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타인의 타인

아빠와 함께 2025. 12. 27. 10:17

[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0 - 타인의 타인

25,12,0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두 가지 구원론 !!

오늘은 교재 179페이지에 나오는 '구원론'을 해보겠는데,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바로 구원론이라는 겁니다. 이 구원론에 대해서 교재에 보면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는데, "구원론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론과 사람이 스스로 구원이 되고자 하는 구원론이 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구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게 있고, 그리고 그 출발을 인간으로 시작하는, 즉 인간이 노력해서 구원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라는 것인데, 즉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것이 종교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종교라는 것은,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뭔가 해야한다" 라는 것인데, 자기의 미래, 즉 "나의 나 됨에 대해서 지금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된다" 라는 것에 그 강조점이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이 노력해서 하는 구원론이라는 말이죠. 종교 단체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무엇을 하면 구원이 됩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상품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것을 컨셉으로 잡고 종교단체가 운영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립니까? 종교단체가 다 소용이 없어지는데,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구원이 되고자 해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해주지 않으면, 그러면 끝이 난다는 겁니다.

어제 설교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만약에 천국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태워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 기사가 태워주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으로 그냥 끝이라는 말이죠.

* 너무나 냉정하신 하나님 !!

그게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너무나 살살 맞은 일인데, 하나님이 너무 냉정하고 냉혹하다는 겁니다. 전혀 푸근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말이죠. 산타 크로스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은데, KFC 할아버지는 인상이 좋다는 겁니다. 금복주를 보면 얼마나 인상이 좋습니까? 친근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종교는 이렇게 신을 우리 인간과 같이, 인간화를 시키는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 인간을 구원해버리면, 그러면 완전히 맛이 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구원방식, '예수님 구원' !!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그게 교재 180페이지에 보면 이것을 둘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고 하니,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할 때 방식이 나오는데, 바로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는 내 노력을 거부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구원이 됩니까? 인간이 자기 노력을 거부하는 것도 역시 인간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꼼수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도 안 되는데, 즉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이 되는데 있어서 인간의 그 어떤 시도도, 즉 아무리 마음을 낮추고 자기를 부인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종교단체에서 다 하는 것인데, 그렇게 종교단체에서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다 한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로 구원이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공식은 성경에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 그런데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사람도 있는데, 20대의 어떤 청년이 고생해서 벌은 돈 1800만을 몽땅 다 바치고,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북한 쪽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겁니다. 이게 이명진 목사님의 자기 경험인데,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말이죠.

*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마 !!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서 그게 사기였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사기를 치는 자들도 있기는 있지만,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쳤다는 말이죠. 혹시나 여러분은 이런 사기를 당한 적이 없습니까?

부흥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이렇게 꼬이는 것은, 여러분이 온전히 바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빨리 집을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그 나머지는 교회를 신축하는데 지금 바치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부흥사가 자기에게 사기를 쳤다기보다는, 이것이 누구의 탓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친 것이란 말이죠. 여기서 공식이 하나 나가는데, "자기가 자기에게 태클을 걸지 마세요"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마" 라고, 진성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는 말이죠. 아닌가요? 도대체 태클을 누가 겁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건다는 겁니다. 즉 "이 정도로 착하게 살고, 이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면 주께서는 천국에 넣어줄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어느 강의에서 '태클' 이라는 표현 대신에 다르게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나에게 자물쇠를 채운다" 라고 말이죠. 즉 "이것은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조정을 한다는 겁니다.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을 이용해서 종교단체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그것을 자극하고 더욱 더 훈련을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런 본성이 종교 단체 안에서 발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 인간 구원은 없어 !!

성경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분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합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끝까지 너를 죽일 것이다" 하라고 하는, 그게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인간 구원은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은 없는데, 그것은 전부 다 교회에서 잘못 가르친 것이란 말이죠. 구원이라는 것은, 그것이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었는데, 전부 다 무덤에 있는 뼈다귀라는 말이죠. 즉 뼈라는 것이죠.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 내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 !!

제가 어린 시절에 대구 비산동 151번지에 살았는데, 그곳이 어디인고 하면, 서문시장에서 내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사는 집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서 보면, 서문시장부터 해서 대구 시가지가 아래로 내려다보인다는 것이죠.

겨울에 눈이 왔을 때 2층에서 봉창을 통해서 보면, 바깥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다는 겁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나는 이 세상의 일부임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라는 점이란 말이죠. 그것을 풀어보면, "나는 그 어떤 경우라도 눈 덮인 이 세상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나는 절대로 부정하지 못하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어릴 때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어도, 역시 이 세상 안에 있는 어른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 안에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해도 이 세상과 함께 있고, 이 세상 바깥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이 세상, 즉 나의 세상에서, 내가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 라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 그러나 성경은?

