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8 - 동행의 전개
25,10,20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하나님과 동행하며 !!
오늘은 교재 165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동행'에 대해서 나와있다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동행이 가능해 보이는데, 물론 그것이 동행인지 따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것은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5장과 6장을 보게 되면, 먼저 5장 22절에서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라고 되어있고, 또한 6장 9절에서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이 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성경에서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인간과 동행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에 나오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동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동행' 이라는 것은 같이 가는 것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동행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는 것이죠. 인간들끼리의 동행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하게 되면, 이 가능함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함께 영원히 기거한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동행한다' 라는 것은 지상의 문제고, '함께 기거한다' 라는 것은 천국의 문제라는 말이죠. 그리고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을 성경에서 '구원'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동행의 상황이 어떠한고 하니,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지상에서 동행이 되어야하고, 그 다음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영원히 사는 것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안 될 때는, 여기 지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겁니다.
이게 성경의 그림이라면, 그러면 "동행했다, 동행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기준이 무엇인 하니, 동행을 이야기하려면 그 기준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홀로 사는 것은 일단 아닌데, 그것은 탈락이란 겁니다. 자기 혼자 잘난 척을 하는 것은 천국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 가서 홀로 살라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고 하니, 구원의 상태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인데,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야기는 간단한데, 이렇게 홀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모습이라면, 여기 홀로 사는 것 더하기 빈자리라고 하면, 그러면 이 빈자리에 누가 들어가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무엇이 성립됩니까?
그러면 동행이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니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함께 사는, 즉 동행하는 식인데, 그것이 어디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겁니까? 그것이 영원히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것이 무슨 상태인고 하니,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 !!
여기서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과 일단 함께 산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인고 하면, 바로 아담과 하와라는 말이죠. 그런데 함께 살던 그들에게서 '영원'이 빠져버리고, 잠깐 살았는지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함께 살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성립이 안 됩니까? '영원' 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영원토록 함께 있음을 두고 생명, 즉 '영생'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영생, 즉 생명나무인데,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에 그만 실패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실패한 자, 즉 아담이고 그 다음에 하와라는 겁니다. 그들은 실패한 자들인데, 그 실패한 자들이 바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들은 무엇의 자손입니까? 실패한 자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 자신 그 조건을, 그 질서를 이탈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홀로 서기 !!
그렇게 실패가 되고, 결국은 실패한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홀로 사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더욱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홀로 서기'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홀로 서기,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바로 '홀로 서기' 라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와 때가 되면 결혼을 하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결혼을 하면 그것이 한 몸입니까? 처음에 연애를 할 때는 서로 좋다고 하면서 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한 몸인 줄로 알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결혼을 해서 나이가 좀 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두 사람이 그냥 동거하는 방식이 되는데, 왜냐하면 살면 살아갈수록 서로의 생각은 결코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저 사람은 도저히 나와 생각이 같을 수가 없구나" 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세월인데, 그게 바로 부부생활이고 결혼생활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결혼을 해봐야, "너의 인간성도 달라지지 않고, 나의 인간성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 인간성의 근원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실패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실패가 바로 홀로 서기, 또는 홀로 사는 것인데, 이게 실패라는 겁니다. 이 상태가 실패라는 것이죠.
* 인간구원은 없어 !!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홀로 서기에 그만 실패를 하는데, 이 실패에서 벗어나고 싶어할까요? 아니면 그냥 쭉 가고 싶어할까요? 어느 쪽입니까? 그냥 가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인간에게는 뭐가 없다는 겁니까? 인간에는 승리라는 것, 즉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 말이죠. 인간에게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기 혼자 잘 서기 위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즉 홀로 서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홀로 서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 그러니 구원에는 교회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어느 누구라도 도움이 안 되는데, 자식도 마찬가지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자기의 어려운 점을 도와주고 해도, 심지어 예수님이 자기의 어려움을 도와줘도 이 본성, 즉 '나' 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언하는데,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 라고 말이죠. 구원 자체가 인간 구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은 구원하면 안 되는데, 만약에 구원이 되면 천국만 엉망으로 만들어놓는다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 나오는데, 요한복음 12장 27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 예수님을 괴롭히는 '이 때' !!
초반부터 좀 어렵지만 감당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괴로워하는데, 그러면 그 괴로움을 누가 줍니까? 보통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누가 괴로움을 주느냐 하면, '이 때'가 괴로움을 준다는 겁니다. 이 때, 즉 이 세대가 괴로움을 준다는 말이죠. 지금의 이 세대는 누가 좋다고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홀로 서기에 적당한 환경이라고 좋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자 해도, 인간들이 구원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세대를 스스로 힘으로 이길 수 없는데, 여기서 발을 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 세대에서 발을 못 뺀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대와 한 통속이 되어서 누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 예수님과 구원 !!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고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말씀을 하시는 그 정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설움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일단 제자들로부터 받는데,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구원이라는 개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발을 빼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이 땅을 벗어나려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나의 나됨', 그것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나다" 라는 말, 이것은 무엇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까? '홀로 서기'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 홀로 서기가 정당한 세상 !!
