 보편성. 차이가 없고 보편성을 유지하는 겁니다.

모든 차이를 없애버려요. ‘보이는 것들에서 이건 중요한 거고 이건 안 중요하다는, 차이나는 그것을 주님한테 일임하라. 그 업무를 일임하라. 이건 살려야 되고 이건 죽여야 되고 그걸 네 선에서 처리하지 말고 그것은 하나님 나한테 맡겨라.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니까 거룩한 것은 남기고 죄 있는 것은 내가 알아서 죽여줄게.’하고 그 작업을 누구한테 넘겨요?

우리가 이것은 좋은 거고 이것은 나쁜 거라고 골라서, 이것은 앞으로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거고 나한테 실익을 줄 것, 자꾸 이렇게 따져버리면 불안 불안해서 힘들어 못 살아요, 인생을.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를 우리 선에서 말고 주님 선에서 처리하도록 업무를 맡겨야 돼요.

맡기는 방법이 뭐냐? ‘그러면 이제 우리 집에 가서 양 잡아 피 바르면 됩니까? 우리는 죄 안 지으려 해도 죄밖에 없는데, 유황불이라든지 노아홍수 물을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겠죠.

노아홍수 때는 물이었죠. 물로 심판이죠. 그리고 유월절은 뭡니까? 유월절은 천사가 와서 모든 장자를 다 죽였잖아요. 장자를 죽였다는 것은 족보의 제일 윗자리에 있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차남이라든지 살아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는 그 집안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육에 대한 일관성 있는 처벌’, 이것이 바로 유월절 밤의 일이죠. 밤의 일.

우리 송재원 씨가 한번 읽어볼까요? 로마서 8장 7절 한번 읽어보세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스톱! 예, 됐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8장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7장에 보면 우리는 육을 가졌는데 육 안에 괴물 들어있어요.

나는 선하고 싶어요. ‘나는 선해서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어. 착한데, 나 의인인데 설마 나 칠 거 아니죠? 내 인생 망치는 거 아니죠?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사니까 나 힘들게 하지 않을 거죠?’ 이렇게 버티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 더 봤죠. 육을 육으로 보지 않고 육을 영으로 봤죠. 육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본 게 아니고 영적으로 봤죠.

영적으로 보니까 자기 안에 내가 손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게 들어있었어요. 그건 뭐냐? 내가 선을 원한다 해서 내가 선한 사람이 되질 않는다는 사실. 이건 뭐 모든 이 세상 종교가 다 들어야 될 이야기에요. 착하려 한다고 착해지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위선자가 되죠. 도 닦는다고 도 닦여지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 악이 있어서 선한 나까지 이걸 완전히 물속에 집어넣어서 잠수시키는 거예요. 나의 선한 노력까지 짓밟아버리는 거예요. ‘참, 수고했다. 말씀대로 산다고 성경대로 산다고 애 많이 썼다. 그러나, 음메 기 살어. 내가 이겼지, 그치?’라는 걸 발견한 거예요. 원인이 ‘내가 나쁜 짓을 도모하자’가 아니라, 이것은 육신 그 자체의 고유 속성이었던 거예요.

제가 주일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죠. 물려받은 게 그게 다에요, 물려받은 게. 제가 얼마 전 부산강의에서 했는지 ‘아버지가 날 낳은 게 아니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 나를 존재케 하기 위해서 아버지라는 그 기계를 사용해서 이 시대에 태어나게 했다. 아버지 없어도 나는 다른 아버지를 집어넣어서 태어나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난 뒤에… 자기가 옛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잖아요. 이것은 내가 평생 못 놓칠 귀한 것이라고 뭔가 따로 있었는데, 그걸 배설물로 쓰레기로 내놓은 거예요. ‘아, 그게 아니구나. 육신 자체를 우리가 손댈 수 없기 때문에 오신 메시아께서 육신 자체를 근원적으로 죄로 규정하고 처리하셨고,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다. 구원자다.’

구원자라는 것은 새로 시작하자는 거예요, 새로. 이 육신에는 내 이름이 붙어요. 그러나 “네 이름으로 시작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걱정하지 마. 내가 너와 같은 육신을 입었잖아. 아담의 형상? 나도 입었어. 너만 갖고 있는 게 아니야. 네 아담의 형상 포기하고 내 아담의 형상부터 우리 새로 시작하자. 왜? 나는 아버지와 통하거든. 아버지의 모든 것을 성취시켰으니까 이제부터 네 이름 내세우지 말기. 이젠 내 이름으로 살기.”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자, 주의 이름으로 살게 되면 중요한 건 이겁니다. 아직 중요한 것 안 나왔어요. 물 심판-유월절, 그다음에… 보편성이거든요. 물의 보편성으로 모든 호흡 있는 자는 다 죽였잖아요. 유월절은 뭡니까? 양 피 안 바른 사람 다 죽였죠. 지금은 뭐로 죽이냐 하면, ‘예수님의 고통의 보편성, 아픔의 보편성’.

물 심판→유월절→예수님 고통(아픔)의 보편성

주의 이름으로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 주님은 인간에게 있던 모든 저주를 돌파하고 뚫고 나가면서 고통을 겪었던 겁니다. 이제부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어떤 것도 응답이 된다는 그러한 열매, 최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장난삼아 살아온 게 아니고, 인간이 내뱉는 것마다 전부다 죄가 되는 그 자리를 돌파했죠.

다이렉트로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왜 인간의 기도는 응답이 안 되느냐? 그것은 저주받을 인간이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저주에 주께서 풍덩 뛰어들어서, 저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거예요.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 이거 원칙입니다. ‘하나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기도하기 전에 주께서 “먼저 너한테 죄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부터 살피겠다. 어? 죄 있네? 나 네 기도 안 들어줘.” 왜? 네 기도라는 말 본새, 말에 뭐가 섞여 들어갔습니까? 죄. 죄가 섞여 들어간 거예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 이전에 뭐가 있습니까? 절차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이니까, 죄 앞에 욕심이 있었어요. 욕심이라는 것은 마음을 뜻하는데 무슨 마음이냐 하면 하나님 하는 일에 토 달고 이유도 없이 대드는 마귀의 마음이 욕심이에요. 요한복음 8장에 마귀는 욕심의 아비에요(44절). 마귀와 결탁된 이상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봤자 응답하지 않습니다.

잠언서 15장 8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죠.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신다.” 잠언서 15장 29절에도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여기서 자꾸 조건을 걸어요. 어떤 조건이냐? 정직해야 된다는 것과 의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시편 66편 18절에는 마음에 죄를 품지 않아야 된다는 그 조건. 네 조건부터 네가 먼저 한번 살펴봐라. 조건부터 살펴봐라.

