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1 - 구원의 내막
26,03,02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선지자의 지혜 !!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구원론'을 해보겠는데, 여기 교재 184페이지 보게 되면, 여기에서 185페이지로 넘어가면서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지혜가 선지자의 지혜를 따라가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당시대의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인간의 지혜라는 말이죠. 반면에 선지자의 지혜는 수천 년을 넘었다는 겁니다. 수 천년의 내용이 압축되어서 선지자에게 오게 되는데, 그래서 선지자가 자기가 살았던 자기 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필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가 자기 시대에 외쳤던 것은, 수천 년에 이어지는 것을 선제해서, 또는 미리 응축해서 이야기를 되어진다는 겁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말이죠. 선지자는 필름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선지자의 삶 자체가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선지자의 몸에는 그런 예언을 유발할 수밖에 없던 그 당시의 상황, 즉 그러한 환경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환경이 덩달아 수천 년을 내려가면서 그 수천 년 동안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게 반복이 된다는 말이죠. 즉 선지자를 힘들게 했던 그 상황이 반복이 되어야, 선지자가 외쳤던 그 예언도 슬금슬금 그 내용이 풀어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 압축된 내용이 영화 필름이니까 말이죠.
우리가 영화 필름은 눈으로 보면 딱딱한데, 그런데 막상 영상으로 틀어 놓으면 그 안에 함축된 내용이 펼쳐진다는 말이죠. 그와 같이 쫙 펼쳐지기 위해서, 선지자는 미리 이야기를 했고, 선지자의 예언한 것을 따라서 그 선지자 이후의 세계에 이미 적립이 되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확정된 역사'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확정된 역사에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죠.
* 인간 구원은 없다 !!
그러면 여기서 그 확정된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는 그게 궁금하다는 겁니다. 그 내용은 바로 "인간 구원은 없다" 라는 것이 되는데, 그러면서 "새 인간 구원은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 구원은 없다" 라는 게 환경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의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욕심으로 해서 그게 압력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고 선지자가 외쳤던 내용 안에는 "새로운 인간은 구원되고, 천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라는 것이 들어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론'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론이라고 하면 두 개를 생각해야 하는데, 먼저 인간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시도인데, 그것은 결코 선하지 않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구원될 수가 없는데, 그러니 인간이 자기 구원을 요구하고 소망하는 종교적인 행태, 그것은 악하다는 겁니다.
* 구원론은, 인간의 구원욕구를 통해서 !!
그러한 압박을 받으면서, 그러한 힘든 시련 속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새 인간 구원'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의 구원 욕구가 없다고 하면, 새 인간 구원은 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론을 이야기할 때, 그 입구가 어디냐 하면, 우리는 새 인간 구원으로 성급하게 마구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러면 반칙이라는 말이죠. 반드시 어디를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먼저 인간 구원에 들어가서 "아하, 이게 아니구나. 이게 보이스 피싱이고, 사기구나"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보이스 피싱을 당하고 난 다음부터 돈을 아껴 쓴다는 것인데, 그때야 돈이 귀한 줄을 안다는 것이죠. 그러니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했다가 당하지 않은 경우가 제일 좋다는 겁니다. 즉 돈은 돈대로 잃지 않으면서 돈이 귀한 줄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아닌가요?
그러니 인간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다들 야망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나옵니까? 먼저 인간 구원을 시도하다가, 그 다음에 새 인간 쪽으로 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 말씀의 유인과 내침 !!
그러면 먼저 인간 구원 쪽으로 나갈 때, 이렇게 유인하는 게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선지자가 당했던 그 해당 사항의 지혜, 그것으로 압박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새 인간으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 인간 구원에서 새 인간이 나올 때, 이 인간 구원에서 인간들이 미혹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있다는 말이죠. "나도 구원을 받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요인들, 즉 "이 구원론에 나도 참여해서 구원을 받아야지" 라고 유도를 당하는 내용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것은 선지자 시절부터 있던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죠. 즉 말씀으로 유인을 해서 말씀으로 쳐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유인될 수밖에 없는 말씀을 이 시점에서 한번 살펴봐야 되지 싶은데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1장 26절과 27절을 보겠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
이 말씀이 어떻게 유인책이 될 수 있느냐 하면, 이게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26절과 27절 내용의 첫째는 "구원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우리 인간이 요구하는 구원은 없다는 말이죠.
그 다음으로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구원은 있는데 그게 어떤 경우인고 하면, 아버지와 그 다음으로 누구입니까? 그게 아들이고 아들의 소원인데, 즉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할 경우에만 구원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왜 중요하냐 하면, '없다' 라고 하는 것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죠. 이 말씀 자체가 의미하는 것이, "인간이 요구하는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데,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고 구원을 받는 당사자 나의 소원이 합해져서 구원이 있다" 라고 말이죠.
우리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래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즉 "내가 교회에 나가서 어떤 정보를 확보하면 내가 구원이 될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아버지 + 아들 + 나", 이렇게 그 소원이 합쳐져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하지만 '나' 라는 것은 여기서 빠져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 말씀(정보)를 통한 '나'의 강화 !!