인간은 이 홀로 서기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 아비와 어미가 실패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본성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홀로 서기가 정당한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런 세대에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 '경쟁' 이라는 것인데, 경쟁, 비교, 대조, 즉 남들에게 지지 않는 근성, 그런 것이 파생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근본적인 것은 동행인데, 그런데 이 세상의 동행은 뭐냐 하면, 인간의 동행은 타인을 이용해 먹기라는 겁니다. 그러니 동행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데, 무엇이든지 이용해먹는다는 것이죠.
* 타인 이용해먹기 !!
어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저 이방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니, 이방 종교의 핵심은 "너 하나 고생해서, 너의 고생 덕을 내가 받아서, 그게 나 홀로 서기에 유리하게 작동이 되면 내가 당신을 믿어줄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야 종교를 이야기했는데, 즉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 하나 국민을 위해서 죽도록 고생하면, 우리는 당신을 지도자로 존중할 용의가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어떤 심보입니까? "너는 죽고", 그 다음에 누구는 산다는 겁니까? "내 살자" 라는 것인데, 이 둘이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는 말이죠.
이것을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는데, 다들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저 인간을 어떻게 이용해서 빼먹을까?"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철저하게 이용해먹고,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내치고 마는 것, 그것이 인간들이 타고난 본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웃사랑, 봉사, 희생, 그런 것이 다 공짜가 아니라는 말이죠. 노림수가 있는데, 손해를 보는 장사를 누가 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이용해먹는데, 그러니까 자기를 좀 건드리지 말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 혼자 사는데도 힘드는데, 그러니 자기를 건드리지 말고, 다만 자기를 대신해서 희생해준다면, 헌금은 할 용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이 나름 잘 돌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전부가 똑같은 그런 범죄인들이기 때문에, 즉 "니 알고, 내 알고", 그렇게 서로를 모두 다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수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수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계층화가 된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남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데 자기에게 힘이 없다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든지, 혹은 직업이 없다든지 해서, 이럴 때는 범죄 가능성의 계층으로 자꾸 떨어지는데, 그러면 씩씩거리면서 세상 탓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은데, 이 여유가 바로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들은 남들을 배려해주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면 인간성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네가 가진 것을 좀 내놔라. 우리 같이 살자" 라고 하는데, 그러나 같이 살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 누가 뭐라도 해도 혼자 사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 성경은, 예수님이 홀로 구원받는 책 !!
그러니 이 성경 전체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홀로 구원을 받는 책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구원을 주어도, 그 구원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가 홀로 사는 것에 지장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즉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죠. "나는 나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나는 나 스스로 있다" 라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있는 것, 거기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5장에 보니까 무엇이라고 합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 과연 가능할까요? 인간 세상에서 볼 때, 이것은 가능함이 아니고, 불가능함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인데, 여기에는 예수님과 아버지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함께 참여하는 다수의 사람들, 즉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144,000명의 백성들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 '불가능'에서 '불가피'로 !!
이것은 불가능한데, 그런데 어떻게 동행이 되는고 하니,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 구원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불가능이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불가피로 바뀐다는 겁니다. 이 '불가피' 라는 말을 최근에 나온 영화제목으로 바꾸면, '어쩔 수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에녹과 노아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또한 그 아이디어를 하나님이 받아준 것이 아니고, 에녹과 노아의 동행은 순전히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에녹과 노아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하나님 쪽에서 "너는 나와 동행해야 한다" 라고 불가피하게 찾아와 버리면,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불가피하게 에녹과 노아가 합류하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이 제시한, 즉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말이죠.
반면에 인간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홀로 서기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동행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동행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파괴하게 합니까? 홀로 서기를 파괴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동행했기 때문에 '나' 라는 주체성이 와해되고 해체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와해되고 해체하는 그 방식이 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성경말씀을 공부하면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지 싶은데, 하지만 실패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홀로 서기에 몰입하고 있는 인간이 성경말씀을 공부해봐야, 그 공부는 지식으로 전달되고, 그리고 그 지식은 홀로 서기에 유리하게 작동이 되기 때문에,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 육신 VS 육신 !!
그래서 이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다 실패하고, 이스라엘은 실패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무엇이 되죠? 육신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육신과 우리 육신을 비교하면 어떻게 됩니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올 수 없는 육신, 그 육신으로 오셨는데 믿었던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목자를 치니까, 그 다음에 양이 어떻게 나옵니까? "주여, 죽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흩어지는데, 그 자체를 성경에서는 "말씀이 응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말씀이 응한 상태인데, 예수님 죽든 말든 지금 누구의 목숨이 귀하다는 겁니까? 홀로 사는 자기 목숨이 귀하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는 척은 하지만, 나중에 무슨 일을 벌이면 또 도망치기 바쁘다는 겁니다. 그러한 그 전체 상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응한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말씀이 응한 게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 예수님을 50년 동안이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때려치우고 "이제 나만 살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 것, 그렇게 변질되는 것, 사실은 그게 우리 인간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배신이라도 할 수도 없는데, 언제 믿은 적이 있어야 배신을 하든지 말든지 한다는 말이죠. 그냥 이용해 먹는 것인데, 예수를 이용해 먹으려고 교회에 나왔다가 급하면 다들 떠나는 것, 그것은 배신이 아니고 당연한데, 본성대로 간다는 겁니다.
바로 그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죠? 그리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육신이라는 겁니다. 이 육신과 육신이, 아까 '이 때' 라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즉 '이 세대' 라는 것이죠.
* 오는 세대 VS 이 세대 !!