그러면 조건을 살피죠.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뭐.’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 아버지가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의 겟세마네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고통’을 수반한 기도였죠. 쓴 잔에 합류하는 기도였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됐고.

그럼 그때 제자들도 같이 기도하면 됐지 않나? 그때 주무셨어요. 겟세마네 기도에 제자 세 명을 데려간 것은, 인간 육신의 한계로서는 예수님의 기도에 합류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주님의 육신도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동일한 보이는 것인데 인간의 육신은 아버지가 내리시는 지옥의 저주를 통과하고 뚫어낼 수 없는 보이는 것인 반면에, 주님의 보이는 육신은 저주를 합류한 육신으로 뚫어낸 거예요.

죄 있는 육신으로서 주님의 저주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겟세마네 기도였던 겁니다. 그렇게 통과할 때 저주를 통과한 유일한 육신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육신이에요. 그 육신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이사야 53장 12절, 성취될 말씀이 거기에 같이 붙어있어요.

이사야 53장 12절, 이것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누가 한번 읽어주셔야 돼요.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는데요? “그러나 실상은”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지금 남의 일을 했어요, 남의 일을. 무능한 자를 위해서 일하셨다고요. 통과를 못하니까. 근본적으로 장착되어있는 주님께 저주받을… 아버지의 원칙에 의하면 범죄한 자의 기도는 주께서는 거부한다 했어요. “구원해주소서.” “이게 미쳤나? 죄인이 어디 구원을 달라 해?”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죠. 범죄자들 천국에 모아서 뭐하는데요? 거기서 뭐 조폭 만들 일 있습니까? 안돼요! 천국은 이미 창세기 3장 24절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배제된 상태에요. 인간은 소외된 상태에요, 천국에서. 어디를 넘봐? 넘보면 안돼요. 넘봤다는 자체도 죄에요. 주제파악도 못하고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요? 못 들어가요, 죄인 주제에.

그러니까 ‘구원해주소서’가 죄가 되죠. 죄가 되는데 인간은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귀 고집이니까. 내가 구원되는 나의 조건을 누가 걸어요? 내가 걸어버려요. 내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을 누가 만들고 걸친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걸쳐요. 아, 요령꾼이죠. 신앙생활이라고 하면서 보니까 태반이 요령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요령, 다른 속 시원한 말로 뭡니까? 꼼수.

‘새로운 나를 구성하는 조건을 내가 이해되는 식으로 집어넣었다.’ 이게 바로 교회죠, 교회. 내가 납득되고 이해되는 순수함의 극치, 순결함의 극치라는 조건들을 내가 나한테 집어넣은 거예요. 이것은 욕심입니다. 나를 나한테 어떤 식으로 작업 걸어서 나로 하여금 주님마저 감동시켜서 주님께서 ‘아, 끈질기다. 아, 알았어. 넣어줄게.’ 뭐 이런 식으로 있잖아요. ‘해서 안되는 게 어디 있어? 열심히 하면 다 되게 되어 있어.’ 하는 그러한 종교적 시도.

그 시도를 누가 가르쳤는가?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았던 시험 중에서 두 번째 시험이 그거였습니다. 종교적인 시험. 첫 번째는 경제적인 것, 두 번째는 종교적인 것, 세 번째는 권력에 관한 것. 우린 거기에 이미 맛 들였어요.

그 조건을 우리 속에서 우리 힘으로 떼낼 수가 없습니다. 왜 못 떼내느냐? 아파요, 떼어내면. 그거 떼어내면 나다운 내가 아니에요. 나다운 내가 안 되니까 내가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내가 그걸 떼내도록 마귀가 가만두지도 않고요.

인간은 그 세 가지 유혹에, 지남철에 쇳조각 딸려가듯이 계속 딸려가는 거예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대전에서 내려야 되는데 부산까지 갔다는 노래가 있어요. 가사를 보면 이래요. 제목이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 제목이 길어요. 왜 부산까지 갔느냐 하면 앞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너무 예쁜데, 그 아가씨가 대전에서 내릴 기미가 안 보이네. 자기는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 가자. 그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 부산까지 가다보니 자기 목적지도 아닌데 부산까지 갔어요. 가서 됐나? 안됐어요. 실패했어요. 그게 가사 내용이에요. 제목은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 <무명전설> 프로그램에 보면 그 노래 나와요.

인간은 벌써 마귀의 지남철에 의해 당겨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문제와 종교문제, 자기 의롭게 되는 거요, 의로우려면 권력도 얼추 있어야죠, 권력문제, 이거 한번 맛들이면 그 맛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중간에 못 내려요. 끝까지 마귀가 가는 곳으로 방향을 틀어서 같이 지옥까지 따라갑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걸 줬다는 것은 영적으로 봤을 때 마귀가 준 거고, 광야에서 예수님의 눈으로 봤을 때 그런 거고요. 보통 이 세상에서는 그 세 가지 유혹을 누가 주느냐? ‘왜 인간은 이러한 눈에 보이는 것을 극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인간과 인간을 대비시키면서 살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눈에 보이는데 개나 소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고 진짜 눈에 보이는 것이 누굽니까? 누구 때문에 마음이 속상하냐 하면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보이니까요. 타인을 거치지 않으면 내가 규정되지 못해요. 지금까지 살면서 다 ‘너는 이래야 돼. 너는 이렇게 되어야 돼. 그래야 네가 능력자야. 그래야 네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거야.’ 꼭 타인이 나에게 내가 누구냐를 규정해주는 겁니다. 남이 규정을 해준다고요.

그 기준에 못 미치게 되면 그 기준의 미흡함 때문에 사람은 돌아버려요. 우울증 걸리고 돌아버린다고요. 남들이 요구하는 기준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이거 맞춰야 되고, 이거 맞춰야 되고, 이거 맞춰야 되고…. 그러니까 사는 게 불안 불안한 거예요. ‘다른 사람이 와서 나한테 뭐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살지?’ 이런 거요.

자,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할 때 뭐를 뜯어내겠습니까? 아까 적어놨는데요. 새로운 나라고 여기면서 새로운 나를 구성하는 조건을 내가 이해되는 식으로 집어넣는 이것, 이 악마의 조건을 주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뜯어내겠죠. 이걸 뜯어내야 돼요. 왜?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제 딸이 부산에서 대구 오는데, 기차로 부산역에서 SRT타고 울산 지나서 경주를 거쳐 오거든요. 경주에서 대구까지 한 20분도 안 걸릴 거예요. 이상하게 대구 쪽으로 와야 될 기차가 느낌상 자꾸 거꾸로 가는 거예요. 기차 기관사가 잘못됐는지 조종이 잘못됐는지 이게 포항으로 갔대요. 그래서 38분 동안 다시 거꾸로 왔다고요. 대구서 내려야 되는데 포항 가서 내릴 뻔했던 거예요.

