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십자가 전선

아빠와 함께 2025. 12. 3. 22:25

[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9 - 십자가 전선

25,11,0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아따, 시끄럽다 !!

오늘은 교재 172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요한복음 11장이 있는 나사로 이이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고 비틀거릴 때 예수님이 오셔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라고 하시면서 다 하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간증집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죽고 난 뒤의 부활이 아니라, "죽을 뻔했는데 살려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살기 힘들어서 죽을 뻔한 그 인식, 그것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이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 정도로 죽을 뻔했다. 아이고, 식겁했다" 라는 정도가 아니고, 살아있으면서도 "아. 지금껏 나의 과거까지 다 포함해서 뇌가 계속해서 죽어와 있었구나" 라는 것인데. 그래야 비로소 주님이 부활이고 생명인 것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죽을 뻔하고 다시 살아나면 "해해, 신난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따, 시끄럽다"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자신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능력은, 우리 인간이 계산하는 능력보다도 더 나아간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고난 가운데 있다고 여기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 광야가 없이 약속의 땅은 없다 !!

예를 들어서, "광야가 없이 약속의 땅은 없다" 라고 하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이 광야를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고생, 즉 고난으로 본다는 말이죠. 즉 "고생과 고난이 없이는 약속의 땅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광야 없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고난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의 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 고진감래(苦盡甘來) !!

하지만 인간들은 이 광야를 자기 고생, 즉 인생의 고난으로 바꿔버리는데, 그러면 "고생 뒤에 낙이 있다" 라고,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이 아니고 상식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복음과는 전혀 관계도 없고, 성령과도 관계가 없고, 그냥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다 느끼는 것이란 말이죠.

성경은 그런 코스를 밟지 않는데, 그러니 광야를 두고 "고생과 고난이 없이 천국은 없다" 라고 되어버리면,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이 광야를 고생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광야가 없이는 약속의 땅은 없다" 라고 하면, 우리 인간들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광야를 억지로라도 힘들게 버티면서 통과해야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광야가 오게 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이미 약속의 땅인 천국이 광야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광야를 후딱 지나서 천국에 가자" 라고 하는 것은 노림수이고,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교회는 하나의 보험회사라는 말이죠. 즉 "여러분, 힘들게 교회에 다니시면 천국을 보장해줍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달이 13,500원을 내시면 나중에 보험금을 탑니다" 라는 것과 같은데, 보험료가 너무 적은가요? 그런데 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죠. 즉 "나의 선한 행위로 계속 적금을 넣으면, 그것이 천국에서는 상급으로 돌아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신앙인가? 투자인가?

지금 제가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게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한테 투자한 것인데, 그렇게 자기한테 투자를 하게 되면 무엇을 믿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께 투자한 것을 자기가 믿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지 신앙이 아닌데,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교회가 얼마나 사기를 많이 쳤는지 모르는데, 이런 사례를 끄집어내면 끝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도 또한 그런 사기를 듣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말이죠. 즉 "계속해서 나에게 희망을 제공해주는 교회라면 얼마든지 다닐 용의가 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주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앞의 것을 1번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2번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2번에는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2번에는 '나' 라는 것이 빠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광야에 집어넣든 약속의 땅에 집어넣든, 그렇게 구원을 받는 것은 누구의 일이라는 겁니까?

이게 주님의 일방적인 주님 자신의 일이지, 우리에게 이득을 주는, 즉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주님 고유의 일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2번에 해당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 십자가만이 십자가를 전한다 !!

그래서 지난 낮 설교시간에 "십자가만이 십자가를 전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십자가를 전하는데 누가 빠져야 된다는 겁니까? 자기가 빠져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십자가를 전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십자가를 전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십자가를 전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 다시 요한복음 11장으로 !!

다시 요한복음 11장으로 돌아와서, 인간이 비틀거릴 때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이고 부활은 아니라는 겁니다. 교재 173페이지에 보면, "비록 나사로는 죽었지만, 그가 주님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믿어야 믿음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너는 죽어왔다 !!

이것은 뭐냐 하면,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났는데, 그러면 나사로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나는 살아나기 이전부터 이미 줄곧 죽어왔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죽어왔다' 라는 것을 문법으로 'to 부정사' 라고 하는데, 이것은 완료형이라고 해서 "죽었다, 살았다" 라는 것이 아니고, "줄곧 죽은 채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부활이고" 라고 하시면서, 그 다음에 "나는 생명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십자가는 스스로 십자가를 전하니까, 즉 주님이 십자가를 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자신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필요하냐 하면, 줄곧 죽어온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자" 라고 하는, 그런 관점은 탈락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탈락이 되고, 그러면 무엇입니까? 주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무엇을 사용하느냐 하면, "주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인 것을 활용하기 위해서, 줄곧 죽어 와있던 나를 사용하신다"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불만을 터뜨리는데, 즉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문제는 목사님처럼 그렇게 나오면 큰 예배당에 교인이 몇 명이나 오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당이 크다고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까? 성도의 공간은 예배당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배당이 크면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하고, 그러면 예배당이 작으면 사람이 적어도 됩니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지금 유럽의 큰 예배당들이 무엇으로 바뀌었어요? 콘서트장으로 바뀌고, 심지어 술집으로 바뀌었다는 말이죠. 그것을 짓는데 무려 100년 이상이 걸렸다는 겁니다. 지금 거기에 가면 관광객들이 와서 카메라로 찍고 한다는 것이죠. 그 성당에서 드리는 예배조차도 이벤트인데, 즉 쇼라는 겁니다.