이것은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자기가 속해있고 떠날 생각이 없는 이 세상, 그것을 배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서 "이 세상에서 결국은 나는 한 줌의 재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이것을 빼먹은 것인데, 세상살이에 충실했던 그 대가가 자기를 무엇으로 만든다는 겁니까?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한 줌의 재, 이게 바로 성경에서 알려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게 전부 다 허상이었던 것인데, 이 세상과 더불어서 있다는 것이 허상이고, 실상은 한 줌의 재라는 것, 그게 자기의 실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 모습인데, 즉 "나는 한 줌의 죄가 되기 위해서, 그동안 이 세상과 하나라는 허상의 세월을 살아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시공간,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 하얗게 눈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 눈의 세계가 자기에게 속해 있고,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자기에게 전부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해서, 비로 그것을 벗어나는 바깥의 안목이나 바깥의 시선, 그런 바깥의 인식들을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
* A : 당신은 요즘 무엇을 합니까?
* B : 요즘 놉니다.
* A : 왜요?
* B : 퇴직을 했거든요. 직업이 없어서 놀아요.
-----------------------------

그런데 성경적으로 볼 때 뭐냐 하면, 과거에 무엇을 했던 지금은 일거리가 없어서 논다는 말이죠. 그렇게 일거리가 없으면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과 아무런 경계, 즉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일거리가 없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살아있으면서 일거리가 없는 시체와도 같은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
* A : 당신은 요즘 무엇을 합니까?
* B : 저는 일거리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 A : 뭐라고요?
* B : 저는 죽었지만, 주님이 일하시네요.
-----------------------------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 되는고 하니, "저는 죽었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일거리가 없으니 죽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는 죽었지만 그런데 일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게 뭐냐 하면, 시공간 바깥에서 확장된, 즉 이 세상과 확장된 다른 곳에서 자기에게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콜라텍에 가서 춤을 춘다고 하면, 이게 노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콜라텍에 가서 춤추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주께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는 어디로 가는고 하니, 골프가방을 메고 태국에 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역시 이것도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한시도 놀 수가 없다는 것이죠. 주님은 죽은 시체를 가지고 계속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 손자를 키운다고 죽을 지경입니다 !!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나는 놀지 않습니다. 손자를 키운다고 내가 진짜 죽을 지경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싶은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손자가 취직을 하고 장가를 가면 또 다시 어떻게 됩니까? "역시 나는 이 세상 이 전부야" 라고 하는, 그런 시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구원이 되지 않은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문제가 무엇 하나 얻어걸리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이 '나' 라는 것이, 옛날에는 이렇게 있었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알던 세상 바깥으로 나가버린 상태", 그게 곧 구출이고 구원이라는 말이죠.

* 우리는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게 나가버린 상태가 무엇인고 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경험했던 것인데,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문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사느냐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천국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아예 천국에서 받아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천국에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 이미 실시된,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는 곳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주님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 땅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킬까요? 말씀을 통해서 시킬 때, 그게 주의 일을 하는 것이란 말이죠.

* 주의 일이란, 주님만의 일이다 !!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주의 일이란, 주님만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즉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란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주님이 내 안에 살아서 지금 주의 일을 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 주님만이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 계속 주께서 살려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순서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주님만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고 하면, 그것은 곧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이죠.

* 죄인 값 + 예수님 값 !!

그렇게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그 죄를 자신의 값으로 용서하시고, 그리고 나서 우리를 의인이 되게 하시는데, 그것이 곧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의인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주의 일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은,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하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인이 되게 할 때 무엇으로 하느냐 하면, 주의 일은 말씀으로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죠. 말씀으로 말이죠.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의 특징은, 말씀과 멀어지는 게 아니고, 주의 일은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지적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으로 지적해주면, 자기는 죄인이 되고, 그래서 지옥에 가야만 하는데, 그런데 죄인 값에 플러스가 되는 것이 있는데, 즉 예수님의 값이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치렀던 값이 말이죠.

* '값없이' 생명수를 !!

요한계시록 22장에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 나오는데, 물론 믿는 자에게는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여기 22장 17절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생명수가 나오는데, 그 생명수 앞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값없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러면 이 '값없이' 라는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런데 만약에 그냥 값없이 되어버리면 무엇이 없어져요? 주께서 하신 주의 일이 사라진다는 말이죠. "야, 신난다. 공짜로 얻었다" 라고 하면, 그만 주의 일이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값없이' 라고 했을 때, 그 값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펴본다고 하면, 지금 그 사람 안에는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이죠. 그 사람 안에 주님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값없이' 라는 그 값의 가치를 위해서, 주께서 동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말씀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 안에는 뭐가 있는고 하니, '값없이' 라는 그 값이 말씀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말씀 안에 말이죠. 그래서 말씀을 만약에 멀리한다고 하면, 점점 더 말씀과 떨어진다고 하면, 그 인간은 자기 잘난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 공짜지만 공짜가 아냐 !!