방향이… 예수님께서 오실 때 마귀가 그렇게 예수님을 말렸어요. “이런 짓 고만하세요. 이 세상 우리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자꾸 말리는 이유가 방향이 반대방향이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종교적으로 알려준 것은 ‘우리는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면 됩니다.’라고 교회를 통해서 유포시켜놨는데 그 하나님이 마귀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사랑의’ 하나님을 붙여버렸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좋은 분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봤죠? 이사야 53장 12절에서, 하나님을 찾던 그들이 예수님을 뭐로 봤습니까? 범죄자로 만들었죠. 인식 자체가 터무니없이 대비되는 인식인데, 자생적으로 우리 안에서는 그 인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는 그런 인식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모든 죄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서는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53장 2절에 보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여기서 내린 결론은 ‘말씀 접근 금지’. 자동적으로 이 분위기가 형성되었어요. 모든 인간은 말씀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어요. 이건 뭐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에요. 몽땅 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좋은 하나님, 고통을 면제해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봤어요.

그러나 접근이 금지된 말씀은 예수님의 고통을 통과해야 비로소 말씀세계 속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고통. 그런데 예수님의 고통은 개인적이라서 어떤 사람도 그 고통에 접근하지 못하죠.

아까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의 고통에 참여해서 인간세계, 저주받은 세계에서 말씀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을 따로 구분했는데 그것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친구’라고 불렀어요.

친구라 부르고 악마 속에 있는 친구를 지금 예수님께서 내 속에 있으려면 그냥 못 가고 죽음의 고통을 통과해야 데려올 수 있잖아요. 지금 그 일을 주께서는 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걸 간단히 얘기하면, 친구를 위해서 돈을 준다든지 친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높여준다든지 친구를 위해서 권력을 주는 게 아니고요. 그것은 마귀가 친구 행세를 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유사 친구로서 하는 거고요.

진짜 친구는 뭐냐? 예수님 쪽에서 목숨을 버림으로써 데려오는데 예수님이 목숨 버리는 장소가 어디죠? 하늘나라입니까, 이 땅입니까? 이 땅이죠. 이 땅에서 주님은 목숨을 버림으로써,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을 말씀의 세계,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천국 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친구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주장이죠. 왜? 접근 금지되어 있으니까. 일방적인 주장이라고요.

그러면 아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고 했잖아요.’라고 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 되시는 분이 아버지 앞에서 어떤 기도를 했는가?’ 그것이 규정되어야죠. 이름만 달랑 따와서 주문 외우듯이 하는 게 아니고요.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아버지 앞에서 어떤 기도의 현장성을 형성했는가?’ 이 말입니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그다음 뭡니까? ‘아휴…’이런 거죠. “탄식으로” 그다음 탄식으로 우리보고 기도시킵니까, 뭐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꼬라지 하고는. 저것도 기도라고. 아이고, 이 답답아, 답답아.” 탄식하는 거예요. 저게 무슨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자기가 장난치는 거지.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아니야, 아니야. 그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야.’라고 늘 일깨워주는 것. 그럴 때 우리는 그 성령의 기도 앞에서 내 기도는 먹히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는 욕심에서 나와서 들어주지도 않아요.

그럼 우리는 여기서 이제 배짱이 생겨요. ‘뭐 해봐도 엉터리인 걸. 아마추어가 뭘 하겠어? 나 안할래. 나 기도 안한다! 천부여, 손들고 나옵니다. 기도 안하기로 손들고 나옵니다.’ 기도 안하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이 세상에서 일을 벌이신 분이 주님이에요. 주님은 친구 모집을 멈칫하거나 포기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해놨기 때문에. “나는 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주님의 친구 돼야지.’ 이것은 삐- 친구 아닙니다. 친구 아닌 자를 친구 되게 하는 작업에 나서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만이 아는 고유의 고통으로 찾아들게 만들죠. 그러면 우리는 기도 안한다고 버티질 못합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어찌합니까~’ 하는 거 있죠.

여기에 대해서 정말 주께서 찾아왔다, 안 왔다를 뭐로 판정내릴 수 있느냐? 판정내리는 그런 자국이라든지 증상이 있는가? 있습니다. 이거에요. ‘무엇이 감사를 막는가?’라는 겁니다. 이 질문. 이 질문과 대비해서 나쁜 질문,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 있어요. ‘주님, 어떻게 하면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무엇이 감사를 막는가?’라는 질문과 배치됩니다. 이 질문은 마귀가 하는 질문이에요. 마귀가 우리를 평생토록 속이는 질문입니다. 정말 주님의, 성령의 질문은 뭐냐? ‘무엇이 그동안 감사를 막았던가?’

정답 나옵니다. 누가 감사를 막아요? 문제 쉬워요. ①무엇이 감사를 막는가? ②주여, 어떻게 하면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삽니까? 할 때, 무엇이 감사를 막았습니까? ②번. ②번이 ①번을 막은 거예요! 내가 언제 너보고 뭐 하라 하더냐 이 말이죠. 중요한 것은 네가 감사하지 않는 거예요.

‘주님, 어떻게 하면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수백 가지의 노림수가 있어요. 남들의 좋은 평가를 내가 유지할 수 있겠다는 꼼수가 작용한다니까요, 꼼수가. ‘이 정도하면 신앙인 맞잖아. 남들 앞에 나도 신앙인이라고 내세울 수 있잖아.’하는 이 꼼수가 아직도 자기 자신, 자기 이름을 포기 못한 채 자기 이름은 그대로 살아있고 여기다가 위선적으로 주의 이름을 파스 붙이듯이 엉터리로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이게.

‘무엇이 감사를 막는가?’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너 자체가 주님 보기에 감사거리다’. 네 이름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소유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누구의 이름으로? 너 자체가 주의 이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네가 벌써 합류되었다는 것을 성령을 받아서 알게 되면 질문이 이렇게 바뀌어요. ‘무엇이 이 순간에, 지금 몇 시지? 몇 시 된 이 순간에 무엇이 감사를 막고 있지?’