이제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여기 교재 73페이지에 사무엘상 4장 10절과 11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삼상 4: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삼상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 언약계의 상실과 인간의 죽음 !!

여기에서의 질문은 "언약계의 상실과 나의 죽음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즉 언약궤를 빼앗긴 것과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죠. 성경은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인간이 자기를 알아서 해석하면 안 되고, 언약계의 위치와 이동방향, 즉 언약궤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언약궤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도리어 해석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그러한 해석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구약 때는 언약궤가 움직여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는데,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으면 언약궤도 죽어야 합니까? 그게 아니면 언약궤는 펄펄 살아있어야 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언약궤가 펄펄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궤를 이용하려는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만 모가지가 날아가 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나' 라는 것에 있는 게 아니고, 그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궤 살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 이 언약궤 사건을 완성했습니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어떤 상자가 아닙니까? 즉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즉 어떤 객체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말이죠.

* 사건의 조종을 받는 자, 곧 성도 !!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 보이지도 않는 사건이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눈에 보이고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 그리고 그러한 자기 현실을 지금도 다스리고 지배하고 조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예배당이나 교회, 그것이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에 가면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하고 다정한 친목단체가 있는데, 그게 자기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사건인데, 보이는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 그것이 지금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건, 그 사건이 자기를 통솔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친히 이끄신다, 인도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통솔한다' 라는 말이 적절한데, 성경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신 양들을 인도하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로 인도하신다는 겁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즉 의의 나라로 간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땅은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광야인데, 그러면 이 광야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누가 광야를 주도하는고 하니, 그것은 인도하시는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고생한다' 라고 여기지 말고, 주님과 함께 동거한다, 즉 '동행한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괜히 고생으로 여겨서, 그러한 자기 고생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주어서,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 라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도 만만치가 않은데, 보통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비파괴 검사(Non Destructive Testing, NDT) !!

제가 강의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두 가지의 타입이 나오는데, 하나는 자기가 파괴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두 타입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먼저 하나는 파괴되는 즐거움인데, '비파괴 검사(Non Destructive Testing, NDT)' 라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비파괴 검사는 실제로 다 부수어서 안에 무슨 오류가 있고 문제가 있는지를 조사하는 게 아니고, 그냥 가만히 놔두고 조사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조사가 끝나고 난 뒤에, 그 대상을 다시 활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비파괴 검사'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방사선도 들어가고, 초음파도 들어가고, 음향도 들어가고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정육면체가 있는데, 이것을 비파괴 검사로 검사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방사선이나 초음파를 쏘아서 어떤 오류가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우리 인간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가 검사를 당했다고 하는 표시를 내려고 하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비파괴 검사를 받아서 자기는 멀쩡하기 때문에, "나는 멀쩡해요" 라는 것이 나와야 합니까? 그것이 아니면 방사선이 나와야 합니까? 방사선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진짜 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이 방사선을 내세워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즉 말씀이 와서 우리를 골수까지 쪼개면 쪼개면, 그 말씀에 의해서 점검을 받은 사람에서는 무엇이 하는고 하니, 말씀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비파괴 검사를 실시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방사선이 되어서 우리를 조사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조사를 하게 되면, 그러면 조사를 받고 난 뒤에 "당신은 오늘 어떤 검사를 받았습니까?" 라고 하면, "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자기에게 들어왔던 말씀에 의해서, 물론 그것이 비파괴지만 어차피 파괴라는 겁니다. 누구에게 테스트를 당한다는 것은 자기가 검사를 받은 것인데, 즉 파괴를 당했다는 말이죠. 자기 스스로 해석한 게 아니고 외부에서 해석을 했으니까, 파괴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는 파괴를 당하면서,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내놓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과정이 어떠하다는 겁니까? "(1) 슬프다, (2) 즐겁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입니까? 말씀이 자기를 경유해서 나올 때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이죠.

* 가벼움을 동반한 말씀 !!

그러니 들어온 말씀으로 인해서 자기는 지적을 받아도 너무나 마땅하다는 것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드러나는 가벼움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가벼움을 동반해서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너는 구원을 받았나? 나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라는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말씀이 나에게 있었어" 라고 하면서 말씀만을 전하고, 또한 상대방은 그 말씀만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너는 구원을 받아서 참으로 좋겠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들끼리 비교를 하는 것인데,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누가 신앙이 더 좋은가? 라는 식으로 말이죠. 오직 말씀이 나와야 하는데, 거기에는 자기 변명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 악착같이 버티기 !!

이게 두 번째 경우인데, 첫 번째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파괴되는 즐거움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는 결사적으로 버티기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버티는 것인데, 그러면 말씀이 나오는 게 아니고 "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말씀이 자기를 투과해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참고로 해서 자기가 자기를 검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말씀을 들었지? 오늘 설교말씀을 잘 들었지?" 라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너, 똑바로 해. 바르게 살아.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수가 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전히 주인은 누구입니까? 말씀이 아니고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전혀 신앙생활이 아닌데,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겁니다. 그냥 버티기에 들어간다는 것이죠. 결사적으로 사력을 다하여 자기 의미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버틴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아직도 젊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뭐냐 하면, 철딱서니가 없다는 말이죠. 젊었을 때는 철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자기 자신을 매일같이 검사를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남들에게 욕을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제대로 살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한다는 겁니다.