다시 말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고, 내가 열심히 나를 조정하고 나를 관리해야 한다. 나는 내 덕에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말씀을 가까이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대한 지적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적이 가능해지면서, 거저 주시는, 값없이 주시는, 그런 값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값은 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거저지만, 이 값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게 결코 거저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어떤 예수님의 공로가 있는데,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있다는 말이죠. 그 하신 일이 주의 일이 되고, 그 주의 일, 그 공로를 위해서 자기가 계속해서 살아있을 때까지는 살게 하는 그 현장, 바로 그 현장을 자기 몸을 가지고 만끽하면서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나이가 많아도 노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죠. "오늘 오후 2시에 무엇을 할 겁니까? - 낮잠을 잘 겁니다" 라고 하면, 그게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낮잠을 자는 일을 주의 일을 하게 되는데, 도대체 놀 틈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오후 3시는 무엇을 할 겁니까? - 화투를 칠 겁니다" 라고 한다면, 화투를 치는 주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점에 10원을 하는 고스톱을 치면서,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주님의 방법도 참으로 희한한데, 우리를 지적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 모든 환경이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어서, 값없이 거두어주시는 그 값과 연계시키는 일, 그렇게 지금도 주님을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 사람이 아닌, 말씀 논쟁 !!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신다면, 이러한 두 구분을 다음과 같이 하시면 되는데, "사람을 가지고 논쟁하지 말고, 말씀을 가지고 논쟁하자" 라고 말이죠. 사람을 사지고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다" 라고 논쟁하지 말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조리 죽은 자인데, 그 죽은 자를 끄집어내어서 굳이 논쟁할 이유가 없는데, 사람에게는 그런 가치 자체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 하면, 논쟁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하고 나는 다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타인을 공격하면서 "나는 너보다도 더 우수하다" 라는 것을 스스로 확정하려고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무식하고 못난 것아, 너는 지옥에나 가라" 라고 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고, 이런 경우에는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지적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교회헌금을 위해서 보험까지 깨뜨렸으니까, 역시 나는 훌륭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에서 마태복음 16장을 잠시 보겠는데, 그 이전에 아까 했던 것을 기억이 나도록 제가 다시 해보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태클을 걸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 '나' 라는 것은 지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잘나게 자기 인생을 조정해버리면, 그러면 자기 부정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는 이럴 정도로 철저하게 내 관리가 되었으니까, 나는 얼마나 훌륭한지 몰라"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태도는 뭐냐 하면, 이미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인한 느긋함, 그 느긋함을 통해서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까지 것, 그런 말씀이 없어도 나는 다 알아. 돈만 있으면 되지"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철저한 자기 방어 가운데서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역시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공간만 쳐다보고 사는 사람, 그러니까 구분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현재 시공간만 찾아다니는 자인데, 그러니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겁니다. 즉 바깥 안목이 없다는 것이죠

바깥 안목은 없고 기존의 안목을 가지고, 그냥 "아이고, 죽으면 구원을 받겠지" 라고, 그렇게 구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 자기가 계속해서 지적을 받을 일이 없고, 자기 것만 사수하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기 부정이 전혀 안 되는 것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 가만히 있어보세요. 제 단도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자기가 신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신이라는 것이죠.

자기 안정감만 있으면 최고가 되니까, "나에게 있어서 내가 신이다" 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천국에 가서 할 게 없다는 겁니다. 자기 잘난 척을 한다고 바빠서 말이죠. 그런 사람을 천국에서 받아주겠어요?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주님의 공로만을 드러내는 자들이 천국에 있는데,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온다는 말이죠. 주님의 공로만 영원토록 찬양하는 곳이 천국인데, 물론 천사도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죽기 전부터 주님의 공로만 찬양하는 작업을 이 땅에서 하게 되는데, 주의 영, 즉 성령이 와서 그 일을 시킨다는 말이죠.

* 왜 천사는 날개가 6개인가?

어제 주일학교 설교가 무엇이었는고 하니까, 천사가 날개가 6개 있다는 겁니다. 두 개는 아래쪽의 자기 발을 가리는데, 즉 자기 존재를 없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죠. 그리고 날개 2개는 자기 얼굴을 가리는데, 감히 자기를 만드신 분을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 빛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사가 자기를 표현해야 하는데, "나는 하나님 앞에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그 뜻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날개가 6개라고 했지요? 두 개는 아래로 해서 자기를 가리는데 소모하고, 두 개는 자기 얼굴을 가려서 차이남, 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빛과 피조물의 그 한계를 차이를 분명히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두 개의 날개가 있는데, 그 두 개의 날개로는 무엇을 하느냐 하면, 퍼덕거리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한다는 말이죠. "저는 영원히 주님만을 영화롭게 하겠습니다. 달랑달랑!",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의 기능인데, 거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죠. 22절에 보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는 과연 어떤 형편일까요? 천사와 같은 기능, 그러한 형편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천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습니까? 자기를 가리고, 오직 주님만 찬양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죽기 전에 성도에게 이 일을 하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할 사람이라고 하면, 그런 사람은 자기 잘난 척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면, 그 말씀은 우리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지적을 하신다는 말이죠.

* 그래, 나는 지금 잘난 척을 하고 있어 !!

자기 잘난 체를 한다고 골프채가 든 가방을 끌고 인천공항에서 태국으로 가는, 그런 잘난 척을 우리가 서로 서로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골프를 좋아해서 추운 겨울 날씨를 피해서 태국에 골프를 치러 가는데, 주위에서 "저 인간을 봐라. 저 졸부를 봐라. 지금 돈을 좀 벌었다고 잘난 척을 하는 것을 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하면 됩니까? "지금 주님께서 나의 잘난 척을 하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골프채가 든 가방을 끌게 하는 고생을 시키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주의 일을 하고 있어. 지금 나의 죄를 마구 까발리고 있단 말이야" 라고, 그렇게 나오시면 된다는 겁니다.