이 세대를 다른 말로 하면 '질서'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의 질서와 인간의 자기를 위한 인간의 질서의 대결 상태라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질서를 '오는 세대' 라고 하고, 인간의 질서는 '이 세대' 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질서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 권세로 구성되어 있고, 그 권세에서 파생되는 첫 번째로 높은 것이 국가이고, 그 다음으로 직장, 그리고 가정이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가정은 자기 인생인데, 이런 것이 전부 다 하나의 권세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말이죠.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이렇게 질서는 대결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교회 권세도 무엇의 권세에 대한 대결 상태입니까?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대결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질서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죠. 하늘의 질서는 천국을 이루는데, 지옥에 가는 질서 안에는 교회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온다고 해서 인간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 아닌데, 물론 목사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가지고 '법' 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율법' 이라는 겁니다. 유대사회에서 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광야에서 모세가 받은 것이 율법인데, 그게 유대 사회의 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부순다는 겁니까? 그 율법을 파괴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불가피하게 동행을 할 자를 뽑아내는 방식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뽑아낼 때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자유케 하는 자를 뽑아내는 방식인데, 즉 영원히 함께 천국에서 살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에 유대인들이 시비를 거는데, 그 하나 하나가 다 "예수 네가 하는 일은 율법에 위반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도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당연히 똑같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국가법에 위반된다, 교회법에 위반된다, 가정법에 위반된다" 라고, 그렇게 모든 사사로운 법에 위반이 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행이니 그러한데, 하나님의 질서에 같이 묶여있는 것이 동행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질문을 더 하겠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세상이 나를 반대한다. 내가 세상을 반대한다" 라는 것 중에서 어느 경우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뽑아내는 자유에 대해서 누가 반대합니까? 우리가 반대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존 사상과 똑같은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말이죠.
* 나는 핍박을 한 자 !!
그래서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이 먼저 사울에게 다가오면서 하시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것인데, 이 말이 어렵다는 겁니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왜 어려운고 하면, "내가 부르지도 않는데 왜 찾아왔습니까? 왜 찾아와서는 '너는 나를 핍박했다' 라고 시비를 거십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한 관계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울은 주님이 "나를 핍박했다" 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 라는 존재를 주님의 그 핍박 안에다가 묶어버리는데, 즉 동행을 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 라는 것은 영원히 예수님에 대한 핍박자로서 동행이 시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핍박자로서 동행을 하게 되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경에서는 어떤 열매가 맺혀야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죠. 그 성령의 열매가 어떤 것인고 하니, 그 토대가 바로 "나는 주님에 대한 핍박자다" 라는 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나온다는 것이죠.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자기가 핍박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거기서 육체의 열매가 나온다는 겁니다. "저는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헌금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거룩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의 패가름이고, 그것은 또한 홀로 서기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핍박을 한 자' 라는 인식이 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결국 성령의 모든 열매, 그게 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이라는 말이죠.
* 자아 파괴 !!
감사와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하면 제일 간단한데, 굳이 자기가 꼭 더 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아 파괴' 라는 겁니다. 즉 성령에 의해서, 또는 말씀에 의해서 자아가 파괴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굳이 더 살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 무엇이 날아갈까요? 자기에게 대한 기대와 목표와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더 살 필요도 없는 인간에게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고, 만약에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기대와 목표와 목적을 세운다고 하면, 그것을 세우는 순간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찾아올까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와 걱정과 염려가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분에게 두려움과 공포와 염려가 찾아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어디 산다는 것이 별 것이 있느냐?" 라고 할지 몰라도, 문제는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 두려움이 없는 사랑 !!
요한일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도 "나는 두려움이 없이 살고 싶어"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겁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왜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야 되느냐 하면, 지금 우리는 자기 걱정, 자기 행복을 염두에 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나' 라는 것은 파괴 대상인데, 거기서 무슨 자기 행복을 찾느냐는 말이죠. 두려움이 없고 공포가 없고 걱정이 없고 염려하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에녹은 동행을 함으로서 누구를 기쁘시게 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이죠.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뭐냐 하면, 동행자를 기쁘시게 하는 것, 그러니 자기 옆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게 아니고, 자기와 동행하자고 저쪽에서 불가피하게 찾아오신 분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뭐냐 하면, 공포와 염려와 두려움과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자기에게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 쉽게 살기 !!
이게 어려우면 더 쉽게 가겠습니다. "쉽게 사는 것, 그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너만 챙기면 되는데, 왜 하나님까지 걱정하느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그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과 동행중이야"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영원히 살 대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게 동행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쉽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면,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지 싶은데, "어떻게 하면 쉽게 삽니까?"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질문조차도 걱정과 두려움의 염려의 연속성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6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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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5장과 6장에 있는 하나님과의 동행 이야기에서, 고린도전서 15장 사이가 너무나도 많이 비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울 것입니까? 그것을 바로 '언약'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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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어 있는 대목을 요한복음 가지고 오늘 강의시간에 하겠는데, 창세기는 앞에 있고, 고린도전서는 뒤쪽에 있다는 말이죠. 그 안에 있는 들어있는 내용으로 뭔가 이어져야 하는데, 그 이어지는 내용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동행' 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데, 그렇게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불가피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여러 가지 절차와 과정, 그것을 제가 요한복음을 가지고 너무 어렵지 않게 설명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에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라고 하는데, 지금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이죠. 불가피하게 동행하겠다고 찾아온 그 취지가 여기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본성은 홀로 서기에 철저하기 때문에, 누가 다가오는 것도 귀찮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밀어내게 된다는 말이죠. "나는 내 잘난 맛에 살고 싶어" 라는 것인데, 누구라도 자기 앞에 얼쩡거리는 것은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나는 나만 최종적으로 잘 되면 그만이야" 라고 니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마귀가 준 "네가 신처럼 되리라" 라고 하는 것으로, 그렇게 우리는 본성이 실패자이고, 그 본성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 나를 찾아오신 주님 !!