그것은 인간은 정보를 소지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정보를 소지해버리면 '나'는 그대로 확립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즉 "내가 있고 거기에 내가 어떤 소유를 하게 되어버리면, 내가 파괴가 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강화하고 확고히 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정보나 지식과 같은 것들이 자기에게 달라붙어 있으니까, 즉 "내가 성경말씀이라는 정보를 소유함으로서 나를 확립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내가 되느냐 하면, 나는 최종성을 보장받게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내가 천국을 가로막는다 !!
그러면 여기에서 최종성을 보장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어제 오후예배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천국으로 가는데 있어서 마지막 커튼이 누구인고 하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즉 "내가 천국을 가로막는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모든 정보, 즉 "내가 아는 것이 나에게 쏠리고, 나는 그것을 확보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리고는 어떻게 나옵니까? 그러면 이제 마지막 최종성을 가지고 무대 세트에 뒤에 있는 커튼을 들치면서, "주님, 그동안 잘 계셨어요? 까꿍!" 라고 하면서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최종성이 누가 됩니까? 자기가 최종성이 되면서, 그렇게 '나' 라는 것이 확립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이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에게는 원래 구원이 없다는 말이죠. 그게 창세기 3장 24절의 말씀인데, 쫓아냈으니까 구원이 없는데, 그런데 '나' 라는 것이 최종성이 되면 거기에 위반이 된다는 겁니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세워진 것은 쓰러진 것의 그림자다 !!
"세워진 것은 쓰러진 것의 그림자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말이죠. 땅바닥에 쓰러지게 되면, 그렇게 쓰러진 사람은 다시 자기가 세워지기를 희망하고 고대하게 된다는 겁니다. 쓰러진 상태에서 자기가 쓰러지지 않고 나약하지 않고 멀쩡하게 될 때, 그 세워진 것은 꿈이 되고 환상이 된다는 말이죠.
지금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데,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비록 죄인으로서 이 땅에 버려질지라도, 언젠가는 복음을 알아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어디까지나 허상이고 환상이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자기가 쓰러졌기 때문에, 그래서 희망 사항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보통 그림자는 어디서 생깁니까? 세워진 것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림자가 세워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세워진 것 자체가 없는데, 세웠다고 하는 것은 쓰러진 자들의 의견들을 모아서, 그렇게 뭔가 하나의 꿈을 꾸면서 세운다는 말이죠.
* 유발 노아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
'호모 데우스' 라는 책이 있는데, '유발 노아 하라리' 라는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썼다는 겁니다. 그는 동성애자인데, 그리고 그가 또 지은 책이 있다는 말이죠. 지금 당장에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 두 권의 책을 보면서 참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주장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데이터 교회, 즉 데이터 종교라는 말이죠. 이게 어떤 종교냐 하면, 모든 인간들의 지혜를 데이터로 모아서, 그것을 숭배하는 종교, 즉 'AI' 라는 겁니다. 앞으로는 이런 시대가 온다는 것이죠.
* AI 종교 !!
그러니까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쓰러진 것들의 희망사항이 새로운 허상의 종교, 즉 데이타 종교인데, 그게 '신'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신을 세우는 것, 즉 우상을 세운다는 말이죠. 그러면 날이 갈수록 이 시대가 왜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가를, 인간들 자신이 숨기지 않고 그대로 자꾸만 보여준다는 겁니다.
데이터를 모으는 것인데, 그러니 신학이고 성경이고 복음이고 간에 모든 데이터를 AI에게 집어넣으면, AI는 다시 그것을 인간들에게 제공하고, 그러면 또 그것을 끌어 모아서 점점 더 지식이 발달하게 되고, 그게 '데이터 교인' 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데이터, 즉 지식이 풍부한 것이 인간에게 점점 더 희망을 구체화시킨다는 말이죠.
* 구원이란?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희망은 과연 무엇인가요? 그것은 현재 결핍된 것이 다시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워진 것이 쓰러진 것과 단절이 되지 않는데, 이게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세워져도 쓰러진 것과 한 통속이 되는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완전히 막히는 것, 즉 모든 것이 다 단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데서 살려내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은 뭐냐 하면, 물론 자기는 끊어졌다고 우기지만 이 환상 때문에 결코 끊어진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끊어졌다고 해도 희망의 끈은 계속해서 '나'로부터 피어나고 있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나' 라고 하는 최종성의 문제라는 것이죠.
* 나의 최종성 !!
결국은 구원론에서 구원받는 자기가 최종적인 모습이 되는데, 즉 '나' 라는 것이 최종적인 관심사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자기의 최종성, 그래서 어제 오전 설교시간에 후딱 지나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면 나는 달라져야 된다" 라고 말이죠.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새로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얼추 납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 달라진 내용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달라진다는 것은 '나'의 최종성에서, 아까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 또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구원이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아버지와 아들, 이 뒤에 인간들은 자꾸만 '나'를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까? 반칙인데,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지와 아들과 나의 소원대로 내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 이런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 새로 다시 !!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먼저 들은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괜찮다는 겁니다(ㅋㅋ). 지금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하고 있는데, 마태복음 11장 26절, 27절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인데, 그러면 그 소원에서 인간의 소원이 과연 끼어 드느냐는 것인데, 인간의 소원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이야기입니까? "구원을 받는 당사자가 바로 나인데, 그런 나의 의견은 일체 고려하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조직 쪽에서, 즉 아버지와 아들 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나를 천국에 보낸다" 라고, 이야기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너는 빠져라" 라는 것인데, 우리는 빠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나' 라는 것이 빠질 때, 그것을 "낄끼빠빠" 라고 하는데, 즉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라는 겁니다(ㅋㅋ).