* 응용문제 !!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가 나가는데, 여러분은 풀 자신이 있죠? 아버지가 말기 암에 걸렸는데, 그런데 딸도 형편이 힘든다는 겁니다. 나이 40에 시집도 가지 않았고 자기 몸도 아프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딸에게 와서 자기를 좀 돌봐달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딸이 아버지를 모신다고 죽을 지경인데,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이 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까 이야기한 골프채와도 똑같은데, 지금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를 시집도 가지 않은 간 딸이 그것을 떠맡으면서, 자기는 힘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게 과연 누가 일으킨 사건입니까? 주께서 일으킨 사건인데,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딸, 즉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우리교회에도 보면 그런 집사님들이 계시는데,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신다고 난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힘이 들어서 그야말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요?

그런데 그렇게 부모님이 오시니까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없던 분노가 마구 올라오는데, 즉 "부모 지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시집갈 때 돈도 한 푼 주지 않았으면서, 그런데 이제 와서 나보고 돌봐달라고 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인간은 자기 방어가 안 돼 !!

이런 생각,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여기에 날개가 두 개 있다면 "주를 찬양합니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교회에 가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주제를 전혀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인간은 철저하게 죄인인데, 아직까지 어느 정도 죄인가가 들통이 덜 났다는 겁니다.

이게 병든 아버지가 오는 예보다도 골프채 이야기나 콜라텍에서 춤추는 게 훨씬 더 좋은데,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다르다는 말이죠. 로또에 당첨되는 경우도 있고, 자식이 아버지에게 집을 끼고 대출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마음대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 실없는 이야기(1) !!

이 시공간에 대해서 광주에 강의를 하려고 가면서 집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 집사님이 연세가 이제 70 가까이 되는데, 평소에 친분이 있는 어떤 장로님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분이 이제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집사님이 안타까워서 일부러 그 장로님을 만나곤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났는데 집사님이 늘 후회하는 것이 뭐냐 하면, 복음 이야기를 해주려고 만났는데, 그런데 꼭 끝나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만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죽을 때가 되었으니까 복음을 전해야지" 라고 하면서 가는데, 그런데 막상 만나보면 실없는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온다는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어떤 이야기가 실없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실없는, 즉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12월은 새 하늘과 새 땅 !!

오늘이 12월 1일이죠? 제가 일부러 11월 달력을 떼지 않았는데, 오늘 떼려고 말이죠. 세월이라는 것은 지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이 안에 있던 모든 추억과 기억은 11월 달력 종이와 함께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생 살았던 시공간은 어떻게 될까요? 주께서는 마치 이 11월의 달력처럼 시공간을 그야말로 사정없이 찢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거기에 담겨졌던, 즉 고생하면서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그리고 몸이 아프고 수술하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그런 시공간이 날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거기에 같이 묻혀 있던 우리도 모두 다같이 무늬처럼, 하나의 패턴처럼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날아간다는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즉 12월은 그냥 다가오는 하나의 달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즉 "내가 어떻게 사느냐?" 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주님이 살아서, 그분과 더불어 우리가 같이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공로가 삽입되어서, 주님 자신의 공로로 아버지께 영원함을 보장받았다면, 그 공로가 스며든 우리도 주님 덕분에 어떻게 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같이 영원한 천국을 누리게 되는데, 오직 그 관계로 인해서만 12월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은 답변을 일단 생각해놓으시고, 그 답변은 좀 있다가 물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8장을 보겠는데, 19절입니다.

(요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게 참 중요한데,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을 하는데, 아주 간단한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라는 것에 대한 답변이 여기 19절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게. 우리 아버지는 이런 이런 분이시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모르니 내 아버지도 모른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너희는 막혀 있다" 라는 것인데, 즉 "구원은 너희가 말하는 그 시간과 공간 시공간에 철저하게 차단되어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어릴 때 하얀 눈을 보면서 "이 세상과 내가 하나구나" 라고 느끼듯이, 그렇게 자기는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늙어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그러한 일념으로만 살았지, 이 시공간 바깥의 다른 시공간에서 어떤 분이 자기가 전부라고 여기는 이 세상에 찾아오셨다는 사실,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구원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 세상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현재 이 땅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세상의 일부가 된 사람을 주께서는 차단해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너는 나를 모르게 되어있어" 라는 것인데, 이것은 "너는 아무것도 몰라" 라는 것과도 똑같은 이야기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말한 구원과 천국도 내가 아는 천국과 구원과는 달라. 왜냐하면 너는 철저하게 네 중심이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너희는 내 아버지를 몰라 !!

그러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고 하면, "네 아버지를 알게 해주면 내가 네 아버지를 믿을게" 라고 하는, 이것을 예수님은 차단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모른다. 나를 나를 모르니, 내 아버지를 모른다"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너희는 내 아버지를 몰라야 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래야 일방적인 구원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령, 즉 자기의 영을 보내셔서 자기 제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 실없는 이야기(2) 1!

아까 집사님이 실없는 이야기만 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실없는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이냐는 말이죠. 나이 60대 후반이 된 사람이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한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게 너무 주관적이라서 어려우면 객관적으로 해보겠습니다. "1번) 사람 이야기, 2번) 말씀 이야기" 라고 하면, 여기서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 실없는 이야기일까요? 물론 사람 이야기라는 겁니다.