그런데 여기에서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불가피하게 밀어붙이는 식인데, 그래서 뭐냐 하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내가 있는 곳에 주님이 찾아왔다" 라는 것은, 그 '나' 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없애버리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있던 것을 떠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동안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모든 인생 고생이 다 엮어서 거기에 스며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게 아까워서 인간은 떠나지를 못하는데, 자기가 고생한 게 너무 많아서 말이죠. 특히 연세가 많은 분들은 "자식새끼를 내 힘으로 다 키웠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자식을 떠나보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 영원히 내 곁에 !!
"너희들이 잘 되면 나는 소원이 없다" 라고 나오는데, 아버지도 그렇겠지만 특히 어머니 쪽에서 이런 것이 강하다는 말이죠. "결혼을 해서 너거 아버지가 술 먹고 힘들 게 할 때 나는 진짜 죽으려 했다. 그러나 너를 낳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나는 삶의 의지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너만 보고 산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에 자식에게 부담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것은 나중의 문제고, 일단 자기가 조성한 자기 인생을 자기 손으로 헐어버린다는 것, 그것은 자기가 있는 한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나' 라는 것이 있는 이상 자기 부인이 안 되는데, 도저히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도 그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라는 말이죠. "너 있는 곳, 그것을 포기하게 만들겠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나 있는 곳에 일방적으로 너희를 집어넣는 식으로 나는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 부수어지는 나의 삶의 터전 !!
여기에서 주님에게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자기가 평생 살아오면서 자기 삶의 목적이 되었던 이루어 낸 그 삶의 터전, 그 터전이 문제라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그 터전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잘남, 자기 의, 자기 노력, 그게 집대성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교회에 오래 다니는 사람들, 특히 한 교회에서 3대, 4대로 장로가 되어버리면, 그것이 그 사람을 지옥에 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내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어디 교회가 있어야 "이 교회는 내 것이다" 라고 할텐데, 교회는 없다는 겁니다. 교육관을 지을 때 자기 집을 바쳤다고 하는데, 왜 바치느냐는 말이죠. 부흥사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그만 손을 들어서 2천만원을 냈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이 무엇입니까?
이게 "나의 것은 항상 내가 했다" 라는 것인데, 피아노를 누가 바치고, 꽃꽂이를 누가 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피아노가 꽃꽂이에 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런데 바친 사람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함부로 피아노를 치면 말린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자기 이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이름 안에 자기 과거를 다 집어넣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 이름 속에는 자기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그대로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데, 17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여기 18절을 보게 되면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그 속에는 무엇이 없고 하니, '불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심사해서 받아주는 의의는 그 출발점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기가 말을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싶은 것, 그것은 우리의 본성, 즉 홀로 서기를 박살낸다는 말이죠. 그렇게 박살을 내서 완전히 해체를 시킬 때, 그 사람은 자기 영광이 파괴된 입장에서, 더 이상 무엇을 내놓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아이를 4명 키우고, 2천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라고, 그렇게 내어놓을 것이 없다는 말이죠. 고생해서 아이를 4명 키우고, 2천만원을 헌금한 것에 대해서, "저는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주께서 깨뜨려 버리셨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주님의 능력에 대해서만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반드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자기 실패라는 말이죠. 그것을 전제로 할 때만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그 십자가가 왜 우리에게 핍박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야만 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즉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라는 것이 자기의 훌륭한 면이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내세울 게 없는 강도 !!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3개가 있었는데, 그때 구원받은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강도였다는 말이죠. 바로 그 코스인데, 강도가 되지 않으면 누구든지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강도의 특징은 더 이상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강도짓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렇게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은, 이미 자기 이름으로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고 확정을 시켜놓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동안 몰랐던 노아의 동행, 에녹의 동행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인데, 그것을 노아나 에녹은 그 당시에 알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 안에 노아 동행과 에녹 동행의 취지를 담아놓고 어떻게 하십니까? "이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의인이 된 사람은 없다" 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십자가의 능력을 전달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죠.
그래서 강도가 고백하기를, 그 강도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야말로 참으로 뻔뻔하기까지 한데,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질서와 자기의 질서, 이것이 대결구조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홀로 서기에 충실하니까, 여기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 그래서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저는 이제 나의 질서를 포기했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데 강도가 또 하나 더 있었는데, 그 강도는 뭐라고 하냐 하면, "예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 강도는 자신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강도의 경우에는, 강도짓을 하다가 이제는 뭔가 구원을 받으면, 즉 이제 착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그러한 기존의 자기 법 체제, 즉 홀로 서기, 그 질서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반면에 구원받는 다른 편의 강도는 어떻습니까? 자기 질서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시는데, 즉 천국에 가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나는 쓰레기다 !!