* 너는 빠져라 !!
그런데 그렇게 빠질 때 그냥 빠지면 안 되고, "내가 구원을 받겠다는 나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왜 받아주지 않고, 반드시 빠져야 하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설명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 설명을 하나 해드릴게 있다는 말이죠. "왜 내가 빠져야 되느냐?" 라는 것인데, 모든 세상 일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에 '나'를 집어넣지 않는, 그런 최종성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일에 최종적인 의미의 그 마감 현장, 거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나'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행복할까? 이게 내게 의미가 될까? 내에게 이익이 될까? 내게 손해가 될까?" 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든 인간이 나오는 모든 행위와 행동에서 '나'를 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미 '나에게는 신을 믿기 전에 믿는 자가 있었는데, 누구를 믿느냐 하면, "나는 나를 믿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나를 놓치기 싫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신은 핑계인데, 하나님과 예수님은 핑계고, 정작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나' 라는 겁니다.
* 타인을 통해서 나의 소중함을 !!
그래서 이러한 '나'의 소중함, 그것을 확인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래야 좀 든든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확인을 받기 위해서 자기 주변에 누구를 배치하느냐 하면, 자기 주변에 타인을 배치한다는 말이죠.
이 타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라고 하는데, 어릴 때는 이 타인이 곧 가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족과 친구들을 통해서 "내가 소중한 것이 맞지? 그렇지? 내가 너에게 확인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화 3시간을 가볍게 하면서, "내가 소중한 것이 맞지?" 라고 해야하는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너는 내 친구가 맞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너는 내 친구가 맞지? 그러니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너만은 이해하지? 그렇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 가족, 애인, 이러한 자기 주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이렇게 소중한 인간이다" 라는 것을 우회로, 그들의 격려를 통해서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을 왜 확인하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런 자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타인이 있는데, 여기에 친구나 가족, 성경적 용어로 하면 이웃인데, 그런데 거기에다가 무엇까지 동원하느냐 하면, 여기에 신, 즉 하나님과 예수님까지도 동원시켜서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주겠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천주교는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는데, 그게 마리아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에 갈 때는 마리아에게 인사하고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주위에 포진된 모든 것들은 자기가 소중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용도인데, 그렇게 확인하는 것에서 살아갈 맛을 느끼고,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낸다는 말이죠.
* 나는 나를 신봉한다 !!
이게 바로 우상인데, 즉 '나' 라는 것이 가장 최종성이고, 그렇게 자기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자기를 믿는 종교인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서는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너는 나를 믿지?" 라는 것인데, 어떤 드라마의 대사에 보면 "우리는 계약서 없이 믿음으로 뭉쳤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대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미스 홍' 14회에 말이죠(ㅋㅋ)
그러니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계약서도 없이 믿음으로 뭉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런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 믿음 대신에 무엇을 집어넣습니까? 계약서를 집어넣는데,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즉 계약서를 주셨다는 말이죠. 모세가 하늘에서 그 계약서를 작성하고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 계약서가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최종 계약서의 내용은 "반드시 여기에 적힌 내용대로 지키는 자에게만 천국에 입성한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계약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계약의 내용이 율법인데, 그러니 그 율법을 다 지키는 조건 하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 거룩과 의의가 의가 구축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계약서에 사인을 누가 할까요? 계약서 내용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받은 자만이 계시를 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 최종 사인을 누가 하겠습니까?
*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
이 땅에 사인을 하러 오신 분이 계시는데, 누구의 이름으로 사인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이름인데, 그 예수 이름으로 사인을 한다면, 그러면 과연 누가 최종성입니까? 자기 자신이 최종성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최종성입니까? 사인을 하시는 분, 즉 예수님이 최종성이 된다는 말이죠.
이러한 바꿔치기 하는 작업, 그것이 바로 주께서 이 땅에 벌리시는 구원 작업이라는 겁니다. 즉 "내가 최종성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최종성이 아니라고 하면, "나는 최종적으로 소중하다"와 "소중하지 않다" 라는 것 중에서 어느 쪽입니까?
"나는 소중하지 않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새로운 세계가 왔을 때, 우리가 다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은, 여기에서 '다른 인간' 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나의 최종성'에서 '주님의 최종성'으로 바뀌어지는, 그렇게 달라져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최종성이 아니고 자기가 우상이 아니고 자기가 소중하지 않다면, 여기에 있는 것, "내가 잘났다" 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포진된 여러 가지, 즉 자기가 친구라고 이야기하고 가족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마리아가 주님이라고 이야기했던 이 모든 것들은 한꺼번에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 하나님께 '나'를 부수는 방법 !!