실없는 이야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자체가 쓸데없기 때문인데, 하늘나라에서 아무 쓸데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방어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데, 물론 엉터리지만 말이죠. 자기 정당화, 자기 의로움, 그게 실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퇴직하고 나서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면, 그 세월이 지옥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실없는 이야기도 한 두 번이지, 자꾸만 하니까 상대방도 듣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네가 하는 이야기는 내가 다 아는 뻔한 이야기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만남도 뜸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그런 실없는 이야기 속에는 무엇도 포함이 되겠어요? 당연히 교회 이야기도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말씀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느 교회의 목사 이야기, 장로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이야기는 말씀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 말씀으로 지적을 !!

그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의 이야기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말씀 자체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직접 자기에게 무엇을 하면 됩니까? 말씀으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말씀으로 지적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 지적의 내용은 "너는 말씀과 멀어졌어", 혹은 "점점 더 말씀과 가까이 졌어" 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적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를 나무라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미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죄를 계속 주께서 끄집어 내어줘야, 예수님의 값없는 공로가 계속해서 풍성해지고,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해진다는 말이죠.

지금 주님은 답답한데, 왜냐하면 인간을 붙들어서 죄를 끄집어내야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너 같은 말도 안 되는 죄인을, 지옥에 갈 죄인을 내가 고통 속에 힘들게 건져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상대방은 어떻게 나옵니까? 말씀을 피해서 도망을 친다는 말이죠. 자꾸만 말씀이 없는 곳으로 도망을 치는데,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사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실없는 이야기를 말이죠.

* 실없는 이야기(3) 1!

-----------------------------
* A : 아이고, 오랜만에 보죠?
* B : 예, 오랜만입니다.
* A : 요즘 건강을 어떻습니까?
* B :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습니다.
* A : 그래도 많이 힘들죠?
* B : 좀 그렇습니다.
-----------------------------

그러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실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암 치료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죠. 1시간 이상을 식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역시 병원은 어떤 병원이 좋고, 의사도 어떤 의사가 좋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나서는 "앞으로 우리 이제 좀 건강하게 만납시다. 건강관리를 잘 하세요" 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중간 중간에 말씀 이야기가, 말씀을 통해서 지적을 받은 이야기가 없다는 말이죠. 즉 자기 부정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죠.

* 주님이 제시한 구원절차 !!

그러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지를, 그것을 이제부터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6장을 보겠는데, 26절입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부분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어렵다는 겁니다. 여기에 지구가 있는데, 이렇게 여기에는 한국과 중국이 있고, 여기에는 미국이 있다는 말이죠. 이게 온 천하인데, 그러면 이 온 천하가 중요합니까? 자기 목숨이 중요합니까? 지금 그것을 예수님이 묻고 있다는 겁니다.

지구 중심의 맨틀 가까이에 가면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하는데,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귀합니까? 물론 요즘은 인조 다이아몬드가 많이 팔린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 귀한 다이아몬드가 이 지구에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지구에는 뭐냐 하면, 휴식 공간이 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하와이가 유명했는데, 태국의 휴양지도 아주 좋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가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물론 그러다가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있고 말이죠.

그것이 온 천하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사람들은 그게 좋은 것은 다 아는데, 그리고 주님도 아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런 온 천하하고 네 목숨하고 어느 쪽이 더 귀하냐?"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답을 뻔히 알고 있다는 것인데,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당연히 자기 목숨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마태복음 16장 24절과 연결시켜 보세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오려고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번 보세요. 26절에서 '온 천하'를 언급하시면서 '자기 목숨'을 말씀하시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 온 천하 VS 자기 목숨 !!

자기 목숨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뭐가 하나 더 있어요?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즉 "네가 자발적으로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느냐?" 라고 물어보신다는 겁니다. 온 천하보다도 자기 목숨이 귀하다는 것, 그것까지는 인간들이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가난하고 망가져도 자기 자존심 하나만큼은 지킬 용의가 되어있다고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것은 타고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그 자기 귀한 목숨에 대해서, 우리 인간을 보고 "너는 죄인이니까 지옥에나 가라"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자기 목숨인데, 그런데 그 귀한 목숨에 대해서, "이 더러운 인간아, 너는 지옥이나 가라"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자기 목숨에 대해서 스스로 저주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죠. 단연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내 목숨이다" 라고 해서, 이것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주었는데,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돈은 없어도 영혼은 천국에 간다" 라고, 그렇게 통발을 굴리고 계산을 했는데, 그런데 그 목숨을 과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저주할 수 있는, 그런 용의가 되어 있느냐고 예수님이 묻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할 수 없는데,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 구원의 한계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주님의 일이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못한다. 때려 죽어도 자기 부인은 안 된다" 라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말이죠.

인간은 아플 때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데, 그렇게 아플 때 누구 위주로 삽니까?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사는데, 그렇지요? 그때 자기 본색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켰다는 겁니다.