* '씨익' 웃는 마귀 !!

그런데 성경에서 보게 되면, 그러한 태도에 대해서 누가 좋아하는고 하니, 여기서 마귀가 웃는다는 말이죠. 마귀가 '씨익' 웃는 대목, 마귀가 신나서 좋아하는 대목, 그게 욥기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욥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 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벌거벗고 태어났는데, 맞지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고치는 것이 더 확실한데, "내 것이 없다" 라고 말이죠. 인간은 태어날 때 자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인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것이 없는데, 그런데 그 없는 것을 '내 것 만들기'에 나서게 한다는 말이죠.

* 인간은, ①②③④ !!

첫 번째, 인간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는데, 즉 벌거벗은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을 촉구해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 인간이 열심히 인생을 살면서, 자기 것이 없는데 자기 것을 만들게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두 번째라는 것이죠.

세 번째는 뭐냐 하면, 그 만들어진 자기 것으로 즐거워하면서 살도록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죽으라고 자기 것을 지키도록 한다는 말이죠. 이 말이 더 어려운데, 이것은 "이제 나도 내 것의 일부로 편입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인간은 죽을 때도 자기 것을 지킨다는 말이죠. 자기가 결혼해서 아파트도 장만하고 또한 자식이 생기고 하면, 그것이 다 자기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을 때도 그것을 걱정하면서 죽는다는 말이죠.

* 나도 내 것이 !!

여기까지는 우리도 아는데, 여기서 더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내 것 지키기' 라는 것에서, 그러면 '나'도 누구 것이 되었느냐 하면 '내' 것이 되었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을 가룟유다가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죽더라도 그동안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것, 그게 '자기 의' 라는 말이죠. 그런 자기 의, 자기 도덕, 자기 순수함,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까지 바친다는 겁니까? "나는 죽어도 좋아"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미쳤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나' 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충성하기 위해서 살아왔다는 겁니까? 자기가 만들어낸 '나의 것'에 충성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 라는 것도 거기에 흡수통합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정신병자라는 겁니다. 그 정신병자를 보고 누가 웃습니까? 마귀가 그냥 웃는 게 아니고 '씨익' 웃는다는 말이죠. "네가 내 손아귀를 벗어난다고 생각했더냐? 교회에 다닌다고 내 손아귀를 벗어날 줄 알았어? 웃기지마. 나는 너를 알거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처하는 주님의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까, 아까 비파괴 검사를 할 때 무엇이 들어온다고 했지요? 말씀이 들어온다 했는데, 말씀이 또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디모데전서 6장 7절과 8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라고 하는데, 이제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주님이 우리를 보는 관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점에서 보신다는 말이죠.

* 자기 것이 없는 인간,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태어날 때는 무엇입니까? 태어날 때 자기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 것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만드는 것에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배후에 누가 작용한다는 말입니까?

마귀인데, 이 세상이 마귀의 세상이 아닙니까? 마귀가 인간을 변질시킨 것이란 말이죠.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즉 시작부터 "이제는 네가 즐길 수 있고, 네가 행복할 수 있어.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네 것이 있어야 한다. 네 것이 없으면 사기를 당한 것이지. 그러면 죽어야지, 이 인간아!" 라고, 그렇게 마귀가 조종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마귀의 제작물로서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죠. 그리고 교회를 가면, 거기에 또 마귀에 속한 사람이 강대상에 올라가서 설교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사대가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비파괴 검사에서 말씀이 오게 되면, "나는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다. 아이, 좋아라" 라고 하면서 다시 '나'에게로 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사로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아니고, 주께서 살려내니까 어떻다는 겁니까?

처음부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주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는 것을, 즉 죽은 상태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 죽은 상태에서 자꾸만 성경을 자기 좋은 쪽으로 활용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173페이지에 보면 여호수아서 6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20절과 2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수 6:21)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

나팔을 불면서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장면인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집안의 가축들까지 칼날로 다 멸했다는 말이죠.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신이 나서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높임으로서, 그 언약궤 앞에서 자기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것이 없으면, 살아있는 내내 누구 것을 위하여 살게 됩니까? 이제는 언약궤에 종속된 언약계의 사람으로서, 언약궤만 더 높이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자기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것이 되는데, 그것을 두고 '이스라엘'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반드시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자기 파괴' 라는 말이죠. 그게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자기 파괴 !!

자기 파괴, 이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되면, 즉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자기 것이 파괴되는 것,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 즐거움보다도 신바람이 난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깨어지는 즐거움, 바로 그것이란 겁니다.

애초부터 '내 것' 이란 것, 그것은 마귀의 짓임을 발견하는 기쁨, 즉 "나를 통해서 주께서 계속 일하고 계신다" 라는 행복감, 그러면 그 행복함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긴장을 하면서 사력을 다하는,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즐거움 가운데서, 여러분 과연 어느 쪽입니까?