이 모든 것들은 말씀에 의해서 파괴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즉 말씀이 이것을 다 부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부수느냐 하면,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부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드리겠는데, 그 방법이 아주 놀랍고 신기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듣게 하는데, 그렇게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단 1초도 걸리지 않고, 그야말로 0.5초라는 말이죠. 그렇게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나는 곧장 우상이 된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말씀이라는 데이터, 그 정보를 확보해서 우리는 자기 경직화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 경직화, 즉 액체 질소라는 겁니다. 액체 질소는 마이너스 196도씨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이게 굉장히 위험하다는 말이죠.
이게 007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악당이 세상을 폭파시키기 위해서 액체 질소를 만드는 공장을 세웠는데, 그런데 노는 007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어이 그 적들을 물리치는데, 마지막 장면에 보면 천재적인 악당 과학자가 액체 질소 앞에 있다가 007에 의해서 그 액체 질소 탱크가 터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터질 때 그 악당 과학자가 순간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마이너스 196도에 의해서 꽁꽁 얼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꽁꽁 얼어버리는데, 그 다음 방법이 어떻습니까? 그 악당을 탁 치게 하면 산산조각이 나버린다는 말이죠.
*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줌으로써 !!
이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인데,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줌으로써,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자기 확립을 시도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살았어. 나는 구원이 되었어. 나는 이만하면 되었어" 라고 말이죠.
분명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최종적이 아니고 너는 배제된다" 라는 것인데,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최종적이 아니고 배제된다" 라는 그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게 도달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나' 라는 것은 그만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또 다시 최종성, 최종적인 자기 우상화, 즉 우상적인 작품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하면, 성경 지식의 확보, 또는 데이터 확보로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구원이 안 되는데, 그러나 이 경로는 반드시 밟아야 한다는 말이죠. 성경을 통해서 "나는 이제 이 정도는 안다" 라는 경로는 반드시 통과해야, 자기가 얼마나 우상적인 행위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죠.
* 일관성은 유지되되 연속성은 파괴된다 !!
이것을 "일관성은 유지되되 연속성은 파괴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성경 말씀이 일관적인 내용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우상이 되고, 그 연속성은 인정하지 못하니까 그만 깨버리는데, 그렇게 깨버리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세워진 자가 아니고 쓰러진 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쓰러진 자에게 다시 말씀이 오게 되면, 쓰러진 자가 갑자기 무엇이 됩니까? 그만 세워진 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또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만 남고, 여기에서 '나'의 소원, 즉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소원이라는 자리에서 빠지는 작업, 그 작업을 말씀이 자체적으로 해낸다는 겁니다. 결코 자기가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게 말씀의 위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위력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커튼 너머에서 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커튼 너머가 어디냐 하면, 그게 거울 너머라는 것이죠.
* 거울 너머 !!
'거울 너머', 이것을 이미지, 즉 현상화를 하려면 굉장히 어렵다는 겁니다. 물론 AI에게 물어볼 수도 있는데, 이런 것이 동화책에 보면 많이 나온다는 말이죠. 거울은 이쪽 세계를 반사해서 비추어주는데, 그런데 동화에 보면 무엇입니까? 이쪽 세계가 따로 있고, 거울 세계는 그 세계 속에서 또 따로 논다는 겁니다.
이미 최종성이 되시는 분인 예수님을 통해서 저쪽에 천국을 만들었는데, 그 만드신 분에서 무엇이 나오죠?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에서, 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상태에서 말씀의 위력이 구원될 자기 백성이 되는 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그래서 아들의 사인에 의해서 계약서대로 구원이 된다는, 그 위력이 거울 너머에서 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거울 너머에서 오는데, 그런데 이 거울 너머는 어떻습니까? 이 거울 앞에 비치는 우리가 거울 너머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들어가려고 하면 자기 머리만 깨진 거울에 찢어진다는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나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에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라고 하는데,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오시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건너가고 난 뒤에 그 계약서대로 다시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오신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것이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때 우리는 달라져야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달라진다는 겁니까? 우리는 건너가지 못했다는 점을, 즉 자기가 최종성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최종성으로 건너가신 분이 누구입니까? 여기에 건너가신 분이 이렇게 나와 있는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라고 말이죠. 이 예언의 마지막이 어떤 내용이냐 하면, 모든 말씀을 이룰 분이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찔림을 받아서 살해를 당하는 일이 있으면, 그러면 모든 연극은 끝이 난다는 겁니다.
그냥 사람이 죽는 것말고, 모든 예언의 말씀을 한 몸에 다 품고 그분이 찔림을 받을 때, 역사는 이미 끝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었을 때, 예수님을 죽였던 그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난 뒤에, 그 죽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있던 세계,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겁니다.