포행자요 살인자인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오니까, 그 사울이 어떻게 됩니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유를 아시겠죠? 그래서 구원받는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쓰레기다. 나는 배설물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이 조건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의 계획과 기대와 목표 속에 "나는 쓰레기다" 라는 것이 과연 포함이 되어있습니까? 그런 것이 들어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앞으로 점점 나아지는 인간은 당연히 들어있지만, 그 안에 쓰레기와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특히 에베소서 4장과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점점 나아진다고 착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기 이전에는 쓰레기였는데, 이제는 천사처럼 변하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교회에 나오는데, 물론 목사도 그런 설교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사기였는데, 마귀가 그런 사기를 유발시켰다는 것이죠. 목사가 왜 그렇게 합니까? 손님이 있어야 교회가 유지된다는 겁니다. 일종의 고객만족인데, 인간은 자기 잘남에 미쳐 있다는 말이죠.
마귀가 인간에게 그러한 심성을 심어주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강제퇴거를 시켰다는 겁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은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정녕 살리라" 라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이죠.
우리는 "나는 정녕 살리라. 오래 사는 게 남는 장사다" 라고, 그런 의식으로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타인들은 전부 다 자기를 공격하는 잠재적인 공격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긴장을 늦추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벌벌 떨며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 가인과 감옥 !!
그 첫 번째 인간이 누구냐 하면, 바로 가인이었다는 말이죠. 가인이 동생을 죽였는데, 그러면 자기도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데, 그런데 하나님은 사형을 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형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게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자기 본성은 살고 싶은 것인데, 하지만 주변에는 짐승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고역이 되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감옥'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인간의 감옥' 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지금 핵심이 뭐냐 하면, "내 이름이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바꾸어지느냐?"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의 이름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인간의 자기 이름은 해당사항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주의 이름이 인간의 자기 이름을 제거하고 난 뒤에 찾아오셔서, 그렇게 주의 이름으로 동행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이름에 속할까요? 아니면 주의 이름에 속할까요? 주의 이름에 속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과거에 어떤 짓을 했든지 간에, 그것은 누가 유발시킨 것이 됩니까? 주께서 유발시킨 것이란 말이죠.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자기가 구원받는 것도, 그게 자기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 됩니까? 주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 심플 라이프 !!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할 뿐인데, 그래서 모든 일에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볍게 살이 되면 주님만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기를 만드신 주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 불신자들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행복하지 않고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들은 자기를 기뻐하는 것에 완전히 밀폐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 기쁨 안에 들어있는 자폐증 환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전부 다 무엇을 해서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 그것으로 전부 다 자체적으로 막혀 있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이름이고 자기 이름인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구성한 세계 바깥으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겁니다.
* 언어는, 자기 사수를 위한 철통 방어책 !!
이것은 하나의 상식으로서 알아놓으면 좋은데, 인간이 내뱉는 말, 즉 언어라는 말이죠. 이 언어 안에는 무엇이 있냐 하면, 자기 사수를 위한 철통 방어책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말은 다 그렇다는 것이죠.
이게 대표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 상견례 자리인데, 상견례를 할 때는 긴장이 되고 손에 땀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한복을 집어던져 버리고는, "아이고, 오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저 저쪽에서 무슨 피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니까, 저쪽에서 홍단을 가지고 있는지 청단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쪽에는 피밖에 없는데 말이죠. "우리 아이가 당신과 같은 아가씨하고는 살 수준은 아니지만, 자기들이 좋아한다고 하니까" 라고 나오면,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파토를 안 되는데, 요즘은 부모가 함부로 자식 결혼을 깨게 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데, 그러니 상견례는 그냥 승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아기가 생겼어요"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
아무튼 이 언어라는 것은 서로가 철통 방어인데, 그래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드론 띄우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일종의 탐색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뭐냐 하면, 그게 사람 관계라는 겁니다.
* 오늘도 병원에 출근하는 할머니 !!
사람 관계에 종사하는 자들에게는 월급을 많이 주어야 하는데, 병원에서도 힘든 게 뭐냐 하면, 환자들을 대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의학공부는 하면 되는데, 열심히 외우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원해서 환자를 만날 때는 정말 힘든다는 것이죠. 어제 진료를 했는데, 그 할머니가 오늘 벌써 아침 9시에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병원에 놀러온 것인데,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말이죠. 병원에 가면 의사와 간호사가 아주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겁니다. 이제는 여러분도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죠(ㅋㅋ). 그렇게 병원에 자주 간다고 해서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국가의 의료보험재정이 거들이 나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세상을 사는 것이 정말 힘든데, 인간관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자연인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자기는 쉽게 살고 싶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쉽게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이가 들면 도망을 친다는 것이죠.
요즘은 경로당에는 가지 않는데, 차라리 집에 혼자 앉아서 TV를 보면 것이 낫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게 구원입니까? 동행이 안 된다는 말이죠.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이 등장하는데, 그게 교재 166페이지에 나온다는 말이죠.
* 솔로몬 성전 !!