성경은 과연 어느 쪽을 말합니까? 성경은 우리는 이미 주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주의 것이라는 겁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만약에 자기 것이 있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주의 일이 되어야 2번에서 1번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파괴이기 때문인데, 그러면 그 파괴는 어디서 온다는 겁니까?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온다는 것이죠.

그 외부에서 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즉 말씀의 능력에서 온다는 겁니다. 자기 것에서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자기 것에서, 자기가 거듭날 수 있는 경우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성경말씀을 잘 연구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2번에서 1번으로 갔을 때 비로소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말이죠. 이 고백을 제가 칠판에 써보겠는데,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 고백을 하기까지 그동안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나 길었습니까? 그렇지요?

* 다시, '비파괴 검사' !!

'비파괴 검사'를 다시 해보겠는데, 말씀이 와서 우리를 거치고 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비로소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입니다" 라고 하면서, 벌거벗은 채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할 그 시점을 자기가 체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님을, 자기 믿음마저도 자기가 소유하면 안 되는 것을, 그것을 마귀가 좋아하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자기 믿음을 자기가 포기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이 개시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일방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주님의 자기 이야기 때문에, 그 말씀을 현실시키는 주체자는 누구라는 겁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없는 주님의 자기 믿음을 집어넣어서, 그 선물로 준 믿음으로, 은혜로 준 믿음으로, 우리는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구원은 값없이 얻은 것인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슨 고백을 하게 됩니까? 이게 신나는 고백인데,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나이가 많으면 알게 되는데, 물론 주께서 인도하시면 말이죠.

* 십자가 전선 !!

그런데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물론 젊은 사람들도 일찍부터 성령을 받게 되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전선', 이것을 오늘 강의제목으로 하겠는데, 왜냐하면 십자가 전선에 일찍부터 감전되면, 그렇게 감전이 된 자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전선은 일종의 줄기인데, 그 십자가 줄기에 일찍부터 감전이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감전이 된 사람은 온 몸이 시커멓게 되어서 손은 벌벌 떨리고 있다는 것이죠. 25,000볼트에 감전에 되어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 감전사고가 17살일 수도 있는데, 60살이 되지 않아도 감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30살 때 십자가의 전선에 감전이 되었다고 하면, 그 전선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사건으로, 그게 계속해서 이어져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전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만약 30살에 십자가 전선에 감전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30살, 31살, 계속 감전이 된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32살 때 여자를 만나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때 주례자가 "옆에 있는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십자가의 전선에 감전된 신랑은 뭐라고 고백을 해야 할까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라고 해야하는데, 이것은 "나는 저 여자를 믿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저 여자를 사랑한다는 나를 믿지 않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례자가 은혜를 받게 되는데, "네가 나보다 낫구나. 네가 나보다 인생을 더 아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의 일은 오직 주님만이 하시는데, 거기에 우리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파괴가 되어야 하는데, 말씀에 의해서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주의 일은 없다는 겁니다.

*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함께 !!

이제 교재 174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서 한 말씀만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언약궤를 앞장세울 때 그들의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는 말이죠. 즉 "이 세상에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함께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감지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아닌' 이라는 것, 그것을 말로 하기는 진짜 쉬운데, 그런데 성경 속의 현실은 어떠한고 하니, 주님의 영이 아니면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도저히 감지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자기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것은 생각하지 마시고, 죽을 때까지는 아직 젊다는 겁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젊은데, 그러면 여기서 '젊다' 라는 표현을 제가 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젊으니까 그렇다는 말이죠.

* 여전히 주께서는 젊다 !!

자기 나이가 80이 되었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80도 나이야? 그것도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거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는데, 여러분보다 나이가 더 많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이가 많다. 혹은 적다" 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께서는 젊다" 라는 점이라는 겁니다.

그 젊은 분이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을 보라는 말이죠. 그러니 끊어서 단독자로 "내가 누구냐?" 라고 하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회춘하세요"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청춘을 돌려다오 ♬" 라는 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ㅋㅋ). 사실 돌려주지 않아도 전혀 괜찮은데, 왜냐하면 90이 넘어도 계속해서 청춘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누구인고 하면, 바로 '나'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것을 내가 믿으니, 나에게 가장 위험한 요소는 나 자신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제발 남 탓을 하지 마세요. "너 때문에 내 인생을 조졌다" 라고 말이죠.