* 이 땅에서 아버지께 간 사람은 한 분 !!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살고 있던 그 시대에 죽은 자로서 같이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자기들이 죽인 그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생각은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아버지에게로 갈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죠. 물론 죽어서 낙원에 간 사람은 있는데, 에녹도 있고 엘리야도 있는데, 그리고 구약 성도들도 낙원에 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어서 아버지께 간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대기 상태에 있다는 말이죠. 언제까지 말인가요?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십자가에서 다 이룰 때까지 대기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았는데, 그래서 "이 땅을 나도 빨리 떠나고 싶은데, 내가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떠나지 못하게 지금 남겨두고 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는 "내 소원이 뭐냐 하면, 빨리 죽어서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는 것이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쁨은 무슨 기쁨이라는 겁니까? 성도에게는 보너스가 나오는 날이 유일한 기쁜 날이 아니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있다는 것, 그런 날이 다가온다는 것이 기쁨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사도바울의 소망이고, 또한 성도의 소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울 너머의 "찌른 자도 볼 것이다" 라는 내용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되었다고 하면, 예수님이 찔림을 당함으로써 우리가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파괴되도록, 그렇게 이미 결정이 난 세상이라는 것이 확정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도 그 세계에 가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가 그 세계에 가게 되면 우리가 최종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최종성이 되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달라져야 하는데, 우리가 최종성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최종성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최종성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고 하니, 우리가 살아있는 한 가면 안 되고, 우리를 뚜레박이나, 또는 우리를 보쌈해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올려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때 우리를 둘러싼 보쌈 기능이 바로 "말씀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를 둘러쌀 때, 우리는 보쌈을 당해서 올라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본향으로 건너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 정리하면 !!
정리를 해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일체의 희망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아예 받아주지를 않는다. 그러면 주님의 희망이 말씀 속에 있어서, 그 말씀이 와서 우리를 보쌈해서 데려가듯이 데리고 간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 말씀의 보쌈기능 !!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쉽죠? 그런데 올라갈 때 그 올라가는 보쌈의 기능이 뭐냐 하면, 항상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우리는 말씀을 듣게 되면, 이게 자기 구원으로, 즉 자기가 우상화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우상화가 되는 것을 또 말씀이 와서 파괴하는데, 그런 식으로 보쌈기능이 계속해서 실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보쌈기능은 일관성은 있되, '나'의 단독성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날마다 깨부순다는 말이죠.
자기가 단독적이 아니라고 애쓰는 것도 일종의 단독성인데, 그것도 깨버린다는 겁니다. 모든 것은 주께서 알아서 말씀으로 우리를 깨주는데, 우리는 깨어진 것을 가지고 주섬주섬 끌어모아서 다시 '나'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앞으로 말씀을 들으면 나는 깨진 채로 있을 거야. 나는 다시 정립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모습이 아닌데, '나' 라는 우상의 모습은, 그 모습은 죽을 때까지 유감 없이 발휘가 된다는 말이죠.
* 엄마, 나 보너스를 탔어 !!
"엄마, 나 보너스를 탔어" 라는 이야기를 못합니까? 물론 엄마에게 빼앗기지 싶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ㅋㅋ), 그렇게 외치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행복해" 라는 말을 왜 못합니까? 하지만 내일이 되면 깨진다는 말이죠.
주님이 다 알아서 깨어주시는데, 그렇게 깨질 때 깨지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그 말, 즉 "나는 내가 소중하고, 나는 최종적이고, 나는 나의 가치를 믿고 싶어" 라는 이야기를 주저하지 말고 외치라는 겁니다.
갑자기 노래 가사가 또 생각나는데, 서영은 씨가 불렀던 노래가 있다는 말이죠. "이젠 혼자가 아냐. 다시 햇살은 비출 거니까 외쳐라. 나는 이제 어떤 슬픔이고 뭐고 다 떠났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매일 같이 외치고 싶은 내용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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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과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거야
그런 내가 더 슬퍼보여도
날 위로하지마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너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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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의 고집', '나의 욕심', '나의 소망', 그런 것을 추구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하면서도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이 왜 행복하고 즐거웠냐 하면, 자기가 이런 짓들, 그런 것이 자기에 안에 숨어있던 자기 죄를, 즉 자기를 우상화하는 본성을 이제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내 구원은 주님 앞에서 잘렸다 !!
어차피 깨질 거니까, 어차피 깨질 것인데 못할 게 뭐가 있느냐는 말이죠. 어차피 아닌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당당함'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무엇이든지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는 것이죠.
"내 구원은 주님 앞에서 잘렸다" 라는 사실을 외치는 자, 이게 바로 구원받은 자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구원받은 자만이 그렇게 외칠 수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천국을 노리다가 그만 잘렸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이 구약 때 나온 세계관인데, 그것이 '지표' 라는 말이죠. 어제 설교시간에는 '지표면' 이라고 했는데, 오 목사님은 이것을 '지평' 이라고 했고, 다 괜찮다는 겁니다.
이 지표면, 이 밑은 뭐냐 하면, 냉혹함, 아비규환, 무질서, 탐욕, 이런 것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의식의 세계인데, 이제 실재세계라는 말이죠. 이런 실재세계에서, 제가 방금 뭐라고 했지요? 냉혹함, 아비규환, 무질서, 혼돈, 탐욕, 이런 것들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 나는 신이다 !!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것의 그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나도 신이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는 친구라고 했다가 그만 싸우고 나서는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한 헤어졌다가 만나고 그 모든 것은 뭐냐 하면, "나도 신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각자가 신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나는 신이 아니야" 라고 하는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지표는 뭐냐 하면, 한 장의 얄팍한 담요로 덮여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는 울퉁불퉁하다는 것이죠.