김경문 감독? 한화의 마지막 투수? 포수가 똑바로 던지라고 그렇게 해도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고… 삼성은 가만있다가 점수 다 났어요. 희한한 야구에요. 아이구, 답답아. 탄식하는데 도대체 왜 탄식해요? 우리는 이것 때문에 탄식해야 돼요. ‘바르게 살게 해주옵소서.’ 왜? 왜? 진짜 천사가 와서 인터뷰하고 싶다. “네가 왜 바르게 살아야 돼?” “멋있잖아요.” “아직 멀었다. 너 많이 맞아야 되겠다. 많이 맞아야 되겠어.”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면 동의하면 돼요. ‘그렇습니다.’ 하면 돼요. 다만 그동안 복잡다단한 인생을 부단히 살면서 마귀가 끈질기게 ‘주님, 어떻게 하면 내가 주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왜? 마귀는 알거든요. 주의 하는 일에 감사만 틀어막으면 인간은 자기가 마귀에게 스스로 놀아나서 우울증 걸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발작을 일으켜요. 더 더 더… 자기가 자기한테 채찍질하면서 ‘더 더 더 바르게’ 이러고 있다고요. “뭐 하냐, 너? 너 지금 뭐하고 있어?” 진짜 천사가 와서 보기에 같잖지도 않은 행동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방금 한 것이 성경 본문 여러 군데서 어떻게 ①번이 맞고 ②번이 틀렸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60416b 요한일서 5장 15절(말씀과 말씀의 만남)-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사람 대 사람의 대비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구성하는 조건을 뭐로 바꾸느냐? ‘사람 대 사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말씀과 말씀’으로 만나면 되잖아요, 카페에서. 너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말씀으로 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말씀이 낳은 열매로 보겠다.

그렇다면 안 만나고 싶어도 서로 당기죠. 당기면서 말씀을 빙자해서 다른 걸 노리는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이런 현실을 만들어냈음을 같이 공유하는 겁니다. 프린트한 것 한번 봅시다. 진짜 간만에 가스펠송을 이렇게 하나 했어요.

[Morning has broken]
(Cat Stevens, 1972)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아침이 밝아왔네. 마치 처음 맞는 아침처럼

처음 맞는 아침처럼. 처음. 처음이에요. first morning이에요.

Blackbird has spoken like the first bird
검은 새가 노래하네. 마치 세상 첫 새처럼

the first bird, 첫 번째 새처럼. 가사가 심오하죠? 첫 번째. 어제 말씀의 창조주하고 오늘 말씀의 창조주가 다르다는 말이에요. 나의 동일성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이미 우리는 우리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어제의 내가 나를 붙들고 오늘의 나를 만든 게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일 안하죠. 하나님이 일하시려면 새로움으로, 말씀의 새로움으로 일하는 거예요.

Praise for the singing, praise for the morning
노래하는 소리에 찬양을, 아침에 찬양을

Praise for them springing fresh from the world
세상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모든 것에 찬양을

왜 이렇게 새로우냐? 찬양하기 위해서.

Sweet the rain's new fall, sunlit from Heaven
하늘의 햇살 속에 내리는 새 빗방울은 참으로 달콤하네

Like the first dewfall on the first grass
마치 처음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처음’이 도대체 몇 번 나오는지. 계속 나와요. 처음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Praise for the sweetness of the wet garden
촉촉한 정원의 달콤함을 찬양하라

정원이 뭐냐? 에덴동산이죠, 뭐. ‘garden’인데 에덴동산이라고 보면 돼요.

Sprung in completeness where His feet pass
그분이 지나가신 자리마다 완전한 생명이 피어났네.

‘His’ 대문자 썼죠.

Mine is the sunlight, mine is the morning
나의 것은 이 햇살, 나의 것은 이 아침

Born of the One Light Eden saw play
에덴에서 빛나던 그 하나의 빛에서 태어난 것

에덴의 그 빛이 계속해서 지금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서 비 내리듯이, 알파요 오메가, 시작과 끝으로 완성되어버린 말씀 속에서 에덴에 있었던 그 빛과 나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새 창조를 우리에게 제공했다. 매일같이 다시 태어나게 한다.

Praise with elation, praise every morning
기쁨으로 찬양하라, 매일 아침 찬양하라

God's recreation of the new day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이 하루를

Morning has broken like the first morning
아침이 밝아왔네. 마치 처음 맞는 아침처럼

새로운 주님 자신의 작품이에요. 새로운 열매. 이것은 인간은 배제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결과물이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이 가사 내용에 의하면, 성도가 낄 자리가 없어요. 성도의 행함이 여기에 끼면 안돼요. 이미 우리는 육신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 문제를 씻으려고 애쓰면 안 된다 이 말이죠. 해결한 분이 있는데, 그 해결한 분이 처리하면 되잖아요.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그럼 우리는 ‘내가 해결할 수 없으면 해결을 누가 해주는가?’ 여기에 친구가 있죠. 아까 친구 이야기했잖아요. 여기 [Ben]이라고 마이클잭슨이 불렀던 노래인데요.

[Ben]
(1972, Michael Jackson)

Ben, the two of us need look no more
We both found what we were looking for
With the friend to call my own
I'll never be alone
벤, 우리 두 사람은 더 이상 다른 곳을 볼 필요 없어
나의 사람이라 부를 친구가 있으니 난 결코 외롭지 않을 거야

And you, my friend will see
You've got a friend in me (you've got a friend in me)
그리고 네가 내 친구인 것을 너도 알 거야
네가 내 안에서 친구를 얻었다는 것을

아, 이 대목이 중요하죠. ‘네가 내 친구인 것을 너도 알 거야.’ 예수님이 친구인 것을 너는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성령, 친구의 영을 보내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 너한테 도착했을 걸? 그게 수용체에요. 그러니 성도가 십자가 외에는 내세울 필요 없어요. 뭐 헌금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필요 없어요.

주께서 하신 그 마무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면 그때부터는 뭐냐? 주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줬다는 거예요. 우리의 친구는 주님이 아닙니다. 그건 김대중이 이야기한 거고요. 주님의 친구가 우리죠. 주님 쪽에서 목숨을 바치지, 우리는 목숨을 바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목숨은 왜 안 받습니까? 더러워서 안 받아요. 옴팍 깨끗한 목숨만이 우리를 접수해야 되지, 거기다가 더러운 우리 목숨이 섞이면 보일러 폭발해버립니다.