어제 낮 설교시간에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는데,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
[설교] 대구에 어떤 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손자가 곧 수능입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손자한테 보탬이 되고자 갓바위에 올라갑니다. 거기에 가서 비는데, 부처에게 배운 대로 하면 두 가지 업보가 있어요. 선한 업보가 있고 악한 업보가 있는데, 선한 업을 세우면 선한 업을 손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속법에 위반됩니다. 여러분, 부모가 힘들게 노동해서 얻은 것을 아들이나 손자에게 주면서 "내가 번 내 돈을 내 예쁜 손자한테, 아들한테 상속해준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할머니가 공부하는데 고생했다고 손녀딸한테 500원을 주면서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데 나라가 뭔데 세금을 떼느냐?" 라고 나온다면, 그러나 나라가 세금을 떼는 이유는,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의 입장에서 노동도 없이 소득이 왔기 때문에 소득세를 뗀다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쌓은 선한 업보를 나눠준다고 할 때, 아들이 3명이 있다고 합시다. 첫째 아들이 "어머니, 손자를 위해서 선한 업보 쌓는다고 해버리면 엄마는 손자를 위해서 애쓴 것이지만, 올라가다가 엎어지면 돈이 나가고, 완전히 자식을 불효자로 만듭니다. 그냥 손자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이나 만들어주시면 손자에게 힘이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때 둘째 아들이 반대하고 나서는데, "엄마가 힘든 줄을 알면서도 갓바위까지 올라가서 손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엄마 개인의 존재 의미가 된다.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두어야지, 형이 뭔데 엄마 건강을 걱정해서 못하게 하지?" 라고 한다면, 그러면 누가 맞습니까?
셋째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다 만만치 않죠? 논리의 타당성이나 근거가 딱 있죠? 셋째 아들이 이야기하기를, "형님들, 엄마가 형님들에게 '나의 이런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해달라' 라고 요청한 적도 없는데, 왜 형님들이 주제넘게 나서십니까? 가만히 계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큰형님, 지금 엄마 걱정을 하는데 그 심보가 '내가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큰아들로서 엄마에게 얼마나 효도했는지 아느냐? 이 동생들아!' 라고 하는, 이런 자기 선한 업보를 쌓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둘째 형님은 엄마의 선한 업보가 손자한테 전달된다고 생각하는데, 엄마의 나쁜 업보는 전달이 안 될까요? 납득이 되게 설명해보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자기 손자에게는 16.5%의 DNA가 유전된다고 하는데, 자식한테는 50%씩 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13.5%인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사람은 자기가 남들에게 잘해준 것만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의 나쁜 성질과 성격, 그게 남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계속 영향력을 주고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 그런 것은 사람들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겁니다. 귀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버티기에 나서기 때문에 말이죠.

* 어느 인디언 부족 이야기 !!

여기서 미국의 인디안 이야기를 하겠는데, 이 인디안 남성들이 허세가 많다는 겁니다. 남성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이들이 허세가 많아서 옆 부족의 남성들하고 시비가 붙었다는 말이죠. 이게 '이로쿼이' 라는 부족의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들이 옆의 부족들과 싸울 때, 여기에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들이 말하기를, "남성들이여, 당신들의 전쟁통에 우리 여자들과 자식들이 죽어도 좋습니까? 당신들은 지금 허세와 자존심를 세운다고 서로 죽이는데, 그러면 그 틈 사이에서 가정이 박살나고 자식이 죽고 아내가 죽어도 좋습니까?" 라고 하면서, 여성들이 말렸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여성들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행동을 했는고 하니까, 남성들에게 자기들이 입던 치마를 입히고, 또한 자기들이 사용하던 장식품으로 그들의 몸을 치장시켰다는 말이죠.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까, 그 땅에는 평화가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남성이 무엇으로 바뀌었지요? 여성화가 되면서 평화가 오는 방식이었다는 말이죠. 물론 남성의 몸이 여성으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문화적으로 여성화가 되기를 여성 쪽에서 촉구를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는데, "부부가 그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은? (1)복음 알기, (2) 좌파가 아니면 됨, (3) 코를 골지 않기, (4) 담배 피우지 않기" 라고 한다면, 여기서 정답은 몇 번입니까?

정답을 말씀해 드리겠는데, 정답은 복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고, 코를 골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나 실용적이라는 겁니다. 명분과 같은 것은 허상이라는 것이죠. 그런 것은 다 헛된 것이고, 실제로 일상에서 같이 사는 것은 잠을 잘 때 코를 골지 않으면 되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 나는 당신을 사랑해 !!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결국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당신을 사랑한다" 라는 말은, "나는 내가 살아온 방식을 사랑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신이 내가 사는 방식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이 내 방식 안에서 일치가 되면, 나는 당신과 항상 부부의 연을 맺을 의사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성경이고 복음이고 간에 일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자기 취향에 맞는지, 자기 타입이 맞는지, 그게 제일 첫 번째 조건이라는 말이죠. 결혼 조건을 봐도, 자기가 절대화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절대화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몸이 불편하면 모든 것이 다 불편한데, "나는 믿음이 좋습니다" 라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내가 나를 경작하는 사람이고. 내가 나를 재배하는 사람이고 키우는 사람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내 것 지키기 !!

여기에 평생을 다 걸었는데, 제가 이것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벌거벗은 채로 태어났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평생 동안 그 삶의 모습은 '내 것 지키기' 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돈을 모으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고생한 것을 그냥 무의미하게 갖다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오든 말씀이 오든 간에, 인간은 버틸 대로 끝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그 버티는 방법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조건은 그대로 있고 여기에다가 말씀이해, 성경지식, 이런 것을 추가하게 되면 나중에 죽어서도 자기는 버틸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종교가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주께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 교재 174페이지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생각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 자기 구원이 들어있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에 자기 구원이 들어있습니까? 들어있지 않은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 나라와 그 의는, 결코 자기 의가 아니고 그분의 의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자기 뜻이 들어있다고 생각을 할까요?

* 사울 왕의 금식, 그러나 !!