* 울퉁불퉁한 담요 !!
그런데 이 담요 밑에서 뭔거 자꾸 쑤시고 올라온다는 겁니다. 때로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데, 그러니 뭔가 사는 게 편하다고 할지라도 걱정이 없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또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뭇가지가 있으면, 이 지표면에 유체공학에 의해서 공기가 흐르면서 바람이 분다는 말이죠. 같은 좁은 지역에 있는 나무 가지는 바람이 불면 같이 바람이 불게 되어 있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같이 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고 하니까, 자식이 10명이 되는데 이 자식이 괜찮다 싶어서 안심하게 되면 저 자식이 말썽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아무리 행복해도, 그 행복이 깨질까봐 불안한데, 그것이 불행이라는 겁니다. 불행이 찾아오지 않아도, 그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미래를 모르니까 그러한데,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이것이 우상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기가 우상을 겨냥해서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어제 이야기한 기생 라합이라는 말이죠. 공격하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무엇으로 공격하느냐 하면, 말씀으로 공격한다는 겁니다. 말씀으로 공격하는데, 이렇게 공격을 하니까, 이 울퉁불퉁한 인간들이 갑자기 우상과 한마음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한마음이 되어서 오신 분을 창으로 찔렀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예상을 하시고 찔림을 받은 채로 부활해서 올라가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올라감으로써, 이 세상은 더 이상 어떻게 됩니까? 일체 이 세상은 지옥이라는 것이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옥으로 확정된 세계, 그게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그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서 여기서 제대해서 주님이 계시는 곳에 가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그분과 하루라도 빨리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 그게 그의 소망이었다는 말이죠. 이것이 3층 세계관인데, 즉 "하늘, 지표면, 울퉁불퉁",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 신학자들은, 즉 히브리적 세계관은 어떠한고 하니, 이렇게 인간이 사는 세계가 있고, 그 밑에 음부가 있고, 그 위에는 천국이 있다고 했다는 말이죠. 첫째 하늘이 있고 둘째 하늘이 있는데, 이것을 합쳐서 그냥 하늘이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 안에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니 별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죠.
* 복수 전쟁 !!
그러면 그 내용은 뭐냐 하면, 한마디로 이게 '전쟁' 이라는 겁니다. 여기 밑에서 찔렀고, 그러자 위에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보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복 또는 복수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게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여기서 민수기 23장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민 23:8)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라고, 이 이야기를 하는 자가 발람 선지자인데, 그가 자기를 어떻게 소개합니까? 그게 민수기 24장 3절 이하에 나온다는 말이죠.
(민 24:3) 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 24: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자가 말하기를
(민 24:5)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민 24: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민 24:7)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
* 발람 선지자와 말하는 나귀 !!
처음에 제가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의 지혜는 모든 다른 인간들의 지혜보다 월등하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미래를 내다본다는 겁니다. 미래를 내다보니까, 이것은 거울 너머에서 나온 소리라는 말이죠.
우리가 여기서 "야, 발람은 똑똑하다. 훌륭하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발람은 자기가 타는 나귀보다도 더 못하다는 겁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이 탄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자기 주인을 살리기 위해서 버티고 가지 않으니까, 발람이 그것도 모르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면서 때리니까, 나귀가 하도 답답해서 터져 나온 게 뭐냐 하면, 그게 인간의 언어라는 말이죠.
(민 22: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민 22: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 지라
(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그렇다면 이 발람 입장에서는 어떤 점에서 놀랐겠습니까? 여기서 보기를 드리면, "1)나귀가 말했다. 2) 하나님의 감시하는 체제에 내가 놓여있구나" 라는 것인데, 몇 번일까요? 2번이라는 겁니다. 이 나귀가 스파이였다는 말이죠.
발람은 나귀가 자기가 부리는 종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종이 아니고 하나님이 파견한 스파이였다는 겁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시키는 제대로 일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그것을 감시하는 감시자로 바뀌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발람이 훌륭하다. 발람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라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말고, "발람도 하나님께서 나귀를 다루듯이 똑같이 다루어서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그 정체성, 즉 차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모압 지경을 통과하게 만들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누구냐가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가 이스라엘 누구인지를 보여주는데, 그 정체성이 뭐라고 되어있지요? 모압이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니까,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저주치 아니한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은 자를 내가 어떻게 꾸짖을까" 라고, 발람이 그렇게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이 데이터를 보면서 우리는 뭐라고 생각을 합니까? "딱 나구나. 감히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는 자가 바로 나네"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우상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말이죠.
* 야, 딱 내 이야기구나 !!