Ben, you're always running here and there (her and there)
You feel you're not wanted anywhere (anywhere)
벤, 너는 항상 여기저기 뛰어다녔지
넌 어디서도 너를 원하지 않는다고 느꼈지

자기 좋아하는 사람 찾기 위해서 따라다녔지만 별로 좋아하는 사람 없었죠. 하지만,

If you ever look behind
And don't like what you find
There's something you should know
You‘ve got a place to go (you've got a place to go)
만약 네가 (지난 날을) 뒤돌아본다면
그리고 네가 발견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너도 네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어

I used to say, I and me
Now it's us, now it's we
(I used to say, I and me)
(Now it's us, now it's we)
(옛날부터) 난 말해왔어. 나는 나라고
지금은 우리야. 지금은 우리야

함께. 요한복음 17장 이야기죠. 너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21-23절, 26절)

Ben, most people would turn you away (turn you away)
I don't listen to a word they say (a word they say)
벤, 대부분 사람들이 네게 등을 돌려도
너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유발하겠죠. 특히 마귀 나라에서 시기를 유발하겠죠. 어떻게 유발합니까?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이런 식으로. 그럼 우리 답변은 뭐냐? “몰라. 그건 굳이 내가 알 필요 없어.”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나오잖아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다음 질문은 뭡니까? “그 말씀이 어떻게 믿어져?” “몰라. 성경에 보니까 기름 부음이 있대, 요한일서 2장 27절. 성령이 오니까 믿어졌어.” “그럼 네가 구원받는 데에 네가 한 것은?” “없어. 아, 있네. 죄만 짓는 것.” 죄만 짓는 것 외에는 없죠.

They don't see you as I do
I wish they would try to
그들은 내가 너를 보는 것처럼 보지 않아
나는 바라. 그들도 노력했으면.

I'm sure they'd think again
If they had a friend like Ben
(A friend)
Like Ben
(Like Ben)
Like Ben
나는 확신해. 그들도 다시 생각할 거야
만약 그들이 벤 같은 친구를 가진다면 말이야

이 세상에 벤 같은 친구는 없다. ‘주님 같은 분은 없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죠.

자, 왜 이 두 곡을 내가 선정했느냐 하면, ‘Morning has broken’에서 누굴 쳐다보느냐? 위를 쳐다보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주님이 안 보이잖아요. 현실적으로 우리 육신은 보이잖아요. 육신이 보이는 인간의 한계는 뭐냐? 보이는 인간만, 보이는 것들만 찾아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려는 이 버릇은 육신 때문에 계속해서 있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그걸 감안해서 우리에게 보이는 사람을 보내준 거예요. 사람은 차이 나게 마련인데, 만나면 어떻게 차이나지 않는, 공유하는 생각을 함유하는 사람을 만나는가? 기적이죠. 둘 다 동일한 말씀의 내용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만남, 이게 바로 교회죠. 그게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누구든지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내가 함께하겠다, 거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처럼 서로 차이나고 모르는 사이라도 말씀, 말씀가지고 말씀 수용체를 집어넣어서 둘이 만나면, 자기 자랑 이야기? 아니죠. 우리 주님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만나는 작업을 하는 근거를 이제부터 제가 제시하겠습니다. 그 근거가 구약성경에 나와요. 구약성경은 집단입니다. ‘집단’은 수학 용어로 ‘집합’이죠. 어떤 집합? 열린 집합이죠. 열린 집합인데, 열린 집합으로 해놓고 곧장 닫힌 집합으로 만들어버려요. 열린 집합⇒닫힌 집합.

‘빼꼼히’. ‘빼꼼히’가 뭐냐? 누가 집에 왔을 때 ‘딩동~’하면 문 열잖아요. 그럼 그냥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니에요. 빼꼼히 봐서 “왜 오셨습니까? 어디서 오셨습니까? 볼 일 없으면 돌아가시죠.” 이게 ‘빼꼼히’ 아닙니까. 이게 ‘빼꼼히’라고요.

열렸는데, 건질 때는 열어놓고, 열어놓고는 닫는 거예요. ‘폐쇄집단’이에요, 폐쇄집단. 이스라엘 전체를 주님께서 언약에 의해 폐쇄집단으로 만들어놓고, 그쪽에 이방인도 섞였으니까 약간은 열어놨지만 폐쇄집단으로 만들어놓고, 이 폐쇄집단이 국수주의로 되는 것, ‘우리들끼리’ 했을 때 자체적으로 폭발해버려요.

폭발해서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산강의에서 했던 것, 여러분들 그 현장에 없었잖아요, 잘 보여드리겠습니다. 구면(球面), 공이죠. 구면을 보면 곡률이 있어서 기울어져요. 그런데 표면을 짧게 아주 작은 영역으로 끊어버리면 이것은 구면이 아니고 평면이 돼요. 평면 된다고요. 휘어진 게 안 보여요.

그러면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내 것, 내 집 이렇게 살게 되면 여기서 ‘최선을 다하여 내 것 지켜내기’가 되면서 바깥에는 이게 죄라는 것을 규정할 게 없어진다고요. 크게 보면 죄인데, 끊어놓으니까 이것은 자기 정당성이 되면서 자기 의가 누적되어버려요. ‘내 인생 열심히 살았다. 뭐 어쩌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산다는 것은 다른 것과 대비해보면 이미 이것은 휘어진 거고, 내가 살기 위해서 남한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래요, 전체적으로.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항상 자기 의를 정당화하다 보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사는 게 이게 뭐가 잘못이냐? 자꾸 죄인, 죄인 하는데 도대체 나는 왜 죄인인지를 모르겠다.’ 코딱지만큼 봤거든요. 자기 정당한 것만 골라서 수집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항상 좁게 세상을 바라보니까 자기 생존에 기반을 둔 정당성이 있어서 물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 없다고 원망했죠. 넓게 보는 관점에서 보면 원망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그 죄가 주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가리거든요.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죄를 죄대로 노출시키고 감사를 감사로 다시 집어넣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되겠죠.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었잖아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자 무섭다. 그치? 무섭지?” 언젠가 그런 질문했죠.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은 다리오 왕이 잔인하냐, 거기서 살아있는 다니엘이 잔인하냐?’ 했어요. 다니엘은 말합니다. “이게 뭐가 무서워? 사자는 네가 무서워하잖아, 네가.”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 세 친구를 불 속에 넣었죠. “이래도 안 무서워? 무섭지? 무섭지?” 본인이 무서운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한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 세 친구는 “이게 뭐가 무서워?” 다니엘과 다니엘 세 친구가 진짜 무서워하는 것은 따로 있어요. 이 세상이 요단강을 찾지 못할까봐 그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나를 육에서 영으로 바꾸는 그 지점을 못 찾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에요.

그것은 우주 전체를 다 동원시켜서 만든 지점이거든요. 요단강에 뭐가 있기 때문에? 아까 안양강의에서 했죠?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어린 양의 피를 반복시키는 사건의 현장, 그걸 십자가에서 완성하잖아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은 십자가 달린 앞에서 내가 비치지 않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에요. 무섭죠? 십자가가 사라지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에요.