하나님께서 성전을 준비한 이유가 있는데, 그 내용이 열왕기상 8장에 기록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먼저 28절과 29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8: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왕상 8: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여기 29절에 보면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 성전이라는 말이죠. 아까 제가 "주의 이름만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주의 이름, 즉 예수님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계속해서 열왕기상 8장 33절에서 38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8: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왕상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왕상 8:35)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왕상 8:36)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왕상 8:37)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왕상 8: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5절에서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라고 하고, 그 다음에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전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죄를 아는 자가 들어오게 되면, 성전에 있는 희생 제물은 그 죄와 만나서 죄를 사해주는, 그런 공간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만남의 장소, 즉 성전이라는 겁니다.
* 만남의 장소 !!
경부고속도로 서울 쪽에 '만남의 장소' 라는 휴게소가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인간도 인간 존재를 만나는 게 아니고, 한쪽은 죄를 사하시는 분, 다른 한쪽은 죄를 지니고 있는, 또는 죄 덩어리의 존재로 다루면서 만나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는, 필히 우리가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죄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짓고, 그리고 어떤 때는 의도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해도 죄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선악체계로 감싸져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착하고, 또 저런 경우에는 악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죄가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죄 그 자체라는 것이죠.
* 죄를 노출시키는 환경 !!
그러면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 방식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데, 그 삶의 환경을 숨어있는 죄를 노출시키는 환경으로, 그렇게 주님이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죄를 노출시키는 환경으로 만드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살면 살수록, 우리는 "아하, 그것도 죄였어. 이것까지 죄였어. 나는 그것이 희생인 줄로 알았는데, 가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도 죄였네. 교회에서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도 죄였어. 예전에는 진짜 몰랐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공로를 더욱 더 높이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우리 집에 사기를 친 그놈에게 현상금이 100만원 붙었어" 라고 하니, 그 집의 어린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100만원은 틀렸어. 101만원이 되어야지. 왜냐하면 내가 돈 만원을 가지고 왔으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성립이 됩니까?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자기 돈을 가져왔다고 해서 100만원이 아니라 101만원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죄사함이라는 것은,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 균형이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끄집어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 주님의 죄사함은 그것을 양적으로 능가한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에 5장에 나오는데, 죄가 있는 곳에 무엇이 넘친다는 겁니까?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죠.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그렇게 은혜가 칠 때, 그 은혜의 양과 우리가 지은 죄를 한번 비교해 보시라는 겁니다.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데,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우리 죄를 용서한 은혜를, 그 은혜의 양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서 죄가 나온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죄 용서를 받은 그 사랑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새록새록 새롭게 경험하는 것인데, 바로 그 생애가 우리의 남은 생애가 되기 위해서, 주께서 동행해주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환경을 통해서 동행을 해주신다는 말이죠.
* 우리의 죄를 아시는 분은 예수님뿐 !!
그러니 도대체 우리가 어느 얼마나 죄를 지어야, 주께서 용서해주신 그 분량을 우리가 다 체크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달하면 참 대단한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만이 우리가 몰랐던 죄를 죄다 다 아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의 죄를 다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말이죠.
그게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잠깐 나왔는데,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서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변명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홀로 사는 게 버릇이 되어서, 자꾸 변명과 핑계를 댄다는 말이죠.
그것을 뚫고 진짜 우리의 죄를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을 우리가 보답해서 용서를 받는 게 아니라, 대신 예수님이 우리가 모르는 죄까지 아시고,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이 용서해주시니, 그때부터는 주님의 사랑을 덤터기로 받는 그 시간만이 우리에게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고린전서 15장을 한번 봅시다. 창세기 5장에서 고린도전서 15장까지는 너무 멀다고 했는데, 그러면 쭉 당기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15장 42절과 43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 썩을 것으로 썩게 하시고 !!
여기 42절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보면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썩을 것으로 심고"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썩을 것으로 썩게 하시고" 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너는 썩어야 돼" 라는 주님의 목적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생일축하 노래를 부를 때, 그 의미를 알고서 불러야 한다는 말이죠. 즉 "썩을 것이 썩을 것으로 태어난 것을 주께 감사합니다" 라는 내용을 담고 생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팔순잔치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30대가 가장 탱탱하기는 하지만 말이죠. 33살에 죽은 김광석의 노래에 보면 '서른 즈음에'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30살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는 겁니다. 이 노래는 그가 딱 30살에 발표했지 싶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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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즈음에 ] (김광석, 1994)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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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42절에서 "썩을 것으로 심고 심고" 라고 한 다음에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이게 나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라는 것인데, 이게 누구의 일입니까?
당연히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편하게 사세요. 여기에 손대지 마세요. 개입하지 마세요. 우리가 빡세게 기도한다고 해서, 주의 일이 변경되고 하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 라는 것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인데, 즉 "이미 되어진 일에 대해서 제가 미처 모르는 감사가 있으면, 그것을 계속 나의 죄를 통해서 감사가 유도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그게 기도라는 겁니다.
* 신령한 몸 !!