*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

그래서 이러한 인간의 본심을 한마디의 문장으로 표현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데,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친근하게 다가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세상에서 불신자들이 하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 나도 교회에 60년을 다녔는데, 남는 것은 이것밖에 없더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결국 자기 일은 누가 한다는 겁니까? "나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믿음에서는 섞지 않지만, 자기 몸, 자기 마음, 즉 본능은 이상하게 왠지 여기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자기도 그만 거기에 가담자가 되어버렸는데, 결국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누가 한다는 겁니까? "사람이 하는 것이다" 라고, 이것으로 그만 낙점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은 사람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주께서 구원 절차를 언급했다는 말이죠. 인간은 어디까지 따라간다고 했습니까? "온 천하보다 자기 목숨이 귀하다" 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는데, 그런데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 "그런 귀한 자기 목숨을 네가 스스로, 너의 입으로 욕을 할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그 대목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러한 짓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면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죠.

* 모든 인간은 가해자 !!

그렇다면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 하면, 그것을 이제부터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주께서는 이 문장으로 구분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당신은 과연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라는 것인데, 즉 "당신은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피해자 쪽에 속했습니까? 가해자 쪽에 속했습니까?"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은 가해자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이 가해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쪽에 속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가해자' 라는 말이 개념이 성립되려고 하면, 모든 인간이 한 통속으로 한 사람을 지목해서, 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든 그 관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받은 자이고, 그 관계에서 눈을 돌려서 "내가 언제 남에게 피해를 주었지? 나는 그런 적이 없어" 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겁니다.

* 나의 진심이 주님이 진심을 가린다 !!

어제 오후 설교 때의 기도제목이 이것이었는데, 기도제목을 한번 써볼게요. "나의 진심이 주님이 진심을 가린다" 라는 것이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결국 사람의 모든 것은, 즉 사람들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남들과 만났을 때 무엇을 끄집어냅니까?

주의 진심을 끄집어냅니까? 자기 진심을 끄집어냅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내 진심을 좀 알아다오. 내가 이렇게 피해를 입었고, 내가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았다. 내가 지금은 밥이라도 먹고 살지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런 나의 사정을 너는 모르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 고생을 좀 알아달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의 진심을 앞장세워서 남들과 만나는 것,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이것이 모두 다 사람의 일이라는 말이죠. 사람과의 관계가 다 그러하다는 겁니다.

"나는 그 교회에 다니면서 복음을 안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남들에게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힘들어서 그 교회를 나왔어" 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게 주님의 진심일까요? 자기 진심일까요? 이게 자기 진심인데, 그래서 이게 자기 의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 자기 의를 알아달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런 자기 진심을 무엇으로 바꿔야 합니까? 이게 주님의 진심으로 바뀌어야, 즉 자기 진심이 주님의 진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 타자(他者)의 타자(他者) !!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어려운 것이니 일단은 제가 칠판에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자의 타자" 라는 것인데, 야구 선수의 타자를 말한 게 아니고, 여기서 타자는 남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즉 타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질문에 들어갑니다. 조금 어려운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인간의 마음 형성에 타인이 관여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의 마음 형성에 관여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아닌 남이 자기 마음을 형성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남이 누구인고 하니, 태어나서 어릴 때, 첫 번째는 아버지와 엄마이고, 그 다음으로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빠와 누나인데, 그리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동생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직접적인 영향은 아빠, 엄마, 동생, 오빠, 누나, 즉 가족들이 주는데, 여기에 가끔씩 놀러 오는 고모와 이모,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그 고모와 이모가 시집을 가서 데리고 오는 사촌들, 이런 타인들이 뭐냐 하면, 자기 마음, 즉 자기 과거를 형성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과거를 과거를 형성해서, 여기에서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비교의식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내 사촌은 비싼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왜 비싼 장난감이 없어?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타인의 텐트에서 자라난 자아 !!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학교에 가니까 친구들은 전부 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자기는 휴대폰이 없다는 말이죠. 이게 무엇입니까? 타인이란 장막 속에, 즉 타인의 텐트 안에서 자라난 자아라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몸이 아니고, '나' 자아라는 것이죠.

여기서 자아와 몸은 다른데, 몸이라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젊었다가 늙어가지만, 그런데 그 몸 안에 들어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자란 가정환경과 사회환경으로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가정환경과 사회환경을 무엇입니까? 그동안 자기가 살아오면서 누구와 만났느냐는 말이죠. 학교와 교회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그 만나는 타인이 현재 자기 마음을 결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타인의 마음이 말이죠.

* 하나님의 텐트, 성막 !!

여기에서 성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타인의 장막, 혹은 타인의 텐트라고 했는데, 그러면 성경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무엇을 만들라고 했습니까? 성막을 지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성막은 뭐냐 하면, 감히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말이죠.

(출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인간이 누구를 만난다는 겁니까? 하나님과 만나는데, 그런데 이 하나님이 뭐냐 하면, 타자의 타자라는 겁니다. 자기가 한계를 지었던 그 남, 그 타인을 자기에게 붙여주었던 바깥에 있는 타인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주님인데, 즉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그런 혜택을 옛날부터 주셨다는 겁니다.

성막이라는 텐트에서, 물론 그 당시에는 이동용 텐트지만, 그 텐트에 의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런데 정작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만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분명히 성막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만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죽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1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이 그 텐트 안의 기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이 지성소라는 겁니다. 그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날 때, 그렇게 하나님 존재와 인간 존재가 만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 살 수가 있습니까? 죽습니까? 죽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무엇을 가지고 와야합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 피, 즉 "희생의 피와 합류된 채로 나는 죽었습니다" 라는 것이 같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 자아는 흐름, 그때그때 달라요 !!