감사해야 되는데 다른 사소한 걸로 짜증내는 거예요. ‘짜장면 맛 하고는…’ 이런 거요. 그 짜장면, 가자 지구에 가보세요. 얼마나 귀한 음식인지. ‘생수를 먹어야지, 어떻게 수돗물을 그냥 먹나?’ 지금 이란 테헤란에 가보세요. 물 없어서 피난길 갑니다. 이란은 얼마나 가문지, 지금 몇 년째 가물어요.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죄라고 규정하는 그 원천을 찾지 못하게 되면 계속 자기는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서 나는 남한테 피해주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그렇게 우기는 겁니다. 주님께서 찾아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거기서 주님의 교체작업과 접근되고 마주했는지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보고 찬찬히 여러분에게 계속 질문 던질게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모세’, 눈에 보이죠.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광야가 보이죠. 눈에 보이는 겁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의 세계에 살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는 아예 못 봐요. ‘뱀’, 보였죠? 뱀을 든 것도 보였죠. 가라앉은 뱀 말고 뱀을 든 것을 봤죠. 봤습니다. 이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민수기 21장에 보면,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냈어요. 21장 5절에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했단 말이죠.

이 말씀을 보면서 방금 제가 한 것처럼 보세요. 이게 눈에 보인다는 거예요. 인간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못 봐요. 보이는 것만 봐요. 그런데 아까 ‘Morning has broken’은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노래하잖아요. 보이는 것에 국한되어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로 옮겨서 그 곡면을 크게 넓혀 버리면, ‘나 죄인 아니야. 나는 최선을 다해 반듯하게 살았어.’라는 그것이 ‘아, 이게 바로 죄구나!’라는 넓은 범위에서 죄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그 기회를 주께서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21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7절을 보면 중요한 테마가 나오죠. 원망했는데 죽었다. 모세한테는 당연하고 하나님한테는 당연한데 누구한테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인간들한테는 당연하지 않아요. 왜? 그들은 한 집단으로 움직이는데 어쨌든 저쨌든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죽는다는 것, 우리 일가친척을 죽이는 것은 본인들 하나의 집단 입장에서는 용납되지 않아요.

처음에는 애굽에서 나온 것 때문에 원망하고 그다음에 광야에서 고생한 것 때문에 원망하다가 이제는 뭘 원망합니까? 같은 동료가 죽는 것에 대해서 원망을 해요. 그래서 백성이 눈에 보이는 모세보고 이야기했어요.

아까 모세가 보인다는 말을 왜 그렇게 강조했느냐 하면, 하나님보고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보고 따지는 거예요. 왜? 눈에 보이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게 아니에요. 누구보고 원망하고 공격해서 죽였습니까? 눈에 보이는 예수님보고 공격한 거예요, 예수님보고.

똑같은 현상이 오늘날 난데없이 성령 받아서 성도가 된 사람보고 주변 사람들이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왜? 눈에 보이니까. 인간은 보이는 것의 한계를 못 벗어나요. 보이는 거니까. “네가 뭔데 너는 나하고 다르다고 우기느냐?” 이런 식으로. 그러면 성도가 말하죠. “나는 다르다고 한 게 아니고 같다고 이야기한 건데. 다 같이 죄인이다.” 그럼 안 믿는 사람이 “그게 문제야. 인간은 달라.” “그래, 난 달라.” “그게 문제야. 인간은 다 같이 똑같아.” “그래, 같아.” “그게 문제야.” 서로 관점 자체가 애초부터 어깃장 났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풀어져 나오는 논리 자체가 어떤 논리를 해도 맞다 하면 틀리고 틀리다 하면 맞고 이래요.

모세도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따져도 왜 나보고 따지냐 이 말이죠. 하나님보고 따지지, 꼭 모세보고 따져요. 7절,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기도해요,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기도 독촉을 요구하는 거예요, 모세보고. 당신이 기도 잘하잖아. 그러니까 당신이 기도해서 뱀들을 떠나게 해 달라.

지금 인간들의 한계가 뭐냐? 인간들의 한계는 ‘날 건드리지 마라. 왜? 나는 의로우니까 건드리면 안 돼. 나의 존재는 중요하니까. 다만 지금 뱀이 나를 건드려왔기 때문에…’ 기도내용을 누가 정해요? 아까 나의 인간됨의 조건을 누가 정한다 했어요? 본인이 정하는 거예요. 본인이 정하고 정한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것도 주의 이름을 동원해서.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요. 기도내용을 본인이 정해놓고 본인이 기도해버리는 거예요. ‘뱀이 나 건드리지 말고 물러나게 해 달라.’ 이게 하나님이 해야 될 도리라고 하나님의 본질을 인간들이 정해버렸어요. 우리가 꼭 같은 한통속이에요. 같은 육신을 입었으니까 우리도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합니다.

뱀을 떠나게 해 달라 했거든요. 방법은 뭐냐? 뱀이 나가버리면 이 마음은 안 변해요. 그럼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뭘 바꿔야 돼요? 인간의 마음 자리에다가 뭘 집어넣어야 돼요?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 계시의 완성성, 말씀을 집어넣어버려야 되죠. 그 작업은 뭐냐? 말씀을 위배했잖아요, 이 사람들이. 위배했으니까 위배한 인간에다 ‘말씀 위배했음’을 아로새기면 되겠죠? 참 쉽죠?

어린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게 되면 그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요구하는 게 뭐냐? 저 회초리 치워버리라는 거예요. 우리 말로 합시다. 우리 말로 하자. 호르무즈 해협, 말로 합시다. 미사일 쏘지 말고. 회초리 치워달라는 거예요. 어머니의 말씀이 옳고 그른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아. 싫어. 다만 회초리라는, 물리적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걸 치워버리라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데 어떤 예수? 예수님의 고통 없는 십자가를 믿겠다는 거예요, 고통 없는 십자가를. 왜? 내 마음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회개하는 조건을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주님께서는 더 이상 나를 때리지 마세요.’ 주님께서 버린 인간 같으면 안 때려요. 그런데 버리지 않은 인간을 기어이 주님의 친구 삼으려면 예수님이 맞았던 그 고통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어요.

떼어내 달라는 뱀을 가까이 집어넣습니다. ‘뱀이 떠난다, 온다.’ 이게 변화죠. 움직임이죠. 움직이는 것을 고정체로 만들어버렸어요. 고정체. 움직임이 딱딱한 놋으로 만든 고정체가 되게 되면 고정체 안에 뭐를 품었느냐? 지금까지의 모든 변화를 품죠. 품고 있는 거예요. ‘네가 이런 짓해서 뱀은 떠난 게 아니라 되레 너한테 찾아왔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민수기 21장 이야기고요, 요한복음 3장 15절을 봅시다. 아까 읽었지만 또 한 번 읽어볼까요. 15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기절초풍할 말씀입니다. 아니, 인간이 뭐했다고요? 뭐했다고 영생을 얻어요? 뭐하는 자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우리는 놋뱀이 없는데요? 우리는 광야가 아닌데요? 놋뱀도 없는데? 뭘 믿어야 영생을 얻죠? 우리는 불뱀한테 물려본 적이 없는데요?