그 다음 44절에 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라고 한 다음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라고 하는데, 신령한 몸, 이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보다 뛰어난데, 아담은 신령한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담은 조건부를 갖고 있는 몸인데, 그래서 그 몸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 그런 한계성을 지닌 몸으로 태어났다는 말이죠. 그런 몸은 주께서 썩게 만들어서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아담의 땅에서 낳은 몸은 죽여버리고, 하늘에 난 예수님의 영광된 몸으로 교체를 하시는데, 그 작업을 주께서는 감히 우리를 통해서 실시하겠다는 말이죠. 그것이 주의 뜻이고, 주님의 구원이라는 겁니다. 자기 구원을 모델로 삼아서, 그 모델에 맞추어서 우리를 다루신다는 말이죠.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또한 48절과 49절에 보면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어디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까?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라고 하는데, 즉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날이 온다는 겁니다.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죄사함의 활동성 !!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인데, 이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나의 이름을 덮쳐서, 나의 이름을 해체시키는 작업, 즉 주의 이름으로 하는 죄사함의 활동성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은 우리 몸이 성전인데, 건물 성전시대는 끝났다는 겁니다. 불타고 없는데, 언약궤도 없다는 겁니다. 신약에 보면, 사도바울이 "우리 몸이 성전이다" 라고 하는데, 즉 "주님의 활동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니 주님의 직장인데, 흙의 형상을 하늘의 형상으로 바꾸는 직장에서, 주께서 야무지게 우리로 하여금 계속, 우리를 죽을 때까지 살게 하면서 무엇을 끄집어냅니까?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말씀으로 하시는데, "봐라, 이래도 너 혼자 살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에게는 혼자 살겠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물려받은 유산이고 그게 죄라는 겁니다. 그 죄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세상에서는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르는데, 낌새는 있다는 겁니다. 그 느낌에 의해서 노래 두 가지를 준비했는데, 하나는 1964년에 고봉산 씨가 불렀던 노래로서, '아메리칸 마도로스' 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옛날 노래인데, 그 가락을 일본의 전통 춤인 '이와오도리' 라고 하는 것에 따왔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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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마도로스]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죄 많은 마도로스 이별이 야속 터라
닻줄을 감으면은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면은 사랑이 운다.
아 ~ ~ ~ ~ ~ 항구의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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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선 !!
제가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 '경계선'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다고 했는데, 비가 창밖에 오는데 어떻게 자기 안에 들어옵니까? 들어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창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갇혀 있으니까, '나 홀로' 라는 것에 갇혀 있으니까, 그러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창이 되면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경계선' 이라고 하는 것은, 양쪽 다를 경험하게 하는 것인데, 그게 경계선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인데, 그 육신을 성령께서 우리를 똑같이 천국도 경험하고 육적인 것도 절실하게 경험하게 하면서, "나는 강도다" 라는 말조차도 우리에게 너무 사치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신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했는데, 그게 결코 과장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서 구약시대에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절망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고민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허물로 느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경계선이니까, 바로 그마저도 누구의 일인고 하니,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경계선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겁니다.
* 데스페라도(Desperado) !!
여기에서 노래를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1974년도에 이글스가 부른 '데스페라도(Desperado)' 라는 노래라는 겁니다. 굳이 번역을 하면 '대책 없는 인간아', 또는 '방랑자여'. '무법자여'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방랑자여, 이제 정신을 좀 차리는 것이 어때? 그렇게 오랫동안 경계를 넘어들며 떠돌았잖아" 라고 하는데, 가사가 제법 대단하다는 겁니다. 이 가사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방랑하고 있는 인간에게 친구가 조언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네가 그동안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떠돌아다녔느냐? 그런데 네가 어떤 여자를 골라도 다이아몬드 퀸을 선택하지마. 돈 많은 여자는 하지마. 그는 기회가 있으면 너를 뒤에서 칼로 찌를 거야. 너를 이용할 거야. 차라리 평범한 여자(하트 퀸)를 원해. 그게 너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가사가 나오는데, "네게 좋은 것이 네 앞에 있다고 볼 때, 그 좋은 것은 절대로 오직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상당히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데, 자기에게만 좋은 게 아니고 다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자꾸만 소망하고 있어. 그게 너의 문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보면 "방랑자여, 이제 너는 젊지 않아. 방랑을 너무나 오래 했어. 너는 젊은 게 아니야. 고통과 허기가 너를 집으로 인도할 거야. 이제 너의 집으로 올 때가 되었잖아. 자유, 그것은 여유가 있는 자들이 하는 소리야. 자유는 없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 가사도 중요한데, "이 세상을 홀로 떠도는 것, 그게 너의 감옥이었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에 나가서 느낀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결론은 "그 어디를 가도 나를 내가 생각한 만큼 나답게 인정해주는 곳은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전부 다 자기를 공격한다는 것인데, 즉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이 세상이고, 또한 그것은 감옥 풍경을 그대로 축소한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을 축소한 것이 감옥이고, 그것을 넓힌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 가사를 보면, "너는 지금 인생이 날인지 밥인지 구분도 안 되지? 이제는 네가 너무 늙어 가지고, 이제 감정의 기복도 없지? 그렇지?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슬픈지,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지도 않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전에는 맛있게 먹었는데, 이제는 맛있지도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가사에 보면, "방랑자여, 이제 정신을 좀 차리는 것이 어때? 네가 쌓아올린 벽을 허물고 문을 열어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가사의 문제점이 드러나는데, 이 가사가 참 좋가는 좋은데, 드디어 복음이 아닌 이유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네가 힘들게 살았지만, 너에게 무지개는 있을 거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지개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지개는 심판의 정조이기 때문에, 무지개는 없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보면 "누군가 너를 사랑하도록 마음에 열어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열어봤자 어떻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있지만,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보면, 자기가 혼자 스토킹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자기를 스토킹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전부 다 자기를 이용할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 목사님, 허무와 복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끝으로 전도서 1장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 1장을 보면서 어떤 분이 질문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 질문의 내용이 "목사님, 허무와 복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인데, 서울강의시간에 이 질문이 나왔다는 말이죠.