아까 그 원리를 이야기했는데, 말씀이 옴으로써 주섬주섬 "나는 대단한 존재구나" 라는 것을 꾸며 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아니한 자를 어떻게 저주하라" 라는 말씀을 대하면 우리는 기쁘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3장 20절과 21절을 보면,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민 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민 23: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발람이 모압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편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적이 되는 모압 선지자가 반대편 서 이스라엘을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21절을 보면 어떻습니까? "야, 이것은 진짜 내 이야기이네, 딱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미 축복을 했는데, 누가 우리를 감히 정제하겠느냐는 말이죠.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발람이 로마서 8장까지, 그 시대까지 내다보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물론 발람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발람 속에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이스라엘의 반대편에 있는 민족의 선지자가 그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면,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죠. 발람과 모압은 아는데, 정작 이스라엘 자신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인데, 즉 파괴되어야할 이스라엘 속에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다는 것이죠.
만약 이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라고 하면, 현재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고 몽땅 한꺼번에 "우리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거짓 선지자인데, 진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바깥에서 이스라엘을 보면서 "너희는 망하는데, 그렇게 망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라고, 이런 모순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 구원실패와 구원성공 !!
다시 말해서, "너는 지옥행이야. 그런데 지옥으로 가는 가운데서 너는 천국에 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두 가지 시선을 모두 이야기하는데, 즉 "거울 너머에서 바라볼 때 너는 천국에 가지 못해. 구원 실패야. 그런데 구원의 실패라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는 천국에 가" 라는, 이게 바로 성경전체에 흘러나오는 '구원론' 이라는 겁니다.
왜 이것이 성경전체의 구원론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바로 그 경로를 거쳤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셨는데, 즉 메시야가 아버지에게 잘렸다는 겁니다.
* 아들의 버림받음 !!
그렇게 버렸기 때문에, 즉 시편 22편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가" 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완성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버림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시 22:1)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롓사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래야 아버지와 아들, 그 다음의 '나'의 소원은 제거되고,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만이 옴팍 충만하게 '나'를 건지는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게 바로 십자가의 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는 능력은 '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인데, 그분의 십자가 능력이 구원의 능력이지, 다른 능력은 없다는 말이죠.
드라마 '미스 홍'의 14회를 보게 되면, 아들이 자기 할아버지에게 마구 대드는 장면이 나온다는 겁니다. 할아버지는 회장이고 아들은 전무인데, 그 밑에 또 아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비는데, 그때 아버지가 아들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는 겁니다.
* 대신하심 !!
그것이 바로 대신하심인데, 그렇게 대신해서 때려주시는 분, 즉 예수님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때려주신다는 말이죠. "너는 구원될 깜도 전혀 되지를 못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를 때려줌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데, 즉 주님에게 얻어맞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얻어맞는 자에게 영원한 얻어맞음은 없는데,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고통 안의 평온함이라는 말이죠. 즉 고통 속에서 평온함을 누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장 4절에 나온다는 것이죠.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주님께서 책망을 하시는데, 왜 책망을 하십니까?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겁니다. 그 사랑이 누구의 사랑입니까? 주님의 사랑인데, 그 사랑이 일방적으로 덮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참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참 사랑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나는 주님에 의해서 파괴된다" 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데, 그것을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사랑으로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주님 앞에 파괴되는 것, 즉 "내 안에 구원되는 나가 있는데, 그런데 나는 나의 겉에서 나를 구원하려고 시도한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헛됨, 그것을 주님께서 아낌없이 따귀질을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시도하는 자기 소망이 모조리 파괴되는 것인데, 마치 껍질을 벗겨서 알맹이를 빼먹는, 이게 그런 껍질을 벗기는 작업과도 같다는 말이죠. 껍질을 벗기는 작업이 아파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가 무시했던 처음 사랑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내 인생이 망가졌다" 라고 하지만, 민수기 23장에서 발람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이 저주하지 아니한 자를 어떻게 내가 저주하겠는가?" 라는 것인데, 미래의 성도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진짜 어려운 것이 남아있는데, 이게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을 해보겠는데 말이죠. 먼저 민수기 24장 17절을 보겠는데, 누군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여기에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라고 하는데, 이것이 장래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가 합니까? 모압의 선지자인 발락이 하는데, 이스라엘이 모압을 박살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20절에 보면, 열국 중의 최고라고 일컫는 아말렉도 역시 마지막에는 멸망에 이른다는 겁니다.
(민 24:20)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 역시 주님이 함께 있으면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러한 성경을 정보를 대하게 된다면, 여기서 자기를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당연히 이스라엘로 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야말로 신바람이 난다는 겁니다. 즉 "역시 주님이 함께 있으면, 그리고 저 별의 왕이 주님이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왕을 모시니까 신이 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서 걸립니까? 민수기 25장에 와서 자빠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신이 났으면,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스라엘은 몽땅 다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25장에 보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 명이 죽느냐 하면, 우상을 섬기다가 염병으로 24,000명이 죽는다는 말이죠.