눈에 보이는 것의 연속성이에요. 아까 내가 여러 번 짜증나게 이야기했잖아요. 모세 보인다, 놋뱀 보인다, 뱀 보인다, 다 보인다 했죠? 지금은 그 보이는 것의 연속성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그 놋뱀, 보이는 요소가 지금 보이는 요소 속에 주께서 말씀, 계시니까, 예언이니까 이란에 폭탄 던지듯이 이걸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이 말씀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인자가 십자가 죽고 난 뒤에 하늘로 들리는 거예요, 이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린다.” ‘든 것’이라는 말은 ‘놋뱀이 있다’에 강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요. 놋뱀은 고정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일은 십자가로부터 확정이 되었습니다. 확정이 되는데 놋뱀이 확정될 때 그 확정된 모습이 평면에 눕혀놓은 것이 아니고 세워놨다 이 말이죠. 세워놓아서 어떻게 하느냐?

민수기 21장에 보면, 장대로 만들어놓고 뱀에 물리지 않고 아직 죽지는 않고 살아있는 자가… 뱀에 물린 건 알아요. 뱀에 물린 건 아는데 그다음에 나온 말이 있어요. 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있어요. 그것을 “보면”

요한복음 3장에서는 “믿으면”. 민수기에서는 “보면”. 요한복음 3장에서는 “믿으면”! 보는 걸 주특기로 하는 인간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안 믿죠. 그러니까 성령이 와야 믿어지는 거예요, 성령이 와야. 그러면 십자가 이야기도 안 믿는다는 말은 계속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이 안 온 사람이죠.

그럼 성령이 왔다는 것은 뭐냐? 보는 것을 부정해버리는 거죠. 모든 보이는 것에 대해서 노아홍수 속에 집어넣어서 ‘죄’라는 단어로 안에서 그걸 고정화시키는 식으로 보는 안목, 그 안목이 성령 받은 자의 안목입니다. ‘아이고, 야구 한 번 질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지. 그게 뭐 탄식할 문제냐?’ 이런 식으로. ‘올 가을에 가을 야구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이런 거.

‘아이고, 내가 죽으려고 태어난 걸 죽으면 되지.’ 왜? 내가 보이니까요. 보이는 나에 대한 부정이죠, 보이는 나에 대한 부정. ‘죽으라고 만들었으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지. 내가 뭔데 거기서 개기고 반항을 하고 발작하고 난리도 아닌가?’ 뭐에요, 이게.

그러나 사람인 이상 육신이 있는 이상 발작할 수 있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죠.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좀 위험한 문장이지만 적어야 되겠어요. ‘나의 불신을 즐기세요.’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거든요. 믿지 않음으로.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믿음을 갖고 태어났어요. 보이는 것에 대한 지독한 신뢰성. 믿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믿음의 목적지는 뭐냐? 옥시토신(Oxytocin)에 근거를 둔 애착 시스템이라고 해요, 뇌 과학에서. 인간이 죽는 순간에 뇌파를 찍어보니까 자기에 대한 이야기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다 축소화되고 압축이 되어서 주마등같이 날아가는 거예요. 뇌파 조사해보니까.

뇌파에 대한 이미지를 새로운 인공지능에 대입해서 이런 뇌파는 어떤 이미지를 말하느냐, 알아보니까 그 이미지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이미지였어요. ‘미안했었어. 고맙다.’ AI가 문장화시켜보니까 이 문장이 딱 나와요. ‘미안해. 하지만 고마웠어.’ 이 문장으로 나와요. 참, 요새 AI 바빠요. 죽은 인간 죽을 때 그 사람 영상 속에 어떤 이미지가 있는가 그것까지 다 알아내느라.

옥시토신이라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한 시스템을 네이처(Nature, 종합 과학 학술지) 논문에서 발표했어요. 최근 논문이에요. 인간이 죽을 때 마지막 남는 것은 지독한 자기 애착이에요. 이걸 뭐 과학적으로 연구할 게 아니고 성경에 나오잖아요, 성경에.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지지 않으면 방향이 내 쪽 가는 방향이 아니고 나 없는 방향이라는 거예요. 내가 가지 않은 방향으로, 다들 넓은 길로 다 그렇게 가요.

그게 죽을 때만 그렇습니까? 아니요. 평소에 그게 잠복되어 있었죠. 잠복되어 있으니까 주마등처럼 쓸데없는 기억들은 다 날아가고 자기 사랑만 달랑 남았다 이 이야기에요. 이 간단한 이야기. 뭐 과학적으로 규명 안 해도 간단한 이야기죠.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만 유명하지만 그 전인 15절도 유명해요, 저를 믿는 자마다 뭘 얻는다? 영생. 하나님께서 영생나무에 오지 말라고 말렸던 것이 영생이었어요. 그런데 왜 영생을 줍니까? 그 이유는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 내부에 변화가 생겨서 그래요.

하나님께서 “인간은 못 들어오게 해라.” 천사가 “알겠습니다. 옛 썰. 충성.” 이래서 막아놨는데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영역이었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주께서 생명나무로 오셨잖아요, 생명나무로.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 6장에 나오잖아요.

오셔서 여기서 어떤 영토를 만들었어요. 그게 ‘예수 안’이라는 영토입니다. 어떤 친구의 죄를 내가 대신 담당한다는 조건 하에 예수님이 가진 영생을 열매화시키는 특수한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게 성전의 완성이거든요.

창세기 20장 17절에 보면 창세기 보는 사람들이 난데없이 굉장히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 20장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추장을 만나는 대목에서 전부다 쉬쉬하고 질문을 안 하고 답변도 못하고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건드릴 뻔하다가, 건드리지도 않아요, 건드릴 뻔했는데 어떻게 돼요? 그 집안이 임신을 못했어요. 저주받아서.

여기서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졌어요. 지금 누가 누구를 속인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였잖아요. 노골적으로 아내라 하면 안 건드렸을 건데 누이라 속였다 이 말이죠. 속였는데 그 처벌은 누가 받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받아야 마땅한데 이게 정의로운데, 처벌은 누가 받고 있어요? 지금 누가 처벌받고 있습니까?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건드릴 뻔한 아비멜렉 쪽에서 처벌받고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지자가 왕림하셨다는 그 이유만으로 아비멜렉은 원인도 모르는 난처한 지경에 빠진 거예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아비멜렉은 감 잡았어요. ‘이것은 신이 우리를 처벌한 것이다.’