성경에 전도서 1장에 허무가 나오는데, 허무, 혹은 기쁨인데, 그것을 어떻게 건너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허무에서 복음을 얻을 것인데, 이 허무에 대해서는 방금 제가 노래 두 개를 통해서 했다는 말이죠.
아메리칸 마도로스의 경우에, 그가 술에 취해서 정박지에 갔다가, 아메리칸 마도도스니까 미국사람인데, 그러면 그를 좋아하던 아가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떠나가 버렸는데, 그러니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그것을 방랑자로 해보면, 방랑자가 주장한 것이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인생을 살아보니까 그 남는 것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허무라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압축해서 이미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전도서 1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7절입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이 전도서에서 합니까? 헛되고 헛되며 해 아래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하는데, 그 다음에 바람 이야기가 나오고, 강물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람과 강물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갇힌 동네를 돌아다닌다는 말이죠. 즉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죠.
* 탈출구가 없는 세상 !!
이 세상에서는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도서의 입장에서는, 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간다고 해서, 그 바다가 최종 목적지가 될 수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는 방식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갇혀있는 상태로 뺑뺑이 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게 이 세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도 소용이 없고, 심지어 의로운 사람도 악한 사람도 그 인생의 결과는 모두가 똑같다는 말이죠. 그냥 종치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기대와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전도서 기자는 "내가 깨달았다" 라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의 지혜라는 말이죠. 여기서 사람들은 이 전도서를 보면서, "성경마저도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으로 마감이 되느냐?"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걱정과 염려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전도서 1장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이 다윗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아들의 아들, 그렇게 계속 이어져서, 그 아들 노선에서 누가 오느냐 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죠.
* 정리하면 !!
여기서 오늘강의를 점검해보면, 에덴동산 쫓겨난 우리 전체를 누군가가 대체를 해버리면, 그 대체한 분이 아주 가는 바늘이 되어서, 우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을 통과해서, 그렇게 해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바늘이 가는 곳에 실이 가듯이,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떠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가 허무를 통과해서 빠져나가게 되면, 우리는 허무에서 천국까지 이어지는 그 줄, 즉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 성령이 와버리면, 우리는 허무를 느끼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고, 우리 육신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확인하는 가운데서 이미 구원받은 주의 일에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 동행의 가치에 대해서 더욱 더 감사하고 고마워하게 된다는 말이죠.
* 예수의 증인 !!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자기의 증인이 되지 말고 누구의 증인이 되라고 합니까? 예수의 증인이 되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 그것이 주의 뜻이라는 말이죠.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우리가 자기 일을 한다고, 자기 자랑을 한다고 나이가 많아질 때까지도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수고마저도 자기가 어떻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킨 것임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10,24 오후 2시에 마침.
Everyone, is your living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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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페라도(Desperado)]
이글스(1974)
Desperado,
데스페라도,
Why don't you come to your senses?
정신 차리는 게 어때?
You've been out ridin' fences
울타리를 따라 달린지
For so long now
너무 오래됐어
Oh, you're a hard one
오, 넌 참 완강하지
I know that you got your reasons
너만의 사정이 있는 건 알아
These things that are pleasin' you
널 즐겁게 하는 이것들은
Can hurt you somehow
어떻게든 널 다치게 할 수 있어
Don't you draw the queen of diamonds, boy
다이아 퀸은 고르지 않는 게 좋을걸
She'll beat you if she's able
할 수 있다면 널 박살 낼 테니
You know the queen of hearts
하트 퀸이 언제든
Is always your best bet
제일 좋은 패라는 걸 알잖아
Now it seems to me
지금 보아하니
Some fine things
이것저것 좋은 것들이
Have been laid upon your table
네 판 위에 깔리고 있는데
But you only want the ones
넌 가질 수 없는 것들만
That you can't get
원하고 있구나
Desperado,
데스페라도,
Oh, you ain't gettin' no younger
오, 사람은 젊어지지 않아
Your pain and your hunger
네 고통과 배고픔
They're drivin' you home
그게 널 집으로 가게 하고 있지
And freedom, oh freedom
그리고 자유, 오 자유는
Well, that's just some people talkin'
글쎄, 그건 그냥 어떤 놈들이 하는 말이지
Your prison is walking through
이 세상을 홀로 헤쳐가는 게
This world all alone
너에겐 감옥이야
Don't your feet get cold in the winter time?
겨울이라 발이 얼어가고 있지 않니?
The sky won't snow and the sun won't shine
눈도 내리지 않고, 해도 빛나지 않지
It's hard to tell the night time from the day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하기가 어려워
You're losin' all your highs and lows
넌 모든 걸 잃고 있어
Ain't it funny how the feeling goes away?
감정이 사라지는 게 우습지 않니?
Desperado,
데스페라도,
Why don't you come to your senses?
정신 차리는 게 어때?
Come down from your fences, open the gate
네 울타리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
It may be raining
비가 올 수 있지만
But there's a rainbow above you
네 위엔 무지개가 뜰 거야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누군가 널 사랑하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Let somebody love you)
누군가가 널 사랑하게 해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누군가가 널 사랑하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
Before it's too late
너무 늦기 전에