여기 교재 175페이지에 보면 "사무엘상에 보면 블레셋 적들이 왔을 때 사울 왕은 금식을 했습니다. 실로암 못 가에서 제사를 드리고 금식을 했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금식을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을 이겼다는 말이죠.

------------------------
* 녹취자 - 목사님, 사울 왕이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길갈에서 제사를 드리고(삼상 13장), 그리고 전쟁 중에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한 적이 있는데(삼상 14장), 그런데 실로암 못 가에서 제사를 드리고 금식을 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

그렇다면 그 다음에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 사울 왕이 무엇을 했을까요? 역시 금식하고 기도를 했는데,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금식을 해서 이겼는데, 두 번째로 아말렉이 왔을 때도 역시 금식을 하고 제사를 드려서 이겼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은 이겼는데, 그런데 누가 졌는고 하니, 사울 왕은 졌다는 겁니다.

* 너는 잘렸어 !!

여기서 사무엘이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닌데, "사울 왕, 당신은 잘렸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전쟁은 이겼는데 잘렸다는 겁니다.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하느냐는 것인데, 왜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집어넣었느냐는 말이죠.

처음에 금식할 때 사울 왕은 자기를 부인했는데, 그런데 두 번째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전쟁에 승리할 것만 계산해서, "전에 무슨 방법을 사용했더라?" 라고 해서, "금식을 해서 승리했지" 라고 해서, 그 은혜를 받은 것만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 은혜가 그만 자기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자기가 한번 해서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니 그 이전에 있던 금식과 기도가 자기 것을 살리는, 그런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누구를 잘라냅니까? 기도와 금식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이라는 말이죠. 즉 이스라엘의 적은 아멜렉이 아니고 사울 왕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사무엘 선지자가 니타나서 지적을 한다는 것이죠.

* 목사님, 이런 성경공부는 필요치 않습니다 !!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제가 이런 강의를 하면 다음과 같이 나오는 목회자가 있는데, "목사님, 이런 성경공부는 필요치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을 하나도 몰라도 기도해서 부흥시켰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만만하게 교인수가 늘어나고 예배당을 크게 지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는 말이죠.

"여러분,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큰 예배당이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제가 기도새벽 시간에, 그리고 기도원에서 기도한 결과입니다. 성경공부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는 두 축이 있는데, 말씀과 기도, 이게 같이 나가주어야 교회가 부흥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목사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러니까 성경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또한 어떤 목사님은 "우리가 예배에 충실했고 찬양하기에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흥되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부흥된 이유를 나름대로 동원시킨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성경공부를 해도 그런 사람은 이단이라는 말이죠. 성경을 빼서 이단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해도 이단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께 잘린 사람은, 바로 나오는 것이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성경공부에 참석하라는 말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즉 "성경공부를 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게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가 "성경공부를 하면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그 '나'를 파괴시킨다는 겁니다. 즉 자기 파괴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 혼란스러운 십자가 현장 !!

제가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인데, 주님이 지신 십자가 현장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어수선했는데, 혼란스럽다는 겁니다. 정돈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그 십자가 현장에 가보세요. 무엇이 빠져있어요? "내가 아는 질서, 내가 기대한 질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 현장에는 질서가 보이지 않는데, 혼란 그 자체라는 말이죠.

* 목사님, 당의정을 주세요 !!

여러분, '당의정' 이라는 것이 있지요? 당의정이 무엇입니까? 쓴 가루약이라든지. 그런 것이 먹기가 힘드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 가루에다가 설탕을 코팅해서 먹기에 좋게 달달하게 만든 것이 바로 당의정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몸에 좋다는 울금 가루를 그냥 먹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이가 들면 몸의 기능이 떨어지는데, 그러면 그 가루가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면, 숨쉬는 기도로 들어간다는 말이죠. 울금 가루가 아무리 좋아도, 먹으면 5분 동안 계속해서 기침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먹게 되면 공포의 시간이 오는데, 그러면 이 울금 가루를 환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죠. 가루보다는 환이 비싸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공포의 시간이 아닌, 달콤한 시간으로 바뀐다는 것이죠. 달콤한 맛이 나면 잘 먹는데, 달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몸 내부가 이것을 거부해서 기도로 들어가고 한다는 겁니다.

* 말씀은 정제되지 않아 !!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십자가에서 당의정을 뽑아낸다는 겁니다.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다 빼고, 정리된 달콤한 것만 딱 먹으면, 그러면 십자가가 안으로 쏙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당의정을 만들어 달라고, 그것을 목사에게 요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은 정제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말씀은 안에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말씀은 어떤 사건, 즉 혼란스러운 십자가 사건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굳건한 '나' 라는 이미지는 십자가의 혼란에 휩쓸려서 자기도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만 뚜렷하고, 나머지는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오직 주인공은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하늘의 해가 어두워지고, 무덤에 있던 그 시체들이 살아나고, 날이 깜깜해지고, 여기 저기에서 온갖 잡소리들이 들린다는 겁니다. "네가 진짜 메시야냐? 이래도 우기느냐? 이래도 메시아냐?" 라고 말이죠.

* 예수님은 패배자 !!