이왕 어려우니 더 어렵게 해봅시다. 이 '자아' 라고 하는 것, 인간의 자아는 존재가 아니고 흐름이라는 겁니다. 즉 자아는 흐름인데, 그런데 이 흐름은 어디를 따라가느냐 하면, 세월을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어제까지의 자아는 어제까지의 역사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런데 오늘의 자아는 어제 몰랐던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5년 전의 자기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시건이, 즉 철이 있어요? 없어요? 철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것은 화를 낼 것도 아닌데 왜 화를 냈지?" 라고 하게 되는데, 지나가면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몇 년을 더 살아야 가능해진다는 말이죠. 즉 새로운 타인을 만나야지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새로운 타인을 만나는데 있어서, 그 타인을 누가 주선해주느냐 하면, 타인의 타인이 주선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날 때,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데,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누구를 앞장세우느냐, 하나님이 새로운 타인을 주선해서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겁니다.

* 인생에 굴곡이 있다 !!

그게 뭐냐 하면, "인생에 굴곡이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세상만사가 굴곡이 있다" 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식이 35살인데도 결혼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데,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죠.

이것을 한 줄로 "인생에 굴곡이 있다" 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이 죽은 인생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타인의 타인, 즉 타인 바깥에 타인 생을, 타인의 타인, 즉 전혀 생소하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생소한 타인'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생소한 타인 !!

그렇게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을 통해서, "그동안 네 수준은 이것밖에 안 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생을 통해서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타인의 타인을 만난, 즉 주님을 만난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 나의 일이다" 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아닌데, 누구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잘난 체를 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을, 중간 날개를 흔들면서 "나 같은 죄인을 주께서 영원히 천국에서 살도록 하셨구나. 주여, 찬양할 뿐입니다" 라고 하려면, 그것을 미리 경험하도록 이 땅에서 말씀과 가까이할 수 있는 상황들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말씀을 왜 만납니까? 그런 것을 알았으니 자기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고, 지적을 당하기 위해서인데, 무엇을 지적합니까? 자기를 지적합니까? 그게 아니고, 자기가 만났던 타인들의 한계, 즉 결국 모든 일은 누구의 일이라는 겁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하는, 그런 자기와 똑같은 인간들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을 구원할 자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다는 말이죠. 즉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생 외에는 아무도 너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다" 라는 겁니다.

모두 다 실없는 이야기뿐인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 무서운 내용을 성경을 통해서 두 군데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을 보겠는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보다는 제가 겁이 없지 싶은데 말이죠.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내가 너의 모아놓은 돈을 썩게 만들겠다 !!

이것을 쉽게 말씀해드리면, 집에 돈을 모아놓은 것이 있죠? 없습니까? 그 모아놓은 돈이 썩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너의 모아놓은 돈을 썩게 만들겠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게 타인이 타인의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육체를 위해서 모아놓은 돈인데, 그런데 그것을 썩게 만들어서 "하나님은 네가 모아놓은 돈이 없어도 천국에 보내는 분이다" 라는 사실을 드러나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피해자가 우리를 가해자로 지목한 것 자체가, 우리를 건지기 위함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서 더 이상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공로만 찬양하는 작업을 이 땅에서 실시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에 무엇만 위해서 살았습니까? 썩어질 양식만 위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리는 자기가 육체가 있는데, 이 육체는 무엇을 먹어야하고, 그렇게 먹으려고 하면 돈이 있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돈이 있어야 뭔가 먹을 수가 있고 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주께서는 뭐냐 하면, "그 끝을 봐라. 너는 죽는다" 라는 하신다는 말이죠. 실컷 살았는데, 나이 90살까지 살았지만 결국은 어떻다는 겁니까? 결국은 죽는다는 겁니다.

* 이순재가 아닌 변웅전 !!

죽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지만, 제 기억에 유독 각인되는 최근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불국사에 가면 제일 안쪽에 있는 큰 건물이 대웅전인데, 그 대를 변으로 바꾸면 변웅전이 된다는 겁니다. 과거에 MBC에서 아나운서를 하던 그 변웅전이 81살의 나이로 죽었다는 말이죠.

물론 이순재도 죽었는데, 저에게는 변웅전이 더 기억이 난다는 겁니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잘 생겼다는 말이죠. 아마 변씨 집안에서는 제일 유명한 사람이지 싶은데(ㅋㅋ), 바로 그 변웅전이 저의 기억 속의 타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너도 시공간의 일부고, 또한 나도 시공간의 일부이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너와 같은 모델로서의 영웅, 또는 타인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의 지표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도 저렇게 멋진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81세가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까 달력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월이 어떻게 됐어요?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변웅전이고 대웅전이고 간에, 그런 것은 이 세상의 일부인데, 공중분해가 되어서 없어졌다는 말이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는데, 그런데 이것이 허상이 아니고, 이게 이미 유일한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실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자기는 뭡니까? 자기도 허상이라는 말이죠. 평생 동안 허상의 세월이 연속해서 이어져왔다는 겁니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말인가요? 타인을 바라보면서, 즉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어떤 분인가요? 타인의 타인인데, 생소한 타인, 즉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타인이라는 겁니다.