그럼 처벌했으면 해결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해결점이 여기 나옵니다. 창세기 20장 1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여기 기도를 누가 합니까? 아브라함이 기도하죠. 이게 사람들한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아비멜렉이 나쁜 짓했다고 할 때, 우리 인간의 논리는 이래요. ‘나쁜 짓했을 때 착하디 착한 아브라함이 등장해서 “아하, 과객이 볼 때 이 집안은 무슨 저주를 받았구먼.” “도사님, 어떻게 해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했더니만 드디어 태가 열려서 임신했다.’ 그래야 우리가 납득되는 스토리거든요.

그런데 사달을 누가 냈습니까? 본인이 냈는데 기도는 누가 해요?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나았어요. 그럼 아비멜렉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본전치기도 못했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병 주고 약 주고.

아비멜렉이 얻은 게 있어요. ‘이 땅에 하나님과 통하는 낯선 존재가 나타났다.’ 이걸 안 거예요, 이걸. 그리고 아브라함이 얻은 이익은 ‘내가 내 인생 살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나를 철저하게 사용한다.’는 이 사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인간 보기에 완벽했어요, 완벽하지 않아요? 완벽하지 않았어요. 전혀 완벽하지 않았어요. 완벽이고 뭐고 그냥 죄인이죠. 그러니까 보세요. 악마가 얼마나 인간을 속입니까. 완벽해야 거룩하고 거룩해야 구원받는다. 이게 얼마나 성경하고 안 맞는 이야기인지. 전혀 맞지를 않아요.

또 예를 들겠습니다. 아까 불뱀 이야기 들었죠? 뱀을 쫓아내야 되는데 뱀을 가까이해서 고정화시켰습니다. 고정화시킨 그 뱀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것이 함축되어 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 왜 죽었는가? 자기 친구의 죄가 함축되어 있고, 들렸다는 말은 우리가 내 생각한다고 ‘내가 뭐 잘못이고?’ 이렇게 하는 우리에게 전체를 다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죄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함축적 요소를 믿는 자는 뭘 얻는다?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내가 바로 불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은 영생을 이미 얻은 사람이죠. 이게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래놓고 임종할 때 자기사랑 하기만 해봐라.

그다음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하 24장 25절.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집단이잖아요. 오늘날 교회도 집단이잖아요. 집단으로 모인다는 것은 사람 대 사람,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모인 게 아니에요. ‘그 사람 직업이 뭐냐? 수입이 얼마냐?’로 모이는 게 아니고 ‘무엇을 담고 모이느냐? 어떤 것을 담고 만나느냐?’에요. 자기 망가진 이야기하면서 모이죠. 망가진 이야기를 하면서 분통 터트리고 화내면서 만나는 게 아니고, 자기 망가진 것을 즐기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능력일 수가 없어요.

사무엘하 24장 봅시다. 이걸 보는 사람들은 또 헷갈리는 거예요. 24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인구조사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입니다. 요압이 말렸어요.

사무엘하 24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역대상 21장에서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사탄이, 악마가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시킨 걸로 나와 있어요. 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잘못은 누가 했습니까? 다윗이 잘못했죠. 여기서 다윗은 왜 그런 잘못을 하느냐고 지금 요압이 말리고 있어요. “왕이여, 이러시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말려도… 여러분, 다윗은 잘못된 것은 안하고 잘한 것은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을 너무 쉽게 보면 안 됩니다. 인간은 본인의 일을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주의 언약대로 언약의 결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에요. 성도의 보이는 모습은 그 안에 언약의 완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죄도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펼치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죠.

그래서 몇 명이 죽었는가? 인구조사하고 난 뒤에 칠만 명 죽었죠. 사무엘하 24장 15절,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몇 명입니까? 칠만 명 죽었죠. 그런데 칠만 명 죽고 난 뒤에 멈추질 않았어요. 시범조로 일단 칠만 명부터 가자. 칠만 명부터 죽이고 계속 죽이는 거예요.

누가 급했어요? 다윗이 급했죠. 왜냐하면 자기 백성이잖아요. 숫자 헤아릴 때 내게 속한 내 거라고 생각하고 내 소유성을 가지고 본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인구잖아요. 눈에 보이는 사람. 다윗도 눈에 보이고.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급했죠.

급했던 다윗이 뭘 봤느냐? 17절에 천사를 봤어요.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천사를 봤는데 천사가 자기 말을 들을 기색이 없어요. 천사는 누구 말 듣습니까? 하나님 말 듣지, 다윗 자기가 뭔데 자기 말을 들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다윗에게 충고해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으니까 21절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앙이 칠만 명 선에서 스톱이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천사한테 지시했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그만 죽여라.” 그 장소가 나중에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 3:1)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요한복음 2장. 2장 16절에 보면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마태복음 21장 13절에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 했어요. 기도하는 집. 누구 이름으로 기도하죠? 여기에서는 지금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죠.

그런데 요한복음 2장 18, 19, 20절에 보면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 성전을 청소했구나.’ 청소가 아닙니다. 성전을 없애버렸죠. 성전이 없어져야 성전이 세워지죠. 벽돌로 만든 성전, 돌로 만든 성전 없애버리고 예수님 몸이 성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 몸이 성전이 된다.’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다시 묻습니다.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누가? 성령 받은 성도들이. 에베소서 2장에 성도들의 모임이죠. 뭐로 모입니까? 말씀으로 모이죠. 복음으로 모이죠. 참 쉽죠?

46년 동안 지은 보이는 건물을 없애버리고 그거 새로 세우는 데에 3일 걸렸어요. 3일 만에 짓는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머리 막 굴리는 거예요. ‘가만있어 봐. 요새 건축기술이 어떻게 돼? 어떻게?’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런 낌새를 줬어요. “몇 년이냐?” “46년.” “이거 헐어라. 사흘 만에 이거 지을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오해 살 만한 발언을 했어요. “주님께서 먼저 거짓말했잖아요. 분명히 사흘 만에 짓는다면서요?” 주께서 이야기한 것은 “너는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보이는 것과 대비하면서 네가 생각하잖아. 그게 네 한계야.” 그게 한계거든요.

말씀은 완성되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은 말씀을 믿게 된 사람들이 보이죠.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반복해서 하는 것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이 얼마나 고귀하고 귀한 것인지, 그 복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게 아까 뭐라고 했어요? 수용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다룰 수 있는 고리 같은 것, 수용체. 말씀의 수용체가 그들 속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성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이다. ‘바르게 살아라’ 아니죠. ‘나 추잡합니다.’하고 자기의 추잡성과 죄를, 불신을 즐기는 거예요. 죄지어서 즐기는 게 아니고 몰랐던 죄를 발굴하게 된 그 놀라운 기적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순간순간 범사에 감사를 누가 막고 있습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우리 자신의 불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막고 있다는 그 사실을 이제는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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