어제 낮 설교시간에 "예수님은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다" 라고 했는데, 이 세상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맥없이 날아갔는데, 그런데 그분을 우리가 왜 믿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을 즐겨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분을 따르고 싶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자기는 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아니고 패배자의 길을 가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게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쁘게 즐겁게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즉 "가볍게 나는 패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권세자가 승리를 쥐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런 고백을 간단하게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정제된, 그런 당의정을 먹어왔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믿고도 자기는 멀쩡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혼란스러움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 전쟁에서 이기고 패배한 사울 왕 !!

다시 사울 왕으로 돌아와서,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했을 때, 과거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는 이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누가 우리 사울을 가짜라고 이야기해? 진짜 왕이 맞아" 라고 하면서, 인기가 아주 높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사울 왕이 "이전에 있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처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되어서,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왕이 되리라" 라고, 그렇게 믿었느냐는 겁니다. 사울 왕은 당연히 믿었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이겼는데, 그런데 아말렉 왕이 잘리는 것처럼 자기도 하나님께서, "이미 너는 잘렸어"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아말렉과의 전쟁을 하나님께 일으켜 놓고, 그 전쟁을 통해서 사울 왕을 그 자리에서 폐위를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말씀에 의한 파괴, 즉 이스라엘을 파괴시켜버리신다는 것이죠.

* 나를 떠나소서 !!

계속해서 교재 176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보면 "이것은 '내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가 없을까?' 라고 살피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차원과는 다릅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는 이야기 나오는데, 베드로가 고기를 잡을 때 갑자기 예수님이 끼어 들었다는 말이죠. 마치 십자가 전선에 의해서 감전을 당한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끼어 들었다는 겁니다.

결코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야, 거기 말고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했습니까? 전혀 아닌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 다음이 중요한데,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떠났습니까? 떠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진짜 주님이 찾아온 사람은, "나는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지옥에 갈랍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나 무슨 소리를 해도 주님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이 오신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나옵니까? "말을 좀 조심해. 말이 씨가 돼. 네가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진짜로 예수님이 너를 버리는 수가 있어. 그러니 네가 똑바로 말해야지. 타이밍이 중요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믿음을 관리한다고 하면서 나선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과 베드로의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 믿고 마음대로 사세요" 라고 했을 때, 불신자는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겁이 나서 말이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면 자기만 손해라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시면 "나만 이익이다. 혹은 손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판정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화를 낼 권한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생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후회하지 마세요. 우리는 후회할 자격도 없는데, 그냥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알아서 찾아왔다면, "주여, 이제부터 주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라고 해도, 주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기어이 천국에 보내신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 이것보다 더 긍정적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을 보고 낙엽을 던지면서 "가란 말이야" 라고 해도, 주님은 가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뜻대로 오고 우리 뜻대로 가는, 그런 주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주께서 우리를 찾아온 이유는, 우리의 그러한 고집을 주님께서는 죄로 사용해서, 즉 우리의 죄를 통해서, 그것이 주님의 의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그런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뿐이라는 것이죠.

그 이야기가 교재 177페이지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 어떤 아들이 5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속으로 엄마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5만 원만 달라고 했는데, 그러자 엄마가 금고문을 활짝 열면서 "얘야, 여기 있다" 라고 하면서 돈 뭉치를 던집니다. 그때 아들이 "어머니, 고맙습니다" 라고 할까요? 아니면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라고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다시는 돈을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엄마는 "정말이다. 금고의 돈을 다 가져가라" 라고 합니다.
-------------------------------

* 진짜 소중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 !!

이게 주님의 뜻인데,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을 한 문장으로 쓰겠습니다. "네가 아끼는 너의 모든 것보다, 나의 생명이 더 고귀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진짜로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자신의 의로 인해서 예수님의 이 생명이 막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그 막혀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파괴해줘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예수님의 생명, 그 소중함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그렇게 파괴함으로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의 그 어떤 귀한 것보다 더 귀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께서는 자기 백성 속에서 일하시고, 그렇게 일하시면 말씀으로 알려주신다는 말이죠.

교재 117페이지를 계속해서 봅시다. 여기에 누가복음 7장 말씀이 나오는데, 36절에서 3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 남을 의식하지 않는 여인 !!

여러분이 아는 말씀인데, 여기서 제가 묻겠습니다. 이렇게 질문 나간다는 것은 더 깊이 들어가겠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을 의식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의식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이 자유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여자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의식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과연 누가 소중합니까? 예수님이 소중합니까? 자기가 소중합니까? 자기가 소중하니까, "예수님은 저 여자가 얼마나 질이 나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저런 자와 놀지? 우리는 점잖은데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훌륭함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남들 앞에서도 자기 훌륭함, 즉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그것이 얼마나 남들로부터 호응을 받는지를 따져가면서,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말이죠.

* 인간은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면서 산다 !!

그래서 엄마가 외출할 때 옷을 입고 꼭 누구한테 이야기를 합니까? "여보, 오늘 내 머리가 어때? 잘 나왔어?" 라고 남편에게 묻는다는 겁니다. 아닌가요? (ㅋㅋ) 사람은 남들에게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죠. 그것을 어렵게 말하면,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면서 산다" 라고 하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친척의 이야기인데, 자기 아내가 죽고 나서 1년 뒤에 그만 그 남편도 죽었다는 말이죠.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내를 따라서 죽었다는 겁니다. 어떤 특별한 질병에 걸려서 죽은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 죽었다는 말이죠.