* 은혜를 은혜로 제발 유지시켜 주세요 !!

그분은 우리에게 "값없이 나의 생명수를 마셔라" 라는 말씀을 날리면서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나옵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주님은 "값이 없어. 그냥 준다니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제 끝으로 생각해볼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은혜를 은혜로 제발 유지시켜 주세요" 라는 것인데, 이 은혜를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라는 겁니다. 거저 주신 선물을 선물로 간직하는 것인데, 천사가 가운데의 날개로 날갯짓을 하면서 날고 있는 것은, 고마움에 대한 표시라는 말이죠.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어? 네가 과거에 고생을 엄청 한 것을 내가 알거든. 술을 처먹는 아버지를 만나서 얻어터진 것을 내가 알거든"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술을 처먹는 아버지든 집을 나간 엄마든 간에,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잠언서 17장 1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 마른 떡 한 조각 !!

여기에 떡이 나오는데, 이 떡이 어떤 떡입니까? 방금 찐 말랑말랑한 떡인가요? 어떤 떡입니까? 그게 아니고 마른 떡인데, 즉 아껴놓은 떡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집안에 전혀 여유가 없다는 말이죠. 가진 것도 없으니, 얼마든지 다툴 만하다는 것이죠. 기본적인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보장되지 않는 집안이라는 겁니다.

남자가 "내가 준 돈을 어떻게 썼어?" 라고 하면, 여자 쪽에서 "네가 나에게 벌어다준 것이 있어? 없어?"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무엇이든 말하게 되면 돈과 관련해서 다툴 요소가 터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잠언서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하다고 하는데, 과연 돈이 없는데 화목이 어디 성립이 됩니까? 과연 그런 집안이 있습니까? 돈이 없으면 화목은 멀리 도망가고 없다는 겁니다.

일단 돈의 여유가 있고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화목이라는 말이죠. 돈의 여유 속에서, 그 다음에 정신적으로 취미가 맞든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하는 것은 일단 집에 돈이 있어야지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그런데 잠언서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왔다고 하면, 여기에서 오늘 한 것을 복습해봅시다. 이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주님이 피해자인고 하니까, 주님은 이미 인간을 아시고 아버지 앞에서 죽기로 작정을 했다는 말이죠. 이 땅에서 죄의 값으로 죽기로 작정하셨는데, 그러니 죗값이라는 것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확정된 진짜 실상인데, 그런데 우리는 허상뿐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허상뿐이니까 자기 잘난 척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대비하면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잠언서 17장 1절이 등장하면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싸워서는 안 된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변명을 늘어놓겠습니까? "주님, 해도 너무하네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말랑말랑한 떡이라도 좀 있으면 그래도 다투지를 않겠지만, 마른 떡 한 조각은 너무나 심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을 '가족 공동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 가족 공동체 !!

가족 공동체는 한 통속인데, 이게 같은 운명체라는 말이죠. 즉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부모가 자식들을 먼저 죽이고 자살을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보통 착각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가족 안에서 자기가 자기를 위한 천국을 만드는 시도, 그것이 가족 공동체라는 겁니다. 이것이 기존의 시공간인데, 기존의 시공간에서 바깥을 보지 못하고 자기 안목에 빠져 있을 때가 이런 경우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외부에서 누가 왔다고 했습니까? 오늘 한 것을 복습해보면, 외부, 즉 타자의 타자가 무엇을 줍니까? 말씀을 준다는 겁니다. 그런 말씀 가운데 하나가 잠언서 17장 1절이라는 말이죠.

말씀이 다가와서, 우리에게 "마른 떡 한 조작을 가지고 싸울 일이 하나도 없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반발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반발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죠.

* 내가 다 이루었다 !!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러면 네가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에서 왜 죽었지?" 라고 우리에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말씀은 십자가와 연관이 되어서 우리에게 지적을 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 "너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너는 잘났고, 네가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살았는데, 그런데 나는 왜 죽었지?" 라는 하시면, 우리는 뭐라고 나옵니까?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여기까지는 안 됩니다.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집니까?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우리 인간의 구차한 변명을 유도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고,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맞닥뜨리면서 "그래, 주님이 다 이루었잖아. 말도 안 되는 허상과 같은 나를 위해서, 즉 나의 바깥에 있는 타인이 벌써 다 이루어서 모든 것을 해결하셨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마귀가 막는데, 주님이 이미 해결했다는 것을 마귀가 막기 위해서 목사들을 동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교회에서 온갖 짓들을 다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잘삽니다. 이렇게 하면 인생이 풀릴 것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야말로 무당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그러니 그런 것은 모두 다 구라고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허상이 아닌 참된 것은 오직 하나, 즉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주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그렇게 해서 믿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밀어내지 말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서 기력이 떨어지고 눈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말씀을 더욱 가까이해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가면서 그게 자기 인생이라고 우기고, 그리고 남들하고 비교하면서 잘난 맛으로 살았는데, 하지만 그게 십자가 앞에서 그게 엉터리이고 거짓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 자체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12,06 오후 2시에 마침.

It is finished !!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의 내막  (0) 2026.03.07
십자가 전선  (0) 2025.12.03
동행의 전개  (0) 2025.11.04
진동  (2) 2025.09.13
물음표  (0)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