(민 25:7)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민 25: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민 25: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
여기에서 그만 인간의 연속성이 깨져버리는데, 분명히 이스라엘은 건드리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렇게 24,000명이나 죽을 정도로 파괴가 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는데, 그래서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박살이 나버렸느냐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이죠? 저주는 예언으로 인해서 불가능하니까, 발람이 꾀를 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를 보내서 꼬드기면 그들이 넘어온다고 한다 말이죠. 즉 다신의 바알종교 행사를 벌이면, 그게 여호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방식인데, 그렇게 꼬드기면 그들은 망하게 된다고, 그런 제안을 누가 합니까?
그것을 발람 선지자가 제안을 했다는 겁니다. 돈을 받고 말이죠.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저주의 방안을 따로 끄집어냈는데, 그런데 그게 왜 성공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살펴보자는 말이죠.
민수기 24장까지는 잘 나갔다가, 25장에 오게 되면 성경을 읽는 사람이 당황하게 되는데, 왜 하나님은 일에 일관성이 없느냐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는 것 아니고, 구원받는 자기 자신에게 일관성이, 그런 연속성이 있다고 우기는 것이 오히려 근본적으로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민수기 31장을 보겠는데, 1절과 2절입니다.
(민 3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31:2)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미디안에게 그 원수를 갚으라고 하시는데, 이들이 앞선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바알브올로 꼬드겼던 자들이 미디안 족속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16절 이하에 나온다는 것이죠.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 31:17)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민 31:18)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둘 것이니라
* 말씀의 공격 !!
그러니 누가 누구를 죽입니까? 물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죽이지만,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죽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우리편이다" 라고 하면서 기분 좋게 있다가, 졸지에 그 하나님에 의해서 작살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스라엘 자체가 그만 우상화가 될 때, 바로 그것을 겨냥해서 무엇이 들어온다는 겁니까? 말씀의 공격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 불타는 성전 !!
성전의 경우에, 그렇게 성전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부심을 가졌다는 말이죠. 즉 "다른 모든 민족에는 성전이 없지. 우리는 성전이 있다"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전은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성전이 누구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만나는 만남의 장소였느냐는 겁니다.
* 성전을 불태우시는 하나님 !!
성전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 당연히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에 의해서 무엇이 불타 버립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깨져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이방민족을 부추겨서 성전을 불태워버렸다는 말이죠.
저도 그 예루살렘 성전에 가봤는데, 지금은 전쟁 때문에 당분간 가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아직도 거기에 600명의 한국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거기서 관광객들에게 가이드를 하는 것이 그들의 생계라는 겁니다. 그게 주로 목사들인데 말이죠.
* 스스로 버리신 목숨 !!
그러면 자기가 소유권이 있는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태워버렸다고 하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는데, 요한복음 10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물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서에 의하면 반드시 뭐냐 하면, 죽어야 비로소 계약성이 생긴다는 겁니다. 아들이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마지막 언약의 피라는 말이죠. 그게 언약의 살과 피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깨짐으로써, 이제부터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아들의 계약서에 대해서, "저도 구원해주세요" 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을 다 없애버렸다는 말이죠.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으로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 아하, 주께서 살아계시는구나 !!
여러분, 이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들어간 사람은 온도가 달라져지게 된다는 말이죠. 어떻게 달라집니까?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날마다 자기 뜻이 무산되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는, 그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오는 기쁜 소식, 그게 너무나 감사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자기 뜻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주께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주님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몰랐는데, 내 뜻이 되지 않는 것을 보니까, 지금 옆에 살아계시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만끽하면서, 그러면서 이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죽을 이유를 찾는데, 칠순을 넘어서 팔순을 내다보면서, 자기가 왜 굳이 이 땅에서 꼭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찾는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새로운 일거리, 즉 자기가 죽어야 될 일거리, 그것을 나이가 70이 된 사람만 하지말고, 젊은 사람도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말이죠. "아, 이래서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라는 것을 찾는 일에 매진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 니 마음대로 사세요 !!
그렇다면 끝으로, 그렇게 찾는데 있어서 매진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경상도 말로 하겠는데, 그것이 "니 마음대로 사세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이 울퉁불퉁한 세상에서의 해답이라는 겁니다.
제가 어느 부부를 앉혀놓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상대방에게 서로완전하려고 하지말고 틈을 만들어놓으라고 말이죠. 틈이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부부니까, 서로 속이지 말고 솔직해지자" 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어떤 인간도 다 우상인데, 그러면 우상이 우상 노릇을 하도록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더 다가오게 되면,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어느 정도는 중립적인 곳이 있어서, 즉 숨을 쉴 틈은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부모라고 해서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식도 부모를 마음껏 이용해도 된다는 생각도 역시 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아주 어릴 때는 무엇이든지 해줘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기 나름대로의 비밀의 공간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숨을 쉰다는 것이죠.
그래야 그 안에서 자기가 우상이 되는데, 이미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 유감 없이 발현되는 자기만의 아지트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상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을 향해서 무엇이 공격을 가한다는 겁니까? 주님의 말씀이 그 아지트를 폭격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자기만의 공간, 그런 자기 아지트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아주 열성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항상 때려주시고 파괴시켜주시니,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이런 놀라운 사랑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나의 이 죄성, 그것을 말씀이 오셔서 친히 박살 내주는 시원함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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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6 오후 4시에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