이것은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으로 설명해보면, 아내가 없으니까 멋있는 남편 노릇을 이제 자기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편 노릇을 할 수가 없다면, 그러면 자기 것이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시들시들 말라서 죽어간다는 말이죠. 자기를 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식물에 물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풍선에 바람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쭈글쭈글 말라간다는 겁니다. 주께서 일하면 회춘을 하는데,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고,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면, 그 자체가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것을 계속해서 가지고 가면,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위험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조져버린다는 말이죠.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인간론이 끝났는데, 다음 시간에는 구원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

여기 교재 178페이지에 보면,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설명하고 이번 시간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십자가를 진 현장은 어수선하다고 했는데, 정리가 되지 않고 어수선하다는 겁니다.

주님의 존재가 되면, 즉 주님이 들어오면 갑자기 자기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수선해진다는 것인데, 감전을 당해서 말이죠. 그래서 다시 잘 나가기 위해서 자기를 수습해보려고 하지만, 파괴되기 이전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허겁지겁 끌어 모아도,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사막에는 가보지 않았는데, 사막에 가면 구멍, 즉 샌드홀이 있다는 말이죠. 동영상으로 본 기억은 있는데, 샌드홀이 뭐냐 하면, 낙타하고 사람들이 잘 가는데 갑자기 앞에 있는 낙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멍에 빠졌다는 것이죠. 그게 평면으로 그 모래인데, 딛으면 안에 그 구멍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우주로 설명하면 무슨 홀이 되겠습니까? 브랙홀이 된다는 겁니다. 모든 보이는, 즉 질서가 있고 안정된 것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 브랙홀 속으로 전부 다 없는 것처럼 푹 빠진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연 세계이고, 그렇다면 영적 세계에서의 샌드홀이나 블랙홀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십자가 사건인데, 모든 안정적이고 질서가 있는, 즉 "내 인생은 내가 이렇게 잘 살았지.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가면서, 내 인생을 열심히 살았어" 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 전선에 감전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애초부터 정돈된 것 자체가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무의미하고 다 해체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가 보여준 사건은 무슨 사건입니까? 그 시대의 블랙홀 사건인데, 우리가 만약에 바리새인이고 그 여자의 과거를 알고 있다면, 그 여자를 보고 "또 놀고 있네. 또 연출하고 있네" 라고 비아냥거린다는 겁니다.

그 여자를 보고 "정신 좀 차려라" 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의 자아를 바로 잡아서, 질서 있게 다시 안정되게 해" 라는 것인데, 그런데 지금 그 여자는 우리의 조언을, 바리새인들의 조언을 과연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무시하겠습니까?

* 리플리(RIpley) !!

무시하는데,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나는 지금 십자가 사건 앞에, 내가 자신이 파괴되어서, 나는 혼란한 것도 고맙고 감사한다" 라는, 그런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참으로 기이한 사건인데, 이것을 영어로 '리플리(RIpley)' 라고 하는데, 영화제목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친절한 리플리' 라는 KBS 일일 드라마도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 뭐냐 하면 "기이하다, 이상하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질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질서라는 이름으로 묻어놓은 바닥에 있는 원초적인 혼란에서 나오는 기이함이라는 말이죠.

-------------------------
※ 리플리 증후군이란?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이 만든 허구의 세계를 실제처럼 믿으며, 거짓말을 반복하는 심리 상태를 말해요. 단순한 허언과는 조금 달라요. 영화 리플리에서 유래한 용어이기도 하죠. 리플리 증후군인 사람은 자기가 그런 상태인 걸 알까요? 대부분은 자각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거짓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는 일부러 거짓말을 시작하더라도, 점점 반복되다 보면 자신도 그걸 믿게 되는 단계로 넘어가거든요. (네이버 질문과 답변)
-------------------------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야, 사람이 물위를 걸었다. 기이하다" 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게 과연 기이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여인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면서도, 자기를 보고 죄인이라고 놀리는 것을 다 무시하고, 그냥 주님 앞에서 용서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 과연 어느 쪽이 기이한 겁니까?

그것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인데, 그 여인은 십자가 전선에 감전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지금 자유라는 말이죠. 인간의 모든 평가, 더 나아가서 자기가 자기에게 내리는 평가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블랙홀, 즉 리플리 십자가에 빠져들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때 자기도 예상도 못한 세계의 새로운 사건, 즉 자기 의가 아니라 그 나라의 의의가 자기에게 찾아왔다는 겁니다. 주께서 자기를 지금껏 죄 있는 여인으로서 사용해주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움직이는 십자가의 존재로서, 그 여자는 누가복음 7장에서 계시의 인물로 삽입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계시의 인물, 그래서 오늘날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늘 나라에서 그런 자들을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 나는 깨어졌다 !!

그러니 말씀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말씀으로 인해서 깨졌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는지, 남들을 흉내내고 모방하면서 얼추 잘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주님을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주님에게 이용을 당할 생각을 하면서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11,18 오전 11시에 마침.

Only the Cross delivers the Cross !!


※ '클로바노트'를 이용함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의 내막  (0) 2026.03.07
타인의 타인  (0) 2025.12.27
동행의 전개  (0) 2025.11.04
진동  (2) 2025.09.13
물음표  (0)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